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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종,Li, Ching-Yan,Jr, Kermit Cromack 강원대학교 삼림과학연구소 2000 Journal of Forest Science Vol.16 No.-
많은 산림의 임상에는 특유의 분해과정에 있는 목질의 도복고사목이 존재하며, 이는 식물, 동물의 서식처가 되고 미생물의 다양성을 제공한다. 분해급 III-V의 Douglus-fir의 목질부 시료를 넣은 리치튜브에 물오리나무(Alus hirsuta)와 루브라오리나무(A. rubra)를 파종하고 온실에서 재배 실험한 결과, 두 수종 모두 근류가 형성되어 분해중인 도복고사목에 감염성 Frankia가 존재함을 시사하였다. 압열멸균한 시료에선 생육이 매우 불량하였고 근류가 형성되지 않았다. 도복고사목 내의 Frankia의 존재로 목질 유기물이 공생 질소고정 균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산림생태계 내의 목질 유기물이 산림이 장기 생산력에 기여하는 系의 구조적 다양성과 생물적 다양성을 창조하고 유지시킨다는 것을 시사한다. Fallen and decomposing woody debris are conspicuous features of the forest floor in many natural forests. They provide habitats for plants, animals, and a diversity of microorganism. Seeds of Alus hirsuta and Alus rubra were sown in leach tubes containing Douglas-fir woody debris of decay class III-V. In greenhouse studies, wood samples induced effective nodule formation in Alus hirsuta and A. rubra, indicating that the fallen trees contained infections and effective Frankia. Alder on sterilized wood substrates grew poorly and did not nodulate. The preserve of infective Frankia in dead, fallen trees suggests that woody debris is a source of symbiotic nitrogen-fixing organism. The results suggest that coarse woody debris create and maintain structural and biological diversity that contributes to forest long-term productivity. Key words : woody debris, Alus hirsute, A. rubra, Frankia, biological diversity long-term productivity
1910년대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와 ≪매일신보≫ 등에서의 ‘만주식민지’론
이명종 한국근현대사학회 2016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78 No.-
In 1910s, a large number of the Korean peasants had been emigrated to Manchuria. They had complaints 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pressure from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majority of these peoples had been not only languished in poor in Korea but also had gone to live as poor peasants and workers in Manchuria. Particularly they considered the Gando as a utopia, and then they emigrated to that province. Some peoples whose had a anti-Japanese consciousness thought the Gando as a land of freedom. As a mouthpiec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HE MAIL-IL SHINPO regarded the emigratory Koreans as losers in struggle for existence, and described the Gando as a hell, and actively opposed Korean emigration to Manchuria. Since Japan and China formed an ‘Agreement of Nam-Man-Dong-Mong’ in May 1915, however, THE MAIL-IL SHINPO highly had been encouraging Koreans to emigrate to Manchuria. After those times THE MAIL-IL SHINPO compared emigration to Manchuria to the recovery of Korean lost territory. And then claimed that Manchuria and Korea had been maintaining a indivisible relationship as the same one. This claims cam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tinents invasion to make Manchuria into the territory of Japan. The intellectual who have been cooperating in this policy of THE MAIL-IL SHINPO was Ji-yeon Jang. THE MAIL-IL SHINPO and Jang had regarded Manchuria as the Korean colony. This discourse conceiving of Manchuria as the Korean colony had played a role of interfering with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Manchuria. These discourses had distorted the desire of the Korean peoples for opposing to economic deprivation and the Japanese rule. 1910년대에는 많은 조선 농민이 일제 치하의 정치경제적 압박에 대한 불만을 품고 조선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1909년에 약 21만 명이었는데 1919년에 이르면 4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빈농 출신이 었고, 만주에서 대개 소작농이나 노동자로 살아갔다. 조선의 빈농은 특히 간도에 대해 ‘영생처’, ‘요지정토’, ‘낙토 이상향’ 등으로 생각하며 이주했다. 항일의식을 가진 조선인은 간도를 ‘조선인의 자유천지’라고 생각하고 이주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주하는 조선인을 ‘생존경쟁 패배자’ 로 간주하였고, 간도에 대해서도 ‘생지옥’ 등으로 표현하며, 이주에 적극 반대하며 만주에 있는 조선인의 귀환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즈음하여 매일신보는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일본 대륙경영의 밑바탕’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듬해 5월 25일 중국과 일본이 ‘남만동몽조약’을 체결한 후부터 매일신보는 지면을 통해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적극 권장하였다. 1910년대 중반 이후 매일신보는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고토 회복’에 비유하였고, 나아가 만주와 조선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의 경우처럼 만주를 일본의 영토로 삼으려는 대륙침략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매일신보의 이런 방침에 협력한 국내 지식인이 장지연이었다. 매일신보와 장지연 및 잡지 반도시론 등은 당시의 만주를 ‘조선인 식민지(殖民地)’로 보았다. 이러한 ‘만주식민지’론은 만주를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독립운동을 무산시키려는 담론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의 목표를 경제문제의 관점에만 국한시킴으로써, ‘합병’ 이후 경제적 궁핍과 동시에 일제 지배에 대한 불만을 품고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