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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退溪先生 胎生風水 硏究 : 朱子 高祖母墓와 比較分析을 通하여

          김기선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3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2

          우리들은 흔히 '人傑는 地靈'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오랜 세월 風水地理 工夫를 하면서 필자는 有名人士의 先祖 山所에는 반드시 明堂이 있었음을 확인한 바가 있다. 따라서 筆者는 '東方의 朱子'라고 불리고 있는 退溪 李滉先生(1501-1570)처럼 大儒學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風水界에 잘 알려져 있는 眞城李氏 始祖산소, 퇴계선생 胎室, 그 옆의 祖父母와 父母山所 등을 보았으나 마음에 흡족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나머지 祖上 산소인 鳴洞의 2세 松安君(자좌 병오파) 내외산소와 佳邱洞 가매기 3세(高祖父) 云候(자좌 병오파) 산소, 道律洞 3세비 安東權氏 산소(자좌) 와 鵲山先生의 증조부모 李禎墓와 安東金氏墓(임좌)들을 찾았다. 새로 방문한 산소들 모두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高祖父 산소가 正穴에 入葬되고 朝山도 秀麗하여 상당히 좋았지만 主山이 높지 못하고 明堂局勢가 狹小하여 鵲山先生의 曾祖父母 산소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曾祖父母 산소를 찾은 순간, '바로 이 山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하였다. 主山이 文筆峯이요, 사방에 온통 一字文星이 둘렀으니 큰 學者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 유명한 鶴駕山을 太祖山으로 하고 있으니, 퇴계선생과 같은 大儒學者 겸 高官이 나오는 자리가 될 것이 아닌가? 退溪先生과 같은 큰 선비나 大儒學者를 배출하는 데에는 鶴駕山과 같은 名山의 힘을 받은 文筆峰이나 一字文星이 主山이나 案山으로 짜낸 調和로운 明堂局이 필요하다고 본다. 風水工夫를 깊이 하려면 中國의 古代典籍들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明나라 徐善繼·徐善述 형제가 지은 『人子須知資孝地理心學統宗』이란 책에 朱子(1130-1200)는 高祖母 程氏夫人墓가 좋아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래서 두 묘를 한번 비교해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程氏夫人墓는 일찍이 宋의 국사인 吳景鸞이 點穴하면서 課記에 "오랜 세월이 흐른 후 孔子와 같은 聖人이 나오리라(當出一賢人聰明如孔子)"고 예언을 하고 事實로 판명된 묘로도 유명하다. 穴場은 산의 높은 곳에 위치하는 데다 물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初代에는 不利하므로 擴中을 파서 마무리할 때에 큰 바위로 눌러서 덮어야한다고 하였는데 후에 과연 不利하여 이장하려고 하였으나 바위 바위 때문에 그쳤다고 한다. 1,059년 그 곳에 朱子의 高祖母 程氏夫人墓를 쓰고 그 후인 1,130년에 朱子가 태어나 이처럼 課記에 符合하니, 徐善繼·徐善述 형제의 말처럼, 누가 風水地理를 否定할 수 있겠는가? 이제 퇴계선생의 曾祖父母墓(李禎墓)와 程氏夫人墓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첫째, 大儒學者(文章·科第·顯貴·名譽)를 상징하는 커다란 文筆峰이 李禎墓에는 主山이 되었으나 程氏墓에서는 案山(鵝子峰)과 朝山(信州鴉山)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 穴이 氣運을 받음에 있어 位置上으로는 主山이 더 좋지만 穴 자리의 性格을 端的으로 나타내는 案山과 朝山도 穴 자리가 힘이 있으면 무방하다. 李禎墓의 主山 文筆峰이 좀 弱한듯 하나 太祖山인 鶴駕山과 龍虎 및 案山의 一字文星이 補完해 주고 있다. 둘째, 坐向은 兩墓 共히 壬坐丙向이다. 셋째, 兩墓 共히 龍虎는 一字文星이다. 넷째, 兩墓 共히 重重包裏하여 調和로운 明堂局을 만들었다. 다섯째, 兩墓 共히 물이 九曲으로 흘러나간다.(程氏墓 처음은 元辰水) 여섯째, 兩墓 共히 穴 뒤쪽의 頭腦部位가 豊富하다. 以上에서 共通點을 추출해 보았으나 兩墓의 相異點을 對比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李禎墓는 낮은 곳에 위치하나 程氏墓는 높은 곳에 있다. 둘째, 李禎墓는 直龍結穴이나 程氏墓는 橫龍結穴이다. 셋째, 李禎墓는 來龍이 弱하나 程氏墓는 强하다. 넷째, 李禎墓는 乳穴이나 程氏墓는 窩穴이다. 다섯째, 李禎墓는 仙人讀書形(신선이 책을 읽고 있는 모양)이나 程氏墓는 金斗穴梁上形(손잡이가 달린 다리미형)이다. 여섯째, 李禎墓는 內明堂局이 相對的으로 작지만 程氏墓는 外明堂局이 크다. 退溪先生의 曾祖父母 李禎內外墓와 朱子의 高祖母 程氏墓와 比較해볼 때, 主山 또는 朝案의 文筆峰과 龍虎案의 一字文星, 豊富한 頭腦部分과 彎環屈曲의 九曲水, 重重包裏 속에서의 調和로운 明堂局이 작용하고 있다는 共通點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들은 일일이 모르고 있지만, 실제로 朱子나 退溪先生의 例에서 보듯이, 偉大한 人物의 背後에는 合當한 明堂이 있었음을 確認하였다는 事實은 커다란 意義가 있다고 본다. 積善을 많이 베풀어서, 明堂에 살거나 先祖를 明堂에 모시면, 心身도 健康하고 運命을 改善할 수 있다. 