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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흥원의 『역중일기<SUP>曆中日記</SUP>』에 나타난 상‧제례 운영의 특징

          이욱(李煜)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8

          본고는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역중일기曆中日記』에 나타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통해서 18세기에 사대부들이 유교 의례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고찰한 논문이다. 본고는 먼저 _역중일기_에 나타난 상례를 살펴보았다. 『역중일기』는 1735년부터 1786년까지 50여 년간의 방대한 기록인데 당시 극심하였던 전염병과 그에 따른 공포와 죽음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최흥원은 1735년 부친상父親喪, 1740년 부인상婦人喪, 1763년 아들의 상喪, 1765년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그는 수차례의 상례를 『주자가례』에 따라 거행하고자 하였는데 절차만이 아니라 회격묘灰隔墓의 조성과 소방상小方牀의 사용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둘째, 최흥원이 수행한 제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최흥원은 5대조 최동집崔東㠍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별묘別廟의 사당과 ‘보본당報本堂'이란 이름의 재사齋舍를 만들어 문중의 주요 제향 공간으로 삼았다. 시제時祭의 운영만을 볼 때 최흥원은 가묘家廟보다 별묘別廟를 더 중시하였다. 한편, 문중의 결속에 시제가 중요하였지만 그의 일상은 시제보다 기제忌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시제가 일 년에 2회에 그쳤다면 기제는 5대조로부터 아내, 동생, 자식의 기일忌日까지 챙겼으므로 더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부친에 대한 별도의 제사인 예제禰祭도 거행하였다. 그 외 10월의 묘사墓祀 역시 중요한 의례였다. 5대보다 더 이전 조상을 묘사를 통해 만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더 넓은 범위의 문중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최흥원의 의례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접빈객接賓客과 전염병傳染病이었다. 접빈객은 당시 사회의 중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손님의 방문과 접대는 제사에 필수적인 요소라 여겼던 재계齋戒를 방해하였다. 3일 또는 하루의 재계 동안에 오로지 제사와 조상만을 생각하고자 했던 주인의 마음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으로 쉽게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은 현실의 사회관계를 중시하면서도 공경의 상태를 유지하려 했던 당시 유학자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반면 전염병은 상례와 제례의 수행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의례 실천에 걸림돌이었다.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은 집을 나와 외진 곳을 찾아 흩어져 생활해야 할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제례를 폐하거나 임시로 간략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변례를 통해 유교 의례는 현실에 적응하고 삶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18세기 조선사회에 유교는 이미 사회문화에 주도적인 이념이었다. 특히 사대부가에서 사당과 제례는 가족과 문중을 결속시키는 기본 의례였다. 최흥원은 이러한 제례를 『주자가례』에 따라 최대한 실천하면서 문중을 지키고, 나아가 자신의 경건한 삶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가족'과 ‘집'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의례의 경건성과 추모의 감정을 유지하려했던 사대부들의 노력 속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역중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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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후반 기후특성의 비교사적 고찰

          이욱(李旭) 한국국학진흥원 2012 국학연구 Vol.0 No.21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이 기후 특성을 연구하는데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기후사 연구에서 『실록』의 자료가치를 검증하고, 그 활용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이웃한 중국의 장기간의 기후 변동 상황을『조선왕조실록』 자료 분석표와 비교하였다. 나아가 15세기 후반이라는 제한된 시기의 조선의 기후 변동 양상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중국과 비슷한 기후 변화 주기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조선왕조실록』은 적어도 기후현상의 거시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유용한 자료라고 판단되었다. 다만 기후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결론도 얻었다. 가뭄과 같은 재이현상에 대한 기록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재이현상을 실정과 연결시키는 유교사상 때문에, 사소한 현상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실록』의 재이 관련 기록을 세심하게 검토하고, 유의미한 통계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15세기 후반의 기후 특성과 이에 대한 인간의 대응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에는 가뭄과 홍수가 많이 발생했지만 비교적 안정된 기후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기후안정에 비례하여 흉년이나 기근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이는 기후의 급격한 변동이 없었던 데서도 기인했지만, 재해를 경감하기 위한 정부와 민간의 적극적인 노력도 개입해 있었다. 세조대의 적극적인 제언 수축과 역농의식力農意識의 주입, 성종대의 활발한 천방川防 축조 등이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가뭄과 같은 기상 현상이 곧바로 흉년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This study was conducted in order to confirm whether The Annals of the Choson Dynasty is a reliable material for research on weather characteristics. For this purpose, we compared weather phenomenawith those in China and Japan in the long period. From the results, it was found that The Annals of the Choson Dynasty is a useful material at least to grasp macroscopic trends in weather phenomena. The record of portents has been somewhat exaggerated. Since Portents were considered as Heaven"s signs, the rulers have to express their sincere efforts to rectify any wrongs. So we should carefully examine the data, and obtain meaningful statistics Based on this assumption, we analyzed weather characteristics in the second half of the 15th century. the climate was not changed violently in this period. This suggests that the climate was relatively stable in this period. As a consequence of stable weather, famine decreased markedly. However, this was not only because of stable climate but also because of the government's active efforts to reduce disasters. As droughts and floods were not frequent, social costs for recovery from disasters also decreased considerably and the saved money could be invested in the construction of social safety nets for the prevention of disasters. Such efforts included the government's active construction of embankments, introduction of seeds suitable for reclaimed lands, and inspiration of the consciousness of forceful farming enduring natural disasters such as floods. As a result, abnormal weathers such as droughts did not lead directly to bad harvests.

