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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형문화재에서 무형문화유산으로 -글로벌 시대의 문화 표상-

        정수진 ( Soo Jin Jung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3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53 No.-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법제화된 무형문화재 제도는 국가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으로 영위되던 지역의 생활양식들 중 역사적?예술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별하여, 그것이 국가적 정체성과 낭만적 민족의식을 담보하는 문화적 표상으로 기능하도록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 문화적 표상은 국가적 차원을 넘어 세계적 표상으로 거듭나고 있는바, 이러한 양상은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싸고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가속화되었다. 이른바 무형문화재에서 무형문화유산으로의 전환은 그 명칭의 변경 이상으로 그것이 기왕에 지녔던 문화적 표상으로서의 위상과 의미 및 기능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 글은 표상의 의미와 기능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주목했던 뒤르케임과 오기노 마사오의 논의를 방법 삼아 그 변화의 양상을 고찰했다. 오기노는 지역의 생활양식이 문화재로 거듭나는 양상을 ``추억의 질서``에서 ``문화유산화``로의 전환으로 분석했지만, 이 글에서는 무형문화재에서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변화를 ``추억의 질서``에서 ``문화유산화``로의 전환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그 전환이 후기자본주의 시대 일기 시작한 문화유산의 산업화 양상과 연동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The System of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legislated by enactment of the Protection of Cultural Properties Act at 1965, has selected the things considered to have historical and artistic value among the local lifestyles that were engaged relatively autonomous from the state, and operated them to function as a cultural representation to guarantee of national identity and the romantic national spirit. But now beyond the national level the cultural representation become a global representation, this aspect has been accelerated in a stiff competition among the East Asian countries surrounding UNESCO`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list. The change so-called from the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to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entails the change of the previous social status, meaning and function the cultural representation had, more than the change of its name. This paper investigate the aspects of the change with the sociological dimension of Durkheim and Ogino Masao who noted the meaning and functions of the social representation as theoretical methods. Ogino have explained the aspect that the local lifestyles are reborn as a cultural properties as the transition from the “order of memory” to “making heritage”, but this paper regards the change from the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to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s the transition from the “order of memory” to “making heritage.” And it argues the transition to be interlocking directly to the commodification of cultural heritage started to happen in late capitalist era.

      • KCI등재

        일본의 문화외교와 국가브랜드 전략으로서의 쿨재팬

        강성우 ( Sung Woo Kang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65 No.-

        본고는 기존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일본의 대외문화정책의 추이를 통시적(通時的)으로 고찰하고, 21세기 일본 문화외교의 구호인 ‘쿨재팬’ 정책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일본 문화외교의 의미와 한계를 논의 한 것이다. 특별히 일본의 문화외교의 흐름을 전체로서 조망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세계화로 국경의 장벽이 낮아지고 국가 간 사회, 경제,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세계 각국은 자국의 이미지 개선과 국가 브랜드 가치 증대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 일본은 패전국이나 침략국가라는 이미지를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문화국가로 변화시키고, 경제발전과 수출촉진을 위해 경제외교를 진행했으며, 경제적 강대국으로 부상한 이후 일본의 국제적인 역할에 대한 요구에 대한 대안으로 문화외교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쳐 21세기에 일본이 내놓은 문화외교의 방안은 “쿨재팬”이다. 일본은 21세기 산업구조를 변화시키고 경제ㆍ문화교류와 협력을 증진하며, 소프트 파워를 강화시키면서 국가브랜드를 높이는 방안으로 “쿨재팬”으로 브랜드화 했으며, 제조업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굴뚝 산업뿐 아니라, 의식주와 문화 콘텐츠 (애니메이션, 드라마, 음악 등)를 포함한 “문화와 생활양식(life style)”의 매력을 경제적 부가가치(附加價値)가 있는 문화산업의 형태로 변형시키려는 정책적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을 개선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대외문화정책을 활용하고 있다. 이에 일본의 대외문화정책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문화정책에 의미 있는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하겠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Cool Japan” as a Japan’s cultural diplomacy and nation-branding strategy in the 21st century. After World War II, Japan was in need of transforming its nation’s image. The foundation of the “peaceful expansion of Japan’s economic power. After the economic recovery in the 1950s, Japan began to rebuild it state as well as its nation image. As Japan grew into an economic superpower in the 1960s to 1980s, Japan exercised its power and influence other countries and attempted to expand its ”economic cooperation“ to promote exports. At the same time, Japan turned the formal KBS(Kokusai Bunka Shinkokai) into the Japan foundation(Kokusai Koriyu kikin) in 1972 in order to redeem its image from militaristic and fascist to peace-loving and democratic state. Moreover, Japan strategically continues to enhance its national brand. In the coming of new era, Japan desired to transform its “industrial structure” by focusing on cultural sector. I will examine how “Cool Japan” slogan came about in the early 2000s and will analyse the promotion of “Cool Japan” project in depth. Moreover, Japan launched “Cool Japan Fund” to invest private companies to promote Japan’s popular culture, such as comic books, movies, fashion, and food. Japan has been successful in promoting its image and national brand. Japan’s Cool Japan strategy is a dire reminder of what it means to be “cultural diplomacy” and “nation-branding,” which is prevalent in the world of diplomacy and politics.

