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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退溪 文學批評 硏究의 現況과 課題

        이정화 영남퇴계학연구원 2007 퇴계학논집 Vol.1 No.-

        This thesis is based upon a study about Toegye's literature criticism, especially in connection with the current state and the tasks ahead. In retrospect, Toegye's literature criticism, which took its root in the morality and knowledge, by bringing on the theoretical criticism and the value of work. Toegye's was a accomplished scholar as Korean Neo-Confucianism. According to him, Korean Neo-Confucianist's consciousness is not a far cry from lifetime. Learning a poem, he was determined the right way in his life. At this point in time the most important tasks confronting us are to conduct an examination of the current state of studying Toegye's literature criticism and to make an assessment of what still needs to be done in the future. In order to accomplish this, the paper proved in-depth presentations on the study of Toegye's literature criticism to field. 퇴계 문학비평 연구의 두 축은 대체로 載道論的 관점과 學問意思가 투영된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문학이 ‘詞華’와 같이 공교로움이나 科擧 及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 퇴계의 입장에 주목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이 어떠한 방식으로 心性의 바른 이치를 표현해야 하며, 심성을 바르게 도야하는데 공헌을 하는 문학의 본질은 무엇인지 고민한 것에 초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계의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학비평 연구의 성과는 儒家의 전통적인 문학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 君子라야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는 퇴계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 고전비평사에 道學者 문학의 품격을 높인 비평가로써 퇴계의 위상을 높인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 있다. 둘째, 퇴계가 도학자라는 인식만을 토대로 한 연구논저와, 철학 연구의 일환으로 퇴계 문학을 조망한 것들 가운데에는, 퇴계가 理善氣惡이라는 인식으로 理法만 주장하여 情感조차 찾아 볼 수 없을 뿐더러, 현실을 도외시하고 理想만을 쫓는 고루한 사람이라는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논의한 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퇴계 역시 다른 도학자들의 인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작품 자체의 個性을 살핀 논문들에서는 문학을 바라보는 퇴계의 진면목에 한결 근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논문들이 이룩한 연구성과에 의해 현재 퇴계 문학비평에의 연구는 載道論的 관점을 지닌 퇴계의 글에서도 法古와 新奇의 조화를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비평도 社會史와 연계되어 있음을 밝힐 수 있었으며, 杜甫처럼 民生의 어려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퇴계의 글을 추적하여 그가 지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정감의 문학을 이끌 수 있는 근간임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당시 江西詩派와 같은 騷壇의 흐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그만이 누릴 수 있는 시세계를 구축한 점은 理學으로 숭앙된 도학자로만 퇴계를 주목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요망하는 것이 된다. 그의 학문이 爛熟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제작한 시편 가운데서 정감이 무르녹은 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정감 깊은 도학자인 퇴계 문학에 진입하는 관건이 되리라 사료된다. 퇴계의 개성이 이룩한 문학의 본질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가능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즉 정감을 아끼지 않은 퇴계의 人間美와, 載道論에 바탕을 둔 그의 확고한 논리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고 퇴계 문학의 개성을 구현하는지에 대해 모색해야 할 것이다.