그리고 偉大한 後孫을 배출하면 道義昻場과 文化暢達을 통하여 國家社會의 發展과 繁榮에도 寄與할 수 있다. From ancient times, Korean and Chinese felt they shared a fate with the earth. They saw a magical link between man and the landscape. So they used feng shui(風水) as a way of linking man's destiny with that of nature by placing graves and residences at auspicious spots, to tap the earth's chi(地氣), where the chi flows smoothly and yin and yang(陰陽) are in harmony, making a productive cycle of the five elements(五行). Nature imitates life. Life imitates nature. Feng shui, as a language of symbols,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silent dialogue between man and nature. The environment takes on a metaphorical quality. They believed that unless the deceased were properly buried, the descendants would suffer. The offspring of an ancestor with an exceptionally good grave on the basis of accumulated virtuous deeds(積善) for generations, it is believed, will be rewarded with wealth, health, lots of sons, longevity, and even a high position. Besides its offspring, even the fate of a nation depends, it is said, on the correct location of the ruler's residence and the correct burial of his ancestors. According to The Form School(形勢學派), the mountain shapes & configurations(山形) can influence the deceased's descendants, while The Compass School(理氣學派) focuses on the orientation(方位). Man is thus affected by yin and yang dwellings(陰陽宅) - the houses of the dead and the places of the living. I assumed, it would he much more truthful especially when it comes to the case of distinguished scholar like Toegye. Therefore,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feng shui on the residency where Toegye(退溪), known as a Korean Chu Hsi(東方朱子), was born and the tomb sites of his ancestors to reveal which one of those influenced him most strongly to be born a great scholar, in comparison with the case of Chu Hsi(朱熹), a respected neo-Confucian Chinese scholar. The writer visited to find Toegye's great-grand parent's graves(曾祖父母墓), buried on the correct spots where one can find no geomagnetic disturbance phenomena(地磁氣 攪亂 現象), backed by mountain shaped like a calligraphy brush(文筆峰) as the high black tortoise mountain(玄武, 主山) and flanked by & facing many surrounding mountains, in many folds, shaped like the horizontal line(一字文星) impling a successful scholar, making a big round bright yard(大明堂) in the center with views of a front pond and a zigzagged, meandering flow of water, which, I am sure, spurred him scholarly success. In case of Chu Hsi, his great-great-grand mother's grave(高祖母墓) surrounded by various mountains in many folds, especially faced two high mountains shaped like a big calligraphy brush(大文筆峰) soared high in the sky as the lower & higher vermilion birds(朱雀, 朝案) making a bigger wide outer bright yard, which, it is said, actualized him to become a famous neo-Confucian scholar. Finally, we analyzed that very distinguished scholars like Toegye & Chu Hsi were born due to the exceptionally good graves of their ancestors, buried correctly on the most comfortable spots where one can find geomagnetic homogenization effect(地磁氣 均一化 效果), backed or faced by the mountains shaped like a big calligraphy brush comprising a successful scholar in terms of feng shui. Feng shui tells us that locating the correct & auspicious spot, through the accumulation of virtuous deeds, plays a decisive role in casting the destiny of the occupants(residences), its descendants(graves) and even a nation(residence of the ruler & graves of his ancestors, city's shapes & public planning). Let's improve and harmonize the environment for one's better life, a prosperous nation and a peaceful world!

