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
최재목(Choi Jae-Mok)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2 다산과현대 Vol.4,5 No.-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Dasan Jeong Yak-yong in 1930"s japanese imperialism era of modern korea. In 1935,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Dasan Jeong Yak-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ong won and Su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Dasan Jeong Yak-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의 『풍류정신(風流精神)』에 대한 검토
최재목(Choi Jae-Mok),정다운(Chung Da-Un)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동북아 문화연구 Vol.1 No.20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thought of Kim, Jeong-Seol. His thought appeared to his hook An Liegant Spirit(『風流精神』).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was made after he died, and it was called His main text with A story cf The Flower Man(『花郞外史』). This hook has a different writing 4 papers. The papers are The Flower Man(「花郞」), A though of Choe, jae-woo(「崔濟愚論」), A though of Yin and Yang(「陰陽論」), Chweseong Kim si-seup 「贅世翁 金時習」). And as well as the purpose of these papres, there are different form. However, the core of this article is 'The Harmony(調和)'. This 'The Harmony(調和)' is read again in today's life history It is difficult to find his thought through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But the new approach to text is needed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이 논문에서는, 아직 학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명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金源極(1871-1927)을 통해서 그가 ‘유교 이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이자 근대적 학술이 본격 유입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양명학’을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원극에 대한 소개는 서경석ㆍ김진량 엮음의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 세상유학기』, 최재목의 「日帝强占期 雜誌를 통해서 본 陽明學 硏究의 動向」, 금장태의 『한국 양명학의 쟁점』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본격적인 연구에 이르지는 못했다. 김원극은 그는 함경남도 永興郡 출신 유학자로, 松南, 春夢, 春夢子, 松南春夢 등의 필명을 사용하여 1908년부터 『西北學會月報』, 『太極學報』, 『大韓興學報』 등에 많은 다양한 글을 싣고 있다. 『태극학보』에는 주필로 활동하였고, 西北學會에서는 副總務로 활동하던 중 1909년(明治四十二年) 11월 11일 伊藤博文 被擊事件 嫌疑者로서 眞相調査를 받았으며 1910년에는 朴殷植에 이어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1934년 11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학과 경제학을 겸비한 정치객이었던 바 그 외에도 문맹퇴치에도 노력하여온 드문 지사이었던 바 지난 소화 2년 8월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김원극은 유교를 1910년대 당시의 서세동점, 약육강식의 세계사적 현실에 맞도록 근대적, 실천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개혁적 특성은 이태리 건국 삼걸의 강조하고 그러한 기풍을 한국의 청년들에게 계몽할 것을 기대하고 촉구한 데에서, 아울러 유교를 서구 기독교에 대항할만한 근대적 콘텐츠(교리, 텍스트 등) 및 종교적 체제를 갖추도록 요구한 바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수구적 보수 유림들과 사고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김원극은 박은식의 대동교 정신에 동조하는 유교 개혁 쪽에 서 있었다. 그는 유교의 본질은 계승하되 구체적 내용들은 한국의 지금ㆍ여기에 맞는 ‘時中’의 유교를 지향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유교가 새로운 체제로 개혁하고 나아가서 利用厚生 및 국민ㆍ청년계몽이라는 세계사적 문명에 발맞출 수 있는 학술이어야 함을 적극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교에 대한 관점은 그대로 양명학 이해에도 적용된다. 김원극의 양명학 이해는 「明代諸儒의 學說」과 「王陽明學論」에 잘 드러나 있는데, 먼저 「明代諸儒의 學說」에서는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은, 「王陽明學論」에서는 양명학이 나의 정신을 번롱하여 단순히 悟道를 주안으로 한 禪家와 다름을 지적하고 ‘人倫交際의 道’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각 학술은 그 세부적 특성을 유지하지만, 큰 틀에서는 합치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王陽明學論」에서는 근대학문의 한 장르인 ‘倫理學’으로서 양명학을 이해하는데 큰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은 아마도 1908년 그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얻은, 당시 일본에서 유포되고 있었던 최신의 양명학 지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추정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근대적 학술체계로 전통사상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양명학이 근대적 학문에 어울리는 특징이 있음을 평가하고자 했음을 인정해도 좋겠다. 