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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복<SUP>安鼎福</SUP>의「천학문답<SUP>天學問答</SUP>」에 대한 비평과반서학적<SUP>反西學的</SUP> 인식의 확산 - 손재<SUB>損齋</SUB> 남한조<SUB>南漢朝</SUB>의 「안순암천학혹문변의<SUB>安順菴天學或問辨疑</SUB>」

        조지형(趙志衡)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8

        본고는 영남 출신 남인 학자 남한조南漢朝의 학문적 계보와 생애사를 검토하여 그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의 형성 과정과 실질을 살피고, 그를 통해 영남지역으로 서학 비판의 흐름이 확산되어 가는 국면을 탐색하였다. 남한조는 경상도 상주尙州 출신으로서 본래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한 영남 이학파理學派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승 사후에 다시 안정복安鼎福에게 나아가 수학하면서 당시 근기 남인 사이에서 큰 문제거리가 되고 있던 서학西學의 실체를 인지하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스승의 권유로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대한 교정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개진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라는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서학이 치성하게 된 원인을 탐색하다가 「이성호천주실의발변의李星湖天主實義跋辨疑」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두 저술은 남한조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18세기 후반 근기 남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서학 비판의 흐름은 남한조를 매개로 하여 이상정 문하의 영남 이학파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남한조와 교유하던 영남 지역의 여러 문인들, 예컨대 정종로鄭宗魯‧조술도趙述道‧황용한黃龍漢‧신체인申體仁‧이동급李東汲은 각각 반서학적 인식을 담은 저술들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남한조의 제자였던 류건휴柳健休는 『이학집변異學集辨』을 찬술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반서학적 인식과 흐름이 근기 지역에서 영남 지역으로 확산되고, 영남 지역 안에서 반서학 정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남한조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review the academic pedigree and life histories of Nam Han-jo, a scholar from Yeongnam region, to research the process of formation of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at he had, and to investigate the phases that the flow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was spread into Yeongnam region through him. Nam Han-jo originally studied under Lee Sang-jeong and succeeded to Yeongnam Yi School scholastic mantle. As he studied under Ahn Jeong-bok after his teacher died, he recognized the true nature of Western learning that was very problematic among Geungi Namin scholars and held critical position on it. While he was in charge of correction of 「Cheonhakmundab (天學問答)」 by his teacher’s recommendation, he left a book 「Ansunamcheonhakhokmunbyeonui (安順菴天學或問辨疑)」 that states his opinions and criticitisms. This book well shows Nam Han-jo’s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e tendency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done by 18th century Geungi Namin scholars affected Yeongnam region’s Namin with the medium of Nam Han-jo. Therefore, such scholars who had academic exchange with Nam Han-jo as Jeong Jong-ro, Jo Sul-do, Hwang Yong-han, Shin Che-in and Lee Dong-geub left their own books that contain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In addition, Ryu Geon-hyu, who was a pupil of Nam Han-jo, wrote 『Yihakjibbyeon (異學集辨)』. As shown above, Nam Han-jo played a great role in spreading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roughout Yeongnam region in the late 18<SUP>th</SUP> century.

      • KCI등재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대한 비평과 반서학적反西學的 인식의 확산—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의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

