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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詠史樂府의 『西涯擬古樂府』 受容과 한민족사의 시적 형상

          金榮淑(Kim, Young-sook) 대동한문학회 2011 大東漢文學 Vol.3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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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사람 이동양(1447∼1516)은 많은 관직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문장과 시를 잘해 ‘다릉시파'의 큰 종장이었다. 그는 『서애의고악부』가 포함된 『회록당집』 100권을 지은 명나라의 중추적인 문인이며 시인이다. 특히 전대와 다른 새로운 체제와 역사적 소재로서 『서애의고악부』를 지어 전대와 다른 악부시의 형상을 나타냈다. 101수의 모든 작품이 ‘제목-사화-원시-사론'의 구성을 하고 있으며, 모든 시들이 역사를 노래한 것이다. 작가가 지은 동기는 옛날 악부가 후대로 오면서 옛 법도나 관례를 답습하고 본 뜻을 회복하지 못하기에 이 폐단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옛 악부의 유풍을 잇는다는 뜻에서 ‘의고악부'라 했지만 역사를 읊었다는 의미로 보면 ‘영사악부'이다. 『서애의고악부』는 1516년 명나라에서 간행한 후 60여년 뒤에 조선에서 이를 수입하여 ‘재주갑인자'로 간행했으며, 후에 목판본으로도 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상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초판이 불타 없어졌지만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간행본이 여러 곳에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영사악부작가들은 『서애의고악부』를 수용하여, 체제를 본받아 민족사를 소재로 한 악부시로 형상하였다. 시집명에 ‘해동' ‘동국' ‘대동' ‘기동' 등의 명칭을 붙인 악부시를 많이 지었다. 이것은 한민족사를 읊은 노래시므로 한국적 ‘영사악부'이다. 심광세(1577~1624)의 『해동악부』, 조현범(1716~1790)의 『강남악부』, 이복휴(1729~1800)의 『해동악부』, 이광사(1705~1777)의 『동국악부』, 권도용(1877~1963)의 『천령악부』등은 작품 서발문에서 『서애의고악부』 체제를 본받아 악부시를 지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10여명의 작가들 작품이 『서애의고악부』를 위시한 전대의 영사악부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의 공통성은 한민족사를 소재로 채택하여 『서애의고악부』의 ‘제목-사화-시' 체제를 본받아 자유로운 악부시 표현법으로 다양한 시적형상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민족사에 대한 자각, 다양한 시체의 변모, 노래시의 범위 확대, 영사악부의 개념인식, 조선의 중국시집 간행과 보급 등의 의의를 지닌다. Lee Dong-yang(李東陽, 1447~1516), who is a person of the Myung dynasty, was promoted to prime minister after passing through many government posts, and was a great master of ‘Dareungsipa(茶陵詩派: poetic sect of Dareung region)' because of being good at sentence and poetry. He is a pivotal literary man and a poet in the Ming dynasty due to composing 100 volumes of 『Hoerokdangjip(悔麓堂集)』 in which he was included. Especially, he composed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with new system and historical materials different from the former generations, thereby having indicated the image of song poem different from the former generations. All works of 101 pieces are