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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吳音과 韓國 漢字音의 關連에 대하여

        趙大夏 한국일본학회 2001 日本學報 Vol.47 No.-

        吳音은 傳來時期 및 地域에 따라 新蓄의 層이 存在하는 複層的인構造를 가지고 있다. 吳音의中核層은六朝時代의中開 東南部音인데, 이는 韓半島 南部를 거쳐 日本에 傳來되었다고 보여져, 吳音의 形成에는 韓國 漢字音이 상당히 影響을 미쳤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本稿에서는 吳音의 複層的 構造중에서 韓國 漢字音과 關連이있다고 보여지는 漢字音의 韻類의 音形과 尤韻를 中心으로 그 異同을 考察해 보았다. 그 結果,먼저 音形面에서보아,例를 들어 侯韻과 尤韻을 辨別하지 않고 吳音「ウ」,中期 朝鮮 漢字音「우」로 轉寫된 例는 侯韻·尤韻·幽韻이 合流한 六朝時代의 音韻狀態를 反映하는 字音이라 보여진다. 또한,陰聲韻尾/-u/를 버리고 單母音化하여 轉寫된 例는 韓國漢字音에서는 一般的으로 보이는 現象이므로, 이 單母音化는 韓國 漢字音의 影響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聲調 體系에서 보아, 韻書 上·去聲의 合流는 中期 朝鮮 漢字音에도 보이는데, 이는 中國語의 四聲과 다른 聲調 體系를 갖는 當時의 韓國人이 中國語를 聽取했을 때 混亂을 일으켜 上·去聲의 區別이 없어졌으며, 이것이 日本 吳音에 基層音으로서 받아 들어졌다고 보여진다. 또한 調値面에서 보아 中期 朝鮮 漢字音 聲調의 調値와 慶尙道 方言 漢字音 聲調의 調値는 그 高低 關係가 相反된다. 中期 朝鮮 漢字音 聲調의 調値는 漢音 聲調의 調値와 같이 中國 中古音의 聲調를 反映하는데 반해, 漢音의 調値와 相反되는 吳音 聲調는 慶尙道 方言 漢字音의 聲調와 類似한것이다. 法華經讀誦音의 聲調와 慶尙道 方言 漢字音의 聲調를 韻書(廣韻)의 聲調와 對應시켜보면, 韻書의 調値에 相反하며 그 相反되는 漢字의 一致率이 매우 높다(平均75.1%).따라서 兩者의 聲調 關係는 결코 無視할 수 없다.

      • KCI등재

        안정복<SUP>安鼎福</SUP>의「천학문답<SUP>天學問答</SUP>」에 대한 비평과반서학적<SUP>反西學的</SUP> 인식의 확산 - 손재<SUB>損齋</SUB> 남한조<SUB>南漢朝</SUB>의 「안순암천학혹문변의<SUB>安順菴天學或問辨疑</SUB>」