        • 투고논문 : 퇴계구곡(退溪九曲)과 퇴계구곡시(退溪九曲詩)연구

          김문기 ( Mun Kie Kim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2 No.-

          본고는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지난해 여름의 학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퇴계구곡 원림의 각 지점을 고증하고 그 원림적 특징과 퇴계구곡시 작자의 생애와 학문, 퇴계구곡시의 작품세계를 고찰하였다. 퇴계구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계 이가순의 퇴계구곡시를 통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그 후,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조사와 퇴계구곡 관련시를 두루 찾는 과정에서 하암 이종휴의 퇴계구곡시도 창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2007년 8월에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퇴계구곡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고 퇴계구곡의 정확한 지점을 고증할 수 있었다. 퇴계구곡 원림의 제1곡은 사련진, 제2곡은 양진암, 제3곡은 죽동, 제4곡은 장명뢰, 제5곡은 고등암, 제 6곡은 임부동, 제 7곡은 양평, 제8곡은 청음석, 제9곡은 쌍계인데 이들 퇴계구곡은 부분적으로 훼손된 바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산구곡이 낙동강의 큰 물줄기에 설정된 것과는 달리 퇴계구곡은 퇴계선생의 유적이 산재하는, 낙동강의 지류인 퇴계, 즉 토계천을 따라 5.5km에 걸쳐 설정되어 있다. 퇴계구곡 원림이 퇴계선생 생존 시에 지정되고 경영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퇴계구곡시는 하계 이가순과 하암 이종휴, 두 사람이 남겼다. 이가순은 전국의 명산과 대찰, 명현의 유적지를 두루 편답하고 수많은 기행시를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무이구곡도가의 차운시와 퇴계구곡시를 비롯한 도산구곡시, 옥산구곡시, 원명구곡시, 소백구곡시 등 5편의 원림 구곡시를 지었다. 이가순의 퇴계구곡시는 전 2구에서는 주로 각 곡의 주위 경관과 풍치를 묘사하고 후 2구에서는 퇴계선생에 대한 회고의 정이나 성정지정을 탁물우의하여 읊고 있어서 그의 이 구곡시는 인물기흥적인 시라 할 수 있다. 이종휴도 무이구곡도가 차운시를 남긴 것을 비롯하여 퇴계곡시와 옥산구곡시, 도산구곡시를 창작하였는데 이종휴의 퇴계구곡시도 서경과 서정을 통해 탁물우의의 수법으로 음영성정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가순의 퇴계구곡시에 비하여 도학의 묘리를 담은 작품이 많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discuss an academic investigation into Toegyegugok(退溪九曲) conducted last summer in an attempt to ascertain historical evidence for each spot of it and its natural characteristics, and it's also meant to look into Toegyegugok poems and the lives and learning of the poets. An academic investigation was implemented into Toegyegugok in August 2007 to confirm its existence, and that made it possible to find out the exact location of it. In general, that remained intact, though it was partly damaged to some extent. That was 5.5㎞ long and along Togye River, a branch stream of Nakdong(洛東) River where Toegye's remains were rampant. It is not sure whether this spot was designated while he was alive. There were two poets who wrote poems about Toegyegugok:Lee Ga-sun(李家淳) and Lee Jong-hyu(李宗休). In Lee Ga-sun's poem, each valley's scenary and scenic beauty were portrayed in the first two lines, and he described his affection for Toegye(退溪) and the uprightness of man allegorically by using things in the second two lines. So his poem could be said to depict how he was elated by things. Lee Jong-hyu composed poems about Toegyegugok(退溪九曲), Oksangugk(玉山九曲) and Dosangugok(陶山九曲) as well. In the poem about Toegyegugok, he allegorized human nature. Overall, however, his Toegyegugok poem described more principles of moral philosophy than that of Lee Ga-sun.

        • KCI등재

          退溪와 星湖의 易學思想에 대한 參量

          김인철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1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9 No.-

