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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이현익의 사단칠정론

        이선열 ( Sun Yuhl Yi ) (사)율곡연구원(구 사단법인 율곡학회) 2016 율곡학연구 Vol.32 No.-

        본 연구는 18세기 낙학계열의 학자인 정암 이현익의 사단칠정설을 중점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김창협의 제자였던 이현익은 초기 낙학파 사유에서 두드러졌던 퇴율절충적 사칠론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즉 율곡학파의 전제를 바탕으로 퇴계설을 최대한 율곡설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는 것이 이현익의 기본입장이었다. 그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인의예지에서 발원한 것이라 하여 양자의 발생경로를 일원화하는 ‘기발리승일도’의 관점을 취하되, 퇴계가 말한 ‘리발’과 ‘기발’ 역시 ‘주리’와 ‘주기’의 맥락에서 용인하는 입장에 선다. 이현익에 따르면 사단과 중절한 칠정은 모두 선한 정(情)으로 가치상 동일하며, 존재상으로도 어느 쪽이 더 리에 가깝다거나 기에 가깝다는 식으로 차별화할 수 없다. 하지만 개념의 층위에서 각자가 함축하는 취지에 주안점을 둘 때 양자의 차이가 불거진다. 즉 사단은 리의 순선한 측면만을 단적으로 지시하고 기의 측면을 언급하지 않은 것인 반면, 중절한 칠정은 기가 리를 순조롭게 따른 경우를 지칭하기 때문에 기의 역할에 강조점이 놓인다. 이처럼 가치론적ㆍ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대상이더라도 무엇을 의도하고 강조하는지에 따라 개념상의 차이는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현익의 기본생각이다. 그는 기에 따라 좌우되는 우연적ㆍ가변적인 선악의 한 측면과 동일시하기에는 사단의 도덕적 함의가 크다는 퇴계의 문제의식에 공명한다. 즉 사단이 칠정의 일부로만 간주될 때 단순히 ‘중절한 일반감정’과 차별화되는 ‘천부적인 도덕감정’의 가치가 희석된다고 본 것이다. 그 같은 취지하에 이현익은 논리구조상 율곡의 학설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 퇴계의 문제의식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는 퇴계와 율곡의 관점이 각각 빠질 수 있는 편향을 지적하면서 사단칠정에 관한 종합적인 인식을 꾀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낙학파의 논리로 사단칠정 문제를 명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현익의 학설은 일정한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performed by Yi Hyun-Ik. Yi belonged to Rakhak(洛學) in Yulgok school in the Joseon Dynasty in the 18th century. Yi``s view on this issue can be recapitulated as two claims: (i) Yulgok was entirely right as regards to the relations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llings, and (ii) nevertheless, Toegye``s view on this issue, if examined closely to understand what it was originally meant, is not incompatible with Yulgok``s theory. This reveals the basic attitudes of Yi``s philosophy, which compromises the two great philosophers`` views. At the same time, Yi provides criticisms on their views. He attempted to reach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while pointing out the problems one may face taking Toegye or Yulgok``s view tendentiously. In sum, Yi``s view o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is the result of accommodating both Toegye``s and Yulgok``s philosophies, and, at the same time, of critically examining their view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Yi``s view lies in the fact that it clarifies the complex issues raised by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within his own line of thinking, as opposed to merely following previous discou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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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협과 김간의 지각 논변

