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형성 과정과 그 배경

        이명헌 ( Lee Myeong Heon ) 백제학회 2022 백제학보 Vol.- No.39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란 사비양식 백제토기 중 고구려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제작·사용된 토기를 지칭한다. 대부분 부여, 익산, 공주 등 백제 도성급 유적에서 출토되고, 사비도성 내에서도 중요 유적(왕궁추정지, 왕실 사찰, 관영 공방 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상위계층이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일부 의례용으로 사용된 기종(대부완, 이배, 접시 등의 소형기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생활용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주로 회색계열, 정선된 점토 혹은 소량의 첨가제가 혼입된 태토, 연질로 제작되며 타날(선문)을 이용해 성형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와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형성 과정과 등장 배경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형성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6세기를 전후하여 일부 고구려계 기종이 확인되는 단계로, 도성(공주) 외 지역에서 소수 확인되며 형태나 제작기법상 5세기대 고구려토기 제작집단과 관련이 깊다. 또 일반적인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와는 다르게 격자문 타날의 비율이 높고, 사용자의 위계 역시 높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1단계 토기는 2단계 토기와 출현 경로나 그 성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1단계 토기를 사비양식 백제토기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2단계는 6세기 중~후엽에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전체적으로 형태나 제작기법이 6세기대 고구려토기와 유사하고, 사비도성 내 국가 중요시설에서 다수 확인된다. 또 중앙 생산된 것으로 판단되며, 사용자의 위계 역시 높다. 이를 통해 기존 견해처럼 사비기에 고구려와의 문화접변으로 고구려토기 문화가 전파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도입·수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단계는 7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백제 멸망까지로,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가 백제 공인들에 의해 제작되면서 고구려토기의 변천 양상과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변화해나가는 단계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존과는 다른 사비기만의 독특한 토기 양식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어서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등장 배경은 Peer Polity Interaction 모델을 이용해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한성기에 유행한 적석총과 고구려와 삼연의 문화적 동질성 등의 사례를 참고하였다. 그 결과 두 사례와는 다르게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는 비교적 간접적인 상호작용(비물질문화의 전이, 기술의 전달 등)을 통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고구려토기의 생활 편리성은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성립 이후 해당 양식이 확산 및 발전하는데 있어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y refers to a new style of Baekje’s Sabi pottery pottery of a new style that emerged under the influence of Koguryo pottery. The development of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can be explained in three stages. In Stage 1, which centers around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potteries were mainly excavated from areas outside the capital (Ungjin). Stage 2, which ranges from the mid to the late 6th century, marks the full-fledged production of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In addition, given the fact that the stage 2 potteries are found in the capital and related to 6th-century Koguryo potteries, they are different from the stage 1 potteries in terms of their nature and places of excavation. There appears to be no continuity between the stage 1 potteries and the stage 2 potteries. In Stage 3, which lasted from the beginning of the 7th century to the fall of Baekje,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began to show its own development trajectories regardless of the changes in Koguryo potteries in the era. Alternatively, this study attempts an interpretation of the formational background of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using the Peer Polity Interaction model. The analysis showed that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are estimated to have been formed by indirect interactions (transfer of non-material culture and technology transfer). Meanwhile, the convenience of Koguryo potteries appears to have been one of the causes behind the dissemination and development of Sabi-style Baekje potteries.

