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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낙오자와 영원인 -서정주의 신라 기획과 전율의 시학-

        정영진 ( Young Jin Jeong ) 반교어문학회 2015 泮橋語文硏究 Vol.0 No.41

        서정주는 당대의 허무주의를 현대 서구문명의 병폐로 이해했으며 신라정신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서정주의 신라정신이 그가 상상한 신라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서정주의 신라 기획이 사회문화적 가치체계로서 제안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서정주가 상상한 신라 사회는 현실규범과 현실논리에서 낙오한 이들이 영원성의 세계 속에서 재생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사회였다. 이 ‘낙오자'들은 비록 현실로 복귀할 수 없지만 영원성의 세계에 거주하면서, 신라인들에게 영원성의 세계를 현시한다. 즉, 그의 신라 기획은 사회통합적 성격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에는 이러한 신라사회의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서정주는 서구정신과 신라정신의 대립이나, 현실세계와 영원성의 세계의 관계 역시 시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신라의 ‘영원인'들은 현실사회에서의 낙오자의 성격이 삭제된 채, 사랑의 주체로 나타난다. 이들은 다만 새로운 앎과 감동을 소유하고 절대적 세계를 현시한다. 즉, 신라 기획의 일부만이 시에 바쳐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서정주의 시인식에 따른 결과이다. 서정주는 현대시가 ‘전격적 쇼크' 혹은 ‘전율'로 체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라 기획의 사상적 성격을 모두 제거하고, 불사(不死)의 이미지로 전형화 된 영원성의 세계만을 시화(詩化)했다. 불사의 이미지들은 현실 전부를 점유해버리는 현실초과의 성격을 띠는데 이로 인해 그것은 영원성으로 감각된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의 절대성이 영원성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서정주 시(중기시)의 개성(스타일)의 확립은 신라정신이라는 보편적 사상 기획에 근거한 것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순수시에 대한 신념과 현대사회에서의 시의 효과에 대한 그의 시인식에 따라 신라 기획의 일부만을 미학화 한 결과였다. Seo Jeong-ju understood nihilism at the time as a social ill of modern western civilization, and sought to overcome this problem through the Silla spirit. This article seeks to show that the Silla planning of Seo Jeong-ju was suggested as a sociocultural value system by examining how Seo Jeong-ju`s Silla spirit was functioning in the Silla society he imagined. The Silla that Seo Jeong-ju imagined was a society allowing those who failed in terms of the norms of reality and logic of reality to be born again within the world of eternity. Although these losers may not return to reality, they could show the world of eternity to the people of Silla, while residing in the world of eternity. Seo Jeong-ju`s Silla planning implied a character of social integration. However, Seo Jeong-ju`s poetry do not reveal such features of the Silla society at all. Not only that, Seo Jeong-ju does not deal with the conflict between the western spirit and Silla spirit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world of reality and world of eternity in his poetry. The ‘people of eternity' of Silla appear as the main agents of love in his poetry, and these agents display an absolute world and possession of new knowledge and impression. Thus, in other words, only a part of the Silla planning has been dedicated to his poetry, which is a result of Seo Jeong-ju`s cognition on poetry. Because Seo Jeong-ju believed that modern poetry must be experienced through ‘lightning shock' or ‘thrill', he removed all ideological characters of Silla planning, and only treated the world of eternity, which was embodied through the image of immortality, in poetry. The establishment of personal characteristics (style) of Seo Jeong-ju`s poetry (middle-period poetry) was based on the planning of a universal idea called Silla spirit, however, was also a result of treating only a part of the Silla planning aesthetically based on his cognition on poetry, concerning the effect of poetry in modern society and his principle on pure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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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茂亭 鄭萬朝의 친일로 가는 思惟

