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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이 논문에서는, 아직 학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명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金源極(1871-1927)을 통해서 그가 ‘유교 이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이자 근대적 학술이 본격 유입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양명학’을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원극에 대한 소개는 서경석ㆍ김진량 엮음의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 세상유학기』, 최재목의 「日帝强占期 雜誌를 통해서 본 陽明學 硏究의 動向」, 금장태의 『한국 양명학의 쟁점』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본격적인 연구에 이르지는 못했다. 김원극은 그는 함경남도 永興郡 출신 유학자로, 松南, 春夢, 春夢子, 松南春夢 등의 필명을 사용하여 1908년부터 『西北學會月報』, 『太極學報』, 『大韓興學報』 등에 많은 다양한 글을 싣고 있다. 『태극학보』에는 주필로 활동하였고, 西北學會에서는 副總務로 활동하던 중 1909년(明治四十二年) 11월 11일 伊藤博文 被擊事件 嫌疑者로서 眞相調査를 받았으며 1910년에는 朴殷植에 이어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1934년 11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학과 경제학을 겸비한 정치객이었던 바 그 외에도 문맹퇴치에도 노력하여온 드문 지사이었던 바 지난 소화 2년 8월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김원극은 유교를 1910년대 당시의 서세동점, 약육강식의 세계사적 현실에 맞도록 근대적, 실천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개혁적 특성은 이태리 건국 삼걸의 강조하고 그러한 기풍을 한국의 청년들에게 계몽할 것을 기대하고 촉구한 데에서, 아울러 유교를 서구 기독교에 대항할만한 근대적 콘텐츠(교리, 텍스트 등) 및 종교적 체제를 갖추도록 요구한 바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수구적 보수 유림들과 사고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김원극은 박은식의 대동교 정신에 동조하는 유교 개혁 쪽에 서 있었다. 그는 유교의 본질은 계승하되 구체적 내용들은 한국의 지금ㆍ여기에 맞는 ‘時中’의 유교를 지향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유교가 새로운 체제로 개혁하고 나아가서 利用厚生 및 국민ㆍ청년계몽이라는 세계사적 문명에 발맞출 수 있는 학술이어야 함을 적극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교에 대한 관점은 그대로 양명학 이해에도 적용된다. 김원극의 양명학 이해는 「明代諸儒의 學說」과 「王陽明學論」에 잘 드러나 있는데, 먼저 「明代諸儒의 學說」에서는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은, 「王陽明學論」에서는 양명학이 나의 정신을 번롱하여 단순히 悟道를 주안으로 한 禪家와 다름을 지적하고 ‘人倫交際의 道’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각 학술은 그 세부적 특성을 유지하지만, 큰 틀에서는 합치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王陽明學論」에서는 근대학문의 한 장르인 ‘倫理學’으로서 양명학을 이해하는데 큰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은 아마도 1908년 그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얻은, 당시 일본에서 유포되고 있었던 최신의 양명학 지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추정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근대적 학술체계로 전통사상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양명학이 근대적 학문에 어울리는 특징이 있음을 평가하고자 했음을 인정해도 좋겠다. 김원극이 구상한 「倫理?」으로서의 양명학은 주체성과 능동성을 갖고 있으면서 ‘人倫交際의 道’로서 실제 사회에서 실용성을 갖춘, 化學ㆍ物理學ㆍ金石學ㆍ地質學등의 제 학문과 대등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인륜의 학문’(=윤리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의 한국에서, 외국의 신지식을 수용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양명학을 근대적 학술로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노력이 당시의 여러 양명학 연구가와 비교해 볼 때 큰 특징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his study focus on Kim Wongeuk(金源極. 1871-1927)’s Yangmyonghak(陽明學), especially, through reexamining his the famous two articles, Myongdaejeuhakseol (the Neo-confucian’s theories in Ming dynasty of china. 明代諸儒의 學說) and Yangmyonghakron(Essay on Yangmingxue. 王陽明學論). Kim Wongeuk is a man unknown to fame to us till now. But his Yangmyonghak (陽明學),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modern korea, is very important to know what is the characteristic of Modern Korea. He studied at Japan for a number of years, and so he had many information about Modern knowledge on sciences and academism in Japan. Based on this, I think, most of his knowledge on Yangmyonhak(陽明學) is also from modern japanese academic, scientific research information, such that modern japanese youmeigaku (Yangmyonghak, 陽明學) by Inouetetsujirou(井上哲次?)’s Youmeigaku-notetsugaku(陽明學派之哲學), Takasetakejiro(高?武次?)’s Ouyoumeisyouden(王陽明詳傳), and the Youmeigaku(陽明學) edited by Higasikeiji(東敬治). The most korean thought’s knowledge and action in Yangmyonghak(陽明學) are from these modern japanese. Kim Wongeuk try to define Yangmyonghak as Oriental ethics. And he think the Yangmonghak is one with the Buddhism. His the definition and interpretation on Yangmonghak are does not correspond with the original. an orthodox method. Most people in Joseon dynasty and modern Korea criticize the Yangmyonghak are very like with Buddhism, but it is a distinguishing mark that Kim Wongeuk take an active a point of view the two are fusing with.