        조지형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8

        This study is to review the academic pedigree and life histories of Nam Han-jo, a scholar from Yeongnam region, to research the process of formation of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at he had, and to investigate the phases that the flow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was spread into Yeongnam region through him. Nam Han-jo originally studied under Lee Sang-jeong and succeeded to Yeongnam Yi School scholastic mantle. As he studied under Ahn Jeong-bok after his teacher died, he recognized the true nature of Western learning that was very problematic among Geungi Namin scholars and held critical position on it. While he was in charge of correction of 「Cheonhakmundab (天學問答)」 by his teacher’s recommendation, he left a book 「Ansunamcheonhakhokmunbyeonui(安順菴天學或問辨疑)」 that states his opinions and criticitisms. This book well shows Nam Han-jo’s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e tendency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done by 18th century Geungi Namin scholars affected Yeongnam region’s Namin with the medium of Nam Han-jo. Therefore, such scholars who had academic exchange with Nam Han-jo as Jeong Jong-ro, Jo Sul-do, HwangYong-han, Shin Che-in and Lee Dong-geub left their own books that contain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In addition, Ryu Geon-hyu, who was a pupil of Nam Han-jo, wrote 『Yihakjibbyeon (異學集辨)』. As shown above, Nam Han-jo played a great role in spreading anti- Western learning awareness throughout Yeongnam region in the late 18th century. 본고는 영남 출신 남인 학자 남한조南漢朝의 학문적 계보와 생애사를 검토하여 그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의 형성 과정과 실질을 살피고, 그를 통해 영남 지역으로 서학 비판의 흐름이 확산되어 가는 국면을 탐색하였다. 남한조는 경상도 상주尙州 출신으로서 본래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한 영남 이학파理學派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승 사후에 다시 안정복安鼎福에게 나아가 수학하면서 당시 근기 남인 사이에서 큰 문제거리가 되고 있던 서학西學의 실체를 인지하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스승의 권유로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대한 교정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개진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라는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서학이 치성하게 된 원인을 탐색하다가이성호천주실의발변의李星湖天主實義跋辨疑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두 저술은 남한조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18세기 후반 근기 남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서학 비판의 흐름은 남한조를 매개로 하여 이상정 문하의 영남 이학파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남한조와 교유하던 영남 지역의 여러 문인들, 예컨대 정종로鄭宗魯, 조술도趙述道, 황용한黃龍漢, 신체인申體仁, 이동급李東汲은 각각 반서학적 인식을 담은 저술들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남한조의 제자였던 류건휴柳健休는 『이학집변異學集辨』을 찬술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반서학적 인식과 흐름이 근기 지역에서 영남 지역으로 확산되고, 영남 지역 안에서 반서학 정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남한조의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 〈闢衛新編 評語〉를 통해 본 ?齋 朴珪壽의 천주교 인식과 대응론

        조지형(Cho Jihyoung)(趙志衡)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1 누리와 말씀 Vol.- No.29

        윤종의(尹宗儀)의 『벽위신편(闢衛新編)』은 ‘척사론(斥邪論)’과 ‘해방론(海防論)’의 두 축을 근간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서양 세력의 침입을 막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의 반영물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편찬물로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당시 서양 세력의 침입과 천주교의 확산이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중국과 조선 지식인들의 지적 고민이 망라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박규수(朴珪壽)의 〈벽위신편 평어(闢衛新編評語)〉는 『벽위신편』에 대한 평어(評語)이자 발문(跋文)의 성격을 지닌 글이며, 해방론 쪽으로 치우친 『벽위신편』에 자신의 척사론을 덧붙여 척사론과 해방론의 두 축을 균형감 있게 보완하려는 성격의 글이다. 아울러 천주교에 대한 억압과 탄압만으로는 천주교의 확산을 막는 데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이에 자신이 생각하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고자 한 논설이기도 하다. 본고는 〈벽위신편 평어〉가 이렇듯 본래 천주교에 관한 척사론의 입장을 담고 있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선행 연구에서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측면에 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선행 연구 성과를 충실하게 수용하는 가운데 〈벽위신편 평어〉에 나타난 박규수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에 논하였다. 〈벽위신편 평어〉에 나타난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은 크게 5가지로 나타난다. ① ‘천(天)’ · ‘천주(天主)’ 용어 사용에 대한 비판,② ‘서학중국원류설(西學中國源流說)’의 긍정과 동도(東道)에 대한 우월의식, ③ ‘천주강생설(天主降生說)’에 대한 비판, ④ 교파(敎派) 분열의 실상 고발, ⑤ 천주교의 침략성과 포교(布敎) 의도 대한 비판. 이 가운데 ④와 ⑤는 기독교의 교파 분열 상황과 서양의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 천주교를 비판한 방식으로 다른 척사론자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박규수는 천주교의 확산을 막고 천주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천주교 관련 서적에 대한 연구를 통한 비판 방법을 제기하였다. 박규수의 이러한 천주교 대응 방식은 유학(儒學)의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억압과 탄압 방식으로는 천주교 확산을 저지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의 해결책을 모색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尹宗?的《??新?》以“斥邪?”?“海防?”?理?核心,?述了在“西???”的情?下“如何阻止西方的入侵”?一??。?不能??地定性??人作品,可以??反映了??中朝知?分子?共同面?“西方?家的入侵及天主?的?散”?一危机而?生的普遍疑?。 朴珪?的〈??新???〉?是?《??新?》的??,又是具有跋文性?的文章。同?,??在偏重于海防?的《??新?》中附加自己的斥邪?,意在平衡“斥邪?”?“海防?”???理?核心的比重。而且,著者提出“?依?抑制和打?天主?的措施,?根本上阻止天主?的?散是有局限性的”?一??,??此?述了自己??行之有效的??方案。 在〈??新???〉中,?管包含了?天主?的“斥邪?”的立?,而在以往的硏究中未能?著者“?天主?的?????方案”的角度上?行深度硏究。基于?一点,?者在充分收容先行硏究成果的前提下,探?了在〈??新???〉中出?的朴珪??天主?的?????方式。 〈??新???〉中出?的?天主?的批判,主要分以下五点:①、?天主?使用“天”、“天主”等??的批判;②、?“西?中?源流?”的肯定??方儒?的?越意?;③、?“天主降生?”的批判;④、揭露?派分裂?情;⑤、?天主?的侵略性???企?的批判。其中,④、⑤是通?例?基督?的?派分裂情??西方的?史事??天主??行批判的,?是在其他“斥邪?”?者的??中?不到的一??新的方式。最后,朴珪?以阻止天主?的?散、??天主?徒?目的,提出了通?硏究天主?相??籍而?行批判的方法。朴珪?的?一?天主?的??源自著者他本人??方儒??越性的自信。而且,他??楚地??到用?迫???的方式在阻止天主??散方面具有局限性?一点,?而探索了上文所述的解?方案。

