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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滿鮮史와 日本史의 위상

        정상우(鄭尙雨) 한국사학사학회 2013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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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주의 역사학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역사학 성립과정에서 일본사를 중심으로 주변민족의 역사를 일본사의 타자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滿鮮史는 일본사를 중심으로 조선과 만주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라 하겠으며, 그렇기 때문에 만선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속에서 일본사의 위상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 논문은 대표적인 만선사학자인 稻葉岩吉의 연구 과정을 통하여 만선사의 체계화 과정과 그 속에서 일본사의 위치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에 부임하던 1920년대 이전 稻葉은 만선사가라기 보다는 청조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동북아의 역사를 대륙과 일본의 關係史라는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가운데 주된 관심을 淸朝와 滿洲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부임과 함께 만주와 더불어 조선과 그 주변을 연구하며 만선의 불가분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稻葉 역시 당시 일본학계의 풍토가 그러했듯이 주로 古代史 연구에 집중했지만 다른 일본인 학자들처럼 韓日關係 보다는 자신이 이전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대륙과 조선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다. 당시 稻葉은 民族的ㆍ政治的ㆍ經濟的 측면에서 만선의 불가분을 주장하는 한편 半島에 영향을 준 것은 만몽의 민족보다는 漢族이라며 중국의 영향력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역사에서 만주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중요시하는 것은 만선이 불가분이라던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 이 시기 만선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은 사료의 해석이라기 보다는 전달에 가까웠고, 조선방면의 민족과 漢族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으로 조선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역사를 어떠한 구조에 입각하여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1920년대 稻葉의 연구는 조선과 그 주변의 관계, 특히 조선에 미친 漢族과 그 문화의 영향력에 대한 것이라 하겠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만선사라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 조선과 그를 둘러싼 주변에 대한 통일적인 歷史像을 제시하고자 했다. 稻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全局上 注意”를 기울여 조선의 역사를 동양사의 일부로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民族 혹은 勢力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 아닌 東胡系 民族, 漢族, 蒙古族의 3자의 세력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조는 契丹이 흥기하고 新羅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만선분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稻葉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稻葉 역시 7세기 이후의 역사를 설명할 때는 滿鮮을 통일적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漢族의 왕조, 契丹이나 女眞과 같은 북방민족, 半島의 민족 등과 같이 개별적으로 바라보았으며 漢族에 의한 以夷制夷에 따른 滿鮮分離의 과정으로 서술하는 한편 만선의 접촉이 있던 17세기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稻葉의 연구는 滿鮮의 불가분성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女眞과 朝鮮의 접근을 높게 평가하는 양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오히려 稻葉이 연구 초기부터 말년까지 시종일관 변치 않고 주장했던 것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 일본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연구의 진전에 따라 稻葉은 자신의 주요 연구대상을 淸에서 조선과 그 주변, 만선으로 이동했지만 언제나 대륙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부심했다. 