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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詠史樂府의 『西涯擬古樂府』 受容과 한민족사의 시적 형상

          金榮淑(Kim, Young-sook) 대동한문학회 2011 大東漢文學 Vol.3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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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사람 이동양(1447∼1516)은 많은 관직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문장과 시를 잘해 ‘다릉시파'의 큰 종장이었다. 그는 『서애의고악부』가 포함된 『회록당집』 100권을 지은 명나라의 중추적인 문인이며 시인이다. 특히 전대와 다른 새로운 체제와 역사적 소재로서 『서애의고악부』를 지어 전대와 다른 악부시의 형상을 나타냈다. 101수의 모든 작품이 ‘제목-사화-원시-사론'의 구성을 하고 있으며, 모든 시들이 역사를 노래한 것이다. 작가가 지은 동기는 옛날 악부가 후대로 오면서 옛 법도나 관례를 답습하고 본 뜻을 회복하지 못하기에 이 폐단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옛 악부의 유풍을 잇는다는 뜻에서 ‘의고악부'라 했지만 역사를 읊었다는 의미로 보면 ‘영사악부'이다. 『서애의고악부』는 1516년 명나라에서 간행한 후 60여년 뒤에 조선에서 이를 수입하여 ‘재주갑인자'로 간행했으며, 후에 목판본으로도 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상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초판이 불타 없어졌지만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간행본이 여러 곳에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영사악부작가들은 『서애의고악부』를 수용하여, 체제를 본받아 민족사를 소재로 한 악부시로 형상하였다. 시집명에 ‘해동' ‘동국' ‘대동' ‘기동' 등의 명칭을 붙인 악부시를 많이 지었다. 이것은 한민족사를 읊은 노래시므로 한국적 ‘영사악부'이다. 심광세(1577~1624)의 『해동악부』, 조현범(1716~1790)의 『강남악부』, 이복휴(1729~1800)의 『해동악부』, 이광사(1705~1777)의 『동국악부』, 권도용(1877~1963)의 『천령악부』등은 작품 서발문에서 『서애의고악부』 체제를 본받아 악부시를 지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10여명의 작가들 작품이 『서애의고악부』를 위시한 전대의 영사악부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의 공통성은 한민족사를 소재로 채택하여 『서애의고악부』의 ‘제목-사화-시' 체제를 본받아 자유로운 악부시 표현법으로 다양한 시적형상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민족사에 대한 자각, 다양한 시체의 변모, 노래시의 범위 확대, 영사악부의 개념인식, 조선의 중국시집 간행과 보급 등의 의의를 지닌다. Lee Dong-yang(李東陽, 1447~1516), who is a person of the Myung dynasty, was promoted to prime minister after passing through many government posts, and was a great master of ‘Dareungsipa(茶陵詩派: poetic sect of Dareung region)' because of being good at sentence and poetry. He is a pivotal literary man and a poet in the Ming dynasty due to composing 100 volumes of 『Hoerokdangjip(悔麓堂集)』 in which he was included. Especially, he composed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with new system and historical materials different from the former generations, thereby having indicated the image of song poem different from the former generations. All works of 101 pieces are forming ‘theme-historical storypoem-historical criticism.' All poems are what sang history. A motive, for which the writer composed, aimed to remove this negative effect because the old Akbu (樂府) followed old law or custom and failed to recover the original meaning while coming to future generations. Thus, it was called as ‘Uigoakbu(擬古樂府)' in a meaning of following the old custom, but is Yeongsaakbu(詠史樂府: poem of having sung history) given seeing it with a meaning of having recited history. It was published in the Ming dynasty in 1516, was imported by Joseon following about 60 years, and was issued as ‘Jaejugapinja(再鑄甲寅字),' was printed even with a block book later, and was read and appreciated by many people. After then, the first edition was burnt to have been gone in China. However, in Korea, the published book in Joseon period is being delivered in many places. Writers of Yeongsaakbu in the late Joseon accepted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and made it image as a song poem with having the racial history as material instead of following system. Many song poems were composed, which attached names such as ‘Haedong' ‘Dongguk' ‘Daedong' ‘Gidong' to the name for collection of poems. This is a song poem that recited history of the Korean race, thereby being Korean-styled ‘Yeongsaakbu(詠史樂府)'. Sim Gwang-se(沈光世, 1577~1624)'s 『Haedongakbu(海東樂府)』, Jo Hyeon-beom(趙顯範, 1716~1790)'s 『Gangnamakbu(江南樂府)』, Lee Bok-hyu(李福休, 1729~1800)'s 『Haedongakbu』, Lee Gwang-sa(李匡師, 1705~1777)'s 『Donggukakbu(東國樂府)』, and Gwon Do-yong(權道溶, 1877~1963)'s 『Cheonryeongakbu(天嶺樂府)』clarified to have composed song poem by following a system with being influenced by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Seobalmun(序跋文) of a work. The others ten Writers can be considered to have been composed by the influence of Yeongsaakbu(詠史樂府) in the former generations including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Commonality in these things is what adopted the history of the Korean race as material, followed the system of ‘theme-historical story-poem,' and made diverse poetic images with free song-poem expression method. This phenomenon has significances such as the perception on the history of the Korean race, the transformation into diverse verse styles, the expansion in range of song poem, the recognition of a concept in Yeongsaakbu(詠史樂府), and the publication & supply of Chinese collection of poems in Joseon.

