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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대구읍지』 편찬과 사족의 대응 -과거편과 인물편의 인물 수록 시기 분석을 중심으로-

          이재두 ( Jae Doo Lee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6 嶺南學 Vol.0 No.29

          이 글은 조선 후기 『대구읍지』의 편찬과 증보 과정 및 과거편과 인물편의 인물 수록 시기 분석을 통하여 읍지 편찬을 둘러싼 대구 지역 사족의 대응을 살펴보았다. 『대구읍지』는 1637년 처음 편찬된 이래, 1697년 현감 우석규, 1757년 진사 조춘경에 의하여 증보 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대구읍지』(1768)는 조춘경 등이 『여지도서』의 저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1786년에는 우재악, 서발, 도술모 등에 의해 읍지가 수정·보완되었다. 『대구읍지』는전국 읍지 상송령에 따라 편찬된 『경상도읍지』(1832)·『영남읍지』(1871)·『영남읍지』(1895)의 일부, 혹은 『대구부읍지』(1899)로 보관되어 있으며, 『경상도읍지』(1832)의 초고본인 국립중앙도서관의 『대구부읍지』로도 남아 있다. 17세기 말 풍각과 화원 지역이 대구에 편입되면서 『대구읍지』의 증보가 필요하였다. 1697년 읍지 과거편에는 밀양을 연고로 하는 많은 인물들이 수록되었다. 『대구읍지』 과거편은 1786년을 마지막으로 19세기가 끝나가도록 추가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1786년 이후 『대구읍지』에서 18세기 말 이후의 과거 합격자가 수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1786년 추가된 인물 10명 중 8명은 고려 말 이래 인조 때까지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보 사항은 『경상도읍지』(1832)부터 확인할 수 있는데, 1786년의 읍지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대구읍지』 인물편 수록 인물의 추가 과정을 통해 조선 후기 대구 지역 사회를 주도해 나간 사족의 확대 양상을 살필 수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읍지만으로는 1637년 읍지를 처음 편찬할 당시 수록되었거나 수록되었다가 빠진 인물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구 지역 사족들은 『대구읍지』에 입록하기 위하여 자신의 선조들이 정구의 문인임을 밝히려고 노력하였음을 확인할 수있다. 『대구읍지』 인물편에 보이는 정구의 문인 22명은 1637년 4명이 처음수록된 이래, 1697년 15명이 추가되었고, 1832년 3명이 추가되었다. 조선 후기 지역 사회에서 읍지 입록은 후손들이 사족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대구 지역에서는 읍지 편찬 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화원 지역(화원 8방) 사족들의 불만이 강하였다. 화원 지역에서는『대구읍지』에 화원 지역 인물들이 제대로 수록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화원읍지라 할 수 있는 『금성집언』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관과 유착된 서인·노론계 사족들이 읍지 편찬을 주도하면서 이들에 대한 지역내 남인계 사족 세력이 불만을 가졌거나, 아예 사족 세력을 배제하고 관이 중심이 되어 향리들이 주도하여 읍지를 편찬하였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는 19세기읍지에 지역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전혀 수록하지 않은 데서도 알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d the compiling and revising of Daegu Eupji(the town record of Daegu), and the people in the Civil Servant Examination and People Sections of the Eupji, and looked into the response of the gentry of the Daegu area. Daegu Eupji was first compiled in 1637 and revised by the mayor Wu Seok-gyu in 1697 and Jinsa(low-ranking public officer) Jo Chun-gyeong. The surviving Daegu Eupji(1768) seems to have appeared while Jo Chun-gyeong and others were making the original script of Yeojidoseo, the national geographical book. The Daegu Eupji was revised and complemented by Wu Jae-ak, Seo Bal and Do Sul-mo in 1786. Daegu Eupji is kept as a part of Gyeongsang Province Eupji(1832), Yeongnam Eupji(1871), and Yeongnam Eupji(1895), or as Daegu District Eupji(1899), and is left as Daegu District Eupji, which is the first edition of the Gyeongsang Province Eupji(1832). In the late 17th century, Daegu Eupji needed to be revised because Punggak and Hwawon areas were included in Daegu. In the Civil Servant Examination Section in the Eupji in 1697 many people who had a connection with Miryang city were included. The Civil Servant Examination Section in the Daegu Eupji did not have any additions since 1786 until the end of 19th century. Another proof of this fact is that since 1786, Daegu Eupji has not added anyone who passed the civil servant examination after the end of the late 18th century. The eight out of ten people who were added in 1786 were the people who lived betwee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the King Injo(1623∼1649)periods. This shows that the Eupji is the products of the efforts of the Daegu gentry of the late 18th century who included their ancestors in order to enhance their status in their town society. However, this addition can be confirmed from Gyeogsang Province Eupji(1832) since the 1786’s Eupji has not survived. Looking into the process of adding people to the People Section in Daegu Eupji, we can find expanding influence of the gentry who led Daegu society. By looking at the surviving Eupji, it is difficult to confirm the people who were added, or who were added and then removed from the Eupji since it was first compiled in 1637. We can only confirm that the Daegu gentry tried to prove that their ancestors were the followers of the scholar Jeong Gu in order to include their ancestors in the Daegu Eupji. Out of the 22 followers of Jeong Gu in the People Section in Daegu Eupji, four people were first added in 1637, 15 in 1697 and three in 1832. In the local societ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dding their ancestors to the Eupji was the result of the descendants’ efforts who wanted to be recognized as part of the gentry. When Punggak and Hwawon areas were newly added in the Eupji during the compiling time, the gentry in Hwawon(8 sub-divisions) were strongly dissatisfied with the compiled contents. They were dissatisfied that people in Hwawon area were not added properly, so they compiled the Geumseong Jipeon, a version of Hwawon Eupji. It is presumed that while the Westerners and the Norons who were linked to the seat of political power were instrumental in compiling the Eupji, the Southerners of the area were dissatisfied with the content. This can be confirmed from the fact that the main local leaders were not recorded in the 19th Eup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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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Cu 금속전극 태양전지의 Ni electroless plating에 관한 연구