          The study aims to figure out differences in interpretation regarding ‘Saints accept Ho Tu(河圖) as a rule' mentioned by Chu Hsi(朱熹)centering around responses and opinions expressed by Toegye Lee Hwang(退溪李滉) and Seongho Lee Ik(星湖李瀷). Chu Hsi's interpretation on ‘Saints accept Ho Tu as a rule' is based on Xian Tian Lun(先天論) by Shao Yung (邵雍), and saints represented by Fu Xi Shi(伏羲氏) analogized Ba Gua(八卦) based on the concepts of numbers and bearings of Four Symbols(四象) and defined directions with regard to Ho Tu Shu(河圖數)of four directions represented by Four Symbols. Toegye proactively accommodated Chu Hsi's view, and it was materialized through disclosure of interpretational characteristics of Chu Hsi. In comparison, Seongho adopted a different standard from Chu Hsi by dividing Ho Tu Shu into odd numbers and even numbers while rationally analogizing Ba Gua Fang Wei(八卦方位) from Ho Tu based on larger or smaller numbers and bearings designated in accordance with characteristics of yin and yang of numbers. Different responses from Toegye and Seongho with regard to Chu Hsi's interpretation unveil Toegye's consistent respect for Chu Hsi and Seongho's critical acceptance of different views based on efforts to figure out new reasonable alternatives, and it stems from their differences in attitudes toward studying. According to Confucian Analects(論語), it can be summarized as ‘Passing down old ideas without creating new ones(述而不作)' and ‘Gaining new insights through restudying old material.(溫故知新)' Such differences led to advancement of Chu Hsi's philosophy during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while paving the way for interpretation of scriptures based on Silhak(實學). 본고는 朱熹의 ‘聖人則河圖'에 대한 해석을 두고 그에 대한 退溪李滉과 星湖李瀷의 반응과 견해를 중심으로 양인이 노정하고 있는 해석학적 입장의 차이점과 그 의의를 검토한 것이다. 朱熹의 ‘聖人則河圖'에 대한 해석은 邵雍의 先天論을전제로 하여 聖人즉 伏羲씨가 四象으로 상정되는 四方의 河圖數를 四象의 數와位의 개념을 통해 八卦를 유추해 내고 그 방향을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퇴계의 반응은 주희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그것은 주희 해석의 특징을 闡揚하는 것으로써 구체화 되었다. 이에비해 성호는 주희와는 다른 기준, 즉 河圖數를 홀수, 짝수로 구분하고 數의 많고적음 그리고 數의 陰陽的性格에 따른 방위 설정 등을 근거로 하여 河圖로부터八卦方位를 합리적으로 유추해 내고 있다. 주희 해석에 대한 퇴계와 성호의 상이한 반응은 퇴계가 주희에 대해 尊信, 私淑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고 한다면,성호는 아무리 주희라 하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은 의심하며 새로운 합리적 대안본고는 朱熹의 ‘聖人則河圖'에 대한 해석을 두고 그에 대한 退溪李滉과 星湖李瀷의 반응과 견해를 중심으로 양인이 노정하고 있는 해석학적 입장의 차이점과 그 의의를 검토한 것이다. 朱熹의 ‘聖人則河圖'에 대한 해석은 邵雍의 先天論을전제로 하여 聖人즉 伏羲씨가 四象으로 상정되는 四方의 河圖數를 四象의 數와位의 개념을 통해 八卦를 유추해 내고 그 방향을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퇴계의 반응은 주희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그것은 주희 해석의 특징을 闡揚하는 것으로써 구체화 되었다. 이에비해 성호는 주희와는 다른 기준, 즉 河圖數를 홀수, 짝수로 구분하고 數의 많고적음 그리고 數의 陰陽的性格에 따른 방위 설정 등을 근거로 하여 河圖로부터八卦方位를 합리적으로 유추해 내고 있다. 주희 해석에 대한 퇴계와 성호의 상이한 반응은 퇴계가 주희에 대해 尊信, 私淑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고 한다면,성호는 아무리 주희라 하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은 의심하며 새로운 합리적 대안본고는 朱熹의 ‘聖人則河圖'에 대한 해석을 두고 그에 대한 退溪李滉과 星湖李瀷의 반응과 견해를 중심으로 양인이 노정하고 있는 해석학적 입장의 차이점과 그 의의를 검토한 것이다. 朱熹의 ‘聖人則河圖'에 대한 해석은 邵雍의 先天論을전제로 하여 聖人즉 伏羲씨가 四象으로 상정되는 四方의 河圖數를 四象의 數와位의 개념을 통해 八卦를 유추해 내고 그 방향을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퇴계의 반응은 주희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그것은 주희 해석의 특징을 闡揚하는 것으로써 구체화 되었다. 이에비해 성호는 주희와는 다른 기준, 즉 河圖數를 홀수, 짝수로 구분하고 數의 많고적음 그리고 數의 陰陽的性格에 따른 방위 설정 등을 근거로 하여 河圖로부터八卦方位를 합리적으로 유추해 내고 있다. 주희 해석에 대한 퇴계와 성호의 상이한 반응은 퇴계가 주희에 대해 尊信, 私淑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고 한다면,성호는 아무리 주희라 하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은 의심하며 새로운 합리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학문의 기본적인 태도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것은論語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述而不作'과 ‘溫故知新'...

        • KCI등재

          退溪九曲과 退溪九曲詩 연구

          김문기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2 No.-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discuss an academic investigation into Toegyegugok(退溪九曲) conducted last summer in an attempt to ascertain historical evidence for each spot of it and its natural characteristics, and it's also meant to look into Toegyegugok poems and the lives and learning of the poets. An academic investigation was implemented into Toegyegugok in August 2007 to confirm its existence, and that made it possible to find out the exact location of it. In general, that remained intact, though it was partly damaged to some extent. That was 5.5㎞ long and along Togye River, a branch stream of Nakdong(洛東) River where Toegye's remains were rampant. It is not sure whether this spot was designated while he was alive. There were two poets who wrote poems about Toegyegugok:Lee Ga-sun(李家淳) and Lee Jong-hyu(李宗休). In Lee Ga-sun's poem, each valley's scenary and scenic beauty were portrayed in the first two lines, and he described his affection for Toegye(退溪) and the uprightness of man allegorically by using things in the second two lines. So his poem could be said to depict how he was elated by things. Lee Jong-hyu composed poems about Toegyegugok(退溪九曲), Oksangugk(玉山九曲) and Dosangugok(陶山九曲) as well. In the poem about Toegyegugok, he allegorized human nature. Overall, however, his Toegyegugok poem described more principles of moral philosophy than that of Lee Ga-sun. 본고는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지난해 여름의 학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퇴계구곡 원림의 각 지점을 고증하고 그 원림적 특징과 퇴계구곡시 작자의 생애와 학문, 퇴계구곡시의 작품세계를 고찰하였다. 퇴계구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계 이가순의 퇴계구곡시를 통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그 후,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조사와 퇴계구곡 관련시를 두루 찾는 과정에서 하암 이종휴의 퇴계구곡시도 창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2007년 8월에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퇴계구곡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고 퇴계구곡의 정확한 지점을 고증할 수 있었다. 퇴계구곡 원림의 제1곡은 사련진, 제2곡은 양진암, 제3곡은 죽동, 제4곡은 장명뢰, 제5곡은 고등암, 제 6곡은 임부동, 제 7곡은 양평, 제8곡은 청음석, 제9곡은 쌍계인데 이들 퇴계구곡은 부분적으로 훼손된 바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산구곡이 낙동강의 큰 물줄기에 설정된 것과는 달리 퇴계구곡은 퇴계선생의 유적이 산재하는, 낙동강의 지류인 퇴계, 즉 토계천을 따라 5.5km에 걸쳐 설정되어 있다. 퇴계구곡 원림이 퇴계선생 생존 시에 지정되고 경영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퇴계구곡시는 하계 이가순과 하암 이종휴, 두 사람이 남겼다. 이가순은 전국의 명산과 대찰, 명현의 유적지를 두루 편답하고 수많은 기행시를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무이구곡도가의 차운시와 퇴계구곡시를 비롯한 도산구곡시, 옥산구곡시, 원명구곡시, 소백구곡시 등 5편의 원림 구곡시를 지었다. 이가순의 퇴계구곡시는 전 2구에서는 주로 각 곡의 주위 경관과 풍치를 묘사하고 후 2구에서는 퇴계선생에 대한 회고의 정이나 성정지정을 탁물우의하여 읊고 있어서 그의 이 구곡시는 인물기흥적인 시라 할 수 있다. 이종휴도 무이구곡도가 차운시를 남긴 것을 비롯하여 퇴계곡시와 옥산구곡시, 도산구곡시를 창작하였는데 이종휴의 퇴계구곡시도 서경과 서정을 통해 탁물우의의 수법으로 음영성정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가순의 퇴계구곡시에 비하여 도학의 묘리를 담은 작품이 많다.

