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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와 心의 문제로 본 李退溪思想의 특징과 사상사적 의의
이퇴계,리,마음심,퇴계심학,양명심학 영남퇴계학연구원 2010 퇴계학논집 Vol.6 No.-
본고에서는 이 理와 心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이퇴계가 중국과 조 선의 선배학자나 동료들을 상대로 그것의 이해를 둘러싸고 씨름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가는 모습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퇴계 사상의 특징 과 그것의 사상사적 의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하였다. 논의의 진행 은 먼저 이퇴계가 明代의 羅整菴과 조선의 徐花潭을 비판하는 모습을 살피고, 그것의 이유로서 四端七情論을 고찰하였다. 다음으로 본격적으 로 리와 심의 관계를 본래성과 현실성의 문제를 통하여 논하였고, 마지 막으로 퇴계심학의 사상사적 의의를 양명심학과의 관계에서 고찰하였다. 결론적으로 이퇴계가 리와 기를 준별하여 나정암과 서화담을 비난하 고, 또 사단칠정논쟁에서 기고봉을 詰難한 이유는 기 혹은 그것이 작용 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렇지만 한편에서 이퇴계 는 추구하여야할 이상으로서의 리가 기․현실과 유리되어 있다고도 생 각하지 않았는데, 이퇴계는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사람의 마 음을 매개로 하여 그것과 같은 내용이 되는 리와 성에 능동성을 불어넣 는 방법으로 돌파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朱子의 리와 심의 관 계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양명심학은 주자 의 심과 리의 ‘둘’의 측면에 기초하여 주자를 부정적 매개로서, 이퇴계는 ‘하나’의 측면에 기초하여 주자를 긍정적 매개로 하여 각각 자신의 사상 을 재구축해 간 것이었음을 지적하였다.
柳崇祖의 『대학』 이해와 理學 사상-『大學十箴』을 중심으로-
심예인 조선시대사학회 2020 朝鮮時代史學報 Vol.- No.92
1511년(중종 6) 성균관 대사성 柳崇祖는 『大學十箴』과 『性理淵源撮要』를 왕에게 진상하였다. 그 가운데 『대학십잠』은 『대학』의 3강령 8조목을 10개의 箴으로 정리한 저술이다. 이 책의 편찬 배경은 두 가지이다. 첫째, 종래까지 제왕학의 텍스트로 중시되던 眞德秀의 『大學衍義』의 한계를 보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사례 중심의 『대학연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대학』의 요체를 깨닫고 실천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둘째, 연산군대의 두 차례 사화를 겪은 유숭조는 중종반정으로 새로운 유교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군주의 聖學이 절실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제왕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공부 방법을 箴의 형태로 풀어냈다. 『대학십잠』의 구성은 格物致知로 시작하여 絜矩로 끝난다. 격물치지는 聖學의 출발이자 治道의 근본이다. 치도는 마음에서 비롯되므로, 마음을 닦아 혈구의 도로 백성을 헤아릴 것을 주문하였다. 이를 위해 敬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이 사실은 16세기 이후 『대학』의 핵심어가 敬으로 모아지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0개의 잠 가운데 특히 『明明德箴』에는 유숭조의 성리설을 비롯한 理學 사상이 담겨 있다. 그가 명덕을 주목한 이유는 修己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즉 명덕을 “삼강령의 으뜸”이라고 하는 동시에 ‘수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지난날 임금이 마음을 닦지 않아 생긴 폭정을 목도한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로 군주의 正心과 修身을 주목하였다. 나아가 ‘反正’이라는 유교적 명분에 맞게 군주에게 天德과 王道의 실천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명덕을 강조하여 정심과 수신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천덕과 왕도의 실현을 기대한 것이다. 이는 유숭조가 『대학』의 내용을 근거로 실천을 꾀하는 이른바 理學의 心學化를 도모했음을 시사한다. 원래 ‘心學’은 국초에 원론적 차원의 수양론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하지만, 연산군을 거쳐 중종대를 기점으로는 실천적 차원의 수양론을 강조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 무렵 심학을 하는 방법으로는 김굉필 이후 『소학』 중심의 실천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유숭조는 군주에게는 『대학』중심의 실천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군주의 심학을 도모하기 위해 『대학십잠』을 편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십잠』은 조선 사회에서 군주의 修身學을 위한 첫 교재이자, 16세기 초 이학의 심학화 과정을 보여준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십잡』 내에는 유숭조 이학 사상의 핵심인 理氣四七說이 들어 있다. 특히 理와 氣를 四端과 七情에 결합한 유숭조의 언설은 李滉의 理氣互發說을 연상시킨다. 유숭조가 이황 이전에 이기사칠설을 제시한 사실은 16세기 초 조선 이학 사상의 단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결국 『대학십잠』은 곧 16세기 중반 이황의 『聖學十圖』 이전에 존재한 성학서로서의 前史的 성격을 띤다. 