일제강점기 정다산(丁茶山) 재발견의 의미 -신문,잡지의 논의를 통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7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하 ‘다산’ 혹은 ‘정다산’) 관련 기사 및 논고를 토대로 당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재발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정다산’의 연구와 ‘언론 매체’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는 바로 1930년대에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한국학’인 ‘조선학’ 때문이다. 그 핵심 세력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고 협조를 거부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연구자들 즉 안재홍安在鴻(1891~1965)·백남운白南 雲(1895~1979)·최익한崔益輪(1897~?) 등이었다. 그들이 펼친 조선학은 ‘조선문화 부흥’의 일환이며, 그것은 문화제국주의의 한국학인 ‘청구학靑丘學’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 대립되는 양자는 ‘한국사회·한국문화 특수성론’으로 공통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자가 후자의 전도형태 顧倒形態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다산에 대한 연구는 1934년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 서거 98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들은 조선학 부흥운동을 꾀하면서 그 일환으로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비롯하여 여타의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인 작업은 역시 1938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2면 기사에 「茶山與觸堂全書 完刑記念祝寶 來十六日 明月館에서」 라고 있는 것처럼, (1934년에 시작하여) 1938년 12월에 이뤄지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신조선사新朝雖社 출판)의 완간 작업이었다. 『여유당전서』의 출판에 참여한 인물로는 실학 관련 기사를 쓴 정인보, 최익한, 문일명文一平(1888~1936), 안재홍 등이다. 최익한은 65회에 걸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힘」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다산의 『여유당전서』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조선학운동에서 ‘정다산`은 분명 우리나라 ‘위인’의 표상이자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 개념, 인물을 새롭게 영유領有하는 방법론이기도 하였다. 그를 둘러 싼 좌의 ‘세계’ 지향과 우의 ‘민족’ 지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근대적’ 학술의 논의가 진척되었고 ‘허虛의 학’을 넘어선 ‘실實의 학’을 추구해가는 절실한 논의의 지명이 열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크게는 〈구(전통-구식)〉⇔〈신(현대-신식〉이 극명하게 대립되고, 그 대립 속에서 새로운 이념들이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익’측에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한 대응 논리로 포괄적인 민족사상 및 학문의 전통 확립을 위해 정인보鄭寅普가 ‘얼’을, 안재홍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분일평이 ‘조선심朝鮮心’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주도해갔다. 이에 반해 ‘좌익’측에서는 이청원, 백남운 등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세계사의 보편성에서 한국사체계를 구성해 사회경제사학을 확립하는 한편 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세계’에 관심을 둔 좌, 민족에 관심을 둔 우의 ‘시점視點’은 정다산, 실학, 나아가서는 조선학을 서술해가는 방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정다산 논의는 ‘민족民族’과 ‘세계世界’ 사이에서 새로운 연구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Tasan Cheong Yagyong in japanese imperialism era, especially, here focused the media and the journal in those days. In 1935,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Tasan Cheong Yag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eongwon and Seo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Tasan Cheong Yag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
최재목(Choi Jae-Mok)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2 다산과현대 Vol.4,5 No.-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Dasan Jeong Yak-yong in 1930"s japanese imperialism era of modern korea. In 1935,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Dasan Jeong Yak-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ong won and Su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Dasan Jeong Yak-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10 陽明學 Vol.0 No.26
