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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곡 정제두의 자연학에 대한 예비적 고찰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1 陽明學 Vol.- No.6

        이 글은 하곡의 자연학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이뤄진 이른바 예비적 고찰에 해당한다. 하곡이라고 하면 한국 양명학의 대성자로 알려져 있고, 그만큼 그는 한국에서 왕양명의 심성론을 개척한 인물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자연학에도 탐구가 깊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종래의 연구에서 개설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시도는 없었다고 해도 좋다. 어쩌면 하곡의 자연학에 대한 탐구는 하곡학에서 숨겨진 또 하나의 지평을 여는 의미를 갖는다. 하곡집의 현존본 중에서 가장 내용이 풍부한 22권 22책본(A본)을 영인한 여강출판사의 『하곡전집』 권21에 제시된 하곡의 자연학에 관련된 부분은 「선원경학통고(璇元經學通攷)」ㆍ「기삼백설(朞三百說)」ㆍ「천지방위리도설(天地方位里度說)」ㆍ「칠요우행설(七曜右行度說)」ㆍ「조석설(潮汐說)」이다. 하곡의 자연학은 주로 안산기(安山期 41세~60세까지)에서 강화도로 은둔한 이른바 강화기[江華期 61세~88세(의 서거)까지]에 이뤄지는 것은 심성학이, 주로 주역과 서경 등의 고전에 기초한 우주론ㆍ천문학ㆍ기상학에 의해 결합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합일(인간학+자연학)을 이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학문 변천의 과정에서 윤곽을 짚어 본다면, 자연→인간이 아니라 우선 ① 인간→자연이라는 식의 시점이 설정된 다음, ② 인간과 자연의 합일(인간학+자연학)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성론, 인간론의 심화로서 자연학」인가, 아니면 「심성론, 인간론에서 자연학으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인가. 이것은 그의 저술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적어도 하곡이 당시 혹은 전통적인 우주론ㆍ천문학ㆍ기상학 등을 토대로 구축해냈을 자연학이 그의 철학체계와 결합하여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또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가 규명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첫째로, 그의 「선원경학통고」, 「기삼백설」, 「천지방위리도설」, 「칠요우행설」, 「조석설」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더불어, 둘째로, 이러한 이론들이 당시의 관련이론들과 어떻게 연계되고 또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셋째로 그의 후계자(이른바 강화학파) 등에 어떻게 계승되어 가는지가 차후 착실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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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재(李文載)의 자연학(自然學)