      • KCI등재

        대방군왕 작호에 대한 고찰 - 중국과 백제의 관계로부터 -

        풍입군 ( Feng Lijun ) 백제학회 2017 백제학보 Vol.0 No.19

        본고는 당나라가 백제를 대방군왕 작호로 책봉한 것으로부터 대방군왕의 유래 및 정치적 의의에 대한 연구에 근거하여 6세기 말부터 8세기까지 중국과 백제의 정치적 관계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북제와 수조시기에는 백제왕을 대방군공으로 책봉하였고, 전연과 후연에서는 모용씨 귀족을 대방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북위에서는 무신을 대방공으로 책봉하였으며, 당나라에서는 대방군왕에게 작호를 하사하였다. 314년, 백제는 대방군을 점령하고 그 체제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전연, 후연, 북연은 모두 관할 경내에 대방군이라는 지명을 쓰고 「삼연」과 백제는 모두 「대방태수」라는 관직을 설립하였다. 북위, 동위에서도 대방현을 설치하였으며, 이로써 「대방」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기능을 지닌 작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한진제국의 정치제도가 후기 조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체현하기도 하였다. 북제는 무평 원년(570)에 번신인 백제왕 (위덕왕)을 대방군공으로 책봉하였고 이는 개황 원년(581) 수문제가 위덕왕에 대한 책봉까지 이어졌다. 당나라 초기(624) 국내·외 형세의 제한으로 백제왕을 책봉할 때 고구려와 신라의 군주들과 함께 군왕으로 책봉하였다. 당과 백제의 책봉은 정치적 관계에 따라 변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잠시 대방군왕의 작호를 폐지하였지만 백제의 안정국세의 수요로 대방군왕의 작호를 다시 부여융에게 책봉하였고 손자인 부여경에게도 책봉하였다. 당 현종은 개원 23년(724) 봉선대전에서 「백제대방왕」과 「고려조선왕」을 「內蕃之臣」의 수석으로 배열하였다. 이는 당에 귀속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당조 번족 속에서의 숭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방주는 당나라가 백제 통치지역에서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당의 통치자가 백제고지에 대하여 지배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고, 당은 「대방」이라는 지명을 백제 지역과 고대 대 방군현을 연계시키려는 역사적 상상으로 볼 수 있다 The subject of this study is the title of Baekje King, `Daifang Dukes/ Daifang King`(帶方郡公/帶方郡王), which was canonized by Chinese emperor. Through research on the origin meaning and political significance of the title, we found several details of political relations between China and Baekje from the late 6th century to the 8th century. Direct source of the `Daifang King` in Tang Dynasty is `Daifang Dukes` of the Northern Qi and Sui for Baekje King. `Daifang King` that Former Yan and Later Yan two dynasties of Murong Xianbei(慕容鮮卑)canonized its domestic nobleman and Northern Wei dynasty canonized its domestic military generals are the source of the Northern Qi Dynasty earlier origin. Baekje have set a new Daifang Prefecture (帶方郡) after China`s Daifang Prefecture was annihilated in 314. Former Yan, Later Yan and Northern Yan are also set new Daifang Prefecture (帶方郡) in their respective kingdom, so the four countries, Baekje and the `Three-Yan`(三燕), all have a official named Daifang Prefecture (帶方太守). The Northern Wei and Eastern Wei also have set Daifang County(帶方縣) in their country. In a word, the term `Daifang` as a place name had been a long heritage, evolving into a feature-rich politic word. It reflects the influence of the political legacy of the Chinese Empire in those various countries. In 570, Northern Qi Dynasty had canonized the vassal Baekje King(Wideok King) the title `Daifang Dukes` creatively, which was continued in 581 when Emperor of Sui canonized Baekje King(Wideok King). The Baekje King was canonized by the Tang Dynasty in 624, because of Chershing Men from Afar`s(懷柔遠人) needs, the Baekje, Koguryo and Silla monarch was upgraded from the Duke to King by the First Emperor of Empire Li Yuan at the same time. When the political relations between Tang and Baekje changed, the canonized title was always unchanged simultaneously. After the demise of Baekje, Tang briefly abandoned the use of `Daifang King`. However, Tang restore this title very soon on account of the situation of Baekje: They put the title of Daifang King on the former prince Buyeo Yung`s head and later on his grandson Buyeo Gyeong s head. In 724, in the Fengshan Ceremony(封禪大典) of Emperor Xuanzong era of the Tang Dynasty, `Baekje Daifang King`(百濟帶方王) and `Koryo Chosun King`(高麗朝鮮王) were sitting in the first row of the vassal, indicating that the Baekje and Koguryo people have a high position in Tang`s family. As a special region in the former-Baekje territory under Tang, Daifang Prefecture (帶方州), embodies the rule of the Tang Empire. The geographical name, `Daifang`, show that the Tang Dynasty put former-Baekje territory and ancient Daifang Prefecture/Daifang County(帶方郡/縣) together, which is a historical imagination.