또 연구과정에서 과거 자신의 견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대륙의 영향을 받아 개국과 동시에 强國이 된 일본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변치않는 신념을 나타내었다. 1920년대 대륙과 일본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던 측면을 강조하던 稻葉은 1930년대 이러한 논의를 반복하면서도 대륙이 무시할 수 없었던 해양의 강자로서 일본의 위상을 2세기까지 소급하는 한편 그것이 지속되었다는 歷史像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위상에 대해서는 古代를 넘어 稻葉 자신도 滿鮮分離가 가속화되었다며 자신이 제시한 만선사적 구조로 설명하지 못한 7세기 이후의 역사에도 관철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稻葉이 체계화했던 만선사라는 것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나타나는 것으로 稻葉 스스로 인정하듯이 7세기 이후에는 존재할 수 없는, 오히려 滿鮮分離史라고 하는 것이 실체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또 滿鮮史를 구조화하며 漢族, 蒙古族, 東胡系 民族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가 제시하는 주요한 국면 – 한사군의 설치, 삼국의 각축,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모두 일본의 개국과 해동의 강자로서 일본의 위상을 설명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稻葉이 추구했던 ‘滿鮮史'라는 것은 7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역사의 재구성이라 植民主義歷史學は日本の大陸侵掠を合理化するためのものであっただけでなく、日本で近代歷史學の成立過程で日本史を中心に周邊民族の歷史を日本史の他者に規定することだった。このような觀點から見ると、滿鮮史は日本史を中心に朝鮮と滿洲の歷史を再構成したものとしせていただき、そのために滿鮮史に対する理解のためには滿鮮史の中で日本史の位相を考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本稿は代表的な滿鮮史學者な稻葉岩吉の硏究課程を追跡して滿鮮史の體系化過程とその中で日本史の位置を糾明するためのものである。 硏究初期から淸朝と滿洲の歷史を硏究しながらもそれを大陸と日本の關係史で見た稻葉は1920年代朝鮮に赴任しながら硏究對象を朝鮮とその周邊に變貌させた。当時、日本の学界の研究の風土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彼は主に古代史を硏究したが、別人の学者のように韓日關係に集中するよりは自分が以前から関心を傾けていた大陸と朝鮮の關係を糾明しようとした。当時、稻葉は民族的・政治的・經濟的側面で滿洲と朝鮮の不可分を主張する一方、半島に影響を与えたものは滿蒙の民族よりは漢族とし、中国の影響力を說明した。このように朝鮮の歷史で滿蒙より中国の影響力を重要視することは滿鮮が不可分だと言っていた自身の主張を自ら否定することだった。また、この時期滿鮮の歷史を說明する方式は史料の解釋というよりは傳達に近い、朝鮮方面の民族と漢族を一對一で對應させることで朝鮮とそれをめぐる周邊の歷史をどのような構造に立脚して統一的に解釋することはなかった。つまり1920年代、稻葉の硏究は朝鮮と彼を取り巻く周邊との關係、特に朝鮮に及ぼした漢族とその文化の影響力についたものと言わせていただき、このような意味で滿鮮史としにくいことだった。 しかし、1930年代に入ってからはこのような樣相から脱し、朝鮮とそれをめぐる周邊に対する統一的な歷史像を提示しようとした。稻葉の表現を借りればいわゆる"全局上注意"を傾けて朝鮮の歴史を東洋史の一部として解釈する中で、単に民族あるいは勢力の間の一對一對應がなく東胡系民族、漢族、蒙古族の三者の勢力關係の中で思考することだった。でもこうした構造は契丹が興起して新羅が三國を統一する7世紀以降は滿鮮分離が行われるため、適用不可能ということを稻葉自ら是認している。そのために稻葉も7世紀以後の歷史を敍述する場合においては、滿鮮を統一的に思考するよりは中国の漢族の王朝、契丹や女眞のような北方民族、半島の民族などとように個別的に眺めており、漢族の以夷制夷による滿鮮分離の過程に敍述する一方で、このような秩序が揺らぐ17世紀の歷史的展開について大きな關心を表明した。しかし、この場合にも稻葉の硏究は滿鮮の不可分性を機械的に適用して女眞と朝鮮の接近を高く評価する樣態を示すとする。 むしろ稻葉岩吉が硏究の初期から末年の1930年代まで変わらず主張したのは東北亞細亞の歷史的展開において日本の位相に関するものだった。時間の經過によって稻葉は自身の主要な硏究對象を淸、朝鮮とその周邊、滿鮮に移動したが、いつも大陸と日本の關係を說明するのに腐心した。また硏究課程で過去自身の見解を否定したりするが硏究の初盤から変わらなかったのは大陸の影響を受けて開國と同時に强國になった日本の歷史的位相に関するものだった。1920年代大陸と日本が相互影響を交わした側面を强調した稻葉は1930年代このような論議を反復しながらも大陸が無視できなかった海洋の强者として日本の位相を2世紀まで遡及する一方、それが始終一貫持續なったという歷史像を提示した。日本のこのような位相については古代を超えて稻葉自身も滿鮮分離が加速化なったとし、自身が提示する滿鮮史的構造で說明しなかった7世紀以後の歷史に(元の日本招諭と侵掠、淸朝の興起) 貫徹なることだった。 こうなると、稻葉が體系化した滿鮮史というのは1930年代に入って現れるもので稻葉自ら認定するように7世紀以後には存在できない、むしろ滿鮮分離史というのが實體に近いものといえる。また滿鮮史を構造化して漢族、蒙古族、東胡系民族の關係を說明する過程で、彼が提示する主要な局面 – 漢四郡の設置、三國の角逐、隋唐と高句麗の戰爭はすべて日本の開國と海東の强者として日本の位相を說明することとも連結なっている。このような意味で稻葉が追求した'滿鮮史'というのは7世紀以前に存在したことで、日本を中心とした東北亞細亞の歷史の再構成といえる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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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史』(朝鮮史編修會 간행)의 편찬과 사건 선별 기준에 대하여