나아가 유숭조의 이기사칠설은 중종대 초반 서울 중심 官學의 이학 수준과 분위기를 잘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In 1511, Yu Sung-jo(柳崇祖), a rector of the National Confucian Academy of the Joseon Dynasty, presented the king Jungjong with Daehaksibjam(『大學十箴』) and Seongliyeonwonchwalyo(『性理淵源撮要』). Daehaksibjam is a book that summarizes the three cords(samganglyeong 三綱領) and the eight steps(paljomok 八條目) of Great Learning(『大學』) into ten admonitory precept. There were two reasons why he wrote this book. First, it had the meaning of overcoming the limitations of Jin Deok-su(眞德秀)’s An Explication of the Great Learning(『大學衍義』), which had been regarded as the text of disciplines of kingship. Second, Yu Sung-jo, who experienced the tyranny during the reign of the King Yeon-san, thought that ‘learning of the sages(seonghak 聖學)’ was desperate to make a new Confucian society through Jungjong-banjeong(中宗反正). To this end, he unveiled a specific way of studying in the form of proverbs that would enable the monarch to become a sage man(seongin 聖人) by himself. Yu Sung-jo began Daehaksibjam with ‘comprehending things and extending knowledge(gyeokmulchiji 格物致知)’ and closed it with ‘principle of applying a measuring square(hyeolgu 絜矩)’. gyeokmulchiji is the beginning of seonghak and the foundation of ‘the way of the governing(chido 治道)’. Since chido comes from the King’s heart, he requested to cultivate virtue and to rule the people with hyeolgu. To this end, he emphasized the attitude of ‘respect(gyeong 敬)’. This fact shows that he had some influence on the definition of gyeong as the key word of Great Learning since the 16th century. “Myeongmyeongdeokjam(明明德箴)”, one of the ten proverbs, contains the thoughts of Yu Sung-jo’s ‘study of principle(lihak 理學)’. The reason why he noticed ‘brilliant virtue(myeongdeok 明德)’ was to emphasize ‘self-cultivation(sugi 修己)’. In other words, he considered myeongdeok was the best of samganglyeong and the starting point of self-cultivation. Because he witnessed the tyranny of the King Yeon-san, he chose ‘making the mind correct(jeongsim 正心)’ and sugi as his first priority in governing the country. Furthermore, he demanded the monarch to practice ‘the moral nature of heaven(cheondeok 天德)’ and ‘the way of the ruler(wangdo 王道)’. Thus emphasizing ‘brilliant virtue’, he ultimately expected the achievement of cheondeok and wangdo. This suggests that he promoted ‘the process of learning of the mind(simhakhwa 心學化)’ of lihak that seeks practice based on Great Learning. The term ‘learning of the mind(simhak 心學)’ was originally used as a theoretical theory of discipline. However, simhak had been changed to a practical theory of discipline in the reign of the King Jungjong. At that period, the main trends of the study of simhak were the practical trend centered on Primary Learning(『小學』). However, he found that the practice of Primary Learning was not suitable for the monarch and judged that the practice of Great Learning was urgent. Thus, he compiled the Daehaksibjam as a guide to seonghak. In that sense, Daehaksibjam is the first textbook for the study of self-cultivation of the monarch in the Joseon society. It is also a book that shows simhakhwa of lihak in the early 16th century. In the Daehaksibjam, ‘Likisachilseol(理氣四七說)’ is the core of his thoughts. In particular, this word combining ‘principle(li 理)’ and ‘energy(gi 氣)’ with ‘four beginnings(sadan 四端)’ and ‘seven emotions(chiljeong 七情)’ is reminiscent of ‘Likihobalseol(理氣互發說)’ of Lee hwang(李滉). The fact that he presented likisachilseol before Lee hwang helps us understand the beginning of Joseon’s lihak thought in the early 16th century. After all, Daehaksibjam is characterized as a textbook that existed before Lee hwang’s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聖學十圖』) in the mid-16th cen...
