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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에 보이는 왜계백제관료(倭系百濟官僚)

          박재용 백제학회 2015 백제학보 Vol.0 No.15

          왜계백제관료는 5세기 후반단계부터 백제가 가야와 왜국의 유력씨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을 계기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왜국의 유력씨족 출신이 많지만 백제계 도왜인의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대화정권의 씨성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은 대왜외교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백제측의 의도가 작용했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와 왜국 모두에게 신속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백제의 왕도에 체재하면서 백제를 위해 활동한 사람들로 보아야 한다. 백제는 왜계백제관료를 왜국뿐만 아니라 안라에도 파견하였다. 왜계백제관료의 외교 대상이었던 소위일본부 관련 인물들은 대화정권에서 파견한 사신이 아니라 6세기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가야지역과 관계를 맺으면서 일본열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대외활동은 『일본서기』 단계에서 천황의 명에 의해 활동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백제는 이들과 계보 또는 출신지역과 관계가 있던 왜계백제관료를 파견함으로써 반백제적 성향을 바꾸어 신라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안라에서 실질적으로 반백제정책을 주도하던 가야소국 수장층에 의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왜계백제관료의 활발한 대왜외교 활동은 성과를 거둔 듯 흠명기에는 백제와 왜국의 활발한 교섭이 기록되고 있다. 당시 백제로서는 급변하는 왜국 내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언어 등의 통교상의 가장 중요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왜계백제관료의 협조는 절실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6세기 중엽 전후에 일어난 한반도의 세력 다툼 속에서 백제의 대왜외교는 더욱 긴박해졌고, 이 시기에 군사외교의 일익을 담당한 것이 왜계백제관료였다. 왜계백제관료의 활동기사가 『일본서기』 흠명기 이후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은 『백제본기』 기록의 잔존형태와 관계가 있다. 日羅의 도왜를 마지막 왜계백제관료의 소멸 이유로 거론하기도 하지만, 일라는 대가야 왕족 출신인 ‘가야계백제관료’라고 판단된다. 일라는 대가야의 멸망 후에 백제로 건너가 그의 집안내력과 함께 백제의 국정운영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달솔의 위치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 또한 승려로서의 활약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일라를 왜국으로 부른 것은 대반씨이며, 그 의도는 흠명대 이후 추락한 자신들의 부활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倭系百濟官僚は,5世紀後半から百濟が加耶と倭國の有力氏族との密接な關係を結んだことを機械に登場される.彼らは倭國の有力氏族出身が多き,百濟系渡倭人の場合もあった.倭系百濟官僚が大化政權の氏姓をそのまま使用したことは對倭外交を有利して導かれる百濟側の意圖が作用したためである.したがって,倭系百濟官僚は百濟と倭國の兩方に臣屬されたとみることは困難で,百濟の王都に滯在しながら百濟のために活動した人□に見なければならない.百濟は倭系百濟官僚を倭國だけでなく,安羅にも派遣した.倭系百濟官僚の外交對象であったいわゆる日本府は大化政權から派遣された使臣ではなく,6世紀以前から獨自的に加耶地域と關係を結びながら,日本列島で移住してきた人□であった.彼らの對外活動は『日本書紀』編纂過程で天皇の命により活動したこととして變わるようになった.百濟は,日本府と系譜または出身地域と關係がある倭系百濟官僚を派遣することにより,反百濟的性向を變えて新羅を牽制しようとした.しかし,安羅で實質的に反百濟政策を主導していた加耶小國首長層によって大きな成果は收め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一方,倭系百濟官僚の活潑な對倭外交活動は成果を收めたよう,欽明紀には百濟と倭國の活潑な交涉が記錄されている.百濟は急變する倭國內部の政勢を把握し,言語などの通交上の重要な難點を克服するために,倭系百濟官僚の協調は極めて必要であった.さらに6世紀半ば前後に起こった韓半島の勢力爭いの中で百濟の對倭外交はさらに緊迫となり,この時期に軍事外交の一翼を擔ったのが倭系百濟官僚であった.倭系百濟官僚の活動記事が『日本書紀』欽明紀以後からもはや見えないことは『百濟本記』記錄の殘存形態と關係がある.倭系百濟官僚の消滅理由を日羅の渡倭と關連づけて理解することもあるが,日羅は大加耶の王族出身である「加耶系百濟官僚」と判斷される.日羅は大加耶の滅亡後,百濟に渡り,彼の家の履歷と百濟の國政運營に多くの寄與を認められて達率の位置まで上がったといえる.また,僧侶としての活躍もあったとされる.日羅を倭國に招待した主體は大伴氏であり,その意圖は欽明代以後,墜落した自己氏族の復活が目的であった.