          이재두,김민정,권혁용,이수홍,Lee, Jae-Doo,Kim, Min-Jeong,Kim, Min-Jeong,Lee, Soo-Hong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 2011 전기전자재료학회논문지 Vol.24 No.4

          The formation of front metal contact silicon solar cells is required for low cost, low contact resistance to silicon surface. One of the front metal contacts is Ni/Cu plating that it is available to simply and inexpensive production to apply mass production. Ni is shown to be a suitable barrier to Cu diffusion into the silicon. The process of Ni electroless plating on front silicon surface is performed using a chemical bath. Additives and buffer agents such as ammonium chloride is added to maintain the stability and pH control of the bath. Ni deposition rate is found to vary with temperature, time, utilization of bath. The experimental result shown that Ni layer by SEM (scanning electron microscopy) and EDX analysis. Finally, plated Ni/Cu contact solar cell result in an efficiency of 17.69% on $2{\times}2\;cm^2$, Cz wa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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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반영된 효 인식

          이재두 ( Jae Doo Lee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5 嶺南學 Vol.0 No.28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 『동람』)의 효자편은 신라, 고려, 본조, 신증으로 분류하여 효자들의 이름과 효행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동람』의 신라 때 효자들은 모두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잘 봉양한 사례들이다. 고려 말에 이르면, 『주자가례』와 유교 윤리의 보급으로 부모 사후의 효행인 시묘가 확산되었다. 『동람』 효자편을 분석해 보면 1485년(성종 16)초간 때에는 시묘(여묘) 행위가 많고, 1530년(중종 25) 신증할 때에는 부모생시의 시병(간병) 사례가 많다. 『동람』 효자편을 보면 경상도는 부모 사후 시묘한 경우가 많고, 경상도 이외 지역은 부모 생시의 효행이 많다. 전라도 지역은 열녀가 많다. 경상도는 고려 말 안향, 정몽주, 이숭인, 길재 이래 유교 윤리가 일찍 보급되고 실천된 지역이었다. 경상도 각 군현은 일찍부터 유교화하여 향촌 사회의 지배층들이 『동람』의 편찬 취지에 잘 부응하였고, 『동람』 편찬을 위한 효자 정보 수집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충청도는 효자 선정에 매우 소극적이어서 효자 이름만을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별로 효자편 설정의 중요성 인식이나 기준 적용의 차이로 인해 자료 수집의 양이 달라졌다. 『동람』에 수록된 효행 사례 중 노비들과 여성들의 경우 대부분은 부모가 병들거나 위기에 처하는 등 극한적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베어 약으로 쓴다거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부모를 구한 경우가 많았다. 『실록』에의하면, 노비 등 천인에 대한 효행 정표는 중종 시기를 정점으로 하여 이후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들에게서는 효행보다는 열행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삼강행실 효자도』(1432, 세종14)에 수록된 효녀 8명 가운데 4명이 성종 때 편찬된 『동람』에서는 열녀편에 수록되었다. 『동람』에는 신라 시대 불교적 효의 실천이 분명한 진정대사와 김대성의 사례는 제외되었다. 『동람』 편찬자들은 역대 효행 사례 중에서 유교적인 효행이 분명하거나 최소한 유교 윤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은 사례들을 모았다. 이에 따라 지나치게 불교적이고 전통적인 효행 사례는 의도적으로 빠뜨렸다. 『동람』의 초간과 신증 시기는 각각 축소 개편된 『삼강행실도』(1489, 성종20)와 『속삼강행실도』(1514년, 중종 9)가 편찬된 시기와 가깝다. 이 책들에 실린 효행 기록은 일상생활 중에 실천한 사례보다는 시병·위난 등 특수한 상황에서 실천된 사례가 제법 많으며, 특히 부모 사후 효행의 비율이 높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381 cases of filial sons recorded in the Sinjeung Dongguk Yeoji Seungram(『新增東國輿地勝覽』 ; Augmented survey of Korean geography). It first analyzes these cases in terms of periods, provinces, types of filial conducts, their objects, and official commendations; then it speculates on the question of how these records reflect changes in the conception of filiality in sixteenth-century Korea.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as follows. In terms of periods, the early Joseon accounts for 79%, whereas Goryeo and Silla account for 20% and 1% respectively. Evidently this breakdown reflects the new dynasty``s endeavor to proliferate the Confucian values by officially commending filial sons. On the other hand, filial conducts by Silla Buddhists(like Kim Daeseong who built Bulguksa and Seokguram) were conspicuously deleted. Among the eight provinces,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of Gyeongsang(40%), Jeolla and Chungcheong account for 70% of filial sons, whereas the three northern provinces of Pyeongan(8%), Hwanghae(6%), and Hamgyeong(2%) occupy merely 16%, and the two central provinces of Gyeonggi(10%) and Gangwon(4%) 14%. The uneven distribution of filial sons far surpass the breakdown of the population among the eight provinces, and it seems to suggest a much stronger Confucian influence in the south than in the north. In the sixteenth century, subtle changes occurred in the Korean conception of filiality. The two-year mourning at parent``s grave became so commonplace that it was no longer officially commended. Instead, they emphasized filial piety while the parents were alive. A notable change also took place in the father/mother ratio. In the Goryeo period, mothers were more common objects of filial conducts than fathers; in the Joseon, it was by far reversed. These facts seem to indicate the prevalence of patriarchy. The ruling elite became quite complacent. From these facts, we can surmise that by the Confucian values were taking root in Korean society by the sixteenth century. The subsequent compilations of local gazetteers continued to underscore the filial conducts of their residents. And these paragons encouraged the Korean people to comply with the Confucian codes of behavior. Presumably this helped Confucian Korea perpetuate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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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장각 일부 후사본 읍지와 이마니시문고의 관계

          이재두(Lee, Jae-Doo)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20 한국민족문화 Vol.74 No.-