      • 최양업 신부 소작 天主歌辭의 목적과 특성

        조지형(趙志衡) 인천가톨릭대학교 복음화연구소 2013 누리와 말씀 Vol.- No.34

        본고는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가 지은 천주가사를 둘러싼 몇 가지 주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아울러 그가 지은 가사 작품들의 특성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지은 작품들은 천주가사의 사적 전개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단일 작가로서는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을 지었고, 작품이 지니고 있는 위상과 영향력이 크며, 내용적으로 발생기 천주가사에서 보이고 있는 천주교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논조에서 벗어나 천주교의 교리와 가르침을 쉽게 해설하여 널리 알리는 단계로 진입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본고는 선행연구의 성과를 기반으로 최양업 신부 소작 천주가사의 친저성 여부, 작품의 범주, 창작의 시기와 목적, 작품의 특성 등에 대한 진전된 논의를 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간 최양업 신부가 지었다고 알려진 22편의 천주가사 작품 중에 작자가 명확히 밝혀진 4편은 작자를 바로잡아야 하며, <십계강론>은 민극가로 추정하고, <사향가>는 작자미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이들 작품을 제외한 16편만을 최양업 신부의 저작으로 보아야 한다. 최양업 신부는 한글이 전교 활동과 신자들의 교리 교육에 좋은 계제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초기에 효과적인 사목활동의 일환으로 국문으로 된 가사 양식을 활용하여 작품을 창작하였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가사를 지은 것은 국내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한 초기, 구체적으로는 1851년 10월을 전후한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 받을 준비를 하는 예비신자들에 대한 교리 교육에 활용하려는 목적이 강하였다. 이러한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형식적으로는 짧은 분량의 단형 구조, 반복과 대비 구조, 교환창 구조 등을 취하여 교리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함은 물론 암송을 쉽게 하며, 나아가 노래로 읊조리거나 음송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용적으로는 천주교 핵심 교리를 설명하고, 사후세계에 대한 심화된 해설을 통해 신자들이 교리에 대한 학습을 통해 신앙생활의 기반을 삼을 수 있게 하는 한편, 천주교 신자로서의 생활 태도를 강조하였다. 本稿的目的是围绕崔良业神父所作的天主歌词谈论几个主要问题, 以及分析他所作歌词作品的特性。崔良业神父所作的作品在天主歌词的私人展开侧面具有重要的意义。仅作为作家他著作了许多作品, 作品所具有的威像和影响力非常大, 从内容上摆脱了形成期的天主歌词中表现的对天主教的拥护和批判的论调, 简单易懂地解释天主教的教理和教导, 进入宣传普及的阶段这一点就可以看出来。对此, 本稿将基于先行研究的成果, 对崔良业神父所作的天主歌词的亲著性与否、作品的范畴、创作的时期和目的和作品的特性等开展真正的论议。 首先, 对过去崔良业神父所作的有名的22篇天主歌词作品中作者明确地发表的4篇应确定作者, 建议推定<十诫讲论>的作者为闵克可, <思乡歌>的作者不详。只能认为除了这些作品以外的16篇为崔良业神父的著作。 崔良业神父明确地意识到韩文将对传教活动和信徒们的教理教育提供非常好的机会。因此, 他回到国内开始活动的初期, 作为高效的司牧活动的一环, 利用国文的歌词样式创作作品。崔良业神父著作歌词是在他回到国内开始活动的初期, 推测具体在1851年 10月左右的时候。其主要目的是用于对加入天主教和准备接受洗礼的预备信徒们的教理教育。 为了附应这个目的, 形式上采用了短小分量的单形构造、反复和对比构造、交换唱构造等, 不仅可以让人容易地理解教理的内容, 而且易于背诵, 且可以用歌曲哼唱或吟诵。从内容来看, 一方面说明了天主教核心教理, 通过对事后世界的深化解说, 让信徒们通过教理学习奠定信仰生活的基础, 另一方面强调了天主教信徒的生活态度。