        • 百濟 滅亡後 扶餘隆의 行蹟과 活動에 대한 再考察

          김영관 백제학회 2012 백제학보 Vol.0 No.7

          This article tries to explore the whereabouts and activities of Buyeo Yung (扶餘隆, 615-682) from the collapse of the Baekje in 660 until he died in 682. He was the crown prince of Baekje kingdom, and was appointed as heir to the throne in 644. He was sent into exile at Luoyang, capital of the Chinese Tang dynasty, along with his father who king Uija(r. 641-660), the last king of the kingdom and about ten thousand Baekje people when Baekje was conquered by the Silla-Tang allied forces. Buyeo Yung did not do public activities due to his father's funeral at the early times of his residence in Tang China. After returning to the former Baekje area in July, 663, Yung persuaded the former Baekje people who engaged in the Baekje Restoration Movement to surrender to Tang forces by using his former position as the crown prince of Baekje. After the Restoration Movement was defeated, Yung was tasked with controlling the kingdom's former territory and in attacking Goguryeo Kingdom by Tang. Buyeo Yung ruled former Baekje people as Dowi(都尉, Commandant) and Dodok(都督 Supervisor-in-chief) in Ungjin Commandery. He also kept Silla from being the sole lead in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UngryongHoemaeng(熊嶺會盟), a meeting conducted by Kim Inmun of Silla and Buyeo Yung in Ungryong for the purpose of formalizing alliance, which was held in February, 664 and Mt.ChwiriHoemaeng(就利山會盟), alliance formed between King Munmu of Silla and Buyeo Yung in Mt. Chwiri in August, 665. Yung attended the Fengshan ritual (封禪) in Mt. Tai in China performed by Tang Emperor Gaozong who conferred the title of Baekje Gungong (百濟郡公, Commandery Duke of Baekje) on Yung in January, 666. In the same year Yung conducted a ritual on behalf of Tang emperor in a Kongzi Temple(孔子廟) in Qufu(曲阜), Shandong province, China. After returning to the Ungjin Commandery from China in May, 666, he control the former Baekje subject, provided Tang forces with military supplies to support Tang's expedition to Goguryeo and tried to prevent Goguryeo from connecting with Woe(倭, Japan) through diplomatic steps. These activities continued until September, 668 when the Pyongyang fortress in Goguryeo was conquered. After Goguryeo was conquered, almost all former domains of Baekje were occupied by Silla, in spite of Yung's effort to prevent Silla from being the sole lead. Furthermore he barely kept the Ungjin Commandery in existence. It was in 675 that he went to Tang. After he left, Silla finally occupied the Ungjin Commandery, which was reestablished in Geonan(建安) Fortress in the former Goguryeo’s area. Yung governed the former Baekje people who moved here and died at the age of 68 in 682. 부여융이 唐에 들어간 초기에는 의자왕의 장례를 치르느라 대외적인 활동이 거의 없었다. 부여융이 백제 고토로 돌아온 시기는 663년 7월이었고, 부흥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고 설득시켜 당군에 투항하도록 하였다. 부여융은 본인이 의자왕의 뒤를 이을 백제의 태자였다는 점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백제부흥군을 진압한 뒤에 부여융은 당의 백제 고토 지배와 고구려 정벌에 이용되었다. 부여융은 웅진도독부에서 도위와 도독으로서 백제유민들을 다스리고 664년 2월 웅령 회맹과 665년 8월 취리산 회맹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666년 1월 당 고종의 태산 봉선에 참여하였고, 백제군공의 작위를 받았다. 666년 2월 2일에는 曲阜의 孔子廟에 가서 황제를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666년 5월경에 웅진도독부로 돌아와 백제유민 按撫와 더불어 당의 고구려 원정에 필요한 군수품 지원 준비와 倭에 대한 외교적 조치를 통해 왜와 고구려가 연결되는 것을 막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668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668년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를 통해 신라를 견제하고자했지만, 신라에게 밀려 백제 고토의 대부분을 내주었고, 간신히 웅진도독부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당으로 들어간 것은 675년 무렵이었다. 부여융이 백제 고토를 떠나면서 웅진도독부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676년 2월 고구려 고토의 건안 고성에서 웅진도독부는 부활되었고, 이곳에서 부여융은 당으로 옮겨간 백제 유민들을 다스리다가 682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KCI등재