          조선 후기 읍지 연구는 규장각 소장본을 중심으로 해제 작업과 연구 활동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규장각 읍지들의 소장 경위나 읍지 편찬 시기 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부족하였다. 읍지는 각 고을의 역사 지리 인문 정보를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어 식민 지배에 유용한 자료였다. 조선총독부 취조국과 참사관분실은 읍지의 수집과 전사에 힘을 기울여 1915년경에는 959종의 읍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현재 규장각의 도서번호 규17355번부터 규17539번까지 184종 188개 고을 189개의 읍지는 당시에 제작한 ‘후사본’이다. 이 읍지들은 취조국과 참사관분실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읍지를 바탕으로 제작한 후사본이다. 처음에는 몇몇 고을씩 합철하고 도서번호를 매기지 않았지만, 고을별로 분할하면서 도서번호를 부여하였다. 규장각의 후사본 읍지는 편찬 시기가 이른 경우들이 많아 조선후기 읍지편찬 사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였다. 그러나 연속하는 번호 대에 있는 이들 읍지가 일제 강점 이후 동일한 시기에 일률적인 지침에 따라 원본을 베낀 후사본이라는 인식은 부족하였다. 후사본 읍지들은 숙종, 영조, 정조 시기 정부 주도 읍지 편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야기할 수 있다. 후사본 189개 읍지 가운데 69%인 130개 읍지의 원본은 일본 덴리대학 덴리도서관의 이마니시문고가 소장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10%인 20개 읍지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따라서 후사본의 원본인 이마니시문고의 읍지는 장서각의 일부 읍지들처럼 대한제국 제실도서로 규장각이 관리해 오던 도서들이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규장각을 폐지하고 이왕직이 관리하던 제실도서가 1911년 6월 규장각도서와 장서각도서로 분리될 때, 장서각도서로 분류되어 이왕직이 관리하였다. 1910년대 구관제도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취조국과 참사관실이 장서각의 원본을 베끼는 과정에서 장서각에는 일부만 남고 대부분은 이마니시가 소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후사본은 원본에 있던 지도를 모두 생략하였으며, 원형을 무시하고, 장당 24행×24자로 통일시켰다. 경기도와 경상도의 원본은 인찰정간에 장당 24행×20자, 20행×20자로 정서한 선본이다. 이에 비해 다른 지역의 읍지들은 선본도 있지만, 원본 자체도 전사한 후사본인 경우가 있어, 읍지의 크기와 서체가 일정하지 않거나, 별지가 들어 있기도 하다. 원본은 처음에는 고을별로 성책한 상태였는데, 전사 작업 뒤 몇몇 고을씩 합철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읍지 편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마니시문고 읍지 전체를 대상으로 편찬 시기와 읍지 유형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아울러 규장각을 비롯하여 국립고궁박물관, 장서각,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등 주요 기관 및 개인 소장 읍지는 물론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 자료센터 등에서 영인한 읍지들 전체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Kyujanggak"s 189 eupjis, from book number No. 17355 to Kyu 17539, are hand-copied eupjis. Imawanishi"s Collection of Tenry Library has 69 percent, or 130 original books. The eupjis, which were owned by Imawanish, were the royal books of the Korean Empire, the eupjis that were previously owned by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 or the eupjis collected from The Consulate"s office, or by Imawanish while participating in the Joseon Historical Research Project since 1906. The Consulate"s office was combined several counties based on the ‘Imawanish eupjis’. At first, the book number was not assigned, but then the book number was assigned the county by division of each county. Compared to the Imawanish eupjis, the copied editions make it difficult to identify the original form of the eupjis at the time of the eupji"s compilation. Some of the critical years, the names of the previous year"s local authorities and contents were omitted in determining the timing of the compilation, or some other contents were included in the eupji. While copying the eupji, he corrected the clear error or incorporated the contents of the annex into the text.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the reality of the compilation of the eupji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copied editions properly through the original eupjis of Imawanishi"s Collection, but it is also necessary to study the whole eupjis of Imawanishi"s Collection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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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속현 단위 읍지 편찬의 배경과 목적- 대구 화원현 읍지 『금성집언』(1788)을 중심으로 -

