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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Yi JongWoo)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08 교육연구 Vol.44 No.-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 나타난 유학에서 그 용어를 엄밀하게 써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유학의 인, 성리학 등이 그러하다. 유학이란 공자, 맹자, 순자 그리고 후대의 주희까지도 포함한다. 성리학도 마찬가지로 주희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정호와 정이 그리고 후대의 학자인 이황과 이이의 이론까지도 포함한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정확한 표현에서 적절하지 않은 설명이 나타나고 있다. 인을 ‘어짐’,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을 비롯하여 ‘天命之謂性’을 ‘천성은 인성과 같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이황의 理發而氣隨之와 氣發而理乘之, 이이의 氣發而理乘之는 사단칠정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현행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서 과거의 유학을 현대의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것이 정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High school ethics textbook not strict on Confucianism conception. It is example humanity〔仁〕and New Confucianism. Confucianism include Confucius and Mencius and Xunzi and Zhuxi. New Confucianism include not only theory of Zhuxi but also Cheng Hao and Cheng Yi and Yi Hwang and Yi Yi. High school ethics textbook not strict on Confucianism contents. It was write that humanity〔仁〕translate benevolence or love. It was write that god an order equal human nature translate nature of god equal nature of human. It is not strict that mutual revelation of Yi Hwang and one side revelation Yi Yi of theory principle〔理〕and vigor〔氣〕. It is theory of four virtue and seven emotion of Yi Hwang and Yi Yi. High school ethic textbook not write on theory of four virtue and seven emotion of Yi Hwang and Yi Yi. High school ethics textbook not strict on Confucianism conception and theory.
이선경(Yi Suhn-gyohng) 한국양명학회 2011 陽明學 Vol.0 No.28
주희(朱熹)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은 조선의 상수역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문헌이다. 이 논문은 조선의 『역학계몽』 관련 연구들 가운데,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이해를 살펴본 것이다. 이황(李滉)의 『계몽전의(啓蒙傳疑)』는 조선의 『역학계몽』 관련 저작 가운데 최초의 본격적 연구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저작은 특히 후대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본고에서는 이황이 『계몽전의』를 저술한 문제의식이 무엇이며, 『계몽전의』에서 다룬 주요 쟁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것이 후대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연구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밝힌다. 그리하여 퇴계학파 『역학계몽』 이해의 종합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역학계몽』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도모하였던 이황의 태도는 후세의 연구자들에게도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나며, 주석들 간의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하는 연구방식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계몽전의』를 묵수하거나 옹호하는데 있지 않으며, 『계몽전의』를 통하여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다시 쟁점화하고, 그에 대한 조선의 선배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하며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이렇게 『계몽전의』를 중심으로 연구사의 축적을 통해 『역학계몽』 이해의 완전성을 추구해가는 모습은 다른 학파와 구별되는 퇴계학파 『역학계몽』 연구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계몽전의』에 나타난 태극논의는 이황이 상수학(象數學)을 통하여서도 리(理)의 필연성과 주재력을 확보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주며, 이는 『계몽전의』 가상수학 저술이지만 그 안에 이학적(理學的) 관심이 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다만 후대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연구에서는 이학적 관심이 뚜렷한 경우와, 이학적 관심과는 별도로 도수적(度數的) 연구에 치중한 경우로 나뉨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19세기 저작들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이는 퇴계학파 안에 내재하던 하나의 흐름이 19세기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으로 생각된다. Zhu Xi’s Yi Xue Qi Meng(『易學啓蒙』) is the core text in understanding the Image-Number(象數) Theory of Chosun Dynasty. Among the literature on Yi Xue Qi Meng during Chosun period, this article focuses on the work of the school of Toegye (退溪). Yi Hwang’s Qi Meng Zhuan Yi (『啓蒙傳疑』) is known as the first full-scale research work of Yi Xue Qi Meng written in Chosun period. It also had tremendous influence upon the subsequent research of Yi Xue Qi Meng in Chosun. This article has three aims: it (ⅰ) examines Yi Hwang’s motivation of writing Qi Meng Zhuan Yi, (ⅱ) spells out the main issues appearing in Qi Meng Zhuan Yi, and (ⅲ) investigates how it affects the subsequent study of Yi Xue Qi Meng performed by the followers of Toegye. As a result, this article will reveal principal characteristics of Yi Xue Qi Meng research performed by the school of Toegye. Just as Yi Hwang, his followers sought perfect understanding of Yi Xue Qi Meng while resolving the inconsistencies among the annotations of the text. In doing so, they did not merely keep to Qi Meng Zhuan Yi. Rather, they raised questions on the unresolved issues in the text, examined the predecessors’ views on them, and developed their own solutions. Their work is distinct in that they pursued the perfection in understanding Yi Xue Qi Meng by means of accumulating research on Qi Meng Zhuan Yi. The discussion of Tai-Ji (太極) in Qi Meng Zhuan Yi reveals that Yi Hwang intended to establish the necessity and predominance of Li (理) even in his theory of Image and Number (象數學), which suggests that Qi Meng Zhuan Yi embraces the subjects of Neo-Confucianism, though it is primarily a work of image-number theory. Later the analyses of Yi Xue Qi Meng diverged among the followers of Toegye: some took an interest in the theory of Li while others concentrated on the study of nature. In particular, the theoretical traits of the latter are conspicuous in their work in the 19th century, which suggests that one stream of Toegye School bore fruit in the 19th century.
