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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

          최재목(Choi Jae-Mok)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2 다산과현대 Vol.4,5 No.-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Dasan Jeong Yak-yong in 1930"s japanese imperialism era of modern korea. In 1935,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Dasan Jeong Yak-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ong won and Su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Dasan Jeong Yak-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 KCI등재

          金源極을 통해서 본 1910년대 陽明學 이해의 특징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이 논문에서는, 아직 학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명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金源極(1871-1927)을 통해서 그가 ‘유교 이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이자 근대적 학술이 본격 유입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양명학’을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원극에 대한 소개는 서경석ㆍ김진량 엮음의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 세상유학기』, 최재목의 「日帝强占期 雜誌를 통해서 본 陽明學 硏究의 動向」, 금장태의 『한국 양명학의 쟁점』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본격적인 연구에 이르지는 못했다. 김원극은 그는 함경남도 永興郡 출신 유학자로, 松南, 春夢, 春夢子, 松南春夢 등의 필명을 사용하여 1908년부터 『西北學會月報』, 『太極學報』, 『大韓興學報』 등에 많은 다양한 글을 싣고 있다. 『태극학보』에는 주필로 활동하였고, 西北學會에서는 副總務로 활동하던 중 1909년(明治四十二年) 11월 11일 伊藤博文 被擊事件 嫌疑者로서 眞相調査를 받았으며 1910년에는 朴殷植에 이어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1934년 11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학과 경제학을 겸비한 정치객이었던 바 그 외에도 문맹퇴치에도 노력하여온 드문 지사이었던 바 지난 소화 2년 8월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김원극은 유교를 1910년대 당시의 서세동점, 약육강식의 세계사적 현실에 맞도록 근대적, 실천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개혁적 특성은 이태리 건국 삼걸의 강조하고 그러한 기풍을 한국의 청년들에게 계몽할 것을 기대하고 촉구한 데에서, 아울러 유교를 서구 기독교에 대항할만한 근대적 콘텐츠(교리, 텍스트 등) 및 종교적 체제를 갖추도록 요구한 바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수구적 보수 유림들과 사고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김원극은 박은식의 대동교 정신에 동조하는 유교 개혁 쪽에 서 있었다. 그는 유교의 본질은 계승하되 구체적 내용들은 한국의 지금ㆍ여기에 맞는 ‘時中’의 유교를 지향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유교가 새로운 체제로 개혁하고 나아가서 利用厚生 및 국민ㆍ청년계몽이라는 세계사적 문명에 발맞출 수 있는 학술이어야 함을 적극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교에 대한 관점은 그대로 양명학 이해에도 적용된다. 김원극의 양명학 이해는 「明代諸儒의 學說」과 「王陽明學論」에 잘 드러나 있는데, 먼저 「明代諸儒의 學說」에서는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은, 「王陽明學論」에서는 양명학이 나의 정신을 번롱하여 단순히 悟道를 주안으로 한 禪家와 다름을 지적하고 ‘人倫交際의 道’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각 학술은 그 세부적 특성을 유지하지만, 큰 틀에서는 합치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王陽明學論」에서는 근대학문의 한 장르인 ‘倫理學’으로서 양명학을 이해하는데 큰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은 아마도 1908년 그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얻은, 당시 일본에서 유포되고 있었던 최신의 양명학 지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추정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근대적 학술체계로 전통사상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양명학이 근대적 학문에 어울리는 특징이 있음을 평가하고자 했음을 인정해도 좋겠다. 김원극이 구상한 「倫理?」으로서의 양명학은 주체성과 능동성을 갖고 있으면서 ‘人倫交際의 道’로서 실제 사회에서 실용성을 갖춘, 化學ㆍ物理學ㆍ金石學ㆍ地質學등의 제 학문과 대등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인륜의 학문’(=윤리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의 한국에서, 외국의 신지식을 수용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양명학을 근대적 학술로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노력이 당시의 여러 양명학 연구가와 비교해 볼 때 큰 특징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his study focus on Kim Wongeuk(金源極. 1871-1927)’s Yangmyonghak(陽明學), especially, through reexamining his the famous two articles, Myongdaejeuhakseol (the Neo-confucian’s theories in Ming dynasty of china. 明代諸儒의 學說) and Yangmyonghakron(Essay on Yangmingxue. 王陽明學論). Kim Wongeuk is a man unknown to fame to us till now. But his Yangmyonghak (陽明學),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modern korea, is very important to know what is the characteristic of Modern Korea. He studied at Japan for a number of years, and so he had many information about Modern knowledge on sciences and academism in Japan. Based on this, I think, most of his knowledge on Yangmyonhak(陽明學) is also from modern japanese academic, scientific research information, such that modern japanese youmeigaku (Yangmyonghak, 陽明學) by Inouetetsujirou(井上哲次?)’s Youmeigaku-notetsugaku(陽明學派之哲學), Takasetakejiro(高?武次?)’s Ouyoumeisyouden(王陽明詳傳), and the Youmeigaku(陽明學) edited by Higasikeiji(東敬治). The most korean thought’s knowledge and action in Yangmyonghak(陽明學) are from these modern japanese. Kim Wongeuk try to define Yangmyonghak as Oriental ethics. And he think the Yangmonghak is one with the Buddhism. His the definition and interpretation on Yangmonghak are does not correspond with the original. an orthodox method. Most people in Joseon dynasty and modern Korea criticize the Yangmyonghak are very like with Buddhism, but it is a distinguishing mark that Kim Wongeuk take an active a point of view the two are fusing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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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의 『풍류정신(風流精神)』에 대한 검토