      • KCI등재

        退溪 書札의 意義와 現況

        문석윤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퇴계학논집 Vol.- No.25

        현재 전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찰(書札)은 3,118통에 달한다. 퇴계의 서찰은 퇴계의 철학과 삶의 정수를 보전하고 있는 것으로서 조선유학사에서 퇴계가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그 중요성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퇴계는 서찰을 통해 자신의 도학적(道學的) 삶과 철학을 표현하였고, 시현(時賢), 지구(知舊), 문인(門人), 가인(家人)에 걸치는 동시대인들과 소통하였으며, 그 소통 행위를 통해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 혹은 도학(道學)의 학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퇴계를 중심으로 한 16세기 조선성리학의 형성 과정을 밀도 있게 재구성할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다. 퇴계의 서찰은 또한 당대의 생생한 생활상을 담고 있다. 특히 그간의 문집 편찬에서 산절(刪節) 및 산거(刪去)된 부분들에는 그러한 생활사적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정본 퇴계전서(定本 退溪全書)』 편성 사업을 통해 그러한 부분들이 거의 모두 복원됨으로써 관련 연구를 위한 유용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urrently, the total number of the letters of Toegye(退溪) Yi Hwang(李滉) amounts to 3,118. They preserve the philosophy and the life of Toegye. Considering the status of Toegye in Korean Neo-Confucian History, their importance is indisputable. Toegye expressed his life and philosophy through them which are communicated with his contemporaries including government officials, friends, rival scholars, disciples, and family members. And through this act of communication, he was able to form a scholarly or academic community. Through the study of them, we can densely reconstruct the formation of the 16th-century Korean Neo-Confucianism focusing on Toegye and provide a more systematic and vivid approach to it. Toegye’s letters are also of value as a living and life-historical record of the time. In particular, the discarded or erased parts of them include many such life-historical records. Almost all of these parts have been restored through Jeongbon Toegye Jeonseo(定本 退溪全書, Completed Works of Toegye) project, which provides useful data for related research.

      • KCI등재

        조선 후기 陶山九曲의 설정과 경영의 한 국면

        姜正瑞 영남퇴계학연구원 2009 퇴계학논집 Vol.4 No.-

        조선 후기 영남의 士林은 퇴계가 지은 <武夷櫂歌> 차운시를 전 범으로 朱子가 은거했던 武夷九曲을 읊은 구곡시를 창작하였다. 이러한 詩作활동은 자신이 은거하는 공간에 九曲園林을 설정하고 경영하며 이 원림을 대상으로 구곡시를 짓는 데에 이르렀다. 퇴계 이황의 家學을 계승한 후손들이 퇴계가 은거했던 도산과 주자의 무이산을 비교하며 陶山九曲을 설정하여 경영하였는데 이러한 흐 름은 18세기 후반에 왕성하게 나타났다. 도산구곡을 대상으로 구 곡시를 지어서 퇴계 선생을 기리려는 의미가 있었지만 단순히 이 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도산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도산 을 성리학적 세계가 구현된 청정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깊은 뜻이 있었다. 後溪李&#38948;淳은 선조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가 지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 퇴계의 자취가 남아 있 는 도산에 도산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여 도산을 주자의 무이구곡 과 대등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陶山九曲詩> 서문에 서 무이구곡과 도산구곡의 유사점을 차례로 언급하며 무이구곡과 도산구곡은 그 지형에서 매우 닮은 점이 많으며 무이구곡과 도산 구곡에 살았던 주자와 퇴계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여러 가지 논거를 들어서 진술하였다. 그 중에서 무이구곡이 무이정사 를 중심으로 아홉 굽이를 설정한 것과 도산구곡이 도산서당을 중 심으로 아홉 굽이를 설정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자의 학문을 정 통으로 계승한 이는 퇴계이며 퇴계의 학문이 완성된 이 공간은 주 자의 학문이 완성된 공간처럼 신성한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 다. 이렇게 설정한 도산구곡은 제1곡이 雲巖, 제2곡이 鼻巖, 제3곡 이 月川, 제4곡이 汾川, 제5곡이 濯纓潭, 제6곡이 川砂, 제7곡이 丹 砂, 제8곡이 孤山, 제9곡이 淸凉이다. 도산구곡은 조선 후기 영남의 士林에게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이 전개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퇴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공간이며 퇴 계의 학문이 완성된 공간이다. 따라서 도산구곡은 영남 사림에게 무속적 불교적 세계가 제거되고 성리학적 세계가 구현된 청정하고 신성한 공간이었다.