forming ‘theme-historical storypoem-historical criticism.' All poems are what sang history. A motive, for which the writer composed, aimed to remove this negative effect because the old Akbu (樂府) followed old law or custom and failed to recover the original meaning while coming to future generations. Thus, it was called as ‘Uigoakbu(擬古樂府)' in a meaning of following the old custom, but is Yeongsaakbu(詠史樂府: poem of having sung history) given seeing it with a meaning of having recited history. It was published in the Ming dynasty in 1516, was imported by Joseon following about 60 years, and was issued as ‘Jaejugapinja(再鑄甲寅字),' was printed even with a block book later, and was read and appreciated by many people. After then, the first edition was burnt to have been gone in China. However, in Korea, the published book in Joseon period is being delivered in many places. Writers of Yeongsaakbu in the late Joseon accepted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and made it image as a song poem with having the racial history as material instead of following system. Many song poems were composed, which attached names such as ‘Haedong' ‘Dongguk' ‘Daedong' ‘Gidong' to the name for collection of poems. This is a song poem that recited history of the Korean race, thereby being Korean-styled ‘Yeongsaakbu(詠史樂府)'. Sim Gwang-se(沈光世, 1577~1624)'s 『Haedongakbu(海東樂府)』, Jo Hyeon-beom(趙顯範, 1716~1790)'s 『Gangnamakbu(江南樂府)』, Lee Bok-hyu(李福休, 1729~1800)'s 『Haedongakbu』, Lee Gwang-sa(李匡師, 1705~1777)'s 『Donggukakbu(東國樂府)』, and Gwon Do-yong(權道溶, 1877~1963)'s 『Cheonryeongakbu(天嶺樂府)』clarified to have composed song poem by following a system with being influenced by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Seobalmun(序跋文) of a work. The others ten Writers can be considered to have been composed by the influence of Yeongsaakbu(詠史樂府) in the former generations including 『Seoaeuigoakbu(西涯擬古樂府)』. Commonality in these things is what adopted the history of the Korean race as material, followed the system of ‘theme-historical story-poem,' and made diverse poetic images with free song-poem expression method. This phenomenon has significances such as the perception on the history of the Korean race, the transformation into diverse verse styles, the expansion in range of song poem, the recognition of a concept in Yeongsaakbu(詠史樂府), and the publication & supply of Chinese collection of poems in Joseon.