          이재두 ( Lee Jae-doo ) 대구사학회 2016 대구사학 Vol.125 No.-

          이 글은 1788년(정조 12) 이수완(李壽完)이 편찬한 화원현 읍지인 『금성집언(錦城輯言)』을 분석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성주목에 속하였던 화원현(화원 8방)은 1685년(숙종 11) 경상 감영 소재지인 대구도호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1788년(정조 12) 화원현의 사족인 이수완은 이 지역의 읍지인 『금성집언』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일종의 속현(屬縣) 지역에서 편찬한 읍지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가 크다. 이보다 앞선 1749년(영조 25) 권상일이 『상산지』를 증보하면서, 상주목 속현인 산양현(산양 5면)의 읍지인 『산양지』 편찬을 시도한 기록이 보이나 현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무렵 『상산지』 증보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단밀현지』가 남아있다. 『금성집언』은 성주읍지인 『경산지』의 화원현 관련 내용을 위주로 하였으며, 『여지도서』와 『대구읍지』의 구성 항목에 따라 이들 읍지에서 누락한 내용을 중심으로 보완하였다. 이 책은 속현 사족(士族)들이 중심이 되어 읍지 편찬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역이 소외된 것에 반발하면서, 지역 사족의 현양(顯揚)과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지역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기 위해 편찬한 읍지이다. 『대구읍지』와 비교해 보면, 방리(坊里)를 비롯하여 명승(名勝), 패설(稗說), 이문(異聞) 등 화원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故事]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수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대구읍지』 편찬 기준에는 미흡한 화원현 지역 단위의 인물들이었다. 일연이나 이숭인, 정구 등 전국적인 인물을 발굴하려는 노력도 부족하였다. 18세기 말 당시의 지역 사회 사족들을 중심으로 자신들과 관련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수록하고자 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This paper analyzed Geumseong Jipeon(『錦城輯言』), the local record of Hwawon-hyeon(花園縣), compiled by Lee Suwan(李壽完) in 1788(the 12th year of King Jeongjo). Hwawon-hyeon used to belong to Seongju-mok(星州牧) since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but in 1685(the 11th year of the King Sukjong) came to belong to Daegu-dohobu(大丘都護府), where the Gyeongsang-do government office was located. A hundred years since then in 1788(the 12th year of the King Jeongjong) Lee Suwan, the Hwawon-hyeon gentry compiled Geumseng Jipeon, the local record of Hwawon area. This book derive sits value and significance in that it was the local record compiled in Sokhyeon(屬縣), the small administrative division. There is a record prior to this time in 1749(the 25th year of the King Yeongjo) that while editing Sangsan Ji(『商山誌』), Gwon Sangil(權相一) attempted to compile Sanyang Ji, the local record of Sanyang-hyeon(山陽縣), the Sangju-mok(尙州牧) Sokhyeon, but it does not exist. There exists only Danmil-hyeon Ji(『丹密縣誌』), which seems to have been produced while supplementing Sangsan Ji. The main contents of Geumseong Jipeon focused on Hwawon-hyeon related topics in Gyeongsan Ji(『京山志』), the Seongju Eupji(the Seongju town record) and supplemented the omitted contents of local records in the Yeojidoseo(『輿地圖書』, the national Eupji) and Daegu Eupji(『大丘邑誌』) according to their categories. Geumseong Jipeon was compiled mainly by the Sokhyeon gentry who rebelled because it felt its area was being ignored while the local records were compiled. By compiling its own local record, the gentry wanted to promote its