        이선열 ( Sun Yuhl Yi ) 동양철학연구회 2010 東洋哲學硏究 Vol.62 No.-

        17세기 율곡학파 내부에서 논의된 智와 知覺의 관계 문제는 일차적으로 智개념에 대한 호병문의 해석이 타당한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었다. 호병문은 『대학장구』 小註에서 智를 ‘마음의 神明’으로 규정하면서, ‘具衆理·應萬事’ 대신 ‘妙衆理·宰萬物’이라는 술어를 채택해 마음이 지닌 주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호병문의 취지는 ‘知覺’ 개념이 마음의 주재 역량과 긴밀하게 연관됨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智와 知覺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아 마치 智가 직접 ‘妙衆理·宰萬物’의 작용을 수행하는 것처럼 진술함으로써 논란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이에 김창협은 호병문이 ‘知覺’에 해당하는 술어를 ‘智’에 적용함으로써 心과 性의 엄연한 구분을 무시하고 ‘認氣爲理’또는 ‘以心爲性’의 오류를 범하였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김창협은 智와 知覺이 본질적으로 별개의 범주에 속하며 양자 간에는 본체(體)와 작용(用)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智와 知覺을 道와 器의 관계로만 규정하며, 같은 맥락에서 心과 性의 관계 또한 주체(能)와 객체(所)의 관계로 보는 입장을 정식화한다. 김창협에 따르면 ‘知覺’이란 ‘智’의 현상화된 양태가 아니며, 본성을 운용하여 정감으로 현실화시키는 ‘心’ 주체의 본유적인 주재능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와 달리 김간은 ‘知覺’에 의한 마음의 주재가 가능한 것은 그 연원에 ‘智’라는 근거가 자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김간은 智와 知覺의 연계성을 부인할 경우 지각이 ‘본체 없는 작용’이 되어버린다고 김창협을 비판한다. 그는 ‘지각’이 마음의 주재적 역량을 드러내는 핵심개념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러한 주재성을 발휘하는 지각의 활동은 智에 근거한 모종의 도덕적 내용에 바탕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본다. In the 17th century, the scholars in Yulgok School discussed the issues regar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Ji(智) and Jigak(知覺). These discussions primarily stemmed from examining whether Hu Bing-Wen`s interpretation of Ji was correct. Hu Bing-Wen, while characterizing Ji as the mystic brightness(神 明) of mind, claims that Jigak is closely related to a mind`s capability for self-control. However, he does not make a sharp distinction between Ji and Jigak, and uses the two notions interchangeably. For this reason, Kim Chang-Hyup argues that Hu was mistaken in that he confused Ji with Jigak, and thus failed to distinguish between Sim(心) and Sung(性). Furthermore, he contends that Ji and Jigak belong to different categories, and that the substance-function(體用) relation cannot be applied to them. According to him, the relation between Ji and Jigak is that of Do(道) and Ki(器). Similarly, the relation between Simand Sungis that of subject and object. He also maintains that Jigakis not the phenomenalized mode of Ji, but the innate capability that employs Sungas the source of morality and turns it into feelings. In contrast, Kim Kan argues that Ji, as a ontological foundation of Jigak, is what enables Jigak to control a mind. In criticizing Kim Chang-Hyup, Kim Kan maintains that if one denies the relation between Ji and Jigak, then one would have to characterize Jigakas a groundless function. Although Kim Kan agrees that Jigak plays a crucial role in mind`s self-control, he holds that Jigakcan play such role only when it is grounded upon moral content, which in turn is based on Ji.

      • KCI등재후보

        타자 대우의 두 원칙: 관용과 서(恕)