        지형(趙志衡)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8

        본고는 영남 출신 남인 학자 남한조南漢朝의 학문적 계보와 생애사를 검토하여 그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의 형성 과정과 실질을 살피고, 그를 통해 영남지역으로 서학 비판의 흐름이 확산되어 가는 국면을 탐색하였다. 남한조는 경상도 상주尙州 출신으로서 본래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한 영남 이학파理學派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승 사후에 다시 안정복安鼎福에게 나아가 수학하면서 당시 근기 남인 사이에서 큰 문제거리가 되고 있던 서학西學의 실체를 인지하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스승의 권유로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대한 교정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개진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라는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서학이 치성하게 된 원인을 탐색하다가 「이성호천주실의발변의李星湖天主實義跋辨疑」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두 저술은 남한조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18세기 후반 근기 남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서학 비판의 흐름은 남한조를 매개로 하여 이상정 문하의 영남 이학파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남한조와 교유하던 영남 지역의 여러 문인들, 예컨대 정종로鄭宗魯‧조술도趙述道‧황용한黃龍漢‧신체인申體仁‧이동급李東汲은 각각 반서학적 인식을 담은 저술들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남한조의 제자였던 류건휴柳健休는 『이학집변異學集辨』을 찬술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반서학적 인식과 흐름이 근기 지역에서 영남 지역으로 확산되고, 영남 지역 안에서 반서학 정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남한조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review the academic pedigree and life histories of Nam Han-jo, a scholar from Yeongnam region, to research the process of formation of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at he had, and to investigate the phases that the flow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was spread into Yeongnam region through him. Nam Han-jo originally studied under Lee Sang-jeong and succeeded to Yeongnam Yi School scholastic mantle. As he studied under Ahn Jeong-bok after his teacher died, he recognized the true nature of Western learning that was very problematic among Geungi Namin scholars and held critical position on it. While he was in charge of correction of 「Cheonhakmundab (天學問答)」 by his teacher’s recommendation, he left a book 「Ansunamcheonhakhokmunbyeonui (安順菴天學或問辨疑)」 that states his opinions and criticitisms. This book well shows Nam Han-jo’s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e tendency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done by 18th century Geungi Namin scholars affected Yeongnam region’s Namin with the medium of Nam Han-jo. Therefore, such scholars who had academic exchange with Nam Han-jo as Jeong Jong-ro, Jo Sul-do, Hwang Yong-han, Shin Che-in and Lee Dong-geub left their own books that contain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In addition, Ryu Geon-hyu, who was a pupil of Nam Han-jo, wrote 『Yihakjibbyeon (異學集辨)』. As shown above, Nam Han-jo played a great role in spreading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roughout Yeongnam region in the late 18<SUP>th</SUP> century.

      • KCI등재

        조중국경조약체제에 관한 국제법적 고찰

        李鉉祚(Hyun-Jo Lee) 대한국제법학회 2007 國際法學會論叢 Vol.52 No.3

        조중국경조약체제는 기본조약인 1962년 국경조약과 조약초안작성 등을 규정하고 있는 1962년 국경합의서와 1962년 국경조약을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1964년 국경의정서로 구성되어 있다. 1962년 국경조약과 1964년 국경의정서에 따라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이 압록강-백두산 천지-홍토수(두만강 최상류 지류)-두만강으로 확정되었다. 조중국경조약체제의 특징은 1909년 간도협약과 1712년 백두산정계비와 비교할 때 다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1962년 국경조약 제1조는 백두산 천지를 북한 54.5%, 중국 45.5%로 분할하고 천지 서북부는 중국에 동남부는 북한에 귀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둘째, 1962년 국경조약은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규정된 토문강(土門江) 대신 백두산으로 뻗어 있는 도문강(두만강의 중국명칭)의 4개의 지류(支流) 중최상류에 있는 홍토수(紅土水)를 조중국경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신법우선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1962년 국경조약 제5조 제3문에 따라 1909년 간도협약과 1712년 백두산정계비는 정식으로 효력을 상실하게 되어 간도지역이 중국에 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러한 국경조약을 체결할 조약체결능력 즉 국제법주체성이 인정되는가? 현재 북한은 북핵위기 해결을 위한 6자회담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국제사회에서 국제법주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냉전체제 종식이후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및 남북기본합의서와 각종 합의서 체결과 발효로 인하여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국제법적 지위를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북한과 중국간에 비밀리에 체결된 조중국경조약체제에 대해 한국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별도로 하고 국경조약 체제 자체를 부인할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 통일한국의 조중국경조약체제의 승계문제에 관하여 독일통일 사례를 통일한국에 적용하면 선행국인 북한이 중국과 체결한 조중국경조약체제에 대해 관련국인 통일한국이 중국과 협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중국경조약체제는 국경조약의 국가승계에 관한 국제법상 국제관습법적 효력을 갖는 국경조약의 계속성 원칙 또는 자동승계원칙이 관련국인 중국과의 국제적 안정성 유지를 위해 통일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concluded by North Korea and China consists of secret treaties concerning the demarcation of the Korean-Chinese Border in the northern Korean Peninsula. It is composed of basic National Border Treaty in 1962 and Agreed Minutes on the Demarcation of the Korean-Chinese National Border in 1962 which provides for a guide to drafting agreement, and Protocol on the Demarcation of the Korean-Chinese National Border in 1964 in which The National Border Treaty is stipulated in detail. According to the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the national border between North Korea and China has been settled on Yalu River-Chonji, Mountain Baekdu-Hongto River(Hongtosu)-Tumen River. The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has three characteristics as follows; First, in accordance with the provisions of Article 1 of the National Border Treaty, Chonji is divided into two and northwestern districts of it(45.5%) belongs to China, and southeastern parts of Chonji(54.5%) belongs to North Korea. Second, the National Border Treaty provides that instead of Tomoon River described in the Demarcating Stone Monument, Hongto River(Hongtosu), which is upriver of four branches of Tumen River, was a border line. Third, it is laid down in provisions of article 5 in the National Border Treaty that after entry into force of the Protocol and the Treaty in 1964, all documents regarding bilateral national border agreement are invalidated except the Agreed Minutes in 1962. As a result, Gando Convention of 1909 and the Demarcating Stone Monument of 1712 are invalidated officially, in turn Gando area belong to China finally. Finally, the future Unified Korea should take a positive attitude toward the matter of succession of the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because the rule of continuity(or automatic succession) to boundary treaties exists firmly in the customary international law.