        • 退溪의『中庸』解釋과 그 특징

          엄연석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5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6

          본 논문은 주희의 『中庸章句』의 관점을 계승한 퇴계의 『中庸』 해석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퇴계의 『중용』 해석의 내용과 특징은 『中庸釋疑』를 통하여 그리고 문인들과 문답한 내용 등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퇴계는 대체로 주희의 『중용장구』의 성리학적 해석 관점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理氣心性論의 시각을 관철하는 입장에서 『중용』을 해석하고 있다. 퇴계는 박세당이나 이익이 道를 구체적 현실에서의 주체적 실천이나 오륜을 실천하는 덕목으로 보는 것과 달리, 性·道·敎가 형이상학적 실체 또는 규범, 그리고 이들 도리를 닦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그는 『중용』에서의 費隱 개념을 형이상의 원리의 세계의 중층적 구조와 실재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 한편으로 퇴계에서 存養 省察, 戒懼, 謹獨 등을 일관하는 개념으로서 敬은 마음의 본체로서 性과 작용으로서 情을 전제하고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을 다스림으로써 理를 마음에 확립하고자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러한 퇴계의 수양론적 관점은 誠과 愼獨을 상제에 대한 종교적 경외심과 복종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정약용의 시각과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나아가 퇴계는 中和와 中庸을 안과 밖으로 구분하여, 중화가 性情에 유래하여 안으로, 중용은 덕행에서 유래하여 밖이 된다고 보았다. 퇴계가 중화와 중용을 내외로 구분하는 것은 이 두 가지를 형이상과 형이하로 구별하고자 한 것으로, 그의 理氣論 철학과 일관된다. 이렇게 볼 때, 퇴계의 『중용』 해석에는 무엇보다도 일상적 현실에서의 실천성 보다도 形而上과 形而下, 마음의 未發과 已發, 性과 情, 動과 靜, 善과 惡을 구별하는 二元論的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퇴계의 사변적 형이상학적 관점은 실천을 중시하는 박세당, 이익, 정약용 등과 같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물질적 욕구와 도덕원칙의 혼돈에 따른 현대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할 때, 理를 도덕적 실체로 마음에 확립하고자 한 퇴계의 철학적 입장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This essay intends to illuminate what characteristic of Toegye's interpretation of Chung-yung中庸 succeeded to Chu-hsi's view of Chung-yung Chang-chu 中庸章句. The content and characteristis of Toegye's commentary of Chung-yung can look through the Chung yung seok yi中庸釋疑 and the question and answer between he and his students. Mostly Toegye not only accepted the neo-confucian viewpoint which Chu hsi朱熹 offered in the Chung yung chang chu¨中庸章句, but also interpreted Chung yung according to his own standpoint of Li chi hsin cheng lun理氣心性論. Toegye understood the nature性·the ways道·the instruction敎 to mean the metaphysical or moral substance, norm, and principle of teaching respectively. However, Park se-dang朴世堂 and Lee ik李翼 regarded the path as a method of man's moral practice or practical virtues of five moral items.五倫. Moreover, Toegye considered the concept of the expansive and secret 費隱 to express the duplicative structure and reality of the metaphysical principle. On the other hand, in Toegye the reverence敬 is a method of culture which is penetrated into the preservation and cultivation存養, reflection省察, caution and apprehension戒懼, and watchfullness over himself謹獨 etc. And it is the methodological principle by which man tries to establish the principle in the mind by governing the feelings which arise from the nature on the basis of the nature as the substance of mind and the feelings as the operation of it. And then while in Toegye's theory of cultivation the reverence means to govern the mind and feelings and cultivate the nature as the principle being immanent in human mind, Cheng yak-yong丁若鏞 interpreted sincerity誠 and watchfulness over the alone愼獨 in connection with the religious reverence or awfulness and obedience of the Lord-on-High. Further in response to the Yulgok's question to suspect that equilibrium and harmony中和 and the mean中庸 can not be divided into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Toegye viewed equilibrium and harmony as the internal by being derived from nature and feelings, the mean as the external by being originated from virtuous conduct. That is to say, Toegye divided equilibrium and harmony and the mean respectively into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This means that he tried to distinguish these two into that which belongs to the realm 'above shapes'形而上 and which belongs to the realm 'within shapes'形而下. And Toegye's view as this is consistent with his theory of principle and material forces理氣論. Viewed as this, the dualistic sight in which one discriminates that which belongs to the realm 'above shapes'形而上, from that which belongs to the realm 'within shapes '形而下, mi-fa未發 of the mind from yi-fa己發 of it, nature from feeling, movement from calmness, good from evil in preference to practice in ordinary life is reflected in Toegye's commentary of Chung-yung as such. The criticism against Toegye's view by such scholars as Park se-dang, Lee ik, and Cheng yak-gong, who made the moral practice or virtuous conduct be important, mostly arises from Toegye's contemplative and metaphysical point of view. However in respect that we try to resolve the contemporary crisis being caused by the confusion between material desires and the moral principle, Toegye's philosophy which tried to stand the principle as the moral substance firm in the mind has a very important significance.

