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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스胡適의 사상을 통해 ‘의무가 되어버린 개인의 권리’ 찾기

        구민희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1 인문학연구 Vol.0 No.41

        오늘날 공동체(사회) 속에 포함된 개인이라면 누구나 ‘권리’와 ‘의무’라는 두 가지 사회적 약속을 가진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라서 무엇보다도 균형이 중요하다. 이 균형이 깨져버리면 개인은 사회의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세계적으로 생존경쟁의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주체적 개인’이다. 때문에 20세기 초 과학과 민주, 자유와 인권의 목소리가 높았던 시대를 살았던, ‘개인의 자유’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국의 후스(胡適, 1891~1962)를통해 ‘개인해방의 길’을 살펴본다. 서구에서 ‘개인의 자유’는 근대 시민계급을 종교적 억압과 신분적 속박으로부터벗어나게 한 해방의 이념이었다. 이로부터 파생한 서구의 사상들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의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서구의 새로운 문물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었고, 또한 서구에서 유학하고 온 많은 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서구의 사상들이중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중국 침입은 사상가들에게 중국의미래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이때 천두슈(陳獨秀, 1879~1942)가발간한 잡지 ꡔ신청년新靑年ꡕ을 중심으로 한 신문화운동(1915년 시작)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서양근대사상에 의거하여 봉건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는데 주력했다. 이는 1919년 반제국주의․반봉건의 구호를 외치는 5․4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계속되면서,지식인들의 사상적 행보는 크게 ‘개인’과 ‘국가’로 양분화 되었다. 전통유교로부터억압된 민중을 구하고자 했던 지식인들 또한 점차 위로부터의 국민국가 건설로 기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스는, 현 중국의 문제를‘개인’의 부재不在라고 파악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한 그만의 주장을 펼쳤다. 그가서구 발전의 원동력이라 생각했던 것은 바로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개인관․진화론․실험주의實驗主義였다. 따라서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전통유교에 얽매어 있는 개인(특히 여성)을 각성시키려 했으며, 어려운 한문에 속박당한 민중들을 위해 문자개혁을 주장했고, 누구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헌법을 제정해야한다고 외쳤다. 후스의 철학체계가 견고하게 정립되지 못해서 사상 자체적 모순과 현실과의 괴리라는 한계를 가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중국에서 ‘개인의 자유’를 대표하는사상가로 후스가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권리와 의무, 개인과 국가의 문제가 현실적으로와 닿는 오늘날 그의 사상들은 반성의 계기와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 알칼리성 폐수를 중화제로 사용하기 위한 처리방법 연구

        구민희,이찬원,문성원 경남대학교 환경문제연구소 2002 환경연구 Vol.25 No.-

        A cleansing wastewater which comes from operating water-purifying machine is classified as a strong alkaline wastewater. When this alkaline wastewater was directly applied to the neutralization of acidic wastewater, there were several problems such as increasing the coagulant amount, reaction time, and floating of sludge in the neutralizing tank. Thus, the goal of this study is to fix the problems in utilizing the alkaline wastewater as a neutralizing agent by introducing a new method to the first pre-treatment process. A cleansing wastewater was characterized by pH 12.3, COD 28mg/L, and SS 25mg/L. Without any treatment, there would be some difficulties in treating in the following physicochemical sewage treatment facilities. When seawater or bittern was added to the alkaline wastewater, the solids were coprecipitated with Mg(OH)₂. Use of alkaline wastewater after removing some contaminants and color made it possible to treat wastewater effectively and economically in the next step of wastewater treatment.