      • KCI등재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초기 호남(湖南)의 급진적 조반(造反) 운동과 그 참여 동기 -성무련(省無聯)의 결성과 참여 세력 분석을 중심으로-

        서석하 ( Seo Sukha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9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76 No.-

        본 연구는 문화대혁명 초기 진행된 湖南의 조반 운동, 특히 호남의 조반 조직인 ‘省無聯’이 진행한 조반 운동을 분석한다. 구체적으로, 호남의 지역적 정치 상황과 ‘성무련’의 성립 배경, 그리고 참여 세력의 동기를 규명하여, 1967년 중순 당 중앙의 질서 회복 정책에도 불구하고 ‘성무련’이 체제 이반적인 조반 운동을 지속하게 된 현실적 원인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문화대혁명의 질서 회복 국면에서 성립한 ‘성무련’에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집단들이 참여하였다. 이들 참여 세력은 참여 동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학생조직들의 경우 ‘계속혁명’을 주장하며 모택동이 애초에 제시하였던 급진적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성무련’에 가담하였다. 둘째, 문화대혁명에서 배제된 조반파들은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조반’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행사하지 못했던 ‘經濟主義’, ‘右派’ 집단들은 아직 개선하지 못한 자신의 경제적 빈곤, 낙인의 제거 등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처럼 상이한 입장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성무련’이었다. ‘성무련’이 당시 주변부적 위치에서 질서 회복 정책을 거부하며 ‘성혁주’와 대립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참여 집단들에게 장래의 상황 개선 기회를 보장해주고 그 기간 역시 연장시켜줄 수 있다고 기대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성무련’ 참여 동기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집단들이 어떻게 ‘성혁주’의 질서 회복 정책에 대한 거부라는 지점에서 수렴되어 ‘성무련’의 체제 이반적인 조반 운동에 참여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당 중앙의 지지 아래 시작된 초기의 조반 운동이 체제 이반적 성격으로 변화하는 데에는 이념적 요인뿐만 아니라 지역의 정치 역학과 사회경제적 상황 등 현실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aimed to illustrate the rebel movement in Hunan province in the early phase of the Cultural Revolution(1966~1968), with the emphasis of Shengwulian 省無聯, a local rebel organization formed in Hunan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As the first empirical study on Shengwulian, this study analyzed how Shengwulian was initially formed and organized. In addition, it focused on each participant joined in Shengwulian, making sense of the strong motivation that drove the Shengwulian’s rebel movement onward even under the campaign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CCP) to restore order against the rebels since the mid-1967. The participants who joined in Shengwulian had the antagonism against the party and Shenggechou 省革籌. On the basis of their anti-establishment antagonism, the participants of Shengwulian shared three motivations. First, some of them, especially students, insisted the Mao’s theory of Continuous Revolution, participating in Shengwulian to pursue the ideal of the Cultural Revolution. Second, the rebels excluded from the Cultural Revolution by Shenggechou hoped to defend themselves and retrieve their influence in the Cultural Revolution. Lastly, the “rightests 右派” and “economistic 經濟主義” groups of the lowest class of Hunan society, which did not have the right to rebel, joined in Shengwulian to elevate their socio-economic status out of stigma and poverty. Shengwulian was able to bring people of diverse backgrounds together into one. It is because the participants could be against Shenggechou that threaten them at that time and shared a sense of hope to resolve each their own difficulty by taking part in the Shengwulian. This study on motivations of participants shows that why various social groups was against Shenggechou’s policy that sought for the restoration of the social order and participated in the rebel movement of Shengwulian. In this respect, this study validated that the power dynamics and socio-economic condition in local level as well as ideological factor played a major role in making the rebel movement started by the support of CCP turn rebellious and against the party's direction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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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근대 부르주아의 표상의 정치학, 개벽사 『별건곤』의 "조선의 자랑"호구