        • KCI등재

          일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妓女의 立役과 運用

          이성임 (Lee, Seongy-im) 대동한문학회 2009 大東漢文學 Vol.30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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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16세기에서 19세기 초반까지의 일기자료를 통해 妓女의 立役과 기녀제의 運用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기녀는 조선시대에 춤추고 노래하고 성을 제공하던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國役體系속에서 역을 담당하던 자들이다. 기녀는 妓籍(官案)에 등록되어 國役에 편성된 공적인 존재로 최하층 여성인 동시에, 최고의 예능인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였다. 기녀를 구분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소속처에 따라 장악원에 속한 京妓와 營鎭을 비롯한 地方郡縣에 소속된 官妓로 구분하여야 한다. 기녀의 규모는 국가의 여악정책과 성리학의 심화정도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京妓는 100~300명에 이르렀으며 官妓는 20~60명 정도였다. 기녀제도는 연산군대에 가장 안정적으로 정착되었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여악이 정면으로 비판받게 되면서 京妓가 혁파되자(1623) 지방관아의 관기만 남게 되었다. 기녀의 충원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官婢중에서 姿色과 才藝를 기준으로 선발하게 되어 있었다. 관기는 넓은 의미의 관비로 관노, 관비, 기녀가 지방관아의 官案에 함께 등재되어 있다. 이들은 公的인 존재로 일정한 역을 담당하는데 이는 妓役이라 하는데, 기역은 16세에서 50세까지 담당하였다. 京妓는 寺奴婢와 마찬가지로 立番制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3인이나 4인이 하나의 條를 이루어 일정한 기간씩 돌아가면서 입번하였다. 즉 3인1조인 경우 한 사람이 6개월을 立番하면 나머지 12개월은 非番으로서 쉬게 되는데 결국 京妓의 奉足이란 非番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번 기간에는 개인적인 사설 영업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목재일기」에 존재하는 妓家가 기녀가 운영하는 사설영업장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녀는 16세부터 역을 담당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 뽑아 敎房을 통해 교육을 받은 다음 현장에 배치되었다. 기녀 중의 우두머리를 行首妓라 하는데, 행수기는 기녀의 대표성을 지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였다. 기녀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을 鄕名이라 하고 나중에 붙여진 이름을 妓名이라 하였다. 기명은 일종의 예명인 것이다. 유희춘이 자신과 관계한 기녀를 향명과 기명을 섞어서 부른다는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향명은 그야말로 투박한 관비병이며, 기명은 화려하고 성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특성을 가진다. 기녀는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혼인 이후에도 이들의 役은 지속되어서 혼인은 해소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기녀가 상대하는 계층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우 천시되어 같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기녀가 되어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는 상대를 ‘上笄' 라고 하는데, 이는 일종의 성년식과 같은 것으로, 이들에게는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이었다. 관기와 관비는 담당하는 기능과 역할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기와 관비 사이에도 일정한 위계가 존재하였으며, 기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관비로 降定될뿐만 아니라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죄목은 자신의 본업을 충실히 거행하지 않은 데에 있었다. 3) 관기의 대표적인 업무 중의 하나가 女樂으로 연회에서 춤추고 노래하여 흥을 돋우는 것이다. 『명종실록』이 완성되어 실록봉안사가 전주에 내려왔을 당시에도 기녀가 참석한 성대한 연회가 며칠에 걸쳐서 지속되었다. 지방관이 이러한 행사에 참석한 기녀에게 선물을 지급하여 수고를 위로하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이러한 큰 행사 이외에도 지방관이 주관하는 크고 작은 연회에도 참석하여 흥을 돋우었고 연회가 끝난 뒤에는 잠자리에 배정되어 시침을 들었다. 양반 관료는 지방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기녀를 만나게 된다.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가족을 데려가도록 규정되었으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방관의 임기가 짧아져 가족을 데려간다는 것이 번거롭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 대신 첩을 대동하고 부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수령과 관기와 관계는 『대명률』의 ‘官吏宿娼律'로 규제되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지방관에게 관기가 제공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柳希春도 전라도관찰사로 여러 군현을 순행하는 동안 그 지역의 관기를 薦枕妓로 제공받았고, 대정현감으로 부임한 金仁澤도 부임하자마자 房妓를 제공받았다. 