      • KCI등재

        백제의 중국식 이름문화 수용 과정의 고찰 - 백제왕과 왕족의 이름을 중심으로 -

        박윤선 ( Park Youn-sun ) 백제학회 2018 백제학보 Vol.0 No.25

        백제왕의 이름은 성씨와 시호 등 중국식 이름 문화를 수용하면서 그 내용과 구성에서 변화를 겪는다. 백제의 전체 시기는 백제왕명의 변화양상에 따라 전통식 왕명시기, 성씨 도입기, 중국식 왕명시기 등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전통식 왕명시기는 백제왕이 전통방식의 한 개의 이름을 가졌던 시기이다. 시조 온조왕부터 제12대 계왕까지로 즉위 전후나 생전과 사후에 모두 한 가지 이름을 사용하였다. 두 번째는 성씨도입기이다. 백제왕들은 전통방식의 이름과 ‘부여’ 혹은 그 축약형인 ‘여’ 성씨 등의 두 가지 이름을 가졌다. 이때 성명은 전통식 왕명의 이름자를 취해서 성씨에 붙이는 방식으로 만드니, 전통과 신문화의 과도기적 양상이 왕명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근초고왕부터 삼근왕까지이다. 이전시기와 마찬가지로 전통방식의 이름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고, 성명은 중국과의 교류 등 특정 경우에 제한적으로 쓰였다. 세 번째는 중국식 왕명시기이다. 동성왕이 시호를 가지게 되면서 백제왕의 이름은 살아 있을 때 사용하는 성명과 사후의 시호 등 두 가지 이름으로 체계화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왕명에도 전통성은 남아 있다. 휘를 먼저 만들고, 성씨를 나중에 붙이는 초기 성명 방식의 흔적이 보이며, 전통식의 이름이 존재하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성씨 없이 이름(휘)만으로 지칭되는 것 또한 그러하다. 성씨 도입기에 백제왕은 전통식의 이름을 쓰다가, 즉위 즈음에 중국과 교류상 요구 등의 필요에 의하여 성씨를 넣은 이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성씨의 사용이 대내외적으로 왕자(王者)임의 과시와 상징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백제에서 왕족집단 구성원 모두가 일상적으로 성씨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던 사실은 부계혈족집단의 표지라는 성씨의 내용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실제 친족집단과 (중국식의) 성씨집단 사이의 괴리가 그 원인일 수 있다. 중국식 왕명시기에도 여전했던 백제왕명의 전통성은 백제사회에서 성씨문화의 이해와 수용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The names of the kings of Baekje undergo a change in their content and composition while adopting Chinese Naming Customs such as family names and posthumous epithets. The history of Baekje can be divided into the traditional name era, early family name era, and the Chinese name era. First, the traditional name era is when the kings of Baekje had a single name according to traditional customs. From the founder King Onjo to the 12th ruler King Gye, rulers would use one name before or after their reign or death. The second era is the early family name era. The kings of Baekje had two names, one of the traditional method and the other using “Buyeo” or the abbreviation “Yeo” as a family name. Names during this time were formed by attaching the first name of the traditional regnal name to a family name, showing the transitory nature of tradition and new culture in the names of kings. This era is from King Geunchogo to King Samgeun. Like the former era, the traditional name was used in daily life, and the family name was added only in certain circumstances such as exchanges made with China. The third era is the Chinese name era. As King Dongsung used a posthumous epithet, the names of kings were systemized into a name during their lifetime and a posthumous epithet. However the names of kings during this time show vestiges of tradition. There are traces of early naming customs such as first names being made first and family names being retroactively attached, traditional names, and being referred to by first name only in daily life. In the early family name era, the kings of Baekje would first use a traditional name and move on to using a full name with a family name around their time of accession, necessitated by occasions such as exchanges with China. The use of a last name would symbolize and display their status as royalty. The fact that not all royal families of Baekje would routinely use a family name shows that the family name as an indication of a patriarchal society was not yet fully realized. This might have been due to the discrepancy between the actual group of royal relatives and the group using family names. The prevalence of the traditional nature of Baekje names show the limitations of understanding and adopting the family name customs.

      • KCI등재

        미호천(美湖川) 중상류(中上流)의 백제토성(百濟土城) 현황(現況)과 특징(特徵)

        김호준 백제학회 2013 백제학보 Vol.0 No.10

        본고는 충청북도에서 발굴조사된 백제성곽 중 미호천 중상류 일대의 土城 입지 및 형태, 축조기법 등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미호천 중상류 유역에서 조사된 백제성곽은 淸州 井北洞土城·父母山城, 曾坪 二城山城 3개소이다. 이들 성곽은 기존에 연구된 백제성곽의 입지여건과 큰 차이가 없었다. 즉 수륙교통의 요충지와 조망권 확보를 위한 입지선정이 적용되었다. 특히 이성산성의 경우 4~5세기로 편년되는 남성과 북성이 모두 내외 이중의 형태인 점과 토축산성(남성)에 작은 보루(북성)를 동반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더불어 부모산성은 이성산성과 인근 괴산 서부리토성의 본성+보루의 배치와는 구별되는 본성+복수의 작은 성과 보루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산성의 배치는 또 하나의 백제산성의 유형으로 설정할 수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토축성벽 축조방식에서 이성산성 성벽을 바탕으로 기저암반의 地釘 방식과 토루의 축조순서, 중심토루의 재료가 다양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를 세분화하여 충청북도 백제 토축성곽의 축조기법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토축재료와 관련하여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토성 축조기법 중 새롭게 밝혀진 사례로 주목받고 있는 표토블럭(turf block)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충청북도 백제 토축성곽은 無基壇式 版築 및 盛土다짐 성벽을 갖고 있으며, 영정주 간격이 2m가 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미호천 중상류 유역의 百濟土城에 대한 현재까지의 고고학 조사 성과 및 축성 기술적 특징을 도출해 냈다고 할 수 있다. 미호천 중상류 유역은 백제시대 분묘 및 생활유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미호천 중상류 유역의 백제성곽에 대한 연구는 백제의 영역 확대과정이나 지방통치 문제를 좀 더 명확히 규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百濟 滅亡後 扶餘隆의 行蹟과 活動에 대한 再考察