이선열 ( Sun Yuhl Yi ) (사)율곡연구원 2016 율곡학연구 Vol.32 No.-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performed by Yi Hyun-Ik. Yi belonged to Rakhak(洛學) in Yulgok school in the Joseon Dynasty in the 18th century. Yi``s view on this issue can be recapitulated as two claims: (i) Yulgok was entirely right as regards to the relations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llings, and (ii) nevertheless, Toegye``s view on this issue, if examined closely to understand what it was originally meant, is not incompatible with Yulgok``s theory. This reveals the basic attitudes of Yi``s philosophy, which compromises the two great philosophers`` views. At the same time, Yi provides criticisms on their views. He attempted to reach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while pointing out the problems one may face taking Toegye or Yulgok``s view tendentiously. In sum, Yi``s view o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is the result of accommodating both Toegye``s and Yulgok``s philosophies, and, at the same time, of critically examining their view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Yi``s view lies in the fact that it clarifies the complex issues raised by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within his own line of thinking, as opposed to merely following previous discourses.
오이환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7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1 No.-
본고는 대북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인홍의 생애와 사상을 광해군 시기에 한정하여 조명해 보고자 하는 연구의 첫 단계로서, 대북정권이 성립하기 전인 광해군 즉위년의 임해군 역모 사건으로부터 그 3년의 晦退辨斥 시기까지 4년간을 다룬다. 간행된 『來庵集』의 저본을 비롯한 근년에 발견된 고문서들을 주된 자료로 삼아 편년 형식으로 재구성해 본 것이다. 광해군 시기 전체에 걸쳐 왕실 내부의 인물이 관련된 역모사건에 대해 남인과 서인은 천륜의 명분을 중시하는 全恩論을 주장한 반면, 북인은 군신의 명분을 우선시하는 討逆論으로 기울었다.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의 문제로서 예학논쟁의 성격을 지닌 당쟁이었다. 전은과 토역의 논쟁은 마침내 明에 대한 事大 의리와 함께 인조반정의 양대 명분 중 하나로 되었다. 임해군의 逆獄에서 전은론자들의 주장은 억울하게 형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며 임해군은 선조의 여러 왕자 중에서도 광해군과 어머니를 같이 한 유일한 형제이므로 義와 恩을 아울러 극진히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임해군에 대해 전은론을 주장한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옥사가 성립된 후에 전은을 입에 담는 자가 역적을 비호하는 사심이 있는 것이 아니면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하의 公義요, 은혜를 펴는 것은 임금의 私情이기 때문이다. 광해군 3년 3월에 우찬성 정인홍은 사직차를 올려, 자신의 스승인 조식 · 성운의 학문과 인격이 이황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 폄하된 점을 해명하면서, 지난해 문묘에 종사된 조선조의 5현 중 이언적과 이황, 그 중에서도 주로 이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이 첫 상소를 하고, 뒤이어 조정의 전 ·현직 관료와 지방 유생들이 계속 의견을 개진하며 정인홍을 성토하였다. 광해군은 계속적인 성토의 움직임을 이와 같은 기회를 틈타 정인홍을 숙청하기 위한 정쟁으로 간주하였다. 8월 성균관에 걸려 있었던 정인홍의 유적 삭제에 대한 방이 왕명에 의해 철거됨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晦 · 退 비판으로 말미암은 소란은 수습되었다. This is the first step of a study, which set limits to the Guanghae-gun period, to elucidate the life and thought of Jeong In-hong who was the spiritual prop of the Daebuk regime, It covers the period from the conspiracy of Imhae-gun which occurred in 1608, the year of Guanghae-gun's enthronement to the critique on Yi Eun-jeog and Yi Hwang in 1611. Through the whole Guanghae-gun period, Seoin and Namin parties asserted benevolence stressing on the moral obligations of man's natural relations, whereas Bugin party asserted punishment which put priority on the moral obligations between sovereign and subject. It was the matter of Neo-Confucian moral obligations and a party strife with the character of dispute on decorum. At last, the dispute on benevolence and punishment became one of the two main causes of Injo coup and could be considered