          전북지역 마한·백제묘제의 양상과 그 의미

          최완규 ( Choi Wan-kyu ) 백제학회 2016 백제학보 Vol.0 No.18

          전북지역의 지형은 동고서저로서 금강하구·만경강·동진강 등 세 하천이 서해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이들 세 하천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끊임없는 문화 활동이 이루어져 왔고, 마한에서 백제시대에 걸쳐 각기 다른 분묘 축조양상을 보이고 있다. 금강하구역은 백제 한성기부터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대외관문으로서 교통의 요충지였을 것으로 백제 중앙으로부터 꾸준한 관리대상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층문화라 할 수 있는 마한 분구묘가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지역과 달리 5세기 중엽부터 백제 석축묘가 축조되었음이 확인된다. 만경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의 익산이나 완주·전주지역에서는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가 부장되는 토광묘가 제의유적과 더불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마한 정치체 성립의 주체세력으로 상정된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마한문화의 전통이 다른 곳보다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곧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마한 분구묘 축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주 혁신도시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석축묘의 축조과정에서도 마한 분구묘의 주구굴착 전통이 횡혈식석실분에도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동진강유역의 정읍 고부지역에는 운학리나 지사리와 같이 마한 분구묘가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어 지배자 계층의 분묘로 추정된다. 이들 유적과 동일한 시간축에 있는 김제 벽골제는 강력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고, 부안 백산성은 물류 거점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발굴결과 확인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사비시대에 지방통치의 거점이 되는 백제 중방 고사부리성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중방성의 치소는 고사부리성이며, 은선리 고분군을 비롯한 백제 횡혈식석실분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점은 백제 중앙세력의 진출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고창 오호리 3호 석실분에서 출토된 청동인장은 백제 지방행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전북지역의 백제문화는 강력한 마한문화 전통 위에서 금강하구·만경강·동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각 각의 정치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전개되어 간 것으로 살필 수 있다. The geographical terrain of the Jeonbuk area is characterized by high elevation in the east and low elevation in the west, which allows for the flow of the Geumgang River, Mangyunggang River, and Dongjingang River into the Yellow Sea. Since prehistoric times, the area around the three rivers has been the center of cultural activities and from the Mahan Period until the Baekje Period, tomb construction methods went through varied degrees of changes. The estuary of the Geumgang River, serving as the external gate of the region was a strategic traffic point from the Hansung Baekje Period to the Sabi Baekje Period. Hence, the region must have been constantly under surveillance by the central government of the Baekje Kingdom. Consequently, Mahan mound tomb, which can be regarded as representative of the region`s basic culture, ceased to evolve and gave way in the middle of the 5th century to the stone chamber tombs of the Baekje Period. This wasn`t the case in other regions where Mahan mound tombs continued to be used. A series of pit tombs were discovered along with ritual relics in the areas south of the Mangyunggang River, north of this river in Iksan, and in Wanju and Jeonju areas. Inside these pit tombs were clay stripe potteries and black neck earthenwares and it is hypothesized that these tombs belonged to the ruling class that founded the Mahan Kingdom. Therefore, it can be assumed that in these regions, Mahan traditions were maintained better than in other places. In fact, even after the Baekje domination of the region, Mahan tombs continued to be constructed. Furthermore, archaeological excavations carried out in the Jeonju Innovation City revealed that the Mahan tradition of digging ditches around the tombs continued well into the Baekje tomb construction process for tunnel style stone chamber tombs. The Mahan mound tombs that could be found in the Jeongeup Gobu region of the Dongjin River basin are speculated to be the tombs of the ruling class because of their considerable sizes. The Gimje Byeokgolje Reservoir, which belongs to the same historical period as these remains, was a strong economic base for the region. Excavations confirm that the Baeksan Fortress in Buan played the role of a distribution point. This served as the foundation on which the Baekje Kingdom`s Gosaburi Fortress was built - a site that would become the hub of regional rule in the Sabi Period. The main seat of power in the central castle was the Gosaburi Fortress. The concentration of Baekje tunnel style stone chamber tombs that have been excavated here and in Gobun-gun, Eunseon-ri, prove that the region was occupied by the main forces of Baekje. Particularly, the bronze seal found in the stone chamber excavated in Gochang, Oho-ri, provides a snapshot of regional administration during the Baekje Period. It can be said in conclusion that the Baekje culture of the Jeonbuk region was built on the foundations of Mahan cultural traditions and inspired separate political and cultural characteristics along the Geumgang River, the Mangyunggang River, and the Dongjingang River basins.