심재천,홍기도,하성식,김태호,성민철 대한수부외과학회 2015 대한수부외과학회지 Vol.20 No.2
Avulsion injury of the flexor digitorum profundus (FDP) tendon from the distal phalanx is considered as a rare injury. We report a patient who sustained a FDP tendon rupture insertion on her fifth finger as a result of a closed, hyperextension with no accompanying laceration or predisposing pathologic condition. Preoperative ultrasonography showed complete rupture of FDP and the gap between the tendon ends. According to the classification by Leddy and Pacter, this case is type II. The reconstruction of flexor tendon using pull-out suture and tie-over button. We are reporting a case with brief review of literatures. 원위지에서의 심수지 굴곡건 견열 손상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들은 열상 및 기저병변이 동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폐쇄성 과신전으로 인해 제5수지 심수지 골곡건이 파열된 환자를 보고하고자 한다. 수술 전 초음파 검사에서 심수지굴곡건의 완전 파열 및 건 말단 사이의 간격이 확인되었다. Leddy와 Packer의 분류의 의하면, 이 증례는 제2형에 속한다. 굴곡건의 재건은 pull-out 봉합 및 tie-over 버튼을 사용하여 시행되었다. 이에 저자들은 문헌 고찰과 함께 증례를보고하고자 한다.
기관지 천식 환자에서 천식 증상의 정도에 따른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의 유전자 다형성
심재정,김제형,이승룡,권영환,이소라,이상엽,강세용,강용구,조재연,인광호,원남희,유세화,강경호,Shim, Jae-Jeong,Kim, Jei-Hyung,Lee, Seung-Yong,Kwan, Young-Hwan,Lee, So-Ra,Lee, Sang-Youb,Kang, Se-Yong,Kang, Yong-Koo,Cho, Jae-Youn,In, Kwang-Ho,Wo 대한결핵및호흡기학회 1998 Tuberculosis and Respiratory Diseases Vol.45 No.1
서 론: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유전자에는 여러 종류의 다형성(polymorphism)가 존재하며, 천식 환자에서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의 대표적인 변이는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의 아미노산이 대치된 부분으로 Arg16-Gly, Gln27-Glu, Val34-Met 및 Thr164-Ile 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속적인 $\beta_2$ 교감신경 유도체의 자극에 대하여 세포표면으로 부터 세포내의 전달과정이 둔화되어 점차 세포전달이 없어질 수도 있는 desensitization 또는 수용체와 수가 감소하는 downregulation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식환자에서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의 desensitization 또는 downregulation 뿐만 아니라 천식 표현형과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유전자 다형성의 상관 관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논란이 많다. 이에 본 연구는 기관지 천식환자에서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의 가장 흔한 16, 27, 34 및 164 의 아미노산에 해당하는 유전자의 다형성을 MASA (Mutated Allele Specific Amplification)법으로 시행하여 각각의 다형성의 발생 빈도와 천식의 심한 정도와 연관이 있는 가를 확인하였다. 대상 및 방법: 대상 환자는 천식 환자 103명이었으며, 이중 남자는 54명, 여자는 49명으로 평균 연령은 46.6세 (19~80세)였고 이환 기간은 4.7년이었다. 대상 환자는 경미하고 간헐적 증상을 보인 30명, 지속적인 경미한 천식 환자는 32명으로 경미한 천식은 모두 62명이었으며, 중등증의 천식 증상은 17명 및 중종의 천식증상을 보인 환자는 24명이었다. 이중 1년 중에 6개월 이상 전신적 스테로이드를 투여하는 환자는 39명이었으며, 투약 중에도 야간 발작이나 야간 기침이 발생되었던 환자는 44명이었다. 대상 환자로부터 10cc의 전혈구를 체취 하여 분리된 림파구에서 분리된 DNA를 이용하여 MASA 방법으로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16번, 27번, 34번 및 164번째 아미노산의 다형성을 검색하였고, 천식의 심한 정도 따른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유전자의 다형성의 분포와 야간 천식의 발작이나 증상의 유무에 따른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유전자의 다형성의 분포를 확인하였다. 