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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운동 전개 양상에 대한 재검토

          이문기 ( Lee Moon-key ) 대구사학회 2021 대구사학 Vol.142 No.-

          본고의 목적은 국채보상운동 초기, 발상지 대구지역의 전개 양상을 재검토하여 선행연구에서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하는데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07년 1월 29일 서상돈의 국채보상 발의는 「취지서」로 작성되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다. 종래에는 「취지서」가 1종만 작성된 것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1월 말에 작성된 「1차 취지서」와 이를 윤문·교정하여 2월 상순에 다시 작성한 「2차 취지서」의 2종이 있었다. 둘째, 발의와 취지문의 배포에도 불구하고 국채보상운동에 큰 진전이 없자, 대구의 운동 추진세력은 운동 전담 단체를 새로 조직하고, 대규모 군중집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 조직된 단체는 ‘대구금연상채회'와 ‘대구민의소'였는데,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전담하는 단체로서는 전국 최초로 조직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대구민의소'는 대구군민대회를 주최·진행하기 위한 만들어진 실행단체였으며, ‘대구금연상채회(얼마 후 '대구단연상채회‘로 개명됨)'가 대구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던 핵심 단체였다. 셋째, ‘대구민의소'는 두 번에 걸쳐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두 번의 군중집회는 이후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활성화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넷째, 대구는 여성들이 전국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를 밝혔던 장소인데, 종래에는 활동의 중심에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식 단체가 아니며, 실제로 대구에서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는 그 정신과 방법론을 계승한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였다. This study set out to review the developmental patterns of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in Daegu, the birthplace of the movement in its early days, and revise and supplement insufficiencies in previous studies. The new findings of the study we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Seo Sang-don's motion for national debt repayment was written as a prospectus in January 29, 1907 and distributed around the nation. The old understanding was that only one prospectus was written. The fact is that there were two prospectuses including the first one written in late January and the second one rewritten based on the first one through embellishment and proofreading during the first ten days of February. Secondly, recognizing that there was no big progress in the movement despite the distribution of the motion and prospectus, the group that pushed the movement forward in Daegu formed new organizations devoted to the movement and prepared for a large mass demonstration. The new organizations devoted to the movement were "Daegu Geumyeon Sangchaehoi" and "Daegu Minuiso," firsts of their kind in the nation. "Daegu Minuiso" was an enforcement agency to hold a demonstration of soldiers and civilians and ensure its progress. "Daegu Geumyeon(Danyeon) Sangchaehoi" was the most important organization to lead the movement in practice in the Daegu area. Thirdly, "Daegu Minuiso" held two demonstrations of civilians, which offered a critical chance to vitalize the movement in Daegu and spread it around the nation. Finally, women declared their participation in the movement in Daegu first in the nation. It was understood in the past that "Namildong Paemul Pyeji Buinhoi" was at the center of their activities in the movement, but it was not an official organization. It was "Daegu Namsan Gukchae Bosang Buinhoi" that actually led women's activities in the movement in Daegu. (honorary professor,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mklee@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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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재일기(樂齋日記)』를 통해본 대구지역 임진왜란 의병의 활동과 성격

