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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강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 연구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장서각 Vol.0 No.39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 11대손인 李乃蕃(1703~1781)이 1748년 터를 잡은 이래 명실상부한 장원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이후 선교장은 금강산과 설악산, 영랑호, 경포대 등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전국의 명류들이 모이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선교장의 열화당과 활래정은 이곳을 거쳐 간 많은 묵객들과 서화가들의 자취가 다수 남아 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은 『강원도지』에 근대 관동지역 서화의 대가로 알려진 此江 朴基正(1874~1949)의 작품이다. 박기정은 彛齋 權敦仁(1793~1859)의 문인으로부터 수학한 후 위정척사의 영수였던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활동에 가담하여 일본에 저항하였다. 그는 원주와 강릉을 배경으로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으나 그의 화명은 화단에서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제 주도의 서화협회 등록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박기정은 일제강점기 선교장 주인이던 이근우와 그의 아들 이돈의의 적극적 후원으로 선교장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글은 강릉 선교장에 소장된 차강 박기정의 《活亭十景百衲圖屛》을 중심으로 그 창작 배경이 된 활래정의 문화사적 의의와 작품 내의 제시 및 화풍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은 1946년 활래정 수석지관에서 제작되어 선교장 주인 이돈의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이러한 百衲屛風은 方形, 圓窓, 扇面 등 다양한 화면에 각각의 주제를 모아 하나의 병풍에 담은 것으로 19세기에 새로 등장한 회화형식이다. 백납도병은 당시 物譜 성격의 청완품에 대한 수집과 완상, 이미지 편집과 재배열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활정십경백납도병》은 편화를 별도로 부착하지 않고 병풍 면에 직접 여러 화면을 구획한 후 그림을 그려 넣은 형태이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화면에 그린 여러 종류의 화목과 화제를 적은 서예 작품에 이르기까지 박기정의 서화 세계를 종합적으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백납도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화목인 산수는 박기정의 현존 작품에서는 드물게 나타나 더욱 의미가 있다. 대개 강안의 어촌 풍경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경포를 생활 무대로 한 선교장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이 모두 실경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박기정은 남송대 강남지역 화가들이 망국의 쇠잔한 정취를 산수화에 이입하는 ‘殘山剩水'의 구도를 빌려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는 그의 작품 활동 시기가 일제강점기와 점철되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박기정의 작품 중 묵매는 『완당화보』를, 석란은 『석파화보』를 임모한 작품이 전하여 이들 화풍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 박기정의 서화 세계는 사심이 없는 경지에서 붓을 잡아야 한다는 ‘用筆在心, 心正則筆正'과 초월의 자유를 추구하는 ‘秋水精神'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청강 장일순, 화강 박영기에게 전수되어 현대화단까지 그의 화맥이 계승되었다. This paper focused on the cultural background Hwallae-jeong pavilion and painting style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 1874~1949). Since Seongyojang House was the former upper class residence of the Yi Naebeon (1703-1781) noble family of Gangneung, Gangwondo, his son Yi Sichun and grandson Yi Hu has credited with their family's economic success. As more and more writers and artists traveled to the eight famous spots in Eastern Korea, such as Geumgang Mountain, Seorak Mountain, Gyeongpo-dae pavilion and Yeongnang-ho Lake, Hwallae-jeong pavilion became an attraction among prominent men of the times. Yeolhwa-dang and Hwallae-jeong pavilion of Seongyojang House, as the cradle for painters and calligraphers, possessed works of Cho Inyeong, Kim Gyujin, Jeong Byeongjo, Kim Donhee, Kim Taeseok, Ryu Jinchan and Park Gijeong.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in 1946 for Yi Donui, owner of Seongyojang House. It was a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bdo (百衲圖) style painted with various pictures in quadrangle, circle and fan-shaped line. The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pdo has origin in Mulbo (物譜) to take pleasure in works of art and visual images in 19th century.