결 과: 16 번째 Arginine이 Glycine으로 변이는 heterozygous 변이가 67명, homozygous 변이가 13명으로 heterozygous 변이가 65.1%로 가장 많았다. 27번째 Glutamine이 Glutamate로 변이는 heterozygous만 11명으로 10.7%였으며, 34번째 Valine이 Methionine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100번째 핵산의 경우도 heterozygous만 6명으로 5.8%였다. 27 번째와 34번째 아미노산의 변이를 일으키는 homozygous 변이와 164번째 아미노산의 변이는 대상 환자 중에는 없었다. 천식 증상의 심한 정도를 경종 및 중등증, 중중으로 2 구분하여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다형성의 발생빈도를 관찰한 결과 중증의 천식환자에서 16번째 아미노산의 변이의 빈도는 많았으나 (p=0.015), 27번, 34번 및 164번째의 아미노산의 변이는 천식 증상의 정도와는 연관성이 없었다. 야간 천식 증상의 유무에 따른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다형성은 16, 27, 34 및 164번째 아미노산의 핵산의 변이와 연관성이 없었다. 결 론: 이상의 결과로 기관지 천식 환자에서 $\beta_2$ 교감신경 수용체 다형성은 Arg 16, Gln 27 및 Val 34의 변이가 존재하고, Arg 16이 가장 많았으며, Thr 164는 없었다. 기관지 천식 환자에서 증상이 심한 중증 천식은 $\beta_2$ 교감 신경 수용체의 다형성중 Arg 16의 변이는 중증 천 Background: Genetic and environmental factors are known to affect the incidence and severity of asthma. Stimulation of $\beta_2$-Adrenergic Receptor ($\beta_2$AR) results in smooth muscle relaxation, leading to decrease in resistance of airflow. The gene encoding the $\beta_2$AR has recently been seguenced. The $\beta_2$AR genotype at the polymorphic loci of codons 16, 27, 34, and 164 was known to cause changes in the amino acids.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structure of the $\beta_2$AR and its functions are being elucidated. Purpose : The gene encoding the $\beta_2$AR was carried out to assess the frequency of polymorphisms in bronchial asthma, to determine wheather these polymorphisms have any relation to the severity, or nocturnal symptoms in bronchial asthma. Methods: The subjects studied were 103 patients with bronchial asthma, which consisted of 30 mild episodic, 32 mild persistent, 17 moderate, and 24 severe asthma patients. The polymorphisms of the $\beta_2$AR gene were detected by mutated allele specific amplification (MASA) method at the codons 16,27,34, and 164. Results: The most frequent polymorphism was arginine 16 to glycine. The other two polymorphisms, valine 34 to methionine and glutamine 27 to glutamic acid occured in 11 and 6 patients respectively. The polymorphism of threonine 164 to isoleucine was not found in our enrolled patients. The homozygous polymorphism of $\beta_2$AR gene was found in only arginine 16 to glycine (12.6%). The heterozygous polymorphisms of $\beta_2$AR gene were in arginine 16 to glycine, valine 34 to methionine, and glutamine 27 to glutamic acid, as 65.1 %,10.7%, and 5.8% respectively in asthma patients. The presence of agrginine 16 to glycine heterozygous or/and homozygous polymorphism was associated in severe asthma (p=0.015), but there was no association between the other three polymorphisms and the severity of asthma. The frequency of the $\beta_2$AR gene polymorphisms was no relation in nocturnal asthma as compared with non-nocturnal asthma. Conclusion: The arginine 16 to glycine polymorphism of the $\beta_2$AR gene is the most frequently found in asthma patients and association with severe asthma. But there was no association between the polymorphism of the $\beta_2$AR gene and nocturnal asthma.