      • KCI등재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대한 비평과 반서학적反西學的 인식의 확산—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의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

        지형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8

        This study is to review the academic pedigree and life histories of Nam Han-jo, a scholar from Yeongnam region, to research the process of formation of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at he had, and to investigate the phases that the flow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was spread into Yeongnam region through him. Nam Han-jo originally studied under Lee Sang-jeong and succeeded to Yeongnam Yi School scholastic mantle. As he studied under Ahn Jeong-bok after his teacher died, he recognized the true nature of Western learning that was very problematic among Geungi Namin scholars and held critical position on it. While he was in charge of correction of 「Cheonhakmundab (天學問答)」 by his teacher’s recommendation, he left a book 「Ansunamcheonhakhokmunbyeonui(安順菴天學或問辨疑)」 that states his opinions and criticitisms. This book well shows Nam Han-jo’s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e tendency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done by 18th century Geungi Namin scholars affected Yeongnam region’s Namin with the medium of Nam Han-jo. Therefore, such scholars who had academic exchange with Nam Han-jo as Jeong Jong-ro, Jo Sul-do, HwangYong-han, Shin Che-in and Lee Dong-geub left their own books that contain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In addition, Ryu Geon-hyu, who was a pupil of Nam Han-jo, wrote 『Yihakjibbyeon (異學集辨)』. As shown above, Nam Han-jo played a great role in spreading anti- Western learning awareness throughout Yeongnam region in the late 18th century. 본고는 영남 출신 남인 학자 남한조南漢朝의 학문적 계보와 생애사를 검토하여 그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의 형성 과정과 실질을 살피고, 그를 통해 영남 지역으로 서학 비판의 흐름이 확산되어 가는 국면을 탐색하였다. 남한조는 경상도 상주尙州 출신으로서 본래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한 영남 이학파理學派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승 사후에 다시 안정복安鼎福에게 나아가 수학하면서 당시 근기 남인 사이에서 큰 문제거리가 되고 있던 서학西學의 실체를 인지하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스승의 권유로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대한 교정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개진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라는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서학이 치성하게 된 원인을 탐색하다가이성호천주실의발변의李星湖天主實義跋辨疑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두 저술은 남한조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18세기 후반 근기 남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서학 비판의 흐름은 남한조를 매개로 하여 이상정 문하의 영남 이학파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남한조와 교유하던 영남 지역의 여러 문인들, 예컨대 정종로鄭宗魯, 조술도趙述道, 황용한黃龍漢, 신체인申體仁, 이동급李東汲은 각각 반서학적 인식을 담은 저술들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남한조의 제자였던 류건휴柳健休는 『이학집변異學集辨』을 찬술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반서학적 인식과 흐름이 근기 지역에서 영남 지역으로 확산되고, 영남 지역 안에서 반서학 정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남한조의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 KCI등재