          최재목(Choi Jae-Mok),정다운(Chung Da-Un)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동북아 문화연구 Vol.1 No.20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thought of Kim, Jeong-Seol. His thought appeared to his hook An Liegant Spirit(『風流精神』).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was made after he died, and it was called His main text with A story cf The Flower Man(『花郞外史』). This hook has a different writing 4 papers. The papers are The Flower Man(「花郞」), A though of Choe, jae-woo(「崔濟愚論」), A though of Yin and Yang(「陰陽論」), Chweseong Kim si-seup 「贅世翁 金時習」). And as well as the purpose of these papres, there are different form. However, the core of this article is 'The Harmony(調和)'. This 'The Harmony(調和)' is read again in today's life history It is difficult to find his thought through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But the new approach to text is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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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정다산(丁茶山) 재발견의 의미 -신문,잡지의 논의를 통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7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하 ‘다산’ 혹은 ‘정다산’) 관련 기사 및 논고를 토대로 당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재발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정다산’의 연구와 ‘언론 매체’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는 바로 1930년대에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한국학’인 ‘조선학’ 때문이다. 그 핵심 세력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고 협조를 거부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연구자들 즉 안재홍安在鴻(1891~1965)·백남운白南 雲(1895~1979)·최익한崔益輪(1897~?) 등이었다. 그들이 펼친 조선학은 ‘조선문화 부흥’의 일환이며, 그것은 문화제국주의의 한국학인 ‘청구학靑丘學’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 대립되는 양자는 ‘한국사회·한국문화 특수성론’으로 공통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자가 후자의 전도형태 顧倒形態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다산에 대한 연구는 1934년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 서거 98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들은 조선학 부흥운동을 꾀하면서 그 일환으로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비롯하여 여타의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인 작업은 역시 1938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2면 기사에 「茶山與觸堂全書 完刑記念祝寶 來十六日 明月館에서」 라고 있는 것처럼, (1934년에 시작하여) 1938년 12월에 이뤄지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신조선사新朝雖社 출판)의 완간 작업이었다. 『여유당전서』의 출판에 참여한 인물로는 실학 관련 기사를 쓴 정인보, 최익한, 문일명文一平(1888~1936), 안재홍 등이다. 최익한은 65회에 걸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힘」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다산의 『여유당전서』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조선학운동에서 ‘정다산`은 분명 우리나라 ‘위인’의 표상이자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 개념, 인물을 새롭게 영유領有하는 방법론이기도 하였다. 그를 둘러 싼 좌의 ‘세계’ 지향과 우의 ‘민족’ 지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근대적’ 학술의 논의가 진척되었고 ‘허虛의 학’을 넘어선 ‘실實의 학’을 추구해가는 절실한 논의의 지명이 열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크게는 〈구(전통-구식)〉⇔〈신(현대-신식〉이 극명하게 대립되고, 그 대립 속에서 새로운 이념들이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익’측에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한 대응 논리로 포괄적인 민족사상 및 학문의 전통 확립을 위해 정인보鄭寅普가 ‘얼’을, 안재홍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분일평이 ‘조선심朝鮮心’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주도해갔다. 이에 반해 ‘좌익’측에서는 이청원, 백남운 등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세계사의 보편성에서 한국사체계를 구성해 사회경제사학을 확립하는 한편 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세계’에 관심을 둔 좌, 민족에 관심을 둔 우의 ‘시점視點’은 정다산, 실학, 나아가서는 조선학을 서술해가는 방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정다산 논의는 ‘민족民族’과 ‘세계世界’ 사이에서 새로운 연구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Tasan Cheong Yagyong in japanese imperialism era, especially, here focused the media and the journal in those days. In 1935,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Tasan Cheong Yag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eongwon and Seo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Tasan Cheong Yag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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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논문 : 환경의 관점에서 읽는 중국 고대 사상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한국환경철학회 2015 환경철학 Vol.0 No.19

