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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간(韓中間) 불경(佛經)설화의 수용방식과 변이양상 -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의 불영담(佛影談)을 중심으로 -

        김승호 ( Kim Seung-ho ) 국제어문학회 ( 구 국제어문학연구회 ) 2010 국제어문 Vol.48 No.-

        불경이 유입되던 시점으로 하여 동아시아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불교설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불경 속에 풍성하게 갈무리된 설화는 점차 중국이나 한국에도 퍼지게 되었으며 그에 의거하여 파생담을 생성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본고에서 주목한 『관불삼매경』 소재 불영담은 불경설화의 대표적 사례로 중국, 한국에 두루 전승적 자료가 풍성하게 남아 있는 예에 속한다. 석존, 독룡, 나찰녀 등의 대비적 인물설정, 파사현정의 사건전개, 그리고 불성의 유지란 주제가 이의 전승력을 확보하게 한 원동력이라 하겠다. 다만 설화수용 방식에 있어 한중간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경우, 근원설화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재화의 범위에서 전승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동진(東晉) 이래 혜원(慧遠), 법현(法顯) 등의 고승들이 직접 불영 현장을 답사, 보고했다거나 혜원이 중국 내에 불영처를 조성하는 등 설화의 체험, 증언자로서 적극적 역할을 보여준 것과 무관치 않은 일이라 하겠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근원설화의 반복에 그치기보다 적극 변이담을 생산하는 쪽으로 이행했다. 원래 관불의 위력과 부처의 위의를 담고자하는 원형담에서 벗어나 사찰의 창건유래, 신승의 예지력을 증언하는 것은 물론 비불교적 민중설화로까지 나아간 각펴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다. 불경설화가 중세기 인도 이외의 지역에 색다른 유형의 설화를 퍼뜨린 결정적 단초가 되는 만큼 이의 유통과 수용양상에 대한 다각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Gwanbulsammaegyeong(觀佛三昧經), which was translated into Chinese by Bultaebaltara(佛?跋陀羅), who is India`s Buddhist monk in the 4th century, is known to more richly cherish narrative-based materials than any Buddhist scriptures. As even the clause of Eosanbulyeong(魚山佛影) in Samgukyusa(三國遺事 :Memorable of the Three Kingdoms), is actually the tale of the origin about rocks of Mt. Maneo based on narrative of having Gwanbulsammaegyeong as material, it belongs to a case that the direction of narrative was changed. In China that had faced Bulyeong(佛影 : Buddha`s shadow) narrative prior to us, what confirms Bulyeongcheo (佛影處) on the way of making a tour of Cheonchuk was solidified as tradition in China. In other words, as Beophyeon(法顯) in Dongjin(東晉) and Hyeonjang(玄?) in Tang(唐) are such Buddhist monks, they recorded it in travel essay by adding another story while confirming traditional narratives. Also, Hyewon(慧遠) in Dongjin(東晉) formed a stone cave same as Bulyeongcheo in India, thereby having strived to prove efficacy possessed by Bulyeong narrative in the Chinese land. Unlike China, Korea can be said to have produced diverse derivative tales with a method of modifying the source tale without being satisfied at rewriting narrative of Gwanbulsammaegyeong. Eosanbulyeong in Samgukyusa is its early trace. On the other hand, as the tales about the origin of rock at Mt. Maneo and about establishment of Bulyeongsa temple are derivative tales in future generations, which were transmitted orally, those can be discovered to be disappeared gradually the Buddhist color. In this way, a story of Bulyeong, which belongs to Indian narrative, wasn`t restricted its dicourse-based function in delivering Buddha`s teaching. Buddhist-scripture narrative, which occurred in India, proceeded with spreading to other countries such as China and Korea, and played a role of a catalyst, which creates even new narrative. To grasp significance and character in Buddhist narrative, which possesses big weight in narrative of the Middle Ages, the interest will be said to be essential not only in the narrative of home country, but also in the narrative within Buddhist scriptures.

