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해남 윤씨 설화의 기호적 의미와 전승집단의 인식

        표인주 ( Pyo In-joo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8 호남학 Vol.0 No.63

        해남 윤씨 설화 형성의 물리적 배경으로 기본적으로 설화 전승집단의 농경민적 생활이 기반이 되었고, 이야기의 대상인 되었던 해남 윤씨 집안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남 윤씨 집안은 한 마디로 중앙 지향의 관료를 배출하고 재지사족으로서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있고, 지역민과의 가부장적 관계를 통해 경제적 능력을 갖춘 가계이다. 이러한 물리적 기반이 해남을 비롯한 인근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해남 윤씨 설화는 13편으로 전라도 지역에 전승되고, 해남 인근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설화의 서사적 화두가 화소와 서사구조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서사의미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서사적 화두에 착안하여 설화를 분류했다. ①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의 유형으로는 3편이 있고, ② [어떻게 벼슬을 할 것인가?]의 유형으로 6편, ③ [어떻게 명당자리를 얻을 것인가?]의 유형으로 1편, ④ [어떻게 장수할 것인가?]의 유형으로 1편, 기타 2편이 있다. 해남 윤씨 설화의 서사구조를 통해 서사의미를 파악하고 이것을 토대로 기호적 의미를 파악했다. 기호적 의미는 설화 주인공이 변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①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 유형으로서 <해남 연동 윤씨>설화의 기호적 의미는‘주인공의 착한 삶’이고, ② [어떻게 벼슬을 할 것인가?] 유형인 <해남 윤씨 중시조>설화의 기호적 의미가 ‘주인공의 지혜로움으로 어려운 난관 극복’이며, ③ [어떻게 명당자리를 얻을 것인가?] 유형인 <윤고산의 신위지지>설화의 기호적 의미는 ‘강자의 속임수’이다. 마지막으로 ④ [어떻게 장수할 것인가?] 유형의 <판소리 명창으로 출세한 사람>설화의 기호적인 의미는 ‘운명의 적극적인 극복 의지’이다. 이러한 기호적 의미가 해남 윤씨 설화에 나타난 주인공이 변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남 윤씨 설화의 원초적 근원과 전승집단의 인식을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해남 연동 윤씨>설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물리적 기반은 해남 윤씨의 경제적인 배경이고, 설화 전승집단은 해남 윤씨가 재복이 있어서 부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주인공이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두 번째로 <해남 윤씨 중시조>설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물리적 기반은 중앙의 관직을 향한 정치적 진출이고, 설화 전승집단은 해남 윤씨가 인복이 있어서 벼슬을 한 것으로 인식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주인공의 지혜로움으로 벼슬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윤고산의 신위지지>설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물리적 기반은 해남 윤씨 집안의 입양 사례이고, 설화의 전승집단은 주인공이 수복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그 이면에는 주인공이 운명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의지로 인해 과거급제 하여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판소리 명창으로 출세한 사람>설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물리적 기반은 윤선도의 정치적 위상이고, 설화의 전승집단은 기본적으로 관복을 가지고 있는 윤선도가 묏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윤선도의 속임수가 합리화되어 있다. 지금까지 해남 윤씨 설화의 물리적 관계와 전승집단의 인식을 살펴보았지만 설화의 계보관계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먼저 형성된 설화가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 유형의 설화이고, 그것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 [어떻게 벼슬을 할 것인가?] 유형의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의 설화가 바탕이 되어 [어떻게 장수할 것인가?] 유형의 설화로, 혹은 [어떻게 명당자리를 얻을 것인가?] 유형의 설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The Tale of The Haenam Yoon clan is physically based on the agriculture lifestyle, and the economic and the political basis of the subject of the clan tale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forming the tales. 13 tales of the Haenam Yoon clan has been transmitted in the Jeonlla region, and has been intensively distributed in the Haenam area. The symbolic meaning of the tales are “The good life of the protagonist”, “The wise protagonist overcoming difficulties”, “The deception of the strong person”, “The active will to overcome destiny” and etc. The first tale formed among the tales of the Haenam Yoon clan were the type of “how to become rich” tale and “how to take up a public office”, which was based on it. It can also be inferred that two types of tales also formed the basis for tales on “how to live a long life”, or “how to get the auspicious location.”

