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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在穆(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6 陽明學 Vol.0 No.16
이 논문은 근대 한국 양명학에서 王龍溪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를 爲堂 鄭寅普의 『陽明學演論』(이하 『演論』)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鄭寅普의 『陽明學演論』이 近代日本陽明學의 영향을 받아, 박은식의 근대한국양명학의 정초와 최남선의 기획에 이어 그것을 완성하는 연구임을 밝히게 된다. 이어서 정인보의 양명 후학에 대한 평가는 우선, 왕용계(畿)와 왕심재(艮) 그리고 당시 양명학 내외로부터 비난을 들고 있던 顔山農이건 何心隱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 모두 그들이 「진실된 학문을 한 사람」이라고 하는 등 王學左派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黃宗羲의 陽明學 左派 평가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또 하나의 특징은, 황종희와 마찬가지로, 흔히 ‘유교의 이단아’ ‘유교의 반역자’로 불리는 이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좀 더 밝혀져야 하겠지만, 그가 전서산의 편지를 통해 「평범한 듯하지만 실질적인 공효(功效)가 있는 것」과 「아주 오묘한 듯하지만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과의 경계를 분명하게 깨닫게 한 말」이라고 적극 평가한데서 알 수 있듯이 청년대중들이 사적인 욕망긍정 보다도 ‘착실한 공부’ 쪽을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저인보가 양명학 좌파를 긍정적ㆍ적극적으로 읽어 내고자 했던 것은 그가 양명학파의 ‘偉人傳記’를 모범으로 하여 당시 日帝 강점기하의 난감한 현실에 맞서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영웅’의 출현을 靑年들에게 희망하고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계몽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하 정인보의 이러한 내밀한 작업이 黃宗羲의 『名儒學案』에, 보다 구체적으로는 ‘양명학’에 의탁되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33년에 『東亞日報』에 66回에 걸친 게재가 이미 말해주듯이 저널리즘에 의탁한 청년 내지 국민 계몽의 차원에서 양명학이 기획되고,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박은식-최남선 등과 노선을 같이 하는 근대일본양명학의 영향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정인보는 전서산과 왕용계의 학풍은 일치한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왕용계는 트이고 명석한 만큼 위를 향하는 체득(體得)의 경지를 주로 많이 말했고, 전서산은 깊고 굳은 만큼 실제적인 일이나 실물과 같이 절실하고 가까운 데 있는 것에 대한 공부를 주로 많이 말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의 저면에는 정인보가 저널리즘을 통해 양명학을 구축하고자 한, 일본에서 발원한 근대양명학을 한국적으로 다시 領有(appropriation)하고자 했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양명학 영위의 독자성도 보인다. 다시 말해서, 박은식이 보여준 『王陽明先生實記』가, 정인보에 이르러 전서산, 왕용계 등의 「陽明門徒 及 繼起한 諸賢」으로 확대, 완성된 것은 근대한국양명학이 일본의 그것을 모방하면서 어렵게 독자적으로 당도했던 ‘근대한국양명학의 완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김윤경(Kim, Yun-kyeong) 한국양명학회 2013 陽明學 Vol.0 No.35
최근까지 한국 양명학 연구는 한국 양명학의 존재양태와 그 사상사적 역할에 대한 공통된 시각 아래서 진행되어왔다. 그것은 1)양명학 전래 이후 전 시기를 통틀어 양명학적 사유를 적극 개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기본 정신은 양명학이었던 학자가 많았다는 것과 2) 사상적 배척에도 불구하고 한국 양명학의 명맥이 꾸준히 유지되어 실학, 개화사상 등 근대적 사유의 저변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조에서 성립된 연구 성과들은 한국 양명학을 사상사의 수면위에 올려놓고 한국유학사를 더욱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지만, 한국 양명학 연구사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과 검증없이 동일하게 유지되어온 연구관점에 기반하고, 한국 사상사 안에서 양명학적 사유와 계통을 밝히는 부분에만 편중되는 연구 경향을 만들어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본 논고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논점 별로 재정리하는 방법을 통해 이와 같은 문제를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연구사에 대한 성찰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선대 학자가 양명학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연구 경향이 한국 양명학 연구의 주를 이루는데도 불구하고 양명학자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분명한 검토가 없었다는 점이다. 본 논자가 주장하는 바는 기존의 연구 관점에 대한 메타적인 성찰과 함께 한국 사상안에서 한국 “양명학파”를 새롭게 조망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왕양명으로부터 형성된 양명학이 한국에서 수용·이해되는 과정을 고찰하는 것을 넘어서, 양명학을 수용한 학자군의 한국 사상적 기반과 철학적 문제의식 및 해결방안을 기준으로 사상 운용 양상을 검토하고 그것이 당대 다른 사유와 어떻게 소통되는가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Until recently, the study of the Korean Yang-ming Studies was carried out from a common perspective of the existential mode of the Korean Yang-ming Studies and its role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The perspective suggested 1) that there were many scholars who took the Yang-ming Studies as their foundational idea throughout the periods after the introduction of the Yang-ming Studies though they did not positively presented Yang-Ming philosophical thoughts, and 2) that the Korean Yang-ming Studies formed the ground for early modern thoughts including Silhak, thoughts of enlightenment etc. as the vein of the Korean Yang-ming Studies had been continuously maintained despite its ideological exclusion. Though the achievements of the work established on this basis put the Korean Yang-ming Studies on the surface and provided some foundations for more richly interpreting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they are problematic in