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shows the various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His calligraphies were motivated literati poetry of China and Joseon, Park's own poem and Cho Inyeong's poetry of Hwallae-jeong pavilion by poem rhythm of Zhu Xi. Park's calligraphy is so-called Chagang style, modified styles of Kim Jeonghui and Gwon Donin. Every screen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folding screen is composed of seven sections. It was painted in the literary artist's style of inkand wash painting. Especially this work includes rare landscapes as well as four gracious plants, grapes, oddly shaped rocks and withered trees. His landscapes described our country devastated in Japanese colonial era by Canshan shengshui (殘山剩水) style of Southern Song Dynasty. The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are seeking for the selfish stage and transcendental idea, so-called ‘Qiushui Jingshen ( 秋水精神)'. This tendency of his works passed to his grandson Park Giyeong and Jang Ilsun in modern art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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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비설화 속 정탁(鄭琢)의 인물전승 양상 연구

        정은영 ( Jeong Eun-young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6 嶺南學 Vol.0 No.31

        이 논문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인 정탁(鄭琢)을 조명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설화에 투영된 정탁의 면모와 거기에 드러난 민간의 전승의식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역사 문헌 속의 정탁은 주로 강직함을 갖춘 관료로서 묘사되고 있다. 반면 설화 속 정탁은 고난을 극복하고 입신양명한 인물,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 참된 위정자의 표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일련의 설화에서 정탁은 탁월한 학문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난으로 인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난은 처가의 괄시라는 고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학문에 정진한 정탁은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과거에 당당하게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는 인물로 설화에 등장하고 있다. 반면 설화 중에는 정탁이 뛰어난 문재로 명나라 장수의 콧대를 꺾고 축지법과 같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남다른 능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로 형상화된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정탁 설화는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지만 전승자의 의도에 따라 역사적 사실은 과장ㆍ확대되었고 여러 허구적인 요소가 더해졌다. 결국 설화에 등장하는 정탁의 모습은 이 설화를 전승했던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정탁 설화 속에는 지금 현재는 좀 부족해 보이는 사람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 힘없는 약자, 백성의 삶을 대변하는 한편 자신들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해주는 위정자를 바라는 전승자의 바람이 들어가 있다. 역으로 말하면 정탁의 삶이 그러한 설화 전승자의 의식과 일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Jeong Tak is an able premier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Whe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ad occurred not only had he taken the role of a guard for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but also recommended Generals such as Yi Sun-shin, Gwak Jae-u, Kim Duk-ryung to the Royal Court enabling them to exercise their abilities. Especially the story about him sending a letter to the King when Yi Sun-shin was in a near-death situation, and saved his life is very famous. Despite his contributions, research on Jeong Tak had been limited to his academical success and ideas and nothing on how the people in his generation or generations after regarded him as a person `Jeong Tak`. Within the historical documents, Jeong Tak is illustrated as a bureaucrat of integrity. However, in the tale of Jeong Tak, he has been illustrated as a person who had overcome difficulties and achieved success and as a man of remarkable abilities. Series of tales of the tale of Jeong Tak shows that he passes the state examination with his outstanding academical ability but this did not simply enabled him to overcome poverty but has lead to his satisfying revenge on his in-laws who had completely ignored him because of his poverty. Meanwhile, in the tales, the tale of Jeong Tak is illustrated as a person who has an extraordinary eye sight which cannot be expected on human and a remarkable person who contracts space by magic. However, even those extraordinary abilities do not appear recklessly but has been used to punish those who judge others by their current circumstances or appearanc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tale of Jeong Tak that appear within these tales are reflections of those who have passed down such tales over generations. Even though you are faced with a difficult situation at present, it delivers a message that there is hope that you will success one day and shows the politicians what their citizens want and how they should treat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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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식재(善息齋) 정지순(鄭持淳)의 화론(畵論)