        차혜영 ( Hye Young Cha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58 No.-

        본고는 『별건곤』 1928년 ‘조선의 자랑’호의 조선표상의 정치학에서 “근대학지를 승인하기 → 문화(과거)를 정당화하기 → 현재(미래)의 권리를 상상하기”의 문법을 갖고 있으며 이 구도속에서 문화, 과거, 조선이 핵심적 지위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구체적 담론분석을 통해 2장에서 1. 과거·조선(특수)를 ‘근대적 知(보편)’의 체계로 질서화·범주화하는 방식, 2. 외국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를 경계짓는 방식, 3. 우리의 문화·역사적 정체성을 통해 재산권을 유추하는 방식, 4. 우리의 다양성의 범위와 대표성을 표상하는 담론정치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별건곤』 ‘조선의 자랑호’ 기획에서 표상된 ‘조선-공통의 우리’는, 진보하는 시간, 미래로의 시간 속에 과거-현재-미래로의 발전론적 연속체 속에 자기를 준거시키고, 과거로부터 주어진 문화적 정체성을 근대 발전론적 주체가 갖는 재산권으로 전유하는 담론전략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 발전론적 주체가 그 문화적 권리를 근거로 부재하는국가의 주권적 정당성을 상상해내는 표상의 정치학과 동전의 양면으로 함께 갖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 권리(재산권과 주권)의 근거는 ‘제국의 근대지·보편의 학지’임을 자신의 문화적정당성과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해석해내는 그들의 역동적인 전유의 정치학도 살펴보았다. 이는 1920년대 이전, 즉 1차 대전 이전 문명론이나 사회진화론적인 시간 따라잡기를 통해자기를 세계 발전의 시간표 끝자락에 두는 사고방식과도 다르고, 1930년대 이후, ‘자기’를 비자본주의 비근대적인 정신적 상징이나 이미지에 두는 단군담론, 로컬리티로서의 조선적인 것,여성적 심상으로서의 조선적인 것과도 다른 지점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러나 역동적인 언표적 좌표계의 단절과 전환의 전략은, 동시에 1925~1928년 식민지 조선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미디어 기획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또다른 정치학이 관철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1925년, 1928년 자치론이 처음 점화된 직후, 그리고 두 번째 자치론이 재점화된 직후~신간회에 참여했던 시기로서, 조선 사회 담론장에서 통일전선, 연합, 대동단결이 화두가 된 시점이다. 자치론과 『별건곤』 조선의 자랑호를 병치해서 해석한 결과, 분열의가시화, 통합이 시대의 아젠다가 된 시점에서, 이들은 조선의 문화적 고유성과 문화적 독립성, 그리고 당대 그 시점에서 조선인이 가진 재산목록, 그리고 그 재산의 진정한 소유주로서 품성을 조선적 자랑으로 설득하는 표상의 정치학, 담론적 정치학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e 94 articles from ‘The Edition of Chosun’s Pride’ published in 1928 in 『Byeolgeongon』 have been dealt with by interpreting our real boundary through the issues: 1. Who we are (historical legitimacy and cultural uniqueness), 2.We have the right (right to equality through comparison with others), 3. What it is that we have (claim of ownership according to the right), and 4. Who our representative is. This allowed us to examine the other points, which are different from a way of thinking of putting ‘oneself’ at the edge of timetable of the world development through catching up with the time of the civilization or social darwinism before the First World War, or from the Dangun, locality, feminine imaginary of comparing ‘oneself’ to non-utility, non-capitalist, and non-modern mental symbols after in the 1930s. The ‘Joseon-we in common’ stressed out in those articles shows us a discourse strategy of comforting oneself in the time progressing and the time in the future, i.e. into the development theory continuum to the past-present-future, and of appropriating the cultural identity given from the past with the property owned by the subject of the modern development theory. At the same time, the subject of the development theory has the face and back of a coin. In other words, it is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of imaging the sovereign legitimacy of a nation (ethnic), which is absent on the ground of cultural rights. For the ground of such rights(property right and sovereignty), their dynamic appropriation of politics have been examined, which interpret ‘imperial modern knowledge’ and ‘universal academic knowledge’ as their cultural legitimacy and capitalistic ownership. However, this strategy of severance and transition of the dynamic locutionary coordinate allowed us to find out that another politics in specific historical circumstances is realized, which is the plan of bourgeois nationalist media of colonial Korea from 1925 to 1928. The period was over the time shortly after the self-government theory was ignited first in 1925 and secondly in 1928. It was the time when the topic of the united front, coalition, and mass-unity was raised in the Joseon social discourse. The analysis of the ‘self-government’ theory and of ‘The Edition of Chosun’s Pride’ in 『Byeolgeongon』 as well revealed that at the time when the contemporary split was visualized and the integration became the agenda of the times thereof, they were performing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and the discursive politics to persuade Koreans to regard the cultural uniqueness and independence of Joseon, the list of properties owned by the Koreans at that point of the contemporary, and the character as the real owners of those properties, as the pride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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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통의 표상 공간, 인사동의 형성