        유방 병변의 감별에서 탄성초음파와 회색조 초음파의 진단 성적 비교

        강지영,이진화,김은경,신수영,김병권,진한,하동호,박병호,최순섭 대한초음파의학회 2012 ULTRASONOGRAPHY Vol.31 No.4

        Purpose: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compare the diagnostic performance of ultrasound (US) elastography and conventional B-mode US for discrimination between benign and malignant breast lesions. Materials and Methods: During a 13-month period, 277 women with 335 sonographically visible breast lesions who were scheduled to undergo biopsy were examined with US elastography. Elastographic findings were classified as benign or malignant based on the area ratio, with 1.00 as the threshold. Findings on conventional Bmode US wer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BI-RADS category, as follows: lesions of BIRADS categories 2 and 3 were considered benign, while those in categories 4 and 5were considered malignant. Statistical analysis included sensitivity, specificity, positive predictive value (PPV), negative predictive value (NPV), accuracy, and ROC curve analysis for comparison of the diagnostic performance of US elastography and conventional B-mode US. Results: Of the 335 breast lesions, 85 (25.4%) showed malignancy on pathology. Findings on B-mode US showed malignancy in 264 (78.8%) and elastographic findings showed malignancy in 102 (30.4%). The sensitivity, specificity, PPV, NPV, and accuracy of B-mode US and elastography were 98.8%, 28.0%, 31.8%, 98.6%, and 79.4% and 69.4%, 81.2%, 57.8%, 88.8%, and 79.4%, respectively. Elastography showed significantly higher specificity and PPV and lower sensitivity and NPV, compared with B-mode US (p < 0.001). The area under the ROC curve (AUC value) was 0.761 for elastography, and 0.634 for B-mode US (p < 0.001). Conclusions: US elastography can improve specificity and PPV of B-mode US,but with significant sacrifice of sensitivity and NPV. Therefore, US elastography may complement B-mode US for differentiation of breast masses. 목적: 유방의 악성 및 양성 종괴의 감별에 있어서 탄성초음파와 회색조 초음파의 진단 성적을 비교하고자 하였다. 대상과 방법: 13개월 동안 본원에서 유방 초음파를 시행한환자 중 종괴가 발견되어 조직검사가 계획된 277명의 환자,335개의 유방 종괴를 대상으로 탄성초음파를 추가로 시행하였다. 탄성초음파에서 양성 및 악성 종괴에 대한 평가는 단면적비 1.0을 기준으로 진단하였다. 회색조 초음파에서는 BIRADS에근거하여 범주 2와 범주 3에 해당하는 유방 종괴는양성으로, 범주 4와 범주 5의 종괴는 악성으로 분류하였다. 회색조 초음파와 탄성초음파의 진단성적을 비교하기 위해 민감도, 특이도, 양성예측도, 음성예측도 및 정확도를 구하고, ROC curve를 분석하였다. 결과: 병리 결과에서 335개의 종괴 중 악성은 85개(25.4%)이었다. 회색조 초음파에서는 264예(78.8%)를 악성종괴로 진단하였고, 탄성초음파에서는 102예 (30.4%)를 악성으로 진단하였다. 회색조 초음파의 민감도, 특이도, 양성예측도, 음성예측도, 정확도는 각각 98.8%, 28.0%, 31.8%, 98.6%,79.4% 이었고, 탄성초음파는 각각 69.4%, 81.2%, 57.8%,88.8%, 79.4% 이었다. 탄성초음파는 회색조 초음파와 비교하여 특이도와 양성예측도는 높았으나,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민감도와 음성예측도는 낮았다 (p < 0.001). ROC curve 분석에서 탄성초음파와 회색조 초음파의 AUC 값은 각각 0.761과0.634 (p < 0.001) 이었다. 결론: 결론적으로 공간 상관도 기법을 이용한 탄성초음파는회색조 유방초음파와 비교하여 특이도와 양성예측도를 향상시키지만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민감도와 음성예측도를 낮추므로유방 병변의 진단에 있어 탄성초음파는 회색조 초음파의 보완적인 검사법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 Magnetite가 혐기성 소화에 미치는 영향

        김민상 ( Min-sang Kim ),홍목 ( Hong-mok Jo ),한의정 ( Ui-jeong Han ),박영미 ( Yeong-mi Park ),시경 ( Si-kyung Cho ) 한국폐기물자원순환학회(구 한국폐기물학회) 2021 한국폐기물자원순환학회 춘계학술발표논문집 Vol.2021 No.-