        정상우(鄭尙雨) 한국사학회 2012 史學硏究 Vol.- No.107

        식민지기 朝鮮總督府는 朝鮮史編修?를 설치하여 조선의 역사편찬을 주도했다. 조선사편수회는 16년간의 작업을 통해 『朝鮮史』35卷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朝鮮史』는 通史라기 보다는 史料集또는 索引集에 가까운 것이었다. 즉 『朝鮮史』는 특정한 歷史像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다른 모든 사료집이나 색인집과 마찬가지로 사건에 대한 취사선택은 피할 수 없다. 이 논문은 『朝鮮史』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조선왕조에 해당하는 『朝鮮史』제 4, 5, 6편(35권 중 24권)에 대하여 어떤 시기에 더 역점을 두었으며 사건의 선별기준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朝鮮史』제4?5?6편에서 활용한 원사료라 할 수 있는 전거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였으며, 편찬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 이를 바탕으로『朝鮮史』 편찬 이전 사료의 수집?정리와의 관련성을 추적하여『朝鮮史』편찬에 있어 사건의 선별 기준을 추정하였다. 『朝鮮史』는 편찬을 담당한 이들이 편찬 당시나 1945년 이후에도 주장하듯이 조선의 다양한 사건 가운데 근거가 확실한 것만을 編年에 따라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수많은 사건 가운데 『朝鮮史』에 실릴 사건을 선별하는 기준은 근거의 확실성만이 아니라 과거 舊慣調査事業과 ‘半島史編纂'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이 강하다. 구관조사사업은 식민통치를 위한 정책의 입안과 그 참고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조사과정에서 典籍에 관한 조사와 사료의 발췌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전적 조사와 사료발췌의 기준은 구관조사의 목적에 부합하여 정치?경제?풍속 등에 대한 제도적인 사항에 관한 것들로, 이는 발췌 담당자가 전제하고 있는 조선에 대한 像과 관계없이 발췌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특정한 시기에 집중되지 않는 것들이다. 반면 ‘반도사 편찬'은 역사편찬사업으로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歷史像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료의 발췌 기준 역시 조선의 역사에서 ‘혼란'을 보여주는 데에 적합한 사건들, 바로 전쟁이나 정치적 분란과 같이 특정 시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위주로 했다. 『朝鮮史』제 4?5?6편의 각 권별로 활용한 자료수가 연산군대~선조대(제4편), 광해군대~인조대, 숙종대(제5편), 고종대(제6편)에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본고에서 살펴보았듯이 적어도『朝鮮史』의 중심을 이루며 절대적인 분량을 차지하는 제 4?5?6편에 실려 있는 사건들은 1차적으로 효율적인 식민통치정책의 입안을 위해 혹은 역사적으로 조선의 대내외적 혼란을 부각하기 위해 선별된 사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朝鮮史』는 식민통치책의 일환으로서 편찬된 사료집 혹은 색인집이라고 하겠다. 조선의 역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고 혹은 자신이 편찬을 담당한 시기와 자신의 학적 관심이 불일치하며, 자료의 해독 능력이 떨어진 채 제국대학이라는 최고 학부에서 이른바 ‘엄정한 실증'만을 수학한 편찬자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 선택된 사건들과 이를 전하는 사료들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적어도『朝鮮史』제 4?5?6편은 사업의 목적과 지향, 결과물이 전혀 다른 구관조사사업이나 ‘반도사 편찬'과 연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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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주의 역사학에서의 고려 시대 연구 - ‘蒙古襲來'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정상우 한국사학회 2021 史學硏究 Vol.- No.141