        • KCI등재

          일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妓女의 立役과 運用

          이성임 (Lee, Seongy-im) 대동한문학회 2009 大東漢文學 Vol.30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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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16세기에서 19세기 초반까지의 일기자료를 통해 妓女의 立役과 기녀제의 運用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기녀는 조선시대에 춤추고 노래하고 성을 제공하던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國役體系속에서 역을 담당하던 자들이다. 기녀는 妓籍(官案)에 등록되어 國役에 편성된 공적인 존재로 최하층 여성인 동시에, 최고의 예능인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였다. 기녀를 구분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소속처에 따라 장악원에 속한 京妓와 營鎭을 비롯한 地方郡縣에 소속된 官妓로 구분하여야 한다. 기녀의 규모는 국가의 여악정책과 성리학의 심화정도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京妓는 100~300명에 이르렀으며 官妓는 20~60명 정도였다. 기녀제도는 연산군대에 가장 안정적으로 정착되었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여악이 정면으로 비판받게 되면서 京妓가 혁파되자(1623) 지방관아의 관기만 남게 되었다. 기녀의 충원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官婢중에서 姿色과 才藝를 기준으로 선발하게 되어 있었다. 관기는 넓은 의미의 관비로 관노, 관비, 기녀가 지방관아의 官案에 함께 등재되어 있다. 이들은 公的인 존재로 일정한 역을 담당하는데 이는 妓役이라 하는데, 기역은 16세에서 50세까지 담당하였다. 京妓는 寺奴婢와 마찬가지로 立番制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3인이나 4인이 하나의 條를 이루어 일정한 기간씩 돌아가면서 입번하였다. 즉 3인1조인 경우 한 사람이 6개월을 立番하면 나머지 12개월은 非番으로서 쉬게 되는데 결국 京妓의 奉足이란 非番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번 기간에는 개인적인 사설 영업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목재일기」에 존재하는 妓家가 기녀가 운영하는 사설영업장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녀는 16세부터 역을 담당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 뽑아 敎房을 통해 교육을 받은 다음 현장에 배치되었다. 기녀 중의 우두머리를 行首妓라 하는데, 행수기는 기녀의 대표성을 지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였다. 기녀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을 鄕名이라 하고 나중에 붙여진 이름을 妓名이라 하였다. 기명은 일종의 예명인 것이다. 유희춘이 자신과 관계한 기녀를 향명과 기명을 섞어서 부른다는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향명은 그야말로 투박한 관비병이며, 기명은 화려하고 성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특성을 가진다. 기녀는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혼인 이후에도 이들의 役은 지속되어서 혼인은 해소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기녀가 상대하는 계층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우 천시되어 같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기녀가 되어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는 상대를 ‘上笄' 라고 하는데, 이는 일종의 성년식과 같은 것으로, 이들에게는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이었다. 관기와 관비는 담당하는 기능과 역할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기와 관비 사이에도 일정한 위계가 존재하였으며, 기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관비로 降定될뿐만 아니라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죄목은 자신의 본업을 충실히 거행하지 않은 데에 있었다. 3) 관기의 대표적인 업무 중의 하나가 女樂으로 연회에서 춤추고 노래하여 흥을 돋우는 것이다. 『명종실록』이 완성되어 실록봉안사가 전주에 내려왔을 당시에도 기녀가 참석한 성대한 연회가 며칠에 걸쳐서 지속되었다. 지방관이 이러한 행사에 참석한 기녀에게 선물을 지급하여 수고를 위로하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이러한 큰 행사 이외에도 지방관이 주관하는 크고 작은 연회에도 참석하여 흥을 돋우었고 연회가 끝난 뒤에는 잠자리에 배정되어 시침을 들었다. 양반 관료는 지방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기녀를 만나게 된다.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가족을 데려가도록 규정되었으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방관의 임기가 짧아져 가족을 데려간다는 것이 번거롭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 대신 첩을 대동하고 부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수령과 관기와 관계는 『대명률』의 ‘官吏宿娼律'로 규제되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지방관에게 관기가 제공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柳希春도 전라도관찰사로 여러 군현을 순행하는 동안 그 지역의 관기를 薦枕妓로 제공받았고, 대정현감으로 부임한 金仁澤도 부임하자마자 房妓를 제공받았다. 