        이선열 ( Sun Yuhl Yi ) 율곡학회 2012 율곡학연구 Vol.24 No.-

        오늘날 다원화된 사회를 어떻게 지속가능 하도록 만들 것인가라는 의제는 가장 중요한 정치·사회적 이슈 가운데 하나다. 다원성이란 곧 복수(複數)의 가치를 의미하며, 복수의 가치에서 비롯되는 차이는 쉽사리 갈등으로 이어지곤 한다. 우리가 다원주의 사회틀 유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치의 충돌에서 비롯 되는 갈등을 받아들이되 이틀 건강한 수준에서 관리하고 조정하는 지혜를 발휘 해야 한다. 그와 관련하여 이 글은 관용과 서(恕) 라는 두 윤리 원칙이 지니는 의의와 한계를 탐색하며, 어떻게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논한다. 서구 자유주의 전통에서 발전해 온 관용 개념은 개인마다 도덕적 믿음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불일치를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성립한다. 자유주의적 전체에 기초하는 한, 원칙적으로 어느 하나의 도덕적 견해 가 그와 다른 도덕적 견해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만한 실질적인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이에 관용은 ``다름``을 억지로 ``같음``으로 통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다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차이의 공존을 지향하는 것이다. 관용은 다원화 사회에서 차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불가피한 한계를 노정하기도 한다. 첫째, 인권의 침해 등과 같은 부정의의 소지가 있는 가치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둘째, 관용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사회 구성원 간의 상호 불간섭이 자칫 서로 에 대한 도덕적 무관심을 조장하기 쉽다. 관용에 기초한 타자의 인정은 차이의 형식적 공존을 넘어 타자와의 교감으로 나아가는 원칙을 제공하지 못한다는데 결정적 한계가 있다.``차이``를 인정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 구성원 간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소통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할 때, 우리는 ``같음`` 에 기반한 상호존중의 원칙으로 유가철학의 서(恕)틀 떠올릴 수 있다. 서(恕)는 내가 욕구하거나 욕구하지 않는 바를 유추함으로써 타인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합당하게 타인을 대우해주는 것이다. 이른바 ``황금률로 불리는 이러한 원칙은 유교윤리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공동체 윤리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성격을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황금률이 모든 상황에 대한 윤리적 해답으로서 정당화되거나 도덕의 체l원리로 서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恕)는 제도나 규범의 방식으로 입법화될 수 있는 성격의 도덕률이라기보다는, 다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할 의지를 가 진 유덕한 시민이 갖추어야 할 품성 또는 태도이다. 유가철학에서 서(恕)가 지니는 의미는 단순히 사회구성원 간의 쌍무적 계약관계를 전체로 한 호혜성을 넘어선다. 즉, 서(恕)의 핵심은 단지 타인과 호의를 교환하거나 쌍방 간에 위해(危害) 금지 약정을 체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민 감하게 반응하고 이틀 몰보고자 하는 이타심, 혹은 타인의 행복을 적극적으로 증진시켜주고자 하는 인도적인 덕성의 발현에 있다. 서(恕) 는 무관심의 영역에 서 내 삶에 포착되지 않고 있던 타자를 나의 관계망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연대감을 생성케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관용과 서(恕)는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 속에서 발전되어 온 개념이고 각각의 내적 논리도 일치하지 않지만 그 저변에는 모두 상호존중을 통한 타자와의 평화로운 공존을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다. 양자는 사회를 통합하고 갈등을 해소 하는 유력한 방안으로써 다원주의 공동체의 원만한 운영을 위한 실천적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One of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and social issues nowadays is how to maintain a society with diverse cultures and values, In order to respect diversity, we ought to be open-minded about various viewpoints on values, however, the difference in opinion stemming from various moral values often leads to social conflicts, Therefore, in order to retain the diversity of society, we should acknowledge the possibility of such conflicts, and try to manage and mitigate me controversies and disputes caused by them. This article discusses two principles of ethics, tolerance and shu (恕, generosity), suggested to cope with me social conflicts stemming from diversity in values. In particular, I discuss the significance and the limitations of the two principles, and examine how they can complement each other. The notion of tolerance as developed in me Western tradition of liberalism is based on the belief that there may be fundamental difference in moral point of views each individual holds, and such difference cannot be resolved, According to the liberalism, it is difficult to find a solid basis for holding that one moral viewpoint is superior to any others, The spirit of tolerance is to pursue the coexistence of different moral values by means of acknowledging the differences as may are, as opposed to eliminating them. Although tolerance is an essential virtue is a society respecting diversity, there may be problems in puffing me principle of tolerance into practice. First of all, one might ask whether we should tolerate a system of value mat endorses me practice of injustice such as the violation of human rights. Also, a non-intervention policy under the cloak of tolerance may give rise to the widespread apathy toward others, In general, the acknowledgement of others based on tolerance, which pursues the coexistence of different systems of value, dose not provide a principle that generates mutual sympa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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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과 한원진의 미발론 비교 검토