특히 김인택은 일정기간을 이들 방기와 생활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방기는 가족을 거느리지 않고 부임한 지방관의 ‘현지첩'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방기와 지방관과의 관계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으며, 이들 방기가 지방관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관아의 행정업무에 영향력을 행사 This study has seen the mean duty and operating status Gwangi, Gisaeng of local offices, seen from diary data. Gisaeng was the women who was dancing, singing, and offering sex in Joseon era. As a public existence belonging to national duty, they were the lowest class and the best entertainer at the same time. How to classify Gisaeng is various but it is divided into Gyeonggi belonging to Jangakwon and Gwangi belonging to local offices, according to position. There were 100∼300 Gyeonggis and 20∼26 Gwangis. Gisaeng system was settled best under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but only Gwangi of local office was remained after Gyeonggi system was demolished after Injobanjeong (1623). Gisaeng was selected from Gwangi based on charm and artistic talent. They were registered in the comprehensive list of government official in local offices. Their duties were prostitute, from 16 to 50 years old. 2) Gyeonggi served their duties in order of fixed sequence, like slaves of local offices. In other words, a team of 3 or 4 people took a turn for a certain time. It is presumed that private operation was available off duty. Gisaeng was selected before 16 years old, got education, and was located in the field. Master of Gisaeng was Haengsugi, representing them. Gisaeng has Gimyeong, a stage name, as well as Hyangmyeong, the original name. Hyangmyeong is literally coarse name of Gwanbi, while Gimyeong sees splendid and sexual appeal. Gisaeng could marry and give birth to their kids, which was very unstable since they needed to keep serving duty. They were disregarded although they dealt with noblemen. The first sex after being Gisaeng was called 'Sanggye,' which was considerable in their community. Gwangi and Gwanbi, the official slaves, shared duty and role. However, there was an order between them, and Gisaeng was forced to degraded to Gwanbi and was sent into exile if she had committed any crime. 3) Representative duty of Gwangi was dancing and singing to add the amusement at feasts, as a female musician. A large-scale feast was going on when an authentic recorder came to Jeonju as Myeongjong Authentic Record was completed. It was a habitual practice to encourage Gisaeng by presents. Besides such events, they took part in big and small feasts to add the entertainment, and served beds after events. 4) Noble officials generally met Gisaeng when they were appointed to a local office. How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ocal governor and Gwangi was regulated by ‘Gwanrisukchangryul' of Daemyeongryul . However, actually it was general to offer Gwangi to local governor. Yu Hichun was also offered by Gwangi serving bedtime affairs while he toured several regions as Jeollado provincial governor, while Kim Intaek was also treated with room Gisaeng named Banggi, as soon as he was took office for Daegeong-hyeon governor. Banggi was a ‘local concubine' of governor, with no accompanying family members. 5) Yu Hichun was in special relationship with Gwangju Gisaeng ‘Yeon' and Jeonju Gisaeng ‘Okgyeonga,' while he was serving as Jeollado governor. Okgyeonnga was his favorite lover of 31-year old woman, who was beautiful and good at singing. She served Yu Hichun's bed affairs, shared drinks, and enjoyed to the full whenever he arrived Jeonju. However, their relation was just ‘Flower Seeing' by all means, disconnected as change of governor. It was not rare to take them concubine after finishing the tenure of office. It was somewhat illegal, but possible when the Gwangi was registered as an assistant of Gyeonggi. As usual, husband's whoring was the main factor to cause troubles between married couple in the 16th century also. Yu Hichun finally caught disease by casual sexes with Gwangi, regardless of his wife's request to keep away feminine charms. However, that situation couldn't be resolved even by jealousy or envy. It was tough to go against the times with individual willing. However, it is very different from the image of wome