특히 김인택은 일정기간을 이들 방기와 생활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방기는 가족을 거느리지 않고 부임한 지방관의 ‘현지첩'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방기와 지방관과의 관계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으며, 이들 방기가 지방관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관아의 행정업무에 영향력을 행사 This study has seen the mean duty and operating status Gwangi, Gisaeng of local offices, seen from diary data. Gisaeng was the women who was dancing, singing, and offering sex in Joseon era. As a public existence belonging to national duty, they were the lowest class and the best entertainer at the same time. How to classify Gisaeng is various but it is divided into Gyeonggi belonging to Jangakwon and Gwangi belonging to local offices, according to position. There were 100∼300 Gyeonggis and 20∼26 Gwangis. Gisaeng system was settled best under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but only Gwangi of local office was remained after Gyeonggi system was demolished after Injobanjeong (1623). Gisaeng was selected from Gwangi based on charm and artistic talent. They were registered in the comprehensive list of government official in local offices. Their duties were prostitute, from 16 to 50 years old. 2) Gyeonggi served their duties in order of fixed sequence, like slaves of local offices. In other words, a team of 3 or 4 people took a turn for a certain time. It is presumed that private operation was available off duty. Gisaeng was selected before 16 years old, got education, and was located in the field. Master of Gisaeng was Haengsugi, representing them. Gisaeng has Gimyeong, a stage name, as well as Hyangmyeong, the original name. Hyangmyeong is literally coarse name of Gwanbi, while Gimyeong sees splendid and sexual appeal. Gisaeng could marry and give birth to their kids, which was very unstable since they needed to keep serving duty. They were disregarded although they dealt with noblemen. The first sex after being Gisaeng was called 'Sanggye,' which was considerable in their community. Gwangi and Gwanbi, the official slaves, shared duty and role. However, there was an order between them, and Gisaeng was forced to degraded to Gwanbi and was sent into exile if she had committed any crime. 3) Representative duty of Gwangi was dancing and singing to add the amusement at feasts, as a female musician. A large-scale feast was going on when an authentic recorder came to Jeonju as Myeongjong Authentic Record was completed. It was a habitual practice to encourage Gisaeng by presents. Besides such events, they took part in big and small feasts to add the entertainment, and served beds after events. 4) Noble officials generally met Gisaeng when they were appointed to a local office. How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ocal governor and Gwangi was regulated by ‘Gwanrisukchangryul' of Daemyeongryul . However, actually it was general to offer Gwangi to local governor. Yu Hichun was also offered by Gwangi serving bedtime affairs while he toured several regions as Jeollado provincial governor, while Kim Intaek was also treated with room Gisaeng named Banggi, as soon as he was took office for Daegeong-hyeon governor. Banggi was a ‘local concubine' of governor, with no accompanying family members. 5) Yu Hichun was in special relationship with Gwangju Gisaeng ‘Yeon' and Jeonju Gisaeng ‘Okgyeonga,' while he was serving as Jeollado governor. Okgyeonnga was his favorite lover of 31-year old woman, who was beautiful and good at singing. She served Yu Hichun's bed affairs, shared drinks, and enjoyed to the full whenever he arrived Jeonju. However, their relation was just ‘Flower Seeing' by all means, disconnected as change of governor. It was not rare to take them concubine after finishing the tenure of office. It was somewhat illegal, but possible when the Gwangi was registered as an assistant of Gyeonggi. As usual, husband's whoring was the main factor to cause troubles between married couple in the 16th century also. Yu Hichun finally caught disease by casual sexes with Gwangi, regardless of his wife's request to keep away feminine charms. However, that situation couldn't be resolved even by jealousy or envy. It was tough to go against the times with individual willing. However, it is very different from the image of wome