          이 논문은 중국 고대의 경서를 중심으로 환경 및 그 파괴나 변화의 실상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環境’이란 ‘인간을 둘러 싼 주변 혹은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이란 의미이며, 근대기 영어 ‘environment’의 번역어로서 자리잡은 개념이다.酒池肉林, 守株待兎, 牛山의 아름다운 숲의 파괴, 想像이라는 말, 優라는 농기구, 여우나 담비 가죽 - ‘狐貊(호학)’이라는 몇 가지 주요 예를 통해서, 중국사상사의 많은 장면 속에 환경 관련 언급들이 보이며 환경의 관점에서 중국 고대 사상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살필 수 있었다.더 많은 예와 개념들을 중국 고대의 텍스트(여기서는『老子』,『論語』,『莊子』,『孟子』,『韓非子』를 주로 살폈음)에서 찾아서 재구성한다면 새로운 ‘중국고대 환경 사상사’가 쓰여질 수도 있겠다. 아울러 중국고대의 사상사가 지나치게 본체론과 인성론을 중심으로 논의되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주류 논의에 의해 가려지거나 제외된, 소거되거나 무시된 많은 논의들이 이제 새로운 형태로 보완되고 복원되어 중국 나아가서 동아시아 사상사를 풍요롭게 재론할 수 계기가 될 것이다.국내의 연구에서는 보통 중국 고대의 사상 관련 텍스트를 철학사상, 윤리도덕, 정치경제의 문제를 살펴보는데 중점을 두어왔다. 구체적으로는 본체론과 인성론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기 때문에, ‘환경’ 문제가 어떻게 기록, 반영되어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핀 경우는 드물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 논문은 중국사상사 연구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는 하나의 시론이라 하겠다. This paper is a study of the ancient chinese thoughts in environment. In general, chinese thought was centered cosmology and theory of human nature. However, the ancient chinese philosophy is deeply associated with environmental changes. In previous studies dealing with neglect this point. Eventually, thoughts is a reflection of human lives and the environment. It is same in china.In Lao Tzu, the Analects of Confucius, Chuang Tzu, Mencius, Han Feizi, we can see the environment-related illustrations. In this paper, I analyze the following concepts: Jiuchiroulin(酒池肉林, The alcohol lake and forests of meat), shouzhudaitu(守株待兎, waiting to die the rabbit hit on a tree stump), the destruction of the beautiful forests Niushan(牛山), xiangxiang(想像, imagine), Farm Equipment you(優), Foxes and martens leather huhao(狐貊).As a result, the following results were obtained: First, the climate in ancient china is gradually getting colder and the weather became dry. Secondly, it was gradually enlarged in a residential and agricultural area. Therefore, mountains and forests began to be destroyed. Third, as the changes of the environment, therefore, the conditions of life were changed a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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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志淵과 高橋亨의 ‘紙上論爭’에 대하여