        •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왜 관계와 남조

          김수태 백제학회 2011 백제학보 Vol.0 No.6

          백제의 대왜관계는 개로왕대를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왜는 비유왕이 보낸 왕녀 지진원을 채녀로 삼는가 하면, 송나라에 백제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통해 백제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을 국제사회에 표명하였다. 이에 백제는 적극적인 대송외교로 대응하였고, 이를 통해 대남조 외교에서 백제가 왜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시킴으로써 왜의 노력을 무산시켰다. 이런 가운데 왜는 비유왕 사후 개로왕이 즉위하자 본격적으로 관계 변화를 모색한 듯하다. 왜왕이 자신에게 반발하여 백제계 이주민과 결합한 지진원을 화형시킨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백제계 이주민을 의식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의사였다. 또한 왜는 대송외교도 계속 추진하였다. 하지만 송은 북위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백제를 더 중시해야 했기 때문에 왜의 거듭된 요구는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개로왕 역시 비유왕과 마찬가지로 왜의 의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개로왕은 더 이상 왕녀를 파견하지 않겠다고 하고 곤지를 파견하는 것으로 그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곧 왜의 군사지배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과 백제계 이주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곤지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기 위해 자신의 부언을 주기도 하여 그 의도를 보다 확실히 하였다. 그러므로 개로왕대 백제는 이전과 달리 새로운 대왜 관계를 추구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웅진천도 이후 왜는 백제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변화를 모색하였다. 476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경과를 설명하는 왜의 태도는 계획적인 것이었다. 곤지의 477年 귀국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는 곤지를 통해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하려는 자신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같은 해 왜는 대송외교도 추진하였는데, 이는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송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때문에 이후 왜와 송의 관계는 오랜 기간 동안 단절되게 된다. 이후 왜는 한 차례 더 새로운 노력을 한다. 바로 동성왕의 귀국을 통해서였다. 동성왕을 귀국시킨 의도는 곤지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왜는 동성왕의 귀국을 그의 즉위에까지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왜의 대백제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실제로 왜왕이 보낸 군사들의 역할이나, 동성왕 모계와 왜 왕실의 관계는 확실히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곤지와 동성왕을 친왜계 인물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동성왕은 개로왕이 추구한 대송외교의 목표를 그대로 따랐다. 또한 동성왕이 가진 대왜정책은 개로왕과 그의 아버지인 곤지와 동일한 것이었다. 동성왕대는 왜에서 귀국하여 왕이 된 인물이 다스린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왜와의 교류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양국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한편 동성왕은 남제에 내속을 청함으로써 자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으며, 왜의 대남조 외교에도 대응하고자 하였다. 百濟の對倭關係は蓋鹵王代を起點として大きな變化を見せる. 倭は毗有王が選った王女池津媛を采女としたり, 宋に百濟を含む韓半島南部の支配權を認められる試圖を通じて百濟との關係を改めて定立しようとしたり, こんな努力を國際社會に表明した. よって百濟は積極的な對宋外交として對應し, 對南朝外交で百濟が倭より優位に立つことを確認させ, 倭の努力を霧散させた. このような雰圍氣のなか倭は毗有王死後, 蓋鹵王が卽位すると本格的に關係變化を摸索したようだ. 倭王が自身に反撥して百濟系移住民と結合した池津媛を火刑させた. これはこれ以上 百濟系移住民を意識せず積極的に統制するという意思であった. また倭は對宋外交も繼績推進した. でも宋は北魏との關係を考慮すると百濟の方をもっと重視する必要があって, 倭の重なる要求はやっぱり受け入れなかった. 一方, 蓋鹵王も毗有王と同じく倭の意圖を容納しなかった. 蓋鹵王はこれ以上王女を派遣しないと昆支を派遣することで自分の意見を披瀝した. すなわち, それは倭の軍事支配權主張を受け入れないことと百濟系移住民達を保護するということだった. ともに昆支の政治的立地を高めるために自身の婦人を讓ることによってその意圖をより確實にした. それゆえ蓋鹵王代百濟は以前と違う新しい對倭關係を追い求めたとしても違いはない. 百濟の熊津遷都以後, 倭は百濟の狀況を注視しながら變化を摸索した. 476年, 百濟と高句麗との戰爭經過を說明する倭の態度は計劃的なものだった. 昆支の477年歸國もこれと關係があるはずだ. 倭は昆支を通じて百濟と倭との關係を改善して自身の立場を博達できると考えた. この年, 倭は對宋外交も推進した. これは百濟が危機に直面しているうちに亞細亞國際關係の中で自身の位置を確實に浮刻しようとすることであった. でも宋は受け入れなく, 以後倭と宋との關係は長い間斷絶されることになる. 以後倭はもっと新しい努力をする. それは東城王の歸國であった. 東城王を歸國させた意圖は昆支の場合と同じであった. 同時に倭は東城王の歸國を彼の卽位にまで連結して, 倭の對百濟關係を改めて設定しようとした. 實際に倭王が送った軍士の役割とか, 東城王母系と倭王室との關係は確實にするには難いところがある. よってこんな点を根據として昆支と東城王を親倭系人物として認識することは再考の餘地がある. 東城王は蓋鹵王が追求した對宋外交目標をそのまま受け繼いだ. また東城王の對倭政策は蓋鹵王と父である昆支が開いた政策と同一なものだった. 東城王代は倭から歸國して王になった人物が支配した時期でもかかわらず倭との交流事實が具體的に確認されない, これは全般的に兩國の關係が斷絶したと把握するのが良いと思う. 一方, 東城王が南齊に內屬申請して自國が國際的に孤立されることを防止しようとしながら, 倭の對南朝外交も對應しよう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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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지역 유적조사 성과를 통해 본 마한·백제 - 2016년을 중심으로 -

          이동희 ( Lee Dong-hee ) 백제학회 2017 백제학보 Vol.0 No.20

          이 글은 2016년도에 호남지역에서 발굴조사된 마한·백제 관련 주요 유적의 성과 외에도, 2016년도에 발간된 발굴조사 보고서와 논문을 살펴보고 호남지역의 마한·백제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2016년도에 발굴조사된 유적조사 현황을 바탕으로 호남지역 마한·백제의 주요 논점을 검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마한 기원과 관련한 분묘, 화천이 다량으로 출토된 광주 복룡동 토광묘의 성격, 경질무문토기의 하한과 타날문토기의 상한, 호남 동부권에 주로 분포하는 백제 산성의 의의와 백제의 지배형태 등이다. Ⅲ장에서는 2016년 발간 주요 보고서 및 논문으로 본 호남지역의 마한·백제 연구 성과를 살펴보았다. 2016년에 발간된 호남지역 발굴조사보고서 가운데 마한·백제 관련 주요 유적은 마한 초현기의 분묘, 호남 최초의 빈(殯) 관련 의례유적, 철기 제작과 관련된 대규모 취락, 백제 오방성 가운데 하나인 정읍 고사부리성, 6세기대 전남동부지역의 백제 영역화를 보여주는 고분 등이 있다. 한편, 2016년에 발간된 논문 가운데 호남지역 마한·백제와 관련 연구 경향은 다음과 같다. 즉, 전북지역에서는 마한 성립기의 점토대토기문화의 전개과정, 전북지역 마한·백제 묘제의 양상과 의미, 익산과 마한·백제 등이 논의되었고, 전남지역에서는 영산강유역의 마한·백제 고분과 출토유물에 대한 글이 주를 이룬다. 즉, 묘제·토기·금동신발로 본 복암리 세력과 주변지역의 동향, 복암리 출토 목간으로 본 나주의 위상, 영산강유역의 왜계 고분과 마한·백제·왜와의 관계, 서남해안 해상교통로와 백제·왜 관계, 영산강유역의 백제 지방도시, 마한토기의 정체성과 동북아시아적 의미 등이 거론되었다. 호남지역에서 마한의 상한, 마한·백제의 전환기, 5~6세기 고총의 피장자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이지만, 쉽게 결말이 나지 않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문헌이 빈약한 호남지역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고고자료가 필요 하고, 지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This study intended to shed new light on Mahan and Baekje in Honam region of Korea by examining major remains related with Mahan and Baekje excavated and examined in Honam region in 2016 as well as the excavation reports and essays published in 2016. Chapter Ⅱ examined major issues about Mahan and Baekje in Honam region based on the results from the excavation of remains in 2016. Major contents of this chapter focused on the characteristics of tombs related with the origin of Mahan and the wooden coffin tombs of Bokryong-dong, Gwangju where ancient coins of China were found in a great quantity and the significance of Baekje fortresses mainly located in the eastern area of the Honam region and the form of governance of Baekje. Chapter Ⅲ examined the research results on Mahan Baekje in Honam region through major reports and essays published in 2016. The trends of essays on Mahan and Baekje of Honam region published in 2016 are as follows; Studies conducted in Jeollabuk-do region mainly discussed the development of the clay-stripe pottery culture during the establishment of Mahan and the meaning of Mahan-Baekje burial system in Jeollabuk-do, while studies conducted in Jeollanam-do mainly discussed Mahan-Baekje tombs on the side of Yeongsangang River and artifacts excavated from them and the sea lanes in the Southwest co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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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정동준 백제학회 2019 백제학보 Vol.0 No.29