        • KCI등재

          利用厚生學派의 成立과 李喜經의 『雪岫外史』

          오수경(Oh Soo-kyeong) 대동한문학회 2003 大東漢文學 Vol.19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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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olsuoisa』 of Lee, Hee-kyung has not yet been known well in the country, the contents of this book are almost identical with that of 『Yeolhailgi』 or 『Bukhakui』 of Leeyonghusaeng school. However, there is a little difference in that two writers of these books usually have the so-called mercantilism thought which acts for the interests of municipal merchants·handicraftsmen, while this 『Seolsuoisa』 lays its theoretical foundation on physiocratism thought which takes an interest in the income enlargement for peasants through technical innovation in agriculture. Lee, Hee-kyung also has emphasized the life-ization of Leeyonghusaeng' science on the basis of the scientific cause 'Simmyungmulri', that is, “let's make the laws of things clear and then the life of the people abundant”, which shows a fragment of scientific thought by Yeonam et al. He went to China as many as 5 times with the intention of realizing this Leeyonghusaeng science, that is, to confirm its advanced civilization(institutions) in person, learn the principles and rules, and then to apply it to our actual life. The fact, that he wrote 『Nonggido』 or manufactured Yongmicha in person and put it to the test-running, seems to be a practice of Leeyonghusaeng will. Especially, while several agriculture-related theories written in 『Yeolhailgi』 or 『Bukhakui』 which contains the highest level theories of Leeyonghusaeng science are mostly empirical contents in China or the introduction of related writings in China and they were realized through practical farming experience in our country, 『Seolsuoisa』 of Lee, Hee-kyung has introduced his own agricultural theories obtained after purchasing paddy and dry field at Hongchon in Kangwon-do and tilling in person - through practical experiment of 『Gugeonbup』 or presentation of vivid agricultural theory in the field of life - which seems to be the fruits of making up for the theoretical vulnerability in 『Yeolhailgi』 or 『Bukhakui』. It can be confirmed from the fact that a theory about 'Gugeonbup' in 『Bukhakui』 or articles about farming tools mostly accepted the logic in Seolsuoisa of Lee, Hee-kyung as it was. This point is the characteristic aspect of the very 『Seolsuoisa』. Therefore, it seems that this book has succeeded to the scientific fruit of Leeyonghusaeng already achieved by Yeonam et al. to a certain extent, further developed it all the more in terms of theory. In addition, these characteristics have shown empirically that several practical schemes concerning Leeyonghusaeng science of Yeonam school group come to the one conclusion after going through joint discussion and work debate among the figures within the group. Finally it is confirmed that the 『Nonggidoseo』 of Lee, Hee-kyung has played the role of clearly carving, in the Korean Chinese literature history, the formation of Leeyonghusaeng school and the school succession of Yeonam school vein in the practical science thought history in the later Chosun period. 이희경(李喜經)의 『설수외사(雪岫外史)』는 그 동안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이 책의 내용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열하일기(熱河日記)』나 『북학의(北學議)』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앞선 두 저서가 대개 도시의 상인·수공업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른바 중상적 사상(重商的思想)을 띠고 있음에 반하여, 이 『설수외사』는 농업의 기술혁신을 통한 농민의 소득증대에 관심을 둔 중농적 사상(重農的思想)에 그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이희경 역시 '심명물리(深明物理)' 곧 “사물의 이법을 널리 밝게 연구하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자”는 과학적 사유를 그 근간으로 삼아 '이용후생'의 학문을 생활화할 것을 강조한 바, 이는 연암그룹의 과학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이용후생의 학문을 실현하기 위해 무려 다섯 차례나 중국에 들어갔다. 이는 그곳의 진보된 문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 이법을 배워 우리나라의 실생활에 직접 응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농기도(農器圖)』를 저술한 것이나 용미차(龍尾車)를 직접 제작하여 손수 시험운행한 사실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그 실천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용후생학의 최고의 이론수준을 담은 『열하일기』나 『북학의』에 기술된 농업에 관련된 여러 이론들이 대부분 중국에서 견문한 내용이나 중국측의 관련저술을 소개한 것이고 우리나라의 실제 영농경험을 통해 이루어지지 못했던 데 반하여, 이희경의 『설수외사』는 그 자신이 직접 강원도 홍천협에다 몇 뙈기의 논밭을 장만하여 이곳에서 자신의 농업이론-예컨대 구전법(區田法) 같은 것을 실제로 실험하기도 하여, 생활현장에서 경험한 생생한 농업이론을 제시한 것은,『열하일기』나 『북학의』의 이론적 취약성을 보완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학의』의 '구전법'에 관한 이론이나 농기구에 관한 조목들이 대개 이희경의 『설수외사』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바로 이와같은 면을 반영한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설수외사』의 특징적 면모다. 따라서 이 저서는 연암그룹이 기존에 성취한 이용후생의 학문성과를 일정하게 계승하면서 아울러 이론적인 면을 더욱 발전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찾아볼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연암그룹의 이용후생학에 관한 여러가지 실천방안들이 그룹내의 인물들 상호간에 공동의 논의와 연구·토론을 거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조선후기 실학사상사(實學思想史)에서 이용후생학파의 성립과 연암학맥(燕巖學脈)의 학파적 계승을 한국한문학사에 뚜렷이 각인하는 역할을 이희경의 『농기도서』는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KCI등재