이 논문에서는 경주가 낳은 두 사상가 즉 수운의 ‘동학’과 범부의 ‘동방학’을 ‘東’의 탄생이라는 ‘視點’에서, 관련 자료를 활용하여, 다시 조명해보면서 범부는 신라 -경주로부터 내려오는 풍류를 잇는 수운의 혈맥을 다시 잇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 먼저 수운과 범부의 ‘東’이란 은유의 배경 찾기로서 다양한 ‘東’의 의미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근대기 일본의 논의까지 안목에 두고 살펴보았다. 즉, 〈‘東’ - ‘日出’ 지역 쟁탈전〉, 〈‘西’에 맞선 ‘東’이라는 시점〉, 〈‘東洋’의 의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빛은 동쪽에서’(Ex Orient Lux) - 한국의 ‘동/동방’ 찾기: 元曉, 塞部〉, 〈타고르가 말한 ‘東方의 등불’ 코리아(조선)〉, 〈‘東’의 우월성’, ‘東洋思想’의 등장〉, 〈근대기 동아시아의 ‘동양’ 논의 -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의 ‘동양’-‘아시아’라는 개념논의 - 이 그것이다. 이것은 최치원 등에 의해 ‘동’으로 대표되는 ‘신라 -경주’- 수운의 ‘동학’- 범부의 ‘동방학’으로 전승되는 문화사적 고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어서 수운의 ‘동학’과 범부의 ‘동방학’이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몇가지 증거를 들어 논의하였다. 즉, 〈최근 신라-경주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 〈수운, 범부의 ‘해동’-‘신라’-‘경주’로의 눈돌림〉, 〈수운의 ‘다시개벽’에서 범부의 ‘동방르네상스’로〉, 〈신라, 경주 문화의 특수성 규명의 방법-범부의 ‘오증론(五證論)’〉, 〈‘血證’論의 확대-범부의 「崔濟愚論」: 무속(巫俗), 계시(啓示), 한울님[天主]의 강림(降臨)에 주목-〉, 〈범부의 ‘사우맞음(대조화)=풍류’는 수운의 ‘內有神靈外有氣化-侍天主造化定’의 부활〉, 〈수운의 ‘仙道+武道+巫俗’(「劍訣」)와 범부의 ‘花郞道’=종교적 요소(←巫)+예술적요소(←風流)+군사적요소(←武)〉가 그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수운과 범부에게서 공통되는 요소들 ①신라-경주에의 주목, ②‘다시개벽’론-‘동방르네상스’론, ③‘내유신령외유기화’-‘시천주조화정’과 ‘사우맞음(대조화)’=‘풍류’, ④ 예컨대 「劍訣」에서 보이는 ‘仙道+武道+巫俗’의 특질과 ‘花郞道’의 ‘종교적 요소(←巫)+예술적요소(←風流)+군사적요소(←武)’의 특질이 지적되었다. 이렇게 수운과 범부의 연결을 통해 ‘동-동방’ 논의의 평가와 그 의의를 되짚어 보는 것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수운의 동학, 범부의 동방학은 ‘동=동방의 탄생’을 통해 우리 민족의 근저가 되는 ‘문화전통’의 본질적 요소들을 당시의 상황에서 재현하려는 하나의 노력이거나 운동이었음을 우리는 기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와 영화 ‘신라의 달밤’ 등은 모두 신라-경주의 발견과 재탄생을 의미했고 신라-경주가 근-현대 한국적 맥락에서 또 다른 ‘시공간’으로 새롭게 탄생되던 것처럼 말이다. This study sheds new light on the two thinkers i.e. Suun Choi Jewoo and Bombu Kim Jeongsol who are born in Gyonju of Korea. Suun advanced Donghak(the east studies) against Seohak(the west studies). And Bombu advanced Dongbanghak(the orient studies) against Seobanghak(the occident studies). The Dongbanghak of Bombu, basically, succeed the Donghak of Suun. Suun is known as a close friend with Bombu’s grandfather in Gyonju. And so, Bombu seems to have many chance to hear from his grandfather or the neighbors about Suun. This study, especially, focus on how to born the viewpoint of the east in Suun and Bombu. The two thinkers pay attention to the traditional values and traditional ethos in korean, from the ancient and medieval history to their days, because of the erosion of traditional values Pungryu(taste for the arts and a romantic turn of mind) under the influence of foreign cultures, i.e. Jujahak(Zhuxi studies) one of the Neo-confucianism, the Christian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Then Suun’s Donghak against Seohak in spirit a shamanist custom as religious ritual for the mountain spirit(仙道/巫俗). And Bombu’s Dongbanghak match for west in ancient and medieval culture, Pungryu of Silla, that is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keywords for building nation morals and ethics strategies. Thus, the two thinkers, who is as a tradition-minded person, asserted each Donghak and Dongbanghak studies, as the main purpose of alternative cultural vision for survival strategy in modern korea under the rapidly changing circumstances.