      • KCI등재후보

        일반논문 : 15세기 후반 조선의 불경번역운동과 “왕의 형상”

        김용철 ( Yong Cheol Kim )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4 동양문화연구 Vol.18 No.-

        15세기 후반 주자학을 국시로 삼고 개국한 조선에서는 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새문자 훈민정음을 가지고 20여종의 불경을 언해해냈다. 이글은 이 “불경번역운동”의 여러 가지 동인 중 특별히 왕과 왕실의 통치 행위라는 정치적 동인을 중시하고 그 핵심에 있는 “왕의 형상”에 주목하였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기본적인 “왕의 형상”은 교화 즉 가르쳐 올바로 변화시키는 성왕의 형상이었다. 불교는 여기에 지혜의 빛으로 세계를 감싸는 부처의 형상을 더해주었다. 유교적 성왕과 불교적 부처의 결합을 통해 현실 속의 왕이 자신의 형상을 강화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 왕과 왕실이 불경을 언해한 이유이다.이글에서는 “왕의 형상”을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었다. 첫째, 문학적 형상이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과 언해된 불경 속에 문학적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는 부처의 형상이 실은 현실 속에서는 “왕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번역가 왕”의 형상이다. 불경언해 과정에서 특히 세조와 세종은 사회 내부로 지식을 들여오는 행위인 번역을 직접 수행한다. 이것은 올바른 지식을 매개로 세상을 올바로 변화시키는 성왕과 부처의 행위를 왕이 번역을 통해 수행한 것이다. In late 15th century, Choson dynasty that leaded by theory of the Zhu Xi school of Neo-Confucianism translated more than 20 kinds of Buddhist Sutra. Initiative group is King and royal family and tool is Hunminjeoneum, the newly invented korean letters system in 1443. This translation movement of Buddhist Sutra had many motives. This study takes political motive in particular. The translation movement is an political act of king and royal family that lays “King`s Images” in it`s heart. Choson dynasty was the neo-confutianist kingdom. And it`s fundamental “king`s image” was the sacred king who educated and transformed the people. In the Buddhist translation movement, Bhudda`s image shining the light of wisdom was added to this Confutian king`s image. Combining this two images, king and royal family strengthened king`s image and sovereign power. This study challeges two aspects of king`s images. One is king`s religious and literary image and the other is “King the translator.”

      • KCI등재후보

        불경 언해본과 한글 디자인

        안상수,노민지,노은유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2014 글짜씨 Vol.6 No.1

        1443년(세종25) 한글을 멋짓고 나서, 1446년(세종28) 그 사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세종의 첫 사업 중 하나는 한문 서책을 한글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당시 한글은 유신들의 반대로 공식 문서에는 쓸 수 없었고, 언문이라 부르며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들의 관심이 적은 불경을 먼저 언해하면서 한글을 활용할 기회를 갖고자 했다. 조선의 불경 언해본 간행은 한글을 통한 불교문화의 대중화를 시도한 것이며, 조선 말기까지 약 400년 동안 한글꼴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알려진 조선 시대의 불경 언해본은 총 45종으로 이때 간행된 한글 문헌(총 299종)의 약 15%에 해당한다. 이 중 한글꼴의 특성이 두드러지는 불경 언해본 11종을 대상으로 한글 창제 원형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불경 언해의 시작기(1449- ), 국가의 주관으로 활발한 간행이 이루어진 불경 언해의 부흥기(1461- ), 지방 사찰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불경 언해의 확산기(1517- )로 나누어 각 시기에 만들어진 한글꼴의 종류와 특징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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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딥러닝으로 불경 읽기 - Word2Vec으로 CBETA 불경 데이터 읽기