        전우용 ( Woo Yong Chun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60 No.-

        ‘전통’은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상징들이자 표상이다. 이것은 스스로 역사를 ‘공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합의하여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과 전승의 필요성을 인정한 ‘낡은 것들’로서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모두와 관계를 맺는다. 전통이라는 단어는 자주 ‘과거로부터 면면히 전승되어 온 공동체 문화의 정수’라는 의미의 접두어로 사용된다. ‘전통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까운 과거’에 발명되었지만 그것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관습과는 달리,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 믿음의 대상이다. 그런데 대상을 ‘전통들’의 집체 또는 연쇄로 구성되는 도시 공간으로 확장하면, ‘전통의 불변성’이라는 명제를 더 이상 고수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의 거리’인 인사동의 경우, 1988년 서울시에 의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었으나, 2014년에도 서울시와 종로구는 ‘인사동 전통문화 거리’를 ‘되살리는’ 계획을 수립, 추진 중이다. 인사동 공간이 변화함으로써 ‘전통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를 재구성하고 보수하겠다는 것이 이 계획의 취지다. 그런데 인사동의 가로 경관과 분위기를 구성하는 전통들의 훼손과 변형에 대한 지적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인사동의 변화에 대한 불만은 1960년대부터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생활과 사회관계의 급속한 변화가 전통의 ‘발명’을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 공간의 급속한 근대화도 전통 공간의 ‘발명’을 필요로 했다. ‘전통 공간의 발명’은 변화가 일상이자 정상인 근대 도시 공간 내에 변화가 억제 또는 유보된 장소를 남겨 둠으로써 도시의 역사성과 지속성을 표현하려는 집단적 욕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 공간은 서화나 골동과는 달라 화석 상태로 유지할 수는 없다. 전통 공간이란 변화가 정책적으로 억제, 관리되는 공간일 뿐이다. 변화 속에 ‘불변성’을 끼워 넣어야 하는 이율배반 때문에, 도시 공간의 전통성은 수시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또 전통은 ‘발명’되기도 하지만 과거의 여러 자원들 중에서 ‘발굴’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거리 또는 전통 공간을 관리, 보존하는 문제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낡은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여 전통의 이미지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울 인사동이 한국적 전통, 또는 서울의 전통문화를 표상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변화해 온 과정은, 한국인들이 ‘전통’으로 인정한 요소들이 특정한 도시 공간 내에 어떻게 퇴적되었고, 그것들이 어떤 이유로 보존 또는 발굴되었으며, 어떤 필요와 관점에서 상호 연계를 맺고 ‘전통’의 이미지를 구성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이 연구는 인사동의 ‘전통’을 구성하는 요소로 인정되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를 살핀 것이다. 현재 인사동의 경관을 구성하는 ‘전통적 요소’들은 거의 전부가 ‘근대의 산물’들이다. 인사동은 한국인이 최초로 근대적 민영 출판사를 설립한 곳, 한국 최초의 근대적고서점이 자리 잡은 곳, 한국인 洋醫가 처음으로 개인병원을 낸 곳, 한국인이 처음으로 ‘바’를 차린 곳, 조선체육회와 조선음악가협회가 처음 자리 잡은 곳,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 있는 곳이다. 이들이 처음 인사동에 ‘전통’의 이미지를 부여했고, 1970~1980년대 서울의 다른 지역들에서 ‘전통 경관’들이 급속히 소멸한 뒤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특별한 지위로올려놓았다. 그런데 도시 공간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억제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전통’의 이미지는 수시로 재구성되어야 했다. 인사동에서 ‘전통’이 형성, 발굴, 창조, 재구성되어 온방식은 향후 서울의 ‘전통경관’ 또는 ‘전통공간’과 관련한 논의에 풍부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Tradition is the past alive in the present and the symbols or representations to demonstrate that the present and the past is connected one another. These are old things that people who believe they share same history agree to endow special value and to acknowledge necessity of conserving and transmission. These are connected with pattern of behavior, way of thinking, tools and goods of all the people in a nation. The word Tradition is often used as prefix that means the essence of culture of community continuously passed down from the pas’. The most part of traditions were invented in near past than people think, however they believe that traditions must be constant and unchanging. In this regard, traditions are different form the customs which people think that changing is natural. However, in the case of expanding the objects to city space, we can not insist eternity of tradition anymore. Insa-Dong has been appointed the street of traditional culture by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in 1994, but the metropolitan government and Jongno-Gu are still trying to make a plan to revive the traditionon this place in 2014. The purpose of this plan is to reconstruct and repair the traditional image of Insa-Dong space which has been damaged by the development of city. By the way, the complaints against the change of Insa-Dong has been raised repeatedly since 1960’s. The rapid modernization of city space needed the invention of traditional placeas the rapid change of life and social relationships needed the invention of tradition. The invention of traditional space is a fruit of the collective desire to express urban historicity and durability. However, city spaces can not be conserved for ages. The traditional space in a city is in fact the space controlled by city government or civil society with the perspective of conserving traditionalculture. The traditionality of city space must have been reconstructed repeatedly, because of coexistence of changes and persistences. Also, tradition is more associated with excavation than invention. Thus, making traditional space is a kind of selection among old things that has been transmitted from the past. The change process of Insa-Dong street shows how Korean traditions or Seoultradition were deposited in city space, how they were conserved or excavated, and how they constructed the images of tradit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at how the cultural factors which Koreans acknowledged their own tradition settled in Insa-Dong. Almost all of traditional factors in present Insa-Dong are the products of city modernization in fact. The first modern private publisher, the first modern antique bookstore, the first modern western hospital, the first modern bar, the first modern music store, the first modern association of sportsmen, the oldest restaurants in Seoul were all in Insa-Dong. At first, these assign Insa-Dong the image of tradition, and as old sceneries rapidly has became extinct on other areas in Seoul,Insa-Dong can be the only one traditional culture street in Seoul. However, the city space is fundamentally changeable, so this image of tradition was frequently reconstructed. The way tradition was made, excavated, created, and reconstructed in Insa-Dong, will give a lot of lesson for the discussion about the future traditional scenery or traditional space in Seoul.