        김영관 백제학회 2012 백제학보 Vol.0 No.7

        This article tries to explore the whereabouts and activities of Buyeo Yung (扶餘隆, 615-682) from the collapse of the Baekje in 660 until he died in 682. He was the crown prince of Baekje kingdom, and was appointed as heir to the throne in 644. He was sent into exile at Luoyang, capital of the Chinese Tang dynasty, along with his father who king Uija(r. 641-660), the last king of the kingdom and about ten thousand Baekje people when Baekje was conquered by the Silla-Tang allied forces. Buyeo Yung did not do public activities due to his father's funeral at the early times of his residence in Tang China. After returning to the former Baekje area in July, 663, Yung persuaded the former Baekje people who engaged in the Baekje Restoration Movement to surrender to Tang forces by using his former position as the crown prince of Baekje. After the Restoration Movement was defeated, Yung was tasked with controlling the kingdom's former territory and in attacking Goguryeo Kingdom by Tang. Buyeo Yung ruled former Baekje people as Dowi(都尉, Commandant) and Dodok(都督 Supervisor-in-chief) in Ungjin Commandery. He also kept Silla from being the sole lead in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UngryongHoemaeng(熊嶺會盟), a meeting conducted by Kim Inmun of Silla and Buyeo Yung in Ungryong for the purpose of formalizing alliance, which was held in February, 664 and Mt.ChwiriHoemaeng(就利山會盟), alliance formed between King Munmu of Silla and Buyeo Yung in Mt. Chwiri in August, 665. Yung attended the Fengshan ritual (封禪) in Mt. Tai in China performed by Tang Emperor Gaozong who conferred the title of Baekje Gungong (百濟郡公, Commandery Duke of Baekje) on Yung in January, 666. In the same year Yung conducted a ritual on behalf of Tang emperor in a Kongzi Temple(孔子廟) in Qufu(曲阜), Shandong province, China. After returning to the Ungjin Commandery from China in May, 666, he control the former Baekje subject, provided Tang forces with military supplies to support Tang's expedition to Goguryeo and tried to prevent Goguryeo from connecting with Woe(倭, Japan) through diplomatic steps. These activities continued until September, 668 when the Pyongyang fortress in Goguryeo was conquered. After Goguryeo was conquered, almost all former domains of Baekje were occupied by Silla, in spite of Yung's effort to prevent Silla from being the sole lead. Furthermore he barely kept the Ungjin Commandery in existence. It was in 675 that he went to Tang. After he left, Silla finally occupied the Ungjin Commandery, which was reestablished in Geonan(建安) Fortress in the former Goguryeo’s area. Yung governed the former Baekje people who moved here and died at the age of 68 in 682. 부여융이 唐에 들어간 초기에는 의자왕의 장례를 치르느라 대외적인 활동이 거의 없었다. 부여융이 백제 고토로 돌아온 시기는 663년 7월이었고, 부흥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고 설득시켜 당군에 투항하도록 하였다. 부여융은 본인이 의자왕의 뒤를 이을 백제의 태자였다는 점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백제부흥군을 진압한 뒤에 부여융은 당의 백제 고토 지배와 고구려 정벌에 이용되었다. 부여융은 웅진도독부에서 도위와 도독으로서 백제유민들을 다스리고 664년 2월 웅령 회맹과 665년 8월 취리산 회맹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666년 1월 당 고종의 태산 봉선에 참여하였고, 백제군공의 작위를 받았다. 666년 2월 2일에는 曲阜의 孔子廟에 가서 황제를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666년 5월경에 웅진도독부로 돌아와 백제유민 按撫와 더불어 당의 고구려 원정에 필요한 군수품 지원 준비와 倭에 대한 외교적 조치를 통해 왜와 고구려가 연결되는 것을 막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668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668년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를 통해 신라를 견제하고자했지만, 신라에게 밀려 백제 고토의 대부분을 내주었고, 간신히 웅진도독부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당으로 들어간 것은 675년 무렵이었다. 부여융이 백제 고토를 떠나면서 웅진도독부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676년 2월 고구려 고토의 건안 고성에서 웅진도독부는 부활되었고, 이곳에서 부여융은 당으로 옮겨간 백제 유민들을 다스리다가 682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KCI등재