        현재 많은 연구들에서 전도성 물질을 이용한 직접전자전달(DIET)가 혐기성 소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선행 연구에 따르면 전도성 물질들을 반응조에 투여하였을 경우 내부에 체류하지 못하고 밖으로 wash-out 되는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게 된다. 그로인해 전도성 물질을 소화조에 지속적으로 투여할 경우 경제성이 저하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1). 혐기성 그래뉼은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어 Expanded Granular Sludge Blanket (EGSB) 및 Upflow Anaerobic Sludge Blanket(UASB) 반응조에 적용하면 외부로 washout 되는 경우를 줄이고 운전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선행 연구에서는 저강도 초음파(ultrasonication)는 그래뉼에 추가적인 공극을 생성해 비표면적을 늘릴 수 있다(2). 이를 접목하여 EGSB, UASB, 반응조에서의 혐기성 그래뉼에 magnetite 삽입 및 부착 실험을 진행하였으며, 각 실험에 저강도 초음파의 효과를 확인하였다. UASB 반응조에서 수소 그래뉼을 생성하며 magnetite의 삽입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UASB, EGSB 반응조에서 각각 생성되어 있는 메탄 그래뉼에 magnetite 부착 가능성을 조사하고, 부착 후 연속 운전을 통해 메탄생산 효율성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magnetite가 부착된 메탄 그래뉼로 Specific Methanogenic activity(SMA) 테스트를 통해 메탄 미생물 활성도를 검토하였다. 수소 그래뉼과 메탄 그래뉼에 magnetite의 삽입 및 부착 가능성을 확인하였으며, 저강도 초음파를 적용하여 magnetite의 삽입율을 80% 증가시켰다. 각 반응조에서 연속 메탄생산 효율성을 확인하였을 때, Organic Loading Rate(OLR)이 2g 일 때 magnetite를 통한 메탄생산 효율성 증가를 확인하였다. 하지만 EGSB는 magnetite 부착만 진행한 반응조는 31일, 저강도 초음파와 magnetite를 동시에 적용한 반응조는 49일까지 효과가 유지되었으며, UASB 반응조에서는 위 조건에서 각각 16일, 34일 까지 효과가 유지되었다. 효과 완료 후 각 조건은 대조군보다 저해된 각일 메탄 발생량을 보였으며, 높은 OLR에서는 magnetite 주입이 저해 효과를 일으켰다. SMA test를 통해서 메탄 그래뉼에 magnetite를 부착하였을 경우 최종 메탄 발생량을 10~17% 증가시켰으며, 메탄 생산속도를 11~17% 증가시켰다.

      • KCI등재

        재일 조선불교유학생들의 활동

        아담(A Dam Jo)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8 佛敎學報 Vol.0 No.48