that they are based on the research perspective that has been maintained identical without essential reflection and verification, and they have given rise to the trend in which research leans too much on the explication of the thoughts and lineage of the Yang-ming Studies. This thesis was designed to examine such problems in a method in which the achievements of the existing studies are rearranged based on each issue, and come up with a new alternative. One of the representative phenomena occurring due to lack of reflection on research history is that there have been no clear reviews of criteria for determining whether one is a Yang-Ming philosopher or not despite the fact that the research tendency in which researchers try to determine whether foregoing scholars were Yang-Ming philosophers has constituted the main stream of the study of the Korean Yang-ming Studies. What the current author claims is that a shift to the perspective from which we take a novel look at Korean “Yang-Ming schools” within Korean philosophies is necessary as well as meta-reflection on the existing research perspectives. Beyond the examination of the course in which the Yang-ming Studies, which had been formed by Wang Yang Ming, was accommodated and understood in Korea, it is to review the aspects of addressing ideas on the basis of the Korean philosophical foundations for the group of scholars who accommodated the Yang-ming Studies and their philosophical awareness and solutions, and to generally examine how they communicated with other contemporary thoughts.
김용재(Kim Yong-Jae) 한국양명학회 2005 陽明學 Vol.- No.14
본 논문은 한국유학사의 한 단면을 당당히 이어 왔던 ‘양명학’에 대하여 그 연구사 검토와 함께 향후 ‘한국양명학 연구’에 있어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들을 밝혀놓은 것이다. 그동안 한국 유학의 사상계는 다양성의 전철을 밟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사관의 망국론에 기초한 주자 일존주의의 학풍으로 일관하였다는 오해와 오류에서 벗어나, 묻혀왔던 양명학사의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께 건국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십분 발휘했던 주자학의 그늘 하에 있었던 양명학을 한국에서 조명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국 양명학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이러한 사안들을 발굴하는 작업으로부터 이루어져 왔으며, 이제 이 분야에서 연구하는 학문 후속 세대들은 한국양명학의 한 획을 점철하고 있었던 ‘강화 양명학파’의 연구에 주력해야 함을 피력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국의 사상사가 주자학을 한국화하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계의 자유로움과 왕성한 학술적 활동이 이루어졌던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본 논문은 기존의 발상에 있어서 도식적 파악과 왜곡된 흔적들에 대한 재검토, 혹은 역비판의 필요성을 통감하며 한국 철학계의 전반적인 구조와 흐름을 명시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분야 - 강화학 - 의 기초 자료 및 영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한국유학 사상계는 주자학 이외에도 獨創的이고도 理智的인 많은 학설들이 산출되었을 것이고,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었던 양명학의 유입과 관심이 미약하게나마 엄연하게 그 궤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철학사와 한국지성사 속에서 양명학의 위상과 자리매김은 일제 식민사관의 성리학 망국론에 기초한 왜곡ㆍ경직된 한국사상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 마련은 물론이고, 다양한 한국 사상계의 복원을 기대하는 학문 후속세대들에게 또다른 연구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향후 우리 한국사상계의 흐름과 정체성을 바로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양명학에 대한 연구는 그 출발과 기획에서부터 貶下와 浮沈의 연속이었다. 향후 한국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더 이상의 시행착오와 인식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명학과 관련한 모든 자료들을 발굴하여, 한국양명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명실상부한 강화 양명학 연구가 필요함을 밝혀 보았다. Zhu-Xi studies had exercised its influence in the field of culture and study in Korea peninsula since it was imported. Specially, The Chosun dynasty adopted Confucianism, actually speaking Zhu-Xi studies, as a national ideology, which ruled Chosun dynasty for 500 years. In the early years of the Chosun dynasty, Confucianism was used for justifying new dynasty and establishing social systems, and as time goes on, Korean Confucianism built its typical and colorful style Now we can have a question whether only Zhu-Xi studies ruled public thought of the Chosun society? Until now, approximately this question didn't ask and accepted as a true. But this hypothesis isn't objective and lacks of positive study, because the Chosun Confucianism not only have Zhu-Xi studies but also have creative theories. In addition, Yang-Ming studies obviously maintained its position in the Chosun society. Specially, we can pose a hypothesis that Korean Yang-ming studies and kang-hua school played a role as a linker of the practical science (實學) and western learning(西學) in the late of Chosun dynasty.