        백제 지역 출토 월요청자 및 관련 문제

        이군 ( Li Jun ) 백제학회 2018 백제학보 Vol.0 No.24

        본문은 한국 백제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 조기 월요 청자를 통해, 그 연대와 분포지역, 기종, 용도 등 여러 방면을 고찰하였고, 중국 조기 월요 청자가 백제로 유입하게 된 방식과 해상 노선 등 기초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동시에 변산반도와 죽막동 유적을 둘러싸는 해항노선상의 주요 위치와 그 역할에 대해 상세히 논하였다. 한국 백제지역에서 중국 六朝시기 100여 점의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중국 조기 월요 청자에 속하는 개체를 총 합한 수는 24점(편)이고, 주로 백제 한성시대의 수도 한성(현 서울), 그리고 웅진(현 공주), 사비(현 부여)의 세 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의 토성유적, 생활유적, 고분과 제사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 중 한성에서 가장 출토가 많이 되었고, 월요 청자는 대부분 東晉의 것이며, 수도가 존재한 시기와 부합한다.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조기 월요 청자는 주로 浙江寧紹平原, 上虞曹娥江 중류 지역과 慈溪上林湖, 古銀锭湖區域의 것이다. 조기 월요 청자의 종류를 살펴보면, 완, 발, 관, 호, 호기, 벼루, 양 형기 등이고, 출토 기물의 기능으로 말하자면, 주로 식기, 盛贮器(불교그릇), 차구, 문방용구, 위생기구와 장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출토 기물의 다양성은 당시 漢문화를 특징으로 한 중국 생활 방식과 풍습이 백제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문화 전파의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한자와 서예 예술을 주 내용으로 하는 漢문화 전파와 중국 차 문화의 전파이다. 백제로 유입된 조기 월요 청자는 반드시 해외 교역 상품과 조공품으로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해야 하고, 당시 양국 관방과 민간의 왕래와 연관이 있다.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조기 월요 청자는 아래 4가지 방식으로 백제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관방 교역이 양국 교류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양국 사신과 수행원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조공기간에 수도 建康에서 지낸 백제 사신들이 청자 그릇을 구입해 돌아갔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또한 동진의 권세 가 문이 백제의 사신을 응대 했을 때 준 선물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東晉 사신이 백제로 갔을 때, 최신 유 행하는 예물로서 백제의 관련 인사에게 선물로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동진시기 백제 승려들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을 하였다. 또한, 중국 남방 도성 建康과 백제로 승려들이 빈번 하게 오고 갔으며, 동시에 중국 일상 용품의 도자기를 몸에 지니고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견된 중국도자기 중 제사용품이 이를 증명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 현존하는 백제 사찰과 무령왕, 성왕왕릉 등의 유적들은 南朝 형식과 비슷한데, 이는 중국에서 여러 번 능숙한 공인들을 파견하여 기술을 전파하였고 장인 기술자들이 백제를 왕래할 때 일 상생활 용품 자기를 휴대하였다. 낙랑, 대방군의 유민과 당시 중국 遼東 등 내지에서 남하한 漢人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황해남도 신천군과 주변을 중심지역으로 漢人 거주구역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 중국 三國時期부터 東晉 전기까지 속 하는 월요 청자가 발견되었는데, 유민들이 정착하며 남긴 물건이다. 東晉-南朝시기 기존의 해상 노선이 막혀 백제와 중국 남방 사이에 한성, 웅진과 사비 등 지역을 출발지로 하는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 한강 혹은 금강 하류를 지나면 강화만과 군산만에 다다른다. 이어 한반도 서해 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고 황해를 건너 중국 淮河, 동남해안선에 도착해 해안선 남쪽부터 長江입구까지 다다르고 나서 다시 강을 따라 항해하면 수도 建康에 도착한다. 東晉말기와 南朝 劉宋시기 山東半島 成山角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강화만에 도달하는 北南道 항로를 새로 개척했다. 변산반도는 위치적으로 자연 환경(풍랑)과 교통의 요충지이다. 백제와 중국 남방 사이의 새로운 해상 노선 상 선박이 통행하고 정박, 경유하는데 이상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백제 웅진과 사비 시대 원양 항해의 중심지 이자, 관문이다. 죽막동 유적 및 관련 유물로 보아, 변산반도는 중국, 왜 그리고 신라 등 외래 선박 혹은 “道逕百濟” 중국으로 가는 왜, 신라의 선박들이 정착하고 환승했으며, 좋은 해풍을 기다리고, 경유하는 곳일 가능성 이 있다. 또한 죽막동 유적은 분명 당시 선박이 정박할 때, 선원들이 제사를 지내며 기도를 올렸던 장소였을 것이다. By analyzing the dynasties, geographical presence, types of ware and functions, as well as the historical records of both China and South Korea,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medium, approaches and shipping routes of Yue Kiln Celadon Porcelain into Baekje, meanwhile illustrating the important role of Beonsan Peninsula and Jumakdong site on the shipping routes. More than 100 pieces of porcelain wares have been unearthed in Baekje, of which 24 are Yue Kiln Celadon Porcelain. Most of the porcelain is found in the then capital Seoul (today’s Seoul), and the city walls, residence sites, ancient tombs and worshiping sites in the neighborhood of Seoul, Woongjin (today’s Kongju), and Sabi (today’s Buyeo). Seoul witnessed the largest amount of porcelain unearthed. The dynasties of the Yue Kiln Celadon Porcelain roughly coincide with the existence of dynasties in history. The Yue Kiln Celadon Porcelain unearthed in Baekjae are mainly produced in Ningshao Plain of Zhejiang Province, in the middle reaches of Cao’e River of Shangyu City, Shanglin Lake and Guyindian Lake in Cixi City. A variety of different wares are found, including bowls, jars, pots, urinals, ink stones, sheep-shaped containers, etc. As regard to functions, there are table wares, storage containers, tea sets, stationeries, sanitary wares, decorative wares, etc. The diversity of the wares shows that the Chinese culture, living style and customs had get across to Baekje at that time, in particular the Chinese characters, calligraphy and the Chinese tea culture. The import of Yue Kiln Celadon Porcelain into Baekje should be a result of the frequent people-to-people exchanges between the two sides, both governmental and non-governmental, instead of via trade or as gifts from the Chinese government. Based on the historical records, there might be four approaches. The period has witnessed frequently two-way flows of diplomatic envoys and attaches. The envoys from Baekje might have bought celadon porcelain wares or received as gifts from their Chinese counterparts during their visit in China and brought them back home. Likewise, Chinese envoys in East Jin Dynasty might have brought porcelain wares to Baekje as gifts to local people. In East Jin Dynasty, a lot of monks from Baekje travelled to China to learn Buddhist doctrines. During their journeys, they also brought the porcelain wares they used in China back to Baekje. This view is evidenced by some Chinese porcelain unearthed in South Korea proven to be worshiping wares. The existing Baekje Temple and the tombs of King Muryeong and Seong in South Korea are similar with the tomb styles in the southern part of China. The above-mentioned fact and other historical records indicate that China had sent skilled craftsmen for many times to Baekje to teach local counterparts, and they might have taken porcelain wares and other daily necessities with them. The former residents in Lelang and Daifang Commanderies and in East and West Liao Kingdom migrated to the Korean Peninsula and thus formed a Han neighborhood with HwangHaeNamDo Shincheon Gun at its core. The Yue Kiln Celadon Porcelain dating to Three Kingdoms Period till early East Jin Dynasty discovered in this area could be left by those immigrants. In East Jin Dynasty, as the traditional shipping route was blocked, a new shipping route between Baekje and the southern part of China was explored, starting from Seoul, Woongjin and Sabi, traveling along Han River and Geum River and then flowing into Ganghwa Bay or Kunsan Bay, and all the way southward along the eastern coast of Korean Peninsula and across the Yellow Sea to reach the mouth of Yangtze River to Jiankang. In the late East Jin Dynasty, another “North-to-South” route was established via Shandong Peninsula, across the Yellow Sea, to the Ganghwa Bay in the Korean Peninsula. Due to its unique maritime environment and geographical location, Beonsan Peninsula had become an ideal stop-over and transfer station for ships travelling between Baekje and the southern part of China, as well as an important hub and gateway for long-distance shipping at that time. The discovery of Jumakdong site and the items inside could prove that Beonsan Peninsula was very likely the stop over and transfer stations for ships from China, Japan and Silla, or ships from Japan and Silla sailing to China via Baekje. And Jukmakdong site should be the worshiping venue for crews of those stop-over ships.