as a former step of the dispute on decorum in latter Yi dynasty. In the case of Imhae-gun's conspiracy, the persons who asserted benevolence emphasized to protect the innocent and apply full grace and justice to Imhae-gun who was the only maternal brother of Guanghae-gun among the many princes of King Seonjo. Jeong In-hong criticized severely the ministers who asserted benevolence on Imhae-gun. According to him, when the treason case was materialized, the persons who talked about benevolence were going to protect the criminal with selfish motives or took no notice of king. Because it is common duty of the subjects to liquidate the traitor and it is the personal sympathy of the sovereign to give grace to him. In March of the third year of Guanghae-gun's rule, Jeong In-hong submitted his resignation to the king, explicating the fact that his teacher Jo Shik's and Seong Oon's learning and personality had been unjustly distorted and devalued by Yi Hwang, he sharply criticized Yi Eon-Jeog and Yi Hwang, mainly Yi Hwang, among the five sages who were decides last year to be co-worshipped with Confucius in Munmyo service. Soon after his resignation was submitted, the students of Seonggyunguan presented the first memorial to the king and the court officials of past and present chairs and the Confucians of provinces continued to censure Jeong In-hong. Guanghae-gun considered these movements of continual denounce as a political strife to purge Jeong In-hong and took advantage of this opportunity. When the expurgation notice of Jeong's name from the roster of Seonggyunguan was removed by king's order on August 12, the turmoil due to the critique on Yi Eun-jeog and Yi Hwang was settled at last.
미발과 그 공부에 관한 정조와 정약용의 문답 연구 - 호락논쟁과 관련하여 -
이종우 ( Yi Jong-woo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2023 퇴계학논총 Vol.41 No.-
正朝는 朱熹가 聖人과 衆人의 未發이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르다고 말하기도 한 것에 대하여 일관적이지 않은 모순이라고 여겨 정약용에게 질의했다. 이것은 호락논쟁의 쟁점이었는데 성인의 미발은 항상 中이지만 중인의 미발은 不中이면서도 중일 때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인과 중인의 미발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조의 질의에 대하여 정약용은 미발은 중인에게 없고, 성인에게만 있다고 답변하였다. 또한 주희는 미발을 復卦라고 말하기도 하고, 坤卦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정조는 주희의 말이 일관적이지 않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여 어떤 것이 주희의 定論인지 丁若鏞에게 질의했다. 이것도 湖洛논쟁의 쟁점이었다 정조의 질의에 대하여 정약용은 곤괘라고 답변하였고, 그것은 洛學 李顯益의 주장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정약용은 복괘와 곤괘를 미발의 중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는데 왜냐하면 괘는 『周易』, 중과 和는 『中庸』에 나오는 용어로서 반드시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李顯益과 달랐고, 주희 뿐만 아니라 정조에 대해서도 비판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주희는 미발시 공부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하여 정조는 어떤 것이 정론인지 정약용에게 질의했다. 이것도 호락논쟁의 쟁점이었는데 이현익은 미발이란 최상의 경지이기 때문에 그 공부가 가능하지 않고 靜의 상태에서 필요한 공부라고 주장한 반면에 朴弼周는 미발시 공부는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당시 낙학의 종장 金昌翕은 박필주를 지지하면서 이현익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湖學의 한원진은 김창흡을 지지하면서 이현익을 비판하였고, 그것이 주목할 만하다. 정조의 질의에 대하여 정약용은 미발시 공부는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그 공부를 愼獨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주희 뿐만 아니라 호락과 다른 맥락에서 미발시 공부가 필요함을 주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희는 신독을 已發공부로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조의 질의와 정약용의 응답에서 전자는 호락논쟁과 주자학에 의심을 통하여 엄밀한 학문을 하였고, 후자는 그들을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King Jeongjo regarded Zhu Xi’s mentions, the Not-Yet Aroused State in Mind of sage and ordinary person is the same or not, as contradiction. This was