          閔百順의 『大東詩選』 연구

          林奎完(Lim, Gyu-wan) 대동한문학회 2011 大東漢文學 Vol.35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이 논문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시선집 『大東詩選』에 대한 연구다. 『海東詩選』을 증보한 『대동시선』은 우리 시선집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시선집이다. 존명배청사상이 이완되고 병세의식이 대두되던 18세기 시대상의 단면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대동시선』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당대 시단의 풍성한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적인 색채와 개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농암과 삼연 형제 및 그 유파들의 시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대동시선』에는 중국과의 친연성을 가지는 작가와 작품을 대폭 수록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문명의 東傳이라는 문화적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기자와 관련한 고가요와 신라, 고려의 국제적 인사들을 대거 부각하여 수록하였다. 셋째 당풍과 송풍, 7언 절구와 율시 등 시풍과 시체에서 비교적 균형감각을 가지고 안배하였으며 작품위주로 선발하여 객관적 설득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동시선』은 한중 문화 교류의 결정으로, 18세기 시사가 집약되어 있다. 이후 쏟아지는 한중 문사 교류 및 한중 통합 시선집의 先聲으로서 18세기를 이해하는 핵심적 키워드가 곧 『대동시선』인 것이다. This Thesis is about DaeDongSiSun(大東詩選) which is a representative anthology of poetry in 18th century. Revised and enlarged with HaeDongSiSun(海東詩選), DaeDongSiSun(大東詩選) is very important in our history of poems. This reflects what the 18th century is like-the idea of 尊明排淸 disappears and contemporary idea appears. The features of DaeDongSiSun(大東詩選) are as follows. First, It shows poetry achievements of the age, which leads to show characteristics of Josun Dynasty. NongAm, Samyoun brothers and those groups are in the stream of the times. Second, DaeDongSiSun(大東詩選) includes works of the China-friendly poets, through which it shows that people feel equal with china and proud of being newly cultural source. GiJa' poems and those of Silla and Gogureu' celebrities are included. Third, the poems of the time of Dang and Song, 7unjulgu(7言絶句) and ulsi(律詩) and others are equally collected and registered. DaeDongSiSun(大東詩選), the integration of 18th history of poems, is the fruit of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ea and China. This is the first step of many books about cultural exchange between two nations.

        • KCI등재

          止浦 金坵 <與王學士書> 詳考

          김병기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19 大東漢文學 Vol.58 No.-

          This research is to study of the worth and the process of composition of the book 『Jipozip』. The 『Jipozip』 is the collection of works of Koo Kim who was a politician and a diplomat of great achievements as well. And the research is also to analyse two letters which were sent by Koo Kim to Ark Wang. The two letters were known as <To Wanghaksa> and <Again to Wanghaksa>. At that time Ark Wang was a scholar and in charge of national archives of One dynasty. The 『Jipozip』 was lost at one time, but this was published at the latter period of Chosun dynasty by collecting and reorganizing 95 poetries of Koo Kim. The 95 poetries were included in 『Dongmunsun』 which was edited by Geojung Seo(1420~1488) at the beginning of Chosun dynasty. By analysing 25 poetries of Ja Choi and 124 poetries of Jaehyun Lee, which were all included in 『Dongmunsun』, Geojung Seo regarded with high respect the literary accomplishment of Koo Kim than that of Ja Choi, and in the literary aspect he compared favorably Koo Kim with Jaehyun Lee. Koo Kim met Ark Wang in China already about the year of 1240, and kept their companionship. Jipo not only forwarded Ark Wang formal national document on the foundation of their keen relationships but also sent Ark Wang personal letters asking to persuade the emperor of One dynasty. With this study it is found validated that Jipo Koo Kim was a writer and also a diplomat in active at the end of Korea dynasty of the highest level in those days. 이 논문은 우선 고려 말의 큰 學者이자 名 文章家였고, 至大한 외교 업적을 남긴 외교가이자 정치가였던 止浦 金坵의 문집인 『止浦集』의 成書過程과 그 가치를 먼저 考究하고, 이어서 당시 元나라에서 국가의 중요문서를 專擔하던 學士 王鶚에게 보낸 私信 2통 즉 <與王學士>와 <又與王學士>의 내용을 분석하고 의미를 연구하였다. 『止浦集』은 일찍이 망실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東文選』에 수록된 시문 95편을 모아 재구성하여 출간하였다. 『東文選』에 수록된 崔滋의 詩文이 25편, 李齊賢의 시문이 124편인 점을 통하여 『東文選』을 편찬한 徐居正의 눈에 비친 金坵의 문학적 지위는 崔滋보다 월등히 높고 李齊賢과 거의 비견할 만 했다고 할 수 있다. 지포 김구와 왕악은 1240년경에 이미 중국에서 만나 교유를 다졌고, 지포는 그런 친밀한 교유를 바탕으로 왕악에게 정식 表奏文을 보냈을 뿐 아니라, 私信을 통해 元의 황제를 설득해 줄 것을 부탁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점을 통해 지포 김구는 고려 말에 활약한 당시 최고수준의 문장가이자 외교가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 KCI등재