        • KCI등재

          利用厚生學派의 成立과 李喜經의 『雪岫外史』

          오수경(Oh Soo-kyeong) 대동한문학회 2003 大東漢文學 Vol.19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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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olsuoisa』 of Lee, Hee-kyung has not yet been known well in the country, the contents of this book are almost identical with that of 『Yeolhailgi』 or 『Bukhakui』 of Leeyonghusaeng school. However, there is a little difference in that two writers of these books usually have the so-called mercantilism thought which acts for the interests of municipal merchants·handicraftsmen, while this 『Seolsuoisa』 lays its theoretical foundation on physiocratism thought which takes an interest in the income enlargement for peasants through technical innovation in agriculture. Lee, Hee-kyung also has emphasized the life-ization of Leeyonghusaeng' science on the basis of the scientific cause 'Simmyungmulri', that is, “let's make the laws of things clear and then the life of the people abundant”, which shows a fragment of scientific thought by Yeonam et al. He went to China as many as 5 times with the intention of realizing this Leeyonghusaeng science, that is, to confirm its advanced civilization(institutions) in person, learn the principles and rules, and then to apply it to our actual life. The fact, that he wrote 『Nonggido』 or manufactured Yongmicha in person and put it to the test-running, seems to be a practice of Leeyonghusaeng will. Especially, while several agriculture-related theories written in 『Yeolhailgi』 or 『Bukhakui』 which contains the highest level theories of Leeyonghusaeng science are mostly empirical contents in China or the introduction of related writings in China and they were realized through practical farming experience in our country, 『Seolsuoisa』 of Lee, Hee-kyung has introduced his own agricultural theories obtained after purchasing paddy and dry field at Hongchon in Kangwon-do and tilling in person - through practical experiment of 『Gugeonbup』 or presentation of vivid agricultural theory in the field of life - which seems to be the fruits of making up for the theoretical vulnerability in 『Yeolhailgi』 or 『Bukhakui』. It can be confirmed from the fact that a theory about 'Gugeonbup' in 『Bukhakui』 or articles about farming tools mostly accepted the logic in Seolsuoisa of Lee, Hee-kyung as it was. This point is the characteristic aspect of the very 『Seolsuoisa』. Therefore, it seems that this book has succeeded to the scientific fruit of Leeyonghusaeng already achieved by Yeonam et al. to a certain extent, further developed it all the more in terms of theory. In addition, these characteristics have shown empirically that several practical schemes concerning Leeyonghusaeng science of Yeonam school group come to the one conclusion after going through joint discussion and work debate among the figures within the group. Finally it is confirmed that the 『Nonggidoseo』 of Lee, Hee-kyung has played the role of clearly carving, in the Korean Chinese literature history, the formation of Leeyonghusaeng school and the school succession of Yeonam school vein in the practical science thought history in the later Chosun period. 이희경(李喜經)의 『설수외사(雪岫外史)』는 그 동안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이 책의 내용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열하일기(熱河日記)』나 『북학의(北學議)』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앞선 두 저서가 대개 도시의 상인·수공업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른바 중상적 사상(重商的思想)을 띠고 있음에 반하여, 이 『설수외사』는 농업의 기술혁신을 통한 농민의 소득증대에 관심을 둔 중농적 사상(重農的思想)에 그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이희경 역시 '심명물리(深明物理)' 곧 “사물의 이법을 널리 밝게 연구하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자”는 과학적 사유를 그 근간으로 삼아 '이용후생'의 학문을 생활화할 것을 강조한 바, 이는 연암그룹의 과학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이용후생의 학문을 실현하기 위해 무려 다섯 차례나 중국에 들어갔다. 이는 그곳의 진보된 문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 이법을 배워 우리나라의 실생활에 직접 응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농기도(農器圖)』를 저술한 것이나 용미차(龍尾車)를 직접 제작하여 손수 시험운행한 사실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그 실천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용후생학의 최고의 이론수준을 담은 『열하일기』나 『북학의』에 기술된 농업에 관련된 여러 이론들이 대부분 중국에서 견문한 내용이나 중국측의 관련저술을 소개한 것이고 우리나라의 실제 영농경험을 통해 이루어지지 못했던 데 반하여, 이희경의 『설수외사』는 그 자신이 직접 강원도 홍천협에다 몇 뙈기의 논밭을 장만하여 이곳에서 자신의 농업이론-예컨대 구전법(區田法) 같은 것을 실제로 실험하기도 하여, 생활현장에서 경험한 생생한 농업이론을 제시한 것은,『열하일기』나 『북학의』의 이론적 취약성을 보완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학의』의 '구전법'에 관한 이론이나 농기구에 관한 조목들이 대개 이희경의 『설수외사』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바로 이와같은 면을 반영한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설수외사』의 특징적 면모다. 따라서 이 저서는 연암그룹이 기존에 성취한 이용후생의 학문성과를 일정하게 계승하면서 아울러 이론적인 면을 더욱 발전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찾아볼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연암그룹의 이용후생학에 관한 여러가지 실천방안들이 그룹내의 인물들 상호간에 공동의 논의와 연구·토론을 거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조선후기 실학사상사(實學思想史)에서 이용후생학파의 성립과 연암학맥(燕巖學脈)의 학파적 계승을 한국한문학사에 뚜렷이 각인하는 역할을 이희경의 『농기도서』는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KCI등재