      • KCI등재

        明淸 地方志 자료를 통해 본 漢族 연극 문화의 海南 전파

        오수경,정소문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22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90 No.-

        Through the study on <WuLunQuanBei-Ji(五倫全備記)> by Qiu Jun(丘濬), I got to the sense that there should be pretty matured theatre tradition in Hainan(海南) in 15th century of Early Ming Period. Because if he had not contacted Nanxi(南戲) in his early age, he could not write the Nanxi play in his thirty. I tried to research how the theatre of Hainan was grown up through tracing the spreading of Chinese theatre of Song and Yuan period through the records of local history(地方誌) of Ming and Qing around the Hainan province. Though the materials are not sufficient, but very precious to understand the situation of Hainan of early Ming period. As it is known that the origin of Hainan theatre is the puppet troupe of Yuan dynasty, but I found that three route of formation of Hainan theatre. Mainly the Chinese Confucious culture began to reach to Hainan in Tang Song Period through the exiled literati. From the end of Song dynasty and in whole Yuan dynasty, Army brought the theatre of northern China. During Ming and Qing Dynasty, pretty much immigrant from Fujian(福建) and Guangdong(廣東) province moved into Hainan, mainly for business and trade. Through these routes, the various theatre including Song zaju(雜劇), especially Wudui(舞隊), Yuan zaju, and Nanxi, especially ‘MinGuang-ju(閩廣劇)’, enter Hainan island and formed the local theatre(土戲) of Hainan. On the base, the local theatre including the Qiongju(瓊劇) was formed in Qing period. 해남 출신 작가이자 대학자인 구준이 1450년에 남희 <오륜전비기>를 창작하였다는 사실은, 15세기 이전부터 해남 지역에 풍부한 연극 문화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어려서부터 남희를 접하지 않았다면 30세에 그러한 희곡을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해남의 연극 문화 형성 양상을 살필 필요를 느꼈다. 본문에서는 주로 해남 광동 지역 지방지를 통해 한족 지역 연극의 해남 전파 양상을 살피고자 한다. 지금까지 해남 지역의 연극은 흔히 원대 潮州에서 온 인형극단(傀儡戲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후 명대의 잡극이 수용되었으나 그 시간은 비교적 늦은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남방 소수민족인 黎族 지역으로 일찍부터 가무가 즐겨지던 곳이며, 송원대부터는 한족 지역과의 빈번한 왕래와 함께 군대와 이민을 통한 문화 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청 지방지에 언급된 해남의 공연문화는 훨씬 더 풍부하다. 이러한 문헌 자료들을 통해 宋元 이래 중원 연극이 몇 가지 경로를 통해 해남으로 전파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비교적 분명한 세 가지 경로의 맥을 짚어보는 데 본문의 목적이 있다. 첫째는 춘절을 비롯한 명절 기간에 행했던 다양한 가무와 “僧、道、獅、鮑老” 등의 분장 행렬로 구성된 송 잡극과 舞隊의 형태이다. 둘째는 중원 지역에서 온 군대가 장기 주둔하면서 연행한 북방의 雜劇故事다. 셋째는 閩南과 潮州 지역의 이민들이 가져온 “閩廣劇”으로, 민남 방언을 사용하여 연창되는 남희다. 이러한 연극 형식들은 명대에 이미 해남에서 관찰된 것들로, 그 후 해남의 土戲로 자리잡았으며, 근대에 와서는 瓊劇이 대표 지방극종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다양한 극종들은 지금까지도 冼夫人 신앙, 關羽 신앙, 媽祖 신앙 등의 제의적 환경 속에서 전승되면서 해남 연극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남희와 잡극의 전파가 해남에까지 이르렀음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중국연극사의 확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 KCI등재