      • KCI등재후보

        일반 논문 : 후스胡適의 사상을 통해 "의무가 되어버린 개인의 권리" 찾기

        구민희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1 인문학연구 Vol.0 No.41

        오늘날 공동체(사회) 속에 포함된 개인이라면 누구나 ``권리``와 ``의무``라는 두 가지 사회적 약속을 가진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라서 무엇보다도 균형이 중요하다. 이 균형이 깨져버리면 개인은 사회의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세계적으로 생존경쟁의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주체적 개인``이다. 때문에 20세기 초 과학과 민주, 자유와 인권의 목소리가 높았던 시대를 살았던, ``개인의 자유``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국의 후스(胡適, 1891~1962)를 통해 ``개인해방의 길``을 살펴본다. 서구에서 ``개인의 자유``는 근대 시민계급을 종교적 억압과 신분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해방의 이념이었다. 이로부터 파생한 서구의 사상들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의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서구의 새로운 문물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었고, 또한 서구에서 유학하고 온 많은 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서구의 사상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중국 침입은 사상가들에게 중국의 미래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이때 천두슈(陳獨秀, 1879~1942)가 발간한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중심으로 한 신문화운동(1915년 시작)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서양근대사상에 의거하여 봉건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는데 주력했다. 이는 1919년 반제국주의.반봉건의 구호를 외치는 5.4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계속되면서, 지식인들의 사상적 행보는 크게 ``개인``과 ``국가``로 양분화 되었다. 전통유교로부터 억압된 민중을 구하고자 했던 지식인들 또한 점차 위로부터의 국민국가 건설로 기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스는, 현 중국의 문제를 ``개인``의 부재不在라고 파악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한 그만의 주장을 펼쳤다. 그가 서구 발전의 원동력이라 생각했던 것은 바로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개인관.진화론.실험주의實驗主義였다. 따라서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전통유 교에 얽매어 있는 개인(특히 여성)을 각성시키려 했으며, 어려운 한문에 속박당한 민중들을 위해 문자개혁을 주장했고, 누구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헌법을 제정해야한다고 외쳤다. 후스의 철학체계가 견고하게 정립되지 못해서 사상 자체적 모순과 현실과의 괴 리라는 한계를 가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중국에서 ``개인의 자유``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후스가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권리와 의무, 개인과 국가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와 닿는 오늘날 그의 사상들은 반성의 계기와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今日、共同體(社會)の中に屬する個人といえば、誰でも「權利」と「義務」と いう二種類の社會的約束はまぬかれない。この二つは相互補完的なので何よりも均衡が重要である。この均衡がこわれてしまえば個人は社會の道具に轉落してしまう。世界的に生存競爭の時代に何より重要なのは自ら均衡を合わせることができる「主體的個人」である。だから、20世紀初─科學と民主、自由と人權の聲が高かった時代を生きた、「個人の自由」のために眞劍に惱んだ中國の胡適(コセキ、1891~1962)を通じて「個人解放の道」を考える。西歐で「個人の自由」というのは近代の市民階級を宗敎の抑壓と身分的束縛から拔け出すようにした解放の理念であった。これから派生した西洋の思想は19世紀末から20世紀初にわたって中國の知識人らを魅了させた。そして當時の中國では帝國主義列强の植民地の爭奪戰に西歐の新しい文物が多樣に紹介されたし、さらに西歐で留學した多くの學生たちが歸國することによって直間接的に西洋の思想が中國に入ってきた。とわいえ、西歐の帝國主義による中國への侵入は思想家にとって中國の未來のための方案を模索するようにした。この頃、陳獨秀(1879~1942)が發刊した雜誌『新靑年』を中心にした新文化運動(1915年開始)が起きたが、この運動は西洋の近代思想に基づいて封建思想を徹底的に批判するのに注力した。これは1919年の反帝國主義.反封建のスロ一ガンを叫ぶ5.4運動にまで續いた。しかし現實的には帝國主義の侵略及び國民?と共産?との內戰が續きながら、知識人らの思想的な步みは大きく「個人」と「國家」で二分化された。戰統の儒敎から抑壓された民衆を救おうと思った知識人らも順次に上からの國民國家の建設に傾い た。このような狀況で1917年にアメリカ留學を終えて歸國した胡適は、中國の問題を「個人」の不在と把握して「個人の自由」のための彼だけの主張を宏げた。彼が西毆の發展の原動力であると考えたことはまさに個人の自由にもとづく、主體的な個人觀.進化論.實驗主義であった。したがって彼はこれを基づき、廣統の儒敎にとらわれている個人(特に女性)を覺醒させようとし、難しい漢文に束縛された民衆たちのために文字の改革を主張し、誰も個人の自由を侵害できないように憲法を制定するべきだと叫んだ。胡適の哲學體系がかたく確立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わけで、思想自體の矛盾と現實との乖離という限界を持ってはいるとしても、今も中國では「個人の自由」を代表する思想家で胡適が擧げ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はなおも「個人の自由」に對する問題が解決さ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ことを反映する。權利と義務、個人と國家の問題を現實的に實感する今日において彼の思想は反省の契機と解決の?口になるだろう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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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트너의 음악에 나타나는 시와 음악의 상관관계 연구- <밤바람 소나타>를 중심으로