a controversial issue in Horak debate. That of sage always is equilibrium, whereas ordinary person equilibrium or non-equilibrium, according to Horak scholars. To King Jeongjo’s inquiry, Jeong Yakyong responded only sage has the Not-Yet Aroused State in Mind, whereas the ordinary person not so. Zhu Xi’s the Not-Yet Aroused State in Mind has been described Fuqua (復卦) or Kunqua (坤卦). King Jeongjo also regarded the descriptions of Zhu Xi as contradiction. This also was one of main issues in Horak Debate. At the time, Yi Hyeonik, a Rak scholar, claimed the State is Kunqua, not Fuqua, and the former is a decided theory in Zhu Xi’s latter years. By contrast, Gwon Sangha and Han Wonjin, a Ho scholar, criticized Yi’s claim, arguing it is not Kunqua but Fuqua. To King Jeongjo’s inquiry, Jeong Yakyong responded it is Kunqua, not Fuqua. This is similar to Yi’s claim. However, he argued the State cannot be described the Kunqua or Fuquau, because the terms are the different Confucian classics. This is different from Yi, and implies criticism of Zhu Xi and King Jeongjo. Also, Zhu Xi said the need self-cultivation in the State or not. For that matter, King Jeongjo inquired which to be a decided theory in Zhu Xi’s latter years. He regarded those of Zhu Xi as contradiction. This also was a main issue in the Horak Debate. At the time, Yi Hyeonik’s claim was not to need self-cultivation in the State because the State is the highest stage. By contrast, Park Pilju’s claim was to need self-cultivation in the State. About their debate, Kim Changhueup supported Park’s claim, criticizing Yi’s. Also, Han Wonjin supported Kim’s claim, criticizing Yi’s. In response to the inquiry of King Jeongjo, Jeong Yakyong’s claim is the need of self-cultivation in the State, and this is “watchful over oneself when one is alone”(愼獨 shendu). The need of self-cultivation in the State is similar to Park and Kim’s claim but self-cultivation as the Shendu is different from. This implies crticism of King Jeongjo’s mention and followed Zhu Xi. In the debate of King Jeongjo and Jeong Yakyong, the former sought an accurte study through criticism of Horak debate and Zhu Xi’s Neo-Confucianism, whereas the latter created a new horizon beyond them.
최영진(Choi, Young-jin),이선경(Yi, Suhn-gyohng)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한국학 Vol.37 No.2
이 글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역학자인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의 역학사상을 그의 주저 『주역상사신편(周易象辭新編)』을 통하여 고찰한 것이다. 이 글은 신후담 역학사상연구의 첫걸음으로 건괘(乾卦)를 중심으로 그의 『주역』해석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주역상사신편』은 신후담의 중기역학사상을 담고 있는 저작이다. 27세에 집필에 착수하여 33세에 완료한 이 저작에서 신후담은 정주(程朱)역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이미 자신만의『주역』해석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주역』의 편제에 대하여 신후담은『주역전의(周易傳義)』와 같이 전체를 12편으로 나누지만, 곤괘(坤卦) 이하의 배열구조는 옳지 않다고 보고, 경(經)은 경(經)대로, 전(傳)은 전(傳)대로 분류하는 건괘의 괘사?효사?단전?상전의 체제로 『주역』전체를 다시 편집한다. 이는『주역』의 ‘경’ 부분과 ‘전’ 부분에는 일정한 사상적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후담은 괘효사를 해석할 때 각 효의 자리(位)와 그에 따른 상(象)을 면밀히 분석한다. 상을 통하여 ‘의리’를 도출하며 점(占)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특히 효변(爻變)을 효사 해석의 구체적 방법으로 명시하여 각 효를 모두 효변에 입각해 풀이한다. 상과 효변에 입각한 『주역』 해석은 신후담에게 하나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는 정주(程朱)의 역학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조선 역학사에서 신후담 이전에 효변을 활용한 괘효사 해석의 사례는 간간이 있었지만,『주역』 효사 전체를 효변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사례는 아직 찾을 수 없다. 