        한국전쟁 전후 해남군에서의 민간인 학살

        박찬승 한국구술사학회 2012 구술사연구 Vol.3 No.1

        한국전쟁기 해남군에서는 인근의 강진, 완도에 비해 학살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더 많이 발생했다.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그 이유는 무 엇일까. 해방 직후 해남군에서도 다른 군과 마찬가지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만들 어졌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시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해온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 나 미군이 들어오면서 이들은 체포되거나 수배되었고, 미군정에 의해 우익세력이 군청과 경찰서를 장악하였다. 이에 반발한 좌익세력은 1946년 11월 대규모 군중봉기를 일으켰 다. 해남군의 군중봉기는 같은 시기 전라남도에서 발생한 군중봉기 중 가장 격렬한 것이 었다. 미군정과 경찰은 이 봉기에 참여한 이들을 체포하였으며, 도피하여 입산한 이들을 토벌하였다. 이후 보도연맹이 만들어졌을 때, 경찰은 11월 봉기 참여자들을 강제로 가입 시켰으며, 그 수는 6백여 명을 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갈매기섬과 해창리로 끌고 가 서 사살하였다.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명 이상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해남경찰 서의 경찰들이 후퇴한 뒤 나주 경찰이 해남에 들어왔다. 나주 경찰은 인민군처럼 행세하 면서 몇몇 마을에 들어가, 인민군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을 사살하였다. 이 일로 희생된 민간인은 55명에 달하였다. 나주부대가 완도로 들어간 뒤, 이번에는 인민군이 해남에 들 어왔다. 인민군은 인민위원회와 각종 좌익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을 동원하여 경찰 가 족과 우익 관계자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를 살해하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서 확인한 우익 관계자 희생자는 37명인데,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10월 초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이에 협력한 이들도 함께 입산한 경우가 많 았다. 경찰과 대한청년단은 마을에 남아 있던 부역혐의자와 그들의 가족을 대거 잡아들였 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를 재판 없이 처형하였다. 해남군 유족회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좌익측 희생자가 약 1800명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에 당시 경찰에 근무했던 이는 한국전쟁기 좌우익 희생자를 합쳐서 7백 명 정도 된다고 보고 있다. 실제 숫자는 아마도 그 사이에 있을 것 같다. 해남군에서 이와 같이 많은 희생자가 난 것은 1930년대 전남운동협의회의 산하 농민 조합 조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해방 이후 해남군의 좌익세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그 결과 1946년 11월 봉기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고, 이로 인해 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KCI등재

        해남 지역 문화유산 보존과 활용 - 고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

        정재윤 백제학회 2018 백제학보 Vol.0 No.26

        This study aims to examine measures for the preservation and utilization of cultural heritage in the Region of Haenam, focusing on the ancient cultural heritage. The ancient cultural relics in the Haenam area are divided broadly into four areas, including Hyeonsan-cheon, Samsan-cheon, Ochon-cheon areas, and Doam bay area in Bugil-myeon. The representative ruins are Gungokri Shell Mound, and as the owners of the tombs were proven to be the powers related to the exchange mediated by the streams and rivers, the potent powers in the ancient Haenam area grew up with the exchange as their background. Next, in literature, Gungokri Shell Mound in Haenam is most likely to be of Sinunsinguk which was the potent main country of Mahan. The Haenam area is mentioned as the location of Sinmiguk, but it can be presumed enough that the Haenam area which was an exchange base is related to that. Like this, the Haenam area was the main base of exchanges so that Sinunsinguk and The countries of Sinmi were mentioned. Cultural heritage in ancient Haenam is characterized by its clear traces of exchanges through sea routes. In fact, through the literature, it is found out that the Haenam area was the base of exchanges. It was never a coincidence that Usuyeong was installed to defend the sea routes for future generations, and famous mountain temples like Daeheung-sa and Mihwang-sa are located there. The utilization of cultural heritage in Haenam made some achievement through storytelling utilizing cultural heritage and natural landscape and the development of Dulle-gil Trail. However, the lack of the preservation and utilization of the ancient cultural heritage, the starting post, which formed the frame of cultural heritage in Haenam leaves something to be desired. In addition, only visible things are listed in parallel, so temporal and spatial discrimination and integration are also necessary. The ancient cultural heritage, the root of Haenam culture, is mostly guide-boards and little utilized. Thus, it is necessary to identify the main bases of exchange, Sinunsinguk and SThe countries of Sinmi, and efforts to find the related ancient ruins should be made in parallel.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connect virtual reality and augmented reality that can maximize the utilization with ruins, and building a symbolized object and installing of gates may also be good measures. 필자는 이제까지 고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해남반도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해남의 고대 문화유산은 해남 지역 문화의 골격을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며, 이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본문을 요약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해남 지역의 고대 문화유적은 크게 4권역으로 나뉜다. 먼저, 백포만 일대는 현산천을 중심으로 군곡리패총과 안호리-석호리 유적, 황산리 분토유적, 월송리 조산고분이 알려져 있다. 이들 고분의 위치와 출토 유물을 볼 때 모두 교류와 관련된 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남만 일대는 삼산천을 중심으로 신금유적, 용두리고분이 주목된다. 이들 유적 역시 왜계 무덤이거나 출토 유물이 교류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양상이다. 옥천천 일대의 만의총 고분군 역시 영암호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지역이 구분되지만 이 또한 교류와 관련있는 세력이었다. 북일면 도암만 일대도 장고봉고분과 외도고분과 신월리고분 등 왜계 무덤이거나 왜계 유물이 출토되어 교류와 관련된 세력임이 입증된다. 따라서 고대 해남 지역의 유력한 세력들은 교류를 배경으로 성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문헌에서 보이는 고대 해남 지역의 실체로는 신운신국과 신미국을 주목할 수 있다. 신운신국은 목지국과 함께 특별한 칭호를 더하는 나라로 위상이 높았다.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교통로의 중심에 있어야 하고, 시기적으로도 1~3세기 경, 고고학적 실체가 드러나야 한다는 점에서 신운신국은 해남 지역이 가장 유력함을 알 수 있었다. 신미국은 영암 지역 외에도 해남 북일면과 현산면이 거론될 정도로 해남 지역과도 관련이 있다.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20여 나라를 거느릴 정도의 통합 세력이며, 교역로의 거점을 장악한 세력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운신국 단계와는 차이가 난다. 이처럼 해남 지역은 신운신국과 신미국이 거론될 정도로 교류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남 문화유산의 특징은 전방후원형분과 조개팔찌, 화천 등 바닷길을 통한 교류의 흔적을 분명하게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三國志』 倭傳과 『日本書紀』를 통해서 해남 지역이 교류의 거점이라는 점은 확인된다. 또한 산을 따라 바다가 두르고 있다는 기술처럼 명산과 산사, 둘레길도 그 특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되어 바닷길을 방어하기 위한 우수영의 설치와 대흥사·미황사 등의 명산이 위치한 것도 결코 우연히 아닐 것이다. 해남의 문화유산 활용은 크게 땅끝권관광지와 두륜산권관광지, 우수영권관광지로 나뉘고 있다. 이들 현황을 살펴보면 문화유산과 자연경관을 잘 활용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둘레길의 개발을 통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남 문화유산의 골격을 형성한 출발점인 고대문화 유산에 대한 보존과 활용이 미흡한 것은 아쉽다. 현재의 활용 또한 가시적인 것만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있어 시·공간적 차별과 융합이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고대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과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 하겠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상호의존적이 될 수 있다. 보존의 가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활용의 가치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 최근 금강산성과 전라우수영 등 문화유적에 대한 보존과 활용에 대한 ...

