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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조(鄭寅朝)의 「울릉도기행(鬱陵島紀行) : 식물채집기 (植物採集記)」에서 보는 1947년의 울릉도

        최재목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2020 비교일본학 Vol.49 No.-

        이 논문은 종래 소개된 바 없는, 1948년 7월에 발표된 鄭寅朝의 「鬱陵島紀行 : 植物採集記」 을 통해서, 1947년의 울릉도 식물 및 현지 상황을 살펴본 것이다. 위의 논의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鄭寅朝는 이미 울릉도의 식물에 대한 많은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기행문이 1947년 8월 ‘남조선 과도정부’와 ‘조선산악회’가 공동으로 구성한 ‘울릉 도학술조사대’의 식물전문조사팀에 소속되어 울릉도 현지답사를 수행했던 필자(정인조)에 의 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기행문에서 언급된 당시의 식물 30여종은 현재 생육 식물들과 대조해본 결과 모두 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째, 기행문에서는 조국, 국토라는 확고한 의식이 잘 드러나 있고, 해방 직후 본토에서 멀 리 떨어진 우리 국토 울릉도의 땅을 밟는 기쁨을 잘 드러나 있다. 넷째, 해방 직후의 울릉도는 정치적으로는 고요했으나, 약초 및 채소 채취는 물론 벌목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행위는 당시뿐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그 이전에도 일본인들의 잠입에 의해, 그리고 조선의 內地 및 섬(거문도 등) 사람들에 의해 지속되어왔던 일이이었다. 다섯째, 일제강점기가 일본인들이 남긴 현지 풍경으로서 도동항의 ‘함석 이층집들’, 산에 식재된 ‘스기’(杉. 삼나무)를 살필 수 있다. 그 외의 것은 기록되지 않아 파악할 수가 없었다. This study examines Jeong In-jo's travel writing titled “Ulleungdo: Plant Collection Records,” written in 1947. This travel writing describes the landscape of Ulleungdo Island in 1947,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but it has not yet been mentioned in the related studies so far. First, it seems that Jeong In-jo already had a lot of basic knowledge about Ulleungdo's plants. This is because this travel writing was written after a participation in the academic research team formed jointly by the ‘South Korean Transitional Government’ and the ‘Chosun Mountain Association’, that went to Ulleungdo in August 1947. Second, all the 30 plant species mentioned in the travel writing are growing on Ulleungdo. Third, the travel writing clearly reveals the firm consciousness of the motherland, and the joy of stepping on the land of Ulleungdo as our homeland, far from the mainland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Fourth, Ulleungdo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was politically quiet, but it can be seen that harvesting herbs and vegetables as well as logging are routinely performed. Of course, this behavior was sustained not only at the time but also befor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y the Japanese and by the Joseon people (inland and islands). Fifth, the scenery of Ulleungdo left by the Japanes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can be seen from the two-story houses in Dodong Port and the Sugi trees planted by the Japanese in the mountains. Everything else is not recorded and cannot be gras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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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우익의 성립과 전개에 대한 시론 -한국의 일본 우익연구를 중심으로-

        최재목,장성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7 일본사상 Vol.0 No.33

        Japan has been so far understood in Korea by using concepts such as right wing, conservative swing, and conservative. However, these concepts, though mutually related, are not the same. They have been grasped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times. In Korea, nevertheless, they have been identified in a context similar to the concept of statism(Etatismus), nationalism and imperialism. Therefore, this paper will examine how the right wing of Japan has been perceived and how it has been developed according to the change of time, then examine the studies of the Japanese right wing in Korea. This attempt will focus on two points. First is that the Japanese right wing has been variously mentioned and referred to during the historical development process. Second is that in Korea the Japanese right wing has not been approached objectively. This is due to the lack of empirical studies using the primary data and the wrong direction of the studies biased by anti-Japanese sentiment in Korea. 우리는 일본을 ‘우익’, ‘우경화’, ‘보수’ 등의 개념을 주로 사용하여 이해해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념들은 상호적인 연관 관계는 있지만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르게 파악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의 개념을 통해 유사한 맥락으로 파악해왔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그 이유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개념의 변화에 대한 추적 연구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일본 우익이 시기 변화에 따라 어떻게 파악되고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 한국에서 진행된 일본 우익연구를 시론(試論)적으로 고찰해보았다. 이와 같은 시도는 두 가지에 주목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는 일본 우익은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났고 지칭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둘째는 한국에서 진행된 일본 우익연구가 아직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1차 자료를 이용한 실증적 연구가 부족했고, 반일 감정에 의한 편향적 방향 속에서 파악된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 KCI등재
      • KCI등재

        退溪의 肖像畵에 대하여 - 近ㆍ現代期 ‘退溪像’ 탄생에 대한 성찰을 겸해서 -

        崔在穆 영남퇴계학연구원 2008 퇴계학논집 Vol.2 No.-

        이 논문은 李退溪의 肖像畵에 대하여 논의하고, 이를 통해서 우 리의 近?現代期에 있었던 ‘退溪像’ 탄생에 대해 성찰을 하는데 목 적이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퇴계의 초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다. 이퇴계 肖像畵의 연구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자만, 사실 퇴계의 초상화 문제는 단순히 초상화 그것에서 그치 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퇴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그의 사상을 어떻게 인식해왔는가 하는 문제, 즉 ‘退溪觀’?‘退溪像’과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초상화는 聖賢의 이상적인, 관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서 실재하는 일반인의 정신이나 개성을 드러내어 보존, 기념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반 면,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기본적으로 한 인간의 ‘정신-혼’을 그대 로 표현한다는 ‘傳神’의 전통을 유지하지만, 중국과 달리 대단히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하 면, 한 개인의 외모를 담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성격, 인 품, 교양 등 정신세계를 반영하여 氣運生動하는 경지로 승화시키 고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퇴계의 초상과 동상 등은 ‘이상 적인 인간의 모습’과 ‘실재했던 한 인간의 정신과 개성’을 합성하 여 그린 상상의 작품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상의 이미지 를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며, 곳곳에서 퇴계를 만나고 있다. 예컨 대, 우리가 사용하는 천원 권 지폐 속의 퇴계 초상. 서울 남산의 퇴계 동상. 이런 등등은 우리가 만들어 오고, 향수해온 퇴계의 초 상이며,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偉人의 再現이다. 퇴계는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통치 논리 속에서, 해방 이후의 박정희의 유신정권기에는 우리 민족의 모범적 武人像인 李舜臣,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모범적 文人像으로서 부각되어 한국적 ‘文 人像’의 대명사가 되어왔다. 이러한 상황의 맥락에서, 해방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퇴계의 초상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되어 유포되는가, 퇴계초상은 퇴계의 본래의 모습이가나 한가, 퇴계 당시 혹은 퇴계 사후에 그 의 채취를 담은 초상을 갖고나 있기는 한가, 등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조사한 퇴계초상화(이와 아울러 그의 銅像?鐵 像?胸像)을 검토하며 ‘近?現代期 ‘退溪像’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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