      • KCI등재

        사람됨을 가르친 퇴계의 자녀교육

        퇴계,사람됨,수기修己,위기지학,자녀교육,가서家書 영남퇴계학연구원 2012 퇴계학논집 Vol.- No.11

        퇴계는 생애 3,154통의 편지를 남겼다. 수신인은 문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아들과 손자 등 혈족들에게도 1,300여 통의 편지를 썼다. 그 가운데 장남 이준(李寯, 1523∼1583)에게 516통을 보냈으며, 손자 이안 도(李安道, 1541∼1584)에게는 125통의 편지를 남겼다. 퇴계가 아들과 손자에게 보낸 편지는 일상적 가르침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차지한다. 즉, 이들 편지에서 퇴계는 학문적 거대 담론이나 이론적 가르침을 전수 하는 유학자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자상하고 때로는 엄격한 아버지와 할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퇴계의 가서에 나타난 사람됨의 교육내용은 뜻(목표)을 세워 학문에 임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사람으로서 도리 를 지켜나가는 등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뜻을 세운다 곧 입지(立志)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현(聖賢)이 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즉 퇴계는 ‘입지란 세속적인 차원을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이를 항상 염두에 두고 학문에 임할 것을 독려했다. 몸가짐의 교육에서는 ‘나의 수양[修己]’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을 구현한다는 목적 아래 스스로를 가다 듬는 수신(修身)과 주변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처신(處身)의 차원에서 실시되었는데, 이는 당시 유학자들의 보편적인 처세관이기도 했다. 또 퇴계는 향촌의 사족으로서 백성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기 위해 이른바 ‘공도(公道)’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래서 자녀교육에서도 법의 두려움 을 가르쳤는데, 궁극적으로는 선비로서 마땅히 지녀야할 의리(義理)정신 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일깨어 주었 다. 특히 퇴계는 도리란 인위적으로 연마하고 가다듬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적 속성 곧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춰야할 것으로 인식 하고 있었다. 퇴계가 실시한 자녀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솔선수범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들과 손자에게 가르친 네 가지 교육덕목을 자신의 삶 에서도 철저히 실천했던 것이다. 물론 퇴계의 이런 실천적 삶은 스스로 를 단속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녀교육의 효과를 극대화시켜주고 있다.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솔선수범은 극히 평범한 듯하면서도 또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것이기도

      • KCI등재후보

        退溪 李滉의 敎學精神과 詩世界

        李貞和 영남퇴계학연구원 2015 퇴계학논집 Vol.- No.17

        퇴계시에는 대학자의 경지에 입신하였음에도 늘 겸손한 선비의 마음 가짐을 잃지 않음으로써 敬 사상을 실천하며 살았던 학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자신의 집을 ‘陶山書堂’이라 명명한 까닭은 바로 舜帝와 陶淵明의 삶과 정신을 흠모하며 살고자 하는 뜻을 늘 잊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 음을 보여주고 있다. 固窮을 견뎌내어 마침내 인생을 달관함으로써 安貧 樂道를 실현한 도연명이야말로 그에게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퇴계시에는 선비의 기상과 절조가 내재된 시가 자주 발견되고 있으니, 이는 퇴계가 후학에게 제시한 敎學精神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 하면, 유자가 견지해야 할 곧고 바른 마음이 곧 퇴계의 삶과 정신에 응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후학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퇴계의 가르침은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참 선비는 자신의 덕행을 남들이 알아주는 것에 별반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죽는 날까지 仁을 이루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기 때문에 시류에 편 승하여 大義가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퇴계가 後學에게 끼친 영향은 講學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음은 물론 이었다. 강학 이외에도 出處를 위시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제자들이 직 접 봄으로써 항상 ‘深戒’로 작용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스승이 바로 퇴 계였다. 이러한 ‘深戒’의 뜻이 반영된 한시에는 삶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 을 촉구하는 스승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한편, 퇴계는 자신과 교유하며 서로 공감하였던 후학에게는 따뜻한 선배의 목소리로 읊은 시를 선사하 기도 한다. 이러한 시에서는 후학과의 교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心 契’의 시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대체로 참다운 선비들은 爲己之學을 통하여 聖學을 실천하였으니, 퇴 계의 교학정신 역시 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퇴계는 爲己之學에 전념 함으로써 부나 벼슬을 얻기 위한 학문이 아닌 자신의 심덕을 쌓는 수양 의 대상으로 학문을 인식하였다. 퇴계에게 있어 즐거움은 聖人의 학문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는 가운데 자생하는 것이 많았다. 퇴계는 후학인 율 곡을 만나보고는 ‘爲己之學’에 힘쓴 그의 내면에 道心이 있다는 것을 확 인하고 이를 시화하였다.

