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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와 윤행임의 「대학장구 서문」 해석과 인물성동이 논쟁 : 『증전추록(曾傳秋錄)』 분석을 중심으로

        이원석(LEE Won-seok)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20 泰東古典硏究 Vol.44 No.-

        이 글은 『증전추록(曾傳秋錄)』을 주요 분석 텍스트로 삼아, 18세기 조선의 사상적 담론과 정치 문화가 정조와 윤행임의 『대학장구』 해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대학장구』의 해석에 있어 두 사람이 나눈 논의의 핵심 대상이 된 부분은 「대학장구 서문」에서 주희가 제시한 본성론이었다. 윤행임은 당대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에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지지하기 위한 증거를 「대학장구 서문」에서 찾고자 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이 처음부터 사람과 사물은 물론이요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본성을 부여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물성이론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윤행임의 이러한 강화된 ‘인물성이론’은 본성 사이의 동일성을 어디에서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윤행임은 각기 다른 기질의 본성에 본연의 측면이 있다고 여겼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이간(李柬)의 인물성동론(同論)과 유사했다. 정조는 한원진의 설을 비교적 충실하게 이어받아, 하늘이 사람과 사물에게 동일한 본연의 본성을 고르게 나누어 주었으나, 사물의 기가 치우쳐서 그것을 온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 사이에 본성적 차이가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의 측면에서 본성을 바라보아야 함을 강조하면서 리와 본성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 차이를 두면서도, 기질의 본성을 보편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로부터 기질의 본성과 리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정조는 주나라의 “오서(五瑞)” 제도를 비유로 활용하여, 다양한 본성의 척도이자 기준의 역할을 하는 ‘리’ 개념을 제시하고 그 대리자로서 군주인 자신의 역할을 부각했다. 이는 경서의 해석에 있어, 해석자가 놓여 있는 정치적 지평, 곧 정치적 문화가 경전 해석과 당대의 철학적 담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This paper, using Zengjeonchurok(曾傳秋錄) as the main analysis text, sought to examine how the 18th century Joseon s ideological discourses and political cultures influenced King Jeongjo(正祖) and Yoon Haeng-im(尹行恁) s interpretation of Daehakjanggu(大學章句). In the interpretation of Daehakjanggu, the core subject of the discussions between the two was the theory of nature presented by Zhu Xi in the preface of it. Yoon Haeng-im sought to find evidences in the preface to Daehakjanggu to support the claim that ‘human’s nature and object’s nature are different,’ and went a step further by claiming that ‘the Heaven had given different natures to human and things from the beginning.’ However, his arguments raises the question of where to secure the equality between nature. Therefore, Yoon Haeng-im considered that there was an original nature(本然之性) inherent in the each other s material natures(氣質之性), which resembled Lee Gan(李柬) s theory of human nature. King Jeongjo inherited Han Won-jin(韓元震) s theory and said that although heaven evenly distributed the same original nature to people and things, there was a differences between people’s and objects’ natures because they were not fully received due to their biased material forces(氣). Furthermore, King Jeongjo went a step further and regarded the original nature as material forces. He placed the existential hierarchy difference between Principle(理) and Nature(性), while showing the importance of the diversity of material natures(氣質之性) as it is. However, the question of how to integrate the various material natures can be raised. King Jeongjo used the Zhu Dynasty’s class system as a metaphor, presenting the concept of Li which serves as a measure of various nature and standard, and highlighting his role as the monarch and as Li’s agent. This is one interesting example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showing that the political horizon in which the interpreter lies, or political culture, influenced the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and the philosophical debate of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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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문의」를 통해 본 홍대용의 경학사상사적 의의 : 전통적 해석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해석 지평 마련

        조정은(JO Jungeun)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20 泰東古典硏究 Vol.44 No.-