        구만옥 ( Mhan Ock Koo ) 한국사상사학회 2014 韓國思想史學 Vol.0 No.47

        이상형과 이문재 부자는 당대 서인계 산림의 영수라 할 수 있는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을 사사하여 사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계 학통을 계승했다. 따라서 이상형·이문재 부자의 학문·사상과 자연인식을 살펴보는 것은 조선후기 서인-노론계의 자연학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상형의 가문은 전라도 남원을 지역적 기반으로 삼아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상형과 이문재는 출사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남원에 거주했다. 따라서 이상형·이문재 부자와 같이 남원이라는 향촌사회에서 삶을 영위했던 유학자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자연학과 관련된 지식에 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지식들이 향촌사회 단위에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당시 조선사회의 사상·문화계의 지형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는 부친 이상형 이래의 가학의 토대 위에서, 김집을 비롯한 사우들과의 강학을 통해 자신의 학문을 성숙시켜 갔다. 이문재는 부친 이상형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척화(斥和)와 존주(尊周)의 입장을 고수했으며, 학문적으로는 역학(易學)과 상수학(象數學)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중심은 이학(理學)이었다. 이문재는 『주역』에 근거해서 학문적 위차를 설정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학은 기학(氣學=天文)·형학(形學=地理)·수학(數學=陰陽)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유학자가 추구해야 할 핵심이었다. 이문재의 저술 가운데 자연학 분야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기삼백주해(朞三百註解)」와 「선기옥형주해(璿璣玉衡註解)」다. 그 제목과 달리 이 두 저술의 내용은 ‘기삼백’과 ‘선기옥형’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과 관련된 자연학의 전반적 문제가 논의 대상이었다. 자연학과 관련된 이문재의 논의를 분석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먼저 자연학과 관련된 논의의 철학적 기초가 역학(易學)이나 음양설과 같은 성리학적 사유체계라는 사실이다. 그가 24기(氣)의 배치법을 설명하면서 역의 대연수(大衍數)에 비유하거나, 조석현상을 철저히 음양설에 입각해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이문재의 서학(西學)에 대한 태도와도 연결된다. 시헌력(時憲曆)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천문역산학은 당대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문재가 보기에 시헌력의 시각법은 성인의 고제(古制)에 어긋나는 것으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었다. 이문재의 학문적 관심은 성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일체의 자연현상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이었지, 성리학적 자연인식의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문재의 후손과 후학들은 「선기옥형주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것이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주목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문재의 몇 가지 논의에서는 요령부득의 문제점이 여러 군데 발견된다. 이는 자연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수준을 의심케 만드는 사례들이기도 하다. 성리학적 자연인식의 체계 내에서 선유(先儒)들의 논의를 종합해서 일관된 체계를 수립하고자 했던 그의 학문적 노력은 부분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것은 유학자 일반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기는 했지만, 16세기 말부터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했던 몇몇 뛰어난 학자들의 논의와 비교해 볼 때 결코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당시 지식정보의 중심지였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원이라는 지방 사회의 제한된 정보 속에서 이문재라는 개인의 지적 열망이 만들어 낸 제한적 성과물이었다. Yi Sang-hyeong(李尙馨) and his son Yi Mun-jae were students of Kim Jang-saeng(金長生) and his son Kim Jip( 集), then the leaders of Seoin(westerner, 西人) Faction. This meant that the Yis succeeded to the Seoin Faction, which had its ideological lineage came down from Yi yi(李珥) to Kim Jang-saeng. Therefore, studying Yi Sang-hyeong Yi Mun-Jae’s scholarly works on natural science will open the passage to understand the Seoin-Noron(老論)’s study on natural science in the late Joseon period. Based on the family wealth accumulated from Namwon(南原), Jeonla-do(全羅道) area, Yi Sang-hyeong moved forward to the positions in central government. However, Yi Sang-hyeong and Yi Mun-jae stayed in Namwon except the time periods they served in central government, and therefore never lost connections with the local confucius scholars. Their lives would help to show how local scholars natural science and how the knowledge circulated locally, and enhance our understanding of configuration of ideas and culture of Joseon. Yi Sang-hyeong established the scholarly tradition of the family, and Yi Mun-jae had it matured through the study exchange with friends like Kim Jip. Yi Mun-jae followed his father in regard of cheokhwa(斥和, Rejecting Reconciliation) and jonju(尊周, Loyalty to Ming), and was appraised as a fine scholar of Yeokhak(Yixue, 易學) and xiang-shu-xue(象數學). The center of his study was lixue(理學), which he understood as the core of confucianism, comprehending qixue, xingxue, and shuxue. The two most important works of Yi Mun-jae on natural science were Annotations to jisanbai and Annotations to xuanjiyuheng. In his comprehensive discussions on natural science in these books, we can come up with a few characteristics. First, the philosophical background of his natural science lied in Neo-Confucian framework of yixue and yinyang theory. This tendency was seen in his explanation of fortnightly period and tidal movements. This also led to Yi Mun-jae’s attitude toward Western Learning. Even though the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of the west boasted the finest level of the day, Yi Mun-jae focused on explaining all natural phenomena in the framework of Neo-Confucianism. Even though Yi Mun-jae’s Annotations to xuanjiyuheng was highly regarded by his descendants and junior scholars, his discussion included serious problems which raised doubts in his intellectual level. This suggests the limits of information available to the provincial scholars who were far away from the center of intellectual world of Seoul(Hanyang). Therefore, Yi Mun-jae’s limited achievements were an outcome of his personal eager for study, only restricted by provinc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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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자연학의 범주와 오행지학적 상관론

