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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연구를 위한 한국종교민속론의 시각

        편무영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35

        동아시아의 범주에 관한 학제적 논의가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한국의 종교민속학에서는 이미 시급한 문제로 다가 왔다. 불교민속론의 발전적 모색을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의 불교민속에 국한된 연구를 지양하고 동남아시아나 서남 아시아의 불교민속을 포함한 총체적 국면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교민속론이 나아가야할 방향이라는 종 교민속연구회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여기서는 동아시아고대학회 제현의 고견에 귀 기울이기로 하였다. 종교민속연구가 결코 한국에 국한된 종교민속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동아시아고대학회 역시 동아시아를 논 의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는 또 다른 언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아시아라는 광역의 문화 영역과 어떤 종교민속이 각각 날실과 씨실이 되어 만나는 접점을 연구의 시발점 으로 삼아야 함을 전제로 내세웠다. 지금까지의 비교 연구가 개별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제부 터는 가령 문양이나 세시풍속에서 발견되는 종교민속을 통해 동아시아 전체를 조망하는 문화횡단에 도전해야 한다 . 그러기 위해 주목해야 하는 것이 종교민속학적 관점인데 이것은 종교민속 현상과 동아시아가 함께 만든 자수의 감상법과도 같은 것이다. 한편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다른 영역들처럼, 문화관련 영역에서도 동아시아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방향성에는 일단 아무도 의문부호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인문과학이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범주는 사회과학과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인문과학 내부에서조차 미묘한 차이가 있다. 편의적이고 통상적이라는 판단 기준은 학술적으로는 무책임하 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민속학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한자와 중화를 축으로 생각하던 과거의 발상이 과연 지 금과 앞으로의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고려해야할 점은 또 있는데, 그것은 문화과학의 이론으로 중심과 주변의 주종관계가 아닌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 계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역사 과학에서는 토인비가 “유기적인 전체”라 표현하였다. 전체와 부분에 의한 문화구조 는 그 어느 것도 중심일 수 없고 늘 주변일 수도 없다. 인도의 범아일여(梵我一如, Brahman-Atman-Aikya) 사상 에 수렴되는 이론이라 할 수도 있겠고, 현상학에서도 관련된 논저는 연구사의 중요한 줄기를 이룰 정도이다. 그와 같은 사상적 맥락에 입각했을 때 중국은 불교의 경유지이면서 재활성 지역이고 고구려 역시 경유지이자 재활성 지 역이라는 관계성에는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리그베다 사 상이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타교가 재활성된 지역이므로 같은 흐름의 관계성은 연속해서 꼬리를 무는 식이다. 한 마디로 전체가 유기체적 관계라는 인식이 중요한데 그렇게 본다면 불교는 무에서 유로 창출되었다기 보다 불교이 전부터 거듭된 재활성의 도달점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무도 없고 유도 없다는 고대 인도의 원초적 사상 역시 그 렇게 사유되지 않았을까. 이와 같이 본다면 한자에 대한 확고부동한 가치 부여와 문화권 설정은 재고되어야 한다. 그래서 종교민속학에서는 동아시아를 아시아의 동부 지역이라는 본의로 되돌려놓고 종교민속 전반을 고찰하고자 한다. 거기서부터 종교와 어떤 민속과의 관계를 검증해야 하며, 불교는 물론이려니와 유교나 도교 가톨릭 개신교 공히 이러한 입장과 관점은 공유되어야 한다. 이상은 동아시아와 종교민속의 관계에 국한된 논술이지만 역사학이나 문학 또는 고고학이나 지리학 해양학 등 다 양한 연구 분야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고대학회는 각 분야가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범주가 무엇 인지 살펴본 연후에 학회로서의 총체적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While the existing research of topics associated with East Asiais not adequate, clarifying Korean folklore of religion has become an urgent task. For more understanding Buddhist folklore, we must examine Northeast Asia along with Southeast and