김원극이 구상한 「倫理?」으로서의 양명학은 주체성과 능동성을 갖고 있으면서 ‘人倫交際의 道’로서 실제 사회에서 실용성을 갖춘, 化學ㆍ物理學ㆍ金石學ㆍ地質學등의 제 학문과 대등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인륜의 학문’(=윤리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의 한국에서, 외국의 신지식을 수용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양명학을 근대적 학술로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노력이 당시의 여러 양명학 연구가와 비교해 볼 때 큰 특징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his study focus on Kim Wongeuk(金源極. 1871-1927)’s Yangmyonghak(陽明學), especially, through reexamining his the famous two articles, Myongdaejeuhakseol (the Neo-confucian’s theories in Ming dynasty of china. 明代諸儒의 學說) and Yangmyonghakron(Essay on Yangmingxue. 王陽明學論). Kim Wongeuk is a man unknown to fame to us till now. But his Yangmyonghak (陽明學),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modern korea, is very important to know what is the characteristic of Modern Korea. He studied at Japan for a number of years, and so he had many information about Modern knowledge on sciences and academism in Japan. Based on this, I think, most of his knowledge on Yangmyonhak(陽明學) is also from modern japanese academic, scientific research information, such that modern japanese youmeigaku (Yangmyonghak, 陽明學) by Inouetetsujirou(井上哲次?)’s Youmeigaku-notetsugaku(陽明學派之哲學), Takasetakejiro(高?武次?)’s Ouyoumeisyouden(王陽明詳傳), and the Youmeigaku(陽明學) edited by Higasikeiji(東敬治). The most korean thought’s knowledge and action in Yangmyonghak(陽明學) are from these modern japanese. Kim Wongeuk try to define Yangmyonghak as Oriental ethics. And he think the Yangmonghak is one with the Buddhism. His the definition and interpretation on Yangmonghak are does not correspond with the original. an orthodox method. Most people in Joseon dynasty and modern Korea criticize the Yangmyonghak are very like with Buddhism, but it is a distinguishing mark that Kim Wongeuk take an active a point of view the two are fusing with.
일제강점기 정다산(丁茶山) 재발견의 의미 -신문,잡지의 논의를 통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7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하 ‘다산’ 혹은 ‘정다산’) 관련 기사 및 논고를 토대로 당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재발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정다산’의 연구와 ‘언론 매체’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는 바로 1930년대에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한국학’인 ‘조선학’ 때문이다. 그 핵심 세력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고 협조를 거부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연구자들 즉 안재홍安在鴻(1891~1965)·백남운白南 雲(1895~1979)·최익한崔益輪(1897~?) 등이었다. 그들이 펼친 조선학은 ‘조선문화 부흥’의 일환이며, 그것은 문화제국주의의 한국학인 ‘청구학靑丘學’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 대립되는 양자는 ‘한국사회·한국문화 특수성론’으로 공통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자가 후자의 전도형태 顧倒形態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다산에 대한 연구는 1934년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 서거 98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들은 조선학 부흥운동을 꾀하면서 그 일환으로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비롯하여 여타의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인 작업은 역시 1938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2면 기사에 「茶山與觸堂全書 完刑記念祝寶 來十六日 明月館에서」 라고 있는 것처럼, (1934년에 시작하여) 1938년 12월에 이뤄지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신조선사新朝雖社 출판)의 완간 작업이었다. 