        1910년대부터 시작된 불교계의 일본유학은 1920년대 이르러 그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신지식을 수용하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불교계의 의식과 더불어 도성 출입 금지 해제 이후 확산된 일본불교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인의 자주성을 말살하고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흡수시키려는 일제의 교육정책의 영향도 있었다.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는 이회광에 의한 한국불교의 임제종 연합기도를 저지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1년 후 명칭개정을 통해 해체되었다. 이후 1921년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가 결성되어 국내 불교청년운동과 연계하고 국내불교계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들은 순회강연을 통해 신지식의 보급과 계몽에 앞장섰으며, 기관지인 금강저를 발간하고 `원효대성찬앙회` 및 `삼장학회` 등을 통한 불교신앙의 대중화를 도모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그러한 열정을 표면화했다. 1931년 국내 단체인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한데 이어 전국에 산재된 각 불교청년회가 스스로 그 조직을 해체하고 총동맹의 일원인 동맹체로 전환하였다. 그러한 대세에 합류하여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지부동맹인 `동경동맹`으로 변경되었다. 동경동맹은 정기대회, 신입회원 환영 및 졸업회원 송별회를 개최하고, 연구모임 `동맹연구회` 활동, 기관지 금강저 발간을 지속하는 등 자체적 활동과 더불어 국내 불교계와의 긴밀한 유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1930년 초반부터 등장한 종헌실행문제, 사법개정운동, 중앙불전 폐지 문제 등 중요 현안에 대해 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 총동맹 내분 등 불교청년운동 부진의 영향으로 1934년 동경동맹은 해체되었다. 한편, 1930년에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 역시 동경에 그 지부를 두고 있었다. 만당의 동경지부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불교청년운동을 하던 김법린에 의해 1932년경에 조직되었다. 그 당원은 김법린, 허영호, 장도환, 최범술 등으로 당시 국내외 불교청년운동의 핵심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유학 이전부터 해방 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결성된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는 이전의 불교유학생 단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국내 불교계의 후원으로 회관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부분 승려의 신분이었던 일본 유학생들은 귀국 후 환속하거나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결혼을 하는 등, 이른 바 승려의 대처식육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유학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앙교무원의 간부직이나 주지를 맡으면서 일제의 정책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학중 불교를 전공하고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드러낸 이들은 강원이나 혜화전문·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여 해방 후까지도 활발한 학술활동을 펼쳤다. The first Korean Buddhist students studying abroad are known to be Kim Beop-ryong and Kim Seung-beop, who started their studies in 1910s. The number of Korean Buddhist students in Japan increased in 1920s and it seems to be caused by an awakening to the need of learning `new knowledge` in stimulating the Korean Buddhism and a growing favor to the Japanese Buddhism after the lifting of entrance ban to the monks. The Japanese intriguing policy, to abolish independent spirit of Korean people and to merge Korean Buddhism into Japanese Buddhism, also contributed to the increase of the Korean Buddhist students in Japan. The association of Jo-seon Buddhist Students in Japan, founded in 1920, took part in activities like the prevention of trying to unite the order Korean order to Rinzai, the Korean Buddhists led by Yi Hwoi-guang. However, it was dissolved as it changed its name. The Jo-seon Buddhist Youth Association in Japan was founded in 1921 and showed a strong will to join with the Buddhist youth movement in Korean in order to reform the Korean Buddhism. Its passion came to take shape through various activities so it took the initiative in spreading new knowledge and in enlightening people, published its own journal, the Geumgangjeo(which means Diamond Mace) and worked for spreading Buddhism by establishing organizations like the Association in Commemoration of Great Master Wonhyo and the Association for Tipitaka Studies. In 1931, the Jo-seon Buddhist Youth Association in Korea changed its name to General Association of the Jo-seon Buddhist Youth. Accordingly, each of the Buddhist youth associations, scattered over the country, dissolved its organization and became an affiliate of the General Association. Following the general trend, the Jo-seon Buddhist Youth Association in Japan became a member of the General Association, as Tokyo affiliate. The Tokyo affiliate carried its own undertakings, so it held meetings like regular assembly, welcoming and farewell parties, organized the Research Group to study Buddhist teachings and continued to publish its journal, the Geumgangjeo. It also worked for maintaining close relation with the Buddhist movements in Korea, so it actively conveyed their words when important matters became issues since the early 1930s, matters like the execution of the Constitution of the Jo-gye Order, the amendment of Temple Laws, an oppressive measure by Japanese and the abolition of the Jung-ang Buddhist College. However, the Tokyo affiliate was dissolved in 1934 due to the inactivity of the Buddhist youth movement, caused by problems like internal conflicts in the General Association. The Man-dang, a secret anti-Japanese Buddhist organization founded in 1930, had also an affiliate in Tokyo. The Tokyo affiliate of the Man-dang was organized in 1932 by Kim Beop-lin, a student who was actively taking part in the Buddhist youth movement. They played an essential role in the Buddhist youth movement and was known to be dedicated to various activities from the years before studying in Japan to the troubled times after the Liberation. The Association of the Jo-seon Buddhist Students Studying in Tokyo upheld the traditions of the early Buddhist students associations in Japan and built its own hall, supported by the Buddhists organizations in Korea. However, it showed sympathy with Japanese policy of aggression in 1940s. Most of the students, who studied in Japan, were monks and some returned to the laity after their returning to Korea, or married according to the Japanese Buddhist tradition. They were also involved in the vehement discussion on the matter of having a wife and eating meats. Many of them became the leading members of the Business Affairs of the Order or a chief monk of a temple and showed compromising attitudes with the Japanese policy. However, those monks, who distinguished themselves in Buddhist studies with outstanding academic abilities, dedicated themselves to teaching and research at monasteries

