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영남 유학과 ‘낙중학'

        홍원식(洪元植)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0 한국학논집 Vol.0 No.40

        조선 시대 영남 유학을 말하면서 흔히 안동을 중심으로 한‘左道'의 退溪學派와 진주를 중심으로 한‘右道'의 南冥學派를 든다. 사실 16세기 중엽 동시대에 영남 좌우도에서 退溪 李滉과 南冥 曺植이라는 걸출한 대유학자가 출현하면서 영남 유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조선 유학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남유학을 이렇게만 보면 그 중간 지역인 낙동강 중류 지역 일대에서 일어난 유학은 단순히 변방이나 경계 혹은 절충적인 것으로만 이해되고 그 자체가 지닌 역사적 위치와 고유한 특성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낙동강 중류 일대에서는 일찍이 조선 초에 圃隱 鄭夢周를 이은 治隱 吉再가 사림의 씨앗을 부은 곳이며, 그것이 싹터 나머지 낙동강 일대로 퍼져 나가고 다시 온 조선으로 퍼져‘유교 조선'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낙동강 중류 일대에서는 일찍이 유교의 씨앗이 뿌려졌으며, 조선 중엽에 이르러 마침내 寒岡 鄭逑와 旅軒 張顯光의 이른바‘寒旅學派'가 출현하였고,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당대‘최대, 최고'의 면모를 지닌 寒洲 李震相의‘寒洲學派'가 출현하였다. 이렇듯 낙동강 중류 일대에서는 퇴계와 남명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사림의 溫床이 마련되었으며, 그 위에 한려학파가 등장하였고 이러한 형세는 조선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따라서‘낙동강 중류(洛中)'지역의 유학을‘낙동강 상류(洛上)'지역의 퇴계학이나‘낙동강 하류(洛下)'지역의 남명학으로부터 독립시켜 낙상과 낙하 유학과 병렬시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를‘낙중학'이라고 지칭하였다. 먼저 조선 중엽의 대표적 낙중 유학자인 정구는 외증조부인 한훤당 김굉필을 중심으로 한 五賢文廟從祀를 주도하면서 정몽주에서 이황에게로 전해온도통의 적전임을 자임하였으며, 그의 문하에 종유한 장현광도 이에 동의하면서 낙중 선현들에 대해 존경의 마음과 함께 계승적 의식을 가졌다. 19세기 조선말에 등장한 이진상도 기본적으로 퇴계학에 대한 계승의식을 지니면서 한편으로 한강과 여헌의 학을 이어 낙상 퇴계학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낙중학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정몽주와 길재에서 발원한 실천궁행 중시의 도학이며, 이것은 퇴계와 남명 및 한강을 거치면서 경을 통한 존덕성의 마음 공부 중시로 이어졌다. 이것은 낙상과 낙하의 영남 유학과 대체로 공통된 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기호 유학과는 대별된다. 그리고 낙중학은 조선 중엽 한강에 이르러 한차례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도학 중심의‘明體'와 더불어‘適用'의 학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학풍은 眉? 許穆을 통해 근기 실학에서 꽃을 피우게 되지만, 낙중의 후예들도 부분적으로 이것을 계승하여 퇴율학의 성리설 다툼에 전념했던 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낙중의 유학자들은 한강의 후예답게 한결같이 예학에 관심을 가져 퇴계에서 한강으로 이어져온 영남 예학을 주도적인 위치에서 발전시켜 나갔다.