        정은진(Jeong, Eun-jin) 대동한문학회 2010 大東漢文學 Vol.33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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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茂亭 鄭萬朝(1858∼1936)의 친일로 가는 사유를 고찰한 것이다. 이에 앞서 그의 저작이나 가계, 사상, 교유 등에 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무정은 소론계 명문 집안인 동래정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상적으로도 양명학에 관심을 지니는 등 주자학적 권위에만 매몰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沈大允(1806∼1872).姜瑋(1820~1884)의 가르침을 받았고, 李建昌(1852~1898).黃玹(1855~1910).金澤榮(1850~1927).呂圭亨(1849∼1922).鄭寅普(1893~1950년 이후)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는 20세기 전후 지성계를 이끌며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고 노력한 인물도 있었고, 무정처럼 친일로 선회했던 인물도 있었다. 무정은 을사오적처럼 천인공노할 만한 친일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협조하고 그들이 주는 벼슬을 받았다. 이에 무정의 삶의 행력을 중심으로 친일로 가는 사유를 단계적으로 점검하게 된 것이다. 무정은 젊은 시절 東道西器의 관점을 견지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부패 관리 척결, 균형 있는 인재등용 등을 강조하였다. 이후 김홍집이 이끄는 갑오개혁의 중심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그 과정에 친일적 면모를 보였고 시속과 부합하게 되었다. 또한 명성왕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진도에서 12년간 유배의 체험을 겪으면서 더욱더 친일적 성향으로 우회하였다. 해배 후에는 산업화와 군사력을 겸비한 일본의 문명화에 매료되어, 일본을 문명의 모델로 설정하고 추수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書同文'이라는 사고의 틀로 유학과 한문을 중시하며, 일본과의 공통점을 찾고 연대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그는 친일인사들과 '以文會' 등을 결성하고, 그 성과물을 『매일신보』.『조선문예』등의 매체에 게재하였다. 또한 일본이 창설한 경학원의 부제학과 대제학을 맡고, 『경학원잡지』를 통해 친일유림들과 일본이 강조했던 사회교화론, 유교진흥정책을 선전하고 고양시키는 방면으로 동화.변질되어갔다. This study is focused on the reason of Moojung Jeong Man-jo's pro-Japanese. Prior to this, I simply reviewed his writings, family, thought, and fellowship. Moojung was born in prestigious Dongrae Jeong Family of Soron party. He did not want to be surrounded by the authority of Neo-Confucianism in thought. He got the teaching of Sim Dae-yun(1806~1872).Gang Wee(1820~1884) and had a academic relationship with Lee Geon-chang(1852~1898).Hwang Hyeon(1855~1910).Kim Taek-young(1850~1927).Yeo Gyu-hyeong(1849~1922).Jeong In-bo(1893~1950?). Among these people, during the 20th century, some led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kept the academic self-esteem, the others went wrong to pro-Japanese like Jeong Man-jo. Moojung is not as bad pro-Japaneses as Elsaojuk(乙巳五賊) but he cooperated Japan and took a post in the Japan government. So I studied the step of his pro-Japanese through Moojung's life history. Moojung strongly agreed to the ideology of Dongdoseogi(東道西器) in his young age, kept to the thought of independent-modernization. And he emphasized on the eradication of corrupt officials and balanced recruiting. After that, he had a important role in Gapohgaehyuk(甲午改革) led by Kim Hong-jib, and during this affair he showed pro-Japanese aspect. Also he was involved in the case of the Empress Myengsung's assassination to be exiled to a Jin-do island. In this process he turned more strongly to pro-Japanese. Because of this, he persisted to follow Japan's modernization model of having both industrialization and military power. He also regarded Confucianism and Chinese to be important, found out the common point with Japan, and emphasized on the solidarity with Japan. He organized 'Yimunhoe' with pro-Japan person and ran the results in the newspaper like 'Maeilsinho', 'Josunmoonyeo'. He also took a position of Gyenghakwon Boojehak and Daejehak established by Japan, propagated the theory of social enlightenment, confucianism promotion policy through the Gyeonghakwonjap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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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가난과 보수주의 시학