          閔百順의 『大東詩選』 연구

          林奎完(Lim, Gyu-wan) 대동한문학회 2011 大東漢文學 Vol.3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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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시선집 『大東詩選』에 대한 연구다. 『海東詩選』을 증보한 『대동시선』은 우리 시선집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시선집이다. 존명배청사상이 이완되고 병세의식이 대두되던 18세기 시대상의 단면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대동시선』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당대 시단의 풍성한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적인 색채와 개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농암과 삼연 형제 및 그 유파들의 시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대동시선』에는 중국과의 친연성을 가지는 작가와 작품을 대폭 수록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문명의 東傳이라는 문화적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기자와 관련한 고가요와 신라, 고려의 국제적 인사들을 대거 부각하여 수록하였다. 셋째 당풍과 송풍, 7언 절구와 율시 등 시풍과 시체에서 비교적 균형감각을 가지고 안배하였으며 작품위주로 선발하여 객관적 설득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동시선』은 한중 문화 교류의 결정으로, 18세기 시사가 집약되어 있다. 이후 쏟아지는 한중 문사 교류 및 한중 통합 시선집의 先聲으로서 18세기를 이해하는 핵심적 키워드가 곧 『대동시선』인 것이다. This Thesis is about DaeDongSiSun(大東詩選) which is a representative anthology of poetry in 18th century. Revised and enlarged with HaeDongSiSun(海東詩選), DaeDongSiSun(大東詩選) is very important in our history of poems. This reflects what the 18th century is like-the idea of 尊明排淸 disappears and contemporary idea appears. The features of DaeDongSiSun(大東詩選) are as follows. First, It shows poetry achievements of the age, which leads to show characteristics of Josun Dynasty. NongAm, Samyoun brothers and those groups are in the stream of the times. Second, DaeDongSiSun(大東詩選) includes works of the China-friendly poets, through which it shows that people feel equal with china and proud of being newly cultural source. GiJa' poems and those of Silla and Gogureu' celebrities are included. Third, the poems of the time of Dang and Song, 7unjulgu(7言絶句) and ulsi(律詩) and others are equally collected and registered. DaeDongSiSun(大東詩選), the integration of 18th history of poems, is the fruit of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ea and China. This is the first step of many books about cultural exchange between two nations.

        • KCI등재

          菱洋 朴宗善의 <小江南曲> 연구

          최고경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19 大東漢文學 Vol.60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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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sun jukjisa is a form of jukjisa that departs from the previously established tradition of the genre modelled on Chinese jukjisa by placing its focus on regions in Korea. Beginning with the works of Kim Jong-jik, the composition of early Chosun jukjisa was sporadic and dealt with one of the following three themes: romantic love between a man and a woman, history and local customs. Later,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as the works grew longer and notes were added to the works containing detailed information about each respective region, the regional guide-like quality of Chosun jukjisa became more pronounced. However, the Suncheon jukjisa Sogangnamgok by Park Jong-sun is notable for its divergence from this typical trend of later Joseon jukjisa. Sogangnamgok is a work that candidly depicts the riotous frolicking that was enjoyed in the company of gisaeng in Suncheon's gyobang. Park Jong-sun regarded ‘leisure' as Suncheon's main local characteristic and sang freely of the leisure, amusements and landscape captured in that region. These songs reflect the influence of the Gangnam fad popularized by contemporary artists, and works by other writers which also emphasized the playful spirit of Suncheon, Park Jong-sun's interest in yeomjungsi and characteristics of the social identity of the concubine. It is these factors that inspired Park Jong-sun to compose the new popular song of the Honam region Sogangnamgok, which is characterized by its ‘playfulness'. Another feature of this song is its strong musicality, heightened by the deliberate inclusion of musical elements taken from the likes of akbusi, songs about love between a man and a woman, and the music of gyobang. Like this, in comparison to the trend of contemporary jukjisa which merely faithfully relayed information about various regions, Sogangnamgok is an attempt to combine the late Joseon jukjisa form with a sense of playfulness and musicality, and is therefore a valuable resource that shows us a different form of late Joseon jukjisa. 조선 죽지사는 이전까지 중국의 죽지사를 모의했던 전통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지역을 표면에 내세우며 출범한 양식이다. 이는 초창기에 김종직을 시작으로 남녀 간의 사랑, 역사, 풍속 세 가지 모습을 지니면서 간헐적으로 창작되다가 조선후기로 가면서 편폭이 길어지고 지방의 세세한 정보를 담은 주석이 다량 첨부되면서 지방지로서의 성격이 강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문인 박종선의 순천 죽지사 <소강남곡>은 이러한 조선 후기 죽지사의 일반적인 흐름과는 상이한 면모를 보여 주목된다. <소강남곡>은 순천의 교방을 배경으로 그곳 기생들과의 질탕한 풍류를 가감 없이 담아낸 작품이다. 박종선은 순천의 지역적 특성을 ‘풍류'로 간주하고 이곳에서 포착되는 유흥과 향락의 풍경을 자유롭게 노래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던 중국의 강남 열풍, 순천의 풍류를 강조한 여타 문인들의 작품들, 박종선의 염정시에 대한 관심과 서얼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특징 등이 반영되어 있다. 박종선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들에 힘입어 ‘풍류'적 성격의 새로운 호남 지역 유행가 <소강남곡>을 창작한 것이다. 남녀 간의 연정을 소재로 한 악부시나 교방의 풍악소리 등 음악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삽입함으로써 가창성을 강하게 드러낸 것도 특징이다. 요컨대 <소강남곡>은 지방의 정보를 충실히 담아내는 데에 치중했던 당대 죽지사의 흐름과 달리 풍류와 음악성이 겸비된 조선 후기 죽지사의 또 다른 형태를 시도하고자 했던 것으로, 조선 후기 죽지사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 KCI등재