최재목(崔在穆) 한국양명학회 2008 陽明學 Vol.0 No.21
이 논문은 崔南善의 『少年』誌와 東敬治의 『陽明學』誌를 중심으로 近代 韓國ㆍ日本의 「陽明先生肖像」에 나타난 思想 戰略을 살펴본 것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로서의 王陽明 사상이 일본의 明治期에서 재평가되어 근대적 학문의 맥락에서 朱子學, 古學이란 용어와 더불어 新造語인 ‘陽明學’이란 개념이 탄생하여 중국으로 進輸出되고, 한국은 일본과 중국 양방향에서 그 개념 수용의 시간적 편차를 보이면서도 근대 학술로 서서히 편 입해간다. 이 속에는, 近代知의 領有와 交信이, 동아시아 내부에 제국주의의 확산과 맞물려 진행된 遊學生 및 지식인의 교류, 텍스트 流通網을 통해서 긴밀히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서 「陽明先生肖像」은, 근대적 정신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주요 記號로서, 아울러 실천적 사상을 전하는 미디어 역할을 하는 형태로 유통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맥락 속에서 그것을 복제 혹은 재생산하는 형태로 잡지나 저술 등에 편집하여 넣는 형태로 활용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王陽明 생전과 逝去 후에 여러 종류의 초상화가 나온다. 이들의 일부가 한국과 일본으로 유입되어 활용된다. 일부는 복제되고, 일부는 모사되고, 또 일부는 중국에서 유출되어 일본에만 남아있기도 하다. 이러한 복잡한 정황은 동아시아 근대사의 복잡한 궤적과도 맞물려있다. 주자학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양명학 유통망에 장애가 있었던 한국에서는 「陽明先生肖像」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崔南善의 『少年』誌、 終刊號에 들어있는 「陽明先生肖像」일 것이다. 이 號에는 특집으로서 讓谷 朴殷植(l859~ 1925)의 『王陽明先生實記』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특집호의 口繪로서 실린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東敬治(호는 正堂, 敬治는 이름 1860- 1935)가 주간하는 「陽明學會」 발행의 『陽明學』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잡지와 학술서를 통해 다량의 「陽明先生肖像」이 유통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을, 지면 관계상 모두 다루지 않고 그 가운데 朴殷植에게 영향을 주었던 『陽明學』을 대상으로 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에만여러 건의 「陽明先生肖像」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동아시아 근대기에 「陽明先生肖像」은 일반 대중 그 가운데서도 청년 및 소년(=청소년)을 계몽하는 하나의 ‘실천적 정신’을 전달하는 새로운 미디어로서 등장하고 있었으며, 또한 肖像의 선택에는 나름대로의 의미부여가 있었다. 그렇다면 肖像은 근대적 사상을 전달하는 전략으로서 하나의 미디어 역할을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王陽明 생전 및 逝去 후에 나타난 肖像畵를 살펴보고, 한국의 「陽明先生肖像」은 崔南善의 『少年』誌를 통해서, 일본의 그것은 東敬治의 『陽明學』誌를 통해서 각각 살펴보고 그 近代的 의의를 思想 戰略的 자원에서 짚어본다.
金容載(김용재) 한국양명학회 2012 陽明學 Vol.0 No.33
한국에서의 경학 연구는 학문적 특성 상, ‘中語中文學’·‘漢文學’·‘哲學’·‘思想’ 등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연구되어 왔다. 특히 ‘中語中文學科’ 전공에서의 경학은 주로 ‘文字學’(小學)과 ‘『詩經』’·‘『論語』’ 중심의 연구가 主를 이루어 왔고, ‘漢文學’ 전공에서는 五經과 四書에 대한 조선시대 유자들의 경전 주해를 주요 논제로 다루어 연구되어 왔다. 동양사상이나 철학 방면에서는 유가경전을 모두 섭렵하여 총괄적인 연구를 진행해 오기도 했으며, 사상사에 드러난 ‘인물’ 중심의 연구도 아울러 병행되어 왔다. 특히 동양사상을 연구하는 유교경전 연구 방면에서는 十三經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註釋(注疏)뿐만 아니라, 경서에 나타나 있는 인물과 사상(예컨대 정치사상·경제사상·교육사상·예술사상 등)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해 왔다. 뿐만 아니라, 경서에 담긴 註解 내용을 근저로 중국의 유가사상과 한국의 유가사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집주』와의 同異點을 찾아내어 담론의 장을 이끌어내며 지금까지 주요 테제를 창의적으로 발굴하여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의 유학이 주로 朱子學에 傾倒되어 왔기 때문에, 주자학 이면의 유자와 사상적 위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 지금의 연구과제로 각광받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경학’은 각계각층으로부터, 또는 다양한 학문 영역으로부터 여러 방면의 學問思潮를 형성하며 제각기 연구되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연구 활동이 하나의 창구로 일원화 되지 못하여, 일방통행식의 연구로 직진하여 왔다. 물론 어떤 경서에 대한 연구가 학문영역별로 똑같은 성과를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같은 경서이기에 참고할만한 자료를 공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서로 간의 학문적 교류와 소통이 다소 미흡했었다. 이에 한국에서의 경학을 연구하거나 경학에 관심이 많은 자들은 좀 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수한 ‘경학’ 연구가 진행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각계각층의 학자와 교수들이 학회 창립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타진하기에 이르게 되었고, 이는 한국의 수많은 경학 연구자들이 ‘한국경학학회’의 창립을 열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경학은 우리나라 반만년 동안의 왕조 교체기 때마다 대두되었던 지도 체제였으며 이념이었다. 또한 동아시아 삼국의 한자문화권·유교문화권 내에서 경학은 韓·中·日 삼국의 교집합 요소라 할 수 있으며, 중추적 역할을 자임해온 것으로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그 이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국내의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경학학회 창립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오랫동안의 숙고 끝에 2011년 2월 名實이 相符한 ‘韓國經學學會’가 창립되어, 당해 연도 4월부터 바로 학회의 제반 활동에 돌입하였다. 본고는 국내에서 한국경학학회가 창립된 후, 不斷한 학술활동과 연구발표 그리고 신진학자 발굴 등 왕성한 학회 활동과 향후 동향을 중국 산서성 산서대학 국제학술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것이다.