        김일권 동아시아고대학회 2018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50

        이 논문은 우리 역사에서 발달하였던 전통시대 자연학의 범주를 감응적 자연학과 유심적 자연학 및 생태적 자연학의 세 갈래 범주로 꼽을 수 있음을 논하면서, 그 중에서 자연과 인간의 상관성을 가장 복합적이고 특이한 방식으로 전개하였던 흐름이 다름 아닌 오행지학적 천지상관론이라 일컬을 수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오행지학은 전통시대 역사서에서 천문지 다음에 편장되는 오행지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논변구조를 말하며, 내용적으로는 자연에 관찰되는 제반 현상들을 목화토금수의 오행론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 관련한 모언시청사의 오사론(五事論) 및 천변지이에 따른 춘추재이론이라는 매우 복합된 구조로 인식하였던 상당히 독특한 자연학 갈래이다. 현대의 우리에게는 낯설고 난해한 사유이나 전통시대 오행지학적 천지상관론이 당시로서는 실제적 자연관이자 사회관이고 인간관으로 인식되었던 것임을 고찰하였다. 주변의 자연세계를 인식하는 범주에서 예컨대 풍속과 민심의 변화조차 실제하는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였던 흐름이라서 자연과 인간의 깊은 감응적 상관론을 읽을 수가 있다.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오행지학은 오행재이론과 오사재이론 및 황극재이론이라는 세 축의 해석 체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분석하였고, 그 사상기반으로 공자의 『춘추』, 진시황대 『여씨춘추』, 『상서』 홍범구주론, 복생의 『홍범오행전』, 동중서의 『춘추번로』, 유향ㆍ유흠 부자의 홍범재이론, 반고의 「오행지」 재이론에 이르기까지 고대사회가 추구한 재이적 천인상관론이 일관되게 견지되고 지속되는 흐름임을 고찰하였다. 이처럼 오행지학적 재이론은 가장 전형적인 고대 동아시아적 감응자연학이자 천인감응론에 속한다. This research discusses the traditional Korean naturology in three categories: the reciprocal, the spiritual, and the ecological. Among these the most complex and particular development appears in the Correlation Theory of Heaven and Earth based on Ohaengji (Treatise on the Five Elements). This theory refers to the argument structure of Ohaengji, that is the second most compiled treatise following the Treatise on Astronomy. It is the characteristic naturology perceived through a very complicated structure containing theories of the Five Elements of wood, fire, earth, metal, and water; the Five Matters of society that are one's appearance, speech, seeing, hearing and thinking; and the vicissitudes of history caused by natural disasters. Although it might be an unfamiliar and difficult way of thinking for the modern person, this paper examines the fact that the Correlation Theory of Ohaengji was perceived as the realistic view of Nature, society, and human. It is understandable that in the realm of Nature of their perception, even the changes in the folk customs or sentiment were considered as part of the close correlations between nature and human. The Treatise on the Five Elements is analyzed as being composed of three axes for the interpretive system. They are the theories of abnormal occurrences in the Five Elements, in the Five Matters of society, or in the great royal road. In its philosophical basis this paper examines classic books among others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by Confucius, Springs and Autumns Annals of Mr. Lü, Documents of the Shang, Nine Categories of Hongbeom, Record of Five Elements of Hongbeom, and Luxuriant Gems of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These books from ancient times provide the persistent flow of correla tion between heaven and human concerning abnormal occurrences. The Correlation Theory of Ohaengji, likewise, belongs to one of the most typical naturology of reciprocity and the theory of heaven and human reciprocity in ancient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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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과학사 연구에서 ‘실학’의 문제