『여유당전서』의 출판에 참여한 인물로는 실학 관련 기사를 쓴 정인보, 최익한, 문일명文一平(1888~1936), 안재홍 등이다. 최익한은 65회에 걸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힘」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다산의 『여유당전서』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조선학운동에서 ‘정다산`은 분명 우리나라 ‘위인’의 표상이자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 개념, 인물을 새롭게 영유領有하는 방법론이기도 하였다. 그를 둘러 싼 좌의 ‘세계’ 지향과 우의 ‘민족’ 지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근대적’ 학술의 논의가 진척되었고 ‘허虛의 학’을 넘어선 ‘실實의 학’을 추구해가는 절실한 논의의 지명이 열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크게는 〈구(전통-구식)〉⇔〈신(현대-신식〉이 극명하게 대립되고, 그 대립 속에서 새로운 이념들이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익’측에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한 대응 논리로 포괄적인 민족사상 및 학문의 전통 확립을 위해 정인보鄭寅普가 ‘얼’을, 안재홍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분일평이 ‘조선심朝鮮心’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주도해갔다. 이에 반해 ‘좌익’측에서는 이청원, 백남운 등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세계사의 보편성에서 한국사체계를 구성해 사회경제사학을 확립하는 한편 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세계’에 관심을 둔 좌, 민족에 관심을 둔 우의 ‘시점視點’은 정다산, 실학, 나아가서는 조선학을 서술해가는 방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정다산 논의는 ‘민족民族’과 ‘세계世界’ 사이에서 새로운 연구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Tasan Cheong Yagyong in japanese imperialism era, especially, here focused the media and the journal in those days. In 1935,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Tasan Cheong Yag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eongwon and Seo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Tasan Cheong Yag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崔在穆(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2
이 논문은 신라 때 발생한 花郞?花郞徒가 언제부터 왜 「武의 精神」ㆍ「武士道」와 결합되어, 더욱이 「花郞道」로 새롭게 조어되어 유포되었으며, 또한 사상적으로 왜곡 선전되기 시작했는가를 재검토해가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는 것이다. 보통 한국은 「文의 나라」로 불리며, 「?武」나 「武의 精神」ㆍ「武士道」가 강조되는 데에 저항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만일 한국에서 「武의 精神」ㆍ「武士道」를 논한다면, 우선 타민족인 隋와 싸워 승리한 高句麗의 乙支文德 장군이나 임진왜란기 이론과 싸워 승리한 武? 李舜臣 등에서 보여지는 韓民族 내부의 흐름, 또 하나는 일제식민지기에 일본의 「武ㆍ侍(사무라이)」로부터 영향 받아 형성된 외래의 흐름이라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다 일본의 무사도가 오히려 한국에서 전래라고 하는 주장도 있기에 이것 또한 하나의 흐름으로 간주한다면 일단 세 가지의 계통을 상정할 수 있다. 종래 학계에는, 일제식민지기는 물론 해방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랑 관련 연구가 나와 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지대한 관심거리였다는 것을 중명하고 있다. 그런데, 종래 한국의 「?武」나 「武의 精神」ㆍ「武士道」를 논하는 경우에는 高句麗の乙支文德이나 朝鮮時代의 李舜臣 등의, 이민족과 싸운 장군들의 「武의 精神」이 강조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백제, 고구려라는 한반도 내부의 동일민족끼리 싸워 승리한 신라의 「花郞」ㆍ「花郞徒」가, 특히 「일제식민지기」에 선별적으로 적극 연구,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요약하여 말한다면 일제기에 화랑은 내선일체를 위한 도구적 가치가 인정되어 「花?道」로서 재창출되고,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에 의한 국가재건、박정희 정권하의 南韓ㆍ慶尙道 정권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논리로서 활용된다. 즉 이선근에 의해 화랑도는 한국 상무정신의 표본으로서 선전되었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래의 연구를 비판하는 형태로서 많은 연구가 이뤄져 왔다. 이 흐름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다: 花?ㆍ花?徒→花?道=武士道⇒오늘날의 花?道. 花?ㆍ花?徒는 종교적, 예술적, 군사적 등등 다양한 면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武의 精神」ㆍ「武士道」이라는 한쪽만을 강조하여, 왜곡되어 논의되어 왔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재검토하면서, 花郞, 花郞徒, 花郞道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고자 한다.