      • KCI등재

        특집2 : 글로벌 시대와 동아시아 문화의 표상 ; 일본의 상징으로서의 후지산 -그 표상을 둘러싼 또 하나의 시좌-

        이경희 ( Kyung Hee Lee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3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54 No.-

        본 논문은 후지산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시좌를 전면화한 쇼와[昭和]시대의 세 텍스트에 주목하여, 그러한 시좌가 어떻게 해서 일본의 상징으로서의 후지산의 문화적 측면을 공고히하는 결과로 이어졌는가를 조명한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소설 <부악백경(富嶽百景)>(1939년)의 일인칭 시점화자인 ‘나’는 ‘닛폰의 후지야마’와 ‘실제 후지’의 균열을 절대시한다. ‘나’는 정형화된 ‘닛폰의 후지야마’에 대한 대항 이미지로 ‘실제 후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 ‘실제 후지’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이데 다카시[出隆]는 <후지담의(富士談義)>(1948년)라는 에세이에서 자연 존재로서의 후지산( ‘저것’)과 일본의 상징으로 인격화된 후지산( ‘저 녀석’)의 굴절된 관계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의 분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과도한 집착을 보였다. 따라서 그가 ‘인민의 적’인 부르주아계급과 한패이자 증오와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후지산에는 양자가 혼재되어 있다. 그 결과, ‘자연 존재로서의 후지산’에 대해서는 기약 없는 유보만 있을 뿐끝내 구체적인 비전은 제시되지 못한다. 가가 오토히코[加賀乙彦]의 소설 <신부악백경(新富嶽百景)>(1981년)에는 ‘바라보는 후지산’과 ‘오르는 후지산’이 후지산의 이중 구조로 제시된다. 후지산을 바라보는 산으로만 여겨 왔던 ‘나’는, 사진가 친구의 강한 권유에 못 이겨 처음으로 후지산에 오른다. 그런데 이날 이후로 ‘나’의눈에 비친 후지산은 유한한 인간의 삶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만하고 무심하게 서 있는 거대한 대자연이다. ‘나’는 이와 같은 후지산을 거부한다. 따라서 ‘자연 존재로서의 후지산’의 실체는 여기에서도 온전히 복구되지 못한다. 일본은 후지산의 세계유산등록 추진에 있어 자연유산이 아닌 문화유산으로서의 등록의 길을 택했다. 후지산은 세계자연유산의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세계문화유산의 기준은 채울 수 있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즉, 세계가 인정하는 후지산의 유산적 가치는 자연 존재로서가 아니라 ‘일본의 상징’으로 기호화된 문화적 측면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판단은 적중하였고 후지산은 지난 6월 22일에 드디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본 연구에서 다룬 상기의 세 텍스트는 ‘실제 후지’(=자연으로서의 후지산)의 존재를 강하게 확신하고 규명하려 하면 할수록 그실체에서 멀어진다고 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마치 그것은, 단독으로는 좀처럼 증명되기 어려운 자연 존재로서가 아니라 문화적 존재(=일본의 상징)로서의 가치를 세계로부터 공인받게 된 후지산의 현주소를 예견한 듯한 것이었다. This study observed literature texts in the Showa period that the critical viewpoint about the Mt. Fuji nationalism was fully extended and focused on how the critical attempt helped to solidify the cultural aspect of Mt. Fuji (symbolization of a state). ‘I’, a first person narrator in “One hundred views of Mount Fuji”, a novel written by Dazai Osamu in 1939, absolutized a rift between and ‘Hujiyama in Japan’ and ‘the real Fuji’. ‘I’ represents ‘the real Fuji’ as an image opposing against ‘Hujiyama in Japan’. However, it is just the image independently created by ‘I’. There is still no trace of ‘the real Fuji.’ While calling the biased close relationship between ‘Mt. Fuji as a natural being(that thing)’ and ‘Mt. Fuji as a historical being(that guy)’, Ide Takashi emphasized that it would actually be impossible to separate them in “Discussion on Fuji”(1948). As a result, Mt. Fuji defined as ‘the enemy of people’ and the object of hatred and struggle in collusion with the bourgeoisie is Mt. Fuji that the two things are mixed. However, he did not eventually present any vision related to ‘Mt. Fuji as a natural being’ introduced after years of struggle. Mt. Fuji is setup into a double structure, ‘Viewing Fuji’ and ‘Climbing Fuji.’. “A New One hundred views of Mount Fuji” written by Kaga Otohiko in 1981. ‘I’ who just considered Mt. Fuji as ‘Viewing Fuji’ climbed up to the summit of Mt. Fuji according to a strong advice of one of his friends, a photographer for the first time. Since then, Mt. Fuji seen in ‘I’s eyes becomes the huge mother nature standing arrogantly and indifferently without thinking of the finite human life. ‘I’ is hostile to and denies Mt. Fuji. In this sense, the true nature of ‘Mt. Fuji as a natural being’ is not fully recovered even her. Japan registered Mt. Fuji as a cultural heritage, not a natural heritage in promoting Mt. Fuji to be registered as a World Heritage Site in 2004 because it was judged that Mt. Fuji could meet the standards for the registration of a world cultural heritage site, not a world natural heritage site. In other words, the heritage value of Mt. Fuji, recognized by the world, was considered to exist as a cultural aspect symbolized a ‘Japan`s symbol’, not as a natural being. The judgment hit the bull`s eye and the registration of Mt. Fuji as a World Cultural Heritage Site was decided (June 22, 2013). The three texts mentioned above showed an irony that it gradually died away from its true nature whenever the existence of ‘the real Fuji’ (Mt. Fuji as a kind of nature) was strongly convinced and investigated. It seemed that its identity as a cultural being(Japan`s symbol) predicted the current address of Ft. Fuji recognized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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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廟會에서의 春節 표상화 과정-현대 북경 지단(地壇)과 용담(龍潭) 공원을 중심으로-

