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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간과 장기간 지구성 운동에 따른 골격근 내 대사적응

        김상현,안나영,고진호,김기진 한국운동생리학회(구 한국운동과학회) 2012 운동과학 Vol.21 No.3

        김상현, 안나영, 고진호, 김기진. 단기간과 장기간 지구성 운동에 따른 골격근 내 대사적응. 운동과학, 제21권 제3호. 331-338, 2012. 지구성트레이닝에 따른 해당효소의 역할은 미토콘드리아효소에 비해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적응이 일부분만 이루어진 상황에서의 해당효소 작용 또한 규명된 것이 없다. 이에 본 연구는 지구성트레이닝에 따른 에너지대사 적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단기간과 장기간 지구성트레이닝 후 미토콘드리아 전자전달 효소와 해당효소의 발현정도를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24마리의 흰쥐를 각각 6마리씩 4그룹(sedentary; Sed, 1 day exercise; 1d Ex, 3 day exercise; 3d Ex, 3 weeks exercise; 3wk Ex)으로 분류한 다음 수영을 실시하였다. 미토콘드리아 전자전달 효소와 해당효소의 발현 분석을 위한 골격근은 마지막 운동훈련 18시간 후 적출하였다. 그 결과 해당효소인 총 LDH와 GAPDH는 Sed 그룹에 비해 1d Ex 그룹(60 %)과 3d Ex 그룹(80 %)은 유의하게 감소하였으며, 3d Ex 그룹은 1d Ex 그룹과도 유의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3wk Ex 그룹은 Sed 그룹과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그리고 HK와 LDH-H는 3d Ex 그룹과 3wk Ex 그룹이 Sed 그룹에 비해 유의하게 높게 나타났다. 미토콘드리아 효소 중 β-산화효소인 LCAD는 1d Ex, 3d Ex 그리고 3wk Ex 그룹 모두 Sed 그룹에 비해 유의하게 증가하였으며, 3d Ex 그룹은 1d Ex와 3wk Ex 그룹보다도 유의하게 높게 나타났다. 미토콘드리아 전자전달계 효소인 COX4와 NADH는 1d Ex, 3d Ex 그리고 3wk Ex 그룹 모두 Sed 그룹에 비해 유의하게 증가하였다. 또한 단기간 지구성트레이닝시 미토콘드리아 효소와 해당효소간에는 유의한 부적상관관계가 있으며, 장기간 지구성트레이닝시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Kim, S. H., Ahn, N. Y., KO, J. H., Kim, K. J. Metabolic adaptation by acute and chronic endurance swim exercise in skeletal muscle. Exercise Science, 21(3): 331-338, 2012. The Effect of chronic and acute endurance training on the role of glycolytic enzymes compared to the mitochondrial enzymes has not been clearly identified, This study measured mitochondrial electron transport enzymes and glycolytic enzymes to evaluate the metabolic adaptation after acute and chronic endurance training, Twenty-four rats were randomly assigned into 4 groups (Sedentary, Sed; 1 day exercise, 1d Ex; 3 day exercise, 3d Ex; 3 weeks exercise, 3wk Ex). Exercise groups were trained by using a 6h/day swimming program. Muscle samples for mitochondrial enzymes and glycolytic enzymes were harvested 18 hours after the last bout of exercise, The expressions of total LDH and GAPDH in glycolytic enzymes were decreased in the 1d Ex (60 %) and 3d Ex (80 %) group from the Sed group. But, 3wk Ex group was not changed compared with Sed group, The expressions of HK and LDH-H form were increased in 3d Ex and 3wk Ex group compared to the Sed group, The expression of mitochondrial β-oxidation enzyme LCAD was increased more in the 1d Ex, 3d Ex and 3wk Ex than the Sed group, with the 3d Ex group having the most increase. The expressions of mitochondrial electron transport enzymes COX4 and NADH were increased in all exercise groups. There is a negative correlation between mitochondrial enzymes and glycolytic enzymes by acute endurance exercise, but by prolonged endurance exercise there is no corr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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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타-아드레날린 수용체의 활성이 골격근 내 미토콘드리아 생합성에 미치는 영향