교과서에 기술된 양명학의 실태 분석 및 개선을 위한 제언 -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를 중심으로 -
김민재(金珉在) 한국양명학회 2020 陽明學 Vol.0 No.56
본 연구의 목적은 학교 도덕교육에서 고등학교급에 해당하는 ‘윤리와 사상’ 과목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양명학의 기술 실태를 파악하고, 개선을 위한 제언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본 연구에서는 현행 『윤리와 사상』 교과서 이전에 발간된 교과서들까지 포함해, 국정 2종과 검정 12종의 총 14종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양명학 관련 내용들을 분석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대상들을 분석한 결과, 중국양명학과 한국양명학은 모두 ‘윤리와 사상’과목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의 표현방식이나 보조단의 활용 방법 등이 세련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교과서 내 양명학 기술에는 상당한 ‘보수성’과 ‘비균질성’이 발견된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양명학의 경우에는 양명학을 수렴적으로 이해하게끔 기술되어 있으며, 지행합일에 대해서도 양명학의 고유하면서도 강력한 도덕적 실천성이 잘 부각되지 않도록 기술되어 있다는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양명학의 경우에는 중국양명학과의 차이점이 거의 드러나지 않게끔 기술되어 있으며, 한국양명학의 태두로 평가받는 정제두의 사상적 특색도 잘 나타나지 않도록 기술되어 있다는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중국양명학과 한국양명학 모두 교과서들 간에 내용이나 분량에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는, 소위 ‘비균질성’의 문제가 있음을 도출하였다. 이 같은 양명학 기술의 보수성과 비균질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최소화된 ‘도덕과 교과서 집필기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강화해야 한다. ‘도덕과 교과서 집필기준’에, 중국양명학과 관련된 사상마련·발본색원·만물일체나 한국양명학과 관련된 생리ㆍ진리ㆍ임정종욕 등의 내용 요소들을 공식적으로 추가함으로써, 『윤리와 사상』 교과서들 간에 나타나는 ‘비균질성’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도덕과 교과서 집필기준’ 개발 시에는 도덕교육학계와 양명학계가 긴밀하게 협업·합의하고, 시대적 요구 등을 고려하여 양명학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내용 요소를 교육과정 개정 시기에 변경하거나 추가함으로써,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양명학 기술의 ‘보수성’ 문제를 일정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description of Yang-ming Studies in the 〈Ethics and Thoughts〉 textbook of high school and to make suggestions for its improvement. For this purpose, the total of 14 textbooks were selected for analysis in this study. After analyzing the textbooks, it was found in the 〈Ethics and Thoughts〉 textbooks that both Chinese Yang-ming Studies and Korean Yang-ming Studies occupy an important status, and that the way content is expressed has improved over time. At the same time, however, this study also showed that Yang-ming Studies’s descriptions in textbooks were found to be ‘invariability’ and ‘non-uniformity’. In other words, there is a invariability that has not accurately reflected the characteristics of Chinese Yang-ming Studies or Korean Yang-ming Studies in textbooks, and there are significant differences in the content or quantity of the Yang-ming Studies descriptions in each textbook. To solve the problems of descriptions of Yang-ming Studies in textbooks, the current minimum ‘the standard for the writing of moral textbooks’ should be strengthened to a certain level. By officially adding various elements of Chinese Yang-ming Studies and Korean Yang-ming Studies to ‘the standard for the writing of moral textbooks’, the non-uniformity issue can be resolved to some extent. In addition, if the moral education and Yang-ming Studies circles cooperate closely in selecting content elements in developing ‘the standard for the writing of moral textbooks’, the invariability problem of descriptions of Yang-ming Studies from the past to the present can be solved in part.