        김바로(金바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Vol.80 No.-

        본 연구는 CBETA(씨베타) 불경 데이터를 대상으로 딥러닝 방법인 Word2Vec(워드투벡)을 통해서 불경을 분석하고 시각화하는 방법을 탐색하고, 이를 토대로 인공지능이 불경을 읽는 방법의 장단점을 검토했다. 우선 인공지능에 대한 불교학 연구가 인공지능에 대한 비판의 측면에 집중되어 있는 현상을 제시하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불교학 연구를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서 Word2Vec을 통한 불경 분석의 이론적 배경과 분석 알고리즘을 서술하였다. 또한 불교학 연구자가 분석 결과를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불교학 연구자가 분석 결과에 손쉽게 접근하여 사용할 수 있는 시각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 분석 방법의 장점으로 ‘넓게 보기’, ‘다르게 보기’, ‘디지털 학문 선순환’을 제시하였고, 단점으로 ‘형태적인 접근의 한계’, ‘설명 불가능한 인공지능’, ‘해석 불가능한 인공지능’의 문제를 서술하였다. 그리고 서술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불교학의 지식과 사유를 디지털에 이식하기 위한 불교학 디지털 온톨로지를 제안하였다. This study explored how to analyze and visualize the Buddhist scriptures using the deep learning method Word2Vec using CBETA data, and based on this, examined the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of how artificial intelligence read the Buddhist scriptures. First of all, the Buddhist study on artificial intelligence presented a phenomenon focusing on the aspects of criticism on artificial intelligence, and proposed the study of Buddhism using artificial intelligence. To this end, the theoretical background and analysis algorithm of Buddhist scripture analysis through Word2Vec were described, the method by which Buddhist researchers could explore the analysis results was presented, and a visualization method was presented to enable Buddhist researchers to easily access and use the analysis results. Finally, the strengths of artificial intelligence were "broad view," "different view," and "digital academic development," while shortcoming was to describe the limitations of formative approach, unexplained artificial intelligence, and incomprehensible AI problems. And as a way to solve the problem described, I proposed a Buddhist study digital ontology to transplant Buddhist knowledge and manas to 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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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代 官人의 佛經 傳播와 役割

        김은정 중국사학회 2024 中國史硏究 Vol.- No.147

        불교는 당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당대는 황실 주도 하에 대대적인 역경사업이 진행되었고, 번역된 경전은 강경, 사경, 매매 등의 방식으로 전파되었다. 여기에서 관인은 황실에서 공적인 역할을 부여받기도 하였고, 개인적인 활동을 통해 불경을 지역사회에 전파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관인은 공적 영역에서 국가권력이 주도한 역경사업에 참여하여 윤문과 감호의 업무를 맡았고, 경전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사적 영역에서는 불경 주석서와 영험기를 직접 편찬하였고, 고승대덕에게 불경 주석서 편찬을 요청하고 경제적으로 후원하면서 불경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관인 역시 개인의 목적으로 사경 및 각경 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이 간접적인 불경 전파의 요인이 되었다. 사경 활동으로 다양한 불경이 확산되었고, 각경 활동으로 경전이 보존되고 시각적으로 전파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관인들의 사경 및 각경 활동은 주로 불교의 사후세계관과 유교의 ‘효’ 관념이 결합된 가족의 추복과 평안을 기구하는 목적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대승불교의 공통적인 목표인 일체중생을 위해서도 발원하였다. 개인과 종교적인 목적뿐 아니라 관인이라는 신분으로 정치적 의미의 발원 역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대 중후기 幽州의 節度使와 하급 관인들은 황제와 상관을 위해 각경 활동을 끊임없이 진행하였다. 대체로 정치적 목적과 시대 상황이 부합되어 황제의 수복강녕, 상관의 공훈을 작성하고, 지역의 평안을 발원하였다. During the Tang Dynasty, Buddhism permeated secular society, influencing various aspects such as politics, literature, and culture. The initial phase of Buddhism's integration into the secular realm commenced with the translation of Buddhist scriptures. The imperial family of the Tang Dynasty spearheaded this translation project, disseminating a substantial volume of translated scriptures through oral communication, the transcription of Buddhist scriptures, as well as through buying and selling them. In this process, Tang officials, belonging to the elite intellectual class, assumed a public role within the imperial family. They played a pivotal part in spreading Buddhist scriptures and were instrumental in the populace's acceptance and subsequent dissemination of these scriptures. Generally, the officials of the Tang Dynasty were primarily responsible for proofreading and acting as Guardian Ambassadors (監護大使). On a personal level, certain officials engaged in interactions with monks, supporting the compilation of commentaries on Buddhist scriptures. Additionally, they personally wrote commentaries on Buddhist scriptures and even authored works such as the Diamond Sutra Lingyan-ji (『金剛經』靈驗記). Additionally, Tang officials played a role in copying Buddhist scriptures or sutras for personal use, and officials like the Jiedushi (節度使) prayed for the well being of the emperor or high ranking officials, as well as the stability of the region. The fundamental objectives of family peace and the restoration of ancestors were also expressed through the use of Buddhist scriptures, combining Buddhist post world views with Confucian filial piety. Their leading role significantly contributed to the widespread dissemination of Buddhist scriptures in basic society, exerting a profound influence on preserving a substantial collection of these scrip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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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經科判與初唐文學理論