local gentry family names while attempting to expand their influence and promote their local identity. Compared to Daegu Eupji, the Gemeseong Jipeon is rich with many passed-down stories of the Hwawon area including the village scenic spots, mysterious and interesting folk tales and rumors. However, against the original enthusiasm, the people in the record were limited to local figures in the Hwawon-hyeon which did not satisfy the Daegu Eupji compiling standards. It was lacking in the attempt to discover the national figures such as Ilyeon(一然), Lee Sungin(李崇仁) and Jeong Gu(鄭逑). This shows its limited judgement in trying to discover the local figures by focusing solelyon the local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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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경상도 읍지 편찬 사업 재검토

          이재두 ( Lee Jae-doo ) 대구사학회 2020 대구사학 Vol.138 No.-

          이 글에서는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의 『영남여지』(1841)와 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 경상도편(1878, 이하 『고궁읍지』)의 편찬 시기와 읍지 유형 및 저본을 살펴보았다. 『영남여지』는 92%가 『경상도읍지』 유형이며, 『고궁읍지』 경상도편은 72%이다. 『고궁읍지』와 『영남여지』를 통해 1786년과 1832년 편찬한 『경상도읍지』 가운데 분실한 읍지의 원형을 추적하여 보유편을 확보할 수 있다. 경상도의 1786년지는 9개 고을 읍지를 분실하였다. 『고궁읍지』 경상도편에는 이들 읍지가 두 책에 연속하여 실려 있는데, 1786년지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9개 고을의 1786년지는 『경상도읍지』 유형 4개, 『여지승람』+알파(α) 유형 3개, 『여지도서』(경상도) 유형 1개, 『여지도서』+α 유형 1개가 된다. 1832년지는 4개의 읍지를 분실하였다. 『영남여지』를 통해 김산군, 영덕현, 고성현의 『경상도읍지』 유형을 확인할 수 있으며, 『교남지』(1938)를 통해 의성현의 『경상도읍지』 유형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832년지의 각 고을 읍지는 『경상도읍지』 유형이 100%이다. 조선후기 읍지들을 숙종, 영조, 정조 때 개발한 몇몇 유형으로 분류하여 파악하면, 저본으로 사용한 읍지의 편찬 시기와 수록 항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역사 연구에서 조선후기에 편찬한 읍지를 활용하려면 읍지의 편찬 시기와 유형 및 저본 등을 제대로 파악하여야 한다. In this article, we looked at the time of compilation, the eupji type, and the origin of Yeongnam Yeoji(1841) and Gogung Eupji(Gyeongsang-do sections, 1878). The original form of the lost eupjis was revealed out of the Gyeongsang-do Eupji, compiled in 1786 and 1832 through Gogung Eupji and Yeongnam Yeoji. Yeongnam Yeoji is 92 percent of the Gyeongsang-do Eupji type, and Gogung Eupji is 72 percent. Gogung Eupji is believed to be based on Gyeongsang-do Eupji(1786), as lost eupjis from nine counties are bound by two books. If so, it appears that there were four Gyeongsang-do Eupji types, three Yeojiseungram+α types, one Yeojidoseo types, and one Yeojidoseo+α types. Gyeongsang-do Eupji(1832) lost eupjis in four counties. Yeongnam Yeoji confirmed the the Gyeongsang-do Eupji type in Gimsan-gun, Yeongdeok-hyeon and Go Seong-hyeon, and Uiseong-hyun can check the traces of the Gyeongsang-do Eupji type through Gyonam-ji(1938). In this way, each county in Gyeongsang-do Eupji(1832) has a Gyeongsang-do Eupji type of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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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5년(인조 13) 현풍현감 김세렴의 『포산지』 편찬