        김상현,김기진 한국운동생리학회(구 한국운동과학회) 2012 운동과학 Vol.21 No.3

        김상현, 김기진. 베타-아드레날린 수용체의 활성이 골격근 내 미토콘드리아 생합성에 미치는 영향. 운동과학, 제21권 제3호. 347-354, 2012. 카테콜라민의 작용에 의해 골격근 내 미토콘드리아 생합성이 증가하는가에 대해서는 수 십년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최근 몇몇 연구는 카테콜라민의 생성이 운동시에도 증가되기 때문에 운동에 의한 골격근 내 미토콘드리아 생합성 또한 카테콜라민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에 본 연구는 운동시 골격근 내 미토콘드리아 생합성이 실제로 베타 아드레날린성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가를 알아보았다. 이를 위해 흰쥐를 대상으로 갈색지방조직과 골격근에서 β-AR의 활성에 따른 미토콘드리아 생합성 정도를 분석하기 위해 norepinephrine과 베타 아드레날린성 촉진제(clenbuterol)를 처치하였으며, 운동에 의한 골격근 내 미토콘드리아 생합성 정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AMPK 활성체인 AICAR와 베타 아드레날린성 억제제(propranolol)를 처치하였다. 그 결과 norepinephrine과 clenbuterol에 의한 β-AR의 활성에 의해 갈색지방조직에서는 PGC-1α의 mRNA와 단백질 발현이 증가하였으나, 골격근에서는 PGC-1α mRNA와 단백질 발현뿐 아니라 미토콘드리아 전자전달계 효소 또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또한 AICAR 처치는 PGC-1α mRNA를 증가시켰으나, propranolol은 AICAR에 의해 증가된 PGC-1α mRNA를 더욱 증가시켜 β-AR의 활성 차단이 운동에 따른 골격근 내 미토콘드리아 생합성을 억제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Kim, S. H., Kim, K. J, The effect of β-AR on mitochondrial biogenesis in rat skeletal muscle, Exercise Science, 21(3): 347-354, 2012. Mitochondrial biogenesis by activation of β-adrenergic receptor (β-AR) with catecholamine in skeletal muscle was the object of interest for several decades. Several recent studies argue that because catecholamine formation is increased during exercise, mitochondrial biogenesis is also increased by catecholamine action in skeletal muscle. This study measured PGC-1α and mitochondrial electron transport enzymes to evaluate the mitochondrial biogenesis by β-adrenergic stimulates in rat skeletal muscle. Rats were subcutaneously injected with norepinephrine and clenbuterol(β-adrenergic agonist) for mitochondrial biogenesis by β-AR activation in brown adipose tissue(BAT) and skeletal muscle. Also propranolol(β-adrenergic antagonist) and AICAR was injected subcutaneous to determine whether catecholamine and necessary for exercise induced mitochondrial biogenesis. Norepinephrine and clenbuterol increased PGC-1α mRNA and protein expression in BAT, but they had no effect on PGC-1α and mitochondrial electron transport enzymes in skeletal muscle. While AICAR increased PGC-1α mRNA expression, propranolol suppression of PGC-1α mRNA expression did not occur, and was actually expressed more than AICAR treated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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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산 김준연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정치활동