또한 한 세대 뒤 인물인 정약용(1762?1836)이 효변을『주역』 해석의 방법론으로 체계화하였음을 볼 때, 양자의 효변론에 대한 비교연구, 더 나아가 성호(이익)학파 역학사상의 특징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신후담의 역학은 ‘의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주의 역학을 계승하고 있으며, 효의 자리와 상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석·종합하고, 효변을 괘효사 해석의 중심방법론으로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주역』 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생각된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theory of Yi(易) held by Shin Hudam(愼後聃, 1702?1761) by examining his Zhouyixiangcixinbian(『周易象辭新編』). In particular, I focus on his interpretation of Qian Gua(乾卦) as it is the steppingstone of studying his theory of Yi. Shin starts to write Zhouyixiangcixinbian when he is 27 and finishes it at the age of 33. So, it represents his thoughts of Yi in the middle period of his academic career. In this book, Shin develops his own interpretation of Zhouyi (『周易』), drawing upon Cheng Yi’s and Zhu Xi’s theories. He divides Zhouyi with 12 sections as in Zhouyizhuanyi (『周易傳義』). However, unlike the existing way, he rearranged Zhouyi separating the Scriptures (經) from the Interpretations(傳). This reorganization reflects his view that there is a theoretic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different kinds of portions in Zhouyi. In interpreting the meaning of hexagram and the line, Shin fully analyzes the place of each line(爻) and its corresponding image(象). He draws out the implications of hexagram and the line without mentioning divination(占). Especially, he explicates each line based on the principle of lines’ change(爻變). Shin’s theory of Yi(易) is distinguished from Cheng Yi’s or Zhu Xi’s in that it is built upon the images and the principle of lines’ change in interpreting the lines. It also precedes one of the four interpretations of Zhouyi known as xiaobian(爻變) given by Jung Yakyoung(丁若鏞, 1762?1836). In conclusion, Shin’s theory succeeds Chen Yi’s and Zhu Xi’s in that it employs the implications (義理), whereas it differs from them in that it highlights the place of each line and its corresponding image and takes the principle of the lines’ change as the principal method of interpreting Zhouyi.
이동인(Yi Dong-In) 동양사회사상학회 2004 사회사상과 문화 Vol.10 No.-
정약용丁若鏞은 이이李珥로부터 약 200여 년이 지난 시기에 살았다. 따라서두 사람이 살던 시대의 사회적 현실과 사상의 흐름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학맥으로 보아도 이 두 사람을 직접 연결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회개혁사상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다고 여겨진다. 두 사람 모두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며 사회개혁에 뜻을 두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의 사상을 분석하면 달라진 사회현실이 어떻게 사상에 반영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이와 정약용을 떠나서 조선 중기와 후기의 사회개혁사상을 논하는 것은 아마도 무의미할 것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이들 두 학자의 개혁사상이 갖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나아가 사회현실의 변화가 사회사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본다. In this research we made a comparative study on the thoughts of Yi, Ih(李珥) and Jeong, Yak-yong(丁若鏞), focusing on their ideas of social reform. Our findings are: 1) The basic ideas and concepts of social reform of these two scholars are very similar, leaving the possibility open that the reformative ideas of Yi remains a model in the thoughts of Jeong. 2) Many minor differences between the reformative ideas of the two in fact reflect the socio-economic changes that happened after Yi's time. 3) Still we found some significant differences in the approaches to the social reform, such as found in the theories of land-reform. The last point is that: Yi's theories of reform were always practicable and reformative while those of Jeong were sometimes not easy to put in practice and quite revolutionary in nature.