      • KCI등재

        백제의 왕호(王號)·후호(侯號)·태수호(太守號)와 장군호(將軍號) - 5세기 후반 백제의 지배질서와 동아시아 -

        井上直樹 ( Inoue Naoki ),임동민(번역) ( Dong-min Lim ) 백제학회 2018 백제학보 Vol.0 No.25

        중국 황제가 高句麗, 百濟, 倭의 군장이나 그 신료에게 除授한 將軍號 등의 官爵號를 토대로 그러한 여러 나라의 지배체제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특히 백제나 왜에서는 군주 자신의 官爵뿐만 아니라, 신료에 대한 將軍號 除正 요구도 여러 번 이루어졌고, 장군호를 비롯하여 중국 황제에게 除授 받은 관작이 중시되었다. 이 중에, 백제에서는 개로왕대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백제왕의 官爵號 除正 요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宋에게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것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집요하게 송에 백제의 軍政權을 요구하는 왜에게 외교적 견제를 가하기 위함이었고, 대내적으로는 개로왕이 제수된 관작, 특히 장군호를 토대로 신료들을 왕권 아래에 위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개로왕은 중국 왕조의 장군호에 의거하면서 신료를 서열화하고 있었다. 그 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일시적으로 멸망의 위기를 맞았다. 곤란한 상황에서 즉위한 동성왕은 南齊에게 신료의 장군호 제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것과 연동된 백제 왕족, 귀족의 3품 장군에게는 백제 독자의 王號를, 4품 장군에게는 侯號를, 한인 관료의 3·4품 장군에게는 太守號를 신하들에게 수여하고 있었다. 5세기 후반의 백제에서는 백제 귀족이나 한인 관료들을 왕권 아래에 위치시키기 위해, 중국 장군호를 극히 중시하고 있었다. Attempts to account for the domination-system of various countries, such as Koguryo, Paekche, Wa, have been made for a long time, based on the ‘Changgunho’(將軍號, the name of General titles). Chinese emperor gave ‘Changgunho’ to kings or officials of Koguryo, Paekche, Wa. In particular, there had been numerous requests for the ‘Changgunho’ of officials in Paekche and Wa as well as the titles of kings in Paekche and Wa. The titles received from the Chinese emperor, including ‘Changgunho’, were valued in various countries. King Kaero of Paekche actively requested titles from China. In this way, Paekche was officially recognized by the Liu Song dynasty for its international status. The purpose of Paekche diplomacy was to apply diplomatic checks to Wa, which was persistently demanding the military administration of Paekche to China, and to control to officials, based on King Kaero’s the name of titles(Changgunho). King Kaero ranked his officials according to the Chinese dynasty’s ‘Changgunho’. Later, Paekche was temporarily in danger of collapse due to Koguryo's attack on the capital. King Tongsong, who took the throne under difficult circumstances, asked Southern Qi for the title of ‘Changgunho’, and gave the ‘Wangho(王號, king title)’ to Paekche royal family and nobles who were given the third rank ‘Changgunho’, and gave the ‘Huho(侯號, marquis title)’ to the fourth rank ‘Changgunho’, and gave the ‘T'aesuho(太守號, governor title)’ to Chinese officials in Paekche who were given the third or fourth rank ‘Changgunho’. In Paekche, in the late 5<sup>th</sup> century, ‘Changgunho’ was highly valued to place Paekche nobles and Chinese officials in Paekche under the King’s throne.