        김상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0

        낭산 김준연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정치활동 김상현 ‘동아일보그룹'은 일제하 동아일보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해방정국에서 한국민주당의 결성을 통해 국내 우파 세력을 결집시켜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에 대한 연구는 민족주의 우파세력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일제하 국내 민족운동전선의 운동론 및 분화과정, 그리고 해방 이후의 좌우대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동아일보그룹'을 주도한 김성수ㆍ송진우ㆍ장덕수ㆍ김준연 등과 같은 인사들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는 이들의 노선 및 지향을 보다 치밀하게 파악하는 작업으로서 그 중요성을 지닌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이 연구에서는 朗山 金俊淵(1895~1971)의 민족운동과 정치활동, 그리고 정치사상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에 걸친 한국근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이들 ‘동아일보그룹'의 정치브레인으로서 그 운동양상을 대표하였고, 그들이 지향한 구체적인 정치활동을 일선에서 실천하였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준연은 일제시대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계 거물이었다. 그래서 제3차 공산당 탄압사건 당시 7년이라는 최고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동양의 최고 대학인 동경제대와 독일의 베를린대학에서 유학한 수재였던 만큼 사회주의 이론에도 밝아 ‘사회주의 서적의 도서관'이라고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ML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는 그가 입당하자 “일꾼을 얻었다”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감옥 안에서 일제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할 만큼 투철한 혁명가였다. 그런데 김준연은 1934년 출옥 후부터 철저히 민족진영의 논객으로 변신하여 왕년의 ML당 당수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켜나가기 시작하더니 해방 즈음에는 극우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송진우ㆍ김성수를 도와 이면에서 이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낭산 김준연의 일제시대 민족운동과 해방 후 정치활동을 고찰해 보고자 기획되었다. 이를 통해 동아일보 계열의 해방 전후 정치활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The national movements and political activities after the liberation by Nang-San, Kim Jun-Yeon Kim, Sang-hyun In Japanese colonial period, ‘Dong-A ilbo group' coordinated a national movement based on the ‘Dong-A ilbo'. And ‘Dong-A ilbo group' was developed as a major political force that unified the right, thereby organizing the korean democratic party after the liberation. In order to understand the studies on the right claiming to nationalism, the movement and classification of national movement in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conflict between the left and right, the studies on the ‘Dong-A ilbo group' remain elucidative. To validate the political line and orientation, the studies on ‘Kim Sung-Woo, Song Jin-Woo, Jang Duk-Soo and Kim Jun-Yeon', known as the leaders of ‘Dong-A ilbo group' have been emphasized. Kim Jun-Yeon, known as a political brain of ‘Dong-A ilbo group' represented the national movement and political activities by ‘Dong-A ilbo group' in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after the liberation. Based on the previous studies, independence movement, political activities and political ideas of Kim Jun-Yeon, known as ‘Nang-San' were demonstrated in this study. Kim Jun-Yeon was a socialistic representative, who had been charge in secretary of the third Joseon communist party. It has been known that Kim Jun-Yeon studied in ‘Tokyo imperial university' and the ‘Berlin university'. Due to his socialistic theory, he was called as a ‘library of socialistic books'. Kim Jun-Yeon joined to ML party and denied the suggestion of being a convert. Based on these facts, he was known as a revolutionary and was sentenced 7 years' imprisonment in the 3rd Joseon communist party repressive case. Since 1934, he had changed to representative of nationalism and become a birchist. Kim Jun-Yeon established the political interest with Song Jin-Woo and Kim Sung-Soo. In order to evaluate the political activities of ‘Dong-A ilbo group' after the liberation,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activities after the liberation by Kim Jun-Yeon, Nang-San were demonstrated in this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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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미술 아카데미>의 태동과 ‘러시아적인' 예술문화의 전개

        김상현 한국노어노문학회 2021 노어노문학 Vol.33 No.1

        As has been well known, the Russian <Academy of Arts>,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reign of the Empress Elizabeth Petrovna in 1757, was created under the heavily influence from the French <Royal Academy of Arts>. From the most of its important curricula to specific administrative programs, the Russian <Academy of Arts> itself represents the starting point of Russian art, particularly painting, though it began with French artistic hierarchy and legacy from historical painting and portrait depicted the Russian tsars and tsarinas. Yet, it had not past a century until Russia found and developed her genuine characteristics, with a piece of evidence showing that ‘the 14 people's revolt', as well as the Wanderers following the democratic and anti-governmental power politics stand for the typically Russian style of paintings. Given these basic developments of the Russian <Academy of Arts>, this article scrutinizes not only the general contour of history of Russian paintings from the early period of the imperial institute, but the so-called genuine Russian characteristics reflected in paintings, in particular. To this end, the primary purpose of this pilot experiment is to examine and explore the Russian paintings' long history and essential features which are different from those of French arts during the period of the early 18th century into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17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원한 <미술 아카데미>는 제국 러시아, 제정 러시아의 역사관과 예술관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엘리트 예술가를 양성하는 전문 기관이었다. 회화 장르의 위계질서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역사화 장르를 가장 우선시하여 젊은 예술가들을 교육한 기관으로 출범한 아카데미는 총 4분과(회화, 조각, 건축, 판화)를 개설하였다. 아카데미는 사회적 의무와 시민의 덕행, 국가와 국가 기관에 대한 충성을 장려하는 주제를 선택하도록 학생들에게 거의 강요된 예술 교육을 주입하였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 및 성경의 주제를 바탕으로 한 관변적 역사화는 가장 중요시된 교육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과 예술교육 방침은 점차 아카데미 내부에서 갈등과 새 양식에의 도전을 야기하였다. 1830년대부터 시작된 탈고전주의적 움직임을 비롯하여, 반제도권적 저항의 움직임은 1863년 일명 ‘14인의 반란 사건'을 통해 그 정점에 달하였다. 정부가 제시한 지정 주제에 반대하여 자유 주제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아카데미를 자진 퇴학한 14인의 저항 사건은 이후 이동파의 전신이 되었고, 19세기 후반 러시아 예술 문화의 흐름을 형성하는 가장 거대한 움직임으로 부상하였다. 본 연구는 <미술 아카데미>의 역사를 1)프랑스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와의 비교, 2)러시아 <미술 아카데미>의 기본 특징과 역사 전개, 3)14인의 반란 사건을 통해 본 러시아 예술의 특징, 4)이동파 화가들의 화풍을 기본적으로 살피면서 러시아 예술문화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로써 본 연구는 19세기를 중심으로 러시아 미술의 본질적인 특징이 반규범적 민주주의 정신, 관제적 예술 규범 타파, 친민중적인 화풍 창조,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봉사 정신의 의무감 등에 있음을 제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한다.