          靑莊館全書를 통해 재구한 李德懋 초기 삶의 궤적

          권정원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21 大東漢文學 Vol.66 No.-

          This thesis examined the trajectory of Lee Duk~moo's early life through the work in Chungjangkwan Junseo . The period of writing of the work was investigated and listed sequentially, and the aspects of life that can be examined through the work were summarized. In this paper, I focused on the early life up to the age of 27, a formative period of Lee Deok~moo's literature. First, The period of writing of the work was investigated and listed sequentially. And I looked at the characteristics of life that can be seen through the work. Especially, I focused on his writing activities. The characteristic aspects of the work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ree periods. First, from 17 to 19 years old. Lee Deok~moo lived in his uncle Park Soon~won's house. During this period, because of Lee Deok~moo began to write works, the amount of works was small and the level was not high. Second, from 20 to 24 years old. Lee Deok~moo lived under Namsan Mountain. During this period, His friendship and writing activities were the most active. Third, from 25 to 27 years old. During this period, there were not many writing activities. There are only Yimokgusimseo(耳目口心書) and a few letters to his friends and a few poems. This is because Lee Deok~moo' mother died on May 1, 1765, and he took care of his mother's illness before that. So it was difficult for him to do professional writing with a purpose. Yimokgusimseo is a record of what you hear with your ears, see with your eyes, speak with your mouth, and feel with your heart. And the letter is a message of regards to his friends. Therefore, it was the best writing activity that Lee Deok~moo could do after losing his mother. During this period, His friendship continued to be connected with his former friends, most of whom were seoeol(庶孼) writers. 본고는 靑莊館全書 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이덕무 초기 삶의 궤적을 살펴보았다. 작품의 저술시기를 考究하여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작품을 통해 살필 수 있는 삶의 특징적 면모를 서술하였다. 李德懋(1741~1793)는 53년 생애를 살았는데, 그동안 71권 33책의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이를 통해 그의 전 생애를 살피기엔 지면상 한계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이덕무 문학의 형성기라 할 수 있는 27세까지의 초기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이덕무의 생애를 살필 수 있는 기초 자료인 <年譜>는 그의 아들 이광규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대체로 39세 검서관 벼슬을 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하지만, 그 이전 시기에 https:/ 대해서는 대단히 소략하다. 그리고 이덕무는 연암일파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덕무가 연암을 만난 것은 28세 때이다. 따라서 이덕무 28세 이전의 작품은 연암과 무관하게 창작된 것이고, 이는 이덕무의 문학관이 연암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덕무 문학의 형성 배경으로서의 이덕무의 삶을 살피고자 한다면, 연암을 만나기 이전 시기에 대해 보다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본고는 27세까지의 작품의 저술 시기를 고구하여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이를 통해 살필 수 있는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저술과 교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편의상 세 시기로 나눠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7세부터 19세까지로, 이덕무 저술 활동이 시작되었던 시기이다. 이덕무의 유년 시절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외숙 박순원의 집에 우거하던 시기로, 詩作이 시작되었다. 산문으로는 <鵲巢上樑文>과 <戊寅篇>이 있고, 시는 66수 정도가 있다. 저술활동을 시작하는 단계였으므로, 저술의 분량도 많지 않고 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것은 아닌 듯하다. 교유는 內弟 박종산, 姨弟 여좌백, 妻男 백동좌, 백동수와 친분이 두터웠다. 둘째, 20세부터 24세까지로, 남산 아래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덕무의 교유와 저술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19세까지 박순원의 집에 우거하던 이덕무는 20세에 남산 아래 장흥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교유는 이웃에 거주하던 남홍래, 남명래, 정자성과 이형상, 윤가기, 이명오, 박종산, 서찬수, 이광석, 윤경지 등 詩會를 하던 문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시회를 열고, 담론을 즐기며, 함께 유람을 하고, 서로 시문과 서문, 기문 등을 주고받는 등 교유도 확대되고, 저술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셋째, 25세부터 27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저술활동이 많지 않았다. 단지 <이목구심서>와 벗들에게 보내는 척독, 그리고 약간 편의 시가 있을 뿐이었다. 이덕무는 1765년 5월 1일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이전부터 어머니 병간호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목적성을 가진 전문 저술을 하는 것은 형편상 어려웠다. <이목구심서>는 듣고 보고 말하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쓴 글이고, 척독은 벗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빠진 이덕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술 활동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목구심서>에서 이덕무의 일상과 독서, 그리고 벗들과의 교유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유는 이전 벗들과 지속적으로 이어졌는데, 대부분이 서얼 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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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日 儒學史에 나타난 ‘古學'의 차이-오규소라이・이토진사이・허목・조익의 예를 중심으로-