        이 글은 「논어문의」를 분석하여 홍대용이 조선경학사상사에서 지니는 의의를 살핀다. 홍대용은 유가에서 받드는 인물들의 권위와 이들에 관한 주석의 권위에서 벗어나 『논어』를 이해했고, 그 권위에 균열을 내는 도구로 상식과 유가 이념을 취했다. 그동안 문제 삼을 수 없었던 대상을 문제 삼으면서 경문의 본래 뜻과 상관성이 약한 불필요한 논의에 경종을 울리고, 공자를 현실을 살아간 한 인간으로 되살려 내고, 유가의 성인을 높인다면서 오히려 유가 이념에 배치되는 논의로 귀결되는 폐단을 드러냈다. 이러한 홍대용의 비판 작업은 유학에 대한 반발이 아닌 오히려 유학이 그간 간과했던 유학의 본래 정신 즉, 현실에 근거해 마땅함을 평가해야 하고, 군신과 부자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정신을 환기시키는 작업이었다. 새로운 비판점에 선 시도였던 만큼 그 깊이는 부족했으나 홍대용의 경학사상사적 위치에서 깊이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논어문의」를 통해 살펴본 홍대용의 경학사상사적 의의는 유가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에서 경험적 상식과 유가 이념에 근거해 경문과 주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경학 흐름을 만들어 갈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assesses the significance of Hong Dae-yong in the history of thoughts on Confucian classics in Joseon by analyzing his “Noneo muni” (Inquiry on the Analects). Hong Dae-yong understands the Analects deviating from the authority of renowned Confucian figures and commentaries on them; he takes common sense and Confucian ideology as a tool to crack the authority. By addressing issues about the subjects that have not been taken as a problem, Hong raises the alarm about unnecessary discussions that has little to do with the original meaning of sentences in Confucian classics. In addition, he describes Confucius more vividly as a human being who lived in reality, and reveals the harmful effect of speaking too highly of Confucian sages that in the end runs counter to the spirit of Confucianism. Hong Dae-yong’s criticism is not an opposition to Confucianism, but on the contrary a reminder of the Confucian spirit: evaluation should be based on reality, and there should be no violation of the principles of ruler and subject, father and son. As his criticism is directed to new subjects, its depth is insufficient; however, it would be unjust to demand depth considering his historical position. In sum, the significance of Hong Dae-yong in the history of thoughts on Confucian classics can be found in that he prepared a bridgehead to open a new chapter in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by critically examining Confucian classics and commentaries on them, on the basis of common sense and Confucian ideology while not restricted by the authority of 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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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의 『논어질서』판본에 대한 일고

        김새미오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3 泰東古典硏究 Vol.30 No.-

        본고는 7종의『논어질서』를 중심으로 그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현재 성호 이익의 『논어질서』는 성호기념관에 2종, 국립중앙도서관에 2종(『성호질서』, 『칠경질서』), 한국국학진흥원에 2종(화경당본, 학사종택본),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1종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 성호기념관 2종이 가장 선본이며, 시대 적으로도 앞선 것을 확인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칠경질서』와 한국국학진흥화경당본, 학사종택본은 같은 계열의 『논어질서』로 판단된다. 이들의 필사 순서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논어질서 수고본)→ (논어질서 초본)→ 성호기념관본2종→ 칠경질서→ 화 경당본·학사종택본 국립중앙도서관『성호질서』와 서울대학교 규장각본은 그 체제가 다른 것과 는 현격하게 달라, 추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The paper examined characters and meanings of seven volumes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written by Seongho Yi Ik. Seongho Yi Ik’s Analects of Confucius is identified to be held by the following institutions: two volumes at the memorial hall of Seongho Yi Ik; two volumes at National Library of Korea; two volumes at Academy of Korean Studies; and one volume at Seoul National University’s Kyujangkak (Royal Library of Chosun Dynasty in a latter period). Of these, the two volumes obtained by the memorial hall of Seongho Yi Ik is identified the very first version in terms of its publication year. Those volumes held by National Library of Korea and Academy of Korean Studies are considered as a copy version. It is presumed that the seven volumes of Seongho Yi Ik’s Analects of Confucius was copied in handwriting in the following order of time: Original manuscript Analects of Confucius by Seongho Yi Ik; First draft of interpretation of Analects of Confucius; the two volumes held in the memorial hall of Seongho Yi Ik; one volume (haksajong taekbon) held in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volume obtained by National Library of Korea and the one by Seoul National University’s Royal Library differ significantly from other volumes in its styles; therefore a further study is necessary to define th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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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代 東아시아 任命文書의 性格 -7~10세기 동아시아 임명문서를 통한 통치 시스템의 비교분석-