        구민희 한국피아노교수법학회 2019 음악교수법연구 Vol.20 No.2

        니콜라이 메트너(N. Medtner, 1880-1951)는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등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20세기 러시아 후기 낭만시대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피아노 음악에서 특히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메트너의 작품 중 <밤바람 소나타>(Sonata in E minor Op. 25, No. 2 “Night Wind”)는 그의 피아노 작품을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대표작이다. 이 곡은 메트너의 뛰어난 소나타 형식의 작곡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밤바람이여, 왜 울부짖는가?>로 시작하는 러시아 시인 튜체프의 시를 기악곡에 인용하는 독특한 양식을 볼 수 있다. 이 곡에서는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메트너가 문학적 상상력을 음악으로 구현한 그만의 방식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밤바람 소나타>에서 인용된 튜체프의 시와 음악의 관련성을 살피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연구를 통해 시는 곡에서 전반적인 분위기 및 형식, 조성, 선율, 리듬, 짜임새 등을 통해 음악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의 결과는 <밤바람 소나타>의 영감의 근원이었던 튜체프의 시가 음악에 미친 영향을 탐색함으로써 곡을 쉽게 접근하고 깊이 있는 해석에 도움을 주는 것에 의의를 가진다. 또한 국내에서 생소한 메트너의 작품을 한층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레퍼토리의 확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기대한다. Nikolai Medtner is a Russian composer and pianist of the late Romantic period, contemporary with Rachmaninoff and Scriabin. Sonata Op. 25, No. 2, ‘Night Wind’, is the most monumental of the piano works by Nikolai Medtner, a composer who was especially talented in piano music. The piece of music showcases Medtner’s outstanding techniques to compose a sonata. With its unusual style of using a poem as an epigraph to instrumental music—the Russian poet Fyodor Tyutchev’s work in this case—, the literary-inspired artist takes his own unique approach, namely translating a literary imagination into music. This study focused on examining the connection between ‘Night Wind’ and the Tyutchev poem and found that the piece of poetry inspired the sonata in various aspects, including its overall mood, form, key, melody, rhythm, and texture. This study is significant because its exploration of how the poem influenced the sonata as its source of inspiration helps interpret the piece of music in depth. It is also expected to better familiarize Korea with Medtner’s works and expand Korean pianists’ repertoi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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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이성 유방암 수술환자의 보조화학요법 현황

        구민희,제남경 한국병원약사회 2021 병원약사회지 Vol.38 No.2

        Background : In July 2017, breast cancer surgery codes have been revised to more accurately describe a procedure of breast cancer surgery. This study aimed to investigate the current practice patterns of breast cancer surgery and the subsequent adjuvant chemotherapy after the revision of breast cancer surgery codes. Methods : We analyzed the 2018 inpatient datasets provided by the Health Insurance Review and Assessment Service (HIRA-NIS-2018-0047). Female patients with non-metastatic breast cancer who underwent breast cancer surgery and adjuvant chemotherapy were selected. Multinomial logistic regression analysis was performed to explore the relationships among variables regarding the selection of adjuvant chemotherapy relative to the doxorubicin and cyclophosphamide (AC) regimen. Results : Breast-conserving surgery was performed more frequently than mastectomy (70.2% vs. 29.8%) in 2018. For study subjects who underwent axillary lymph node dissection, the odds ratio for selecting sequential anthracycline-cyclophosphamide and taxane (AC-T) as adjuvant chemotherapy over AC was 23.27 (95% confidence interval [CI]=8.61-62.91). For patients aged 65 years or older, the odds ratio for selecting cyclophosphamide, methotrexate, and 5-Fluorouracil (CMF) as adjuvant chemotherapy over AC was 12.16 (95% CI=3.22-46.00). Conclusion : Factors influencing the choice of adjuvant chemotherapy were associated with age and presence of positive lymph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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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의 "한류" 현상에 따른 교육학적 고찰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을 중심으로-

        구민희 ( Min Hee Koo ),이재규 ( Jae Kyu Lee )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人文科學 Vol.0 No.49