        Since the late 19th century, modernization and imperialization have progressed simultaneously in Japan. Considering this historical process of Japan, the studies of Japanese historians at that time has the attributes of modern historiography as well as justifying Japan's invasion into the surrounding areas. It is also said that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modern historiography in Japan was the process of forming the “Tōyō.”(the Orient, 東洋) Then, Japanese historians' studies on the history of East Asia, including Korean history at the time, needs to be positioned in the process of forming “Tōyō,” and its meaning should be considered. On the other hand, superficially, Goryeo dynasty was a time to show the external and internal turmoil of Korean history to Japanese historians. This is because during the Goryeo Dynasty, there were well known events represented by repeated invasions by the northern people such like Khitans, Jurchens, Mongols and rebellion of the Myocheng, political changes by soldiers. However, if you look at past Japanese historians' studies on the Goryeo Dynasty, you can see something interesting. It shows considerable interest in the Mongol invasion of Goryeo, interference of the Yuan, the invasion to Japan of the Goryeo and Mongol Allies, and the external relationship of Goryeo before and after the Mongol Invasion to Japan. This is based primarily on the theory of heteronomy on Korean history, given that it focuses on external relations during the Goryeo Dynasty. However, “Mongol Invasion to Japan” is directly related to Japanese history, and it was an event that could maximize the status of Japanese history in that Yuan, the world's strongest country at the time, did not achieve its goal. In addition, the incident was literally an East Asian incident involving several countries at the time, including Goryeo, Yuan, Sung and Japan. This paper considers the studies of Japanese historians in the past who approached the Mongol Invasion to Japan through external relations of Goryeo in terms of the formation of the so-called “Tōyō.” At that time, Japanese historians understood that the establishment of suzerainty of Yuan in Goryeo was a prerequisite for Yuan's policy toward Japan. In other words, it looked at the external relationship of Goryeo as a precondition for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ntinent(Yuan) and Japan. In addition, as a precondition for understanding Mongol invasion to Japan, Yuan's conquer on South Sung as well as its relationship with Goryeo and Japan was included in the field of view, positioning Japan's existence as an important variable of East Asian international politics. Japanese historians at the time expanded their perspective to the past before the mid-13th century from this perspective. Since the founding of the Goryeo Dynasty, they have studied by considering the relationship and transportation of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Goryeo, Sung and Japan. And through this, they insisted the continuous relations between continent and Japan. In other words, Japanese historians who focused on the external relationship of Goryeo for understanding the Mongol invasion to Japan, looked at the incident as an East Asian event and connected the continent with Japan, but also positioned Japan as a major variable in the historical process of the continent. 19세기 후반 이래 근대화와 제국주의화가 동시적으로 진행된 일본사의 전개과정을 고려할 때, 당시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주변으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측면과 더불어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일본의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 전개는 ‘동양'의 형성 과정이었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일본인 역사가들의 연구는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성격, 즉 ‘동양'의 형성 과정 속에 위치짓고, 그 의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편 피상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는 대륙에서 연이어 등장한 북방민족의 거듭된 침략과 묘청의 난ㆍ무신정변 등으로 대변되는 눈에 띄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한국사의 대내외적 혼란을 보여줄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과거 일본인 연구자들의 고려시대에 대한 연구와 서술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바로 몽골의 고려 침략과 元의 간섭 및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특히 蒙古襲來를 전후한 시기 고려의 대외관계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시대를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한국사에 대한 ‘타율성론'에 입각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蒙古襲來'는 일본사와 직결된 것으로, 刀伊의 入寇와 더불어 제 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유이한 사건이자,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元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점에서 일본사의 위상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元, 고려, 南宋, 일본 등 당시 여러 국가들이 관련된 말 그대로 동아시아적 사건이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의미가 있는 몽고습래를 고려의 대외관계를 통해 접근했던 과거 일본인 역사가들의 연구를 이른바 ‘동양'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 역사가들은 고려에서 元의 종주권 확립이 元이 대일정책을 본격화할 수 있는 선결과제로 파악했다. 즉 대륙(원)과 일본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전제로서 고려의 대외관계를 바라본 것이다. 또한 蒙古襲來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元의 南宋 경략은 물론 이들과 고려 및 일본과의 관계까지도 시야에 담으며 일본의 존재를 당시 동아시아 정국의 중요한 변수로 위치지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당시 연구자들은 13세기 중반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고려 건국 이래 고려와 송ㆍ일본이라는 동아시아 3국의 관계와 교통에 대한 고찰로 그 시야를 확대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이 대륙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즉 蒙古襲來라는 사건을 고려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해 나아갔던 과거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이 사건을 동아시아적 사건으로 바라보며 대륙과 일본을 연결시켰음은 물론 대륙의 역사적 전개에 주요한 변수로서 일본을 위치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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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하 ‘全州' 지방의 지방사 편찬 -『全州府史』(1942)를 중심으로-

        정상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5 한국문화 Vol.71 No.-

        This paper is intended to examine the local history compilation of colonial period through ‘Jeonjubusa(『全州府史』)' which was published in 1942. Since the Joseon Dynasty, the central government and local community leaders(在地士族) had compiled local history for governing of local and ensuring the superiority of their own in the community. The local history of Jeonju had also been compiled in the Joseon Dynasty. Its main contents are physiographical and anthropogeographical items of Jeonju. After the Joseon Dynasty had opened her ports, many Japanese settled in the Joseon and compiled local histories. In Jeonju, ‘Lichoutojensyu(『李朝と全州』)' was compiled by Japanese who settled in Jeonju. It was intended to argue the need for a railroad that passed through the Jeonju. So the relationship of the Joseon Dynasty and Jeonju has been presented as a means for the installation of transportation. After the ‘Lichoutojensyu' had been published, local history of Jeonju was not compiled. So the ‘Jeonjubusa' was the first published local history of Jeonju after 1910. Since 1930s, a lot of provincial governments had published local history to call in historians. Joseonbu(全州府) also called in Hideo Ogiyama(荻山秀雄) and Chikao Ogura(小倉親雄), who had majored in history at Kyoto-Imperial-university and worked in the Library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朝鮮總督府 圖書館), for compiling ‘Jeonjubusa'. ‘Jeonjubusa' was composed of 4 chapters. The development of Jeonju by colonial rule, current state and historical sites and figures of Jeonju were narrated at chapter 2, 3 and 4. These composition and contents were something close to the topography(地誌) rather than history-book. As the ‘History of Bu'(府史), it was chapter 1 that described history of Jeonju for the first time, to serve as historical basis for the other chapters. In chapter 1, the historical meaning of Jeonju are summarized in two aspects. One is the Jeonju as the capital of the Later Baekje, and main contents of this part is that Gyeon-whon(甄萱) wanted to pay tribute to Japan for getting aid but failed to perish in the end. The other is the Jeonju as the family originate(貫鄕) of the Joseon royal family, and main contents of this part is the facilities installed in Jeonju - such as Gyeonggijeon(慶基殿), Jogyoungmyo(肇慶廟) and Jeonjusago(全州史庫) which symbolized the Joseon Dynasty. That is, the history of Jeonju was written as Korea-Japan relation under the Japanese superiority and symbolic icons of the Joseon Dynasty, not historical changes of Jeonju. A lot of historical materials presented in ‘Jeonjubusa' could be gotten easily against background of government authorities such as the Library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r Joseonbu. But most frequently used historical materials shaping the center of the description - such as the Annals of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and Ilseongrok(日省錄) - were those presented in Joseonsa(『朝鮮史』, compiled by Joseonsa Pyosuhoe(朝鮮史編修會). In other words, the history of Jeonju was replaced by Korea-Japan relation based on the Japanese colonial historiography and narrative of Joseon Dynasty's symbolic icons. And such a history of Jeonju was ensured “scientific objectivity” by historiography project of the central authority represented by Joseonsa.