        沈永煥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5 泰東古典硏究 Vol.35 No.-

        중국은 수당(隋唐)에 와서 진한(秦漢)이래 계속해서 발전해 온 고도의 통치법인 율령(律令)을 완성하였다. 이 율령은 곧 일본(日本)과 신라(新羅)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은 3성(三省)이라는 제도가 상징하듯이 문서를 기초하는 중서성(中書省), 문서를 심의하는 문하성(門下省), 문서를 시행하는 상서성(尙書省)으로 분명하게 분립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분립되었기 때문에 각각의 관부에서 각각의 관원들이 하는 임무도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일본은 태정관(太政官) 아래 8성(省)을 둔 구조이기 때문에 당과는 다르다. 천황(天皇)의 의지를 받아 문서를 기초하는 역할은 중무성(中務省)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무성은 이론적으로는 당의 중서성에 해당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당의 중서성은 재상의 관부이지만 중무성(正4位上)은 다른 7성(正4位下)보다 한 단계 위계가 높지만, 여전히 8성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서의 기초를 제외한 문서의 심의나 시행에 있어 모두 태정관이 관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려초 김부고신(金傅告身)은 문서의 내용은 책수(冊授)이지만 문서의 양식은 당의 칙수고신(勅授告身)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문서의 기초도 당이나 일본처럼 3관이 분화된 것이 아니라, 내의성(內議省)의 장관인 내의령(內議令) 1인이 총한림(摠翰林)을 겸대하고 작성하였다. 문서의 심의는 광평성(廣評省)의 장관인 시중(侍中) 1인이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서의 시행은 당시 중앙의 주요 관부인 광평성(廣評省), 내봉성(內奉省), 군부(軍部), 병부(兵部)의 장관과 차관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8세기에서 9세기를 거치면서 일본에서는 양로공식령(養老公式令) 칙수위기식(勅授位記式)에서 오위이상위기식(五位已上位記式)으로 문서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는 당시 내적으로는 영외관(令外官)의 설치로 대변되는 율령제도의 변질, 외적으로는 당의 국제적인 영향력의 약화를 반영한 통치 시스템의 변화였다. 신라는 애장왕(哀莊王) 6년(805)에 공식령(公式令) 20여 조의 반포를 통하여 당시 통치 시스템을 반영하였다고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신라시대의 임명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신라말의 공식령은 고려초 김부고신을 통하여 그 양식을 소급하여 추측할 수 있다. 곧, 당의 3성 6부제나 일본의 2관 8성제와는 달리 김부고신은 상위 관부의 합의를 통한 통치 시스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In China, the high governing law Yullyeong, which had been through continual advancement since the Qin and Han Dynasty was completed by the Sui and Tang Dynasty. This law gave great influence to Japan and Silla. The special feature of the system of Tang is that it is clearly separated into three ministries - Jungseoseong(中書省) which drafts the documents, Munhaseong(門下省) which reviews the documents, and Sangsaseong(尙書省) which puts the documents into effect, as the system referred to as ‘three ministries’ symbolizes. Since this kind of separation exists, there is also a clear division between the tasks carried out by each government officials of each of the ministries. Japan is different from Tang in the respect that its systematic structure is composed of eight ministries under the Taejeonggwan(太政官). This is because through taking into account the will of emperor of Japan, the Jungmuseong(中務省) which drafts the documents, is seperately established, This Jungmuseong may seem in theory to be categorized as Jungseoseong of Tang, but in fact it is different from it. This is because while Jungseoseong is the office for the prime minister of Tang, Jungmuseong is a step higher in authority compared to the other seven ministries but is yet still one of the eight government ministries. Therefore, it was shown that Taejeonggwan was involved in all the processes apart from the drafting of documents - such as the revision and enforcement of documents. The special feature of the contents of Kim Bu’s office warrant of the early Goryeo Dynasty is that it belongs to chinese chaeksu(冊授) in a meaning aspect, but belongs to chinese chiksu(勅授) in a formal aspect. Even the foundation of documents was not separated into three offices as in the case of Tang or Japan but a single person who has been appointed as Naeuiryung(內議令) of Naeuiseong(內議省) additionally served as Chonghanlim(摠翰林) and prepared it. It was shown that the revision of documents was carried out by the work of the single person who is the Sijung(侍中), the minister of Gwangpyeongseong(廣評省). It was revealed that the ministers and vice ministers of the center main offices such as Gwangpyeongseong(廣評省), Naebongseong(內奉省), Gunbu(軍部), and Byungbu(兵部) participated in the enforcement of documents. While going through the eighth and ninth century, a change of document occurred in Japan - from Yangrogongsignyeong(養老公式令) Chiksuwigisik(勅授位記式) to Owiisangwigisik(五位已上位記式). This was internally the alteration of Eullyeong system represented by the constitution of Yeongwegwan(令外官), and externally a change in ruling system taking into account the weakening of international influence of Tang. It is seen that the ruling system of that time was reflected in the proclamation of approximately 20 articles of Gongsignyeong(公式令) in the 6th year(805) of Aejang of Silla. However unfortunately, there are currently no appointment documents of Silla Dynasty left. The Gongsignyeong(公式令) of late Silla can be speculated by tracing back to material of early Goryou, Kim Bu's office warrant(金傅告身). That is, that Kim Bu's office warrant is shown to have been a ruling system carried out as a result of agreement among high offices in contrast to the Three Ministries-Six Departments system of Tang or Two Offices-Eight Ministries system of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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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의 논어질서 판본에 대한 일고