        정영진(Jeong, Yeong-Jin) 동악어문학회 2015 동악어문학 Vol.64 No.-

        1950년대 경제적인 가난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별로 가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궁핍한 생활에서 비롯한 고독과 비애의 정서를 발견하기는 쉽지만, 가난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시들은 아주 적다. 서정주는 말한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글은 서정주의 시를 당대 한국 현실을 리얼하게 다룬 소설들과 겹쳐 읽으면서, 서정주 시의 미적 이데올로기와 시장경제 원리와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1950년대 ‘가난'이 저항 담론의 수행성을 구성할 수 없었던 까닭과 서정주 시의 보수주의 미학의 성격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1950년대 서정주 시처럼 자본주의 세계의 질서와 원리를 고유한 자기 원리로 번역해 낸 시인은 없어 보인다. 이때의 자본주의 질서와 원리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체계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사익을 추구하고 개인들은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자유롭게 시장에 참여하며, 이때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는 ‘시장 원리(maket principle)'를 의미한다.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은 자기 조절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개입이 시장의 흐름을 깨는 것으로 간주된다. 서정주는 역사적 신체를 배제하고, 인간의 타고난 본성들의 향연을 이상화했다. 그는 훼손되지 않은 본연의 인간성이 다른 수많은 본연의 생명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세계에 영원성 내지 절대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서정주는 시장 지향의 심성(mentality)이 구축되어가는 전후사회의 집단적 무의식-교환의 감각을 내면화하는 등-을 대담하게 구도를 잡아 미학화 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서정주에게 전통은 ‘동양'이나 ‘신라'에 있다기보다는 ‘현실'을 수용해가는 민중들의 집단적 무의식 차원과 결부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정주의 보수주의 미학(시학)의 핵심은 바로 현실수용의 구조를 미학화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The economic poverty during the 1950s is a clear fact. However, poems did not have much interest in poverty. It is easy to discover the sentiment of solitude and sorrow based on impoverished life, and, however, there are an extremely small number of poems that overall deal with poverty. Jeong-ju Seo says “Poverty is nothing but merely being ragged.” What is the reason he can make such a statement? This study seeks to examine the correlation between the aesthetic ideology of the poems of Jeong-ju Seo and the principles of market economy, while reading both the poems of Jeong-ju Seou and the novels that realistically depicted the realities of Korea during the time. This study seeks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conservatism aesthetics of the poems of Jeong-ju Seo and the reason that ‘poverty' was not able to compose the performance of the confrontation discourses in the 1950s. There seems to have been no poet that translated the orders and principles of the capitalism world into his or her own unique principles as the poems of Jeong-ju Seo had in the 1950s. The orders and principles of the capitalism world means the ‘market principle' that considers that human beings pursue their own interests pursuant to human nature, individuals freely participate in the market to obtain maximum satisfaction, and the price is formed by an ‘invisible hand' pursuant to demand and supply, rather than meaning a system that has its objective as profit-seeking. Because a market where free competition by economic agents is formed has a function of self-control, artificial intervention is regarded to break the flow of the market. Jeong-ju Seou excluded the body of history and idealized the banquet of the inner natures of people. He sought to grant absoluteness or eternal nature to the world where the undamaged human nature naturally interacts with the numerous other natural organisms. Many believe Jeong-ju Seo forms an aesthetic sense by boldly grasping the composition of the group unconsciousness in the postwar society ? internalization of the sense of exchange - where a market-oriented mentality was being constructed. Maybe, the tradition to Jeong-ju Seo could have been combined with group unconsciousness of the public accepting the ‘reality,' rather than the ‘East' or ‘Silla.' That is because the core of the conservatism aesthetic (poetry) of Jeong-ju Seo is in making an aesthetic sense in the structure of acceptance of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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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식재(善息齋) 정지순(鄭持淳)의 화론(畵論)