          우인수 ( In Soo Woo ) 대구사학회 2016 대구사학 Vol.123 No.-

          본고는 임진왜란 시기 대구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 과정과 의병의 활동을 살피고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본고에서의 대구지역은 임란 당시 大丘都護府 관할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하였는데, 이는 대구지역의 의병이 대구부사와 일정한 협의를 거치면서 일어났을 뿐 아니라 대구부 관할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고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대구지역 의병활동의 특징적인 한 모습을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최근 임란 연구에서는 의병 창의에 대한 의의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관군의 역할을 일정하게 인정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본고도 이와 같은 최근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대구지역 의병의 경우 관군과의 연관 하에서 일어난 점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본고에서 활용한 주된 자료는 대구의 유력 사족이었던 樂齋 徐思遠이 남긴 일기인 『樂齋日記』이다. 그는 대구지역의 의병 대장을 맡은 인물로 결성초기부터 관여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일기에는 대구 의병이 결성되는 과정과 활동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대구지역 의병의 특징으로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창의의 출발 단계 때부터 官民 협력체제가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창의의 주동자인 서사원은 부사와 함께 논의를 통해 의병을 구성하였고, 부사도 의병의 훈련에 참관하여 관심과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대구부 전체의 의병진의 구성은 대구부의 행정조직인 면리를 기본 단위로 하여 義兵將과 有司를 배치함으로서 대구부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를 취한 점이었다. 이는 安集使 金륵이 경상좌도 몇몇 고을에서 시행하여 효과를 본 체제였는데, 대구도 이 체제를 받아들여 적용한 것이었다. 대구지역 의병의 전공은 비록 혁혁하지 않았지만 관민이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대구지역 내의 산 속에 머물면서 대구부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한 점은 일정하게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대구지역 의병의 성격은 전체 의병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formation process and activities o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after Japan invaded Joseon in 1592 and to ascertain its nature. Here, the Daegu region refers to the areas under the governance of Daegu Dohobu(大丘都護府) during the war since the army was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based on consultation with the Daegu Busa(大丘府使) with the noblemen of Daegubu(大丘府) forming such an army and fighting in and around Daegubu, which clearly shows a characteristic aspect of activities that the army carried out in the Daegu region. Recent studies o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ave made new attempts to recognize the certain roles of royal forces without damaging the significance of the army. The present study also followed the recent flow in its research efforts.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is a good case of such armies and in connections with the royal forces. The major source of the present study was Nakjaeilgi, a journal kept by Nakjae Seo Sa-won that was a member of a prominent noble family in Daegu. He was the general o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and got involved in the army from the beginning, thus holding a position to get detailed information about its circumstances. His journal offers a good description about the process and activities of the army in the Daegu region, thus claiming great value as a historical material. The first characteristic o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was a relatively smooth cooperation system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from the early days of its formation. Seo Sa-won, the leader of the army, discussed its formation with the Busa, who, in turn, showed his interest and concern for the army by observing its training. The next characteristic was that the organization of the army covering the entire Daegubu was based on the basic units of Myeon(面) and Ri(里), the administrative units of Daegubu, deployed the general and the secretary, and thus encompassed the entire Daegubu. The system was originally implemented by Anjipsa(安集使) Kim Reuk in some towns in Gyeongsangjwado(慶尙左道) and later accepted by Daegu. Even though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did not perform meritorious service during the war, it deserves high evaluation in that it established a collaborative system with the royal forces, stayed in the Daegu region, and tried to protect the life and property of people in Daegubu. Those aspects of the army will be of assistance to the research on the entire history of armies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iswoo@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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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지역 고대정치체의 형성기반과 달성토성의 위상 -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

          김세기 ( Kim Seki ) 대구사학회 2018 대구사학 Vol.132 No.-

          대구지역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월성동 777-2유적에서 좀돌날 석기를 포함한 석기 제작장이 조사된 바 있어 늦어도 후기 구석기시대 전후로 보인다. 그 이후 신석기, 청동기, 원삼국 시대를 지나면서 하천과 구릉지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고, 인구의 증가와 농경이 발달하여 고대 정치체가 형성되게 되었다. ‘대구분지'는 주변 산지의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한 금호강과 대구의 중심을 북에서 남으로 관류하는 신천의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즉 금호강과 신천, 팔거천, 진천천 주변의 충적지와 그 주변으로 발달한 낮은 구릉지를 포괄하는 범위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은 기원전 2세기말이 되면서 고조선 혹은 낙랑지역 주민들의 유이민 파동에 의해 발달된 중국 한(漢)의 철기문화가 급속히 전파되고, 농경을 비롯한 철기제작기술의 발달로 여러 세력사이에 정복과 통합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철기문화와 함께 무문토기가 주류이던 토기도 와질토기라는 새로운 토기가 등장하여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즈음에 묘제도 지석묘와 석관묘에서 목관묘라는 새로운 묘제로 변화한다. 이 목관묘는 구릉의 중심지에 집중화 되고 한국형동검과 철제무기 및 무엇보다 중요한 철제 농공구 등이 대량으로 부장되는 등 고대 정치체 형성의 기반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삼국지』 등이 보여주는 진변한 소국의 형성 징후를 그대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국가 형성의 징후는 기원전 1세기 전반의 대구 팔달동 유적에서 잘 나타나고, 만촌동과 평리동 등에서도 이시기의 청동제품과 철기들이 출토된바 있어 금호강 유역의 대구지역이 다른 지역 보다 빠른 시기에 소국이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대구지역에는 다벌국(多伐國), 혹은 달벌국(達伐國)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이름들은 대구의 고총고분군 분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대구지역에서 이러한 소국이 존재했던 곳은 대구 중부의 내당동, 비산동, 평리동지구와 화원지구, 다사지구, 팔달동지구, 불로동지구 등이다, 여기에는 달성토성을 비롯하여 화원의 성산토성, 죽곡리 산성, 봉무동토성, 검단토성 등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소국 중에서 중심은 달성토성이 있는 다벌국 혹은 달벌국이었다. 또 이때의 묘제는 이전까지 목관묘가 주류였으나 점차 정치권력이 확대 되면서 고총고분군으로 이어진다. 대구지역의 주요 고총고분군은 내당 동·비산동고분군, 대명동고분군, 성산리고분군, 문산리고분군, 구암동고분군, 불로동고분군 등이다. 달성토성은 대구분지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토성이나 점토다짐의 중간에 석축을 교차로 쌓아올린 토석 혼축성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신문왕 9년(689)에 오늘날의 대구광역시 중심부인 달구벌로 수도를 옮기려 하였다. 비록 실행하지는 못하였지만, 아마도 달성토성은 새 수도 궁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였을 것이다. The first time people started living in Daegu seems to be around late Late Paleolithic. The reason for this is that the stoneworks, including Jomdolnal seoggi, were found in the 777-2 ruins of Wolsung-dong. Since then, villages have been formed around the rivers and hills, passing through the Neolithic, Bronze Age, and the Third World. As a result, population growth and agriculture developed and ancient politics were formed. ‘The Daegu Basin' covers the alluvial areas around Kumho River, Shincheon, Palgcheon and Jincheon, and the low hills developed around them.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iron culture of Han, which was developed by the migrants of Choson or Nakrang area, spread rapidly in the end of the second century BC. The development of iron and steel making technology, including agriculture, led to the active conquest and integration among the various forces. In addition to iron culture, the earthenware culture changed from Mumuntogi to Wajiltogi. At this time, the mausoleum changes from a stone coffin grave to a wooden coffin. This wood carvings are concentrated in the center of the hill and show the foundation of the formation of ancient politics such as Korean sword and iron weapons, and most important iron farming tools. The signs of the formation of the early state appeared well in the Paldal-dong area of ​​Daegu in the first half of 1st century BC. And the bronze products and iron ware were excavated at Munchong-dong and Pyeongri-dong in the same period. It is known that Daegu was a Dabeol country or a Dalbeol country, which is related to the distribution of tombs in Daegu. In Daegu area, these small areas were Namdang-dong, Vishan-dond, Pyeongry-dong and Hwawon Area, Dasa Area, Paldal-dong, and Bulro-dong. There are the earthen ramparts such as Sungsan, Seongsan, Jiokgok, Bongmudong, Geomdan. After the re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Silla tried to move the capital to the Dalgubel, the center of Daegu Metropolitan City(689). Perhaps Dalseong earthen ramparts, although it could not, was probably the most likely candidate for the new capital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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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대구공동위원회의 설치와 활동