      • KCI등재

        사칠논변 분개설의 논거로서 『주자어류』의 “칠정횡관사단(七情橫貫四端)”에 관한 연구 -영남 퇴계학파의 논의를 중심으로-

        배병대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퇴계학논집 Vol.- No.25

        The debate o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in neo-Confucianism during the Chosun Dynasty had persisted for about more than 300 years after the Four-Seven Debates between Toegye and Ko-Bong. Da-San said that since the controversy of the Four-Seven Debates derived from two different versions of the Li-Qi theory, both should be recognized. This suggests that it is impossible to reveal the true nature, in Zhuzixue, on the relationship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as long as both arguments are presented based on the theories each of them has been respectively built upon. Thus, this paper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that has appeared in the Zhu Xi’s literature. In particular, the focus is on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 of [Zhuzi Yulei] that Toegye presented as the argument for the ‘Boon-Gae(分介)’ theory, rather than the later stated theory of “但七情不可分配四端, 七情自於四端橫貫過了” (hereafter referred to as the ‘Running across(橫貫)’ theory). This ‘Running across(橫貫)’ theory hasn’t been directly mentioned in the debate between Toegye and Ko-Bong, but Toegye’s disciples continued to present it as a basis for the ‘Boon-Gae(分介)’ theory. This paper examines the debates on the ‘Running across(橫貫)’ theory presented by Galam Lee Hyun-il, Daesan Lee Sang-jung, Ipjae Jung Jong-ro, Sami-heon Jang Bok-chu, and Amseo Cho Geung-Sub, who lived in the Yeongnam region and have followed Toegye’s line of scholarship. And, considering the appropriateness of ‘Running across(橫貫)’ theory as the rationale for Toegye's ‘Boon-Gae(分介)’ theory, by compiling the discussions of these people. In addition, the discussion between Geukjjae Shin Ik-hwang and Namdang Han Won-jin, who interpreted ‘Running across(橫貫)’ theory as ‘Honlun(渾淪)’s logic, is considered together.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not only to confirm that Zhu Xi’s ‘Running across(橫貫)’ theory plays an important role in succeeding and developing Toegye Studies, but also to reveal that the ‘Boon-Gae(分介)’ theory of Toegye are consistent with the Zhu Xi’s main theory. 조선 성리학에서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의는 퇴계와 고봉 간의 논변 이후 300여 년간 지속되었다. 다산은 사칠논변 시비의 근원이 서로 상이한 이기설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양자의 주장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각자 구축한 이론에 근거하여 논변을 전개하는 한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한 주자학의 본의를 밝히기가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주자의 문헌에 제시된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주목한다. 특히, 퇴계가 분개설의 근거로 제시한 『주자어류』의 “사단은 리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가 아닌, 그 이후에 진술된 “칠정은 사단에 나누어 배치될 수 없으며, 칠정은 사단에 대해 횡관하여 지나간다.[但七情不可分配四端, 七情自於四端橫貫過了.]”(이후 ‘횡관설’로 표기)에 집중한다. 이 ‘횡관설’은 퇴계와 고봉 간의 논변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퇴계 후학들에 의해 분개설의 근거로 꾸준하게 제시되고 논의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영남 퇴계학파인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입재 정종로, 사미헌 장복추, 암서 조긍섭을 중심으로 횡관설에 대한 논의를 살펴본다. 그리고 이 논의들을 종합하여 퇴계 분개설의 논거로서 ‘횡관설’의 합당성을 고찰한다. 또한, 논지의 설득력을 강화하기 위해 혼륜의 논리로써 ‘횡관설’을 해석한 극재 신익황과 남당 한원진의 논의도 함께 살펴본다. 본 논문의 목적은 퇴계학이 계승되고 발전하는 데 있어 주자의 횡관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퇴계의 분개설이 주자의 본설에 부합한 이론임을 밝히는 데 있다.