West Asia. Similar to how research on religious folklore is not limited to Korea, the Association of East Asia Ancient Studies has conducted research in the field of East Asia. Conventional East Asian studies still retain the model of seperate fields of study with respect to East Asia. Now, we must cross-culturally conduct research on one specific cultural phenomenon. For this reason, this paper discusses the necessity to investigate some folkloristic phenomena employing the perspective of East Asia. On the other hand, there is no doubt that cultural studies must consider East Asia Studies, similar to the social science and humanities disciplines. The range of perspective used in East Asian Studies. however, is not integrated with the social sciences. Subtle variations can be found even within humanities. Criteria of judgment, that are convenient and ordinary, continue to be used without significant academic responsibility.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question arises whether previously effective Sino-centered thought continues to be relevant in the global era. Another aspect needs to be considered. Cultural structures must be perceived as an organic relation between the whole and the parts, and not as examples of master-servant relations between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Arnold J. Toynbee also described it as an organic whole. Nothing can be a center or a periphery in the cultural studies, as they are composed of wholes and their parts. This theory converges with the Indian philosophy of Brahman-Atman-Aikya. Phenomenological arguments also account for an important part of the theory. In this intellectual context, China can be perceived as a stopover and a revitalizing region, and Koguryo as well. Likewise, though India is known as the birthplace of Buddhism, India also revitalized the Rigveda and Zoroastrianism of Persia. These relationships are impermanent. In other words, it is important to see the whole as an organic link. Buddhism emerges from a combination of the constant revitalizations that occured before its arrival and its own new beginings, instead of simply emerging out of nothingness. I think the ancient Indian philosophy stating that there is no nothingness or being was also conceived in a similar manner. Therefore, we must reconsider Sino-centric thinking. It is necessary to redefine East Asia as the eastern part of Asia and take religious folklore into consideration. From that point of view, we must verify a relation between religion and folklore. Additionally, this viewpoint has to be shared with not only Buddhism, but also Confucianism, Daoism, and Christianity. These are the feature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East Asia and religious folklore. However, it is necessary to consider diverse fields such as history, literature, archaeology, geography, oceanography, and so on. For these reasons, the Association of East Asia Ancient Studies should declare a perspective as an academic conference, after reviewing a range of East Asian Studies in other areas of research.