崔在穆(Choi Jae-Mok)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1 동북아 문화연구 Vol.1 No.28
This paper is a preliminary study on confucianism and music in the Joseon dynasty. In Joseon dynasty, not only having the development of Confucian ritual(禮, Rye), but also having the development of the Confucian music(樂) by Confucian scholars and Scholars officials. In the first time, the Confucian music did not highlighted on the front of the society in the Joseon Dynasty that was the Confucian society, compare with the Confucian ritual. The Confucian rituals had became widely available even in the palaces also in the private life of people. But the Confucian music, at first, was used only for ceremonies and the national level events. It is the Aak(雅樂) that is the music for use in ceremonies, and the Dangak(唐樂) that is the music for use making be bright, be correct the palace. Hyangak(郷楽) is the unique music of the country have inherited in Korea. The Aak and Jeongak is based on classical texts of ancient and medieval Chinese literature and philosophy, such as the Riji(禮記, The text on confucian ritual), the Analects of Confu년 (論語) etc. In the the Joseon dynasty, as a national project created the most important Confucian classic music books is Akhakgwebeom(樂學軌範) edited by Songhyon(成俔), a canon and the manual of confucianism music of Joseon, musical instruments, music system etc is recorded in detail. When the late Joseon dynasty, from the national level to the private sector be discussed and practiced, by the Confucian scholars, so called, Sonbi(士, confucian scholars). It is just Muinomak(文人音樂, Confucian scholars Music), such as Jeongak(正樂) as the Aak(雅樂), means just correct, pure and good music.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12 陽明學 Vol.0 No.32
이 논문에서는, 함석헌이 이해, 해설한 왕양명의 「大學問」 즉 「한 사람: 王陽明, 大學問」( 함석헌전집20: 씨?의 옛글풀이 )를 중심으로 그의 양명학에 대한 관점과 그 특징을 살펴본다. 종래의 함석헌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양명학에 초점을 맞춰서 논의한 것은 거의 없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양명학과 관련시켜 고찰해보는 이 논문은 함석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살펴보는 함석헌의 양명학 이해의 특징은 (1)왕양명 만물일체론의 ‘대인’=‘큰 사람=한 사람’論: 한사상과 양명학의 결합, (2)萬物一體論의 ‘神秘主義’적 이해, (3)‘仁’의 ‘씨?’사상적 이해이다. 이 가운데서 함석헌이 왕양명의 만물일체론에 주목하고 더욱이 이것(=만물일체론)을 신비주의로 해석하고, ‘한’ 사상으로 연결시킨 것은 탁견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이단시되었던 양명학의 사상에서 ‘만물일체’론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신비주의적 측면에서 부각시킨 점은 그간 학계에서 간과해왔던 양명학의 진수를 들춰낸 셈이다. 이것은 함석헌이 「지금같이 살림이 곧 정치, 정치가 곧 전쟁이 돼버려 죽음의 문명이 돼버린 때」라고 진단했던 1980년대 이전 군부독재시절이나 자본과 문명의 황폐화, 에너지의 고갈 등에 맞부닥친 지금의 현실에서나 여전히 시사점을 던져준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서 평가되어온, 승리해온 사상사를 뒤집어 보면서, 그 그늘에 가려진 思考와 지적資産 속에서 새로운 지혜를 찾아내어, 새 옷을 입히고,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여, 실천해가는 일이다. 전통시대에 이단, 사이비라 내몰던 사상, 양명학에서 찾아낸 함석헌의 화해와 평화, 생명과 만물사랑의 메시지를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靈昭’의 ‘靈’을 「‘얼씨고 절씨고’ 할 때의 얼씸, 양검스러움. 昭는 밝고 환함.」, ‘明德’을 「밝은 속?. 德은 바탈대로 할 수 있는 속의 힘.」이라는 등의 해석은 양명학의 연구에도 새로운 관점과 활력을 제공할 수 있는 탁견이다. 아울러, 함석헌의 저작 속에는 고난을 견뎠던 왕양명의 심경이 담긴 시 「泛海」, 「??吟」, 「老檜」 등이 소개되어 있다. 