        • 1SE-4 : 제지 산업의 다기능성 폴리머 (PVAm)

          이욱 이욱(2) 한국공업화학회 2014 한국공업화학회 연구논문 초록집 Vol.2014 No.1

          VFA(Vinylformamide)는 독성이 강한 Acrylamide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로 대두되고 있으며 VFA를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PVAm(Polyvinylamine)을 합성하여 제지공정에 다양한 용도로 적용이 가능하다. 현재 제지산업의 가장 큰 목표는 기존 종이물성을 유지하면서 filler(탄산칼슘)의 첨가량을 늘려 원가절감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종이 강도 저하, 인쇄품질 저하, 공정오염 등의 많은 문제가 발생되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약품으로 PVAm이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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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가학家學 전승과 문중서당門中書堂

          이욱(李旭) 한국국학진흥원 2011 국학연구 Vol.0 No.18

          유교는 정신의 계승으로서 도통道統과 학맥學脈을 중시하였다. 이와 함께 유학자의 학풍이나 인격을 형성하는데 있어, 사승관계師承關係 못지않게 가학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가학은 조선시대 학문 전승의 중요한 통로 중 하나였다. 이 글에서는 ‘생활양식의 전승'이라는 관점에서 조선시대 가학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가학'의 다양한 용례를 살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가학이라는 용어는 가풍家風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며, 학문의 전수와 함께 취미와 경세론, 행동거지 등 생활양식을 전수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가학이 전수되는 주요한 장소였던 문중서당門中書堂의 운영원리와 실제 운영 사례에 대해 살폈다. 문중서당은 같은 문중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가학의 전승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문중서당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교육 원리는 주자가 엮은 『소학小學』에 입각한 교육, 즉 학문을 익히기 이전에 바른 몸가짐과 마음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문중 서당의 성격상 과거 공부를 전폐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었다. 문중이 향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급제자를 배출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소학』에 입각한 교육을 하면서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과정도 적절하게 운영하였다. 18세기 이후 문중서당의 운영은 단정한 언행과 진지한 학문 탐구, 그리고 적절한 과거 공부를 통한 입신양명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울러 종족宗族간의 화목한 가풍을 마련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결국 문중 서당 운영을 통한 가학의 전승은 진지한 학문 연구를 통해 해당 문중의 독특한 학풍을 형성하여 전수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단정하고 엄숙한 생활태도를 가풍 내지 가학으로 수립하고 이를 대대로 전수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Confucianism emphasized the lineage of learning(道統) and scholastic network(學脈) for the transmission of spirit. Along with these, it regarded family scholarship(家學) as important as teacher student relationship(師承關係) in building Confucians' academic or personal character. Family scholarship was one of important channels for the transmission of learning in the Chosun Dynasty. This study analyzed family scholarship in the Chosun Dynasty from the viewpoint of ‘transmission of lifestyle.' For this purpose, we examined various examples of ‘family scholarship' used in the Chosun Dynasty. According to the results, the term ‘family scholarship' used in the Chosun Dynasty had a meaning similar to ‘family tradition(家風),' and also implied the transmission of lifestyles such as tastes, governing philosophies, and code of conduct. Next, we examined the operating principles and actual cases of family school(門中書堂), which was a major place where family scholarship was transmitted. Family schools were established for strengthening the inner solidarity of family and transmitting family scholarship. The educational principle to be implemented through family schools was education based on Chu Hsi's Xiaoxue (小學-Elementary Learning), namely, the acquisition of right physical and mental attitudes before learning. Given the nature of family schools, however, they could not neglect preparation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s. In order for the family to maintain its status in the village, the school had to produce students successful in such examinations. For this reason, family schools taught proprieties and Xiaoxue and, at the same time, helped students be prepared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s. From the 18<SUP>th</SUP> century, family schools were operated mainly for decent words and deeds, serious learning, and successful life through passing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Moreover, they paid attention to family traditions promoting peace and harmony among family members. After all, the transmission of family scholarship through the operation of family school was partly for establishing and maintaining a unique scholastic tradition of the family but its more meaningful purpose was to promote decent and elegant life attitudes as family tradition or family scholarship and hand them down through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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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제사의 의미와 기억의 의례화儀禮化