      • KCI등재

        九州 海岸島嶼와 東아시아의 戰爭 — 고대 韓․日지역세계의 대외적 교섭을 중심으로 —

        鄭孝雲 동아시아고대학회 2007 동아시아고대학 Vol.15 No.-

        본고는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치고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한반도의 남해 연안지역과 큐슈 북부의 해안 지역에서 전개된 전쟁 즉, 포상 8국의 전쟁, 고구려와 왜의 전쟁, 반정전쟁, 백촌강의 전투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포상 8국의 전쟁은 3세기 초 公孫씨의 帶方郡 설치로 인한 낙랑군과 구야국을 연결하는 해상 루트의 혼란과 한반도 남해안 연안 세력과 가야세력과의 해상 교역권의 질서 재편을 둘러싼 것이었다. 광개토왕릉비로 보이는 백제를 매개로 한 고구려와 왜의 전쟁은, 중국 대륙의 불안정한 정세에 연동된 4세기 초 고구려의 낙랑․대방군 지역에의 군사적인 병합에 의한 한․일 지역사회의 새로운 질서 재편에 의한 결과였다. 6세기반정의 전쟁은 일본 열도의 大和정권과 九州 북부 연안의 筑紫정권과의 싸움이었지만, 가야와 신라,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에의 세력 확장이란 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7세기에 전개된 백강전투는 당시의 동아시아 제국 즉, 신라와 당의 세력과 백제부흥군과 왜, 고구려 세력이 참가한 국제전이었다. 전쟁의 배경에는 중국 대륙의 당제국의 출현과 각 지역 정치 세력의 권력 집중을 매개로 한 통일 국가로의 정치적인 의지가 있었다. 이상의 전쟁은 한반도의 남해 해안의 도서와 일본 구주 북부 연안의 도서를 포함한 두 지역이 공유하는 해양이라고 하는 지리적인 공간을 무대로 전개되었지만, 한․일 지역세계에만 한정한 것은 아니고,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 외교 정세와도 밀접한 연결을 가져 전개된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또, 이들 전쟁은 발 생 시기와 각 지역의 고대국가에의 성장과 발전,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관여한 정치세력의 변화는 있었지만, 대마도를 중간 기착지로서 생활을 해 온 한반도의 남해안과 큐슈 북부 연안의 도서 즉, 고대 한․일 해역세계 도서의 해상민들이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고대 한일지역 세계는 바다라고 하는 자연적, 지리적인 장벽에 의해서 단절되고 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해양을 매개로 한 도서라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고대 한․일 지역세계 나아가서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와 역사적,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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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自鳴鼓角의 역사적 의미