        이선열(Yi Sun-yuhl)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한국학 Vol.32 No.2

        송시열과 한원진은 17세기와 18세기 기호학파 노론의 중심인물로서 동일한 정치적, 사상적 노선을 공유한 학자들이다. 그러나 사상사의 맥락에서 볼 때 두 사람의 학설은 다소 상이한 양상을 보이는데, 그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미발에 관한 이론이다. 특히 미발을 역의 곤ㆍ복괘로 파악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은 미발에서 곤과 복의 두 층차를 인정하는 반면 한원진은 곤괘만을 미발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통해 송시열은 미발에서의 실질적인 지각작용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것이 미발수양의 가능근거를 제시한 주희 중화신설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파악한다. 이와 달리 한원진은 미발시에는 단지 지각능력만 잠재되어 있을 뿐 실제 지각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아 수양공간으로서 미발의 위상을 축소한다. 이러한 양자의 견해차는 ‘중’ 개념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연결된다. 송시열은 미발과 ‘중’을 동일시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발상태에서 ‘중’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한원진은 마음의 미발 또한 기질의 편차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성인이 아닌 보통 사람은 미발시에도 ‘중’을 견지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한원진의 입장은 이간과 낙학이라는 동시대 논적과의 논쟁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한원진은 송시열의 가치노선을 계승하여 성리학 이론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송시열을 넘어서서 배타와 분별의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을 나아갔다. Song Si-yeol and Han Won-jin were the central figures in the Old-faction of Ki-ho School on the 17th and 18th century respectively, sharing the same political and ideological stance. Illuminating on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ir philosophical expounding, however, their theories offer somewhat contrasting arguments, especially on the theories of wei-fa (before-issuance). Insofar as the problem of interpreting wei-fa as kun(坤)·fu(復) hexagram is concerned, while Song admitted both hexagrams as the two levels of wei-fa, Han insisted that only kun hexagram were to be applicable to the notion of wei-fa. Arguing thus, Song held that actual process of consciousness was possible at wei-fa, which in turn corresponded to Zhu Xi's idea behind writing 'the New Theories on Centrality-Harmony' where Zhu proposed the solid basis of moral cultivation at wei-fa. On the contrary, Han challenged that at the time of wei-fa, consciousness existed only as latent and not as an actual process, hence diminishing the status of wei-fa in the realm of cultivation. Such difference in succession led to the different understandings of the notion 'centrality'(中). Song identified wei-fa with centrality, believing that all humans can experience 'centrality' when in the mode of wei-fa. Han, on the other hand, disputed that human mind, wei-fa or not, could not escape from the deviation of temperament, and that it would be quite difficult for a layman, who is not yet a sage, to maintain 'centrality' even at the time of wei-fa. Han's such stance was established through many disputations with scholastic opponents of his time, such as Yi Gan from Rak-line of Old faction. Ideologically Han was taking over Song's inheritance; however, through process of restructuring Neo-Confucian theoretical framework, Han took Song one step further and opened a new way that strengthened the logic of seclusion and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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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이선열 ( Sun Yuhl Yi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2 한국 철학논집 Vol.0 No.33