        구만옥 ( Koo Mhan-ock ) 한국실학학회 2018 한국실학연구 Vol.0 No.36

        조선후기에는 天文曆算學을 비롯한 自然學분야에서 새로운 학문 경향이 대두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주자학적 자연학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첫째, 주자학에서는 자연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조선후기에는 자연학의 학문적 가치와 중요성을 긍정하는 논의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종래 ‘小道’로 치부되었던 算學을 비롯한 자연학이 유학자들의 필수 교양으로 격상되었다. 둘째, 物理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다. 이는 理氣論과 格物致知論으로 대변되는 주자학적 세계관과 인식론의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공부의 대상과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자연법칙으로서의 물리에 대한 탐구가 적극적으로 모색되었고, 탐구의 대상 역시 유교 경전과 그 주석서에서 벗어나 자연물로 확장되었다. 이제 공부는 天地萬物을 대상으로 한 博學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물리에 대한 최신의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西學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셋째, 자연학의 연구방법론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주자학에서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할 때 주로 思辨的방법을 사용했다면, 조선후기에는 경험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학자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測量·實測을 중시했다. 조선후기에 물리 탐구의 수단으로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학자들이 한결같이 서학의 우수성으로 數學과 實測을 거론했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후기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 풍토에서 기존의 학문적 位階를 일부 해체하여 자연학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하고,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물리를 탐구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 지식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일부 학자들의 학문적 실천은 조선후기 학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이다. In the late Joseon Dynasty, new academic trends emerged in the field of natural sciences including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It differs in several aspects from the existing Natural Philosophy of Neo-Confucianism(Learning of Master Zhu). Firstly, Neo-Confucianism did not recognize the unique value of natural scie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debate about the academic value and importance of natural science began to appear. As a result, the natural sciences such as mathematics, which had previously been regarded as trivial knowledge, have begun to be recognized as essential education of Confucian scholars. Secondly, a new perception of wuli(the principles of things, the principles of the phenomena) emerged. This can be seen as a result of the change of Neo-Confucian world view and epistemology, which are represented by the theory of li and qi(理氣論) and the theory of ge-wu-zhi-zhi(格物致知論: theory of the investigation of things and cultivation of knowledge). Accordingly, the subjects and methods of study have changed. The study of physics as a natural law was actively sought, and the subject of study was extended to the natural world, from the Confucian scriptures and commentary(the Confucian Canon and annotation). Now, the study has become more broad learning(博學: boxue) of heaven-and-earth and the myriad things, and the Western science(西學: Western Learning), which contains the latest knowledge and information about physics, was accepted positively. Thirdly, the research methodology of natural science changed, as well. In Neo-Confucianism, scholars used mainly a speculative method to explore the meaning of things.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scholars who attempted to actively introduce empirical methods appeared. They emphasized observation and measurement. Thus, scholar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o intend to actively accept Western learning as a means of natural science research, have consistently addressed mathematics and experiments as the excellence of Western learning. In the academic climate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 existing academic hierarchy is partially dismantled in order to affirm the original value of the natural science. The academic practice of some scholars who attempt to establish their own natural science by actively accepting the foreign Western learning and studying physical laws, is one of the important indicators showing the changes in the late Joseon academic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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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스토아 자연학에서 능동 근원의 물체성 검토