          최재목(Choi Jae Mok),이효진 동아시아일본학회 2009 일본문화연구 Vol.32 No.-

          An intention of this study is to summarize about 'the Controversy on a Newspaper' of Chang, Ji-youen(張志淵) and Takahashi Toru(高橋亨) through Maeilshinbo(《每日申報》) in 1915. Chang Ji-yoen and Takahashi Toru are very important people who drew up a narration of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 However, their view points are totally different. Through this controversy, we can realize that how different they are. This controversy started from the question of “Is it possible that we distinguish a Confucianist(儒學者) from a Confucian(儒者)?". And then, they dispute about 'the founder of Korean Confucianism(性理學)' and so on. The controversy was progressed three times of questions and answers. The view points on this controversy influenced their writing which are An Outline of Chosun Confucianism(『朝鮮儒學大觀』) written by Takahashi Toru and The Origin of Korean Confucianism(『朝鮮儒敎淵源』) written by Chang Ji-yoen. This study tries to analyze by getting rid of a fixed idea that Chang is a nationalists and Takahashi is a Japan government-patronized scholar. Therefore, we can found why their thinking is different from their study environment. The understanding of a Confucianism based on their lacal history and traditional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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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논문 : 元曉와 王陽明의 사상적 문제의식과 그 유사성

          최재목 ( Jae Mok Choi ) 한국불교사연구소 2015 한국불교사연구 Vol.6 No.-

          이 논문은 분황(芬皇) 원효(元曉. 617-686)와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 1528)의 생애, 사상, 문제의식의 측면에서 비교, 논의해보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시대와 지역과 사상적 맥락을 달리 한다. 즉 공간적으로한반도와 중국대륙처럼 서로 다른 문화와 습속을 갖고 있다. 또 시간적으로는 양자간에 850여년의 차이를 보인다. 아울러 사상의 면에서 이 둘은 불교와 유교로 그 맥락을 달리 한다. 이렇게 시공간과 사상적 맥락의차이를 넘어서서, 두 사상가를 비교해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사상가는 인간의 ‘마음(心)’에 주목하여 독자적인사상을 구축, 전개해간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두 사상가는 생애와 철학적 문제의식에서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즉원효와 왕양명은 시공간을 달리하는 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유사한 문제의식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렀다. 먼저, 이 두 사상가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인물로서 통합적 안목과 실천적인 성향을 가졌다. 다음으로, 두 사람이 보여주는 깨달음의 결론도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즉 원효가 무덤에서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깨달았던 ‘심외무법(心外無法)``은 양명이 그의 좌천지 귀주성 용장 생활에서 깨달았던 ‘심즉리(心卽理)’와 흡사한 경지였다. 왕양명은 나와 세계의 분리, 이분법적인 분열을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가 주요 과제였다. 즉「심과 리를 합하여 하나로 한다(合心與理而爲一)」는 과제를 해결할 열쇠는 결국 바깥에 있지 않고 ‘오심(吾心)’에 자족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그의 번민을 끝낸다. 원효 또한 국가, 사회적인 고뇌 의 날카로움, 즉 ‘두 뿔(角=覺) 사이’에 돋아난 ‘뇌영옹종(腦영癰腫)’을 중생심=일심의 수레를 끌고서 해소해간다. 이 원효의 심외무법(心外無法)과왕양명의 심즉리는 결국 나와 세계라는 두 축의 통합이라는 유사한 번민을 껴안고 있었다. 모두 인간에 대한 성찰과 인문적 방법론을 모색함으로써 그 돌파구를 마련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상적 문제의식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걸출한 사상가는 나와 세계를 만들어 내는 ‘나’(=주체)의 존재양식을 철저히‘통찰’함으로써 나와 세계의 이분화=분열이 결국 ‘나’에서 비롯됨을 자각하였다. 그 고뇌는 해소는 내 마음의 장애를 넘어 ‘하나 됨(一, 合一)’ 지평을 만남으로써 가능하였다. This paper is to discuss a Similarity of Philosophical Issues between Bunhwang Wonhyo(芬皇元曉) and Yangming Wangshouren(陽明王守仁). Wonhyo is a priest of the Silla dynasty of korea and Wang Yangming is a neo-confucian scholar of Ming dynasty of china. Such these, the two thinkers differ in time and space. However, between the two thinkers. we can see some similarities, in philosophical issues, career and character. First, the two are free-spirited personality. Next, the two are reached very similar conclusions in perspective for life and the world. Wonhyo drank water in the skeleton of the grave. And then he realized that, out of our mind, there is no principle of the world. Wang Yangming also realized that our mind is a principle in the cave of northwestern china, one day which exiled from the bureaucratic life of Beijing. The separation, conflicts and dilemma between me and the world, also the pain and anguish in our daily life and history, is comes from me. There is no truth beyond the mind. Therefore, the two knew that we must discipline our minds before criticizing the outside, and should be changed inside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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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霞谷 鄭齊斗의 ‘致良知說의 弊’비판에 관한 재검토