        한남수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58 No.-

        The re-starting of Chinese New Year in the park temple fair after the Reforms and Openness in the 1980s began with the ‘culture making’ by the government in its effort to find the identity of traditional culture. With the pilot operation of Jidan Park and Yongdam Park in Beijing as major sites to hold temple fair ,the custom of holding Chinese New Year among people has also changed. temple fair naturally fuses traditional values and daily life of Chinese New Year, and strengthen cultural identity as the driving force of enjoying a specific space. Therefore, temple fair is the place which leads individuals, society, and community to experience Chinese New Year and prey for something. The value, mood, and traditions of Chinese New Year which had a long history were despised and destroyed by various political and social conflicts following the Sinhai Revolution in 1911. Then, the government, to compensate for the failure of the revolution, collected opinions from various sectors of the society, and expressed its willingness to pursue cultural policy. As the economic situation became better after the Open-door policy in the mid-80s, Chinese New Year also could escape from the political obstacle. Especially, with Yongdam Park in Beijing being selected as the site for holding Chinese New Year temple fair in 1984, and Jidan Park being also chosen as such a site in 1985, the cultural meaning of traditional value began to be emphasized. Those two sites received the citizens' support as the channels of reviving Chinese New Year culture and recovering cultural identity. For a long time, Chinese New Year had faced crisis because of the civil war and political dissonance, and changed into the site of political teaching lacking citizen sharing and communication. The government, to compensate for such a political reality, had to hurry recovery of traditional culture. In such a respect, re-birth of park temple fair in Beijing was an important case where people could strengthen nationalistic mood and recover contemporary traditional culture. To re-start Chinese New Year in temple fair in the park has the meaning of being the first step to recover the customs of the traditional culture from the extinct past, and attach importance to citizens as subjects who enjoy culture. Thus, the opening of temple fair in the park was the space of daily life, of citizens, and of Chinese New Year festival, and could maximize the image of ‘tradition’, while drastically eradicating religious colors of it. Of course, there are limits in reviving historical mood of the past in the ‘tradition’. But, the names temple fair and Chinese New Year were effective to make people enjoy tradition. Through Chinese New Year in temple fair, people could share communication, exchange, and cultural mood, and began to recognize temple fair as a cultural plaza. temple fair resembled a huge exhibition which embraced various demands and change of living styles. The government, by concretizing the image of Chinese New Year, could naturally lead the event. Jidan Park, with its support for the ‘Book City’, book market, supported the meeting of books and citizens. Using natural resources of the Yongdam Park Lake, it held the Yongseonjeol festival at The Dragon Boat Festival, upgrading its pride as the place of experiencing traditional culture. Currently, park temple fair in Beijing provides new driving force of cultural plaza which sends a strong message of Chinese New Year, and gives the identity of traditional mood and daily space. 개혁개방 이후 공원 묘회(廟會)에서의 춘절(春節) 재개는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정부의 ‘문화만들기’에서 시작되었다. 북경의 지단(地壇)과 용담(龍潭) 공원이 묘회의 주요 개최지로 시범 운영되면서 춘절을 맞이하는 세태도 변화가 일어났다. 묘회는 춘절의 전통적 가치와 일상을 자연스럽게 융합시키고, 특정 공간을 향유하는 동력으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한다. 때문에 묘회는 개인과 사회, 공동체 모두에게 춘절을 체현하고 발원하는 곳이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해 온 춘절이 신해혁명 이후 여러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가치와 정서 그리고 전통적 유산들이 폄하되거나 파기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혁명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시작했고, 문화정책에 실천적 의지를 표명했다. 1980년대 중반 개방 정책 이후의 경제적 상황이 일정 부분 실효를 거두면서, 춘절도 정치적인 방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1984년 북경의 용담공원과 1985년 지단이 춘절 묘회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전통적 가치에 대한 문화적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두 공간은 춘절 문화의 정서를 환기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통로로 시민의 지지를 받았다. 오랜 기간 춘절은 내전과 정치적 불협화음으로 위기에 봉착했고, 시민의 나눔과 교류가 부재한 채 정치적 교화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정부는 이 같은 정치적 현실을 만회하기 위해 전통문화의 회복을 서둘러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북경 공원 묘회의 탄생은 춘절이란 민족적 정서를 공고히 하고 동시대의 전통적 가치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공원 묘회에서의 춘절의 재개는 단절된 과거로부터 전통 문화의 상흔을 회복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자로서 시민을 중시하는 첫 단계로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공원에서의 묘회의 개방은 일상의 공간, 시민의 공간, 춘절 축제의 공간으로 종교적인 색체를 과감히 제거하면서도 ‘전통’이란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전통’의 의미가 과거의 역사적 정서를 그대로 옮겨오기에 한계가 있었지만 시민에게는 묘회와 춘절이란 명칭만으로 여전히 그 유효한 가치를 심어주었다. 시민들은 묘회에서의 춘절을 통해 소통과 교류 그리고 문화적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고, 묘회를 문화 광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묘회는 거대한 박람회장을 방불케 하며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와 삶의 변화를 수용했고, 정부 역시 전통문화공간으로서의 춘절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단 공원은 도서 시장인 서시(書市) 개최를 지원하면서 책과 시민의 만남을 수용했고, 용담 공원 호수의 자연 자원을 활용해 단오(端午)에 용선절(龍船節) 축제를 열어 전통 문화 체험 장으로 자존감을 높였다. 현대 북경 공원 묘회는 춘절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전통적 정서와 일상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문화 광장의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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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표상에 나타난 문화적 정체성의 경쟁:오끼나와 슈리성의 사례