일반 논문 : 왕수인(王守仁)의 심학(心學)에서 식물(植物)과 광물(鑛物) 비유의 의의
최재목 ( Jae Mok Choi ) 한국환경철학회 2011 환경철학 Vol.0 No.11
흔히 왕수인(王守仁. 호는 陽明. 1472-1528)의 심학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중점이 놓여 있어 생물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이유로 국내외의 학계에서도 왕수인의 심학이 생물이나 식물에 대해 어떤 관점과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별도로 논의한 적은 드물다. 그러나 실제로 왕수인의 저작을 통해서 보면 그는 식물, 광물과 같은 자연물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는데 매우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왕수인의 주저『전습록(傳習錄)』을 중심으로 초목과 같은 식물, 그리고 금(金)과 같은 광물에 대한 그의 관점이 어떠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향에서 인용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구체적인 논의는 <식물을 매개로 한 사상 전개>, <초목 생장의 비유 - 윤리론, 수양·공부론의 모형 ->, <금의 순도 비유를 통한 인간 덕성의 설명> 순서로 진행하였다. 그 결과 왕수인은 초목과 같은 식물, 그리고 금(金)과 같은 광물에 대한 예를 주로 운용하면서 자신의 사상의 얼개를 짜거나 그 구체적 내용을 전개하고 있었다. 초목 생장의 비유를 통해서는 윤리론, 수양·공부론을, 금의 순도 비유를 통해서는 인간 덕성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처럼 왕수인은 그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서 나무와 풀과 같은 식물, 금과 같은 광물을 예로 들었다. 이것은 왕수인이 활동하던 당시 일상생활과 습속을 통해서 ``누구나가 인정하는`` 공인된 사물의 예를 통해 논의의 설득력을 얻기 위한 것으로, 그가 자주 사용한 설명 방식이었다. 그의 이론 정립에서 자연만큼 큰 논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 자연은 의지나 힘을 가진 것이 아닌 가치중립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무한한 책임·사명감을 명확히 하게 된다. This study argue on a meaning of the metaphors of plants and minerals in Wang Shouren` Sinxue. Here I try to suggest Wang Shouren how interests in plants and minerals related with his htoughts. It is easy to think Wang Shouren`(1472-1528) Sinxue is only focuses on the human mind, so we often did not pay attention to who or what he has interests in plants and minerals. But we can find out in his texts he actually has an interests in plants and minerals, that is associated with the construction and description of his thoughts. Wang Shouren is actually citing the examples of a grass, trees and gold to explain and develop his the theory of human nature and ethics. Perhaps at then a grass, trees and gold are universally recognized by anyone in china. This is a demonstration by the authority. For him, nature as like plants and minerals, was a mirror of human life and a large theoretical basis. So, he shall present human`s academic learning and life are basically based on principles of the nature. However, the nature does not have the power but only value-neutral. So he tried to suggest that human has the unlimited responsibility and mission for nature. Human must have a responsibility for maintaining and caring nature.
최재목(Jae-mok Choi)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2011 인간 · 환경 · 미래 Vol.- No.6
‘生命’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렇게 막상 묻고 보면 정확한 대답이 궁색해진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연구에서의 윤리원칙〉을 내용으로 하는 1964년의 《헬싱키선언》도 인간의 생명만을 다루고 있으며, 생명 일반의 논의는 제외되어 있다. 종교가, 철학자, 문학자, 생물학자, 의학자 등은 각기 그들 나름대로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같은 분야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명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각기 조금씩 나름대로의 정의(定義)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생명’이란 말에는 인간, 동물의 ‘목숨’ 외에도 ‘사물이 성립, 유지되는 유일한 힘’, ‘사물의 대단히 중요한 것(본질적인 것)’과 같이 사물의 ‘근원적 힘’, ‘본질’ 등의 뜻도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생명을 좁은 의미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일반의 삶(=生, 죽음[=死]에 대하여)으로 국한하여 보는 경향이 있지만 ‘목숨’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 일반의 ‘살아있게 하는 힘’이며, 특히 ‘숨[呼吸/息]’과 깊은 관계 속에 정의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숨을 쉬는 것이라면 당연히 ‘심장(心臟)’을 가지고 피가 순환하기에 ‘체온(體溫)’을 가지며, ‘의식(지각/사유 능력)’을 담당하는 ‘두뇌’와 ‘마음[心]’이 있는 등 몇 가지 주요 요소가 상정될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호흡, 체온(혈액순환), 마음이라는 세 요인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에서 보는 ‘생명(生命)’의 의미를 논의하였다. This paper discuss the meaning of 'life' in Oriental Philosophy. Life, in Korea, says 'Saengmyong'. But 'Saengmyong', in chinese, Sheng Ming(生命). Shengming is, by the roots, same as the Xingming(性命). But, may be, in Religion, the philosopher, a literary man, biologists and scientists etc, each have their own concept about the life. But in eastern philosophy defines the Sheng Ming(life) details as follows; Life is ① breath, ② blood circulation and body temperature, ③ consciousness and perception. Such as eastern philosophy as like Buddhism, Confucianism all deal with the problem of life. Therefore, in the east, all things, such as the existence in the universe is all life. Life just is not considered a human being. Our body and mind has deep connections with the universe, and all things already communicate with the others. This is all things exist within the realm of human life, and in the category of physical sensation that is present in the proximity. However even though the fine is always with us. So for all that exists, the whole feel is also important to respect.