          이욱(李煜) 한국국학진흥원 2011 국학연구 Vol.0 No.19

          본고는 유교의 조상 제사를 기억의 의례화라는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먼저 조상 제사의 목적을 근본에 보답하고 시원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제사를 구성하는 제 요소들을 조상과 후손, 시간과 공간, 절차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먼저 제사의 대상을 살펴보면 조상 제사는 그 대상이 혈연적 연속성에 의해서 정해지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공적인 국가 제사나 향당의 제사가 ‘공덕功德'을 기준으로 대상을 정하는 것과 대비되었다. 그리고 제사는 죽은 영혼을 조상으로 안착시키는 의례였다. 한편, 사후死後 흩어지는 혼백魂魄의 성질 속에서 감응의 조 건과 후손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후손은 흩어지는 혼을 부르는 필수조건이며 감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주체이다. 한편, 조상이 거주하는 사당과 의례의 공간이 되는 집(家)을 통해 기억의 연속성을 볼 수 있었다. 이 에 반해 주기적인 제사의 시간은 일상성 속에 매몰되는 부모의 기억을 되살리는 의례의 주요 방식이었다. 마지막으로 제사의 절차는 부모에 대 한 음식의 공궤供饋를 재연함으로써 효의 실천을 보여 주었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ancestral memorial services of confucianism from the viewpoint of ‘ritualization(儀禮化) of memory'. At first, this article understood the purpose of ancestral memorial services as rewarding one"s root and returning to the origin. It also looked at the elements of services into ancestor, descendant and procedures. As to the object of services, the descendants distinctively decided to whom they would service by the blood continuity. That is contrasted with the memorial services of state or village communities which decided the objects by charitable deeds. Memorial services was the ritual to enshrine the soul of the dead as ancestor. As the soul was believed to be scattered after death, the descendant and the conditions of sensing reaction became more important. The descendant are the one who calls back the scattering soul and feels the sensing reaction directly. The continuity of memory can be found in shrine where ancestors reside and house where services take place. Periodic service is the main method to revive the memory of parents that recedes in the routine daily life. At last, the procedure of services represented the practice of filial duty by reenacting the supporting parents with f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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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이욱(李旭) 한국국학진흥원 2016 국학연구 Vol.0 No.30

          이 글은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의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과 그 성격을 고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특히 광산김씨의 일원이었던 김해金垓는 임란 초기부터 예안 의병의 중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안동열읍향병' 결성 이후에는 도대장都大將으로 경북 북부 일원의 의병부대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 글에서는 광산김씨의 의병활동을 안동 예안지역 의병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과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성격을 통해 밝히고자 하였다.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 사람들은 전쟁 초기부터 자발적으로 의병을 결성하여 초기부터 활약하였다. 처음에는 관군과 협력하여 죽령으로의 일본군 진출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었지만, 일본군에게 예안이 점령당하면서 이 지역 의병활동은 한때 위축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반전되면서 의병이 재결성되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 대다수 군현을 포괄한 대규모의 ‘안동열읍향병'이 결성되었고, 광산김씨 예안파의 김해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안동열읍향병은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과 합력하여 일본군의 핵심주둔지인 당교를 집중 공격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이 당교에서 철수하자 그들을 쫓아 밀양, 경주까지 진출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 활동은 경상도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북상한 일본군 주력부대의 연결고리를 끊거나 경상도 지역의 주요 거점 지역을 분쇄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해가 지휘했던 안동열읍향병은 해당 지역 명망 사족들의 연합부대의 성격을 지녔다. 이들은 대부분 이황의 문인들이었다. 이들과 연합했던 관군 지휘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사이에는 학문적인 일체감 뿐 아니라 혼인 관계도 겹치는 매우 밀접한 사이였다. 때문에 예안의병은 관군 지휘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관군이 지닌 병력과 무기의 우수함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예안 의병의 활동은 기존 임진왜란사나 의병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임란 초기 관군의 활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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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ancial Management and Fishery & Salt Policy in Late Chosŏn: Focusing on the Regulations of the Equalized Tax Law for Maritime Taxes

          이욱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1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16 No.2

          The Regulations of the Equal-Service Law of 1750 for maritime taxes, finalized in the revision of the fishery-salt tax, did not make an active move for the financial expansion of state revenue. Because of the state's emphasis on the use of the fishery-salt tax for a compensation to the reduction of 'military service tax for men of good status,' the taxation was confined strictly to means of production, not any surplus value gathered from the process of commodity transaction. This non-commercial orientation of the taxation under the Regulations caused the serious lack of fact-finding investigation and exact calculation for the completion of the taxation. At the same time, while laying blame on the various illegal activities, including concealment and negligence, of the local offices and their associates for the gradual reduction of the tax revenue, the state had little consideration on how to guarantee a stable condition for the taxpayers to continue the business. There was no state-sponsored program to sustain the conservation of the fishery-salt business that usually faced a precarious market in production and price. The passive approach as above made the fishery-salt tax vulnerable to the hands of the royal estates, central bureaus, and local administration in an endeavor to secure their own finances rather than state revenue.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provincial quota system was introduced as a supplementary financial resource in state revenue. Eventually, the provincial quota system came to facilitate the localization or decentralization of the fishery-salt tax due to the enormous amount of expenditure in management. The enactment of the Regulations reflected the basic limit of the Chosŏn economy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The vital expansion of commodity transaction during the periods definitely needed a structural shift in the established commercial policy of the state. Yet, the inability of the central government to read the situation and cope with the demands of the day turned the growing profit, gained from the non-agricultural sector of the economy, in unofficial forms of miscellaneous taxes that were never systematically channeled into the pubic finance of the central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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