        • 退溪學과 『孟子』, 그리고 孟子

          홍원식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5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6

          『孟子』와 맹자 사상은 맹자 사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맹자는 그가 죽은 뒤 1,000여 년이 지나 정이나 朱熹와 같은 朱子學者들에 의해서 '발견'된다. 정이는 맹자의 性善說과 養氣說에 주목했으며, 주희는 정이의 관점을 이어받아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우고, 또한 그것으로 『맹자』를 해석해 『孟子集註』를 지었다. 주자학을 계승한 退溪 李滉의 『맹자』에 대한 전문적 저작으로 유일하게 『孟子釋義』가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맹자』에 대한 글풀이를 한 것이지 뜻풀이를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 속에서는 『맹자』나 주희의 『맹자』 해석에 대한 퇴계의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오히려 이 책은 『맹자』에 대한 口訣과 諺解史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맹자와 퇴계학의 관계에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철학적인 면에서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자학자들은 맹자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상당한 誤讀을 하고 있다. 퇴계학은 바로 그 맹자 철학에 대한 오독을 바로잡는 데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누구나 堯·舜과 같은 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맹자를 새롭게 발견한 주자학자들은 맹자의 성선설을 받아들이고, 또 궁극적 목표가 맹자와 같이 성인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을 동의하면서도, 그 과정을 너무 멀고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퇴계학은 주자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너무 두터운 도덕형이상학의 무게를 덜어내며, 마음에 대한 철학적 무게를 실어주고 마음을 바탕으로 성인에 이르는 길에 더 무게를 실어줌으로써 그만큼 더 성인이 되는 길이 가깝고 쉽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본래의 맹자 철학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Mencius and Mencius' philosophy has not been noticed much since his death. From such a context is Mencius 'found' by Neo-confucian such as Cheng-Yi and Zhu-Xi 1000 years after he was died. Cheng-Yi notices Mencius' theory of Xingshan(性善說) and of Yangchi(養氣說), and Zhu-Xi establishes his system of philosophy by succeeding to Cheng-Yi's viewpoint and writes Mengzijizhu(孟子集註)by understanding Mencius. The only special writing of Toegye who succeeds to Zhu-Xi is Maengjaseokyi(孟子釋義). It is not the explanation of meaning but that of characters as the title shows. So it's not easy to read Toegye's idea about Mencius or Zhu-Xi's Annotation of Mencius. Rather it has an important meaning in the Korean suffixes to a Chinese text or the history of Korean annotation of a Chinese character. What is more important in the relation between Mencius and Toegye's Learning lies in the philosophical aspect. As mentioned above, Neo-Confucian find Mencius, but they misinterpret him to a great extent. What Toegye's Learning has a positive meaning is that it corrects the misinterpretation of Mencius' philosophy. Mencius said that any human can be the Sages like Yao and Shun, based on the theory of Xingshan. But the Neo-Confucian who find Mencius newly accept the theory and agree that the ultimate goal is to become the Sages just as Mencius' idea, while they make the way to the goal too long and difficult. Toegyehak reduces too heavy a weight of moral metaphysics, adds the philosophical weight about the mind(心), and increases more weight to the way to the Sage. Therefore, the way to the Sage is near and easy so much. This can be said to return to the original philosophy of Mencius.