        한경자 한국서양고전학회 2019 西洋古典學硏究 Vol.58 No.1

        This paper examines Stoic corporealism through the elucidation of the Stoic corporeal god. In the Stoic physics, the world as a whole and things within the world are described as composites of two principles: the active (to poioun) and the passive (to paschon). Both these principles, termed god and matter, are corporeals (i.e., bodies). The corporeality of god is the foundation for characterization of the Stoic ontological system as corporealism (or as materialism). Thus, the elucidation of the active principle provides the basis for understanding Stoic corporealism. This paper, therefore, examines the corporeality of these two principles, god and matter, and, in particular, the corporeality of the active principle, to understand how it is that the active principle (i.e., god) is a body, and thus to understand Stoic corporealism more completely. First, I introduce the main fragments that present the corporeality of the two principles and indicate how the corporeality of the two principles is expressed (Section 2). Then, I review the conception of bodies (sōmata) in Stoicism by considering the Stoic criterion of a body as something that either acts or is acted upon. Then, I show how the Stoics modified the discussion of “being―body” from Plato’s Sophist, 245e6-249d5, and, thereby created the interpretation that “everything that either acts or is acted upon is body (=being)” (Section 3). After this, examining Plutarch’s discussion at Conjugalia Praecepta cp. 34, I illustrate the concept of the body as the single organic united entity in which the parts and wholes entirely depend on each other (Section 4). Finally, following this discussion, I argue that the corporeality of the active principle implies that the mobility of the body (=being) is inherent in the body (=being) (Section 5). 스토아 자연학에서 우주와 사물의 구조는 두 개의 근원인 능동 근원(작용자)과 수동 근원(피작용자)의 구성체로 설명된다. 신과 질료라고 불리는 이 두 근원은 스토아 자연학 체계에서 모두 물체이다. 수동 근원인 질료가 물체일 뿐만 아니라 능동 근원인 신도 물체인데, 이 중 능동 근원이라고 지칭되는 ‘신’의 물체성은 존재의 구조에 대한 스토아철학만의 특징적 이해 방식을 표명한다. 따라서 능동 근원의 물체성에 대한 해명은 이른바 스토아적 유물론의 성격을 이해하는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스토아 자연학에서 상정되는 우주와 사물의 두 근원인 신과 질료의 물체성, 특히 능동 근원의 물체성을 검토하여 능동 근원(신)이 물체라는 것이 함축하는 바를 밝히고, 이를 통하여 이른바 스토아적 유물론의 성격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우선 2절에서는 스토아 자연학에서 두 근원의 물체성을 언명하는 주요 단편을 소개하고 이 두 근원의 물체성이 어떤 식으로 표명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3절에서는 물체 개념에 대한 스토아의 이해를 검토한다. 특히 물체의 기준을 ‘작용을 가하거나 작용을 받는 것’으로 두는 스토아 특유의 물체성에 대한 이해의 함의를 추적한다. 그리고 플라톤의 소피스트 편 245e6-249d5에서 제시된 ‘존재-물체 관계 논의’가 스토아철학에서 전용되어 의미 변형이 이루어진 사항을 검토하여, 스토아가 전용한 ‘작용을 가하는 것/작용을 받는 것은 모두 존재-물체’라는 새로운 기준이 스토아 유물론을 정초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규명한다. 4절에서는 물체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플루타르코스의 단편을 검토함으로써 스토아에서의 물체의 의미를 재고하고, 여기서 강조되는 스토아 물체의 의미가 ‘수동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부분과 전체가 서로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임을 밝힌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마지막 5절에서는 스토아 자연학에서 능동 근원의 물체성이 함축하는 바가 ‘존재-물체’의 운동의 힘이 물체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점이 논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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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아 자연학에서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tonikē kinēsis) 고찰