특집 논문 : 환경의 관점에서 읽는 중국 고대 사상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한국환경철학회 2015 환경철학 Vol.0 No.19
이 논문은 중국 고대의 경서를 중심으로 환경 및 그 파괴나 변화의 실상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環境’이란 ‘인간을 둘러 싼 주변 혹은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이란 의미이며, 근대기 영어 ‘environment’의 번역어로서 자리잡은 개념이다.酒池肉林, 守株待兎, 牛山의 아름다운 숲의 파괴, 想像이라는 말, 優라는 농기구, 여우나 담비 가죽 - ‘狐貊(호학)’이라는 몇 가지 주요 예를 통해서, 중국사상사의 많은 장면 속에 환경 관련 언급들이 보이며 환경의 관점에서 중국 고대 사상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살필 수 있었다.더 많은 예와 개념들을 중국 고대의 텍스트(여기서는『老子』,『論語』,『莊子』,『孟子』,『韓非子』를 주로 살폈음)에서 찾아서 재구성한다면 새로운 ‘중국고대 환경 사상사’가 쓰여질 수도 있겠다. 아울러 중국고대의 사상사가 지나치게 본체론과 인성론을 중심으로 논의되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주류 논의에 의해 가려지거나 제외된, 소거되거나 무시된 많은 논의들이 이제 새로운 형태로 보완되고 복원되어 중국 나아가서 동아시아 사상사를 풍요롭게 재론할 수 계기가 될 것이다.국내의 연구에서는 보통 중국 고대의 사상 관련 텍스트를 철학사상, 윤리도덕, 정치경제의 문제를 살펴보는데 중점을 두어왔다. 구체적으로는 본체론과 인성론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기 때문에, ‘환경’ 문제가 어떻게 기록, 반영되어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핀 경우는 드물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 논문은 중국사상사 연구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는 하나의 시론이라 하겠다. This paper is a study of the ancient chinese thoughts in environment. In general, chinese thought was centered cosmology and theory of human nature. However, the ancient chinese philosophy is deeply associated with environmental changes. In previous studies dealing with neglect this point. Eventually, thoughts is a reflection of human lives and the environment. It is same in china.In Lao Tzu, the Analects of Confucius, Chuang Tzu, Mencius, Han Feizi, we can see the environment-related illustrations. In this paper, I analyze the following concepts: Jiuchiroulin(酒池肉林, The alcohol lake and forests of meat), shouzhudaitu(守株待兎, waiting to die the rabbit hit on a tree stump), the destruction of the beautiful forests Niushan(牛山), xiangxiang(想像, imagine), Farm Equipment you(優), Foxes and martens leather huhao(狐貊).As a result, the following results were obtained: First, the climate in ancient china is gradually getting colder and the weather became dry. Secondly, it was gradually enlarged in a residential and agricultural area. Therefore, mountains and forests began to be destroyed. Third, as the changes of the environment, therefore, the conditions of life were changed also.