        이성재 동아시아고대학회 2016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43

        대중에게 <자명고 이야기> 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자명고각 이야기>는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가 대외확장을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낙랑을 병합할 의도로, 낙랑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여 자국의 안전을 담보할 목적으로 두 나라의 왕실이 정략혼인한 역사적 사실을 윤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명고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우는 악기인 자명고각이라는 허구적 요소에 대해 낙랑의 우월한 방어 체계의 은유라는 견해가 있으나 고대 한국에서 북과 뿔피리가 경보용으로 사용된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고구려가 이웃나라의 신성한 고각을 탈취한 후 복속시키는 <자명고각 이야기>와 유사한 형식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데, 이것은 고각이 고대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 신성성을 지니고 있는 기물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북은 고대 한국에 존재하였던 일종의 신성 구역인 소도에서 의식용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는 신성한 햇살무늬가 그려진 대형 북을 찾아볼 수 있어서 고구려에서도 북을 신성한 악기로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북과 피리가 하늘과 땅을 제사지내는 중요한 종교 의식에서 사용되었고, 신라에는 적병을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며 기후를 조절하는 등의 신령스런 능력을 지닌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존재했다고 한다. 북과 피리는 굿과 같은 한국 무의 종교 의식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종교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자명고각은 고대 한국 사회의 악기에 대한 종교적 신성 관념에 대한 반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고대 한국에는 북과 뿔피리와 같은 신령스런 악기가 나라를 지켜주는 신보로서 인식되었으며, <자명고각 이야기>는 그와 같은 역사적 사실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determine that belief that sacred musical instruments had the ability to defend the country was part of systems of religious idea of ancient people of Korea. The story of the drum and the horn which make a sound by themselves if enemies invade(Jamyenggogak) of Nakrang is thought to embroider the historical fact of marriage of convenience between Goguryeo and Nakrang. The existing research claims that the drum and the horn which make a sound by themselves if enemies invade are the metaphor for superior warring system of Nakrang. But the definite examples that drums and the horns were used as alarms in ancient Korea are not found. Drums and wind instruments such as horns and pipes were recognized as the objects that had a religious sacredness in ancient Korea. Drums were used as ritual instruments in Sodo(the sacred area such as the city of refuge) of Han. Goguryeo people recognized that Drums were sacred instruments. Drums and wind instruments were used at the important ritual that Baekje people worshiped the gods of heaven and earth. According to 『Samgukyusa』, there was the mysterious pipe was named Manpasikjeok that was able to defeat the enemy nad cure a disease in Silla. Drums and pipes are still used today at religious ceremonies such as Gut. As a result, the belief that sacred musical instruments such as drums and horns had the ability to defend the country existed in ancient Korea. Therefore,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the story of the Jamyenggogak is the vestige of the belief of sacred musical instruments of ancient people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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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인 집단의 기원에 대한 연구와 동아시아 고대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