        한경자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23 철학논집 Vol.72 No.-

        This paper examines the Stoic “tensional motion (tonikē kinēsis)”, which is the simultaneous movement of pneuma in opposite directions. It highlights the influence of “tensional motion” on Stoic corporealism. Understood through “tensional motion,” “pneuma as a fire–air structure” contains two constitutive powers, i.e., “hot” and “cold,” which lead to the simultaneous occurrence of expansion and contraction, i.e., the simultaneous inward and outward movements. Theses movements constitute substantiality and quality of things, i.e., the function of the corporeal active principle of Stoic physics. Through the construction of the tensional movement mechanism, Chrysippus clarifies the meaning and status of the corporeality of the active principle (God), and establishes Stoic corporealism. The “tensional motion of pneuma” is an explanatory device that serves as the foundation for Chrysippus to introduce the concept of pnuema, which is a biological concept of the time, into Stoic physics and develop it into a concept of cosmic pneuma. 이 논고는 스토아 자연학 체계화 과정에서 크뤼시포스가 도입, 발전시킨 ‘프네우마(pneuma) 긴장 운동’의 의미를 추적, 해석하여 스토아적 유물론에 있어 ‘긴장 운동(tonikē kinēsis)’의 역할과 함의를 재조명한다. 스토아 자연학에서 제시되는 ‘긴장 운동’을 통해 이해되는 ‘불-공기 구성체로서의 프네우마’는 ‘뜨거움’과 ‘차가움’이라는 상반적 성질을 자신 안에 ‘함께’ 갖고 있으며, ‘팽창 운동’과 ‘수축 운동’을 ‘동시에’ 한다. 이러한 프네우마 긴장 운동의 동시적 양방향 운동은 사물의 실체성과 성질을 구성하면서 스토아 자연학에서 물체적 능동 근원의 작동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긴장 운동 작동 메커니즘의 구성을 통해 크뤼시포스는 능동 근원(즉, ‘신(theos)’)의 물체성의 의미와 위상을 명료화하고 스토아적 유물론을 확립시킨다.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은, 크뤼시포스가 당대의 생물학적 개념인 ‘프네우마’ 개념을 스토아 자연학에 도입하여 우주적 ‘프네우마’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 발판 역할을 한 핵심 설명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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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세계관이 현대인의 철학으로서 갖는 특장(1) -인간학과 자연학의 통합체계-

        금기현 동양철학연구회 2011 東洋哲學硏究 Vol.67 No.-

        人間學과 自然學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구성하는 점은 宋代이후로 새롭게 정립된 理學들 중 오직 性理學만이 갖는 특색이다. 성리학의 獨自的인 思惟노선은 北宋의 程이(정이)에서 시작되어 南宋의 朱熹(주희)에서 확정되며 조선조의 退溪李滉(퇴계 이황)과 栗谷李珥(율곡 이이)에 이르러 각각 하나의 완성된 체계를 낳는다. 필자는 宋代이래의 理學을 ``直貫系統(직관계통)의 理學``과 ``性理學``으로 兩分하고서, 性理學만이 갖는 인간학과 자연학의 통합성이 전통의 儒學界에서는 때로 哲學上의 논란을 낳기도 했으나 현대철학의 무대에서는 오히려 特長으로 계승해야 할 가치가 있음을 논의한다. 유럽의 近代科學이 들어오자 중국의 지식인들은 과학을 ``格物致知學``이라 명칭하면서 전통의 格物致知와 연계하여 여러 방향을 모색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格物致知는 갑자기 사라지고, 전통의 格物致知와는 無關한 ``과학``만이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그것과는 별개로 中國儒學의 현대화 과정에서는 직관계통 이학의 대표인 陽明學진영에서 ``良知自我坎陷說(양지자아감함설)``이 제시된다. 필자는 한편으로는 20세기의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 연구 성과를 참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현대의 양명학 진영에서 나온 良知自我坎陷說을 참조하면서, 현대성리학이 인간학과 자연학의 통합체계를 모색할때 어떤 점들을 짚고 가야 하며 어디에서부터 기초를 닦아가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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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理氣哲學의 세계관이 현대인의 철학으로서 갖는 特長(I) - 인간학과 자연학의 통합체계 -