        김창민 ( Chang Min Kim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56 No.-

        이 글은 오끼나와인들의 문화적 정체성 변화와 경쟁 과정을 슈리성이라는 문화 표상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끼나와는 1409년 류큐왕국의 설립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다. 이 과정에서 오끼나와의 문화적 정체성은 유동성을 보여왔다. 특히, 류큐처분 이후 오끼나와는 류큐왕국으로서의 정체성과 일본으로서 정체성 사이의 경쟁을 경험하였으며, 1945년부터 1972년 사이에는 류큐와 미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서 문화적 정체성의 경쟁과 혼란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1972년 일본으로 ‘복귀’된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과 류큐사이에 정체성 경쟁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정체성의 변화와 경쟁은 슈리성을 통하여 표출되었다. 오끼나와를 지배한 세력들은 자신의 지배를 확인하며 피지배지역으로서 오끼나와를 정체화 하기 위하여 슈리성 복원을 주도하였다. 소실과 파괴로 점철된 슈리성 복원의 역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끼나와인들은 외세의 이러한 정체성 만들기를 수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복원된 슈리성을 류큐문화의 대표적 표상으로 의미 부여를 함으로써 자신들을 류큐문화 담지자(擔持者)로서 정체화 한 것이다. 결국 슈리성은 외세에 의해 규정되어진 정체성과 오끼나와인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정체성이 경쟁하고 타협하는 현장인 셈이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change and competition of cultural identities of Okinawan people through Shuri-jo as a most important cultural representation of Okinawa. Okinawan people have been under the control of external power from the establishment of the Ryukyu Kingdom. In this process, the cultural identity of Okinawan people has been unstable. Particularly, after the fall of the Ryukyu Kingdom, Okinawan people experienced the competition of a cultural identity between the Ryukyu Kingdom and Japan. Also during the period of the Ryukyu Government (1945~1972), the Okinawan people experienced competition and a confusion of the cultural identity among the Ryukyu Kingdom, Japan and the United States. After 1972, this competition and confusion of cultural identity has continued. The competition and change of its cultural identity in Okinawa is manifested in Shuri-jo. This external power dominated Okinawa has initiated to restore Shuri-jo in the aim of making the Okinawan identity as a dominated region. The history of Shuri-jo restoration can be understood in this view point. However, the Okinawan people not only accept identity making of external power, but also make their own cultural identity as Ryukyu by providing meaning as the most important cultural representation of Ryukyu Kingdom to a restored Shuri-jo. As a result, Shuri-jo has been competing and/or negotiating the field of cultur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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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9세기 동아시아 漢詩圈에서 ‘性靈說’의 수용 양상

        李鵬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08 韓國學論集 Vol.43 No.-

        18세기 중국시단에는 수많은 유파가 존재했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유파는 格調派’와 ‘肌理派’와 ‘性靈派’였다. 그 중 ‘성령파’의 핵심 견해가 바로 ‘성령설’인데,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袁枚(1716~1797)와 趙翼(1727~ 1814)을 꼽을 수 있다. 성령설에서는 “시인은 천부와 영성을 갖춰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시인에게 천재와 영감을 요구한다. 18-19세기의 중국시단에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키고 또한 가장 큰 비난을 받은 詩學觀念은 당연히 袁枚와 趙翼 등이 창도한 ‘性靈說’일 것이다. 이 시학 관념은 국경을 넘어서 조선과 일본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문화는 스스로 전통에서 현대로의 완만한 전환을 시작했지만, 전통문화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현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은 어느 정도 환영을 받았지만 역시 많은 비판과 저항을 받았다. 같은 시기 일본문화의 자아의식은 전례 없이 흥기하여 일본의 문화 엘리트들은 일본 문화가 중국 한문화의 해외 추종자로 남아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점차 중국문화와의 평등한 위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조선의 상황은 중국과 많이 닮아 있지만, 조선의 문화엘리트들은 유가 전통가치관을 수호하는 데 중국보다 더욱 확고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중국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의 선택과 감별을 행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과 조선의 현대화 전환과정은 중국문화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자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과 함께 하였고, 중국은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사이의 고통스러운 분열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일본과 조선에서의 성령설의 각기 다른 수용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적으로 漢文化圈에 귀속되어 있던 동아시아 삼국이 18~19세기 문화적 전환기를 맞아 전통문화로부터 현대문화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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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회(廟會)에서의 춘절(春節)표상화 과정 -현대 북경 지단(地壇)과 용담(龍潭) 공원을 중심으로-