      • KCI등재

        해남반도권 지석묘의 등장과 확산과정

        조진선 호남고고학회 2022 湖南考古學報 Vol.71 No.-

        해남반도는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하며, 해남만과 월출산에 의해 영산강유역과 구분된다. 필자는 해남반도권을 14개 소 지구로 구분해서 지석묘 분포밀도를 살펴 보았는데, 분포밀도가 높은 지구(a·b등급), 낮은 지구(c·d등급), 지석묘가 없는 지구로 나누어진다. 지석묘 분포밀도가 높은 지역은 북동부의 성전·강진-도암(북) 지구에서 해남반도 중부를 거쳐 서남부에 있는 화산·현산-송지(북) 지구로 이어진다. 이를 벗어난 지역은 분포밀도가 낮거나 지석묘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해남반도권 지석묘의 분포밀도 등급선을 작성해 보면, A등급선은 성전→계곡→마산→산이 지구와 강진-도암(북)→옥천→해남-삼산→화산 및 현산-송지(북) 지구로 이어진다. B등급선은 북서부의 화원반도와 남동부의 강진만 서안지역으로 이어진다. 해남반도 남단의 북평지구와 송지(남)지구에서는 아직까지 지석묘가 확인되지 않았다. 해남반도권과 탐진강유역권을 함께 살펴보면, 이 지역에서 지석묘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갈수록 분포밀도가 낮아진다. 또한, 탐진강 상류 지역은 Ⅰ기부터, 탐진강 중류~해남반도 동북부 지역은 Ⅲ기부터, 해남반도 중부와 서남부 지역은 Ⅳ기부터 지석묘가 조영되기 시작한다. 이는 지석묘가 탐진강 상류 지역부터 점차 해남반도 쪽으로 확산된 것을 나타낸다. 광주·전남지역 지석묘에서는 Ⅲ기부터 세형동검-점토대토기문화 유물들이 확인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해남반도권 지석묘의 상한연대는 기원전 3세기를 크게 상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 보아, 해남반도권에서 지석묘가 가장 활발하게 조영되는 시기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전후경까지이며, 기원후 1~2세기에도 지석묘가 조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KCI등재후보