      • KCI등재

        20세기 전반 일본인 연구자들의 ‘만주사' 만들기

        정상우 만주학회 2020 만주연구 Vol.0 No.30

        This paper examines the common ground Japanese historians shared about the Manchurian history and how it has changed over time, using diachronic histories of the Manchurian past they employed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Japanese historians thought Manchuria had historically been an area where several forces, including Manchurian, Mongolian and Chinese forces, struggled for power. This systematization of Manchurian history explained the ongoing competition for rights among imperialist powers, including Japan, in Manchuria in the early 20th century as a historical phenomenon consistent with Manchurian history's development process. However, in the 1930s, Japanese historians' systemic treatment of Manchukuo failed to recognize the country as a state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y emphasized Manchukuo's birth as a natural, historical consequence of development. Manchurian history gradually organized in the form of nation-history, even at a crude level. As such, the Japanese historicity of Manchukuo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changed from local history to a national one. Just as Manchukuo was an experimental site for constructing a modern state, studies and descriptions of Manchurian history were also experiments in ‘history making', whose effect produced an interest in Manchuria and led to the founding of Manchukuo. 침략성과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양면성을 생각해 볼 때 만주는 흥미로운 지역이다. 러일전쟁의 이후 일본은 만주를 발판삼아 중국에 대한 이권을 확장해 나가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만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개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만주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 공간으로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을 구성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의미가 있는 20세기 전반기 일본인 연구자들이 서술한 만주사에 대한 통사들을 통해 당시 그들이 만주사에 대해 공유하였던 공통적인 지반은 무엇이었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만주사 연구를 이끌었던 시라토리의 조망에서 보여지듯이, 만주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식은 만주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 차원에서 체계화할 수도, ‘만주민족'과 같은 범주를 설정하여 민족사와 비슷한 형태로 할 수도 있었다. 만주사의 체계화와 관련하여 만주사를 다룬 최초의 통사라 할 수 있는 이나바의 『滿洲發達史』(1915)는 만주사를 지역사로서 정리했다. 즉 만주를 몽고, 중국, 만주 방면의 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보고, 이들이 만주라는 공간에서 벌인 경쟁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만주에 대해 중국의 우선권을 인정하였던 당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 일본인 역사가들의 만주사 연구와 조망도 중국의 존재를 더욱 의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시각은 여전히 만주를 몽고, 만주, 중국 방면의 세력들의 경합 지역으로 바라보면서 그 역사를 조망한 것이었다. 이렇게 만주의 과거를 몇 세력의 경쟁지역으로서 정리하는 것은 19세기 후반 이래 만주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을 만주사 전개의 당연한 귀결로서 역사화하며, 20세기 이래 만주를 둘러싼 일본의 행보를 만주사의 전개에 부합하는 역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여, 만주사의 무대 위로 일본을 소환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주국의 건국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만주국 탄생의 역사적 필연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만주사의 정립을 요구하였다. 만주사를 여러 세력들이 경쟁하는 지역의 역사로서 정리하는 것은 만주를 분쟁지역으로 역사화할 수 있는 것으로, 만주국 건국 이후에는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만주국 건국 이후 만주사에 대한 통사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만주사 정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상당했고, 당시의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화답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당시 급하게 쏟아져 나온 통사들은 당대에도 그 수준을 의심받았지만, 만주의 과거를 만주 또는 만몽의 민족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 통사들은 만주와 몽고의 민족들의 상무정신, 고유한 활력을 이야기하며 만주에 처음 등장한 민족으로서 肅愼을 부각하며 만주사의 기원을 더 먼 과거로 소급하는 한편 만주와 몽고의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를 서술하였다. 이는 비록 중국문명에 비했을 때 저열한 것으로, 또 중국 문명과의 접촉 이후 밀려나는 것으로 서술되었지만 만주・몽고 민족 고유의 생활 풍습・풍속, 제천의식・종교, 고유의 조직 체제는 물론 漢文과 대비되는 고유 문자의 존재는 만주와 몽고 민족의 민족적 독자성에 대한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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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통선이북지역(DMZ) 서부평야 일대의 수생태계 생물다양성 및 군집 특성