          Regar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Mahan, this paper reviewed the literature materials and related studies on the relationship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which was problematic in the prevailing theory, and examined literature materials and related studies on the south of Geum River and north of Noryeong Mountains, Yeo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 The summary is as follows. This paper reviewed the article of King Onjo of Baekjebongi(百濟本紀) in Samguksaki (三國史記) and literature materials related to the construction of Byeokgolje which were materials on Baekje’s annexation of Mahan before the reign of King Geunchogo, and also reviewed the Jinguki(神功紀) of Nihonshoki(日本書紀) which was material on annex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The results of the review showed that all three materials lack of evidence that Baekje’s annexation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be convinced that the prevailing theory before the 1990s was a theory proven through literature material. This paper also reviewed Baekjejeon(百濟傳) of Chinese official history and Oujinki(應神紀) of Nihonshoki which were literature materials on the trends in southern area of Geum River after the 5th century. Both materials showed that Baekje did not carry out the territorialization of the area until the 5th century. This article examined various literature materials on the trends of You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s after the 5th century, including the Samguksaki, Nihonshoki, Baekjejeon of Chinese official history. Through these materials, it was confirmed that the Yeongsan River basin became a part of Baekje's territory at some point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and that the small states of Yeo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 which had remained in the state of ‘subjugation’ until the reign of King Muryeong, were territorializ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 In addition,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at Seomjin River basin, such as Gimun(己汶) and Daesa(帶沙), was incorporated into Gun(郡: county) which was a territory of Baekje no later than 600, and that the Dam-ro system(擔魯制) was implemented in the 530’s and the five Bang(方: province) system in 540s. 이 글에서는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하여 먼저 통설에서 문제가 되었던 근초고왕대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한 사료와 관련연구를 재검토하고, 금강 이남 노령산맥 이북,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순서로 사료와 관련연구를 검토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초고왕 이전 백제의 마한 통합에 대한 사료로서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조와 벽골제 축조 관련 사료, 근초고왕대 백제의 마한 통합에 대한 사료로서 『日本書紀』 神功紀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3개 사료 모두 근초고왕대에 백제의 마한 통합이 완료되었다는 근거로 부족한 점이 있어서, 1990년대 이전의 통설은 적어도 문헌사료로 입증된 학설이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5세기 이후 금강 이남 지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中國正史 百濟傳, 『日本書紀』 應神紀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두 종류의 사료 모두 5세기까지 백제가 금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역화를 관철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5세기 이후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여러 사료 『三國史記』·『日本書紀』, 中國正史 百濟傳 등 여러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들 사료를 통하여 영산강 유역이 6세기 중반의 어느 시점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고, 무령왕대까지 ‘복속’에 머물렀던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소국들이 성왕대에 영역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己汶·帶沙 등 섬진강 유역이 늦어도 600년을 전후한 시점에는 백제의 영역으로서 郡으로 편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530년대에 담로제가, 540년대에 5방제가 실시되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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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왕호(王號)·후호(侯號)·태수호(太守號)와 장군호(將軍號) - 5세기 후반 백제의 지배질서와 동아시아 -