        정은진 ( Eun Jin Jeong ) 한국한문교육학회 2009 한문교육연구 Vol.32 No.-

        선식재 정지순은 18세기 소론 가문인 東萊鄭氏家의 인물이다. 그의 가문은 서울 남산 아래 세거하며 고위관료를 대대로 배출한 京華世族으로, 18세기 정치·학술·사상·문예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본고는 선식재 연구의 연장선에서 그의 화론을 조명한 것이다. 그 방법은 선식재가 화론에 관심을 지니게 된 배경과 화평 현황을 검토하고, 그 화평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선식재는 7세에 부친 정석경을 여의고, 맏형 정원순과 둘째 형 정경순의 가르침 속에 유년시기를 보냈다. 그 과정에 그는 특히 서예와 그림에 깊은 관심을 지녔다. 선식재의 선대들은 대대로 고위관료를 지냈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는 서책과 고화들이 다량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수천 권의 서책과 고화는 선식재에게 예술적 자극이 되었다. 또한 선식재는 정선·심사정·김광수·강세황·조윤형 등 18세기 화단을 이끌었던 중요 인물들과 교유하며 그림에 관한 이해를 높였고 화론을 형성해 갔다. 선식재는 그림이란 `사물의 이치[理]`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이라 높이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형상이 없는 山水나 草木을 그릴 때의 관건은 `그 이치`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선식재가 예술 및 회화창작의 기준으로 `사물의 이치`를 중시한 것이다. 또한 선식재는 사물의 이치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心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물의 이치와 자신의 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곧 자신의 심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명확히 이해했을 때 가장 훌륭한 그림이 탄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식재는 이처럼 회화창작의 중요전제로 `理와 心`을 강조한 것뿐만 아니라, 당대 화단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겸재 정선의 眞景에 관한 견해를 표출하기도 했다. 선식재는 진경은 겸재가 그린 그림의 전부가 아닌 일부였음을 언급하였다. 또한 소식의 글을 인용하여, `眞景`을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의 참모습, 진짜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진경`의 일차적 의미를 대상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나라를 벗어난 중국이나 그 외의 지역을 그리더라도,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인식한 대상의 참모습을 그린다면 그것도 충분히 진경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외에도 선식재는 겸재 진경산수화의 표현력을 설명하면서, 겸재의 진경이 유람한 자나 그렇지 못한 자가 보더라도 노닐 수 있는 공간이자, 소요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시켰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선식재가 진경이란 감상자가 대상을 보고 그곳에서 노닐 수 있을 만큼의 사실적 표현력과 작자의 내면을 발현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경에 관한 이 같은 선식재의 언급들은 겸재 그림에 관한 성과를 진경 외의 분야에도 열어두는 계기이며, 민족적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되었던 진경에 관한 의미를 재고할 여지를 시사하고 있다. Sunshikjae Jeong, Ji-soon was a man of the Donglae Jeong Family which was a major Soron Party of 18C. His family was the Kyungwha-sejok(京華世族) which had resided Namsan(Mountain), Seoul for generations. Also his family produced many men of high-ranking official and very important persons in the politic, art, science and literature of 18C. This study is focused on his painting criticism as a view point of an extension of Sunshikjae research. I checked why Sunshikjae had interest on painting criticism, checked and analyzed the status of painting criticism. Sunshikjae lost his father, Jeong suk-kyung at the age of 7 and spent his childhood under the teaching of his brothers, Jeong won-soon and Jeong kyung-soon. In these days, he especially had a a deep interest in calligraphy and painting. Because Sunshikjae`s generations of ancestors were high- ranking officials, his family had many books and old paintings. Theses books and old paintings stimulated Sunshikjae`s artistic feelings. Also Sunshikjae Increased understanding of the painting and set up the painting criticism, keeping a close relationship with Jeong sun, Shim sa-jung, Kim kwang-soo, Kang se-hwang, Jo yoon-hyung who were very important peoples of 18C artists. Sunshikjae evaluated paintings highly because paintings could express most well the way of things. And he explained that the key point of drawing landscape or plants is how well it can express the way of things. This shows Sunshikjae evaluated the way of things highly as a criterion of art and painting creation. Also, Sunshikjae thought his own mind role is important to express well the way of things. Both the way of things and his own mind cannot be separated like two sides of the same coin. And thought the best paintings could be created by deep understanding the way of things through his own mind. Sunshikjae emphasized the reason and mind as a premise of painting creation and also expressed the Jingyeong(眞景) of Gyemjae Jeongsun who was a core person of painters of his day. Sunshikjae thought Jingyeong(眞景) is the real things or true character seen by eyes, inciting Soshik`s words of "Gyemjaehwaseo". So it can be fully told as Jingyeong although someone draws not Korean but Chinese landscape, only if he himself experiences and draws the real thing. Sunshikjae put the focus on real thing as basic meaning of Jingyeong. Sunshikjae thought that Jingyeong have to have the realistic description as if gallery could ramble there, and express painter`s internal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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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pid Micropropagation by Axillary Buds Cultures of Smilax china