        정상우,김윤호,김현맥,김수환 한국환경생태학회 2018 한국환경생태학회지 Vol.32 No.6

        This study surveyed the diversity and community characteristics of benthic macroinvertebrates and freshwater fish, which are the main animal classifications in a hydro ecosystem, from May to September 2017 in the western plains of the Demilitarized Zone (DMZ). The results showed a total of 125 species of benthic macroinvertebrates belonging to 66 families, 19 orders, and four phyla in the streams and wetlands. Among benthic macroinvertebrates, Coleoptera (27 spp.: 21.60%) was the largest group in terms of species richness followed by Odonata (26 spp.: 20.80%), non-Insecta (22 spp.: 17.60%), and Hemiptera (11 spp.: 8.80%) occupying in the lentic area. Of the feeding function groups (FFGs), predators (51 spp.: 56.67%) showed a relatively larger presence, indicating the dominance of hygrophilous invertebrates that usually inhabit the freshwater wetlands or ponds. Of the habitat oriented groups (HOGs), climbers (33 spp.: 24.44%) and burrowers (17 spp.: 12.59%) were the dominant groups. This observation is typical in a slow flowing habitat and can lead to the disturbance of the ecosystem due to cannibalism among predators. Cannibalism can be caused by stress induced by various population and environmental factors. For the ecosystem services benchmark (ESB) value, site 13 appeared to be the highest with 82 marks while other sites showed relatively lower rates and indices (III water quality class with α-mesosaprobic). The analysis result of stability factors showed that almost all sites were evaluated to be the I characteristic group with high resilience and resistance or the III characteristic group that was sensitive to environmental disturbance and formed uneven and unstable communities. Of the freshwater fishes, 46 species (3,405 individuals) belonging to 39 families and 18 orders were identified in all the investigated sites. Among them, Cyprinidae (30 spp.: 65.2%) was the largest group, and Zacco koreanus was identified as the dominant species (728 individuals, 21.4%). The survey of freshwater fish communities found both stable communities (sites 7 and 13) with low dominant index (0.39) and high diversity index (2.29) and unstable communities (sites 2, 3, 8, and 10) in opposite tendency. This survey found five Korean endemic species, 17 species belonging to the export controlled species, two endangered species level II (Lethocerus deyrollei and Cybister chinensis), and rare species (Dytiscus marginalis czerskii) among benthic macroinvertebrates. The survey also found an invasive species, Ampullarius insularus, which was distributed throughout the whole area and thus can continuously disturb the ecosystem in the western plain area in the DMZ. Of freshwater fish, one natural monument (Hemibarbus mylodon) and three endangered species level II (Acheilognathus signifer, Gobiobotia macrocephalus, and G. brevibarba) were observed. The survey also found four introduced species (Pomacea canaliculate, Carassius cuvieri, Lepomis macrochirus, Micropterus salmoides) in the western DMZ area, indicating the need for the protection and conservation measures. 본 연구는 2017년 5월부터 9월까지 민통선이북지역 서부평야 일대에서 수생태계의 주요 분류군인 저서무척추동물과담수어류의 다양성 및 군집특성을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저서무척추동물은 총 4문 19목 66과 108속 125종이 확인되었다. 저서무척추동물의 분류군별 출현종수는 딱정벌레목이 27종(21.60%)으로 가장 높은 다양성을 나타냈고, 잠자리목26종(20.80%), 비곤충류가 22종(17.60%), 노린재목 11종(8.80%)이 채집되어 정수성 저서무척추동물의 분류군들이우점하였다. 섭식기능군은 잡아먹는 무리(51종, 56.67%)가 높게 나타나 습지성 형태의 무리들이 우점하고 있는 것으로나타났으며, 서식기능군은 기어오르는 무리(33종, 24.44%)가 높게 나타났으며, 단순한 하상에서 나타나는 굴파는 무리(17종, 12.59%)도 다소 높게 출현하였다. 이는 유속이 느린 서식처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분류군간에 동종포식을유발하여 생태계의 교란이 심각해 질 것으로 평가되었다. 수환경평가의 ESB 값은 S13지점에서 82점으로 최우선보호수역으로 평가되었으며, 대부분 지역에서 수질 III등급의 α-중부수성으로 오염이 심각한 환경상태로 나타났다. 군집안정성분석결과 회복력과 저항력이 높은 Ⅰ특성군과 교란에 민감한 Ⅲ특성군으로 평가되었으며, 전체적으로 균일하지못하고 불안한 군집을 형성하였다. 어류는 잉어과에서 30종(65.2%)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계류에 서식하는 참갈겨니가 728개체(21.4%)로 우점 하였다. 어류 조사결과 총 18목 39과 46종(3,405개체)이 출현하였으며, 군집분석 결과우점도지수가 낮고(0.39) 다양도지수가 높은(2.29) 안정된 지점(S7, S13)과 반대성향의 불안정한 지점(S2-3, S8, S10) 이 복합적으로 평가되었다. 본 조사에서 출현한 저서무척추동물의 법정보호종은 한반도고유종 5종, 국외반출승인종17종, 멸종위기야생생물 Ⅱ급인 물장군과 물방개 2종이 출현하였다. 그 외 희귀종인 배물방개붙이의 서식처가 확인되었으며, 생물 위해외래종인 왕우렁이가 전지역에 분포하여 민통선이북 서부평야지대의 생태계 교란이 끊임없이 발생할것으로 판단되었다. 어류에서는 천연기념물 1종(어름치)와 멸종위기야생생물 Ⅱ급 3종(묵납자루, 꾸구리, 돌상어)의서식처가 확인되어 보호 및 보전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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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 말기관찬 지방사에서의 지방 구현- 『대구부사(大邱府史)』(1943)를 중심으로 -