심경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9 美術史學 Vol.- No.38
This paper analyzed the portraits of scholar officials wearing Simeui (深衣), which were widely created in the late Joseon period from the perspective of Confucian rites and the Succession of the Way, among the Noron scholars. Simeui is the historical Chinese attire for men which is recorded in Book of Rites(禮記) and advocated in Zhu Xi's Common Rites(朱子家禮) as the symbol of Confucian scholars. Simeui Prtraits(深衣肖像) refer to the portraits of the scholar officials wearing Simeui and other accessories. The Noron scholars of Joseon intended to represent the significance of the succession of learning and the Way since Song Siyeol(宋時烈) through Simeui, represented by ‘Jikryeong Simeui’(直領深衣) and Simeui Portraits. The portraits of the Confucian scholars wearing Simeui were also painted at the end of Goryeo but the significance of the “Simeui Prtraits” was established by Song Siyeol in the late 17th century. Through the portraits, Song Siyeol wanted to symbolize the scholastic mantle of Neo-Confucianism succeeded from Confucius to Zhu Xi and to show “Common Rites” walking into everyday lives. Since then, he has been considered as the patriarch of the “scholars of the mountains and forests (山林)” and the symbolic figure of Noron. Also, his portraits wearing Simeui continued to be created based on those done during his lifetime. In the early 18th century when Noron was faced with repetitive political conflicts, Song Siyeol’s successors tried to attach a deeper significance to ‘Song Siyeol and Simeui’. His pupils, including Gwon Sang-ha, had themselves in Simeui portrayed to pass down the meaning of the scholastic mantle. During this period, the relationship between Noron and famous portrait painters such as Jin Jahae and his son Jin Eunghoe, showed that the influence of ‘Confucian justice’, which was behind the thoughts and politics of the scholar officials of Joseon, even expanded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cholars and painters.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portraits of Song Siyeol were widely imitated and succeeded. Within the circle of the Noron scholars, ideological division and the succession of Confucian justice theory since Song Siyeol continued to be reflected in portraits. The scholar officials of Horon and Nakron also tried to put meaning of their fractions and families to the portraits. The objective of this paper is to find social significance of Simeui Portraits created by Noron scholars in the late Joseon Period. It is expected that this paper will contribute to the deeper understanding of the rich culture of portraits in Joseon. 이 논문은 조선 후기에 널리 제작된 심의초상을 노론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의례론과 도통계승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심의(深衣)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옷으로 禮 記와 家禮를 통해 유학자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심의초상(深衣肖像)은 이 심의와 부속 의복을 입은 사대부를 그린 초상이다. 조선의 노론 사대부들은 ‘직령심의’로대표되는 형식의 심의와 이를 그린 심의초상을 통해 송시열 이래의 학문과 도통계승의의의를 밝히고자 하였다. 심의를 입은 유학자의 초상은 고려 말에도 그려졌지만 본격적인 ‘심의초상’의 의의는 17세기 후반에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정립되었다. 송시열은 심의초상을 통해 공자에서 주희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상징하고, 「가례」의 일상화란 의의를 내보이고자 하였다. 이후, 당대 山林의 종정으로 송시열은 노론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생전에 남긴 초상과 영초를 바탕으로 송시열 초상과 심의도상이 후대에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노론의 정치적 갈등이 반복된 18세기 전반에는 송시열의 직계 문인들에 의해 ‘송시열과 심의’에 대한 의의가 심화되었다. 