        • 퇴계(退溪)의 서원향사례정초(書院享祀禮定礎)에 대한 고찰(考察) - 백운동서원향사례(白雲洞書院享祀禮)수정을 중심으로 -

          한재훈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3 No.-

          書院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은 講道(作人)와 尊賢(崇道)이다. 즉, 敎學공간으로서의 기능과 享祀공간으로서의 기능이 書院의 대표적인 기능이다. 하지만 그동안書院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敎學공간으로서의 書院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 왔다. 이는 書院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인 講道(作人)와 尊賢(崇道) 중에서 전자에 편중된 것으로, 書院의 전모를 온전히 구명하기 위해서는 후자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1549년 12월 退溪는 豊基郡守로 재직하면서 白雲洞書院을 賜額해달라는 주청을方伯을 통해 나라에 올렸고, 이를 계기로 이듬해 白雲洞書院이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인 紹修書院이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賜額을 주청하기직전인 1549년 가을 退溪가 白雲洞書院에서 준행되어 온 기존의 享祀禮에 대하여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를 개정함으로써 書院享祀禮와 관련한 중요한 표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본 논문은 書院享祀禮의 定礎라는 관점에서 退溪의 업적을 고찰하고자한다. 이를 위해 논문은 먼저 白雲洞書院에서 행해지던 享祀禮에 대하여 退溪가 제기한 문제를 검토하고, 다음으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退溪가 제정한 春秋享圖와 廟祭笏記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退溪가 書院享祀禮를 완벽한 수준에서 정립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갈수 있는 든든한 초석을 놓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서울 京畿地域의 退溪門人과 그 性格

          황위주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3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3

          본고는 서울 경기지역 퇴계 문인의 실상과 그 성격을 집중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서울 경기지역 퇴계 문인들이 그 수에 있어서는 경상북도 지역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대체로 퇴계 이전에 이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해 온 사림파 선배 학자들의 학맥과 깊이 연계되어 있었고, 수적 비중에 비하여 퇴계와의 학문적 친연성은 상대적으로 대단히 미약하였으며, 전체적으로 학자형 보다 관료문인적 경향성이 농후하였음을 밝혔다. 이런 특징 때문에 서울 경기지역 문인들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곧 이어 전개된 당파와 학파의 복잡한 분화 관계 속에서 동문으로서의 결속력과 동질성을 상실하고 점차 기호지역 우율학맥 중심의 서인 노론계의 중심 세력 혹은 그 일원으로 편입되었으며, 광해군 당시의 북인집권기를 거치면서 사실상 학통이 거의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에 출현한 근기남인학파는 서울 경기지역 자체의 퇴계학맥을 계승하는 바탕 위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영남지역 주류학맥과 다시 재접목되어 나타나는 특이한 형국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This is a study on the Toegye(退溪)'s students who lived in seoul-Kyungki area and that general distinguishing marks. in result, I find out some interesting facts. (1) the number of students was less than kyungpook district, but more than all the rest districts, almost occupied 20%(64person) of total students(310person). (2) they generally had an important mutual relation with academic tradition of Sadefu(士大夫) who former times of Toegye(退溪) actived in environs of seoul-kyungki area. (3) even if it were so, the scholastic compactness with Toegye(退溪) was very relaxed as compared with importance in number. and the student of bureaucratic-literary type were in generally more than the person of scholar type (4) because of like these inclination, passing by the times of king Guanghae(光海), they failed to present a united front, step by step disguised themself as central force or member of West party(西人) against East party(東人) or South party(南人). (5) for this reason, the school of Kenki South party(近畿南人) which was appeared in the times of king Sukzhong(肅宗) not placed on the academic tradition of seoul-kyungki district, but placed on the academic tradition of youngnam district which had been scholastic center of Toegye(退溪)'s school.

        • 傳記資料에 나타난 書名을 중심으로 본 퇴계 학맥의 전개

          이군선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4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4

          본고는 퇴계 문인들의 전기자료에 나오는 서명을 중심으로 퇴계 학맥 전개의 한 단면을 살펴본 것이다. 퇴계 문인의 전기자료를 살펴보면 퇴계가 문인들을 가르칠 적에 사용한 교재는 주로 『심경』『근사록』『주자서절요』등의 책이었으며, 퇴계의 문인들이 학문의 요체로 생각했던 책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고에서 논의한 내용은 첫째, 퇴계가 문인들에게 교학하며 가장 중요시한 서적이 『심경』과『근사록』이라는 것이다. 『심경』과『근사록』을 공부하는 것이 당시 학문적 성향이기는 하지만 여타의 문하에서는 퇴계 일문에서처럼 집중적인 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퇴계의 학문성향이 心學(理學)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퇴계의 문인들이 중시한 서명 역시 『심경』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근사록』과 『주자서절요』역시 많은 문인들이 애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자서절요』는 퇴계에 의해 정리되어 퇴계의 학문체계가 녹아 있는 것으로 퇴계의 문인들은 독실하게 공부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은 퇴계의 학맥이 『심경』과『주자서절요』를 중심으로 心學(理學) 위주로 전개되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정리한 퇴계 문인의 전기 자료에 나오는 서명을 토대로 살펴본 퇴계 학맥은 어디까지나 전기자료에 나오는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향후 개별 문집을 통한 정밀한 연구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Through this thesis, a phase of the development of Toegye's scholastic lineage is looked around mainly the titles of books represented on biographic material cf Toegye's disciples Examining biographic material of Toegye's disciples. Toegye used textbooks named 『Simkyung(心經)』『Jujaseojeolyo(朱子書節要』, 『Geunsarok(近思錄)』, etc when taught his disciples, and they regarded the books as the secret of studies, too. The contents of this thesis was argued, above all that Toegye considered 『Simkyung』『Geunsarok』as the most important books while he communicated with his disciples Studying those books was scholastic propensity of those days, but intensive course of lectures as Toegye's family was not accomplished under other instruction. That might show that his scholastic propensity made Simhak(心學)-it is very similar t o psychology- the prime object. Second, the title whose books Toegye's disciples thought to be cardinal was also mainly 『Sixkyung』, Moreover, a lot of disciples were fond of reading 『Geunsarok』. 『Jujaseojeolyo』, as well, 『 Jujaseojeolyo』 was especially organized by Toegye and his disciples learned it enthusiastically because it fused his scholastic system. This propensity was closely connected with the thing which his scholastic lineage was Simhak-centered development like. 『Sixkyung』and『Jujaseojeolyo』. Toegye's scholastic lineage that I previously organized mainly the titles of books stood on just biographic material. Therefore, it needs minute researches through collections of individual works from now on.