        장우순,문치웅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60

        인류 및 동북아인의 기원을 연구하는 인류학은 새로운 유전학 기술을 받아들인 분자인류학이라는 새로운 융합학문의 성과에 힘입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동북아 고대사는 본질적으로 한국인ㆍ중국인ㆍ일본인의 기원 및 이주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분자인류학이 새롭게 밝혀내고 있는 동아시아인 집단 및 동북아인 집단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은 동북아의 고대에 대해 새로운 역사해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적어도 분자인류학적 분석을 근거로 한 동아시아인 집단의 기원 및 이동에 대해서 한ㆍ중ㆍ일 학계의 결론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한ㆍ중ㆍ일 역사학계의 해석은 분자인류학이 도출해낸 결과와는 큰 거리가 있다. 분자인류학의 성과를 역사학계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협업을 진행할지가 향후 분자인류학과 역사학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The study of the origins of Northeast Asians is surprisingly developing with the integration of genetic knowledge and technology into the field of anthropology. Th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is essentially linked to the origins and migration of Chinese, Korean and Japanese people. Molecular anthropology reveals new information on East Asian and Northeast Asian groups, providing opportunities for new historical interpretation of Northeast Asian ancient times. On the origin and migration of East Asian groups, which are at least based on molecular anthropological analysis, the academic community of Korea, China, and Japan has a similar conclusion. However, the interpretation of the Korean, Chinese and Japanese historians is far from the results of molecular anthropology. How historians accept the achievements of molecular anthropology and how to proceed with collaboration will be a key task in the future of molecular anthropology and historical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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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슈(九州)의 역사문화와 동아시아 —중세기까지의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윤광봉 동아시아고대학회 2007 동아시아고대학 Vol.15 No.-

        고대의 일본은 한반도 및 중국 그리고 또한 남방의 여러 섬들과의 교류에 의해 이들 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발전의 기틀을 삼았다. 이러한 것이 집약된 체제가 이른바 律令制社会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 바로 큐슈이다. 그러나 이렇듯 활발한 외래문화 수용의 창구였던 이곳도 9세기 말 이른바 견당사(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폐지로 인해 대륙과의 공식적인 교통이 끊어지면서 시들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오랜 동안 세월을 지내며 나름대로의 길을 터 문화 교류가 이어졌으니, 이는 보이지 않는 민간레벨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의미이다. 중세 일본인의 고려 조선에 대한 인식은 무관심과 공포심으로 인한 무지와 독선적 이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중세기에 이르러 남해(南海), 류우큐(오끼나와)를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16세기에 큐슈를 둘러싼 국제환경의 변화는 나가사키라고 하는 새로운 창을 통해 큐슈를 또한 번 새롭게 탈바꿈을 시켰다. 그것은 바로 네덜란드 및 중국과의 무역이 행해 진 것인데, 이러한 것을 통해 새로운 외래문화가 유입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의 유입과 함께, 동아시아에 있어 구주사회의 특이한 존재로서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華橋사회가 형성되고 이들이 끼친 영향이 구주 여기저기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되풀이하지만 중세 큐슈지방의 문화교류는 주로 물자교환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당시 조선 측 입장에서는 왜구의 출몰로 피해가 심하긴 했지만 일본과의 관계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통신사, 회찰사 명목 등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대부분이 유능한 지식층으로서 대마를 통해 하카다(후쿠오카)로 상륙, 키타큐슈, 세토나이를 통해 에도까지 왕래하며 수준 높은 문화의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또한 큐슈의 여러 다이묘(大名)들에 의해 수용된 그리스도교는 큐슈인에게 또 다른 외래문화의 충격으로서 영향을 주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한 막부는 결국 탄압을 하기 시작, 1639년 행해진 포르트갈 선박의 내항금지는 약 100년간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교의 종말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나중에 일본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Ancient Japan paved the way for the development as an ancient country by accepting foreign culture positively through the cultural exchange with Korea, China and many southern islands. This is what we called the constitutional society. It is Kyushyu that was the region which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this society. However, the region which took in foreign cultures vigorously began to decline, because the official traffic with a continent was interrupted due to the abolition of dispatching envoys to Tang China late in the ninth century. Nevertheless, the cultural exchange continued for a long time and it means nongovernmental cultural exchange was open. Japanese recognition of Chosun was close to ignorance and selfrighteous understanding resulted from indifference and fear. However, the circumstances began to undergo a change by the expansion of territoriy to various areas such as the southern sea and Okinawa in the Middle Ages. In particular, the change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surrounding Kyushu in the sixteenth transformed Kyushu through Nagasaki. It is the new foreign culture that trade with China and the Netherlands brought through Nagasaki. With the inflow of the new culture, China town, a special exaneaence in Kyushyu, was formed, centering around Nagasaki and it influenced places in Kyushyu. Repeatedly speaking, the cultural exchange in Middle Age of Kyushyu was the barter system. At that time, Chosun felt the need for improving the relationship with Japan regardless of its frequent invasion. That is why Chosun Tongshinsa (조선통신사)and Hoichalsa(회찰사) were sent to Japan. Most of them who belonged to the intellectual class left high standard cultural traces while going through Hakada (Fukuoka), Tusima, Kita Kyushyu, Seto Inland Sea and Edo(Tokyo). In addition, the Christianity accepted by Daimyos(delegates) of Kyushyu had a impact on people in Kyushyu. The shogunate government began a suppression because of fear of the situation. The prohibition of a visit of a Portuguese fleet to Japan from 1639 had continued for about 100 years. As a result, Christianity came to the end. However the fatal series of event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Japanese modernization 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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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불교민속의 형성과 전개 - 蓮華化生의 문화사적 관점을 중심으로 -