        Hyun-Jin,Song,Seon-Jeong,Sim,Mi-Jin,Jeong,Chang-Mi,Heo,Hak-Gon,Kim,Gwon-Yong,Jeong,Su-Yeoung,Heo,Yong-Weon,Choi,Geun-Hye,Park,Jae-Kyung,Yang,Hyun-Shik,Moon,Myung-Suk,Choi 경상대학교 농업생명과학연구원 2010 농업생명과학연구 Vol.44 No.6

        An efficient method for the rapid propagation of Smilax china from axillary buds was established. Plants with thick leafage were selected from Korea native S. china population. Axillary buds of S. china collected from selected plant and were cultured in various culture media (2MS, MS, 1/2MS, WPM, B5 and SH medium). Shoot was induced from axillary bud on MS basal medium after 4 weeks of culture. 1/2MS medium showed a higher growth rate than those of the others, while the lowest shoot growth was obtained in 2MS medium. Among the sucrose concentrations, 5% sucrose was the optimum level for shoots growth from axillay buds. Among cytokinins, 0.5 mg L -1 6-benzylaminopurine (BAP) treatment showed the best performance on shoot multiplication, yielding average shoot multiplication forming about 2.4. Rooting was induced directly near the base of the shoot on 1/2MS medium containing with three-auxins α-napthalene acetic acid (NAA), indole acetic acid (IAA) and β-indolebutyric acid (IBA) (0.5 and 1.0 mg L -1 ). The 1.0 mg L -1 IBA treatments induced earliest rooting with maximum of root number and root growth. These rooted plantlets were successfully transferred to pots for 4 weeks hardening process, and were transferred to soil with above 90% survival rate.

      • KCI등재

        Enhancement of Seed Germination and Seedling Growth of Allium victorialis var. platyphyllum by the Soaking Treatment of Plant Growth Regulators

        Mi,Jin,Jeong,Hyun,Jin,Song,Seon,Jeong,Sim,Yeong,Rong,Seo,Hyeon,Jeong,Im,Gang,Uk,Suh,Chandrakant.,S.,Karigar,Myung,Suk,Choi 경상대학교 농업생명과학연구원 2015 농업생명과학연구 Vol.49 No.1

        The effects of seed soaking treatment with the solutions of plant growth regulators IAA, GA3 and BAP on seed germination and shoot and bulb growth of Allium victorialis var. platyphyllum (Korean wild garlic) were determined. A significant variation in the seed germination rate was recorded at all treatments for various soaking periods. Maximum seed germination was obtained when seeds were soaked in IAA or GA3 solution at 200 mg L-1. The MAP treated seeds started to germinate after 3 months. Among treatments, IAA was found to be most effective in improving seed germination, but further seedling growth was not correlated to the soaking time. Seed soaking in IAA or GA3 solution enhanced further growth of seedlings compared with water control treatment. Shoot and bulb growth was highest in GA3 treat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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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교육에서 『무정』의 정전화 연구