        정상우 동북아역사재단 2014 東北亞歷史論叢 Vol.- No.45

        This paper examines local history compilati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rough Daegu-busa (大邱府史; The History of Daegu), a text published in 1943. Since the Joseon period, the central government and local yangban (在地士族) had compiled local histories for governing local society and ensuring their superiority in these areas. The local history of Daegu was also compiled during the Joseon period. Its main contents are administration, population, land, significant installations, and famous persons in Daegu. Even after Korea became a colony, local history continued to be compiled in Daegu, but this was undertaken primarily by Japanese who had settled in Daegu. Such compilation was to say that the development of Daegu owes to Japanese and colonial rule. On the other hand, since the mid-1930s many provincial and local governments under the Government-General of Chōsen (朝鮮總督府) had published local histories, and had thus called in historians. Daegu-bu (大邱府) invited Suematsu Yasukazu (末松保和), who was a professor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京城帝國大學) and deeply involved in the Association of the Compilation of Korean History (朝鮮史編修會), to compile Daegu-busa. This book, while covering the local history of the past, has attracted academic attention in two ways. One is that famous scholars, represented by Suematsu, were assembled. The other is that they utilized reliable historical materials, such as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Joseon wangjo sillok, 朝鮮王朝實錄). Daegu-busa presented Empress Jingu's (神功皇后) “Sankan seibatsu” (三韓征伐), or the conquest of the Three Han, as the beginning of the history of Daegu, and explained the history of Daegu in the relationship with Japan from its origins in to the Joseon period. In other words, Daegu-busa imparted new meanings to Daegu as “Daegu in Korea-Japan relations” and “Daegu in the empire,” but not as “Daegu in Korea.”The new meanings for Daegu have been demonstrated by various historical materials, such as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However, historical materials cited in Daegu-busa have one point in common. This is a result of the Government-General's investigation and compilation of historical materials such as Chōsenshi (朝鮮史), which was compiled by the Association of the Compilation of Korean History. In other words, the Government-General's investigation and compilation of historical materials ensured the “scientific objectivity” of local history such as Daegu-busa. And Daegu-busa, whose text was based upon the historical materials summarized by the central authority, depicted Daegu as “Daegu of the Japanese Empire.” 이 논문은 식민지기 지방사 편찬을 1943년 대구부에서 간행한 『大邱府史』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식민통치기 지방사 편찬의 목적과 추이 및 일제 식민지배 말기 지방의 특성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드러내었으며, 중앙사 편찬과 지방사 편찬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지방사․지방지 편찬은 조선 시대 이래 중앙에서 지방 통치를 위해 편찬한 地誌나 재지사족들이 향촌에서 자신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편찬한 邑誌와 같이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지나 읍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구 역시 그 행정적 위상, 호구, 토지, 시설물, 인물 등에 대한 사항이 파악되었다. 지방사지류의 편찬은 강점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주로 지방청이나 대구에 이주해 온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 많았다. 이는 이른바 일본인과 식민통치에 의해 대구가 발전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방사 편찬과 더불어 1930년대에 접어들어 대구 지방의 청소년 교육을 위한 독본류의 간략한 교육용 교재도 등장하였으며, 지방의 유지이자 ‘當局'과 연결된 유림층들이 총독부의 유교정책에 호응하여 전통시대의 것과 비슷한 체제와 내용의 읍지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0년대 중반 이래 조선총독부의 지방청에서는 전문 역사가를 기용하여 ‘道史', ‘府史'를 발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구부 역시 조선사편수회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京城帝大의 助敎授 末松保和에 의뢰하여 1943년 『大邱府史』를 간행하였다. ‘沿革編', ‘府政編', ‘特殊編'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大邱府史』는 조선 시대 이래 편찬된 대구 지역의 지방사지를 포괄하면서도 대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강점 후 大邱府 설치 이후 대구의 변화상을 제시하고 있는 ‘府政編'의 경우 식민지화 이후 대구부의 발전을 드러내어 식민통치를 선전한다는 점에서 대구의 일본인들이 편찬했던 지방사와 대동소이하다. 그렇지만 ‘沿革編'과 ‘特殊編'은 발간 당시 학계의 주목을 끄는 것이었다. 이는 末松保和와 같은 당시 명망있는 학자들을 기용했다는 점과 조선왕조실록으로 대변되는 다양하고 확실한 사료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特殊編'은 末松만이 아니라 당대 내노라하는 10명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전공분야와 관련지어 대구를 분석한 논문을 싣고 있는데, 이는 『大邱府史』가 단순히 대구의 발전상을 과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적 권위를 갖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편찬을 담당한 末松保和의 역량이 가장 현저히 드러나는 것은 ‘沿革編'이었다. 3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과시하는 이 부분은 대구의 역사를 종합한 것으로, 역사가로서 末松保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역사상 대구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사건으로 神功皇后의 三韓征伐을 제시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전기 한일 무역에서,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서, 또 일본에서 필요한 약재의 주요 시장으로서 대구가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즉 『大邱府史』에서 파악하고 있는 대구의 역사적 특성은 일본과의 관련성 속에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구는 일본과의 관련 속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특성 역시 일본과의 관련성 속에서 부각되었다. 이때 대구는 ‘조선의 대구'라기 보다는 ‘한일관계 속의 대구'가 되며, 더 나아가서는 ‘제국의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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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사에서 민족사로 —<滿洲發達史>(1915)와 <滿洲國史通論>(1940)를 통해 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만주사 연구—