왜 그가 왕양명의 시에 깊이 共鳴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왕양명의 ‘초연’ ‘초탈’ ‘절개’에 관한 심경의 투영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고난의 시대를 왕양명의 시를 거울삼아 건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문제를 포함하여 이제 남은 과제는 함석헌의 전저작에 흩어져 있는 양명학 혹은 양명학적 요소에 대한 종합적 고찰이라 하겠다. This study discus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Ham seok-hon and Yangmingxue(Yangming philosophy). Ham seok-hon, who is a famous christian in korea, accepted japanese Mukyoukaishugi(Non-church movement) which is originated by Uchimurakanjo. Later, it is succeed to Kim gyosin who is a famous modern korean christian, and after him it is succeed to Ham seok-hon. Basically, Japanese Yangming thoughts originated by Nakae toju of E-do period succeed to Uchimurakanjo’s Mukyoukaishugi internally in his christian viewpoint and thoughts, for example he estimate Nakaetoju as one of typical japanese four person, just Daihyoudeki nihonzin(代表的日本人). Ham seokhon accepted and interpretated Wang yang-ming’s thoughts, especially Daxuewen(Question and answer about Great learning, Daxue) which is a most famous and important one in wang’s texts, from viewpoint of Ssial(seed, a substantial in things and human) is the key words of his thoughts. And he interested in Wang’s Wanuyitirun, and he understood it as mysticism or occultism.
최재목 ( Choi Jae-mok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7 儒學硏究 Vol.38 No.-
이 논문은 동아시아 양명학연구의 과제를 화두로 현재 시점에서 양명학연구를 성찰해 보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다. 디테일보다도 거시적 안목에서 양명학연구의 새 지평을 성찰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 논문에서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자학의 방향 즉 `언어문자의 입장=언어·문자문화(literacy)의 인간탐구`와 상산학 혹은 양명학의 방향 <육성·소리의 입장=소리문화(orality)의 인간탐구`라는 주제에 대한 보다 세밀한 탐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주자학과 육왕학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자학이나 육왕학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으나 결국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진정한 세계 - 동일한 지점(場) -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즉 보르헤스가 말한 “많으면서 하나인 달=우리 자신의 존재”처럼 말이다. 둘째, 동아시아의 양명학 탐구는 일단 동아시아라는 지리적, 역사적 현실이 `울퉁불퉁한, 어설픈, 불편한` 형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지역이 산출해낸 학술적 번민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각기 다른 지리적, 역사적 형식이 만들어낸 굴곡된=뒤틀린 스탠스 혹은 시야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컨대 `일본 양명학은 원래의 양명학이 아니다, 왜곡된 양명학이다` 등등의 상투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문제는 원본 양명학을 미리 설정한 다음 여타의 전개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 전개된 내용(팩트) 자체를 직시하고, 그것을 그대로 명확히 기술해내는 태도이다. 평가는 그 다음이다. 있는 것(사실)과 있어야 할 것(당위)의 간극을 인정하고 혼동하지 않는 냉정함에서 양명학은 기술되어야 한다. 셋째, 양명학 연구에 대한 상상력 부분이다. 동아시아 전체를 바라볼 때 양명학은 마치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사물들 사이에 변하지 않는 어떤 공통된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인 `위상수학`(位相數學, Topology)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양명학은 `심(心)`이란 주제를 근간으로 만나고 갈라진다. 진흙과 다양한 도자기, 물과 다양한 얼음, 고무줄-끈과 다양한 변형, 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만나면서 다시 흩어지고, 흩어지고선 다시 만난다. 그러나 `같은 형태…사물들 사이에 변하지 않는 어떤 공통된 성질`을 추구하지만 디테일에 들어서면 `마지막 어휘`를 거머쥐기는커녕 아찔한 떨림-실망감-황당함 같은 `정신적 경련`을 일으키고 만다. 