      • KCI등재

        퇴계 『논어석의論語釋義』의 편찬 의도와 성격

        조지형(趙志衡) 한국국학진흥원 2011 국학연구 Vol.0 No.19

        본고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논어석의論語釋義』를 대상으로 이 책이 편찬된 경위를 살피고 이를 통해 편찬 의도와 성격에 대해 재론한 것이다. 퇴계가 『논어석의』를 편찬한 시기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반포된 지 약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사림士林들이 정권을 장악한 지 5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림파들에 의해 성리학의 관점에 입각한 주석서들이 일부 나오기 시작하는 등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는 일부 우리말로 풀이한 현토류懸吐類·언해류諺解類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현토류·언해류 가운데는 경서의 역해譯解 과정에서 천착한 곳, 틀린 곳이 많아서 배우는 자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퇴계가 석의釋義를 기획한 의도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치에 맞지 않은 해석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에 퇴계는 주자의 해석인 집주集註를 근간으로 해서 기존의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논어석의』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퇴계는 『논어석의』를 편찬하면서, 권근權近·류숭조柳崇祖·김계조金繼 趙·이극인李克仁·손경孫暻·이득전李得全·이충작李忠綽·신광한申光漢·이 언적李彦迪 등의 학설과 언석諺釋을 비교·고찰하였으며, 또 중국의 여러 주석가들- 쌍봉 요씨雙峰饒氏·신안 진씨新案陳氏·인산김씨仁山金氏·남헌 장씨南軒張氏-의 학설도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일부 수용하여 자 신의 주장에 근거를 삼고 있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서적들도 참 고하였다. 『논어석의』는 기본적으로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와 삼경 三經에 기반하고 있으며, 아울러 13경 가운데 하나였던 『논어주소論語注疏』도 참고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집주의 본의를 확인하기 위해서 필 요한 경우에 『주자어류朱子語類』·『주자대전朱子大全』·『문헌통고文獻通考』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또 『장자莊子』를 참고하기도 하였다. 본고는 퇴계의 『논어석의』가 순수한 개인 연구 주석서일 뿐만 아니라, 후학 및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성격이 짙은 저술로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논어석의』는 『논어』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해석이 분분한 구절이나 난해구 등을 위주로 해설하고 있다. ②퇴계의 『논어석의』는 전체적으로 본문을 언해諺解로 풀이하는 방식을 취하 고 있다. 여기에 정확한 우리말 독음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③사서삼경석의四書三經釋義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들과 주고받은 문답을 수록하고 있다. 제자들의 실명을 적시摘示한 경우도 있다. ④『논어석의』의 편찬 시기는 도산陶山에 은거했을 때이므로, 퇴계의 행적으로 보아 교육을 통해 후진을 양성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⑤『논어석의』는 어구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어 주는 해설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실제 수업에 기인한 방법들이다. ⑥경서經書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주요 어휘들을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퇴계는 『논어석의』의 편찬을 통해 종래 해석이 분분한 구절들에 대해서 주희朱熹의 집주集註를 근간으로 우리말로 풀이된 모범적인 해 석을 제시하고, 이를 제자들의 교육에 적극 활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KCI등재