        해남굿의 장단 구성과 무속문화권적 특징

        김혜정 국립국악원 2013 국악원논문집 Vol.28 No.-

        This article focuses on Haenamgut(shaman ritual), which has not been studied yet, and attempts to examine its musical features and characteristics of its cultural area through the comparison with sigimgut of other regions. Objects for comparison are limited to gut from regions close to Haenam such as Jindo, Shinan, Youngam, Goheung, Hwasun, and Sunchun. The following are the summary of the results of discussion. Firstly, Haenam has its own distinctive features. The following facts are distinctive to Haenam gut: that Ogugut precedes Jesukgut; that it caters for all the house gods but Sonnimgut; that it uses the titles of Pansori rhythm and does not use irregular beat at all; and that it uses Jungtayrung of Jinyangjo in Jesukgut. The fact that Ogugut precedes Jesukgut gives the impression that the whole gut is performed for the deceased and reduces the impression of luck gut. In addition, Sangyeosori is not used at all in Ogugut and Gildakum, a common feature among Haenam shamans. Secondly, There are some features in Haenamgut which are related to the eastern regions such as Youngam, Goheung, and etc. The following facts are identical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eastern region such as Youngam and Goheung: that there are gutguri for house gods such as Sungjugut and Jiwanggut; that it uses the title Sunburi rather than Chogamangsuk; and that it uses 3 small beat Jungmori. Thirdly, There are some hints of characteristics of the western region in Hanam gut. It has Jinyangjo rhythmic structure, and it uses only 4+2 structure and not 3+3, and finally it uses Jungjungmori, making it very similar to the Southwestern part of Jeonnam. However, the fact that it has relatively less relation to the western region may be that gut of nearby Jindo is designated as a cultural asset and went through a lot of changes. Haenam has unique structure of gut. In a larger sense, it belongs to the same regional zone with Youngam and Wando and shares a lot of features with the eastern and the western region of Jeonnam. It is oriented toward more sophisticated and elegant style of music and recognizes the order of gut systematically. 이 글에서는 그동안 연구되지 않았던 해남굿을 대상으로 타 지역 씻김굿과의 비교를 통해 음악적 특성과 문화권적 특징을 점검해 보려 한다. 해남굿의 세습무로는 함화자, 김춘심, 안애임의 세 사람을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비교할 대상은 해남 주변 지역인 진도, 신안, 영암, 고흥, 화순, 순천 등의 굿에 한정하였다. 논의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남의 독자적인 특성이 있다. 해남굿에서 오구굿이 제석굿보다 먼저 연행되는 점, 손님굿을 하지 않지만 다른 가택신은 모두 챙겨 연행하는 점, 판소리 장단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불규칙 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점, 제석굿에서 진양조의 중타령을 부르는 점 등은 해남굿 만의 특성이다. 오구굿이 제석굿에 앞서 있는 점은 굿 전체를 망자를 위해 진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장점이 있어 제석굿이 주는 재수굿적인 느낌을 감소시켜준다. 또 오구굿이나 길닦음에 상여소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 역시 해남 무녀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해남굿에 영암, 고흥 등 동부 지역과의 연계되는 특성이 있다. 성주굿과 지왕굿 등의 가택신을 위한 굿거리가 있는 점, 초가망석보다 선부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점, 3소박 중모리를 사용하는 점 등은 영암이나 고흥 등 동부 지역의 특성과 같다. 악곡 구성에 있어서도 영암굿과의 유사성이 더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해남굿에는 서부지역의 특성도 약간 드러난다. 진양조 장단에 3+3의 구조가 없고 4+2의 구조만 사용한다는 점, 중중모리를 사용하는 점은 전남 서남부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부 지역과의 연계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인접한 진도의 굿이 문화재 지정으로 인해 이미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해남은 독자적인 굿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크게 보아서는 영암이나 완도와 같은 지역권으로서 전남 동부와 서부의 특성을 골고루 갖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 해남만의 특성에서는 대부분 좀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악을 지향하고 굿의 질서를 정연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KCI등재