          강지은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19 大東漢文學 Vol.61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This study is based on the writer's question whether the viewpoint of Western studies plays a substantial role in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East Asian Confucianism. It is fair to say that the pursuit of the “ancient (Go古)” i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in Joseon Korea and Tokugawa-Japan, was not an unconditional pursuit of the “Go,” but was undertaken in a way to support the scholars own views. But, their efforts were aimed at neither breaking down nor supporting existing authority. While both are in a tradition of Confucian history, they have much to do with the development of Confucianism in each society of Korea and Japan. The biggest difference is that there was a civil service exam system in Korea, but Japan did not have one. Tokugawa Japan's “Ko-gaku (古學)” generally sought to restore the original “Go”, arguing that the commentaries of the later days should be left out completely and the ancient texts be studied directly. Meanwhile, under the realistic premise that it is impossible to restore the “original” “Go” texts and contexts, Joseon Confucian scholars sought to better understand “Go” by referring to commentaries that were a little closer in time to “Go”. This concession was related to the need for a clear understanding of the present Confucian texts by being well-versed in commentaries as references for administering the civil service exams. These are the basic differences between the Joseon and Tokugawa Confucian scholars, but not many of these differences were significant as challenges to the current authority. In the former case, there was no such authority that should be destroyed (e.g., Zhuzi Studies as a ruling ideology), and in the latter case, it was a way to understand “Go” while working with the existing authority. 본고는, 동아시아 유학사에 대한 이해 속에는, 상당한 비중으로 서양학술의 관점이 녹아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필자의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일 유학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에 대한 추구는 널리 알려진 대로 ‘고'를 무조건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견해를 제출하는 방법으로서 ‘고학'을 표방한 것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 자체는 기존의 권위를 타파하거나 높이려는 것에 있지 않았다. 양자 모두 ‘고'를 존중하는 유학사적 전통 속에 있으면서도, 한일의 각 사회에서 유학의 발전, 지위 및 그 토대가 되는 과거제도의 유무와 큰 관련이 있다. 도쿠가와 일본의 ‘고학'은 대체로 ‘고'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을 추구하여, 후대의 주소는 이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서 전면적으로 배제하고 직접 경서를 마주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에서는 ‘고'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전제 속에서 ‘고'에 조금 더 가까웠던 시대의 주소들을 참조하여 ‘고'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하였다. 과거제도가 존재하는 지역에서 현행의 경서를 보다 명백히 이해하고 주소를 섭렵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과 상관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있으나, 양자 모두 현행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의미지울 만한 부분은 많지 않다. 전자의 경우 파괴해야하는 권위라고 할 만한 것 (예컨대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주자학 등)이 존재하지 않았고, 후자의 경우 기존의 권위를 사용하면서 ‘고'를 이해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KCI등재

          <閔翁傳>의 ‘민옹-화자'의 교유 - 孟子 의 교우관과 비교를 겸하여-

          심은경,김원중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21 大東漢文學 Vol.66 No.-

          This description contemplates ‘Yunam Pak Chiwon's friendship discussion' shown in Yunam's early prose. Specifically in the passage from a preface in Minongjeon. Precedent's writings, Menicius Selection <Teng Wen Gong 上> 5.4 ・<Li Lou 上> 7.12, heavily influenced Yeonam's preface on a discussion on ‘trust', Mencius's present outlook on equality and friendship was that they should be reciprocal. Particularly in <Wan Zhang 下 10.3>, Mencius emphasized that age, class, family, and etc, are insignificant in making a friend, a perspective that had crucial role to Yunam's view on friendship. By all means, Yunam's perception of friendship can be examined from the records from <會友錄序>・<繪聲園集跋>・<答洪德保書 第二>, and the preface of his earlier work Bangkyeong-gak Oejeon had already revealed his definition of ‘friendship' and further affirmed the author's torturous contemplation of an ideal young friendship. Moreover, Mencius's perspective of equal and dignified friendship is reconstructed through Minongjeon's reckoning on thoughts on the necessary virtue in individual friendship of contemporary men buried under materialistic consequentialism. Considering the formal attributes to ‘friendship', difference and similarities in Mencius and Minongjeon's motif of friendship become clear. 본고는 연암의 초기 산문 <閔翁傳>에 나타난 ‘연암의 우정 담론'을 고찰한 것으로, <閔翁傳>의 典故 중의 하나인 孟子 의 교우관과 관련된 구절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연암은 <自序>의 ‘信'에 관한 담론에 영향을 준 전고로 孟子 <滕文公 上> 5.4 ・<離婁 上> 7.12 등을 제시하여 <自序>의 典故는 孟子 의 평등적 사고관에 따른 우정관까지 소급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孟子 <萬章 下> 10.3에서 나이, 귀천, 가문 등이 벗을 사귀는 도리에서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어 孟子 야말로 연암의 우정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물론 <會友錄序>・<繪聲園集跋>・<答洪德保書 第二> 등 연암의 기록물을 통해서도 연암의 ‘우정관'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미 그의 초기작 放璚閣外傳 全面에 ‘우정'에 대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고, 젊은 시절의 ‘우정'에 대한 깊은 고뇌가 녹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閔翁傳>은 ‘민옹-화자'구도의 사건의 전개의 긴밀성 및 문답식 서술 구조, 신분을 초월한 평등한 교우관 등에서 孟子 의 전고를 십분 활용하여 젊은 시절 우정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아울러 ‘우정'이라는 속성 고찰을 통해, 孟子 의 ‘우정' 모티브와 <閔翁傳>의 ‘우정' 모티브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규명했다. 요컨대 孟子 로부터 이어온 우정에 대한 평등적・존엄적 사고는 <閔翁傳>이라는 작품을 통해 재구성되어 물질만능의 결과주의에 매몰된 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개인 간의 우정에 대한 단상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으로 사료된다.