        片茂永 동아시아고대학회 2013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30

        인도에서 네팔과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 이르는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연화화생 문양의 전파와 수용을 문화사적 관점과 불교민속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불교 발생 이전부터의 다문화 융합상황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문화사적 관점이 유효하였고, 불교발생 이후의 불교민속의 형성과 발전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불교민속학적 관점이 유효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연화화생을 한반도와 일본에 전했다는 측면도 있으나, 인도나 네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 힘들다. 즉, 중국은 인도와 한반도 사이에서 문화의 전달과 재생산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재생산에는 인도의 신화적 사상이 속화의 길을 걸으며 연화화생을 민속 레벨에 확산시켰다는 뜻이 담겨 있고,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고대 인도의 사상을 잘 보전하여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달했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상의 구도에만 입각했을 때 그렇다는 뜻이고, 도상에 담긴 의미에서는 중국에서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이르면서 희미해지거나 잊혀졌다는 사실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 문화 원형의 망각은 새로운 문화의 재활성으로 이어진다는 메를로·퐁티의 문화 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원류에서 멀어질수록 변형 또한 심해질 수 있다는 문화변형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한 셈이다. 문화사적 관점은 문화의 다양성을 거시적으로 고찰하면서 보편성과 원형에 소홀히 하지 않는 반면, 불교민속학에서는 문화사적 원형 탐구보다 지역마다의 토착화에 더욱 주목한다. 지금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불교민속론이 후자의 연구 자세였다는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이나 사례 중심형 탐구자세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전체적 관점 또한 경시할 수 없으니 그러기 위해 동아시아의 문화사적 관점은 불가결하였다. 여기서 알게 된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원형 문제란 연화화생이 결코 동북아시아나 불교라는 이제까지의 틀에 국한되는 문화 현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에 국한해서 보려는 인문과학적 착시현상이 유독 연화화생에 한정되는 일은 아니나, 연화화생은 이제까지의 문화적 배경을 넘어 인도의 불교이전이나 베다 사상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래서 불교민속학적 방법의 한계를 문화사적 관점이 보완해줄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열어주었다. 그러나 불교민속학적 방법으로 터득한 것도 적지 않은데 그것은 연화화생이 고대 인도의 신화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문화현상으로서의 연화화생은 지역마다 제각기 다른 토착화의 길을 걸으면서 원류의 망각과 더불어 민속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민속학적 관점과 조사방법으로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지역민속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이러한 토착화 현상들은 역으로 말해서 문화사적 관점을 통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나 지역 민속의 틀 속에 가두어버릴 우려도 배제하기 힘들었다. 지역의 민속이라도 관점을 달리한다면 아시아의 보편 문화로 승화 가능하다는 재발견이었다. 부분 현상들을 크게 하나로 엮어 보이는 이론 작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연화화생과 같은 불교 관련 다양한 문화현상이나 불교민속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불교민속학적 관점이나 방법과 더불어 동아시아나 아시아적 관점에서의 문화사적 방법이 동시에 강구되어야 한다. 불교민속학적 관점과 방법은 앞으로도 유효하되 구속되지 말아야 하며, 동아시아나 아시아적 관점에서의 문화사적 연구방법은 민속학의 외연을 증폭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I have looked into diffusion and acceptance of self-born on the lotus flower from a Buddhist folkloristic and cultural historic point of view through India, Nepal, China, Korea and Japan. It is because that I think cultural history is effective way to shed light on cultural convergence before Buddhism was arisen, and the other hand, Buddhist folklore is effective way to shed light on formation of Buddhist folklore after Buddhism was arisen. It seems to be related to the logical development of comparative Buddhist folklore. There is a theory that China has diffused self-born on the lotus flower to Korea and Japan, however, there is also a theory that China was influenced by India and Nepal. That is, China has carried out the roles of both delivery and reproduction. Speaking of reproduction, it means that Indian myth diffuses self-born on the lotus flower folkloric scale. Also, delivery means that Chinese Buddhism preserved Indian philosophy well and spread to Korean and Japanese Buddhism. The latter theory, however, makes sense only when it is based on structure of icons. It is hard to exclude the fact that deeper meanings of icons have faded out by way of China, Korea and Japan. According to Merleau-Ponti, a philosopher of France, the oblivion of cultural original form will be connected to the reproduction of new culture. The further culture is away from origin, the worse culture is transformed. The cultural historic viewpoint considers not only diversity of culture, but also universality of culture and the origin form. Buddhist folklore, on the other hand, considers the distinct characteristics of the area. The research methods of Korean and Japanese Buddhist folklore are based on the latter. Even though area study and case study are important, global viewpoint of East Asia has not to be minimized. To do that, cultural historic viewpoint and spatial trans-culture were indispensable. One thing that I learned from cultural historic point of view was that self-born on the lotus flower is never restricted to Northeast Asia or Buddhism. It is not the only humanistic illusion of restricting to East Asia, however, self-born on the lotus flower confirms that Indian philosophy before Buddhism was arisen and Vedic philosophy have to be considered. Besides, cultural historic perspective has the possibilities of compensating the defect of Buddhist folklore so far. Of course, there are some facts that I could know by Buddhist folklore, which is, self-born on the lotus flower treads the path of localization losing sight of origin and turning into the folk culture. It means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localizations of folk culture are always restricted to regional folklore. From a different view, however, there is a possibility that even regional folklore can be universal culture. There is also a theoretical possibility of weaving together the all parts of phenomenon into one. In conclusion, to analyze Buddhist cultural phenomenon, like a self-born on the lotus flower, both Buddhist folkloristic and cultural historic perspectives have to be considered. Buddhist folkloristic perspectives and methods will subsist now and for ever, but it has not to be tied down. Cultural historic research from Asian viewpoint will intensify extension of Folkl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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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加耶와 吉備의 교류 양상