        張伯偉 영남중국어문학회 2003 중국어문학 Vol.0 No.41

        본 논문은 불경의 科判, 단락을 분석하는 것이 중국 문학이론에 미친 영향을 규명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科判이란 용어가 문학이론에 가장 먼저 제기된 시기는 初唐시기이지만, 이러한 방법의 형성은 사실상 불경의 科判과 관계가 있다. 본 논문은 불경의 科判은 隋唐 이래로 문학이론 뿐만 아니라 유가 경전의 義疏에 스며들어 있음을 상세히 논술함으로써, 科判의 영향이 광범위하고 깊어서 문학이론 영역에도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음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또한 문학을 논할 때 사용하는 술어, 문장 기세 및 의미맥락(文勢義脈), 文論 작가의 불교와의 인연 등 세 가지 측면에서 初唐 문학이론에 미친 불경 科判의 흔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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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불경사건(不敬事件)과 천황제교육의 향방

        이명실 ( Myung Sil Lee ) 한국교육사학회 2013 한국교육사학 Vol.35 No.4

        본 연구에서는 일본이 ‘일본적 근대교육’의 이미지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두 개의 불경사건, 즉 우치무라 간조와 이노우에 데쓰지로가 연루된 사건을 통해 일본 근대 천 황제교육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논의를 전개한다. 이들 사건은 1891년과 1926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났지만, 모두 천황의 위상을 둘러싼 논쟁의 성격을 띤다는 공통점을 가지며, 1930년대 이후의 천 황제교육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논의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두 개의 불경사건이 일어났던 1891년과 1926년 전후의 사회·정치적 배경과 각각의 불경사건에서 제시되었던 논쟁의 핵심 내용, 그리고 사건의 경위 등에 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체제의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행동이나 사상에 대해 ‘불경’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유로운 생각의 유포를 차단했던 통제의 방식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천 황제교육의 이미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feature of the Tenno system education in modern Japan by examining two incidences of lese-majesty related to Uchimura Kanzo and Inoue Tetsujiro. These incidents have a meaning of the control to the thought and the act which resist the Tenno`s authority. Uchimura`s incidence of lese-majesty occurred in 1891. Uchimura who did not pay respect to the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in a school ceremony was exposed to blame from students and teachers. The character of this incident was converted into the dispute about the collision with the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and Christianity by Inoue. After all, Uchimura was expelled from the school and the basic principle of the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was adopted as contents of school education. The incidence of lese-majesty which involved in Inoue arose in 1926. Because of contents of “Our National Polity and National Morality”(1925) written by Inoue, Inoue was exposed to criticism from the ultra-nationalists. This book was banned and Inoue`s tone of argument returned to the 1910s. The feature of the Tenno system education through analyzing two incidences of lese-majesty can be said as follows: a) The incidence of lese-majesty was utilized in order to strengthen the ideology of Tenno system education and to make the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into the basic of National Morality; b) Regardless of social standing and political-inclinations, the thought and the act contrary to the basic principle of the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became a target of blame; c) The image of the Tenno system education strengthened by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was fixed in the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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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사학)(韓國史思想)(史學) : 왕희지(王羲之) 서예이론에 불법이 끼친 영향 고찰

        이영철 ( Young Cheol Li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韓國思想과 文化 Vol.75 No.-