        정진석(Jeong, Jin-Seok) 한국현대소설학회 2017 현대소설연구 Vol.0 No.67

        이 연구의 목적은 문학교육이 실천한 『무정』의 정전화 과정을 밝히고 교육의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정』이 중등학교 교과서에 처음 수록된 2차 교육과정부터 학습의 대상이 되지 못한 2009 개정 교육과정까지의 변천 과정을 살피고 정전화의 논리를 재구하였다. 『무정』은 문학사의 차원에서 최초의 근대적 장편 소설이지만 문학교육의 차원에서는 가장 오래된 정전이다. 현대소설의 어떤 작품보다도 가장 ‘앞선 시기'에 ‘지속적으로' ‘다수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읽혔다. 그만큼 학습 목표, 작품 해석, 수록 범위, 학습 활동 등과 관련된 교재화의 양상이 시기마다 상이하다. 2 · 3차 교육과정기 고전 문학사를 다루는 고등학교 선택 과목 〈고전〉의 교과서에 처음 실린 『무정』은 4차 교육과정에 와서 전래의 소설과는 구분되는 ‘최초의 근대적 장편 소설'로 규정되면서 6차 교육과정까지 정전의 위상을 확립해간다. 7차 교육과정부터 『무정』은 대중소설의 면모를 조명 받으며 교육 내용의 지평을 확장하지만 교육 정전의 위상은 흔들린다. 『무정』의 정전화에 대한 사적 고찰을 통해 확인된 문학교육의 성과와 한계는 『무정』 교육의 개선을 위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구체적으로, 첫째, 문학사 교육과 관련하여, 학습자가 문학사적 안목을 형성할 수 있도록 『무정』을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서 현실 인식의 차원이나 문체적 차원의 연속성을 탐구하고 이해하게 해야 한다는 것, 둘째, ‘문학과 매체' 관련 성취기준과 관련하여, 『무정』의 소통 현상과 문체 선택의 관계를 탐구하게 함으로써 『무정』의 매체적 특성을 기호론과 소통론 양편에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셋째, 문학 교실에서 특정 연재분이 아닌 장편소설 『무정』 전체를 풍성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활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This study aims to review transition of canon formation of 『Moo Jeong』 in literary education critically, and find improvement plans. To achieve this, from the 2th national curriculum period that fist introduced 『Moo Jeong』 to 2009 revised national curriculum period, curriculum, textbooks are examined. As a result, aspects and a logic of canon formation of this work are revealed. Aspects of canon formation is analyzed in dimensions of achievement standards, units, learning activities and interpretation. As a result, what this paper does quite clearly is that first, korean language education has strengthened this work`s status as a educational canon for literary history education and media approach, second, this work`status has nosedived because of falling behind in the making teaching material and failing to set up relation with new achievement standards. Historical consideration on canon formation of 『Moo Jeong』 involves literary education`s issues and a new possibility of making teaching material. To succeed outcome and overcome the limitations through referring foregoing historical consideration, improvement plans for canon formation of this work are suggested in terms of literary history education, the media approach to literature and a new reading method of 2015 revised national curriculum.