          이재두 ( Jae Doo Lee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6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8 No.-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苞山志』(古2758-1)는 조선 중기 현풍현의 읍지이다. 이 읍지는 표지까지 합쳐 69장 137면의 필사본이며 모두 4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표지에 찍힌 붉은 색 印記는 1741년부터 1745년까지 현풍현감이었던 朴致文 소장본이었음을 보여준다. 『동명집』과 현풍면에 남아 있는 김세렴 인정비에는 金世濂이 『포산지』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포산지』에 실린 기록의 하한인 풍영대 제명 석각이 1634년 5월 16일이고, 제영 뒤의 遺事들은 원문을 많게는 2/7까지 줄였는데, 이 과정에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김세렴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따라서 『포산지』는 현풍현감 김세렴이 중심이 되어 1634년 시작하여 1635년경에 편찬하였음이 분명하다. 자료의 수집과 편찬 과정에서는 풍영대에 함께 이름을 새겼던 제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인조반정과 북인의 몰락이라는 정국의 위협 속에서, 과거 현풍 지역 인물들이 조식과의 학문적 연원이 깊음에도 불구하고, 김세렴과 현풍 사족들은 현양할 인물과 지리 정보들을 김굉필, 이황, 정구로 연결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포산지』 곳곳에는 현풍 사회를 주도해온 북인계의 흔적이 보인다. 조식의 제자이며, 박성·곽준의 스승인 裵紳을 높이려는 지역 사회의 노력은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곽율은 조식의 제자로 배신·김부륜·김우옹과 서로 학문과 덕을 닦았으며 박성·곽준과 종유하였다. 정구 신도비와 박성 행장에서는 정구와 박성이 정인홍과 관계를 단절한 내용을 부각시켰다. 곽준 신도비에는 증조부인 곽승화가 김굉필과 더불어 김종직의 문하에서 종유한 사실은 나오나, 스승인 배신이나 조식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곽율, 박성, 곽준,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특히 곽준은 황석산성의 영웅으로 국가로부터 포상 받은 인물이다. 곽재우전은 한 면이 떨어져 나갔지만 배대유가 지은 것이다. 배대유는 조식의 再傳弟子로 광해군 때 폐모론을 주도하였다. 곽재우전 뒤에 협주로 곽재우가 영창대군을 주살하려는데 반대하여 올린 상소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역모 사건이 빈번했던 인조 정권 아래서 비판 세력의 예봉을 피하기 위한 장치였다. 요컨대 『포산지』는 북인계 남인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김세렴과 현풍 지역의 사족들이 중앙 정계의 주요 남인 세력들과 연결하여 지역 인물을 현양을 하고, 이를 통해 역모에 희생되지 않기 위한 생존 투쟁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Posanji(古2758-1), which is kept in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is a record of Hyeonpung Hyun, in the mid-Joseon dynasty. This record comprises 69 sheets of paper with 137 pages of manuscript with 45 items. The red stamp on the cover of the book shows that its owner was Park Chimun, who was the mayor of the Hyeonpung Hyun from 1741 to 1745. According to Posanji, Pungyeongdae Stone Monument was named on May 16, 1634. The historic records after the poetry recital section of the book shows that the poems were shortened from the original ones. In the Appreciation Monument of Kim Seryeom, which remained in Hyeonpung Myeon, was recorded that it was he who compiled Posanji. From these records, it seems Kim Seryeom was indeed the main compiler of Posanji. He possessed such excellent writing skills that he was sent to Japan as a diplomat less than a year after he left his post as Hyeonpung Hyeon mayor. Posanji was compiled around 1635(the 13th Year of King Injo) but begun sometime in 1634. We can see traces of the Northerners who were leading Hyeonpung society. The local community`s effort to promote Bae Shin, Jo Sik`s disciple, was not accepted. Bae Shin was a teacher of Park Seoung, Kwak Yul and Kwak Jun. Despite the fact that local figures in Hyeonpung in the past were deeply connected academically to Jo Sik, Kim Seryeom and certain Hyeonpung gentries connected local famous people and geographical information to Kim Goengpil, Lee Hwang and Jeong Gu. Kwak Yul, Park Seong, Kwak Jun and Kwak Jaewoo raised volunteer armie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Kwak Jun was rewarded by the government as a hero of the Hwangseok Wall battle. A piece of the Kwak Jaewoo biography section in the Posanji was lost, but it was written by Bae Daeyu who was Jo Sik`s disciple and led the Decrowning of the Queen Movement during the Prince Gwanghae period. The commentary at the back of the Kwak Jaewoo biography recorded that Kwak Jaewoo wrote the opposing appeal to put Prince Yeongchang to death. This was their plan to avoid the impetuously harsh charge from the critical forces under King Injo`s rule when treason was prevalent. In summary Posanji was the result of Kim Seryum and Hyeonpung gentry`s struggle to survive who were pro-Northerner Southerners. They made a connection with the major Southerners in the central government and promoted local scholars so that they would not become a scapegoat of t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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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산지』에 실린 『여지도서』의 목차와 편찬 규정