        정은진 ( Eun Jin Jeong ) 한국한문교육학회 2009 한문교육연구 Vol.32 No.-

        선식재 정지순은 18세기 소론 가문인 東萊鄭氏家의 인물이다. 그의 가문은 서울 남산 아래 세거하며 고위관료를 대대로 배출한 京華世族으로, 18세기 정치·학술·사상·문예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본고는 선식재 연구의 연장선에서 그의 화론을 조명한 것이다. 그 방법은 선식재가 화론에 관심을 지니게 된 배경과 화평 현황을 검토하고, 그 화평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선식재는 7세에 부친 정석경을 여의고, 맏형 정원순과 둘째 형 정경순의 가르침 속에 유년시기를 보냈다. 그 과정에 그는 특히 서예와 그림에 깊은 관심을 지녔다. 선식재의 선대들은 대대로 고위관료를 지냈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는 서책과 고화들이 다량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수천 권의 서책과 고화는 선식재에게 예술적 자극이 되었다. 또한 선식재는 정선·심사정·김광수·강세황·조윤형 등 18세기 화단을 이끌었던 중요 인물들과 교유하며 그림에 관한 이해를 높였고 화론을 형성해 갔다. 선식재는 그림이란 `사물의 이치[理]`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이라 높이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형상이 없는 山水나 草木을 그릴 때의 관건은 `그 이치`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선식재가 예술 및 회화창작의 기준으로 `사물의 이치`를 중시한 것이다. 또한 선식재는 사물의 이치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心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물의 이치와 자신의 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곧 자신의 심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명확히 이해했을 때 가장 훌륭한 그림이 탄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식재는 이처럼 회화창작의 중요전제로 `理와 心`을 강조한 것뿐만 아니라, 당대 화단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겸재 정선의 眞景에 관한 견해를 표출하기도 했다. 선식재는 진경은 겸재가 그린 그림의 전부가 아닌 일부였음을 언급하였다. 또한 소식의 글을 인용하여, `眞景`을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의 참모습, 진짜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진경`의 일차적 의미를 대상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나라를 벗어난 중국이나 그 외의 지역을 그리더라도,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인식한 대상의 참모습을 그린다면 그것도 충분히 진경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외에도 선식재는 겸재 진경산수화의 표현력을 설명하면서, 겸재의 진경이 유람한 자나 그렇지 못한 자가 보더라도 노닐 수 있는 공간이자, 소요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시켰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선식재가 진경이란 감상자가 대상을 보고 그곳에서 노닐 수 있을 만큼의 사실적 표현력과 작자의 내면을 발현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경에 관한 이 같은 선식재의 언급들은 겸재 그림에 관한 성과를 진경 외의 분야에도 열어두는 계기이며, 민족적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되었던 진경에 관한 의미를 재고할 여지를 시사하고 있다. Sunshikjae Jeong, Ji-soon was a man of the Donglae Jeong Family which was a major Soron Party of 18C. His family was the Kyungwha-sejok(京華世族) which had resided Namsan(Mountain), Seoul for generations. Also his family produced many men of high-ranking official and very important persons in the politic, art, science and literature of 18C. This study is focused on his painting criticism as a view point of an extension of Sunshikjae research. I checked why Sunshikjae had interest on painting criticism, checked and analyzed the status of painting criticism. Sunshikjae lost his father, Jeong suk-kyung at the age of 7 and spent his childhood under the teaching of his brothers, Jeong won-soon and Jeong kyung-soon. In these days, he especially had a a deep interest in calligraphy and painting. Because Sunshikjae`s generations of ancestors were high- ranking officials, his family had many books and old paintings. Theses books and old paintings stimulated Sunshikjae`s artistic feelings. Also Sunshikjae Increased understanding of the painting and set up the painting criticism, keeping a close relationship with Jeong sun, Shim sa-jung, Kim kwang-soo, Kang se-hwang, Jo yoon-hyung who were very important peoples of 18C artists. Sunshikjae evaluated paintings highly because paintings could