        • 고려후기 淸州郭氏 家門의 시세계 연구-곽예와 곽운의 경우-

          ,,,,,,,,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02 大東漢文學 Vol.16 No.-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investigate the poetries from Kwak's family of Chungju in the latter years of the Koryo Era. Kwak's family of Chungju had prospered early in the Koryo era and developed into a powerful family after the later thirteenth century. Kwak-ye won the first place in the state examination in Kojong king's days and “Sangyeon(賞蓮)” whose he had written got praised or ridiculed by people. He egged the Weon empire of the old Mongolian country on to fight with Japan and conquer it and criticized a pro-Weon group(「感渡海」) and also gave a scolding for a weak spirit of the intelligentsia who neglected their duties of criticism.(「壽康宮觀獵」). And, he has also struck out a path of vital spirit through the changes of the natural scenery in a spring day and an early summer.(「東郊馬上」, 「初夏」) The present writer thought that although the line of his sight was staying at a stage of roundabout and leisure path, yet his poetry spoke for the strain of the intelligentsia paradoxically at that time. He, Kwak-woon, greatgrandson of Kwak-ye has written the poem to hope a pure heart(淸) as an ultimate stage in his heart (「思舊山」) to imitate the virtues of homecoming after one's resignation from a government office called “Guegeorae(歸去來)” written by Do-yeonmyong(陶淵明). “Chung” is sung up to a state of nature as well as personalities. It seems that the poetic world both Kwak-woon and Kwak-ye represented the appearances of other life style to differ from devoting theirselves to society and country through their attitude of mind with reality and actuality as the intelligentsia at that time. It is appreciated to be interested in that if all could keep a survival power of a sense of sovereignty.

        • KCI등재

          『靑坡劇談』의 文獻的 檢討

          李來宗(Lee, Rae-jong) 대동한문학회 2011 大東漢文學 Vol.34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靑坡集』은 靑坡 李陸이 남긴 詩文集으로써 저자의 死後 아들 李嶮에 의해 1512년에 최초로 刊行이 이루어졌다. 現存本이 극히 드문 이 初刊 『靑坡集』에는 권1에 詩가 수록되어 있고 권2에 『靑坡劇談』이 수록되어 있다. 이 初刊本 文集은 글자 모양이 고졸하며 문자 간격이 널찍하게 판각되어 있어 조선전기 목판본으로서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고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靑坡劇談』은 이런 類로서는 드물게 文藝美의 獲得에 성공하고 있어 독자들의 애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독자나 연구자들은 初刊本에 所載한 『靑坡劇談』을 간과한 채 후대에 필사된 『大東野乘』 所載本을 그 대본으로 삼고 있어 眞面目을 살피는데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제 초간본을 살펴보면 이 筆記集에는 총 95話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 대부분은 逸話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稗說類 筆記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실은 15세기는 野史의 저술을 禁忌視하던 시대였다. 그에 따라 당시 여타의 필기류 곧 『太平閑話滑稽傳』나 『慵齋叢話』등과 마찬가지로 稗說에 속하는 이야기가 그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Cheongpa-jib” is a poetry collection written by Cheongpa Yi Yuk. It had been first published by his son Yi Heom in 1512 after Yi Yuk had passed away. There are only few books left of this first edition Cheongpa-jib. In Vol. 1, there are poems. In Vol. 2, there is the “Cheongpa Geukdam”. This first edition literary collection has quite modest and simple fonts. Together with wide distance between characters, this edition shows the characteristic and beauty of woodblock-printing during early Joseon dynasty. “Cheongpa Geukdam” is the subject of this study. “Cheongpa Geukdam” is an extraordinary literary work that achieved both the beauty of literary art and the ardent support of the readers. However, till today, most of readers and researchers have been referring to the “Daedong Yaseung” article-edition instead of the first edition of Cheongpa-jib for Cheongpa Geukdam. Daedong Yaseung is the hand-copied version of Cheongpa Geukdam that was made much later. Therefore, there have been limitations in exploring the real characteristics of Cheongpa Geukdam till today. Cheongpa Geukdam in the first edition of Cheongpa-jib carries total 95 stories. Most of them are anecdotes. Therefore, it is possible to define Cheongpa Geukdam as a gossip collection. However, in fact, the writing of unofficial history was banned at the time and that is why gossip collections such as “Taepyeong Hanhwa Golgye Jeon” or “Yongjae Chonghwa” were quite popular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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