          허종 ( Heo Jong ) 대구사학회 2017 대구사학 Vol.126 No.-

          대구공동위원회는 1946년 전국에서 유일하게 미군정의 제안으로 대구지역의 좌우 정치세력이 협력하여 식량문제를 비롯한 지역 현안을 논의,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아울러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장래 소련과의 회담에서 자국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견지에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여의치 않을 경우 대중들에게 좌파세력의 기만성을 노출시켜 대중과 분리시키고 탄압.약화시키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대구지역에 유일하게 설치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해방 후 여러 차례의 좌우연합과 미군정에 대한 좌우세력의 협력노선이 작용하였다. 좌파세력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원칙의 하나로서 좌우연합을 추진하였고, 대구공동위원회를 그 일환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취약한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인식하였다. 대구공동위원회는 지역의 대표적인 좌우세력의 네 개 정당의 대표로 구성되었고, 군정의 하곡 수집 협력과 농민들의 하곡 수집 독려, 일제 잔재 청산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좌파세력 탄압과 좌파세력의 응전이라는 전국적 정국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결국 10월 항쟁으로 좌우세력의 신뢰가 무너지고 미군정이 좌파세력을 탄압하면서 대구공동위원회는 와해되었다. In 1946, the Daegu Joint Committee was established solely for the purpose of discussing and resolving regional issues, including food issues, by cooperating with the left and right political forces in Daegu region with the proposal of U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It was also an application on the regional level as one of the measures to realize the policy of strengthening the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in the future talks with the Soviet Union by acquiring the popular support of Korean people for the US policy after the recession of the U.S.-Soviet Joint Commission. At the same time, it was part of the policy of separating the left-wing forces from the masses by exposing their deceitfulness, and exposing and weakening them in case of things going wrong. The background of its establishment solely in Daegu area was the coalition several times of the left and right forces and the cooperation of them with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after the liberation. Leftist forces have pursued a left-right coalition as one of the principles for establish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democracy decided at 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and recognized the Daegu Joint Committee as its part, and at the same time, as a way to expand the weak public base. The Daegu Joint Committee consisted of representatives of four political parties from representative regional left-right forces, and was centered on cooperating with the military in collecting summer crops, encouraging farmers to collect summer crops, rice paddies, and clearing the remnants of Japanese rule. However, it was not free from the nationwide flow of the oppression on leftist forces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and the reaction of the leftist forces, finally, the Daegu Joint Committee was collapsed when the trust of the left-right forces fell down due to the October Struggle 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suppressed the leftist forces.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hjong@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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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의 대구 공업에 관한 연구