        김기현 동양철학연구회 2011 東洋哲學硏究 Vol.67 No.-

        人間學과 自然學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구성하는 점은 宋代 이후로 새롭게 정립된 理學들 중 오직 性理學만이 갖는 특색이다. 성리학의 獨自的인 思惟 노선은 北宋의 程頤(정이)에서 시작되어 南宋의 朱熹(주희)에서 확정되며 조선조의 退溪 李滉(퇴계 이황)과 栗谷 李珥(율곡 이이)에 이르러 각각 하나의 완성된 체계를 낳는다. 필자는 宋代 이래의 理學을 ‘直貫系統(직관계통)의 理學’과 ‘性理學’으로 兩分하고서, 性理學만이 갖는 인간학과 자연학의 통합성이 전통의 儒學界에서는 때로 哲學上의 논란을 낳기도 했으나 현대철학의 무대에서는 오히려 特長으로 계승해야 할 가치가 있음을 논의한다. 유럽의 近代科學이 들어오자 중국의 지식인들은 과학을 ‘格物致知學’이라 명칭하면서 전통의 格物致知와 연계하여 여러 방향을 모색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格物致知는 갑자기 사라지고, 전통의 格物致知와는 無關한 ‘과학’만이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그것과는 별개로 中國儒學의 현대화 과정에서는 직관계통 이학의 대표인 陽明學 진영에서 ‘良知自我坎陷說(양지자아감함설)’이 제시된다. 필자는 한편으로는 20세기의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 연구 성과를 참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현대의 양명학 진영에서 나온 良知自我坎陷說을 참조하면서, 현대성리학이 인간학과 자연학의 통합체계를 모색할 때 어떤 점들을 짚고 가야 하며 어디에서부터 기초를 닦아가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 KCI등재후보

        存齋 魏伯珪의 格物說

        오항녕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2 泰東古典硏究 Vol.28 No.-

        본고에서는 18세기 조선에 살았던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1798)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견해와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위백규는 자신의 문집인 『존재집(存齋集)』의 4권(12권~15권)에 걸쳐 「격물설(格物說)」이라는 논설을 남겼다. 이 논설에서는 천지(天地)부터 인간의 삶 일반, 주체인 나[我], 각종 동물과 식물에 이르기까지 탐구하면서 다양한 대상과 주제에 대한 평론과 설명을 덧붙였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보아, 그의 이러한 연구와 관찰은 당시에 매우 독특하고 드문 경우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위백규의 「격물설」은 성리학의 오랜 전통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성(性)-정(情), 인간-자연, 성인과 범인 등에 대한 추상적, 이론적 논쟁의 한편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탐구하였다. 아니, 그 논쟁의 물질적 토대가 자연학, 의학적 베이스라고 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위백규는 일상의 소학(小學), 인체에 대한 의학(醫學), 벌레, 수목, 동물에 대한 자연학(自然學)적 관찰을 계속했다. 그는 태극, 음양, 오행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이기론(理氣論)과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에 입각하여 우주와 자연계, 인간을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위백규의 논설은 성리학적 격물설에 대해 도덕주의라고 평가했던 학계 일반의 관점이 수정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과학과 가치를 분리시키는 근대 철학의 이분법적 사유에 기초한 도덕주의적 해석에 내재한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위백규의 「격물설」에 대한 논의는 조선후기 사상계의 이해에 관한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격물설」은 대상에 대한 관찰을 전제로 한 지식의 축적과 체계화이다. 이는 「격물설」 중 일부인 위백규의 「상론(尙論)」에도 적용될 것이다. 이치[理]와 형세[勢]의 긴장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며 이루어지는 사론(史論)을 규범적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위백규는 스스로 성리학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격물설」만이 아니라, 「독서차의(讀書箚義)」에서 보듯이 관심 영역을 확장시키고 다른 학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견해를 제시한다. 같으면서도 달라져가던 시대를 산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 사상사 연구에서 나타났던 근대주의적 목적론을 씻어내고 위백규를 보면 어떤 접근방법이나 관점이 가능할까?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본고에서 「격물설」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위백규란 사상가의 면모를 드러내기는 부족하다. 그의 의학, 음악론, 예론, 언어학, 역사학, 자연학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I studied a theory of the gaining knowledge of Wie Baek-gyu who lived in Chang-Hung in 18th Century Joseon. In his anthology vol.12~15, he wrote a lot of comments and reviews about the being in the world from heaven and earth, human, to insects. In view of quality and quantity, the study and observation like these was a very particular and rare case at that time. However it was an inevitable result in the longrun tradition of the gaining knowledge theory of neo-confucianism. In parallel to the abstract and theoretical debates around the nature-passion, the nature of human-thing, the heart of the sage-common being, the scholars of Joseon studied his world concretely more and more. Wie Baek-gyu observed things of universe like heaven and earth, four season, 24 solar terms, five-elements, a vaginal itch. And he also observed almost all the things he met in his daily life. Needless to say human-relationship, insects, trees, grasses, birds, fishes and animals were the objects of his study. His study was based on the nature itself, Physica. The neo-confucianism presupposed the medical science from the beginning in its main frame like the nature-passion. Actually, he explained the movement of five-elements by the terms of the medical science such as the liver, the gall, the kidney etc. In this respect, the opinion that understands the view of Wie Baek-gyu as moralistic only can be correct partly. On the contrary, his study was the rational one primarily, and on this base he extended his observations to the moralistic realm.