        본 논문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잠야 박지계의 인심도심에 관한 학설을 검토하고 그 철학적 의미를 분석한다. 박지계의 인심도심설은 주희의 그것과 뚜렷이 구분되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더욱이 주희 인심도심설이 지닌 미묘한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주희의 인심도심설에서는 두 가지 명제, 즉 “인심과 도심은 한 마음의 두 양태”라는 명제와 “양자는 모두 이발시의 마음”이라는 명제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주희에게 있어 이 두 명제는 모두 “지각”이라는 계기와 연관되며 서로 긴밀하게 연계된다. 그러나 주희는 인심과 도심 두 개념의 존재론적 일원성과 가치론적 이원성 사이에서 고심하며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에 대해 박지계는 인심도심이 모두 미발 이발에 걸쳐 있으며, 양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마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주희와 다른 길을 간다, 박지계의 인심도심설은 철저한 이분법에 근거하여 “마음은 하나”라는 주희의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구축되어진다, 그에 따르면 도심과 인심은 연원에서부터 발생까지 서로 다른 별개의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고, 전자는 후자를 주재하고 후자는 전자의 명령을 받드는 군신관계와 같다, 또한 인심은 최선의 경우라 할지라도 도심의 휘하에 놓이는 것일 뿐 도심과 같은 차원에 속할 수 없다. 박지계는 인심이 최선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도심에 의해 교정되고 길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사유는 주희의 이론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동안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던 17세기 조선 성리학계의 다양한 일면을 보여준다. Pak Jigye is a Confucian scholar of Chosun dynasty in the 17th century. This article examines his theory of Insim-Dosim, and analyzes it from philosophical perspective. Although Pak considered himself as a devout follower of Zhuxi, his theory of Insim-Dosim was quite different from Zhuxi`s. There are two fundamental propositions underlying Zhuxi`s theory of Insim-dosim: (i) Insim and Dosim are not two minds; rather, they are two aspects of one single mind, and (ii) both Insim and Dosim are in the state of post-issued mind(Yibal). For Zhuxi, these two propositions are inextricably related to the concept of Jigak. However, he struggles between the ontological unity of Insim and Dosim and their axiological duality, and finally reaches an ambiguous conclusion on the issue. Pak Jigye takes a different path, insisting that both Insim and Dosim belong to every aspect of mind including Mibal and Yibal, and that they are two separate minds. His theory is based on solid dichotomy of Insim and Dosim, and it denies Zhuxi`s premise on the unity of mind. According to him, Dosim and Insim are drastically different in terms of their forms, origins and the ways of occurrence. Their relation is analogous to the relation between sovereign and subject in the sense that the former supervises the latter while the latter follows the orders of the former. Therefore, Insim always comes under the control of Dosim even at its best, and cannot be reached at the level of Dosim. Pak maintains that Insim must be guided and domesticated by Dosim in order to reach its highest state. His theory is unique and differs from Zhuxi`s. And it reveals diverse aspects of Neo-confucian thoughts in the 17th century Chosun, which have less discussed in the literature of Korean Neo-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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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 기정익의 기수설(氣數說) -박상현·윤증과의 논변을 중심으로-

        이선열 ( Yi¸ Sun-yuhl ) 퇴계학연구원 2020 退溪學報 Vol.148 No.-

        본 논문은 17세기 율곡학파 내부에서 奇挺翼과 朴尙玄, 尹拯을 중심으로 논의된 氣數 논변의 학술적 의의를 규명하고 기정익의 사유가 지닌 특징적 면모를 탐색한다. 氣數說은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氣와 그 현실의 명운을 결정하는 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한 논의로 지금까지 조선 성리학 연구에서 다뤄진 적이 없는 다소 특이한 담론이다. 논변의 주요쟁점은 氣와 數를 동일하게 볼 것인지 구분해서 볼 것인지, 그리고 氣와 數의 가변성과 불변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논변은 기정익의 주장에 대해 박상현과 윤증이 반론을 제기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박상현과 윤증은 기와 수를 구분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으나, 박상현의 경우기와 수를 모두 불변적·고정적인 것으로 여긴 반면 윤증은 반대로 기와 수를 모두 가변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들과 달리 기정익은 기와 수를 둘로 나누어 가변적인 것과 불변적인 것으로 철저히 구분하는 입장을 취했다. 기수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운명을 과연 얼마나 극복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함축한다. 아울러 이러한 물음은 기에 의해 국한된 현실 속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노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탐색하는 율곡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논변의 중심에 있었던 기정익은 박상현과 윤증의 주장에 대응해 자신의 기수설을 확립해가며 의지와 숙명의 길항 관계를 깊이 숙고하는 사유를 보여준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academic significance of the arguments of gi (氣) and su (數) discussed in the 17th century Yulgok School, focusing on the debate among Ki Jeong-Ik, Park Sang-Hyun, and Yoon Jeung. The Gi-su argument is a discussion about how to see the relationship between gi that makes up the real world and su that determines the fortune of the reality, and is a rather peculiar discourse that has not been dealt with in the study of Chosun's Confucianism. The main issue of the argument was whether to see gi and su identically or separately, and how to understand the variability and immutability of gi and su. The philosophical question implied in the argument is to ask how much a person can overcome and change the destiny that has been given since birth, based on the worldview of the li (理) and gi (氣) theory of Neo-Confucianism. In addition, this question can be said to be embodied in the agony of the Yulgok School, which explores how far human efforts beyond the limits are possible in the reality confined by gi. Ki Jung-Ik, who was at the center of the discourse, responds to the arguments of Park and Yoon, establishing his theories and deeply pondering the relationship between will and f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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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 한원진의 김창협 지각론 비판