하나의 `고무줄`이 가만히 있으면 짧지만 당기면 한없이 늘어나듯, 양명학은 각각의 장(場)에 맞는 길이와 넓이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본 양명학이 있을 수 없고 각각의 지역에 따른 전개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양명학의 그 위상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각각의 자리(場)에서 특수한 바이브레이션-왜곡-재해석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This paper is written with the intention to reflect on Yangmingxue at the present time with the issue of East Asia Yangming Studies. The aim is to reflect on the new horizon of Yangming Studies in macroscopic perspective rather than detail. The summary of the discussion in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 the lecture was `human inquiry of literacy` and Sangjak or Yangmyung was a human exploration of orality. First, Zhuzixue was human inquiry through literacy, and Xiangshanxue or Yangmingxue was `human inquiry through orality. This point should not be overlooked. However, the difference between these two people is not fundamental. That is the difference of academic tendency or characteristic. Second, the differences in East Asia`s Yangming studies are rooted in geographical and historical differences in East Asia. The space called East Asia is not the same. It is rugged, not uniform. Not one but many. Each region has its own social and historical agonies. There is also a different academic consciousness. So it is natural that the twisted sight and stance created by different regions. It is an error, for example, pointing from A to B, A is not Yangmingxue, and A is wrong. Third, it is the imagination problem of Yangmingxue. Looking at East Asia as a whole, Yangmingxue can be compared to Topology. Because Yangmingxue is sharing the problem of mind. But it meets and divides around it. It is like a variety of ceramics made of mud, and various kinds of ice made by water. It is like a work that is made by variously changing rubber bands and strings. There can be no original Yangmingxue. There is only development according to each area.
<도산서당>과 <도산십이곡>·<성학십도>의 ‘志·學’ 구조가 갖는 인지적 상관성 試論
최재목(Choi, Jae-mok),조용미(Jo, Yong-mi),김동성(Kim, Dong-seong) 영남퇴계학연구원 2021 퇴계학논집 Vol.- No.28
퇴계가 구상한 건축물 <도산서당>의 현실공간과 퇴계의 언설로 구축된 <도산십이곡>과 <성학십도>라는 공간의 구조는 흥미롭게도 합치하고 있다. 즉 도산서당은 건축공간으로써 전학·후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도산십이곡은 전6곡 ‘언지(言志)’와 후6곡 ‘언학(言學)’의 구조, 성학십도는 전5도 ‘지(志)’와 후5도 ‘학(學)’의 구조로 되어 있다. 도산십이곡과 성학십도도 퇴계라고 하는 사상가의 지성 내에 존재했던 공간적인 배치라고 본다. 이 논문에서 논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퇴계가 구상한 건축물 <도산서당>의 현실공간과 퇴계의 언설로 구축된 <도산십이곡>과 <성학십도>라는 공간의 구조는 흥미롭게도 합치하고 있다. 즉 도산서당은 건축공간으로써 전학·후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도산십이곡은 전6곡 ‘언지(言志)’와 후6곡 ‘언학(言學)’의 구조, 성학십도는 전5도 ‘지(志)’와 후5도 ‘학(學)’의 구조로 되어 있다. 도산십이곡과 성학십도도 퇴계라고 하는 사상가의 지성 내에 존재했던 공간적인 배치라고 본다. 위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산서당, 도산십이곡, 성학십도는 어떤 지향점을 정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일관된 형식으로 되어있다. 즉 이 구조는 지(志. agenda)를 정하고 구체적 학(學. action plan)을 제시하는 구조로 일관한다. 퇴계는 부지런히 공부하는 인간상을 제시하였으며, 그 공부론의 근저에는 경건함[敬]이 자리해 있다. 둘째, <도산서당>, <도산십이곡>, <성학십도>의 셋은 퇴계가 중년이후 그의 사상이 완숙해지면서 그려낸 공간론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공간에서는 <도산서당>이었고, 언어-언설공간에서는 <도산십이곡>과 <성학십도>였다. 그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고 퇴계의 인지적인 심층 의식 속에 자리해 있던 인지적 공간 설계도였다. 셋째, 성현이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고 퇴계의 일상 속에 명확히 내재되어 학인(學人)이 닮아가야 할 대상이었다. 