이후 권상하를 비롯한 송시열의 문인들도 심의를 입고 초상을 제작하여 학통의 의의를 이어가고자 하였다. 특히 이 시기 노론과 진재해와 진응회 부자간의 관계는 사대부들의 사상과 정치를 당위적으로 뒷받침하였던명분론이 사대부화원의 관계로까지 확장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18세기 후반에는 송시열 초상의 이모와 전승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노론 내에서도 송시열 이후 사상적 분화와 명분론의 계승 등의 의미가 초상에 계속 투영되었다. 호론과 낙론의 사대부들은자당과 가문의 의의를 초상에 담고자 했다. 본 논문은 조선 후기 노론계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제작된 심의초상에 담긴 사회적의의를 찾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선의 다채로운 초상 문화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수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심예인 조선시대사학회 2018 朝鮮時代史學報 Vol.- No.85
조선은 理學을 지배이념으로 하여 성립된 나라이다. 이학은 道學으로도 불렸다. 이학이 만물을 理로 설명하는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라면, 도학은 道統의식과 함께 타 사상에 대한 闢異端의 논리를 내재한 개념이다. 그동안 조선의 도학은 주로 김굉필과 조광조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의리실천학을 지칭하는 용어로만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도학은 이미 고려 말 이학이 도입되면서부터 그 용례가 발견될 뿐 아니라 시기별로 그 성격을 조금씩 달리하였다. 14세기 말 도학은 당시 원나라에서 도입된 程朱學 내지 이학 자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때 도학은 道問學의 학문 방법과 경세실천에 집중되었고, 특히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는 벽이단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15세기 도학 역시 도문학의 학문방법과 경세실천에 집중되었다. 여기에 사대부뿐만 아니라 군주를 위한 학문과 사상으로서 治道學 내지 經世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세조나 연산군과 같은 覇道的 군주와 부패한 정치세력이 부상하자, 15세기 말부터 절의실천적 도학이 주장되는가 하면 治心․養性․居敬과 같은 수신의 학문 태도, 즉 尊德性의 학문방법이 크게 권장되었다. 도학이 이제 마음을 닦는 心學으로 확대된 것이다. 도학의 핵심은 무엇보다 도통을 잇는 데 있다. 여말선초 이학자 가운데 가장 먼저 도통을 정리한 인물은 李穡이다. 이색은 원나라 許衡을 도통의 반열에 올려 원대 이학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여말선초의 도통론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중국의 선유들에 대한 文廟從祀 논의, 조선 유자들에 대한 문묘종사 논의,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유자들의 도통 논의가 그것이다. 도통논의에서 두드러진 점은 당대 사회의 가치에 따라 도통론이 좌우되어 문묘 종사의 대상들이 끊임없이 入享과 黜享을 거듭했다는 사실이다. 여말선초의 도통론은 君主道統論과 儒者道統論으로 특징지어진다. 군주도통론은 周나라 武王 이후 끊어졌던 王統을 이학의 나라인 조선의 국왕에 의해 다시 잇고자 한 도통론이다. 이는 박의중과 정도전에게서 그 단초가 나타난다. 유자도통론은 공자 이후 사대부의 영역으로 내려온 도학의 전수가 조선의 유자들에 의해 이어지는 도통론이다. 유자도통론은 문묘종사를 통해 공인되는 형태와 유자들 사이에 존재한 도통의식 또는 도통론의 형태로 구분된다. 15세기까지는 이제현에서 이색을 거쳐 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불교에 기울거나 절의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이들은 모두 문묘 종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실제로 여말선초에는 학문의 전수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도통론이 존재하였다. 첫째, 원대의 허형에서 고려의 이색으로 이어지는 도통론이다. 둘째,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론이다. 셋째, 이색-정도전-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론이다. 넷째, 권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도통론이다. 그밖에도 박영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붕-박영으로 이어지는 도통론을 제시하였고, 박세채의 기록을 통해 이황이 4현을 언급하기 전까지 김안국을 도통의 반열에 올리려는 움직임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여말선초 도통론은 16세기 중반 이후 士林勢力에 의해 정해진 도통과는 별개로 다양한 도통의 계보가 존재했다. Chosŏn was a nation established by taking the “learning of principle”(K. Ihak 理學 C. lixue) as its ruling ideology. The learning of principle was also called the “learning of the Way”(K. Tohak 道學 C. daoxue). While the learning of principle is a value neutral concept used to explain all things by the principle, the learning of the Way is a concept that contains the logic of regarding other theories as heterodox teachings along with the strong sense of the lineage of the Way. The learning of the Way