        해남 땅끝 마을의 관광가치 극대화를 위한 마케팅 방안

        이웅규,구정대 동북아관광학회 2022 동북아관광연구 Vol.18 No.1

        본 연구는 전남 해남만이 지닌 특별한 자연 및 문화관광자원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남만이 지닌 ‘땅끝 마을’이라는 독특한 지역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명소화하여 관광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해남지역의 경제 활성화와 더불어 지역발전을 꾀하는 일거양득의 관광마케팅 전략을 추진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된 전남 해남의 ‘땅끝 마을’의 지역정체성을 계속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해남 ‘땅끝 마을’의 관광가치를 극대화하여 관광객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관광지를 새롭게 창조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지자체와 지역주민들의 합의뿐만 아니라 외래 관광객에 의한 사회적 지지에 의해 나온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해남 ‘땅끝 마을’의 장소성과 고유성만이 지역의 주민 및 외래 관광객들이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를 통해 본 연구가 도출한 해남 '땅끝 마을'의 관광가치 극대화 방안은 첫째, 세계 땅끝 마을 박물관 조성, 둘째, 해남군 관광종합발전계획과 연계한 해남 땅끝관광 활성화, 셋째, 치유 개념 등을 도입한 해남 '땅끝 마을' 이미지 극대화 추진, 넷째, 한반도 “땅끝” 이미지를 부각하여 남북평화 시대의 상징적 장소로 패러다임 변화의 시도 등을 제시하였다.

      • KCI등재

        고려시대 해남청자의 생산과 운송

        한정훈 한국중세고고학회 2023 한국중세고고학 Vol.- No.14

        이 연구는 고려시대 해남지역에서 생산한 청자의 운송과 유통에 관한 것이다. 먼저 Ⅱ장에서는 해남청자 생산을 소(所)체제에 연결하여 세종실록지리지 해진군(海珍郡) 기록에 전하는 5개 소(所) 중 1~2개 소가 산이면 진산리 일대에 있던 자기소(磁器所)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어서 Ⅲ장에서는 해남청자의 유통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육상과 해저 유적에서 발굴한 해남청자의 현황을 검토하였다. 특히 다량의 해남청자를 선적한 침몰선 세 척(완도선·십이동파도선·마도1호선)에 집중하여 해남청자의 운송 양상에 관해 알아보았다. 필자는 선행의 연구보다 해남청자를 비롯한 청자의 운송과 조운(漕運) 시스템과의 관계를 조금은 유연하게 바라보고자 한다. 사적인 거래뿐 아니라 공납 자기라 하더라도 운송량 등의 여러 조건에 따라 인근의 조창(漕倉)인 장흥창(영암)을 경유하지 않고 소비지로 바로 운반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완도선’이었다. ‘완도선’·‘십이동파도선’의 경우와 같이 대규모의 해남청자를 선적·출항하는 경우는 운송의 편리를 고려하여 ‘덕진(德津)’·‘입암포(笠巖浦)’와 같이 청자 가마에 인접한 포구를 이용하였다. 그에 반해 ‘마도1호선’의 경우처럼 소량의 해남청자를 운송하는 경우는 해남지역의 포구보다 인근 조창과 같이 교통입지가 양호한 포구에서 출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carriage and distribution of celadons produced in the Heanam province during the Goryeo period. At first, chapter II presumed that about one or two So(所)s among five So(所)s shown in the Haejingun(海珍郡) record of Geography Section of the Annals of King Sejong might be Jagiso(磁器所) located around Jinsan-ri, Sani-myeon, by connecting the production of Heanam celadons to the So(所) system. Then, chapter Ⅲ investigated the conditions of Heanam celadons discovered from land and submarine sites, to verify the distribution range of them. In particular, it examined the transportation pattern of Heanam celadons by focusing on three sunken ships(Wando Ship, Sibidongpado Ship and Mado Ship No.1) loaded with a lot of them. This study had a more flexible view on the relation between the carriage of celadons including Heanam celadons with carriage by sea(漕運) system, compared to previous studies. Not only private trade, but also ceramics for tribute were sometimes directly carried to consumption sites, without passing through Jangheungchang (Yeong-am), a nearby tribute granary(漕倉), according to many conditions including the carriage amount. The representative case was ’Wando Ship’. Then, where were the ports from which Heanam celadons were departed, except for the nearby tribute granarys(漕倉)? Some ports near the kilns for celdons, such as ‘Deokjin(德津)’ and ‘Ipampo(笠巖浦)’ were used, given the convenience of carriage, when a large amount of Heanam celadons were loaded or departed, as in the case of ‘Wando Ship’ or ‘Sibidongpado Ship’. On the other hand, a small amount of Heanam celadons might be carried to some ports with better traffic conditions, such as nearby tribute granarys, rather than to those located at the Heanam province, as in the case of ‘Mado Ship No.1’.