        문자의 산생과 더불어 발생된 서예는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온 동한시대 이후 많은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되었다. 서예는 문자를 떠나서 존재하지 못하고, 불교 역시 불경(佛經)을 비롯한 많은 불사의 시작에 문자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일찍이 서예를 중시하는 『잡아함경(雜阿含經)』, 『능가경(楞伽經)』, 『오분율(五分律)』 등의 불경이 있다. 서예는 일종의 철학적 예술이며 또한 서예이론은 예술적 철학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발전과정에는 상호간의 철학적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 불법의 광범위한 전파를 위해 서예 불사가 필요하였고, 서예가는 불법의 영향으로 자신의 이론을 더욱 심오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 경전의 서사는 부처님과 인간을 가깝게 하고, 복과 덕을 받게 하며 불법과 도(道)를 수행하여 찬양하게 하며 하늘을 공양하고 사악한 죄를 없애주었다. 즉, 불경을 쓰는 것 자체가 큰 공덕인 것이다. 역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의 서예와 그의 이론에 불법의 영향이 있다. 그의 서예를 논하는 작품으로 <제위부인필진도후>, <서론>, <필세론>, <용필>, <기백운선생서결(記白云先生書訣)>등이 전한다. 물론 이들이 왕희지가 쓴 것이 아닌 육조시대 사람의 위작이라고도 하나, 설령 왕희지의 이름을 빌려 썼다 할지라도 그 정밀한 이론은 분명히 당시에 전하는 왕희지의 말에 의거했을 것이다. 왕희지의 서론에는 마음과 뜻을 대비하여 마음을 더욱 중히 여겼다. 이러한 마음은 우주의 마음으로 본심(本心) 또는 심원(心源)이라 불리며 서예의 근본이 된다. 서예를 전하는 것은 心法을 전하는 것으로 붓질이 바르면 사람의 마음도 바르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왕희지의 철학사상은 유가, 삭가, 도가 세 사상의 혼합물이나 더욱 불법의 영향이 지대하다. 서예는 불사의 전개와 활동으로 인하여 보존·전파되고 제고되어 왔다. 불법은 또한 서예 불사의 전파로 인하여 광범위한 보급이 가속화되었다. 이 둘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한 가운데 함께 발전해 나아갔음을 분석 하였다. 一般都承認佛法自東漢傳入之後, 中國文化的各方面都産生了極大的影響, 而在藝術領域裏, 特別書法方面的影向尤爲顯著, 治專書者多有詳之. 惟佛法對中國書法藝術的影響和兩者發展過程中的相互關係, 系統地論述者不多. 書法離不開文字, 타是藝術在文字上的具象表現. 文字作用極爲重要. 佛敎經典裏已經重視了, 例『瑜伽師地論』, 『雜阿含經』, 『楞伽經』, 『五分律』等. 書法是一種藝術實踐, 實踐離不開理論, 書法實踐也是由書法理論指導和制約的. 因此, 歷代大書法家他們都有自己的書法理論, 不單討論執筆,運筆,布白,雲氣等等技法, 而且還涉及到書法家自身的世界觀,人生觀,藝術觀等等哲學思想問題. 而且現在所要討論的受佛法影響的書法理論, 就是書法家所表述的哲學思想問題.我們通稱書聖王羲之, 東晋大書法家. 他的哲學思想, 諸家看法不同. 陳寅恪認爲東西晉南北朝之天師道爲家世相傳之宗敎, 其書法亦往往爲家世相傳之藝術. 這裏天師道是佛敎一個支流. 商承祚則認爲王羲之思想不僅儒道混合, 還或多或少受佛家卽色宗的代表人物支遁般若學思想的影響. 而且我認爲王羲之的思想, 主要是由支遁接受來的佛敎思想,儒,道兩家思想還是次要的. 『法華經』之權敎, 『般若經』之方便, 『涅槃經』, 『維摩經』之四依, 『楞伽經』百八句, 歸結爲‘字句非字句’. 則佛家以思量爲意, 意與心詮異而體同. 宗密謂‘經是佛語, 禪是佛意’. 故禪學名心學, 禪宗名佛心宗. 意卽心也, 語卽言也. 意卽心也, 意地卽心地, 意境卽心境. 心爲書道之體, 法爲書道之用. 王羲之云“凡書貴乎沈靜, 令意在筆前, 字居心后, 未作之始, 結思成矣.” 王羲之把心意對用, 兩者固同義而異語也. 心貴乎沈靜. 這種思想, 在玄佛日益合流的東晉時代, 一般知識人樂于接受, 王羲之當然更是心領神會. 認爲王羲之的‘釋道觀念是現象, 而至人思想是本質.’ 所謂‘至人思想’, 正是王羲之從支遁那里接受來的佛家思想. 可以說, 王羲之的 思想, 是以佛家思想爲基調的儒釋道三敎合一的思想, 當時的名士多半如此, 這是時代所賦予的特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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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한 거자(擧子)의 불경 읽기 - 유만주의 『흠영』을 중심으로 -

        박상란 ( Park Sang-ran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6 동방학지 Vol.177 No.-