18세기 경기도관찰사의 업무 실태와 특징 : 『畿營狀啓謄錄』을 중심으로
李仙喜(Yi Sun-hui)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장서각 Vol.0 No.23
이 연구는 경기도관찰사가 작성한 『畿營狀啓謄錄』를 분석함으로써 경기도관찰사의 업무실태와 업무특징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 『畿營狀啓謄錄』은 沈?之가 1783년(정조 7) 6월부터 1784년(정조 8) 6월까지, 윤달을 포함하여 약 13개월 간 작성한 장계를 정리한 것이다. 장계의 작성시기별, 업무분야별 집중도를 분석하여, 경기도관찰사의 업무 하중 정도와 중점업무 및 시기를 살폈다. 또한 경기도관찰사의 업무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嶺營狀啓謄錄』에 담긴 경상도관찰사의 업무내용과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지방통치의 운영 실제와 구체적 운영 방식을 규명하는 일단을 마련코자 하였다. 심이지는 재임기간 동안 평균 이틀에 3건 정도의 장계를 작성하였다. 심이지는 농형과 우택에 대한 장계를 가장 많이 작성하였고 다음으로는 진휼 관련 내용이었다. 장계가 집중된 시기는 1784년 윤3월과 6월이었다. 윤3월에 장계 건수가 가장 높았던 이유는 농형과 우택에 대한 장계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농형이나 우택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장계 외에 실제로 관찰사가 수행한 업무 중 빈도수가 높은 것은 진휼 업무였다. 경기도관찰사의 업무특징은 경기감영의 위치와 관련성이 짙어 보인다. 심이지가 경기도 관찰사에 재임하였을 당시에 경기감영은 도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심이지는 국왕이 부르는 즉시 입궐하여 국왕을 친견하여야 했다. 입시 횟수는 월평균 2.5회에 이르렀다. 입시와 함께 경기도관찰사는 능원묘가 많은 경기도의 지역적 특징과 국왕의 행차에 영향을 받았다. 능원묘에 대한 관리업무와 상언 · 격쟁에 의한 추가 조사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This study analyzes Ki-Yung-Jang-Gae-Deung-Rok, written by provincial governors of Gyeonggi-Do, so that it will show characteristics of the job of governor of Gyeonggi-Do. Ki-Yung-Jang-Gae-Deung-Rok is a document which was a paraphrased Jan-Gae by Sim Yi-Ji form Jun of 1783(Jung Jo 7) to Jun of 1784(Jung Jo 8). I analyzed it according to concentration of writing time and kind of jobs and then looked for work loads and main jobs of a provincial governor of Gyeonggi-Do. Through this, I tried to show specific methods of operation for local adminstration in the second half of Chosun. Sim Yi-Ji(沈?之) wrote three pieces of Jang-Gae(狀啓) every other day during his term in office. Jang-Gae relevant to agriculture and precipitation were top in the list of his Jang-Gae, and Jang-Gae relevant to relief followed. The periods, in which Jang-Gae was written intensively, were March(leap month) and Jun. The reason why the number of Jang-Gae in March(leap month) were the highest is that there were many Jang-Gaes relevant to agriculture and precipitation. Beside of Jang-Gaes relevant to agriculture and precipitation, the most frequent jobs of governors were ones related to relief. Characteristics of the job of governor of Gyeonggi-Do depends on the location of Gyeonggi Gam Yung(監營). Originally located in Su-Won, Gyeonggi Gam Yung moved to Gwangju and later relocated in Han-Sung Bu(漢城府) just outside of Don-Eu Moon. Gyeonggi Gam Yung had been located in the capital till 1886, when it moved to Su-Won. When Sim Yi-Ji started his term in office, Gyeonggi Gam Yung was in the capital. As soon as the king called him, he had to go to the palace and see the king in person. The number of his Ip Si(入侍) reached to average 2.5 in a month. Moreover he had to see the king when he had not been to the palace. Occasionally the king visited Gyeonggi Gam Yung on the way to somewhere else. Besides the king's the walk influenc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job of governor of Gyeonggi-Do. Because people used to submit Sang Un and Gyuk Jang when the king was out of the palace. About appeal to king(上言·擊錚), the king used to order reinvestigations with special Jun Gyo(傳敎). The governor had to reinvestigated the finished suits of the past. To confirm the characteristics of the job of governor of Gyeonggi-Do that I analyzed in Ki-Yung-Jang-Gae-Deung-Rok, I compared with the job of governor of Kyung-Sang-Do in Yung-Yung-Jang-Gae-Deung-Rok(嶺營狀啓謄錄). Yung-Yung-Jang-Gae-Deung- Rok was written from Jun of 1783 to March of 1784. Though my research was limited to two of provinces and there was a little time lapse, I conclude that the jobs of governors of Eight of Provinces had their own characteristics in relation to their regional characters.