      • 남해안 신석기시대 전기 매장의례 시론 :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

        김상현(金相賢) 영남고고학회 2012 영남·구주학회 합동고고학대회 Vol.10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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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世紀 후반의 海印寺와 新羅 王室의 후원

        김상현(金相鉉)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6 新羅文化 Vol.28 No.-

        최근에 해인사 법보전의 목조비로자나불의 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中和 3年(883), 즉 신라 헌강왕 9년(883)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본고는 9세기 후반 해인사여러 상황과 왕실의 후원 등을 살펴봄으로서 이 불상 조성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해인사는 順應에 의해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는데, 왕의 할머니인 聖穆太后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창건 후에도 계속된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해인사는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로 발전했다. 9세기 말의 해인사 田券 43매가 조선 초에 발견된 바 있는데, 작성 연대를 알 수 있는 전권 으로는 헌강왕 때의 4건과 진성여왕 때의 3건이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해인사가 토지를 매입한 것이지만, 실제는 寄進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은 점에 유의하면, 헌강왕과 진성여왕 때에도 왕실의 후원은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 전권을 직접 보았던 조위의 기록에 의하면, 헌강왕 11년(885) 이전까지는 北宮海印藪라고 표기되고, 진성여왕 4년(890) 이후부터는 惠成大王願堂이라고 표기되었다고 했다. 북궁해인수란 ‘북궁의 원찰 해인사'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위 전에 北宮長公主로 불렸던 공주 만(曼)은 해인사를 원찰로 해서 후원을 했던 것 같다. 진성여왕 2년에 각간 魏弘이 죽자 왕은 그를 惠成大王으로 追封했다. 그리고 해인사를 원당으로 하여 혜성대왕의 명복을 빌었던 것 같다. 진성여왕 때에 매입한 해인사 전권에는 모두 惠成大王願堂으로 표기되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처럼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발전한 해인사는 효공왕 4년(900)까지 28명의 大德이 배출되었고, 希朗, 賢俊, 定玄 등의 고승이 활동하고 있던 9세기 후반의 해인사는 화엄종의 대표적인 사찰이 되어 있었다. 王京의 北宮에 살았던 경문왕의 공주 김만은 20대 초에 즉위하여 진성여왕이 되었다. 여왕 통치 10년, 어지럽던 나라는 후삼국으로 분열하고, “산천이 모두 전장이 되어버린” 상태가 되자, 병약했던 왕은 효공왕에게 양위하고, 6개월 만에 북궁에서 죽었다. 조위는 진성여왕이 죽었다는 북궁을 해인사로 단정하고, “여왕은 해인사를 위홍의 원당으로 삼았기에 왕위를 버리고 오직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절에 몸을 의탁하고, 마침내 이곳에서 죽었으니, 죽어서도 함께 묻히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북궁은 해인사가 아니라 왕경에 있던 여왕의 사제였다. 조위는 양위 전후 여왕의 참담한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낭만적인 해석을 했지만, 이 무렵 해인사는 도적떼로부터 삼보를 지키기 위해 승속이 무장을 갖추어 대항하는 와중에 56명이나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해인사 비로자나불상의 묵서명에 의하면, 大角干님과 王妃님에게 燈身주기를 서원하고 있다. 해인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발전한 절이다. 따라서 9세기 후반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상의 묵서명 중에 大角干主, 妃主 등의 명칭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무렵 신라 왕실에서 행한 이와 비슷한 佛事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해인사가 북궁의 원찰이었고, 진성여왕이 위홍의 명복을 비는 원당이었다고 하드라도 이 불상을 眞聖女王이나 角干 魏弘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하겠다. 진성여왕 즉위 4년 전에 이 불상은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Recently, Mukseomyeong(墨書銘, an explanatory legend with black ink) of Mokjo-Birojanabul(木造毘盧遮那佛, a Buddhist statue made of wood) at Haeinsa(海印寺) Beopbojeon(法寶殿) was discovered. According to the records, the Buddhist statue was created in third year of Joonghwa(中和) era(883) and it falls on the 9th year of the king Heongang(憲康王) of Silla. In this essay, I intend to look through the state of affairs of Haeinsa in the late ninth century and the auspices by the Royal House in order to contribute to elucidate the historical background around the