          이재두 ( Lee Jae-doo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7 嶺南學 Vol.0 No.60

          언양현 읍지인 『헌산지(?山誌)』(1760)의 서문과 각종 범례는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표준 양식, 곧 목차와 편찬 규정을 밝혀준다. 『헌산지』를 편찬할 무렵 홍문관에서 내려 보낸 규정은 35개 항목이었다.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쳐 5개의 항목을 추가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최종 완성된 『여지도서』의 경상도 지역 목차는, [지도], [강역(彊域)] 외에 ①방리(坊里), ②도로(道路), ③건치연혁(建置沿革), ④군명(郡名), ⑤형승(形勝), ⑥성지(城池), ⑦관직(官職), ⑧산천(山川), ⑨성씨(姓氏), ⑩풍속(風俗), ⑪능침(陵寢), ⑫궁실(宮室), ⑬학교(學校), ⑭단묘(壇廟), ⑮총묘(塚墓), ?공해(公?),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橋梁), ?역원(驛院), ?목장(牧場), ?관애(關?, 관액), ?봉수(烽燧), ?누정(樓亭), ?사찰(寺刹), ?고적(古蹟), ?진보(鎭堡), ?명환(名宦), ?인물(人物), ?제영(題詠),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조적(??),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 ?군병(軍兵) 순이다. 군현에 따라 최대 40개 항목까지 수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지리지를 목표로 한 『여지도서』 편찬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수록 23개 항목에 [지도], [강역], ①방리, ②도로, ⑦관직, ?공해, ?제언, ?창고, ?목장, ?진보, ?한전, ?수전,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병의 17개 항목을 추가하였다. 경상감영에서 내려 보낸 홍문관 지침에 따라 각 군현에서는 중앙에 올려 보낼 3권(어람ㆍ홍문관ㆍ성균관), 감영에 비치할 2권을 만들어 감영에 바쳤다. 감영에서는 각 군현에서 읍지를 일률적으로 재단하고 장정하여 책으로 묶었다. 현존하는 『여지도서』 경상도편은 일부 군현이 누락되어 있지만, 여러 차례의 수정 지시를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모든 항목`을 반영하였다. 이에 비해 다른 도 지역에서는 ⑬학교(學校)ㆍ?명환(名宦)ㆍ?제영(題詠), ⑫궁실(宮室)ㆍ⑮총묘(塚墓) 항목이 대부분 들어 있지 않다. 이들 5개 항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수록 항목이었으나, 여러 차례의 수정 지시에도 불구하고 목차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기 이전까지는 경상도에서도 빠져 있던 항목이었다. 중앙 정부의 지방 통치 자료 수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 항목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재지사족의 입장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례를 들어 이들 항목을 유지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인물의 수록 자격도 중앙 정부에서 요구하는 수준으로 제한하지 않고 더 많은 인물들을 수록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여지도서』에서 경상도와 다른 도 지역의 일부 항목이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러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The preface and various introductory notes printed on Heonsanji(『?山誌』)(1760), Eupji(『邑誌』, local gazetteer) of EonyangHyeon(彦陽縣) explain the table of contents and compilation regulations of Yeojidoseo(『輿地圖書』). The table of contents for Yeojidoseo is 40 items except for [Map] and [Boundary(彊域)]. According to Heonsanji, Yeojidoseo contains Eupji where [Map] and [Boundary], and 17 items are added to 23 items listed on existing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新增東國輿地勝覽』) - compiler intended to expand Yeojidoseo into national geography section. According to guideline of Hongmunkwan(弘文館) sent down from Gyeongsang Gamyeong(慶尙監 營), each county sent 3 books[King`s reading(御覽)ㆍHongmunkwanㆍ Seonggyunkwan(成均館)] to be sent to central government and 2 books kept in Gyeongsang-Gamyeong, to Gamyeong. In Gamyeong, Eupji collected in each county were uniformly cut, bound to a book. Gyeongsang-do chapter of Yeojidoseo was missing some counties. But all of items of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were finally reflected through instructions for revision. On the other hand, the other province chapters do not contain items of school(學校)ㆍimportant government official(名宦)ㆍpoetry(題詠), royal chamber(宮室)ㆍgrave (塚墓). The 5 items were listed ones on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But they were missing before the table of contents was finally fixed, though instructions for revision several times. These items would not have been necessary in terms of data collection for governing local government by central government. But from the standpoint of local scholars(在地士族), they would want to keep the items, raising the old cases(古例) of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And they would want to list more figures on figure item, not limiting number of figures - central government limited it. This would be the reason why Gyeongsang-do chapter and other province chapters are different each other in Yeojido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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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대의 제1, 2차 읍지 편찬 사업(1757~1760)