          井上直樹 ( Inoue Naoki ),임동민(번역) ( Dong-min Lim ) 백제학회 2018 백제학보 Vol.0 No.25

          중국 황제가 高句麗, 百濟, 倭의 군장이나 그 신료에게 除授한 將軍號 등의 官爵號를 토대로 그러한 여러 나라의 지배체제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특히 백제나 왜에서는 군주 자신의 官爵뿐만 아니라, 신료에 대한 將軍號 除正 요구도 여러 번 이루어졌고, 장군호를 비롯하여 중국 황제에게 除授 받은 관작이 중시되었다. 이 중에, 백제에서는 개로왕대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백제왕의 官爵號 除正 요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宋에게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것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집요하게 송에 백제의 軍政權을 요구하는 왜에게 외교적 견제를 가하기 위함이었고, 대내적으로는 개로왕이 제수된 관작, 특히 장군호를 토대로 신료들을 왕권 아래에 위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개로왕은 중국 왕조의 장군호에 의거하면서 신료를 서열화하고 있었다. 그 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일시적으로 멸망의 위기를 맞았다. 곤란한 상황에서 즉위한 동성왕은 南齊에게 신료의 장군호 제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것과 연동된 백제 왕족, 귀족의 3품 장군에게는 백제 독자의 王號를, 4품 장군에게는 侯號를, 한인 관료의 3·4품 장군에게는 太守號를 신하들에게 수여하고 있었다. 5세기 후반의 백제에서는 백제 귀족이나 한인 관료들을 왕권 아래에 위치시키기 위해, 중국 장군호를 극히 중시하고 있었다. Attempts to account for the domination-system of various countries, such as Koguryo, Paekche, Wa, have been made for a long time, based on the ‘Changgunho’(將軍號, the name of General titles). Chinese emperor gave ‘Changgunho’ to kings or officials of Koguryo, Paekche, Wa. In particular, there had been numerous requests for the ‘Changgunho’ of officials in Paekche and Wa as well as the titles of kings in Paekche and Wa. The titles received from the Chinese emperor, including ‘Changgunho’, were valued in various countries. King Kaero of Paekche actively requested titles from China. In this way, Paekche was officially recognized by the Liu Song dynasty for its international status. The purpose of Paekche diplomacy was to apply diplomatic checks to Wa, which was persistently demanding the military administration of Paekche to China, and to control to officials, based on King Kaero’s the name of titles(Changgunho). King Kaero ranked his officials according to the Chinese dynasty’s ‘Changgunho’. Later, Paekche was temporarily in danger of collapse due to Koguryo's attack on the capital. King Tongsong, who took the throne under difficult circumstances, asked Southern Qi for the title of ‘Changgunho’, and gave the ‘Wangho(王號, king title)’ to Paekche royal family and nobles who were given the third rank ‘Changgunho’, and gave the ‘Huho(侯號, marquis title)’ to the fourth rank ‘Changgunho’, and gave the ‘T'aesuho(太守號, governor title)’ to Chinese officials in Paekche who were given the third or fourth rank ‘Changgunho’. In Paekche, in the late 5<sup>th</sup> century, ‘Changgunho’ was highly valued to place Paekche nobles and Chinese officials in Paekche under the King’s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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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성씨문화의 이해

          박윤선 백제학회 2019 백제학보 Vol.0 No.29

          Surnames in China were, first, an intensive expression of the social tradition of patrilineal descent and patrilocal residence. The name was shared by the members of the agnate kin. Second, they were both an indication of patrilineality and social status. For a formation of a patrilineal or matrilineal, thus unilineal line of descent, the prevalent marriage tradition must be exogamy and the patrilocal residence. However while possibilities of endogamy are spotted in Baekje, those of patrilocal residence are not.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ascertain agnatic kinship while ruling out matrilineality. It seems safe to assume Baekje wanted the foundation to realize surname culture. Even the royal family, who were certain to have surnames, didn’t routinely use surnames in records. They also used different surnames between father and son, showing surnames failed in serving their purpose to indicate patrilineality and unite the members of kin. It is also hard to assume the existence of surnames in Baekje at all. It is thought that the kings of Baekje would use surnames in exchanges with China to express a cultural homogeneity and promoting a diplomatic expedience. Thus the role surnames played was different to its origin. Namesakes, who show possibility of names developing into surnames, tend to take after the names of kings. “Goyi”, “Dongsung”, “Giru”, and “Sam-geun” are names of Baekje kings used by later members of the royal family. Out of these, “Goyi” seems to have developed in to a surname while “Dongsung” has failed to reach that level. “Giru” could be an indicator of matrilineal kin or an indigenous Baekje word. “Cho-go”, “Gu-su”, and “Gae-ru” seem to be simply reused names of earlier kings. While every name differs in its function, the namesake of the names of earlier kings display the fact that the owners are royalty, thus serving its function to show social status. “Hae”, an honorary title of Buyeo, developed into a Baekje surname. “Mak-go”, “Gap-bae” were not surnames but were titles showing social status. Surnames in Baekje weighed more toward showing social status than indicating patrilineality. People’s names in general in Baekje would actively adopt terms that indicated social status, thus being homogeneous in nature to said surnames. Early Baekje was introduced to surnames and was socially adapting to the concept. The surnames failed to full realize their function and were partially integrated into society. This is in part due to the disparity between actual kinship and the kinship surnames expressed, and is also due to the disparity between Baekje’s intent in using surnames and their original function. 중국의 성씨는 첫째, 부계(父系) 혈통율과 부거(夫居)의 거주율이 원리였던 사회적 관습의 집약적 표현으로 부계친족집단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둘째, 부계 표지이자 신분 표지로 형성되었다. 부계나 모계의 단계(單系) 출계집단의 형성을 위해서는 동성불혼의 외혼의 관습(exogamy)이, 부계중심의 친족집단 형성을 위해서는 부거제적 혼인 방식이 지배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성혼의 가능성이 포착되고, 부거제는 확인되지 않는 한편 처거제적인 혼인사례가 추론되며, 따라서 모계를 배제한 부계 중심의 친족집단이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즉 백제사회는 성씨문화가 구현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백제에서 성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왕족집단의 경우에도 인명표기에서 성씨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백제 인명에서 성씨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고 전제할 수 없다. 또한 부자 사이에도 다른 성씨를 사용하는 등 부계 출계 표지나 동일 친족집단의 구성원임을 드러내고 결속하는 것과 같은 성씨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백제왕들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성씨를 사용하여 중국과 문화적 동질감을 표현함으로써 외교적인 편의를 도모했다고 생각된다. 성씨 사용 목적이 본래의 역할과 다른 것이다. 성씨의 가능성이 있는 이름으로서 살펴본 동명이인들에는 왕명이 상당히 많다. 고이, 동성, 기루, 삼근 등 백제왕의 이름들을 후대 왕족들이 사용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이는 성씨 단계에 진입하였고, 동성은 아직 성씨화에 이르지 못한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모계 친족집단명 혹은 백제 고유 단어의 가능성이 있는 기루, 단순히 후대왕들이 재사용한 선조왕의 이름인 초고·구수·개로 등의 이름들은 각각 그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선조왕의 이름을 사용하여 왕손이라는 사실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신분표지적인 역할을 공통적으로 행한다. 그 밖에 부여계 존칭 해는 백제에서 성씨화되었고, 백제 고유의 막고·갑배 등은 성씨가 아니지만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호칭이었다. 백제 인명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을 드러내는 호칭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재사용된다는 점에서 성씨와 비슷해 보였고, 역할은 성씨와 다르지 않았다. 백제사회는 성씨를 수용하여 사회적으로 적용해가고 있었는데, 성씨 본연의 의미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한편 성씨가 표현하는 친족집단과 백제의 실제 친족집단과의 괴리에서 기인한 바였고, 다른 한편 백제에서 성씨의 활용 양상과 성씨의 본연의 역할과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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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군왕 작호에 대한 고찰 - 중국과 백제의 관계로부터 -