1960∼70년대 이청준 소설에 나타난 권력의 중층성: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을 중심으로
이수형 ( Yi Soo-hyung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7 민족문학사연구 Vol.64 No.-
기존 논의를 통해 이청준 소설을 의미화하는 주요 계기를 모종의 억압에서 찾고자 하는 관점이 많은 동의를 얻어 왔으며, 나아가 그 억압을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정치권력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경향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청준 소설에 나타난 권력이 흔히 상상되는 것처럼 이항대립적이지 않고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는 이유는 소설에 반영된 당시 현실의 권력의 성격 자체가 중층적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있다. 이청준 소설에서 이루어진 권력 탐구를 대표하는 신문관이라는 존재는 주인공의 환상을 빌려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현실에서 작동했던 죽음의 권력으로서의 주권권력의 성격이 은폐되지는 않는데, 이는 피신문자가 전쟁을 겪으면서 체험한 과거에 대한 진술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1960~70년대는 주권권력의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때 규율권력의 주요 테크놀로지는 고백이다. 고백의 과정을 통해 작동하는 규율권력은 생산적 주체의 산출을 목표로 하지만 이청준 소설 안에서 번번이 실패하며, 이는 규율권력의 내면화 역시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자기계발을 수행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산출한 생명권력 역시 같은 시기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청준은 주권권력이 낳은 벌거벗은 생명의 참극을 폭로하고, 규율권력이낳은 생산적 주체를 거부하고, 생명권력이 낳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자기계발을 비판함으로써 권력 탐구와 비판을 수행한 대표적인 소설가로 자리매김된다. As the nature of power in reality is complex, the power in Yi Chong-jun`s novels is not contradictory. Despite being forced to appear in the hero`s fantasy, the nature of sovereign power as the power of death is not concealed. This is evidenced by a statement about the past war experience. The 1960s and 1970s were the era of sovereign power, but on the other hand, the age of disciplinary power and bio-power. The main technology of regulatory power is a confession. The power of discipline that works through the process of confession is aimed at the production of a productive subject, but fails repeatedly in Yi`s novel, which also shows that internalization of the power of discipline also fails. At that time, there was a period of bio-power that produced self-improvement and homo economicus. Yi is regarded as a representative novelist who explores the tragedy of the bare life created by sovereign power, rejects the productive subject created by the disciplinary power and criticizes the homo economicus created by the bio-power.
1950년대 후반 이승만정권의 ‘권력복합체’ 형성과 운영
이혜영(Yi Hye-young) 한국역사연구회 2019 역사와 현실 Vol.- No.112
Examined in this article is a core power group which supported and sustained Rhee Syngman’s one-man ruling of the country in the late 1950s. So far, this issue was mostly examined within studies that focused on the ruling party Jayu-dang(Liberal Party). According to those studies, coming into the late 1950s an oligarchy-type elite group -composed of several officials including Yi Ki-bung was formed within the Liberal Party, and from 1959 till the next year(when the regime collapsed), the party practically run the country from a dominant status, even sidelining the executive(administrative) branch. This kind of approach allowed us to view the Liberal Party which had only been considered as a tool for Rhee Syngman’s governing so far as yet another political entity that composed the very structure of governance. Yet at the same time, such studies -which also tended to ‘narrow’ the examination to the Liberal Party itself- ended up only discussing whether the party was able to serve as an actual ruling party or not, or emphasizing the existence of oligarchic elite group connecting the party and the cabinet and the expansion of the party"s influence in the operation of the state. In this article a larger focus will be placed on all three sources of power: the Liberal Party, the government’s Cabinet and the Presidential residence, Gyeongmudae[secretariat]. How they connected themselves with each other, and functioned within a singular structure, will be examined. Results indicate that there was a core power group -with Yi Ki-bung at the center- that connected all the above three sources, featuring a radial human network originating from Yi. Also confirmed is that there was a limit to the party’s control over the cabinet, and that the party and the cabinet had quite a ‘checks and balance’ sort of dynamic between 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