        조성당<SUB>操省堂</SUB> 김택룡<SUB>金澤龍</SUB>의 예안<SUB>禮安</SUB> 생활과 시조<SUB>時調</SUB> 창작

        조지형(趙志衡) 한국국학진흥원 2018 국학연구 Vol.0 No.35

        본고는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의 생애 주요 면모와 풍류 양상을 살피고 그가 창작한 시조의 산출 맥락과 의미를 탐색하였다. 김택룡은 경상도 예안禮安에 세거한 사족으로서 조목趙穆과 이황李滉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로서, 중년의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다가 광해군의 혼란한 정국을 목도하고 벼슬을 단념한 채 다시 낙향하여 치사한객으로 노년을 보냈다. 노년기 김택룡은 안정된 경제적 기초위에서 연륜으로 보나 학문적으로 보나 지역 사회 안에서 높은 위상을 점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의 풍류 생활을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그의 풍류상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거처 주변에서의 한거閑居와 독락獨樂. 지역 사대부들과의 풍류風流와 공락共樂이 그것이다. 김택룡은 여유로운 일상생활 속에서 홀로 집 주위의 정자, 누대, 연못, 시냇가를 거닐면서 계절이나 경치를 완상하면서 이에 대한 소회를 토로하기도 하고, 지역 사회 안에서 지연·혈연·학연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벌이고 질탕한 즐거움을 누렸다. 이 과정에서 시문을 향유하고 춤과 노래를 즐겼는데, 한시창과 국문시가가 함께 창수唱酬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택룡의 시조 창작과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언급하여야 할 부분은 그가 한글 사용에 능숙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중요하게 살펴야 할 점은 지역과 학맥으로 이어지는 국문시가의 창작·향유 맥락이다. 특히 그가 공사간에 긴밀하게 교유했던 인물 중에 정구·박선장·정경세·이시 등이 모두 시조를 창작하였다. 이처럼 김택룡은 16~17세기 경북 지역의 시조 작가들과 여러 층위로 얽혀 있는 바, 그의 시조 창작 또한 이와 영향 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김택룡의 시조 작품은 재출사의 권유에 대한 답변 형식이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신을 표출한 것으로서, 정치 현실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명철보신을 꾀하는 독선獨善 의식과 더불어 안빈 속에서도 개결介潔함을 유지하려는 작가의 처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택룡은 16세기 이래 지속되었던 경북 예안 지역 사대부 풍류의 전형을 보여주며, 시가사적으로는 17세기 초반 퇴계의 문인 제자들로 이어지는 시조 창작의 흐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major aspects of the life of Joseongdang Kim Taek-ryong and his life of tasting arts, and investigated the producing context of his Sijo and its meaning. Kim Taek-ryong, as a nobleman who resided in Ye-an area, Kyeongsangdo and inherited the scholarly lineage of Jo Mok and Lee Hwang, entered a government office in his middle age and watched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 of in the period of Kwanghaegun, so he resigned his position and returned back to his home town and spent his old age as a leisurely man. Kim Taek-ryong held high status in local society by years’ experience and scholarly position based on his stabled economic background, and this enables him the life of tasting arts. His life of tasting arts could be classified in two. First, the leisurely living and sole enjoyment of the arts. Second, tasting and enjoyment of the arts with the local gentries. In this process, they enjoyed poems and writings, dances and songs, and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they enjoyed Chinese poem and songs and Korean poems and songs together. The important point related to Kim Taek-ryong’s composing a Sijo is the context of the composition and enjoyment of Korean poem and song, which was inherited by area relation and scholarly lineage. Particularly among people he closely associated with, Jeong Gu, Park Seon-jang, Jeong Kyeong-se and Lee Si etc. composed Sijo. The Sijo work of Kim Taek-ryong is the form of the response on the recommendation for retaking government office and the expression of the conviction he had, and it could be the work in which author’s conduct to keep his righteousness and cleanness in peaceful life along with the consciousness of self-righteousness for preserving wisdom and self protection through keeping distance with the political reality is outstanding. Kim Taek-ryong shows the typical model of the gentry’s life of tasting arts, which has been continued since 16th century in the area of Ye-an, Kyeongbuk, and he hold a position in the flow of Sijo composition which was succeeded to scholarly students of Toegye in early 17th century in the history of Korean poems and songs.