          馮 立 君 백제학회 2017 백제학보 Vol.0 No.19

          The subject of this study is the title of Baekje King, ‘Daifang Dukes/ Daifang King’(帶方郡公/帶方郡王), which was canonized by Chinese emperor. Through research on the origin meaning and political significance of the title, we found several details of political relations between China and Baekje from the late 6th century to the 8th century. Direct source of the ‘Daifang King’ in Tang Dynasty is ‘Daifang Dukes’ of the Northern Qi and Sui for Baekje King. ‘Daifang King’ that Former Yan and Later Yan two dynasties of Murong Xianbei(慕容鮮卑)canonized its domestic nobleman and Northern Wei dynasty canonized its domestic military generals are the source of the Northern Qi Dynasty earlier origin. Baekje have set a new Daifang Prefecture (帶方郡) after China’s Daifang Prefecture was annihilated in 314. Former Yan, Later Yan and Northern Yan are also set new Daifang Prefecture (帶方郡) in their respective kingdom, so the four countries, Baekje and the ‘Three-Yan’(三燕), all have a official named Daifang Prefecture (帶方太守). The Northern Wei and Eastern Wei also have set Daifang County(帶方縣) in their country. In a word, the term ‘Daifang’ as a place name had been a long heritage, evolving into a feature-rich politic word. It reflects the influence of the political legacy of the Chinese Empire in those various countries. In 570, Northern Qi Dynasty had canonized the vassal Baekje King(Wideok King) the title ‘Daifang Dukes’ creatively, which was continued in 581 when Emperor of Sui canonized Baekje King(Wideok King). The Baekje King was canonized by the Tang Dynasty in 624, because of Chershing Men from Afar’s(懷柔遠人) needs, the Baekje, Koguryo and Silla monarch was upgraded from the Duke to King by the First Emperor of Empire Li Yuan at the same time. When the political relations between Tang and Baekje changed, the canonized title was always unchanged simultaneously. After the demise of Baekje, Tang briefly abandoned the use of ‘Daifang King’. However, Tang restore this title very soon on account of the situation of Baekje: They put the title of Daifang King on the former prince Buyeo Yung’s head and later on his grandson Buyeo Gyeong s head. In 724, in the Fengshan Ceremony(封禪大典) of Emperor Xuanzong era of the Tang Dynasty, ‘Baekje Daifang King’(百濟帶方王) and ‘Koryo Chosun King’(高麗朝鮮王) were sitting in the first row of the vassal, indicating that the Baekje and Koguryo people have a high position in Tang’s family. As a special region in the former-Baekje territory under Tang, Daifang Prefecture (帶方州), embodies the rule of the Tang Empire. The geographical name, ‘Daifang’, show that the Tang Dynasty put former-Baekje territory and ancient Daifang Prefecture/Daifang County(帶方郡/縣) together, which is a historical imagination. 본고는 당나라가 백제를 대방군왕 작호로 책봉한 것으로부터 대방군왕의 유래 및 정치적 의의에 대한 연구에 근거하여 6세기 말부터 8세기까지 중국과 백제의 정치적 관계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북제와 수조시기에는 백제왕을 대방군공으로 책봉하였고, 전연과 후연에서는 모용씨 귀족을 대방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북위에서는 무신을 대방공으로 책봉하였으며, 당나라에서는 대방군왕에게 작호를 하사하였다. 314년, 백제는 대방군을 점령하고 그 체제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전연, 후연, 북연은 모두 관할 경내에 대방군이라는 지명을 쓰고 「삼연」과 백제는 모두 「대방태수」라는 관직을 설립하였다. 북위, 동위에서도 대방현을 설치하였으며, 이로써 「대방」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기능을 지닌 작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한진제국의 정치제도가 후기 조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체현하기도 하였다. 북제는 무평 원년(570)에 번신인 백제왕 (위덕왕)을 대방군공으로 책봉하였고 이는 개황 원년(581) 수문제가 위덕왕에 대한 책봉까지 이어졌다. 당나라 초기(624) 국내·외 형세의 제한으로 백제왕을 책봉할 때 고구려와 신라의 군주들과 함께 군왕으로 책봉하였다. 당과 백제의 책봉은 정치적 관계에 따라 변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잠시 대방군왕의 작호를 폐지하였지만 백제의 안정국세의 수요로 대방군왕의 작호를 다시 부여융에게 책봉하였고 손자인 부여경에게도 책봉하였다. 당 현종은 개원 23년(724) 봉선대전에서 「백제대방왕」과 「고려조선왕」을 「內蕃之臣」의 수석으로 배열하였다. 이는 당에 귀속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당조 번족 속에서의 숭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방주는 당나라가 백제 통치지역에서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당의 통치자가 백제고지에 대하여 지배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고, 당은 「대방」이라는 지명을 백제 지역과 고대 대방군현을 연계시키려는 역사적 상상으로 볼 수 있다.