      • KCI등재

        『성호사설』「만물문」의 실학적 만물관과 자연학

        김일권 동아시아고대학회 2011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26

        『성호사설』은 18세기 중반에 편집된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류서류 저술이다. 여기에 담긴 다양한 지식 범주와 컨텐츠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던 까닭에 그가 추구하였던 지적 지향성을 이해하고 그 저술적 가치를 재검토하는 일은 학술적 의의가 높다 하겠다. 성호의 고제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은 성호가 평소에 잡다하게 적은 글을 산삭하여 5편 20문으로 편집한 『성호사설류선』(10권 10책)을 펴내었고, 이 분류안을 그대로 중용하여 국역한 민족문화추진회는 성호의 지식 범주를 천지, 만물, 인사, 경사, 시문의 다섯 류문으로 설립하여 제시하였다. 본 논문은 이 중 「만물문」에 담긴 저술 내용을 분석하여 성호의 만물관과 자연학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성호는 애초에 만물문 항목들을 체계적 계통을 세워 분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궁금해하는 지적 호기심에 따라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한 정도였다. 이에 필자는 성호가 만물문을 통해 내보이려는 만물의 지식 컨텐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분류하여, (1)조류, (2)동물류, (3)어패류・충류, (4)식물류, (5)기물류, (6)복식류, (7)음식류, (8)자연현상류, (9)사건사리류, (10)풍속제도류의 10개 류문과 그 하위로 54개 소분류를 포괄하는 류문 재구성안을 제시하였다. 그 구체적 서술 내용들은 성호의 만물관과 자연학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었는데, 첫째, 서양문물과의 접변을 통해 과학기물의 우수성을 적극 평가하여 당시 사변적 성리학 지형 속에서 실용적 실학성을 제시한 의의가 있었으며, 둘째, 곤충의 습성관찰기와 같이 자연과학적 경험지식을 추구하였으며, 셋째, 석회의 제습과 보습 성질 관찰기와 같이 자연현상과 사물의 변화 원리를 물리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근대 자연과학적 태도까지 보여주었다. 넷째, 반면에 기상기후의 변화를 용의 조화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주술적 사고를 여전히 보여주었다. 다섯째, 그의 물명고증학적 접근은 지적 책임성을 제고한 것이었으며, 여섯째, 여러 기물류의 제작과정 고찰은 그의 실용적 관심과 물리적 자연관을 엿보게 하였고, 일곱째, 농기구, 병장기, 마구, 수레 등 일상생활 중의 실용적 용구에 대한 경세치용적 관찰을 대폭 수록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여덟째, 갯벌의 바닷게 종류나 도량기물의 종류를 세밀히 관찰 기록하는 점 등은 그의 만물 분류학적 태도를 매우 돋보이게 하는 대목들이었다. 아홉째, 기상과 물리화학, 생물현상 등 다양한 자연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 관심도 주목되며, 열째, 서화서체, 점복류, 금수오륜설 등은 만물이 아니라 만사에 대한 사건사리적 관찰을 다룬 것들로써 그의 분석적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그의 만물관과 자연학적 기술은 조선 후기 지식의 생태를 크게 변모시키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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