      • 順菴 西學認識의 계승과 확장, 黃德壹의 <三家略>

        조지형(趙志衡) 인천가톨릭대학교 복음화연구소 2014 누리와 말씀 Vol.- No.36

        본고는 공백당(拱白堂) 황덕일(黃德壹)의 저술 <삼가략(三家略)>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의 서학 인식의 형성 과정과 그에 대한 비판과 대응 양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황덕일은 동생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과 더불어 안정복(安鼎福)의 학문과 사상을 전수한 수제자로서, ‘이익 → 안정복 → 황덕일・황덕길’로 이어지는 학통을 형성한 인물이다. 그는 안정복 문하에서 주자학을 근간으로 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승이 지니고 있었던 서학의 확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다. 이에 황덕일은 스승인 안정복에게 편지를 보내 성호 이익의 저술 가운데 서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서적들을 간행하기를 청하는 한편, 문답을 통해 서학의 폐해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안정복 사후에도 황덕일은 주변 인사들에게 서학의 확산을 막기 위한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서학에 발을 들여놓은 동류들에게는 유학의 가르침으로 복귀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황덕일의 <삼가략>은 도가・불교와 함께 서학을 이단으로 지목하여 비판한 저술로 그의 서학 인식을 집약하고 있다. 황덕일은 주자학을 현정(顯正)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가략>을 저술하여 도・불・서 삼가에 대한 이단성을 파헤치고 있으며, 이를 우선적으로 가문 내의 자제들과 자신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에게 전수하고자 하였다. <삼가략> 서학 부분에서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주요 서학서적의 논점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비판의 논설은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의 견해를 가져와 활용하고 있다. <삼가략>에 나타난 서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서학은 노・불의 주장을 합하고 유가의 상제를 가탁한 것이라는 점. 둘째, 유・불・도 삼교의 학설을 차용하고서도 오히려 삼교를 온전히 배척한다는 점. 셋째, 실제로 서학은 노・불의 하승(下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넷째, 장차 서학이 제멋대로 사설을 행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 해로움은 과거 노・불보다 더 심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강력한 배격의 의지로서 결말을 맺고 있다. 이러한 황덕일의 서학과 서양 인식은 오히려 이익과 안정복의 사례보다 더욱 비판적이고 배타적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本稿的目的是通过分析拱白堂黄德壹的著述<三家略>查明他的西学认识的形成过程及对他的批判和对应的样态。 黄德壹与弟弟下庐黃德吉是传授安鼎福的学问和思想的大弟子, 是形成由‘李瀷→安鼎福→黄德壹・黃德吉’承传的学统的人物。 他在安鼎福门下掌握了以朱子学为基础的学问, 在该过程中自然而然地与老师的西学扩散的问题意识形成了共识。 对此, 黄德壹向安鼎福请求刊行李瀷的著述中坚持对西学的批判立场的书籍。 通过问答声讨了西学的弊端。 此外, 还为了防止西学向周围的人士扩散请求了协助, 并向步入西学的同一流派呼吁恢复儒学的教导。 黄德壹的<三家略>是与道家・佛敎一起指责和批判西学为异端的著述, 集成了他的西学认识。 黄德壹为了恢复朱子学, 一边著述<三家略>, 一边揭露道・佛・西三家的异端性。 对此, 他要首先向家门内的弟子们传授。 <三家略>中出现的批判观点指出, 西学的学说认为儒・佛・道三家的主要内容存在假借的虚构性。 此外, 他还主张若对西学肆意散布邪说置之不顾, 其危害将比道・佛更严重。 因此, 通过强力的排击西学的意志了结。