        • 영산강유역 토기문화의 변천 양상과 백제화과정

          서현주 백제학회 2011 백제학보 Vol.0 No.6

          본고에서는 영산강유역토기의 변천 양상에 대해 7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이를 중심으로 영산강유역 토기의 특징, 백제화과정과 관련되는 백제 토기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토기를 통해 영역화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정치적인 상황이 어느정도 토기에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4~6세기대 영산강유역 토기문화에 나타나는 독자성보다는 백제 관련 토기가 늘어나는 양상에 주목하여 백제의 영역화과정을 단계적으로 파악해 보았다. 영산강유역에는 4세기 후반 직구평저호 등 백제 관련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그 영향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으므로 백제의 지배력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그런데 5세기를 넘어가면 백제 관련 토기가 늘어날 뿐 아니라 일찍부터 백제 관련 토기가 나타났던 지역에서는 고분이 더 이상 조영되지 않는 양상이 나타나는 점에서 영산강유역 내부에 변화가 나타났을 뿐 아니라 백제의 영향력도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점에서 근초고왕의 남정 이후 충청지역과는 다른 양상으로 영산강유역에는 거점지배 등의 느슨한 간접지배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5세기 후엽부터는 개배를 비롯하여 백제 관련 기종이 더욱 늘어나고 영산강유역의 지역 양식도 등장하는데, 대형 옹관묘(U자형)가 조영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석곽묘나 석실묘가 조영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영산강유역의 토기에는 재지성향이 상당히 존속하고 석곽묘와 석실묘 또한 백제 중앙과는 달리 구조적인 차이가 있지만, 토기나 매장시설에 있어서 백제와의 관계는 좀더 밀접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대형 옹관묘(U자형) 중심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간접지배가 강화되어 거의 직접지배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지방제도 등 백제 내부의 변화로 이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도 다른 지역과 동일하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本稿では榮山江流域における土器の變遷樣相について7個の地域に分け, これを中心に榮山江流域出土土器の特徵, 百濟化する過程と關聯がある百濟土器の樣相について調べてみた. 4~6世紀代の百濟の領域化過程は, 榮山江流域の土器文化にみられる獨自性より百濟關聯の土器が增える樣相に注目して段階的に把握してみた. 榮山江流域では4世紀後半に直口平底壺など百濟關聯の土器が現れるようになるが, その影響が大きく目立たないので, 百濟の支配力が全面的に現われたとは考えにくい狀態である. しかし, 5世紀に入ると, 百濟關聯の土器が增えるだけでなく, 早くから百濟關聯の土器が出土した一部の地域で古墳群が造營されない点から, 榮山江流域での內部的な相當の變化に加えて百濟の影響力も大きくなったと推定される. その点で近肖古王の南征以降の忠淸地域とは異なる樣相がみられ, 榮山江流域では據點支配などの緩い間接支配が行ったと考えられる. その後, 5世紀後葉からは獨自的な土器も出土するが, 蓋杯をはじめ百濟の器種がより增え, 外來土器の影響も現われる. そのような土器が組合されて新しい地域の樣式などが成立するが, 百濟との直接的に關聯する型式も廣い地域に共存している. したがって, 槪して大形の甕棺墓(U字形)の存績地域を除くと, 間接支配が强化されてほとんど直接支配に近かったと判斷される. 最後に6世紀中葉以降には地方制度など百濟內部の變化でこの地域に對する直接支配方式も他の地域と同じようになったと推定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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