foundation of the Buddhist statue. Haeinsa was founded by Suneung(順應) in the third year of king Aejang(哀莊王)'s reign(802) with the active supporting of Seongmok-taehu(聖穆太后), the grandmother of the king. Thanks to the constant backing of the Royal House, Haeinsa was able to be developed into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temple of Hwaeomjong(華嚴宗, Avatamsaka Sect) after the foundation. Among the forty three sheers of Jeongwon (田券, a kind of terrier) of Haeinsa which was written in the late ninth century and discover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both the four cases in the king Heongang's reign and the three cases in the queen Jinseong's reign allowed us to acknowledge the year of publication. Even though formally, Haeinsa purchased the lands, regarding the fact that the temple actually might receive the lands by donation, it seems to be supported by the Royal House even in the ruling period of Heongangwang and Jinseong yeowang. Consequently, Haeinsa cultivated twenty eight Daedeok(大德) by the forth year of Hyogong's era(900) and it was able to become the most representative temple of Hwaeomjong in the late ninth century with Buddhist Saint like Huirang(希朗) and Hyunjun(賢俊). The princess Kim Man(金曼), lived in the Northern palace in the capital area(王京), ascended the throne in her early twenties and became the queen Jinseong. After the ten years' reigning of her, the already disordered country ended up being divided into Husamguk(後三國, the Later Three-kingdom). Under the state of "all the mountains and screams was then battlefield", the invalid queen demised the crown to the king Hyogong(孝恭王) and died in the Northen palace six months later of the abdication. Jo-Wi(曺偉) assumed the Northen palace to be Haeinsa. However, the Northen palace was not Haeinsa but the queen's private residence in the capital area. Unlike the interpretation made by Jo-Wi regardless of the miserable reality around the abdication, Haeinsa was in difficult situation and it was revealed in the face that both priests and laymen fought in arms against thieves to preserve three treasures of Buddhism and fifty six of them lost their lives in the fight. According to Mukseomyeong of Birojanabul at Haeinsa, the inscription swears to give Deungsin(燈身, a sapient body) to Daegakgan(大角干) and Biju(妃主). Haeinsa is the temple developed by the backing of the Royal House. As a result, the names such as Daegakganju(大角干主), Biju(妃主) that are found among Mukseomyeong of Birojana's statue created in the late ninth century also have relations with the situation. In those days, the similar Buddhist affairs(佛事) done by the Royal family were numerous. Nonetheless, despite of the fact that Haeinsa was the original faction(願刹) of the Northern palace and was the memorial temple(願堂) where prayed for Wi-hong(魏弘), the interpretation based on the relation of the Buddhist statue with Jinseong yeowang and Wi-hong should be avoided as it seems impetuous. The statue was already created even four years before the coronation of the queen Jin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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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록 교수 정년기념 논총 : 한국사 ; 화엄사의 창건 시기와 그 배경

        김상현 동국사학회 2002 동국사학 Vol.37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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