학인들이 성현을 닮아가기 위해 공부하는 형식 안에 <도산서당>이 들어와 있었고, <도산십이곡>에서는 고인의 예던 길이 일상적 삶의 실천 속에서 드러나 있으므로 그것을 각자 내면화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성학십도>도 마찬가지로 성현이란 존재는 초월적이 아니고 내재적인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바깥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내가 늘 성현을 바라보고 닮아가는 공부가 가능했다. 넷째, 유학의 기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이 관점에서 <도산서당>, <도산십이곡>, <성학십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셋(<도산서당>, <도산십이곡>, <성학십도>)은 퇴계라는 한 인간의 생각 안에서 구상・기획・설계되고, 제작・생산・산출된 유학의 이상적 구현이었다. 물론 퇴계의 사유형식 안에는 현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서로 연결되어 공존한다. 퇴계는 현재적 시점에서 과거의 성현으로, 내가 성현을 닮아가는 미래로 넘나드는 공부를 지향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이라는 유학적 공부론은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실현하는 시간적인 노력(修·齊·治·平)과 그 구체적 공간(身·家·國·天下)을 기반으로 한다. <도산서당>, <도산십이곡>, <성학십도>는, 아래 [그림 ](퇴계 이황의 현실·언설 공간의 인지심리 구조)처럼, 수기치인의 일관된 유학적 논리구조 속에서 구축되었다고 추론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cognitive correlation of the academic structure and the orientation of Dosanseodang, Dosansibigok and Seonghaksipdo. Toegye s direction and academic structure of Dosanseodang, Dosansibigok, and Seonghaksipdo, which Toegye had calculated from middle age to the end of the year, are cognitively correlated with Toegye s own spatial theory. First, Dosan Seodang, Dosansibigok, and Seonghak Sipdo have a consistent format in which you set a certain direction and study diligently. In other words, this structure is a consistent structure that sets the agenda and presents a specific action plan. Toegye presented the human image of diligently studying. There is godliness at the root of this theory of study. Second, Dosanseodang, Dosansibigok, and Seonghaksipdo are spatial theories drawn by Toegyeung as his thoughts became mature after middle age. In other words, Dosan Seodang was shown in the real space, and Dosansibigok and Seonghaksipdo were shown in the Unseol space. These were not separate, but space plans that were located in Toegye s cognitive deep consciousness. Third, Seonghyun was not a transcendental entity, but clearly embedded in Toegye s daily life, and was an object that students should resemble. Dosanseodang was built into the format where students study to resemble Sunghyun. In Dosansibigok, since the path that people used to practice in the past is revealed in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it is suggested to internalize it individually. Likewise in Seonghaksipdo, great humans are not transcendental, but implicit. In an analogy, it is not God outside, but God within me. So, in my daily life, I was able to study to see and resemble great humans all the time. Fourth, the basics of studying abroad are maintaining my body properly and managing others ideally. From this point of view, it is necessary to look at Dosanseodang, Dosansibigok, and Seonghaksipdo. These three were conceived, planned, designed, produced, produced, and produced within the idea of Toegye, an ideal realization of studying abroad. Of course, there is not only the present in Toegye s death type. The past and the future are connected and coexist. Toegye aims to study from the present point of view to the ideal human of the past and to the future where I resemble the ideal human.