      • KCI등재

        便紙를 活用한 退溪의 隔代敎育

        장성애(Jang Sung-Ae),김병주(Kim Byoung-Joo) 영남퇴계학연구원 2018 퇴계학논집 Vol.- No.23

        1. 서론 2. 편지속의 조손교육 3. 퇴계 격대교육의원리와 방법 4. 결론 퇴계는 수기(修己)로서 경(敬)을 실천한 사상가이며 교육자로서 참된 자아실현을 추구한 사람이다. 퇴계는 제자교육과 더불어 자손들의 교육에 힘썼는데 그가 집안 식구들에 보낸 천편 가까이 되는 편지를 통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퇴계가 아들과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는 조손(祖孫)교육의 모범적인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치가(治家)는 치인(治人)에 앞서고 치가에서는 수기로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속에 자녀들을 교육하는 전통가정교육의 원리는 인성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전통시대에는 ‘나’라는 개인의 의미보다는 공동체적 자아관이 우선되던 시대이므로, 현대의 교육과는 상이(相異)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현대인들의 지나친 개인화와 개별화가 확산되는 속에서 오히려 공동체적 삶이 추구하였던 관계와 인간성 회복에 관한 부분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퇴계가(家)의 가학(家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수직적 공동체 삶과 현재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타인을 아우르는 수평적 공동체 삶을 가르치는 구심점이 되었다. 퇴계는 이 바탕위에 아들 준과 함께 손자교육에 힘써 단순한 보육과 양육의 기능을 넘어 가계(家系)내의 동반 수학자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격대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살린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가정교육이란 보통 아이가 유아기부터 학령기에 도달할 때까지 시행된 것을 가장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본 연구에서는 퇴계가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 중 손자 안도가 태어나서 관례를 치르는 15살까지의 단편적으로 실린 기록들을 추출해서 퇴계의 손자교육을 살펴보았다. 퇴계의 나이가 41세부터 55세까지이며 손자가 1세부터 15세까지가 된다. 퇴계의 격대교육은 조부-부모-자녀(손자)의 협력관계로 이루어진 교육이었고, 퇴계가 행한 시기적절한 손자교육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의 유아나 아동교육에 제시하는 시사점이 크다.