        이선열 ( Sun Yuhl Yi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3 한국 철학논집 Vol.0 No.36

        본 논문의 목적은 18세기 湖學의 종장이었던 남당 한원진의 김창협 지각론에 대한 비판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다. 당시 호락논쟁에서 지각과 관련된 논쟁을 주도했던 인물은 김창협이었고, 따라서 당시의 지각 담론은 대체로 그에 대한 찬반 논의로 전개되는 양상이었다. 洛學과 대립한 한원진에게 농암설을 성공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湖學의 학파적 입장을 정립함에 있어 주요한 사안이었다. 쟁점은 주로 지각의 연원에 관한 문제, 혹은 智와 知覺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김창협은 智와 知覺이 본질상 별개의 범주에 속하며 양자 간에 體用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智와 知覺의 관계를 실현되어야 할 ‘道’와 그것을 실현해야 할 ‘器’의 관계, 또는 객체(所)와 주체(能)의 관계로만 보는 입장을 정식화 한다. 나아가 김창협은 心의 지각활동이 본성과 직결된 것이 아니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여 心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한원진은 그러한 김창협의 구도가 性과 心을 분리하며 궁극적으로 본성이 아니라 마음을 본체로 삼는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 그는 心의 지각 활동이 본성이라는 절대적 근거가 없이 이루어진다면, 결국 지각은 자의적으로 대상과 관계맺는 맹목적인 인지활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본다. 만약 본성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지각이 도덕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가정 할 경우, 이는 본성이 아니라 마음 자체에 도덕의 근거가 내재한다는 얘기가 되므로 결국 본체를 性과 心둘로 나누는 셈이 되고 만다. 한원진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이란 도덕본성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활동이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김창협이 도덕실현의 주체로서 지각의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한원진의 경우 도덕실현을 가능케 하는 본원으로서 智의 위상을 중시하는 입장에 선다. This paper aims to analyse Han Wonjin`s criticism centered on Kim Changhyup`s theory of Jigak(知覺). In the early 18th century, Kim Changhyup whose position considered as the leader of Rakhak(洛學) circle was the central figure in the debate on the controversial subject of Jigak. Han Wonjin as an opinion leader of Hohak(湖學)`s legacy was required to argue with his counterpart in order to establish his circle`s standpoint. The main issue they discussed was the relationship between Ji(智) and Jigak. Kim contends that Ji and Jigak belong to different categories, and that the substance-function(體用) relation cannot be applied to them. According to him, the relation between Ji and Jigak is that of Do(道) and Gi(器). Similarly, the relation between Sim(心) and Sung(性) is that of subject and object. He also maintains that Jigak is not the phenomenalized mode of Ji, but the innate capability that employs Sung as the source of morality and turns it into feelings. In contrast, Han argues that Ji, as a ontological foundation of Jigak, is what enables Jigak to be a moral activity. In criticizing Kim Changhyup, Han maintains that if one denies the relation between Ji and Jigak, then one would have to characterize Jigak as a blind function with no moral sense. If one admits Jigak can have moral contents on its own without the connection with Ji, then one would have to allow two moral foundation, which leads one`s idea into heretical beliefs. Han holds that Jigak can a moral function only when it is grounded upon Ji. In conclusion, Han emphasizes Ji as the base of Jigak that enables Jigak to realize morality while Kim emphasizes the role of Jigak as the principal agent of moral activity.