          『驪江世稿』 硏究(Ⅲ) -白峯 李沆의 생애와 詩世界-

          김남형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12 大東漢文學 Vol.36 No.-

          This paper is prepared to review the life and poems of Baekbong Lee Hang, a bureaucrat writer of 17th Century. Lee Hang born in a family of bureaucrats serving the government for 3 generations since great-grand father entered into civil service by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at the age of 35 by focusing on studying since when he was little. He served as a secret royal inspector at Hamgyung Province as a Jungeon, Saganwon, the mayor of Buan - Leejojwarang, Yejochamui, Governor of Chungjoo until Gapsindaechulcheok. He was temporarily stripped of all positions by Gapsindaechulcheok but reappointed based on his ability as a manager and trust from King Sukjong and served as the governor of Anjoo, the mayor of Dongrae, Gwangjuyusoo, Yejochampan. The reason that Lee Hang enjoyed successes in government offices in the midst of severe political confusion during the late 17th Century was that he was good at governing as a local government officer and gained trust from King Sukjong by behaving himself carefully. The poems by Lee Hang consist of memories on glories that his family enjoyed, poems reflecting self-realization as a government officer, poems reflecting the poet's awareness yearning for a life in the nature while admiring the beauty of the nature, poems reminding of war with external enemies like Japan, China and showing the will of excluding China. Among these, the poems with interests in national defense and the will of excluding China are believed to be meaningful poems showing a side of nationalism by intellectuals of the late Chosun Dynasty. 본고는 17세기의 관료문인 白峰 李沆(1636∼1691)의 생애와 시세계를검토하기 위하여 집필된 것이다. 증조부 이래 3대에 걸쳐 출사한 관인 집안에서 태어난 이항은 어려서부터 과거에 뜻을 두고 과거 공부에 열중하여 35세 때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庚申大黜陟이 있기까지 司諫院 正言, 함경도 암행어사, 이조좌랑, 부안현감, 예조참의, 충주목사등을 역임하였다. 庚申大黜陟으로 일시 削奪官職당하였으나, 관리로서의재능과 숙종의 신임에 힘입어 다시 등용되어 안주목사, 동래부사, 광주유수,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세기 후반이라는 격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이항의 宦路가 비교적 순탄했던 것은 그가 지방관으로서 治理에 밝았고신중하게 처신하여 숙종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항의 시세계는 관료로서의 자아 실현의지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 자연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면서 세상사에 지친 심신을 위안하고자하는 작가의식이 투영된 작품, 倭ㆍ淸 등 외적과의 전쟁을 상기하고 국방에 대한 관심과排淸의식을 드러낸 작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계열의 작품은 가문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정치적으로 쇠락해가는 현실에 대한 각성이 그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자연과의 합일이라는측면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둘째 계열의 작품 또한 ‘관료로서의자아실현과 의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계열의 작품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지녔던 국가관 내지 역사관의 한 단면을 엿보게한다는 점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 KCI등재