      • 퇴계학파의 율곡 성리설 비판과 전망 - 우담 정시한의 율곡 성리설 비판 -

        유성선 영남퇴계학연구원 2010 퇴계학논집 Vol.7 No.-

        This paper deals with Woodam Jeong, Shi-han's criticism of Yulgok in the continuation of Toegye school's critical position of Yulgok. As a major in Yulgok school, I examine academic ideas of Woodam Jeong, Shi-han who criticized Yulgok's view from the theory of JuLi in succession to Toegye's view. The paper has significance in discussing Woodam's criticism of Yulgok by being based in not only Toegye school but also Yulgok school. Especially, the paper diagnoses Woodam's criticism of Yulgok's Li․theory of Four-seven from microscopic and recapitulative point of view. That is, Toegye school's criticism of Yulgok was a macroscopic but Woodam's criticosm of Yulgok was a microscopic and recapitulative approach. Woodam was a Neo-Confucian who had been an admirer of Toegye during his whole life. First, I shall sublate the general point of division of Juli and Juki, and then discuss the meanings of Libal and Kibal which were philosophical characteristics of Toegye and Yulgok respectively and the position of Yulgok's criticism of Woodam. The paper proceeds in order as follows. It discuss the criticism and origin of Liki․theory of Four-seven. Woodam's criticism of Yulgok's Songrisol, Yulgok's Likijimo. Yulgok's theory of Four-seven, and the prospect of Woodam's criticism of Yulgok. Woodam succeeded to Toegye's academic tradition and throughly thought of Li as the presiding over Ki. Woodam's academic reflections aimed to succeed Toegye's academic and teaching tradition by interpreting clearly Liki․theory of Four-seven. The most salient feature in his attitude of criticizing Yulgk consisted in putting emphasis on intuition and experience and in supporting and developing Toegye's Songrisol as a Neo-Confucian scholar who regarded the nature as a friend till his latter years. 본 논고는 ‘퇴계학파의 율곡 비판’ 연장선상에서 퇴계학파의 적전자인 우담 정시한의 율곡 비판이 부제가 된 논문이다. 율곡학 전공인 논자는,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여 주리적 입장에서 율곡의 입장을 비판한 우담 정시한의 학문관과 사상을 논술하였다. 본 논고는 율곡 전공자인 필자가 퇴계학의 입장뿐만 아니라 율곡학의 입장에서 우담의 ‘율곡학 비판’을 논의의 근거로 한다는데 일단의 의의를 둔다. 특히 본 논고에서는 미시적이고 요약적인 입장에서 우담의 율곡 이기․사칠론 비판을 통해서 그 지향하는 바를 진단하였다. 즉 ‘퇴계학파의 율곡 비판’이 거시적인 접근이라면 우담의 율곡 비판은 미시적인 접근이자 요약정리의 논고라고 할 수 있다. 우담은 퇴계를 평생 동안 사숙했던 성리학자이다. 먼저 주리와 주기의 일반적 양분의 관점을 지양하고, 퇴계와 율곡의 철학적 특성인 리발과 기발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율곡의 우담 비판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논의하려고 한다. 논문의 차제는 이기․사칠론 비판과 그 연원/ 우담의 율곡 성리설 비판/ 우담의 율곡 이기지묘 비판/ 우담의 율곡 사칠론 비판/우담의 율곡 비판과 그 전망으로 서술하였다. 우담은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철저하게 리를 기의 주재자로 보았다. 또한 우담의 학문적 성찰은 이기․사칠론을 분명하게 해석하여 퇴계의 학통과 도통을 계승하는데 있었다. 우담의 율곡 비판 논의에 임하는 우담의 최대 특색은 만년까지 자연을 벗삼은 유학자로서의 직관과 체험을 매우 중시하면서 퇴계의 성리설을 지지․발전시켰다는 점에 있다.