      • 『일본서기(日本書紀)』 편찬과 백제계(百濟系) 사관(史官)

        박재용 백제학회 2011 백제학보 Vol.0 No.6

        720년에 완성된 『日本書紀』는 수십 년 동안 백제계 사관의 역사서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 推古朝에 최초의 백제계 사관이 등장하여 「國記」를 편찬하였다. 그 「國記」는 『일본서기』 편찬의 시작을 알리를 天武朝의 ``記定`` 사업의 근간이 되었다. 天武·持統朝에 천황과 씨족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각 씨족들은 백제계 사관이 작성한 대외관계기사를 바탕으로 조상들의 활약상을 과대 포장하였다. 이후 율령 국가의 시작인 文武朝를 거치면서 체재 등의 골격이 완성되고, 『일본서기』 편찬의 최종단계언 元正·元明朝에도 많은 백제계 사관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당대 유명한 문인들로 『일본서기』의 문장이나 체재를 정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백제계 사관은 일찍이 백제왕이 보냈거나, 망명 백제인들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백제계 사관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안의 내력이나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겠지만, 당대 가장 큰 세력가인 藤原氏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백제계 사관들은 藤原氏와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머물고 있던 곳은 공통적으로 畿內, 그 가운데에서도 河內 지역에 대부분 거주하였다. 이들은 서로 동족관계를 맺고 기내의 유력씨족들과 결탁함으로써 계속해서 사관집안 혹은 유명한 문인집안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에 계속 투입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일본서기』 이후의 사서 편찬에도 참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720年に完成した『日本書紀』は, 數十年の間, 百濟系史官の歷史敍述に多くの部分を依存した. 推古朝に最初の百濟系史官が登場し, 「國記」が編纂された. その「國記」は, 「日本書紀」編纂の開始を告げる天武朝「記定」事業の根幹となった. 天武, 持統朝に天皇と氏族の根源を明らかにする作業がなされる過程においては, 各氏族は百濟系史官が作成した對外關係記事を土台に, 自身の氏族の活躍像を誇大表現した. 以後, 律令國家の開始である文武朝を經る中で, 體制などの骨格が完成され, 『日本書紀』編纂の最終段階である元正, 元明朝にも多くの百濟系史官が投入された. 彼らは當時著名な文人であり, 『日本書紀』の文章や體制整備を擔っていたのであろう. 百濟系史官が『日本書紀』編纂に加わることができたのは, その一族の來歷や個人的な能力もあったが, 當時最も大きい勢力家であった藤原氏との關係を無視することはできない. 樣樣な資料を檢討した結果, 百濟系史官は藤原氏との關係が非常に密接であることが分かった. 百濟系史官は, かつて百濟王に派遣された者や, 亡命した百濟人の子孫であるが, 彼らが留まっていた地域は決まって畿內であり, その中でも河內地域に大部分が居住した. これらは互いに同族關係を結び, 畿內の他の有力氏族らと結託することによって, 引き績き史官家あるいは著名な文人家に成長することができた. 同時に, これは『日本書紀』編纂に繼續して投入される資格を得ることとなり, 『日本書紀』以後の史書編纂に加わる基礎となった.

      • KCI등재

        백제 성씨문화의 이해

        박윤선 백제학회 2019 백제학보 Vol.0 No.29

        Surnames in China were, first, an intensive expression of the social tradition of patrilineal descent and patrilocal residence. The name was shared by the members of the agnate kin. Second, they were both an indication of patrilineality and social status. For a formation of a patrilineal or matrilineal, thus unilineal line of descent, the prevalent marriage tradition must be exogamy and the patrilocal residence. However while possibilities of endogamy are spotted in Baekje, those of patrilocal residence are not.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ascertain agnatic kinship while ruling out matrilineality. It seems safe to assume Baekje wanted the foundation to realize surname culture. Even the royal family, who were certain to have surnames, didn’t routinely use surnames in records. They also used different surnames between father and son, showing surnames failed in serving their purpose to indicate patrilineality and unite the members of kin. It is also hard to assume the existence of surnames in Baekje at all. It is thought that the kings of Baekje would use surnames in exchanges with China to express a cultural homogeneity and promoting a diplomatic expedience. Thus the role surnames played was different to its origin. Namesakes, who show possibility of names developing into surnames, tend to take after the names of kings. “Goyi”, “Dongsung”, “Giru”, and “Sam-geun” are names of Baekje kings used by later members of the royal family. Out of these, “Goyi” seems to have developed in to a surname while “Dongsung” has failed to reach that level. “Giru” could be an indicator of matrilineal kin or an indigenous Baekje word. “Cho-go”, “Gu-su”, and “Gae-ru” seem to be simply reused names of earlier kings. While every name differs in its function, the namesake of the names of earlier kings display the fact that the owners are royalty, thus serving its function to show social status. “Hae”, an honorary title of Buyeo, developed into a Baekje surname. “Mak-go”, “Gap-bae” were not surnames but were titles showing social status. Surnames in Baekje weighed more toward showing social status than indicating patrilineality. People’s names in general in Baekje would actively adopt terms that indicated social status, thus being homogeneous in nature to said surnames. Early Baekje was introduced to surnames and was socially adapting to the concept. The surnames failed to full realize their function and were partially integrated into society. This is in part due to the disparity between actual kinship and the kinship surnames expressed, and is also due to the disparity between Baekje’s intent in using surnames and their original function. 중국의 성씨는 첫째, 부계(父系) 혈통율과 부거(夫居)의 거주율이 원리였던 사회적 관습의 집약적 표현으로 부계친족집단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둘째, 부계 표지이자 신분 표지로 형성되었다. 부계나 모계의 단계(單系) 출계집단의 형성을 위해서는 동성불혼의 외혼의 관습(exogamy)이, 부계중심의 친족집단 형성을 위해서는 부거제적 혼인 방식이 지배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성혼의 가능성이 포착되고, 부거제는 확인되지 않는 한편 처거제적인 혼인사례가 추론되며, 따라서 모계를 배제한 부계 중심의 친족집단이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즉 백제사회는 성씨문화가 구현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백제에서 성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왕족집단의 경우에도 인명표기에서 성씨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백제 인명에서 성씨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고 전제할 수 없다. 또한 부자 사이에도 다른 성씨를 사용하는 등 부계 출계 표지나 동일 친족집단의 구성원임을 드러내고 결속하는 것과 같은 성씨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백제왕들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성씨를 사용하여 중국과 문화적 동질감을 표현함으로써 외교적인 편의를 도모했다고 생각된다. 성씨 사용 목적이 본래의 역할과 다른 것이다. 성씨의 가능성이 있는 이름으로서 살펴본 동명이인들에는 왕명이 상당히 많다. 고이, 동성, 기루, 삼근 등 백제왕의 이름들을 후대 왕족들이 사용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이는 성씨 단계에 진입하였고, 동성은 아직 성씨화에 이르지 못한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모계 친족집단명 혹은 백제 고유 단어의 가능성이 있는 기루, 단순히 후대왕들이 재사용한 선조왕의 이름인 초고·구수·개로 등의 이름들은 각각 그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선조왕의 이름을 사용하여 왕손이라는 사실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신분표지적인 역할을 공통적으로 행한다. 그 밖에 부여계 존칭 해는 백제에서 성씨화되었고, 백제 고유의 막고·갑배 등은 성씨가 아니지만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호칭이었다. 백제 인명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을 드러내는 호칭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재사용된다는 점에서 성씨와 비슷해 보였고, 역할은 성씨와 다르지 않았다. 백제사회는 성씨를 수용하여 사회적으로 적용해가고 있었는데, 성씨 본연의 의미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한편 성씨가 표현하는 친족집단과 백제의 실제 친족집단과의 괴리에서 기인한 바였고, 다른 한편 백제에서 성씨의 활용 양상과 성씨의 본연의 역할과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 KCI등재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정동준 백제학회 2019 백제학보 Vol.0 No.29