      • KCI등재

        《해남잡저(海南雜著)》〈창명기험(滄溟記險)〉 번역과 해제

        安哉姸(번역자) 중국어문논역학회 2020 中國語文論譯叢刊 Vol.0 No.47

        본 논문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19세기 중국 민간 표해록, 《해남잡저(海南雜著)》를 소개하고 첫 장 <창명기험(滄溟記險)>을 번역함을 목표로 한다. 근대 아시아의 민간 표해록은 중국의 ‘당안(榶案)’이나 조선의 《비변사등록》등으로 대표되는 공적 기록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지기는 하나, 표류와 송환의 과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해 왔다. 또한 아시아 각국의 민간풍습에 관한 기록은 물론 지리와 생업, 군사, 행정, 정치 등에 대한 기록도 담고 있어 해양을 통한 문화 교류의 한 축이자 민속학적 사료로도 가치가 매우 높다. 해제에서는 《해남잡저》의 저자 채정란(蔡廷蘭)의 생애, 총 4종의 판본과 다수의 외국어 번역본, 줄거리 등을 간략히 소개하고, 본문 세 편 <창명기험>, <염황기정(炎荒記程)>, <월남기략(越南記略)>의 주요 내용 분석을 시도하였다. 덧붙여 간단히 《해남잡저》의미와 문화적 가치, 그리고 한계를 언급하였다. 뒤이어 세 편 중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창명기험>을 번역하였다. This paper aims to introduce the 19th century Chinese record of drifting, Hainan zazhu(海南雜著) and translate its first chapter, “Changming jixian (Records of hard experiences in the blue sea).” The so-called private records of drifting have been denigrated less reliable than the official records represented by the “government records (榶案)” of China or Records of the Border Defense Council (備邊司謄錄) of Choseon dynasty. Yet recently they are valued as a source of literary imagination through vivid descriptions of drifting and repprocesses. Moreover, they contain records on civilian customs of the land where the drifters arrived as well as geography, business, military, administration, politics, and history. They also work as an evidence of cultural exchanges via the ocean, not to mention very valuable record of folklore and anthropology. First of all, I briefly introduce the life of Cai Tinglan (蔡廷蘭), the author, followed by explanation of four versions of the manuscripts, translations of many foreign languages, and the main plot. On the one hand, this paper focuses on the meaning and cultural value of this record which wrote the personal drifting experience from Taiwan to Vietnam in 10 months, 1853, while on the other hand, arguing that it also represented its limitation. Lastly, I translated the fist chapter, “Changming jixian,” the most literary parts among the three.

      • KCI등재

        19세기 중국 유학자의 베트남 여행기 『해남잡저(海南雜著)』연구

        안재연 한국중어중문학회 2022 中語中文學 Vol.- No.87

        본 논문은 19세기 대만 유학자가 쓴 베트남 여행기 『해남잡저(海南雜著)』(1937)를 분석함을 목표로 한다. 『해남잡저』는 1835년 유생 채정란(蔡廷蘭, 1801∼1859)이 과거 시험을 치르고 팽호(澎湖)로 돌아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베트남에 표착한 뒤 1836년 귀환하기까지의 여정을 적은 여행기이다. 본문에서는 『해남잡저』의 내용 분석 뿐 아니라 『해남잡저』 가 수용되고 소비되는 맥락을 같이 인식하여 그 가치와 한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우선 『해남잡저』의 판본과 번역본, 체제와 구성을 소개하였다. 뒤이어 『해남잡저』의 본문 「창명기험(滄溟紀險)」·「염황기정(炎荒紀程)」·「월남기략(越南紀略)」의 주요 내용을 분석하였다. 베트남 관원과의 교류, 화교 사회의 묘사, 여성이나 신기한 풍속에 대한 묘사, 베트남 역사와 신화에 대한 채정란의 관찰 기록을 분석하였다. 결론으로 19세기 노골적인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 서양 문물의 유입, 중화 제국 중심의 조공 체계의 몰락 등을 외면한 중화중심주의가 『해남잡저』의 저자, 독자, 지식인과 지배층에 의해 생산, 재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