      • KCI등재후보

        포은 정몽주와 '洛中' 포은 학맥의 도학사상

        홍원식(洪元植) 포은학회 2010 포은학연구 Vol.5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 100여 년이 지나 16세기 중엽에 이르면 在野에서 실력을 기른 士林 세력들이 몇 차례에 걸쳐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은 뒤 마침내 중앙 정계와 학계를 장악하여 이른바 사림의 조선을 만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 新進 士類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밝히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圃隱 鄭夢周를 儒宗으로 받들고 포은의 학이 冶隱 吉再를 거쳐 江湖 金叔滋, 佔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靜庵 趙光祖로 이어졌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들을 문묘 종사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들은 정몽주와 길재가 비록 나아가 죽음(就而死)과 물러나 지킴(退而守)의 차이가 있을 뿐 不事二君의 節義와 大義名分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생각하여 하나의 연원으로 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길재가 살았을 당시나 그의 문집 속에서는 정몽주와 從遊한 사실이나 관계를 밝힐 자료가 없으며, 오히려 그는 李穡이나 權近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특히 권근은 사림의 학맥과는 반대편에 선 이른바 조선 초 勳舊派를 연 인물로 일컬어지기 때문에 學脈 傳承과 道學淵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1926년 경 뒤늦게 발견된 「白猿帖」을 통해 정몽주의 문하에는 松京의 門生들만이 아니라 同鄕인 洛東江 中流 지역의 문생들이 있었으며, 이들 ‘洛中'의 포은 학맥이 조선 초 낙동강 중류 지역을 시작으로 사림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金烏山에 은거한 吉再와 八空山에 은거한 뒤 순절한 敬齋 洪魯이다. 그들은 정몽주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였으며, 유교적 대의명분에 따라 처신하고 實踐躬行과 儒敎的 禮敎를 퍼트리는 데 힘씀으로써 조선의 道學을 열어갔다.

      • KCI등재후보

        경부대운하 프로젝트와 낙동강 개발에 대한 ‘인문생태'적인 접근(pp.39-64)

        홍원식(洪元植), 이상호(李相虎)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8 한국학논집 Vol.0 No.36

        이 논문은 경부대운하 프로젝트와 낙동강 개발에 대해 ‘인문생태'의 입장에서 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현재 운하 건설은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닥쳐서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사업 추진의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내부적으로 사업 추진을 일부 진행 중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가 될 이 사업은 찬반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있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차분한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운하 사업 찬성론자들은 운하 건설이 ‘생태적'이라거나 ‘친환경적'이라는 말을 앞세우고 있어서 마치 운하 건설 자체가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것처럼 호도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본 논문은 크게 두 부분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첫째, 우리는 무엇인가 ‘개발'하고 ‘건설'한다면 그것은 결코 생태적일 수 없음을 지적하려고 한다. 특히 심층생태학의 입장에서 현재 대운하 건설론이 가지고 있는 ‘지속가능한 개발론'이 가진 문제점들을 지적함으로써, ‘개발'과 ‘생태'가 같이 접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려 한다. 아무리 ‘생태적'이고 ‘친환경적' 개발이라고 주장해도 그것은 개발이며, 그 속에는 개발의 논리가 우선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운하는 생태계 파괴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개발에 나설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 보다 정직할 것이며, 어떻게 하면 생태계 파괴를 최소화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두 번째는 ‘낙동강'의 특수성에 맞추어서, 운하 계획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찬성과 반대라는 입장을 가진 주장보다는, 경부대운하 사업이 생태적으로 대재앙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추진해야 한다면, 그 속에서 반드시 검토해야 할 낙동강의 특수성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경부 대운하 건설에 앞서 역사나 문화, 사회 등의 측면을 반드시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낙동강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는 주장을 펴고자 한다. 그리고 자연 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사회 등 여러 측면을 한데 묶어 보는 것이 진정한 ‘생태론'적 관점이라는 주장과 더불어 이러한 우리의 관점을 ‘인문생태'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할런지도 타진해보려 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Gyeongbu(Seoul-Busan) canal project and Nakdong river development from viewpoint of 'Humanistic Ecology' · Nowadays canal construction project meets with opposition by public opinion, but government basically holds on to the idea of construction, and continues in original project innerly. This project, which is the biggest engineering works in Korean history, is well matched pros and cons but can not examine strictly because most of issues is related to political dispute. At this point of time, the consenting party is insisting that the Gyeongbu(Seoul-Busan) canal project is ecological and pro-environmental and patching up e problem of the essence. So, this paper will examine two parts largely. Firstly, we want to indicate that developing or constructing something it self can not be ecological. Especially, from the deep ecological point of view, we want to reveal the errors and problems of the Gyeongbu(Seoul-Busan) canal project, continual development argument, has and make clear that development and ecology can not put together. Though they insist that it is ecological and pro-environmental project, the project is obviously development because it has applied the development principle in it. So it is more honest to ask questions like "Do we have to construct the canal despite of ecosystem destroy?" or " How can we minimize ecosystem destroy?" Secondly, we will examine the Gyeongbu (Seoul-Busan) canal plan from special features of Nakdong river. In this point, if we have to continue this project even though it is disastrous, we have to examine the special features of Nakdong river. Before constructing Gyeongbu(Seoul-Busan) canal, we have to examine the history, culture and society of Nakdong river. And we insist that genuine ecological viewpoint involves historical, cultural and social aspects.