          朝鮮申錫愚與淸人筆談考述

          천금매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2016 大東漢文學 Vol.46 No.-

          This article do a textual research on the content and features of written discussions between Sin Xiyu from Chosun dynasty and the literati of Qing dynasty. Sin Xiyu went to Qing with the identity of winter solstice ambassador in October 1860. He met a number of the literati in Qing Dynasty and left a great number of materilas, such as Yeon Heng Rok, letters, written discussions, poetries and so on. However, there were only four written discussions with six people including Lee Wenyuan, Shen Bincheng, Xie Zeng, Chen Gongshou, Song Shuxing and Song Shuxun. The contents of written discussions between Sin Xiyu and Lee Wenyuan were mianly about the family friendship between Sin Xiyu and Lee Boheng, bemoaning for Lee Boheng and enquiries related issues of Taiping movement. The contents of written discussions among Shen Xiyu, Shen Binchengand Xie Zeng were mainly about introduction to each other and making an appointment to catch up at Zhongheju on the 3rd of the first month of lunar year. The written discussions between Sin Xiyu and Chen gongshou were mainly about the admiration for Chen Gongshou, the return date of the emperor, contemporary issues about Taiping movement and the Nian army, and introduction of and Evaluation on famous painter Kin zhenxi and Zhao xilong who come from Chosun. The discussions between Sin Xiyu and Song Shuxing, Song Shuxun were mianly about what he saw and heard in Songjiazhuang on the way to Beijing. Song family was rich and built barriers to protect themselves from Qing's entry. Many Chosun Dynasty ambassadors knew this story and they all visited Song. Sin XiYu mainly visited the building in songjiazhuang and inquired about their ancestors' stories, related text materials and the issues for ritual and dressed. From the written discussions between Sin Xiyuan and literati in Qing Dynasty we can see that Sin Xiyu actively communicated with literati in Qing Dynasty, who have communicated with Chosun Dynasty, and new friends in Qing Dynasty. Furthermore, he also actively inquired the contemporary issues in Qing Dynasty. Although the written discussions are not long, it has rich contents. The written discussion between Sin Xiyuan and liberati in Qing Dynasty is signficiant to investigate literati communication between Qing and Chosun Dynasty in 19th century, to enrich communication between Qing and Chosun Dynasty, and to explore the truth and the details for social history at that time, with evidence. Therefore, they are of great literature value in studies about literati relationship History between China and Korea. 本文考述了朝鮮文人申錫愚與淸朝文士的筆談內容及特點。申錫愚曾在1860年十月以冬至正使的身份岀使淸朝,結識了眾多淸朝人士,留下了燕行錄、尺牘、筆談、詩文等眾多資料,但是筆談資料卻只有4篇,筆談人物只有6人,分別爲李文源、沈秉成、謝增、程恭壽、宋舒惺與宋舒恂。 申錫愚與李文源的筆談內容主要談到申錫愚與李伯衡的世交以及對李伯衡的哀吊、探問太平天國運動相關問題。與沈秉成和謝增兩人的筆談,主要是相互通姓名,并約新正初三日再于中和局相見會談。與程恭壽的筆談主要涉及對程恭壽的欽慕之情,詢問皇帝回鑾時期以及太平天國與捻軍等時局情況,介紹很評價朝鮮著名書畫家金正喜與趙熙龍等內容。與宋舒惺、宋舒恂的筆談是在進入北京的途中經過宋家莊,宋氏家富豪築城壘,自保於淸人入關之時,朝鮮使臣多聞知其事跡,光顧者很多。申錫愚主要觀看了宋家莊舍城樓,并詢問其宋氏祖先事跡和相關文字資料、以及祭祀是的衣冠问题。 申錫愚與淸人的筆談中我們可以看到申錫愚積極結交與朝鮮人士有交情的淸人,主動結交新的淸朝友人,積極探詢淸朝時局情勢,雖然篇幅不長,但內容豐富等的筆談特點。申錫愚與淸人的筆談對於了解19世紀末中朝兩國文人的交流,豐富兩國文人交流內容,以及了解當時社會歷史真相與細節,有很好的補充和見證意義,因此對於中韓文人關係史研究具有寶貴的文獻價值。

        • 頤齋 曺友仁의 삶과 현실인식

          황동권 대동한문학회 2016 대동한문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Vol.2016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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