      • 忠南의 農業地域에 關한 空間構造分析

        趙南崗 건국대학교 1989 장안지리 Vol.5 No.2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investigate the spatial process of agricultural change and its structure in Chungnam province related to the process of industrialization and urbanization of Korea. Especially this thesis focuses on the analysis of spatial process on the specialization and concentration of agricultural crops, spatial change in the combination of agricultural products and the regional structure of agricultural management. For this purpose, this study examines the overall performance of agriculture in Chungnam province compared with that of the country. And then this study analyze the agricultural structure microscopically, dividing the study area into 181 administrative units (city, Eup and Myeon)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1. The overall performance of agriculture of Chungnam province. (1) The rate of increase in the cultivated area per each farmer was faster than the average rate of country due to the outmigration, (2) The ramie of decrease in farming population was faster than that of farming households because of the selective migration of young people, which has Led to decline the quality and quantity of agricultural laborforce. (3) farming system of agricultural products have been changed gradually from grain crops to cash crops (such as vegetables, fruits and special use crops) and from regional diversification to specialization. As a whole, Chungnam province had comparative advantages in commercial farming. Spatial structure of specialization and concentration processes of agricultural products. (1) Chungnam province has showed the tendency for agricultural specialization, especially fruits and special use crops. crops (2) Regional distribution of grain crops expect rice are tended to Localized pattern, while the pattern of regional distribution for commercial crops are ubiquitous due to the extention of cultivated area for commercial crops. (3) vocational Share Analysis showed that the cultivated area of cash crops increased, while that of general crops decreased . The cash crop regions are concentrated on the northeastern parts of the axes connected from Sosan to Kumsan. 3. Spatial structure of agricultural product combinations. (1) According to the result of Principle Component Analysis and Cluster-analysis, Chungnam province has experienced the gradual change in the spatial structure of agricultural product combination. (2) During the 1960s, the combination of agricultural crops were different between southeastern area and northwestern area mainly due to the topographical differences. (3) Since the early 1970s, the area which had a good accessibility to larger cities had grown cash products combining fruits, vegetables and animal stuffs. As a results, spatial structure of agricultural product combinations has been changed. Northeastern area performed commercial agriculture, while southwestern area grew more generalized and localized crops. 4. Regional structure based on the agrcultural management. (1) During the 1960s, southeastern part of the axes linked from Taechun to Chonan showed the high degree of agricultural intensity and commercialty. However during the period of 1970-1980, northeartern part of the axes linked from Sosan to Kumsan showed much higher degree of intensity and commercially because of the improvement of accessibility to Seoul and Daejon. (2) According to the Factor Analysis, land use factor was extracted as the most important one in explaining the agricultural management in 1960 and 1970, while agricultural intensity factor was emerged the first factor in 1980. (3) In the Light of the agricultural management, regional structure between the northern part and the southern part is very different. In the northern areas, agricultural activities are more extensive. On the other hand, agricultural activities in the southern area are more intensive. The basic factor for such difference between them is due to the topographic and laborforce factor. (4) In order to analyze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regional structure of agricultural management and spatial structure of rural settlement, Canonical Correlation Analysis was used. According to the result of canonical analysis, the following relations are revealed. a . The region with high degree of agriculturaization and with more aged farm population tends to be lowered the centrality of settlement. b. The region with higher degree of agricultural intensity and with higher proportion of active population is likely to have higher centrality of settlement. c. The region with higher rate of cultivated area and with lower accessibility tends to perform farming more extensively. In short, this study revealed that cultivated and intensive agricultural activities formed a concentric ring of land use patterns centered on Daejon and Chonan cities, while self-supporting agricultural activities developed in southwestern area, reflecting topographic conditions. Spatial structure of agricultural products combinations and regional structure of agricultural management in 1960s were delimited in to two parts along the axes linked from Chonan to Taechon. However in 1970 they were delimited along the axes connecting Sosan and Kumsan , which reflects urbanization process and the improvement of accessibility . Now agricultural region of Chungnam province may be viewed as a part of hinterland for Seoul metropolitan region.