express most well the way of things. And he explained that the key point of drawing landscape or plants is how well it can express the way of things. This shows Sunshikjae evaluated the way of things highly as a criterion of art and painting creation. Also, Sunshikjae thought his own mind role is important to express well the way of things. Both the way of things and his own mind cannot be separated like two sides of the same coin. And thought the best paintings could be created by deep understanding the way of things through his own mind. Sunshikjae emphasized the reason and mind as a premise of painting creation and also expressed the Jingyeong(眞景) of Gyemjae Jeongsun who was a core person of painters of his day. Sunshikjae thought Jingyeong(眞景) is the real things or true character seen by eyes, inciting Soshik`s words of "Gyemjaehwaseo". So it can be fully told as Jingyeong although someone draws not Korean but Chinese landscape, only if he himself experiences and draws the real thing. Sunshikjae put the focus on real thing as basic meaning of Jingyeong. Sunshikjae thought that Jingyeong have to have the realistic description as if gallery could ramble there, and express painter`s internal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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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정팔경도(永思亭八景圖)》의 문화적 함의와 회화적 특징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한국학 Vol.39 No.3

        영사정(永思亭)은 전북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마을에서 50m 거리의 야산에 있는 누정이다. 영사정은 순흥안씨 가문의 효의 상징이자 조선중기 호남사림의 교유 장소로서 이에 대한 다수의 시문학이 전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영사정의 연혁을 사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관련 인물들의 교유관계와 영사정과의 인연을 밝혀 영사정의 연혁과 문화적 함의를 정리하였다. 그 결과 안전(1518‒1571)이 선친 안처순을 기리기 위해 거처의 남록에 영사정을 지은 시점은 안처순의 사후인 1534년 이후부터 적어도 1557년 임희무가 사제당을 방문하여 영사정 제영을 쓰기 이전임을 알 수 있었다. 정자 이름은 부모의 사후에도 길이 효성을 바치려는 『시경』 출전의 ‘영언효사(永言孝思)'의 마음에서 ‘영사(永思)'라 지었다. 이후 영사정은 1590년 안전의 아들인 안창국(1542‒1595)에 의해 중건되어 삼대에 걸친 순흥안씨 문중의 효를 상징하고, 제영을 중심으로 16‒17세기 호남사림들이 결속을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시에는 남원 일대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장소였으며, 명나라 주지번의 영사정 편액이 전하여 대외관계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영사정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97년 한 전시회에서 처음 소개된 《영사정팔경도》를 통해서이다. 이 작품은 지본수묵화로 전체 8폭 중 6폭만 남아 있고, 화면의 박락이 심하여 처음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각 화면의 측면 상단에 남아 있는 ‘殘照'와 ‘孤舟', ‘方丈晴雲' 등 일부 화제(畵題)가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이 지은 「영사정팔영(永思亭八詠)」 시제(詩題)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영사정팔경도'라고 명명되었다. 현재는 각 화폭을 유리 액자에 보관하고 있지만, 각 화폭의 크기는 박락 부분을 제외하고 대략 70×50cm로 일반 화첩의 크기와 달라 원래는 조선중기 유행한 8폭 소병풍 형식으로 장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사정팔경도》의 내용은 주로 영사정이 위치한 남원의 명승을 중심으로 선정된 팔경을 주제로 팔영시와 쌍을 이루며, 사계절의 풍광을 묘사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양대박이 지은 「영사정팔영」과 여러 문인의 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영사정팔경도》의 남원 실경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그린 것인지 파악하고 당대의 화풍과 비교하여 16세기 조선회화에서 유행한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제1경 <창송냉월>은 영사정의 일곱 그루 소나무에 걸린 쓸쓸한 달빛, 제2경 <수죽청풍>은 영사정(永思亭) 뒤쪽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 제3경 <순강모우>는 순강의 저녁 비, 제4경 <방장청운>은 지리산에 피는 청운, 제5경 <야도고주>는 순강 나루터의 외로운 배, 제6경 <단안쌍루>는 축천을 사이에 두고 단안 위에 마주한 보허정과 북정, 제7경 <폐성잔조>는 영사정 인근 황폐한 옛 산성 터의 낙조, 제8경 <장교효설>은 금석교의 새벽 눈발을 소재로 한 양대박의 「영사정팔영」과 《영사정팔경도》가 쌍을 이룬다. 