      • KCI등재

        송시열과 박상현의 미발 논변

        이선열(Yi, Sun-Yuhl)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0 철학사상 Vol.36 No.-

        미발(未發)과 기질(氣質)의 관계는 중화론(中和論)과 이기론(理氣論)이라는 주자학의 두 논의범주가 중첩되면서 발생하는 논리적 문제로, 이는 율곡학파 특유의 논점과 결합하여 더욱 증폭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주희는 중화신설을 정립하며 미발을 현상 너머의 초월적 본체가 아닌 ‘마음’의 한 국면으로 규정하였는데, 여기에 심(心)을 기(氣)로 보는 율곡학파의 인식이 투영되자 심의 한 부분인 미발 또한 결국 기의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에 송시열과 박상현은 미발을 기질 개념과 결부하여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놓고 이론적으로 대립한다. 박상현에게 미발이란 ‘대상사물과 감응하기 이전’이라는 마음의 한 시점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시간적 관념이 우선하며 특정한 도덕적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그에게 미발은 곧바로 중(中)의 상태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박상현은 마음을 이루는 기의 청탁(淸濁) 여하에 따라 미발시에도 중(中)과 부중(不中) 또는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선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성인과 보통사람은 각각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미발에 있어서도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성범부동론(聖凡不同論)의 견해로 이어진다. 반면 송시열은 미발이란 곧 마음이 중의 상태에 있음을 일컫는 것이요, 미발 개념을 규정함에 있어 기질의 편차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미발은 단지 사물과 접하지 않은 시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이상태로서의 의미를 그 자체로 함축한다. 그는 기품 여하와 무관하게 천리와 소통하는 마음자리로서 미발의 이념적 위상을 확보하고자 하며, 이에 기질의 영향이 실제화되는 시점을 이발(已發) 이후로 한정하여 미발과 기질의 상관성을 아예 차단시킨다. 송시열에게 미발이란 본성 또는 천리와 동등한 보편성을 가지며, 따라서 성인과 범인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동질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심적 상태로 간주된다. 이러한 두 사람의 견해차는 훗날 호학과 낙학의 입장 대립과 큰 틀에서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Debate on Mibal(未發) between Song Si-Yeol and Park Sang-Hyun: Focusing on the problem of understanding mibal in relation to kijil(氣質). Song Si-Yeol and one of his disciples Park Sang-Hyun disagree with each other as to whether it is legitimate to understand mibal (未發) in relation to kijil(氣質, temperament). The disagreement between them stems from the fact that their versions of mibal differ from each other. According to Park, mibal is a certain time prior to the mind"s making contact with an object. From this view, mibal is basically a temporal notion and does not contain any ethical implications in particular. For Park, mibal is not equated with the notion of centrality(中). He argues that centrality and incorrectness (不中), or good and evil, may coexist, even in the state of mibal. This leads to the view that a sage and a layman cannot be the same in terms of mibal, for they differ in temperament. On the other hand, Song contends that mibal is the mind in the state of centrality. According to him, the difference in temperament should not be taken into account when expounding the concept of mibal. He holds that mibal is not a mere temporal point prior to the contact to an object, but an ideal entity that contains moral significance by itself. Song aims to provide a metaphysical basis of mibal that interprets it as the realm of a mind that is connected to the Heavenly Principle(天理). For this reason, he claims that the difference in temperament can only be displayed in the state of yibal(已發), precluding the interconnection between mibal and temperament. According to Song, mibal, like sung(性) and li(理), is universally applied. Thus, it can be experienced by every member of mankind, sages and laymen alike. In general, the difference of opinion on this matter between Song and Park corresponds to the later disagreement between the Ho-hak line(湖學) and the Rak-hak line(洛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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