      • 이순신 정론Ⅳ : 거북선 구조, 철갑문제

        정진술(Jeong Jin Sool)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2 이순신연구논총 Vol.- No.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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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아직도 학자들 간에 그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몇가지 사항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첫 번째로 여러가지 이견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접근하기 위하여 이해의 출발점으로 거북선의 인원 구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16세기 임란 당시 거북선의 승조원은 이순신과 나대용의 장계에 의해서 125~130명으로 알려졌다. 임란 당시 거북선의 승조원 직무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이순신의 장계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주요 승조원의 직무에는 사부(射夫), 격군(格軍), 방포장(放炮匠)이 있었으며, 이들 세 직무는 임란기 거북선의 구조 해석에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17세기에는 조총의 도입에 따라 포수 직무가 추가되고, 18세기에 이르면 거북선 승조원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정원은 148명으로 책정되었다. 또한 임란 때의 방포장 명칭이 화포장으로, 격군의 명칭이 노군으로 변화되었다. 이들 네 직무 즉 사부, 화포장(방포장), 포수, 노군(격군)은 조선 후기 거북선의 구조 해석에 중요한 고려 요소이다. 거북선의 승조원 명칭에 나타나는 무상(舞上, 無上)이 지금까지 범주(帆柱) 위에서 작업하는 사람 등으로 다양하게 주장되어 왔으나, 필자는 통영에서 발견된 조선 후기 수군문서와 임수간(任守幹)의 『동사일기(東槎日記)』 에 나타나는 통신사선의 선원 명칭을 분석하여 ‘무상'의 우리말 뜻이 ‘물래를 작동하는 선원'의 명칭이며, 조선시대의 군선에서는 대개 닻만을 다루는 정수(碇手)와는 별도로 선수에서 닻물래를 다루는 선원을 일컬었음을 밝혔다. 두 번째로 임란기 거북선의 포 설치 위치가 2층인가 3층인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거북선이 2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는 이들은 2층에, 3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는 이들은 3층에 포가 설치되었다고 보는데, 어느 주장이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하였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임진년 해전에서 거북선의 사상자 통계를 조사하였는데, 격군의 사상자가 23명인데 반하여 사부는 부상자 1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방패로 보호된 2층에서 활동하는 거북선의 격군들이 적의 탄환 및 화살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격군들의 이러한 피해는 그 원인이 방패에 뚫린 포 구멍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므로 임란기 거북선은 격군의 노질 공간과 화포의 발사 공간이 동일한 2층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사부와 격군의 피해 정도가 현저하게 다른 것으로 보아 그들의 활동 공간도 서로 달랐으며, 2층에 위치한 격군과는 달리 사부는 3층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것은 1795년에 발행된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의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포 구멍의 위치와 동일하다고 하겠다. 참고로 조선 후기의 판옥선 즉 『각선도본(各船圖本)』 의 전선도에는 2층 방패에 포혈이 나타나 있지 않다. 판옥선의 방패에 포혈의 유무는 화포의 발사 위치가 2층인가 3층인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그런데 1633년에 경기 수사 최진립이 작성한 해유문서와 1778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풍천유향(風泉遺響)』 에는 포판과 상포판에서 모두 대포를 발사하였다고 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그려진 수군조련도에도 판옥선의 2층 방패에 포혈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 판옥선의 포혈이 2층 방패와 3층 여장에 설치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임란이 끝난 후 조총의 사용이 보편화되므로서 판옥선에는 포를 다루는 화포장 외에 조총을 다루는 포수가 새롭게 편성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판옥선의 2층 포혈은 화포를, 3층 포혈은 조총을 발사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을가 추정된다. 세 번째는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의 거북선 그림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관해서이다. 오늘날 거북선에 관한 논란은 상당 부분이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 거북선 그림들에는 2층 방패와 3층 개판에 포혈이 각각 배열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3층 구조가 확실하다. 그런데 귀선도설의 거북선이 3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물론이거니와 3층도 전통(全通) 갑판이라면, 2층의 높이가 4. 3자(약 129cm)라는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의 기록은 이해될 수 없다. 동양식 노는 노군들이 서서 노질을 해야 하며, 조선 말기에 남자들의 평균 신장 실측치 163.8cm를 고려해 볼 때, 4. 