        이 글은 거자인 유만주가 불경을 읽은 사건에 주목하여 그 특징 및 의의를 논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유만주의 삶과 불교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분석 대상은 그가 남긴 일기 『흠영』이다. 우선 유만주는 불경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초록하여 간행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정밀한 불경 읽기는 그의 박학적 면모 및 사상적 융통성에 기인한 것이다. 다음으로 유만주는 혹세무민의 측면에서 불교를 비판하였지만 그 사상적 가치에 공감하기도 하였다. 사회교화 및 심법의 측면에서다. 또한 그는 고아하면서도 다채로운 불경 문장의 특징에 주목하였으며, 특히 문답법에 의한 전개 방식을 높게 평가했다. 이상 그의 불교관 및 문장에 대한 태도는 유자로서 그의 사상적 면모 및 문학적 관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유만주는 지극한 불운에 직면해 홀로 슬픔을 감당함으로써 끝내 불도에 귀의하지 않았다. 반불론으로 시작된 그의 불교관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독서 편력의 일환으로 시작된 유만주의 불경 읽기는 기본적으로 유자로서 사상 및 문장력 확충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This article considers the features and meanings of a Geo-Ja (擧子) anecdote about Yu-ManJu (兪晩柱, 1755~1788)`s reading of Buddhist scripture. It illumin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Yu-ManJu`s life and Buddhism by looking at what he left behind, Heumyeong (欽英). Yu-ManJu not only read Buddhism, but also recorded and published it, and studied it earnestly. Although he criticized it, he also sympathized with its ideological value in terms of social education and Dharma of Mind (心法). Moreover, he focused on the plain and vivid features of Buddhist writings. His attitude toward Buddhism and Buddhist writings seems to have originated from his ideological beliefs and his interest in literature. Yet, Yu-ManJu did not come to believe in Buddhism. Despite being faced with extreme misfortunes, his thoughts on Buddhism, which started from an anti-Buddhist stance, did not change much. Thus, Yu-ManJu`s Buddhist reading, which was initially an unbalanced form of reading, helped him to expand his ideology and to develop Confucian writing skills.

      • KCI등재

        王羲之 서예이론에 불법이 끼친 영향 고찰

        이영철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韓國思想과 文化 Vol.75 No.-

        문자의 산생과 더불어 발생된 서예는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온 동한시대 이후 많은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되었다. 서예는 문자를 떠나서 존재하지 못하고, 불교 역시 불경(佛經)을 비롯한 많은 불사의 시작에 문자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일찍이 서예를 중시하는 『잡아함경(雜阿含經)』, 『능가경(楞伽經)』, 『오분율(五分律)』 등의 불경이 있다. 서예는 일종의 철학적 예술이며 또한 서예이론은 예술적 철학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발전과정에는 상호간의 철학적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 불법의 광범위한 전파를 위해 서예 불사가 필요하였고, 서예가는 불법의 영향으로 자신의 이론을 더욱 심오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 경전의 서사는 부처님과 인간을 가깝게 하고, 복과 덕을 받게 하며 불법과 도(道)를 수행하여 찬양하게 하며 하늘을 공양하고 사악한 죄를 없애주었다. 즉, 불경을 쓰는 것 자체가 큰 공덕인 것이다. 역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의 서예와 그의 이론에 불법의 영향이 있다. 그의 서예를 논하는 작품으로 <제위부인필진도후>, <서론>, <필세론>, <용필>, <기백운선생서결(記白云先生書訣)>등이 전한다. 물론 이들이 왕희지가 쓴 것이 아닌 육조시대 사람의 위작이라고도 하나, 설령 왕희지의 이름을 빌려 썼다 할지라도 그 정밀한 이론은 분명히 당시에 전하는 왕희지의 말에 의거했을 것이다. 왕희지의 서론에는 마음과 뜻을 대비하여 마음을 더욱 중히 여겼다. 이러한 마음은 우주의 마음으로 본심(本心) 또는 심원(心源)이라 불리며 서예의 근본이 된다. 서예를 전하는 것은 心法을 전하는 것으로 붓질이 바르면 사람의 마음도 바르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왕희지의 철학사상은 유가, 삭가, 도가 세 사상의 혼합물이나 더욱 불법의 영향이 지대하다. 서예는 불사의 전개와 활동으로 인하여 보존⋅전파되고 제고되어 왔다. 불법은 또한 서예 불사의 전파로 인하여 광범위한 보급이 가속화되었다. 이 둘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한 가운데 함께 발전해 나아갔음을 분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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