문화 : "국악(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최재목 ( Jae Mok Choi ),안선희 ( Sun Hee An ) 퇴계학부산연구원 2015 퇴계학논총 Vol.25 No.-
이 연구는 국악이라는 명칭이 성립되기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 지 국악에 대한 명칭과 통감부기 국악의 명칭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 국악이라는 명칭을 통해 조선시대 음악사상을 살펴보았다. 국악이라는 명칭의 근원이 된 향악은 신라에서 가장 먼저 사용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사용된 향악은 신라에서 창작되거나 일반적으로 알려 진 음악을 뜻하며,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향악의 의미는 여러 지방에서 전 승되고 있던 향토음악과 삼국이전 유입된 음악 중 향악화 된 음악을 포함하 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 전승된 향악은 당악보다도 보다 더 활발하게 고려에 전승되었다. 고려는 이전시대에 사용되던 향악(속악) · 당 악 이외에 아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 지속적 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들은 음악의 유래와 관련이 깊으며, 각각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 용어들은 국악의 일부분을 뜻하 는 용어로 사용되며, 국악이라는 용어가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용어는 흔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통감부기의 국악 용어는 1906년부터 1910 년 통감부의 관제개편으로 인해 재등장하였으며, 해외에서도 사용되어 우리 나라의 전통음악을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향악 · 당악 · 아악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국악``이 라는 명칭이 쓰인 사례는 많지 않지만 16세기에서 18세기에 사용된 사례를 찾 아 볼 수 있다. 『중종실록』과 『선조수정실록』· 『황단증수의』· 『청음집』· 『농포 문답』에 국악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어 실록과 의궤, 문집에서 모두 사용 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용되 던 용어는 아니지만, 실록과 의궤 문집과 같이 다양한 문헌에 등장하고 있어 당시 우리나라의 궁중에서 연행된 음악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비추어 볼 때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나라의 음 악``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당시의 화이사상이나 실학사상이 근간이 되어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rrange how gukak (Korean classical music) was called before the name was established in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to Goryeo and also during the period of the Residency-General briefly and examine the idea of music in Chosun with the name of gukak. Hyangak which laid the ground for the name of gukak was first used during Shilla. Hyangak used in Shilla refers to the music that was created or generally known in Shilla. Hyangak used during the Unified Shilla implied the folk music that was transmitted in several regions of it and also the music that had become hyangak among the kinds of music that had flowed in before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Hyangak passed down to Goryeo was even more actively transmitted to Goryeo than dangak. In Goryeo, they started used the term of aak other than hyangak (sokak) or dangak that had been used previously, and they continued to be used up to late Chosun. These terms are deeply associated with the origin of music, and each implied different things. From the period of Chosun, these were used as the terms meaning a part of gukak, and they changed to the term of gukak then. But during Chosun, the term of gukak was not very often used. In the period of the Residency-General, the term of gukak reappeared from 1906 until 1910 when the Residency-General performed the reform of government organization, and it was used outside Korea, too, so it came to be positioned as a term referring to Korean traditional music. During Chosun, such terms as hyangak, dangak, and aak were often used, and the term of ``gukak`` was not very often found; however, it was used every now and tern from the 16th until 18th century. From 『Jungjongsilrok』, 『Seonjosujeongsilrok』, 『Hwangdanjeungsuui』, 『Cheongeumjip』, and 『Nongpomundap』, we can find the term of gukak, so we can see that it was a term used in silrok, uigue, and collections of works all. In other words, gukak was not a term generally used during Chosun, but we can see that it meant music played at Court in Chosun as it appears in various literatures such as silrok, uigue, and collections of works. Based on the historical materials, we can see that it was used as a term referring to ``national music`` in Chosun and laid the ground for the thought of Huayi or Silhak then. This is how it has come to be used as a term with the meaning it has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