김세정,홍원식 한국양명학회 2004 한국양명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Vol.- No.-
陽明은 心卽理說과 知行合一說 및 致良知說을 토대로 朱子 理學을 批判하면서 主體的이고 實踐的인 心學 思想을 樹立하였다. 반면 朝鮮朝에 들어와 退溪는 道統論에 根據하여 朱子學을 積極的으로 擁護하면서 陽明 心學을 酷毒하게 批判ㆍ排斥하였다. 그러나 退溪의 學問 또한 心學으로 지칭된다. 陽明은 朱子 理學을 批判하고 退溪는 陽明 心學을 批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陽明이나 退溪 모두 心學이라는 共通分母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陽明學과 退溪學이 心學으로 통칭되더라도 분명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은 그 思想 體系가 根本的으로 다르다. ‘朱子學에 대한 陽明의 批判’과 ‘陽明學에 대한 退溪의 批判’에 대한 硏究를 토대로 同時代에 展開된 明代의 陽明 心學과 朝鮮朝의 退溪 心學의 比較를 통해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의 同異點과 特性을 밝히는 作業은 아직 國內外 學界에서 進行된바 없다. 다음과 같은 필요성에 근거하여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의 同異點과 特性을 밝히는 比較 硏究를 進行해야 한다. 첫째, 비록 退溪가 朱子學的 立場에서 朱子學을 擁護하고 陽明의 朱子 批判과 陽明 心學을 비판하고 있다고 하나, 朱子學과 退溪學 또한 서로 다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의 比較를 통해 이러한 朱子學과 退溪學의 차이점을 밝혀내는 작업은 中國性理學과 다른 韓國性理學의 특성과 韓國性理學의 獨自的 發展 過程의 根本 原因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작업이다. 둘째, 退溪의 陽明學 批判 問題는 敎條主義. 道統 意識. 異端 排斥 意識에서 벗어나 客觀的으로 評價 해야 한다. 退溪는 陽明學을 批判하고 排斥하는 過程에서 오히려 不知不識間에 陽明學的 要素들을 受容하고 朱子學이 內在하고 있는 問題點들을 克服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단지 ‘退溪의 陽明 批判’에만 한정하여 朱子學的 立場에서 道統을 守護하고 異端을 排斥하였다고 하여 무조건 擁護하거나 반대로 陽明學的 立場에서 退溪가 陽明學을 왜곡하였다고 批判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陽明의 朱子學 批判의 本質과 陽明學의 문제점을 명확히 이해함과 동시에 陽明學에 대한 退溪 비판의 본질과 陽明學에 대한 退溪의 잘못된 이해를 客觀的으로 糾明해야 한다. 이러한 硏究를 바탕으로 해서만이 退溪가 陽明學을 批判하는 過程에서 陽明學을 어떻게 受容하고 있는가, 그리고 朱子學의 어떠한 問題點을 克服하고 있는 가를 밝힐 수 있다. 셋째, 이러한 作業은 退溪 以後 退溪 門下에서 展開된 陽明學 排斥의 妥當性과 問題點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朝鮮朝 陽明學이 韓國 社會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斯文亂賊으로 심하게 排斥당한 根本的인 原因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도 重要한 問題이다. 넷째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의 同異點을 밝히는 작업은 ‘陽朱陰王’(겉으로는 朱子學을 標榜하고 속으로는 陽明學을 受容ㆍ主張)의 論理를 展開하고 있다고 評價되는 韓國陽明學者들의 思想的 本質을 밝히는 데 있어서도 必要한 硏究이다. 退溪가 朱子學的 立場에서 心學을 展開하고 있듯, 朝鮮朝의 陽明學者들 또한 陽明學的 立場에서 朱子學을 展開할 수 있는 可能性의 餘地가 있다. 그러나 이 部分에 대한 硏究는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뿐만 아니라 退溪學이 朱子學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냄으로써만이 가능하다.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의 比較 硏究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陽明의 朱子學 批判과 陽明 心學의 特性을 파악해야 한다. 陽明의 朱子學 批判은 朱子의 ‘格物說’, “性卽理說’, ‘先知後行說’, ‘新民說’ 등 전방위적 측면에서 이루어짐과 동시에 陽明의 心學 사상은 ‘致良知說’, ‘心卽理說’, ‘知行合一說’, ‘親民說’ 등에서 볼 수 있듯 朱子의 학설에 대한 대응의 측면에서 수립된다. 따라서 陽明의 朱子學에 대한 비판을 朱子의 性卽理說과 格物說 및 先知後行說과 新民說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이에 대한 대응 원리로 제시되고 있는 陽明의 ‘心卽理說’과 ‘知行合一說’ 및 ‘致良知說’과 ‘親民說’에 나타난 陽明 心學의 특정을 고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陽明의 朱子學 비판의 타당성과 더불어 朱子學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발전적 측면을 진단함과 동시에 陽明의 朱子學 비판의 문제점을 파악해야 한다. 둘째, 退溪의 陽明學 비판과 退溪 心學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退溪는 程朱學을 원본으로 삼아 확고한 衛道의 입장에서 程朱學을 지키기 위해 陽明學을 포함한 異學 전체를 비판한다. 退溪의 陽明學에 대한 비판은 陽明의 ‘親民說’과 ‘心卽理說’ 및 ‘知行合一說’에 집중되어 있으며, 陽明學을 禪學이라 비판하거나 또는 禪學보다 못한 異端으로 배척하였다. 退溪의 陽明學 批判의 要地를 考察함에 있어, 陽明學 批判의 根據가 되는 退溪의 朱子學的 要素와 더불어 退溪 자신의 독창적 理의 哲學的 側面은 물론 退溪學의 心學 특성들을 고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退溪의 陽明學 批判의 妥當性과 더불어 陽明學의 問題點을 克服하는 發展的 側面을 診斷함과 동시에 退溪의 陽明學 批判의 問題點을 診斷해야 한다. 예컨대 退溪 陽明 心學에 대한 批判은 陽明學의 客觀的이고 普遍的인 道德 規範의 不在와 陽明學이 極端으로 흘렀을 때 主觀的 欲望으로 傾倒될 수 있는 問題點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批判的 意味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問題는 退溪의 이러한 陽明 心學에 대한 批判이 陽明學的 立場에서 보았을 때 정당한가 하는 문제, 즉 지나친 道統論과 破邪顯正의 闢異端論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退溪 陽明學 批判은 敎條主義와 絶對主義에 경도됨으로써 批判을 통한 再創造 過程으로 發展하지 못하는 問題點을 안게 된다. 셋째 ‘陽明의 朱子學 批判과 陽明 心學의 特性’ 및 ‘退溪의 陽明學 批判과 退溪 心學의 特性’에 대한 硏究 內容을 바탕으로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을 비교해야 한다. 