        • 퇴계문인(退溪門人)의 학퇴계 정신(學退溪 精神)과 루정제영(樓亭題詠)에 반영(反影)된 계승양상(繼承樣相)

          이정화 ( Jeong Hwa Lee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5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37 No.-

          퇴계는 산수자연물에 힘입어, 성학에 잠심하여 마음을 편안히 수행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서 비롯된 山水之樂을 누정제영을 통해 직접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럴 때에 그의 작품에서, 實景의 敍景은 단지 의취를 알리기 위한 예비적 역할을 할 뿐이다. 퇴계는 누정과 그 주변경관에 대한 시를 제작할 때에도 변함없이 曾子, 顔子, 屛山, 朱晦翁의 학문정신을 되새기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퇴계와 그 문도들이 제작한 경렴정 제영시편들은, 대체로 누정과 주변경관은 遊賞의 대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과 자연경관이 그렇게 있는 이유 즉 내재하는 理를 찾아내는데 필요로 하는 관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금계의 경우,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에서, 심지어 풀 한 포기에서도 天理를 생각하는 스승의 의취에 공감하며, 자신도 “風月無邊趣”라고 읊조리며 스승에게 속마음을 보이고 있다. 松巖도 역시, 孟子의 “俯仰不愧天地”를 근거로 하여, 스스로 公明正大한 마음을 일깨우고 있다. 명옥대에 오른 퇴계는 영원한 不動의 자세를 간직한 바위를 예찬하는 것으로, 자신의 시상을 의연하게 매듭지었다. 한편, 一竹齋는 속세에 혼탁해진 마음조차 淸寒한 마음으로 치유된다고 설파하여, 명옥대라고 命名한 스승 퇴계의 지취는 바로 이러한 맑고 시원한 마음을 함양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또, 訥隱의 경우, 스승이 밟아간 길을 기꺼이 좇으며, 그의 학문을 계승하며 살아가는 제자의 자긍심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퇴계는 卒去한 제자 錦溪의 이루지 못한 宿願을 돕기 위해, 1566년에 금양정사에 대한 完帖을 제작한 바 있다. 이후, 謙庵은 이 완첩에 대한 跋文을 지어서, 師弟關係로 맺어진 퇴계와 금계의 인연에 대해 상술하였는데, 生死를 초월한 師弟間의 영원한 交分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금계의 제영시는 퇴계시의 영향을 받아 그 意趣가 강조되는데, 이는 곧 혼탁한 塵世에서 때를 묻히는 것을 혐오하여, 신선의 공간으로 인식된 산수에서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꿈꾸는 超逸의 경지다. 한편, 퇴계는 관수루에 올라 이곳이 바로 “妙悟” 즉 오묘한 깨우침을 知覺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라고 칭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의 이치가 군자의 수양과 비슷하다고 여겨 물을 예찬했던 공자의 가르침에 공감하였다. 또, 忠君이외에는 여념이 없을 때 그의 마음은 公人意識을 표출하게 된다. 江皐의 시에서는 “觀水固有術”을 읊조리며, 흥취보다는 향학열이 깃든 의취를 드러내려 애쓰는가 하면, 性齋의 작품에서는, 빼어난 안목을 지닌 시인기질을 보일 뿐만 아니라, 웅대한 기상을 펼쳐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퇴계에서 있어서 자연에 대한 酷愛과 학문에 대한 熱情은 불가분의 것이었거니와, 이는 퇴계학파의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후대에까지 處士文學의 본보기로 계승되어왔다. 본고는 누정제영에서 확인된 意趣를 통하여, 퇴계를 흠모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Consequently, what had been mentioned in this paper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Nujeong Jeyoung(樓亭題詠) written by Toegye was tried to realized in the Confucian ideology. Respect for the sprit of Toegye of his scholastic lineage was represent from literature, especially active in Nujeong Jeyoung(樓亭題詠). They had produced in verses under given title at the towered mansion and arbour. Regard verses written under given title at the towered mansion and arbour as the mountain or river scenery poetry of Toegye and his scholastic lineage, they had revealed a remark full of meaning, having no concern with poetical title. They had focused on 'rule of heaven' 'freshness' 'transcendence' 'desire for learning' by including constant human nature in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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