        정상우 만주학회 2019 만주연구 Vol.0 No.27

        This paper examines the Japanese historians' studies of Manchurian history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with a focus Inaba Iwakichi's (稻葉岩吉, 1876- 1940), The Developmental History of Manchuria (滿洲發達史, 1915) and his last work, The History of Manchukuo (滿洲國史通論, 1940). Inaba conceived the history of Manchuria premise on the view that Manchuria and Mongolia were closely connected (滿蒙不可分). This signified two assumptions: first, that both Manchuria and Mongolia had fundamental connections leading to integration; and second, that to understand the history of Manchuria, consideration of the inter-relations between Manchuria, Mongolia and China was essential and closely intertwined. In The developmental history of Manchuria, in particular, Inaba suggested that Manchurian history resulted from the dynamics interaction of forces of Manchuria, Mongolia and China. As such, frontier tribes were viewed as separate from Chinese dynasty. In other words, in his early work, Manchuria's history was one of the region's history. In contrast, in the The History of Manchukuo, written after the founding of Manchukuo, Inaba suggested a “Manchurian people” to unite the people of Manchuria and Mongol and organized Manchurian history in like with an ethnic conceptualization “Manchurian people.” In other words, he converted Manchurian history from a regional to ethnic-centered national one to this end, Inaba not only took note of the political unity of Manchuria and Mongolia, but also emphasized the unique language and culture of the “Manchurian people.” This new emphasis, apart from Japanese historian's intentions, exposed the historical legitimacy of the founding of the Manchukuo—one that emphasized national and political unity of Manchuria and Mongolia that highlighted the cultural uniqueness of the “Manchurian people.” It additionally served as a response to Japanese imperialism, which had propagandized the “Concordia of Five Races” and was in the midst of fighting on the border with Mongolia at the time. 이 논문은 20세기 전반기 일본인 연구자들의 만주사 연구를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1876~1940)의 만주사 연구, 특히 그의 초기 저작인 <滿洲發達史>(1915)와 마지막 저작인 <滿洲國史通論>(1940)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이나바는 만몽불가분이라는 대전제 위에 만주사를 구상하였다. 이는 만주와 몽고의 일체화 또는 만주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몽고의 세력은 물론 만몽에 대한 중국의 태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특히 <滿洲發達史>에서는 만주사를 만주만이 아닌 만주-중국-몽고를 축으로 하는 몇 개 세력들의 역학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며, 만주의 역사를 이러한 세력들의 관계 속에서 정리하려 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새외민족들을 중국 왕조와는 별개인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상정하는 것이자 만주사는 이를 둘러싼 여러 민족들의 세력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띤다는 시각이기도 했다. 즉 연구의 초기 이나바에게 만주는 동북아시아의 여러 세력들이 교차하는 지역이었으며, 그 역사 역시 만주라는 지역의 역사로서 서술되었다고 하겠다. 이에 반해 만주국 건국 이후의 저술인 <滿洲國史通論>에서는 ‘만주민족'을 설정하여 만몽의 민족을 모두 하나로 아우르고 만주사를 ‘만주민족'의 변화에 따라 구성하고자 하였다. 즉 만주사를 지역사에서 민족사로 전환하여 서술하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나바는 만주와 몽고의 정치적 일체화를 특기하는 한편 ‘만주민족'의 기원을 숙신으로 소급하고 ‘만주민족'의 문자, 풍습을 강조하며 漢族․漢文化와 구별되는 ‘만주민족'만의 고유문화-國粹를 거듭 강조하였다. 이렇게 북방민족의 고유문화를 발견․강조한 것은, 그 의도와는 별개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만 이를 넘어서 만몽의 민족적․정치적 일체화를 강조하고 ‘만주민족'의 문화적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만주국의 역사적 당위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자, ‘오족협화'를 주창하며 몽고와의 국경선에서 노몬한 전투가 한창이던 당시 일본 제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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