        Regar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Mahan, this paper reviewed the literature materials and related studies on the relationship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which was problematic in the prevailing theory, and examined literature materials and related studies on the south of Geum River and north of Noryeong Mountains, Yeo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 The summary is as follows. This paper reviewed the article of King Onjo of Baekjebongi(百濟本紀) in Samguksaki (三國史記) and literature materials related to the construction of Byeokgolje which were materials on Baekje’s annexation of Mahan before the reign of King Geunchogo, and also reviewed the Jinguki(神功紀) of Nihonshoki(日本書紀) which was material on annex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The results of the review showed that all three materials lack of evidence that Baekje’s annexation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be convinced that the prevailing theory before the 1990s was a theory proven through literature material. This paper also reviewed Baekjejeon(百濟傳) of Chinese official history and Oujinki(應神紀) of Nihonshoki which were literature materials on the trends in southern area of Geum River after the 5th century. Both materials showed that Baekje did not carry out the territorialization of the area until the 5th century. This article examined various literature materials on the trends of You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s after the 5th century, including the Samguksaki, Nihonshoki, Baekjejeon of Chinese official history. Through these materials, it was confirmed that the Yeongsan River basin became a part of Baekje's territory at some point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and that the small states of Yeo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 which had remained in the state of ‘subjugation’ until the reign of King Muryeong, were territorializ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 In addition,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at Seomjin River basin, such as Gimun(己汶) and Daesa(帶沙), was incorporated into Gun(郡: county) which was a territory of Baekje no later than 600, and that the Dam-ro system(擔魯制) was implemented in the 530’s and the five Bang(方: province) system in 540s. 이 글에서는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하여 먼저 통설에서 문제가 되었던 근초고왕대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한 사료와 관련연구를 재검토하고, 금강 이남 노령산맥 이북,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순서로 사료와 관련연구를 검토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초고왕 이전 백제의 마한 통합에 대한 사료로서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조와 벽골제 축조 관련 사료, 근초고왕대 백제의 마한 통합에 대한 사료로서 『日本書紀』 神功紀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3개 사료 모두 근초고왕대에 백제의 마한 통합이 완료되었다는 근거로 부족한 점이 있어서, 1990년대 이전의 통설은 적어도 문헌사료로 입증된 학설이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5세기 이후 금강 이남 지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中國正史 百濟傳, 『日本書紀』 應神紀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두 종류의 사료 모두 5세기까지 백제가 금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역화를 관철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5세기 이후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여러 사료 『三國史記』·『日本書紀』, 中國正史 百濟傳 등 여러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들 사료를 통하여 영산강 유역이 6세기 중반의 어느 시점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고, 무령왕대까지 ‘복속’에 머물렀던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소국들이 성왕대에 영역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己汶·帶沙 등 섬진강 유역이 늦어도 600년을 전후한 시점에는 백제의 영역으로서 郡으로 편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530년대에 담로제가, 540년대에 5방제가 실시되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