서애 류성룡의 양명학 이해에 보이는 ‘양면성’ 해명 시론 - ‘尊德性’ vs ‘道問學’ 문제를 매개로
최재목 ( Choi Jae-mok ) 서애학회 2022 서애연구 Vol.6 No.-
이 논문은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 문제를 매개로 서애 류성룡의 양명학 이해에 보이는 ‘양면성’ 해명을 위한 시론이다. 종래의 연구에서 류성룡이 한편으로는 양명학을 ‘긍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명학을 ‘부정’하는 상반된 이해를 두고 논란이 일어 왔다. 이 논문에서는 류성룡에게 왜 이러한 문제가 야기되는지 그가 이해한 <주자학의 ‘도문학’ 경향>과 <양명학의 ‘존덕성 경향>을 대비해보는 식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류성룡은 존덕성, 도문학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 근거는 『중용』의 ‘덕성을 높이고, 묻고 배움에 말미암는다[尊德性而道問學]’라는 구절이다. 둘째, 존덕성과 도문학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존덕성이 본질이고 도문학은 그 실현을 위해 수반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존덕성은 공부의 기초이자 방향성(=아젠다)이고, 도문학은 그 존덕성을 위한 실제적 로드맵으로 이해한다. 즉 류성룡은 『중용』에서 하필 ‘묻고 배움에 말미암고, 덕성을 높인다’라 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고, ‘덕성을 높이고, 묻고 배움에 말미암는다’라고 말한 점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래서 ‘존덕성’(ⓐ)에 근본을 두고 ‘도문학’(ⓑ)을 실행하는 방법을 취한다. ⓐ와 ⓑ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둘 다 중시되어야 하나, ⓐ는 공부의 기초이자 방향성(아젠다)이고, ⓑ는 (존덕성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 경험 세계의 로드맵으로 이해한다. 존덕성=도문학(ⓐ=ⓑ)이 아니라 도문학이 존덕성에 포함되는(ⓐ⊃ⓑ) 관계이다. 셋째, 류성룡은 ‘존덕성’을 중시하는 ‘심학’에 중심을 둔다. 이를 토대로 ‘격물치지’를 내용으로 하는 ‘도문학’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존덕성, 도문학에 선후 관계는 있지만 양자는 상호보완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임이 명시한다. 이렇게 류성룡이 존덕성, 도문학의 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곧 양명학과 주자학을 이해하는 태도로도 연결되고 있다. 그래서 류성룡은 양명학은 주자학의 ‘격물치지’ 같은 도문학적 측면에 소홀하고, 주자학은 양명학의 ‘치양지’ 같은 존덕성적 측면에 소홀하다는 식으로 논의를 이끌게 된다. 이 점이 바로 류성룡의 양명학 이해에서 ‘양면성’을 드러내는 요인이라고 하겠다. This article attempts to resolve the problem of duality in Ryu Seong-ryong’s approaches to Yangming Learning by addressing the classic tension between “honoring the moral nature (zun dexing)” and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dao wenxue).” Scholarship to date has shown that Ryu Seong-ryong endorsed Yangmin Learning on the one hand, and denied its legitimacy on the other. With regard to this problem, this article explains that it arose from the classic tension between Zhu Xi’s emphasis on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and Wang Yangming’s emphasis on “honoring the moral nature.” This article argues the following points. First, Ryu Seong-yong emphasizes the balance between “honoring the moral nature” and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referring to its locus classicus in the Doctrine of the Mean. Second, Ryu Seong-ryong makes it clear that, although inseparable, “honoring the moral nature” should be primary, and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should be considered secondary as the practical method of honoring the moral nature. “Honoring the moral nature” is the purpose of learning and, therefore, sets the direction of moral self-cultivation;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is the practical road map for “honoring the moral nature.” Ryu Seong-ryong heads the sequence in which the two are state in the Doctrine of the Mean: “honoring the moral nature(ⓐ) and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instead of vice versa. In this view, Ryu arguest that the former should be the basis on which the latter could be achieved. ⓐ sets the direction of learning and its ultimate goals, and ⓑ is the road map of the empirical world one should follow ⓐ=ⓑ but as ⓐ⊃ⓑ. Third, Ryu takes seriously the Learning of the Mind which emphasizes “honoring the moral nature.” Based on such premise, Ryu also