따라서 《영사정팔경도》는 양대박의 생졸년을 고려할 때, 「영사정팔영」과 동시에 제작되었거나 그와 멀지 않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사정팔경도》는 조선중기 실경을 바탕으로 그린 현존 팔경도가 희귀한 현실과 더욱이 남원 지역의 팔경을 그린 최고(最古) 사례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학술적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According to record of Sunheung An clan and poetical composition, Yeongsa‒jeong pavilion built by An Jeon(安瑑, 1517‒1571) between 1534 and 1557 to take care of graves of his father An Cheo‒sun(安處順, 1492‒1534) and his mother from Buryeong Han clan. The name of pavilion derived from ‘Yeong‒eon ‒hyo‒sa(永言孝思)' of the Book of Odes. Yeong‒eon‒hyo‒sa means to secure a lasting filial duty even after parent's death. It was repaired by An Chang‒guk(安昌國, 1542‒1595) who was a son of An Jeon in 1590. It was a filial symbol of Sunheung An clan and a solidarity place of Honam scholars through the poetical composition on the pavilion in 16th and 17th Centuries. Ming military camped out at Yeongsa‒jeong pavilion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3. The plaque lettering of the pavilion was written by Ju ji‒beon(朱之蕃, 1558‒1624) who came to the Joseon as an envoy of Ming in 1606. The eight scenic views of Yeongsa‒jeong pavilion remains six out of eight views. Its original type was an eight‒fold screen. Because the names of three views on the painting match up with the poetry of Yang Dae‒bak(梁大樸, 1544‒1592),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the work painted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painting style is reminiscent of Yi Jeong(李楨, 1578‒1607) and Yi Gyeong‒yun(李慶胤, 1545‒1611) who acted in the 16th Century. The eight scenic views of Yeongsa‒jeong pavilion painted by An Gyeon(安堅) and Jeolpa(浙派) painting style at that time. This picture has high academic and artistic value as the oldest work drawn from scenic spots around the Yeongsa‒jeong pavilion in Nam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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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hibitory Effect of Cinnamon Essential Oils on Selected Cheese-contaminating Fungi (Penicillium spp.) during the Cheese-ripening Process

        Jeong,,Eun-Jeong,Lee,,Nam,Keun,Oh,,Jisun,Jang,,Seong,Eun,Lee,,Jai-Sung,Bae,,In-Hyu,Oh,,Hyun,Hee,Jung,,Hoo,Kil,Jeong,,Yong-Seob 한국식품과학회 2014 Food Science and Biotechnology Vol.23 No.4

        The antifungal effects of essential oils (EOs) on cultures of the known cheese fungal contaminants Penicillium spp. were evaluated. Cinnamon leaf and bark EOs were the most effective among 8 EOs tested. The main components of both cinnamon EOs were eugenol, cinnamaldehyde, and linalool. Both inhibited growth of Penicillium spp. at a concentration of 10% v/v ($2,000ppm/mm^2$) on a lawn cell plate. When tested using 3 commercially available cheese starters, cinnamon EOs showed no effect against the FD-DVS ABT-5 cheese starter. However, growth of lactobacilli was inhibited in the presence of ${\geq}10%$ (v/v) of leaf and bark EOs for the KAZU 1 starter, and ${\geq}5%$ (v/v) for the FD-DVS FLORA-DANICA starter. A concentration of $4,000ppm/mm^2$ of cinnamon EOs completely inhibited growth of the Penicillium spp. that naturally contaminates the surface of Appenzeller che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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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inical Value of GRACE Score in the Prediction of Mortality in Patients with Acute Coronary Syndrome

        Eun,Suk,Shin,Myung,Ho,Jeong,Young,Hun,Lee,Sun,Il,Ji,So,Young,Jeong,Ok,Hee,Lee,Jeong,Ja,Kang,So,Young,Yun,Jeong,Eun,Yoo,Hyung,Wook,Park,Ju,Han,Kim,Weon,Kim,Young,Keun,Ahn,Jeong,Gwan,Cho,Jong,Chun,Park Korean Society of Critical Care Medicine 2006 Acute and Critical Care Vol.21 No.2

        BACKGROUND: This study was aimed to evaluate the validity of the Global Registry of Acute Coronary Event (GRACE) in patients with acute coronary syndrome (ACS). METHODS: One thousand thirty hundred seventy eight patients (63.6+/-12.0 years, 921 male), who were admitted at coronary care unit (CCU) of Chonnam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between January 2004 and December 2005, were analyzed. The patients were divided into two groups: the survived group (n=1,298, 871 male, 63.1+/-9.7 years) and the moribund group (n=80, 50 male, 67.4+/-8.5 years). Clinical characteristics, risk factors for atherosclerosis, echocardiographic findings, GRACE score and NT-proBNP were compared between groups. RESULTS: The overall mortality was 5.8 %, 80 out of 1,378 patients. Mortality was higher in patients with Killip IV (46.7%, 50 out of 107 patients) than Killip II or III and elderly patients more than 80 years (42.7%, 38 out of 89 patients). High Killip class and old age were associated with high mortality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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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茂亭 鄭萬朝의 친일로 가는 思惟