          이재두(Lee, Jae-d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장서각 Vol.0 No.41

          영조대의 제1, 2차 邑誌 編纂 事業은 『輿地圖書』 유형이냐, 아니냐의 차이로 구분 할 수 있으며, 수록순서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항목이름도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토산, 성곽, 사묘, 관방, 불우였으나, 『여지도서』에서는 물산, 성지, 단묘, 진보, 사찰로 바뀌었다. 1757년부터 시작한 영조대의 제1차 읍지 편찬 사업 당시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찬읍지와 숙종대 『여지승람』 수정증보 사업의 성과를 반영하였다. 숙종대에 편찬한 읍지가 고을에 남아 있는 경우는 그것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기준으로 수정증보하였다. 수록항목에 대한 정확한 세부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읍지편찬자들은 주로 인물이나 이들의 행적, 혹은 시문의 수록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지방관에 의해 제동이 걸리기도 하였다. 1759년 후반부터 시작한 제2차 사업에서는 홍문관의 범례에 따라 모든 고을의 읍지 목차가 거의 동일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는 다른 새로운 관찬읍지의 표준양식이 등장한 것이다. 홍문관이나 감영은 수록항목에 대한 세부규정을 여러 차례 변경하였다. 수록규정에 따라 수정한 고을별 초고는 도별로 감영에서 다시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여지도서』는 도별로는 각 고을의 항목 수록기준이나 서술방식이 어느 정도 동일해졌다. 그러나 각 도 사이에는 항목별 수록 내용이나 기준이 어느 정도 차이가 나기도 한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여지도서』 유형이 아닌 읍지도 존재한다 At the time of the first Eupji compilation project during King Yeongjo (英祖)’s reign, which began in 1757, Based on Sinjeung-Dongguk-Yeoji-Seungram (新增東國輿地勝覽), Eupji compilation project (邑誌編纂事業) during King Sukjong’s reign was reflected in the results. When Eupji compiled during King Sukjong’s reign remained in the town, it was confirmed by revision. Otherwise, the compilers were forced to revise and augment Eupji based on injeung-Dongguk-Yeoji-Seungram. In the absence of an accurate detailed guideline on the items listed, Eupji compilers focused on the person or their activities, or literatures. However, these efforts were also stopped by the local minister. The first and second Eupji Compilation projects during King Yeongjo’s reign can be distinguished by the type of ‘Yeojidoseo (輿地圖書)’ or ‘no’ and the order in which there are many differences. In the second compilation project, the table of contents of all towns’s Eupji was almost identical according to the legend of Hongmungwan. Yeojidoseo has different regulations for each province and town. The thencompiled Eupji of each town, housed in Gyujanggak, illustrates this confusion in the course of the compilation of Yeojidoseo. Article 35 of the Hongmunkwan legend was issued, but there was a different understanding of the detailed items. In Gyeongsang-do, five additional items were added to simplify the administrative district and include a lot of literatures. Hamgyeong-do included a number of poems across several items, adding school and balcham (發站) items, although it did not contain any poems. The second Eupji Compilation project King Yeongjo’s reign was grouped into a book in 1760 and called Yeojidoseo. It had not been able to compile Eupji at Hanseongbu, Gaeseongbu, some towns in Gyeonggi and Chungcheong Province. This is a new standard form of Gwanchan-Eupji (官撰邑誌), which is different from Sinjeung-Dongguk-Yeoji-Seun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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