3자 높이에서는 노군들이 자유롭게 노질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 때문에 필자는 귀선도설 거북선의 3층 갑판이 전통 갑판으로 되어 있지 않고 노군들이 노질을 하는 머리 위 부분은 갑판이 비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네 번째는 거북선의 철갑 유무에 관한 문제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고 주장하는 편의 주요 근거는 안골포 해전을 기록한 일본측 문헌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 에 To correctly understand the Turtle Ship, I have reviewed several issues about it, which were controversial among historians and researchers. First of all, I took the personnel system of the Turtle ship as the starting point. It is known that there were 125 to 130 crew members of the Turtle Ship in those days of the Im-jin-wae-ran (壬辰倭亂) which was the war of Japanese invasion upon Korea during 1592-1598. It was not clearly mentioned about the duties of all the crew positions of the Turtle Ship, but according to the government report written by Admiral Yi Sun Sin, there were three main positions which are important to understand its structure at the time. They are arrow-shooters who were called ‘Sa-bu(射夫)', rowers who were called ‘Gyeok-gun(格軍)' and gunners who were called ‘Bang-po-jang(放炮匠)'. In the 17th century, the introduction of matchlocks created new shooters who were called ‘Po-su(砲手)'to the Turtle Ship, so the total number of crew members reached 148 in the 18th century. Therefore these four positions, ‘Sa-bu', ‘Gyeok-gun', ‘Bang-po-jang' and ‘Po-su', are important in the study of the structure of the Turtle Ship in the late of the Joseon Dynasty. There are diverse opinions regarding the job ‘Mu-sang(舞上 or 無上)', mentioned in the personnel system, including a claim that it could mean the one working on the ship mast, but I found that it was named for the crew running a spinning wheel by collating and analyzing the naval documents written in the late of the Joseon Dynasty. Therefore ‘Mu-sang' was the crew that played a spinning wheel to weigh or drop anchor on the bow, unlike the job ‘Jeong-su(碇手)', generally handling only the anchor in the battleship at the time. Secondly, I looked into the location of the cannons in the Turtle Ship used during the Im-jin-wae-ran. Some historians insisted that the Turtle Ship had been built two stories and fired its cannons placed on the second floor but others believing three-story Turtle Ship claimed that cannons had been installed on the third floor. Checking into the statistics of casualties of the Turtle Ship during the Im-jin-wae-ran in order to clarify the exact location of the cannons, it is found that while twenty-three ‘Gyeok-guns' were killed and wounded, the total casualty of ‘Sa-bu' was only one. It definitely shows that a considerable number of ‘Gyeok-guns' were damaged from gunshots and arrows even though they stayed on the second floor which were covered with the board wall. It is assumed that the damage was caused by the cannon crenels on the board wall. Therefore, both where ‘Gyeok-gun' rowed out and cannons went off are considered to be located on the second floor of the Turtle Ship. From the noticeable difference on the extent of the damage between ‘Sa-bu' and ‘Gyeok-gun', it is presumed that the working spaces for ‘Sa-bu' and ‘Gyeok-gun' are different: the third floor for ‘Sa-bu' and the second floor for ‘Gyeok-gun'. It also means that the locations of the cannon crenels of the Turtle Ship during the Im-jin-wae-ran are identical according to the Gui-seon-do-seol(龜船圖說) of the Yi-chung-mu-gong-jeon-seo (李忠武公全書) written in 1795, which included pictures of both the Tong-je-yeong Turtle Ship(統制營龜船) and the Jeolla-jwa- su-yeong Turtle Ship(全羅左水營龜船). The third issue is about the correct interpretation of the drawing of the Turtle Ship found in the Gui-seon-do-seol of the Yi-chung-mu-gong-jeon-seo. I think that many of controversies about the Turtle Ship are derived from the misinterpretation of this drawing. Based on it, it is obvious that Turtle Ships found in the Gui-seon-do-seol have three stories as there are crenels on its board walls of the second floor and third floor. If it is a three-story Turtle Ship and both second and third floors are perfect decks, however, it is not convincing at all that the height of the second floor is 4.3 feet(about 129cm) mentioned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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