이를 통해 陽明學과 退溪學의 差異點과 同質點을 찾아냄으로써 退溪의 陽明學 批判 過程에서의 陽明學 受容 與否와 더불어 退溪 心學의 獨自的 特性을 찾아내야 한다. 넷째, 退溪의 陽明學 批判과 더불어 退溪 主理的 또는 程朱學的 心學이 退溪 以後 朝鮮朝의 性理學과 陽明學의 展開 過程에 미친 影響을 고찰해야 한다. 아울러 退溪의 陽明學 批判이 내재하고 있는 肯定的 要素와 否定的 要素를 診斷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現代에 있어 韓國儒學史 硏究의 방향성과 더불어 性理學과 陽明學의 調和ㆍ절충을 통한 새로운 跳躍의 可能性을 模索해애 한다. 退溪의 陽明學 批判과 退溪 心學의 樹立 以後에 展開된 性理學과 陽明學의 展開 過程에 있어 退溪가 미친 영향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可能性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中國에서는 朱子學과 대립된 陽明 心學이 明代에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반면, 朝鮮에서는 朱子學의 理本體論을 기반으로 한 退溪 心學이 陽明이 비판한 朱子學의 문제점을 상당 부분 해결함으로써 退溪 以後 性理學者들이 陽明 心學 수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性理學的 心性論과 修養論을 중심으로 朱子學的 心學思想을 發展시켜 나갔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中國朱子學과 다른 朝鮮性理學의 發展 可能性을 열어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툴째, 陽明學을 受容ㆍ發展시킨 陽明學者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夏谷 鄭齊斗의 경우 陽明學이 ‘任情從欲’으로 흐를 것을 경계하면서 陽明과 달리 ‘心卽理’와 더불어 ‘性卽理’를 주장함은 물론 ‘生理說’에 근거한 독자적 理氣論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退溪와 退溪 門下의 陽明學 비판ㆍ배척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영향과 더불어 理哲學을 근본으로 하는 退溪 心學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退溪의 陽明學 비판ㆍ배척은 朝鮮時代의 철저한 道學의 正統精神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하더라도 학문의 발전을 위해 요구되는 多樣性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退溪의 陽明學 비판으로 인한 功過에 대한 客觀的이고 適切한 判斷과 批判이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朝鮮儒學에 대한 올바른 정립은 물론 現代에 있어서도 道統論이나 闢異端論과 같은 敎條主義的이고 閉鎖的인 學問 風土를 止揚하고 자유롭고 창의로운 학문 풍토 속에서 儒學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陽明 心學과 退溪 心學에 대한 比較 硏究는
한국양명학 연구현황과 새로운 모색 - 강화학 연구의 필요성과 접근방법을 중심 논제로 -
김용재 한국양명학회 2005 陽明學 Vol.0 No.14
A Review and Challenge of Korean Yang-Ming Studies * Zhu-Xi studies had exercised its influence in the field of culture and study in Korea peninsula since it was imported. Specially, The Chosun dynasty adopted Confucianism, actually speaking Zhu-Xi studies, as a national ideology, which ruled Chosun dynasty for 5oo years. In the early years of the Chosun dynasty, Confucianism was used for justifying new dynasty and establishing social systems, and as time goes on, Korean Confucianism built its typical and colorful style Now we can have a question whether only Zhu-Xi studies ruled public thought of the Chosun society? Until now, approximately this question didn't ask and accepted as a true. But this hypothesis isn't objective and lacks of positive study, because the Chosun Confucianism not only have Zhu-Xi studies but also have creative theories. In addition, Yang-Ming studies obviously maintained its position in the Chosun society. Specially, we can pose a hypothesis that Korean Yang-ming studies and kang-hua school played a role as a linker of the practical science (實學) and western learning(西學) in the late of Chosun dynasty. 본 논문은 한국유학사의 한 단면을 당당히 이어 왔던 ‘양명학’에 대하여 그 연구사 검토와 함께 향후 ‘한국양명학 연구’에 있어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들을 밝혀놓은 것이다.그동안 한국 유학의 사상계는 다양성의 전철을 밟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사관의 망국론에 기초한 주자 일존주의의 학풍으로 일관하였다는 오해와 오류에서 벗어나, 묻혀왔던 양명학사의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께 건국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십분 발휘했던 주자학의 그늘 하에 있었던 양명학을 한국에서 조명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국 양명학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이러한 사안들을 발굴하는 작업으로부터 이루어져 왔으며, 이제 이 분야에서 연구하는 학문 후속 세대들은 한국양명학의 한 획을 점철하고 있었던 ‘강화 양명학파’의 연구에 주력해야 함을 피력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국의 사상사가 주자학을 한국화하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계의 자유로움과 왕성한 학술적 활동이 이루어졌던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본 논문은 기존의 발상에 있어서 도식적 파악과 왜곡된 흔적들에 대한 재검토, 혹은 역비판의 필요성을 통감하며 한국 철학계의 전반적인 구조와 흐름을 명시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분야 - 강화학 - 의 기초 자료 및 영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한국유학 사상계는 주자학 이외에도 獨創的이고도 理智的인 많은 학설들이 산출되었을 것이고,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었던 양명학의 유입과 관심이 미약하게나마 엄연하게 그 궤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철학사와 한국지성사 속에서 양명학의 위상과 자리매김은 일제 식민사관의 성리학 망국론에 기초한 왜곡경직된 한국사상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 마련은 물론이고, 다양한 한국 사상계의 복원을 기대하는 학문 후속세대들에게 또다른 연구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향후 우리 한국사상계의 흐름과 정체성을 바로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이와 같이 한국양명학에 대한 연구는 그 출발과 기획에서부터 貶下와 浮沈의 연속이었다. 향후 한국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더 이상의 시행착오와 인식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명학과 관련한 모든 자료들을 발굴하여, 한국양명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명실상부한 강화 양명학 연구가 필요함을 밝혀 보았다.
이우진(Lee, Woo-Jin),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15 陽明學 Vol.0 No.42
이 논문은 ‘한국 양명학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로서 이능화(李能和)에 대한 탐구이다. 먼저, 이능화가 양명학이 어떤 측면에서 “주자학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서구적인(=서구화할 수 있는) 사상 유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탐색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주자학을 서구근대화의 장애물’로 판단하게 된 이유를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이능화의 조선유계지양명학파 에서 나타난 한국 양명학의 연구 관점이나 자료수집의 폭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이후 한국 양명학 연구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았다. 이능화는 조선을 ‘사상속박시대’라고 비난할 정도로 오직 주자학만을 유일무이한 학문으로 존숭하였던 조선 유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지녔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교조주의는 근본적으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기인한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교조주의는 당파의 분열을 발생시켜 유교의 특장점인 정치적 · 윤리적인 사회철학적 성격을 상실케 되었다고 파악한다. 반면 이능화는 양명학을 시대변혁의 방향에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사상으로 파악한 듯 하다. ‘전근대적인 주자학’을 탈피하여 당시의 역사적 사명인 ‘서구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사상’으로 양명학을 바라보았던 것으로 유추된다. 이는 일본의 서구 근대화가 양명학이라는 이념적 기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능화는 『조선유계지양명학파(朝鮮儒界之陽明學派)』에서 조선 양명학파를 학문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 양명학파를 성립시킨 인물로서 정제두로 제시하였으며, 남언경(南彦經)을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서 규정하였다. 다음으로 한국의 양명학 전래시기를 1567년 전후로 추정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후의 한국 양명학 연구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특히 이능화는 조선의 양명학 배척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논증하였다. 이후 그의 한국 양명학 연구는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에게 이어져 식민사관으로 재생산된다. 하지만 윤남한(尹南漢)과 유명종(劉明種)에 이르면 다카하시 도오루가 보여준 식민사관을 넘어서게 되고, 이능화가 마련한 인물 · 시각 · 자료 · 사건들을 그들의 한국 양명학 연구에서 근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점에서 이능화는 ‘한국 양명학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라고 지칭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 사료된다. This paper is aimed to study on Lee Nung-Hwa as ‘the drafter for research on Korean Yangmyeonghak(陽明學)’. First, we examined that why Lee considered Yangmyeonghak as most modern thought. In addition to this, We investigated that why he thought JuJahak(朱子學) as the obstacle of making Josun modern westernization. Second, we investigated Lee’s Josunyukyejiyangmyeonghakpa(朝鮮儒界之陽明學派) for seeking his research perspective and scope of data collection about Korean Yangmyeonghak. And, we examined in particular that what Lee had influenced on researchers on Korean Yangmyeonghak since he published this Josunyukyejiyangmyeonghakpa . Lee described Josun(朝鮮) as ‘the spirit bondage era.’ He had a very critical stance on the Josun Confucianism, because it only acknowledged JuJahak. At that time, any other thoughts except JuJahak were regarded as unorthodox. According to him, Jujahak dogmatism was due to toadyism basically. Jujahak dogmatism had generated multitudinous partisan brawls from the earliest days of Josun. So, the confucianim lost its advantages of ethical and political philosophy. But, Lee looked at Yangmyeonghak positively. He considered Yangmyeonghak as most modern thought. Because Yangmyeonghak was the ideological foundation of the Meiji Restoration. Lee organized the Korean Yangmyeonghak school at the political side, not the academic side in 『Josunyukyejiyangmyeonghakpa』. Lee described Jeongjedu(鄭齊斗) as the feature of establish Korean Yangmyeonghak school, and identified Namunkyung(南彦經) as the first Yangmyeonghak scholar inf Josun. And, Lee estimated the Yangmyeonghak transmission time as around 1567. Many researchers followed these his views. But, Lee analyzed the Korean Yangmyeonghak school from the perspective of colonial history. His perspective of colonial history was continued to Takahasi torou(高橋亨), but that perstpective had been refused by Yunnahan(尹南漢) and Yumyeongjong(劉明宗). However, people, data, and events selected by Lee had been accepted by almost all researchers. In that point, we identify Lee as the drafter for research on Korean Yangmyeonghak.
선병삼(宣炳三) 한국양명학회 2011 陽明學 Vol.0 No.29
본 논문은 양명의 嫡傳으로 평가받는 歐陽德(1496-1554, 字: 崇一, 號: 南野) 양지학의 내용과 의의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한국에서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양명학 연구는 양과 질에서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현재는 선배제현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양명후학에 대한 연구, 중국양명학과 한국양명학의 비교적 시각에 의한 연구, 한국양명학의 계통적 연구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서 양명제자 중에서도 양명사상의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구양덕의 양지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양명학의 핵심을 뽑자면 “심즉리”, “지행합일”, “양지”, “치양지”, “사구교”(四有論, 四無論)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양지 본체론과 치양지 공부론은 양명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구조다. 사실 본체와 공부라는 개념은 성인지학을 주장하는 송명이학의 기초를 구성하는 골격이지만 명대 양명학에서 와서 더욱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따라서良知 本體와 致良知 工夫에 대한 분석은 양명후학 개개인의 양지학을 요령있게 잡아내는 효과적인 방법론이다. 더욱이 구양덕의 양지 본체론과 치양지 공부지론은 왕용계의 양지 본체론과 치양지 공부론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구양덕은 정통으로 평가받은 반면에 왕용계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양명학의 배교자로도 폄하되었다.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구양덕 양지학에 대한 올바른 평가도 동시에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이 작업을 위해 본 논문에서는 “莊敬本體”와 “悅樂本體”라는 도식을 가지고 양현의 차이점을 검토했다. 현재 양명후학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라면 왕용계로 대표되는 이른바 현성파에 대한 긍정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선구자적인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황종희의 『명유학안』으로 대표되는 입장을 고수하던 상황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이제는 새로운 시각으로 용계학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양지학의 본체 공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좋은 토대를 마련해 주었지만 여전히 용계학이 강조하는 “철저하게 하는 공부”론이 갖고 있는 이른바 猖狂放恣에 대한 경향성을 양지학에서 제거하는 문제는 미해결인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어떤 연구자들은 유종주의 “성의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종주의 “신독”과 “성의설”은 양지 주재의 공부론을 긍정하면서도 猖狂放恣의 병폐를 없앨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노력은 양명의 양지학에 비춰봤을 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지는 성의의 근본이고 성의는 치양지의 구체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종주의 성의설을 놓고 말하자면 한 가지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유종주는 양지를 대신하여 성의를 제출하고 치양지를 대신하여 신독공부를 제출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양지는 유명무실한 것이고 양지학은 이미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출로는 없는가? 본 논문은 구양덕의 양지학을 통해 양지 본체와 치양지 공부론에 기반하여 양지 주재의 공부론을 주장하면서도 猖狂放恣의 병폐가 없는 양지학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만약 이 시도가 성공적이라면 명유들이 주장하는 성인되기 학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면서 양명 양지학의 본 모습과 구양덕 양지학의 본 모습을 고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