emphasizes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which begins with the investigation of things. In this regard, honoring the moral nature precedes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however, in fact, the two are inseparable. In this way, Ryu Seong-ryong understands the relation between Zhuzi Learning and Yangming Learning. Speaking of Zhuzi Learning, Ryu points out its weakness in terms of “honoring the moral nature”; speaking of Yangming Learning, he points out its neglect of “following the path of inquiry and study.” In this way, this article explains the apparent duality of Ryu’s approaches to Yangming Learning.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14 陽明學 Vol.0 No.37
조선의 유교는 여성들에게도 교육적, 문화적, 생활사적 차원에서 남성에 준하는 주요 기능을 수행해오고, 심지어는 일부 상위계층의 여성들에게 학문적, 지적, 문화적, 문예적 전망을 갖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가 申師任堂(1504-1551), 시인 許蘭雪軒(1563-1589)과 金浩然齋(1681-1722), 성리학자 任允摯堂(1721-1793)과 姜靜一堂(1772-1832)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가 길러낸 지성인들이다. 아울러 학자이자 시인, 화가등등 많은 호칭을 가진 여중군자 張桂香(1598-1680)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유교라는 시대정신 속에서 임윤지당과 장계향은 성인을 꿈꾸었다. 남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여성의 신분으로 유교의 정상을 꿈꾸었다는 점은 동아시아 지성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만하다. 張桂香은 퇴계 이황의 심학 학통을 이어받은 敬堂張興孝(1564-1634)의 무남독녀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장계향은, 退溪李滉(1501-1570)의 학풍과 맥을 잇는 鶴峰金誠一(1538-1593)의 수제자인 아버지 경당 밑에서 자랐기에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다. 10세에『小學』과 『十九史略』을 깨쳤고, 13세에는 敬身吟, 聖人吟, 蕭蕭吟등의 시를 남겼다. 아버지에게서 持敬과 修身을 배우고, 타고난 재능과 더불어 아버지의 공부법을 본받아 문예적 기법과 안목, 역사에 대한 의식, 인생과 우주의 원리(=文史哲)에 대한 기반을 다지면서 性理學者= 哲學者로서의 면모를 다듬어 갔다. 장계향이 학문과 시?서?화에 능했고,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表題는 閨?是議方](1670년경)을 썼다. 최근 한국에서 여성리더십이 재평가되면서 그 전통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장계향은 ‘나눔과 사랑으로 세상을 치유한 조선의 여인’, ‘깨달은 조선 여인’, ‘慶北女性의 큰 별’, ‘女性君子’, ‘여성철학자’, ‘조선의 큰어머니’, ‘최초의 한글 조리서의 저자’ 혹은 ‘아시아 최초로 요리서를 남긴 여인’, ‘과학자’, ‘실학자’, ‘전란 속에 민초를 구휼한 사회사업가’ 등등 수많은 호칭으로 이른바 <장계향 붐> 내지 <장계향 르네상스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여성리더십’의 전통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새롭게 글로벌 차원에서 브랜드화하여, 새로운 한류로 연결해 가는 일이다. Confucianism of Joseon Dynasty greatly influenced to Korean Women. Especially it provide to have a perspective and intelligence are necessary in confucian society. So many women philosophers and intellectuals have grown in here Joseon Dynasty. The typical women are Sinsaimdang, Henanseolhyeon, Kimhoyeonjae, Imyunjidang, Gangjungildang. In addition to these one, we must not forget a person is Janggyehyang(張桂香, 1598-1680). She had many titles, scholars, poets, painters, social workers, educators, and the great korean mother. She is, generally, called intellectuals of the intellectuals(Yojunggunja. 女中君子). She wrote the first manual book of Hangul cooking food, Eumsikdimibang(飮食地味方). She showed the importance of making food. The food is making is just honoring human(Gyeong In, 敬人). Further, it is honoring things(Gyeong Mul, 敬物) and heaven(Gyeong Ceon, 敬天). These are from to the ancient Korea traditional ethnic thinking form, Gyeong(敬, Reverence and piety). Another import one is that she declared “I can be a Confucian a sage.” Such a declaration would be very rare in East Asian Confucianism. Recently in South Korea have became to discuss the importance of women leadership. By this reason, she began to re-evaluated in Gyeongsangbuk-do which she was born, and South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