        정은진(Jeong, Eun-jin) 대동한문학회 2010 大東漢文學 Vol.33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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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茂亭 鄭萬朝(1858∼1936)의 친일로 가는 사유를 고찰한 것이다. 이에 앞서 그의 저작이나 가계, 사상, 교유 등에 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무정은 소론계 명문 집안인 동래정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상적으로도 양명학에 관심을 지니는 등 주자학적 권위에만 매몰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沈大允(1806∼1872).姜瑋(1820~1884)의 가르침을 받았고, 李建昌(1852~1898).黃玹(1855~1910).金澤榮(1850~1927).呂圭亨(1849∼1922).鄭寅普(1893~1950년 이후)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는 20세기 전후 지성계를 이끌며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고 노력한 인물도 있었고, 무정처럼 친일로 선회했던 인물도 있었다. 무정은 을사오적처럼 천인공노할 만한 친일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협조하고 그들이 주는 벼슬을 받았다. 이에 무정의 삶의 행력을 중심으로 친일로 가는 사유를 단계적으로 점검하게 된 것이다. 무정은 젊은 시절 東道西器의 관점을 견지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부패 관리 척결, 균형 있는 인재등용 등을 강조하였다. 이후 김홍집이 이끄는 갑오개혁의 중심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그 과정에 친일적 면모를 보였고 시속과 부합하게 되었다. 또한 명성왕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진도에서 12년간 유배의 체험을 겪으면서 더욱더 친일적 성향으로 우회하였다. 해배 후에는 산업화와 군사력을 겸비한 일본의 문명화에 매료되어, 일본을 문명의 모델로 설정하고 추수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書同文'이라는 사고의 틀로 유학과 한문을 중시하며, 일본과의 공통점을 찾고 연대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그는 친일인사들과 '以文會' 등을 결성하고, 그 성과물을 『매일신보』.『조선문예』등의 매체에 게재하였다. 또한 일본이 창설한 경학원의 부제학과 대제학을 맡고, 『경학원잡지』를 통해 친일유림들과 일본이 강조했던 사회교화론, 유교진흥정책을 선전하고 고양시키는 방면으로 동화.변질되어갔다. This study is focused on the reason of Moojung Jeong Man-jo's pro-Japanese. Prior to this, I simply reviewed his writings, family, thought, and fellowship. Moojung was born in prestigious Dongrae Jeong Family of Soron party. He did not want to be surrounded by the authority of Neo-Confucianism in thought. He got the teaching of Sim Dae-yun(1806~1872).Gang Wee(1820~1884) and had a academic relationship with Lee Geon-chang(1852~1898).Hwang Hyeon(1855~1910).Kim Taek-young(1850~1927).Yeo Gyu-hyeong(1849~1922).Jeong In-bo(1893~1950?). Among these people, during the 20th century, some led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kept the academic self-esteem, the others went wrong to pro-Japanese like Jeong Man-jo. Moojung is not as bad pro-Japaneses as Elsaojuk(乙巳五賊) but he cooperated Japan and took a post in the Japan government. So I studied the step of his pro-Japanese through Moojung's life history. Moojung strongly agreed to the ideology of Dongdoseogi(東道西器) in his young age, kept to the thought of independent-modernization. And he emphasized on the eradication of corrupt officials and balanced recruiting. After that, he had a important role in Gapohgaehyuk(甲午改革) led by Kim Hong-jib, and during this affair he showed pro-Japanese aspect. Also he was involved in the case of the Empress Myengsung's assassination to be exiled to a Jin-do island. In this process he turned more strongly to pro-Japanese. Because of this, he persisted to follow Japan's modernization model of having both industrialization and military power. He also regarded Confucianism and Chinese to be important, found out the common point with Japan, and emphasized on the solidarity with Japan. He organized 'Yimunhoe' with pro-Japan person and ran the results in the newspaper like 'Maeilsinho', 'Josunmoonyeo'. He also took a position of Gyenghakwon Boojehak and Daejehak established by Japan, propagated the theory of social enlightenment, confucianism promotion policy through the Gyeonghakwonjap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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