of Chosŏn has been mostly used as a term merely referring to meanings and principles focusing on practicality(義理實踐) of the Confucian scholars, including Kim Goeng-pil and Cho Kwang-jo. As the learning of the Way was introduced during the late Koryŏ period, however, the diverse usages of the term were found and moreover, its characteristics changed over a period of time. In the late 14th century the learning of the Way was used as a term indicating Cheng-Zhu learning from the Yuan dynasty or the learning of the principle itself. The learning of the Way focused on the way of study maintaining constant inquiry and study(道問學) and regulating the world(經世實踐). Especially the characteristics stood out as the logic of regarding Buddhism and Taoism as heterodox teachings. In the 15th century, the usage of the learning of the Way also based on classical studies and focused on the way of study maintaining constant inquiry and study(道問學) and regulating the world(經世實踐). The learning of the Way based on classical studies played a role as statecraft learning or ideology for rulers as well as literati. However, as hegemonic rulers like King Sejo or Prince Yŏnsan and corrupt political forces such as old meritorious elites emerged, it came to be difficult to rectify the society only with the learning of the Way valuing the classical studies based on the explication of the classics. Hence, from the late 15th century, the learning of the Way related to cultivate oneself(節義實踐) was advocated while the learning attitudes of honoring virtuous nature(尊德性), such as controlling the mind, nourishing inner nature, and abiding in reverence, were greatly encouraged. The learning of the Way was extended to the learning of the heart-mind (K. simhak 心學 C. xinxue), which was concerned with the cultivation of mind. Above all, the key point of the learning of the Way is carrying on the orthodox lineage of the Way. Among the scholars pursuing the learning of the principle in the late Koryŏ and early Chosŏn it was Yi Saek who was aware of the orthodox lineage of the Way. Yi Saek claimed the authenticity of the learning of principle from Yuan dynasty by putting Xu Heng on the rank of the orthodox lineage of the Way. The arguments on the orthodox lineage of the Way in the late Koryŏ and Early Chosŏn are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the argument on the shrine service to Chinese Confucian scholars, on the shrine service to Korean Confucian scholars, and on the Confucian scholars who were not served in the shrines. It is remarkable to note that opinions on the orthodox lineage of the Way were swayed by the social value of the time resulted in the incessant replacement of spirit tablets in the shrines. Arguments on the lineage of the Way in the late Koryŏ and early Chosŏn are characterized by the argument on the orthodox lineage of rulers and that of Confucian scholars. The argument on the orthodox lineage of rulers was an attempt to reestablish the royal lineage by the kings of Chosŏn, which was a state of the learning of the Way. This royal lineage was considered to have ceased since Emperor Wu of the Zhou dynasty. This was exposed in the idea proposed by Chŏng To-jŏn and Park ŭi-Jung. The argument on the orthodox lineage of Confucian scholars was the assertion that, after Confucius, the Way passed down to the Chinese literati was again transmitted to the Confucian scholars of Chosŏ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