      • KCI등재

        退溪 李滉의 성리철학 연구 현황과 과제

        金洛眞 영남퇴계학연구원 2008 퇴계학논집 Vol.3 No.-

        본고는 퇴계 성리철학에 대한 연구 현황을 점검하는 글이다. 이 전의 성과 분석 연구를 수용함으로써, 점검 범위는 1990년대 초반 부터 2008년 현재까지로 제한하였다. 통상적인 시기 구분법을 사 용하지 않는 대신 퇴계학 연구에서 발견되는 문제의식과 연구대상 을 고려하여 세 가지 연구 경향으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이기· 심성에 관한 연구, ‘퇴계심학’ 연구, 성학십도에 대한 연구가 그것 이다. 첫째가 퇴계학이 철학적으로 연구되던 시기부터 줄곧 관심 의 대상이었다면, 둘째는 첫째의 연구가 심화되던 중 중국성리학 과도 구별되는 한국 성리학의 특징으로 인간·심성론 중심의 연구 라는 점이 지적되고, 元·明유학과의 관련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나타난 문제의식이다. 이것이 199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트렌 드로 형성되었고 논쟁까지도 유발하였다. 셋째는 앞의 두 영역과 유관하게 연구되다가 후에 그 독자적 영역성이 의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과제―논자의 주관적인 판단이지 만―를 제시하여 보았다. 첫째, 차이보다는 보편성을 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퇴계가 위대한 학자인 까닭은 남과 다른 점이 있음 뿐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진리와 가치를 공유하고 자신의 학문과 생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하였기 때문 이다. 둘째, 퇴계학의 본질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꾀해야 함을 제 안하였다. 현재의 문제의식이 결여된 퇴계 읽기는 현실로부터 괴 리된 고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퇴계의 삶과 사상을 온전히 복원하고자 하는 퇴계로 퇴계 읽기가 보편적 진리의 탐구 라는 목적에 충실할 수 있다면, 관념론적 고전주의와는 거리를 둘 수 있다. 셋째, 퇴계학의 온전한 복원의 토대 위에서 현대 학문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퇴계의 학문적 요소를 잘라내어 현대적 삶을 비판하고 윤리적으로 훈계하는 정도를 퇴계학의 응용 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논자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학제간 연구, 통합의 최종 목표는 형이상학의 재건이라고 생각하며, 퇴계 학 연구는 이 문제에 일정한 정도 관여할 수 있다고 본다.

      • KCI등재후보

        家書에 나타난 退溪의 心理에 대한 一考 -長男 寯에게 부친 서찰을 대상으로-

        정시열 영남퇴계학연구원 2013 퇴계학논집 Vol.- No.13

        본고는 退溪 李滉이 長男 寯에게 보낸 家書에 나타난 그의 심리적 양 상에 대한 연구이다. 장남에게 보낸 퇴계의 현전 가서는 500통을 상회 하며, 기간상으로는 不惑인 1540년부터 考終하던 1570년까지 약 30년 이다. 본고에서는 이들 서찰 가운데 40세에서 55세까지 보낸 160여 통 을 대상으로 했다. 퇴계가 70세에 고종했음을 고려할 때 이 15년간은 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관직에 매여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 못한 퇴 계를 대신해 젊은 장남이 집안의 온갖 일처리를 맡아서 하던 때였다. 병 약한 퇴계가 그나마 외부 활동을 하던 이 기간 동안 준은 弱冠의 청년에 서 서른을 훌쩍 넘겨 장년에 접어들었는데, 그는 진로가 결정될 중요한 시기에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들을 바라보는 퇴계의 심사가 편치 않았으리라는 점은 자명 한데, 본고에서는 그 구체적 양상을 기대와 실망이라는 상반된 두 감정 의 공존, 집안을 단속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기인한 섬세함, 혈육에 대 한 믿음과 정서적 의존이라는 세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장남에 대한 퇴계의 기대와 실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 펴보았다. 學?家의 병행을 피할 수 없는 장남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 했던 퇴계였지만, 사대부로서 자식이 학문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자 하는 기대를 접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퇴계의 뇌리 속에 는 준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라는, 병립하기 힘든 두 감정이 공존하는 상 황이 지속되었다. 제3장에서는 세심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집안을 관리하 는 데 정성을 다했다는 측면에서 퇴계의 심리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 았다. 퇴계에게는 자신이 지녔던 가문 수호의 의지와 그에 따른 중압감 을 집안 대소사에 대한 섬세한 조율로 해소하고자 한 측면이 있었다. 물 론 퇴계의 심중에 자리한 이러한 의식은 아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제4장에서는 장남에 대한 퇴계의 신뢰와 정서적 의존에 대해 구체적으 로 살펴보았다. 퇴계는 자신의 안부와 감정 상태, 그리고 잡다한 신변사 를 아들에게 전함으로써 부자간의 정을 돈독히 하고, 정서적 공유점을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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