        한남수 ( Nam Su Han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58 No.-

        개혁개방 이후 공원 묘회(廟會)에서의 춘절(春節) 재개는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정부의 ‘문화만들기’에서 시작되었다. 북경의 지단(地壇)과 용담(龍潭) 공원이 묘회의 주요 개최지로 시범 운영되면서 춘절을 맞이하는 세태도 변화가 일어났다. 묘회는 춘절의 전통적 가치와 일상을 자연스럽게 융합시키고, 특정 공간을 향유하는 동력으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한다. 때문에 묘회는 개인과 사회, 공동체 모두에게 춘절을 체현하고 발원하는 곳이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해 온 춘절이 신해혁명 이후 여러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인해가치와 정서 그리고 전통적 유산들이 폄하되거나 파기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혁명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시작했고, 문화정책에 실천적 의지를 표명했다. 1980년대중반 개방 정책 이후의 경제적 상황이 일정 부분 실효를 거두면서, 춘절도 정치적인 방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1984년 북경의 용담공원과 1985년 지단이 춘절 묘회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전통적 가치에 대한 문화적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두 공간은 춘절 문화의 정서를 환기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통로로 시민의 지지를 받았다. 오랜 기간 춘절은 내전과 정치적 불협화음으로 위기에 봉착했고, 시민의 나눔과 교류가 부재한 채 정치적 교화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정부는 이 같은 정치적 현실을 만회하기 위해 전통문화의 회복을 서둘러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북경 공원 묘회의 탄생은 춘절이란 민족적 정서를 공고히 하고 동시대의 전통적 가치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공원 묘회에서의 춘절의 재개는 단절된 과거로부터 전통 문화의 상흔을 회복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자로서 시민을 중시하는 첫 단계로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공원에서의 묘회의 개방은 일상의 공간, 시민의 공간, 춘절 축제의 공간으로 종교적인 색체를 과감히 제거하면서도 ‘전통’이란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전통’의 의미가 과거의 역사적 정서를 그대로 옮겨오기에 한계가 있었지만 시민에게는 묘회와 춘절이란 명칭만으로 여전히 그 유효한 가치를 심어주었다. 시민들은 묘회에서의 춘절을 통해 소통과 교류 그리고 문화적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고, 묘회를 문화 광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묘회는 거대한 박람회장을 방불케 하며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와 삶의 변화를 수용했고, 정부 역시 전통문화공간으로서의 춘절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행사할 수있었다. 지단 공원은 도서 시장인 서시(書市) 개최를 지원하면서 책과 시민의 만남을 수용했고, 용담 공원 호수의 자연 자원을 활용해 단오(端午)에 용선절(龍船節) 축제를 열어 전통 문화 체험 장으로 자존감을 높였다. 현대 북경 공원 묘회는 춘절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전통적 정서와 일상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문화 광장의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다. The re-starting of Chinese New Year in the park temple fair after the Reforms and Openness in the 1980s began with the ‘culture making’ by the government in its effort to find the identity of traditional culture. With the pilot operation of Jidan Park and Yongdam Park in Beijing as major sites to hold temple fair ,the custom of holding Chinese New Year among people has also changed. temple fair naturally fuses traditional values and daily life of Chinese New Year, and strengthen cultural identity as the driving force of enjoying a specific space. Therefore, temple fair is the place which leads individuals, society, and community to experience Chinese New Year and prey for something. The value, mood, and traditions of Chinese New Year which had a long history were despised and destroyed by various political and social conflicts following the Sinhai Revolution in 1911. Then, the government, to compensate for the failure of the revolution, collected opinions from various sectors of the society, and expressed its willingness to pursue cultural policy. As the economic situation became better after the Open-door policy in the mid-80s, Chinese New Year also could escape from the political obstacle. Especially, with Yongdam Park in Beijing being selected as the site for holding Chinese New Year temple fair in 1984, and Jidan Park being also chosen as such a site in 1985, the cultural meaning of traditional value began to be emphasized. Those two sites received the citizens`` support as the channels of reviving Chinese New Year culture and recovering cultural identity. For a long time, Chinese New Year had faced crisis because of the civil war and political dissonance, and changed into the site of political teaching lacking citizen sharing and communication. The government, to compensate for such a political reality, had to hurry recovery of traditional culture. In such a respect, re-birth of park temple fair in Beijing was an important case where people could strengthen nationalistic mood and recover contemporary traditional culture. To re-start Chinese New Year in temple fair in the park has the meaning of being the first step to recover the customs of the traditional culture from the extinct past, and attach importance to citizens as subjects who enjoy culture. Thus, the opening of temple fair in the park was the space of daily life, of citizens, and of Chinese New Year festival, and could maximize the image of ‘tradition’, while drastically eradicating religious colors of it. Of course, there are limits in reviving historical mood of the past in the ‘tradition’. But, the names temple fair and Chinese New Year were effective to make people enjoy tradition. Through Chinese New Year in temple fair, people could share communication, exchange, and cultural mood, and began to recognize temple fair as a cultural plaza. temple fair resembled a huge exhibition which embraced various demands and change of living styles. The government, by concretizing the image of Chinese New Year, could naturally lead the event. Jidan Park, with its support for the ‘Book City’, book market, supported the meeting of books and citizens. Using natural resources of the Yongdam Park Lake, it held the Yongseonjeol festival at The Dragon Boat Festival, upgrading its pride as the place of experiencing traditional culture. Currently, park temple fair in Beijing provides new driving force of cultural plaza which sends a strong message of Chinese New Year, and gives the identity of traditional mood and daily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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