        李永植 동아시아고대학회 2008 동아시아고대학 Vol.18 No.-

        본 논문은 고대의 키비(吉備)와 가야의 정치적 교섭과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가야계 도래문화의 몇 가지를 검토한 것이다. 키비와 가야의 정치적 교섭은 ‘吉備反乱伝承’이 전하는 야마토정권의 키비 통합을 전후로, 5세기 전반까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造山․作山古墳의 주인공이 가야와 독자적인 교섭을 추진하던 단계와, 키비의 외교교섭권이 야마토 정권에 흡수되는 5세기 후반 이후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欽明紀」에 任那日本府로 기록된 키비노오미(吉備臣) 등은 왜에서 가야에 파견되었던 사신으로, 5세기 후반 이후 야마토 정권에 의해 좌우되던 키비와 가야의 지역적 교섭을 보여주는 것이며, 「応神․雄略紀」에 보이는 韓계통, 특히 가야계 집단의 이주와 정착에 관한 전승 등은 그 이전의 인적 물적 교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가야계 도래문화의 흔적에 대해서는 고대의 지명 인명 씨족명, 키노죠(鬼ノ城)의 우라(溫羅)전승, 貨泉 鐵生産 부뚜막(竈) 등에 주목하였다.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고대의 지명 인명 씨족명에는 가야의 명칭 ‘가야’와 ‘아야’로 읽혀지는 것이 아주 많다. 가야 관련의 고고자료에 비추어 남는 자료만으로 키비와 가야의 교류사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서기 9년 중국의 新왕조가 주조했던 貨泉이 가야와 키비에서 출토되고 있다. 화천은 1~3세기경의 전기가야 시기에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김해의 구야국을 거쳐, 왜국에 이르는 바닷길을 통한 인간과 물자의 왕래를 보여주고 있다. 빗츄(備中)의 가야씨(加夜氏)와 빈고(備後)의 아나씨(穴)는 가야계 씨족으로, 8세기경까지 키비지역을 지배하던 씨족집단이었다. 특히 가야씨는 키비씨의 본가이기도 하였다. 이에 우리 학계에 소개된 바 없는 아시모리하치만신사(葦守八幡神社=葦守宮) 정문(鳥居)에 새겨진 명문을 제시하여, 14세기 중엽까지 가야씨가 키비 중심씨족의 하나였음을 밝혔다. 가야군(賀陽郡)군 중심에 존재하는 키노죠(鬼ノ城)에는 가락국(김해)의 건국신화와 흡사한 우라(溫羅)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변신하는 동물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쫓기는 세력(키비의 우라와 가야의 탈해)과 쫓는 세력(키비의 키비츠히코와 가야의 수로)의 대결구도와 변신의 패턴은 같은 꼴이다. 고대의 키비가 철의 선진지역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로, 그 시작에 철의 왕국 가야와의 인적 물적 교류가 중요한 전제로 되었음에 대해 목간과 일본서기와 같은 문자기록과 고고자료를 제시하여 논증하였다. 끝으로 키비에서 검출되는 5세기 중엽 이전의 부뚜막은 가야계 이주민의 사용과 신앙 활동의 흔적으로 판단하였다. 쏘우자시(總社市)의 오기야쿠시유적(窪木藥師遺跡)의 고정식 부뚜막은 三國志가 전하는 변진=전기가야의 부뚜막신앙과 통하는 것으로, 김해 부원동유적과 진주 평거동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것과 동일하고, 폐기의례에 사용되었던 鐵鋌과 鐵钃은 동래 복천동고분군 출토품과 같은 것이다. 김해 부원동유적에서는 부뚜막 근처에서 卜骨과 4세기 전반의 산인계(山陰系) 하지키(土師器)가 출토되고 있다. 가야의 부뚜막신앙과 키비에 인접한 산인지역과의 교류가 아울러 확인되고 있다. 가야인들이 부뚜막과 부뚜막신앙을 가지고 키비지역에 이주했던 흔적은 키비츠신사(吉備津神社)와 ‘가마솥님(お釜殿)’, 그리고 ‘울리는 부뚜막제사’에서도 확인된다. 키비츠신사에서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같은 변신경쟁의 주인공 키비츠히코(吉備津彦)가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우라(溫羅)의 머리는 숭배대상의 ‘가마솥님’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키비츠신사 역시 에도시대까지 가야씨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신사의 북쪽에는 지금도 카라천(辛=加羅川)이 흐르고 있어, 가야계 이주민들의 흔적으로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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