      • KCI등재

        현대시조에 나타난 ‘할머니’ 양상 연구-『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을 중심으로

        춘희 ( Jo Chun-hee ) 한국문학언어학회(구 경북어문학회) 2019 어문론총 Vol.79 No.-

        고령 사회의 도래는 노년 주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담론 마련을 추동 하였다. 이에 본고는 현대시조 장르에 형상화된 노년 주체, 특히 ‘할머니’로 호명되는 여성 주체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현대시조의 장르적 변방성 및 양반 사대부의 문학양식이라는 혐의 등은 할머니 표상을 고착한 원인이기도 하다. 더불어 현대시조 창작자의 한계 역시 이러한 고착을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간 할머니는 기존 질서를 답습하는 고리타분한 존재일 뿐 아니라 젊은 여성의 적으로까지 간주되어 왔다. 그들은 가족구조 내에서의 남성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그 대체재로 기능했다. 이 때문에 스스로의 노화과정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사회로부터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박탈당한 유령 같은 존재로 부유하게 되었다. 본고는 1900년대 창작·발간된 시조집 중에서 작가별 선집 형태로 묶인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을 텍스트로, 할머니를 소재나 주제로 다룬 80편을 추출하였다. 다시 이들 작품이 구성하고 있는 할머니 양상을 첫째 개인이 소거된 역사적 희생양으로서의 면모, 둘째 노화와 유한자적 감수성으로서의 면모, 셋째 가부장제 가족 구조에서의 역할 등으로 분류하였다. 이를 통해서 할머니는 노년기 남성과 달리 주체적인 현존으로 독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취할 수 있었다. 남성 중심의 시조문학 창작자들을 통해서 대신 말해지고 발견되는 할머니 양상의 한계는 우리 사회에서 그들이 점유한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좌표를 시사한다. 자신의 늙음조차 목도할 수 없는, 즉 목소리를 박탈당한 할머니들의 위상에 대해 재고해야 할 때이다. The advent of an aged society has promoted social awareness and discourses on topics of aging. This article will examine the grandmother that takes shape in the modern-sijo genre. There is a controversy regarding modern sijo as the literary style of grandfathers; this is a reason for focusing on the representation of grandmother'. In addition, the limitations of modern fictional creators have also strengthened these beliefs. Meanwhile, grandmothers have been regarded as enemies of young women, in addition to being orderly followers. They have contributed to consolidating male power within the family structure. Further, as a mother until her death, the grandmother act as a mother and a substitute, and she becomes passive in her own aging process, becoming ghost-like and being deprived of her human rights in society. This study examines the text of "100 modern sijos in our era", which was bound in the form of an anthology by the author; among the works are poems created and published in the 1900s. We extracted 80 pieces from the anthology that use the image of a grandmother as their material and subject. We then classified the patterns surrounding the grandmothers that were created by these works. First, the grandmother is classified as a historical scapegoat; second, she represents; aging and finite sensibility; and third, her role in the family structure of the patriarchy is highlighted. In this way, we assert that the grandmother can-not understand that she is not read as a subjective existence. The limitations of the grandmother figure that are articulated and discovered when focusing on her rather than looking through the male-centered Sijo literary creators are disturbing. These interpretations suggest that there are unfair and unequal coordinates that grandmothers occupied in our society. It is time to reconsider the status of grandmothers who are so deprived of their voices that they can-not even confront their old age.

      • 표준화재 재하조건에서 법정슬래브의 내화성능에 관한 실험적 연구

        범연(Cho, Bum-Yean),여인환(Yeo, In-Hwan),김흥열(Kim, Heung-Youl),민병렬(Min, Byung-Yeol),김형준(Kim, Hyung-Jun) 한국화재소방학회 2011 한국화재소방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Vol.2011 No.추계

        본 연구에서는 현재 법정내화구조로 규정되어 있는 철근콘크리트(RC: Reinforced concrete)조 및 철골철망모르타르(SWM: Steel & Wire Mortar)조 슬래브에 대하여 재하조건에서 구조별 내화성능을 검토하고, 철골철망모르타르조 슬래브에 대해서는 피복두께별 내화성능을 검토하고자 표준화재조건에서 내화실험을 실시하였다. 실험결과 동일피복 두께일 경우 철근콘크리트조 슬래브가 내화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철골철망 모르타르조 슬래브의 경우 피복두께가 10mm 증가 시 7%의 내화성능이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열 이면온도는 슬래브의 두께가 늘어날수록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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