      • SCOPUSKCI등재

        피부 악성 종양에서의 mdm - 2 단백 표현에 관한 면역조직화학적 연구

        조지형 ( Ji Hyeung Cho ),노영석 ( Young Suck Ro ) 대한피부과학회 1996 대한피부과학회지 Vol.34 No.4

        Background: The human homologue of mouse double minute 2(mdm-2) gene codes for a cellular protein that forms a complex with the mutant and wild type p53 protein and modulates its trans-activation activity. Overexpression of the mdm-2 protein is associated with the tumorigenic potential of mdm-2 gene and overcomes the growth suppressive activity of p53. Objective & Methods : In order to investigate the pattern of the mdm-2 and p53 expression in malignant skin tumors, we performed an immunohistochemical analysis using NCL-MDM-2p polyclonal antibody and DO7 monoclonal antibody, respectively, in 10 squamous cell carcinomas (SCCs), 8 basal cell carcinomas(BCCs), 5 malignant melanomas(MMs), and 6 fibrosarcomas (FSs). Results : The expression of mdm-2 protein was detected in 40% of SCCs, 25% of BCCs, 40% of MMs and 33% of FSs, whereas 40% of SCCs, 25% of BCCs, 20% of MMs, and 17% of FSs showed p53 positivity. One case of SCCs and one case of BCCs showed immunoreactivity with both anti-mdm-2 and anti-p53 antibodies. Within the limitations of this small sample size, there was no relationship between the expression of mdm-2 and p53 protein, as overexpression of these two genes was not mutually exclusive. Conclusion : These findings suggest that interaction between the mdm-2 and p53 genes and products in these malignant tumors appears to be heterogenous and more complex than previously realized. Further studies on molecular basis are required to characterize the mechanism of mdm-2 overexpression and its relation to p53. (Kor J Dermatol 1996;34(4): 538-545)

      • KCI우수등재
      • KCI등재

        痴巖 金鉉中의 생애와 시가문학

        조지형 ( Cho Jihyoung ) 한국시가학회 2022 韓國 詩歌硏究 Vol.55 No.-

        본고는 17세기 중반~18세기 초 평안도 영변(寧邊)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치암(痴巖) 김현중(金鉉中)의 생애와 그가 남긴 시가 작품을 살펴보았다. 김현중과 그의 시가문학은 평안도 지역 향촌사족의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역 문학 연구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조선 후기 시가사를 보완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김현중은 평안도 영변 지역 유자로서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에 뜻을 지녔으나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세거지에 머물면서 ‘일향지선사(一鄕之善士)’로서의 삶을 보냈다. 이로 인해 지역 안에서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관찬 지리지인 『영변지(寧邊志)』의 ‘사(士)’ 항목 첫머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가 하면 ‘문예(文藝)’ 항목에도 그의 시문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 문인으로서의 위상이 특별하다. 본고에서는 김현중의 대표작품으로 <화류사(花柳詞)>와 <향산록<香山錄)>에 주목하였다. 이 두 작품은 김현중의 생애 주기 및 표기 언어 표현 양상으로 볼 때 그 대표성이 인정된다. 국문 가사 <화류사>는 남성화자를 중심으로 여인과의 만남, 이별, 그리움, 재회소망 등을 표현한 애정가사 형식을 띠면서, 자신을 괴롭힌 여마(女魔)를 위무하여 원한을 풀어내고자 하는 수사적 차원의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향산록>은 묘향산 명소들을 두루 돌아보면서 비경(祕境)이 주는 유심한 감회에 젖어들기도 하고, 환상적 풍경 속에서 신선이 된 듯한 분위기에 도취하기도 하며, 술에 취한 호방한 정취를 드러내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This paper explored the life of Kim Hyeon-jung(金鉉中), a literary man who worked in Yeongbyeon(寧邊), Pyeongan-do, from the mid-17th century to the early 18th century, and his poetry literature. Kim Hyeon-jung and his poetry literature are meaningful in expanding the scope of local literature research and supplementing the poetry hist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in that they show examples of the aristocratic class in provinces in Pyeongan-do. Kim Hyeon-jung, a Confucian scholar in Yeongbyeon, Pyeongan-do, had a will to enter the world through the past but failed to achieve it and spent his life as a local celebrity while staying in his residence. For this reason, it was highly regarded literary in the Pyeongan-do region. In addition, his status as a local literary man is so unique that he is listed at the beginning of the “scholar” item of 『Yeongbyeonji(寧邊志)』, a government-led geography book, and his poems are included in the “literary arts” item. In this paper, attention was paid to < Hwaryusa(花柳詞) > and < Hyangsanrok (香山錄) > as representative works of Kim Hyeon-jung. These two works are recognized for their representativeness in their life cycle and written language notation. < Hwaryusa > can be understood as a rhetorical work to relieve resentment by appeasing the woman who harassed her, taking the form of a love poem that expresses meeting, parting, longing, and reunion wishes, centering on male speakers. < Hyangsanrok > looks around the Myohyangsan Mountain(妙香山) attractions, immerses in the impressions of the beautiful scenery, expresses the atmosphere of being fresh, and reveals the appearance of enjoying alcoh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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