        정조 시대를 다룬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이 반향을 일으킨 요인은 바로 오늘날 대중을 위하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요구에서 비롯한 것 이다. 당시의 지식인이었던 성균관의 유생들과 임금, 정치인들이 백성의 삶을 편안히 하고자 함께 노력한 모습이 바로 우리가 이 드라마에 몰입하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오늘날 서민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되길 바라는 대중적 요구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상콘텐츠가 갖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여러 장르의 드라마가 있겠지만 <성균관스캔들>과 같은 역사드라마가 한류 바람을 타고 대중화됨에 따라 사실과 허구의 사이에서 문제, 즉 역사의 해석 문제가 거론된다. 특히 한류가 확산됨에 따라 역사해석의 문제는 교육학 적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더불어 이 논문은 역사드라마의 교육적 효용성에 대한 문제를 살펴본다. The main cause for <Sungkyunkwan Scandal>, a drama that deals in the era of King Jeongjo, to create such a stir is just the one that has originated from our demand for intellectuals and politicians serving the public these days. The efforts exerted by the Confucian scholars, King and the politicians, who were all intellectuals at that era, to make the publics` life more convenient may be one of the main reasons for us to be immersed in this drama. This is containing the publics` demand that the intellectuals and politicians have to endeavor for stable lives of the ordinary people. It may be said that this is the very power retained by the image contents. There may be dramas in different genres, but as the historical drama like <Sungkyunkwan Scandal> became so popular by taking advantages of Korean Wave, the issue between fact and fiction, i. e., the issue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is to the fore. In particular, with spread of the Korean Wave, it cannot be denied that the issue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is an important issue from the educational aspects. In addition, this thesis is examining the issue about educational utility of the historical dra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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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 스미스와 노자의 자유방임주의 비교

        구민희 ( Min Hee Koo ) 동양철학연구회 2010 東洋哲學硏究 Vol.61 No.-

        오늘날의 사회를 규정하는 개념 중 하나는 ‘자유방임주의’이다. 우리 사회는 ‘자유방임’이라는 개념으로 사회를 설명함으로써,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그 속에서 자본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가고, 갈수록 자본만 남고 인간은 소외되어 간다. 이러한 현대의 자유방임주의는 극심한 경제적 자유만을 추구해 온 결과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초기의 자유방임주의자인 아담 스미스와 동양의 자유방임주의자로 불리는 노자를 비교해서 오늘날의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 아담 스미스와 노자의 자유방임주의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서로 맥을 같이한다. 첫 번째는 ‘국가’라는 형태는 인정하지만 사회는 자생적인 질서에 의해 운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hand’으로, 노자는 ‘도道’로 표현하였다. 두 번째는 재분배에 의한 인간의 평등한 삶이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재분배를 말했고, 노자는 남는 부분을 덜어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써 평등을 추구하고자 했다. 세 번째는 타인과의 조화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를 ‘동감Sympathy’이라고 불렀고, 노자는 ‘대립물과의 조화’라고 했다. 현상적인 면에서, 이들이 말한 자유방임주의는 확실히 오늘날의 자유방 임주의와 다르다. 우리는 오늘날의 권련다툼, 권력편중, 부익부빈익빈, 인간소외의 문제들을 야기시킨, 자본과 결탁되어 경제적 자유만을 추구한 변질된 자유방임주의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자유방임주의자로 대표되는 아담 스미스와 노자를 통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자유방임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is one of the terms, which define a modern society. By explaining itself with this term, our society remits capitalist exploitation of labor. Capitalists and laborers are degenerated into a tool for a capital and human beings are alienated. This laissez-faire of the modern society is the result of endless pursuit of economic freedom. In this article, Adam Smith, the early defender of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and Laozi, a support of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in Orient, are compared with a purpose to criticize the modern laissez-faire. Smith and Laozi share similar views on three aspects. Firstly, even though they accepted a form of a "nation", they believed that a society runs by a spontaneous order. This spontaneous order was termed as "an invisible hand" by Smith and as "the Way" (dao) by Laozi. Second, both of them believed in a possibility of an egalitarian life of human beings through redistribution. To Smith redistribution meant a process which fulfills an individual desire. On the other hand, Laozi believed in equality by reducing whatever is excessive and supplementing whatever is insufficient. Third, Smith and Laozi stressed on `harmony with others` which was termed as "sympathy" by Smith and as "harmony with the counterpart" by Laozi For Smith and Laozi, the principles of laissez-faire had different meaning from the modern one. The original meaning has degenerated into an ideology while chasing only an economic freedom in collusion with a capital. As a result, the modern principle of laissez-faire has caused various social problems such as a contention for power, imbalance of power, the rich-get-richer and thepoor-get-poorer, and human alienation. To solve these problems, especially the meaning of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should be questioned. Adam Smith and Laozi provide us a clue for the true meaning of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for human be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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