      • KCI등재

        栗谷學과 實學의 차별성에 관한 연구 : 홍대용 등 북학파 실학을 중심으로

        홍원식(洪元植)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1 한국학논집 Vol.0 No.43

        栗谷 李珥(1536~1584)는 退溪 李滉(1501~1570)과 더불어 ‘朝鮮 朱子學'의 시대를 연 兩大 인물로 평가되는 한편 흔히 조선 후기 實學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이가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그의 학맥 가운데 한 줄기가 실학으로 흘러갔다는 것과 더불어 그의 ‘主氣論'적 철학과 ‘務實論'적 經世思想이 실학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자는 실학을 脫朱子學·脫性理學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朱子學的 栗谷學과 실학 간에는 중요한 차별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율곡학을 직접적으로 실학의 선구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율곡학은 洪大容 등 北學派의 실학과 학맥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중요한 학문적 전환이 있다. 둘째, 율곡학의 성리학적 ‘주기론'은 道德形而上學인 반면 실학의 氣哲學은 脫道德的이고 脫形而上學的이다. 더욱이 북학파들은 理氣論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셋째, 율곡학의 務實論的 경세사상은 도덕왕국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王道論的 經世論이라면, 실학의 富國論的 경세사상은 도덕과 거리를 둔 일종의 覇道論的 經世論이다.

      • KCI등재

        녹봉정사와 조선중기 낙중학의 전개

        홍원식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20 한국학논집 Vol.0 No.78

        Nokbongjeongsa was built on Palgeohyeon(八莒縣, Changpyeong-ri, Jicheon-myeon, Chilogok-gun) in which was ‘affiliated Hyeon(屬縣)' of Seongju area(星州牧) in 1561 when the campaign to establish Seowon began to rise(書院設立運動). There, the education has been around for about 350 years in the early 20th century. If one private school of country has been teaching for such a long time, there is no similar example in history. I intensively examined academic activity of Hangang(寒岡) Jeong Gu(鄭逑) and Nakjae(樂齋) Seo Sawon (徐思遠), Nokbongjeongsa, since I think that the reason is deep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Confucianism in the Daegu area. 녹봉정사(鹿峰精舍)는 조선 중기 서원설립운동이 한창 일어나기 시작한 무렵인 1561년 성주목(星州牧)의 속현(屬縣)이었던 팔거현(八莒縣, 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에 세워졌으며, 이후 20세기 초 근대에 이르기까지 근 350여 년 동안 강학을 이어왔다. 향촌의 한 사학(私學)이 이렇듯 긴 시간 동안 강학을 이어온 경우는 역사상 그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녹봉정사가 이토록 오랜 시간 강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까닭을 조선 중기의 ‘낙중학(洛中學, 조선시대 낙동강 중류지역의 유학)', 특히 대구지역 유학의 전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중심적 위치에 있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학문활동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