        김새미오(Kim Saemio)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3 泰東古典硏究 Vol.30 No.-

        본고는 7종의 논어질서를 중심으로 그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현재 성호 이익의 논어질서는 성호기념관에 2종, 국립중앙도서관에 2종(성호질 서, 칠경질서), 한국국학진흥원에 2종(화경당본, 학사종택본),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1종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 성호기념관 2종이 가장 선본이며, 시대 적으로도 앞선 것을 확인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칠경질서와 한국국학진흥원 화경당본, 학사종택본은 같은 계열의 논어질서로 판단된다. 이들의 필사 순서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논어질서 수고본)→ (논어질서 초본)→ 성호기념관본2종→ 칠경질서→ 화경당본·학사종택본 국립중앙도서관 성호질서와 서울대학교 규장각본은 그 체제가 다른 것과는 현격하게 달라, 추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The paper examined characters and meanings of seven volumes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written by Seongho Yi Ik. Seongho Yi Ik’s Analects of Confucius is identified to be held by the following institutions: two volumes at the memorial hall of Seongho Yi Ik; two volumes at National Library of Korea; two volumes at Academy of Korean Studies; and one volume at Seoul National University’s Kyujangkak (Royal Library of Chosun Dynasty in a latter period). Of these, the two volumes obtained by the memorial hall of Seongho Yi Ik is identified the very first version in terms of its publication year. Those volumes held by National Library of Korea and Academy of Korean Studies are considered as a copy version. It is presumed that the seven volumes of Seongho Yi Ik’s Analects of Confucius was copied in handwriting in the following order of time: Original manuscript Analects of Confucius by Seongho Yi Ik; First draft of interpretation of Analects of Confucius; the two volumes held in the memorial hall of Seongho Yi Ik; one volume (haksajong taekbon) held in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volume obtained by National Library of Korea and the one by Seoul National University’s Royal Library differ significantly from other volumes in its styles; therefore a further study is necessary to define th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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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정심(正心)장>에 대한 이황과 박세채의 해석