          崔在穆(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5 陽明學 Vol.- No.15

          이 논문은 露谷 鄭齊斗(1649~1736)의 사상 전개상에 보이는 ‘致良知說의 弊’비판 시기를 재검토해보려는 것이다. 2004년 10월 15일~16일 양일간 강화도의 안양대학교(강화캠퍼스)에서 「강화양명학파의 위상과 현대적 의미」라는 주제로 열린 『강화양명학파 국제학술대회』에서 中純夫 교수(일본ㆍ京都府立大學文學部)는 그의 발표문 「初期江華派における陽明學受容一霞谷ㆍ恒齋ㆍ樗村一」(239~241 쪽)에서, 종래 국내 연구에서 추정해온 『致良知說의 弊』비판 시기에 의문을 던지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된 적이 없는 것이며, 더욱이 종래의 하곡학 연구 성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발언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객관적인 재검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예컨대 종래 국내의 연구에서도 中純夫씨가 제기한 일부 내용에 대해서 단편적인 언급은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검토는 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짚어보는 방식으로 中純夫씨가 제기한 문제의 타당성을 재검토해본다. 윤남한과 유명종은 하곡이 양명의 치양지설 비판을 하곡의 만년으로 보고 있다. 이 이후 이것이 거의 정설화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곡의 사상을 우경화, 우파적으로 변형되었다는 일종의 추정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토대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첫째, ‘양명 치양지의 폐에 대한 비판 내지 평가’는 「존언」 저술 시(43세경)에 ‘23세경에 이루어진 꿈의 기억’과 더불어 기록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존언」이 하곡의 만년 혹은 죽기 직전까지 ‘계속 보완되었다’고 한다면 이 추정 또한 변경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任情縱欲之患」에 자극받아 하곡의 양명학 이해는 결과적으로 중국, 혹은 일본 양명학과 다른 「良知體用論」을 구상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독특한 「良知體用圖」로 구체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만년까지 양명학 이해를 유지하도록 하는 기본틀로서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하곡의 良知體用論的 양명학 이해는 중국과 일본에서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사색의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해도 좋을 것 같다. 앞으로 하곡의 연보적, 사상적 자료가 새롭게 발굴될 가능성도 있으며, 이에 따라 하곡의 양명 치양지설 비판에 따른 양명사상 체계 변화 또한 새롭게 평가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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