        이원석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9 泰東古典硏究 Vol.42 No.-

        원대 주자학자 호병문(胡炳文)은 『대학장구』 제7장인 ‘정심장’의 “부득기정(不得其正)”에 대해 ‘마음에 분노, 두려움, 쾌락, 걱정 등의 감정이 일어나면 바름을 얻지 못한다’에 대해, ‘특정 감정에 얽매이면 마음 본체가 상실된다’라고 해석했다. 이와 달리 주공유(朱公儒)는 ‘감정이 일어나면 마음의 작용이 바름을 얻지 못한다’라고 해석했다. 호병문은 특정 감정에 얽매일 경우 마음 본체의 상실을 야기한다고 보아 마음 본체의 온존에 방점을 찍는 수양론을 펼친 반면, 주공유는 마음의 작용인 감정의 발생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다만 그것을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수양론을 지지한 것이다. 후대의 나흠순(羅欽順)은 호병문을 지지했고 정약용(程若庸)은 주공유를 지지했다. 이황(李滉)은 이들 중 주공유와 정약용의 해석을 채택했지만, 이들의 해석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로지 작용의 측면에서만 마음을 이해하여 마음의 주재자적 지위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이황은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황은 마음이 작용할 때 그 작용을 적절히 제어함과 아울러, 마음이 작용하지 않을 때 그것을 온전히 보존함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박세채는 초기에는 이황의 해석을 지지하였으나, 제7장의 해당 구절을 ‘마음 본체로부터 감정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절제하지 않으면 마음의 작용이 바름을 얻지 못하고 그 결과 마음 본체가 상실된다’고 해석했다. 그는 마음 작용의 절제를 통해 마음 본체가 상실되지 않게끔 하는 실천론을 구상한 것인데, 이는 주공유와 호병문의 해석을 종합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세필은 바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을 배태한 마음 본체 역시 바르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했고, 이에 대해 박세채는 마음 본체는 바른 것이되 다만 그 작용이 바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을 그대로 고수했다. 이렇듯 『대학』의 ‘정심장’에 대해 이황, 박세채, 그리고 이세필이 제시한 새로운 논점은 동아시아 경학사의 다원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것이었다. Hu Bing-wen(胡炳文), a scholar in Yuan Dynasty, interpreted the passage “心有所忿懥, 則不得其正” from chapter 7 of the Daxuezhangju(『大學章句』) as “Emotions vanish the true nature of the mind.” On the contrary, Zhou Gong-yu(朱公儒) interpreted it as “Emotions prevent the mind from working properly.” Hu put forward a theory of practice that refrains from the occurrence of emotions because he believed that the occurrence of emotions caused the true nature of the mind, while Zhu supported the idea that the function of the mind, the generation of emotions, is natural and that it is important to control them. In later times, Luo Qin-shun(羅欽順) supported Hu, but Cheng Ruo-yong(程若庸) supported Zhou. Lee Hwang(李滉) adopted the idea of Zhou and Cheng, but He did not fully accept their interpretation. For he judged that they had defined the mind only from the aspect of function, so they made a mistake of overlooking the host status of the mind. Lee insisted that it is also important to preserve it completely when the mind is not functioning, in addition to properly controlling the function of the mind when it is working. Park Se-chae(朴世采) initially supported Lee’s interpretation, but later interpreted that phrase from chapter7 of Daxuezhangju as “When emotions emerge from the substance of mind, the function of the mind does not become correct, resulting in the loss of the substance of mind.” He conceived the theory of practice that one can recover the substance of the mind through the control of the mind’s function, which could be regarded as synthesizing the interpretation of Hu and Zhou. But Lee Se-pil(李世弼) raised an important question about whether substance of mind, which was born out of the wrong function, also could have the wrong elements in itself. From the above discussion, we could say that the new issues presented by Lee Hwang, Park Se-chae and Lee Se-pil on the interpretation of chapter7 of Daxuezhangju contributed to expanding the plural dimensions of East Asi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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