          박진영 대구사학회 2018 대구사학 Vol.130 N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olve the doubt that Daegu depends on the textile industry, whose economic status is falling, and has not been able to carry out structural changes properly. After liberation, the Daegu industrial industry has not developed into a specialized industry for the metal industry, the mechanical industry, the textile industry, and the printing industry beyond the national average. Since the Korean War, Daegu has made the textile industry a specialized industry thanks to its cheap labor and rapidly growing apparel demand. The specialization of the textile industry was, among other things, a phenomenon that appeared in the government's economic revival policy under US aid policy. In Daegu, the 'beneficiary' group was large companies in the textile industry during the allocation of aid materials and foreign currency funds. The conciliation and cohesion of these beneficiary firms and the state have greatly exacerbated the bureaucratic monopoly character. As a result, the industrial structure of Daegu in the 1950s has become a dual structure. Due to bureaucratic monopoly capital, which is the biggest beneficiary of Korea and Daegu, Daegu depends on textile industry only and has not been able to carry out structural change properly. 이글은 대구가 왜 경제적 위상이 추락하는 섬유공업에만 의존하고 구조 변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을까라는 의구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 후 대구 공업은 공장수 및 종사자수를 지표로 보았을 때 금속공업, 기계공업, 방직공업, 인쇄공업이 전국 평균을 넘고 있어 당시 어떤 특정업종이 특화산업으로 발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대구는 값싼 노동력과 급증하는 의류수요에 힘입어 섬유공업을 특화산업으로 만들었다. 섬유공업의 특화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무엇보다 미국의 원조정책 하에서 정부의 경제부흥정책을 추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대구에서 원조경제 하의 원조물자 및 그 외화자금의 배정 과정 중에서 ‘수혜자'집단은 방직공업의 대기업들이었다. 이러한 수혜기업들과 정부의 결탁과 유착은 관료독점적 성격을 크게 심화되게 하였다. 결국 1950년대 대구의 공업구조는 극소수 대규모 섬유공업만이 발달한 기형화 현상을 가져왔다. 즉 우리나라 및 대구의 최대수혜자인 관료독점자본으로 인하여 대구는 섬유공업에만 의존하고 구조변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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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속현 단위 읍지 편찬의 배경과 목적- 대구 화원현 읍지 『금성집언』(1788)을 중심으로 -

          이재두 ( Lee Jae-doo ) 대구사학회 2016 대구사학 Vol.125 No.-

          이 글은 1788년(정조 12) 이수완(李壽完)이 편찬한 화원현 읍지인 『금성집언(錦城輯言)』을 분석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성주목에 속하였던 화원현(화원 8방)은 1685년(숙종 11) 경상 감영 소재지인 대구도호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1788년(정조 12) 화원현의 사족인 이수완은 이 지역의 읍지인 『금성집언』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일종의 속현(屬縣) 지역에서 편찬한 읍지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가 크다. 이보다 앞선 1749년(영조 25) 권상일이 『상산지』를 증보하면서, 상주목 속현인 산양현(산양 5면)의 읍지인 『산양지』 편찬을 시도한 기록이 보이나 현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무렵 『상산지』 증보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단밀현지』가 남아있다. 『금성집언』은 성주읍지인 『경산지』의 화원현 관련 내용을 위주로 하였으며, 『여지도서』와 『대구읍지』의 구성 항목에 따라 이들 읍지에서 누락한 내용을 중심으로 보완하였다. 이 책은 속현 사족(士族)들이 중심이 되어 읍지 편찬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역이 소외된 것에 반발하면서, 지역 사족의 현양(顯揚)과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지역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기 위해 편찬한 읍지이다. 『대구읍지』와 비교해 보면, 방리(坊里)를 비롯하여 명승(名勝), 패설(稗說), 이문(異聞) 등 화원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故事]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수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대구읍지』 편찬 기준에는 미흡한 화원현 지역 단위의 인물들이었다. 일연이나 이숭인, 정구 등 전국적인 인물을 발굴하려는 노력도 부족하였다. 18세기 말 당시의 지역 사회 사족들을 중심으로 자신들과 관련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수록하고자 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This paper analyzed Geumseong Jipeon(『錦城輯言』), the local record of Hwawon-hyeon(花園縣), compiled by Lee Suwan(李壽完) in 1788(the 12th year of King Jeongjo). Hwawon-hyeon used to belong to Seongju-mok(星州牧) since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but in 1685(the 11th year of the King Sukjong) came to belong to Daegu-dohobu(大丘都護府), where the Gyeongsang-do government office was located. A hundred years since then in 1788(the 12th year of the King Jeongjong) Lee Suwan, the Hwawon-hyeon gentry compiled Geumseng Jipeon, the local record of Hwawon area. This book derive sits value and significance in that it was the local record compiled in Sokhyeon(屬縣), the small administrative division. There is a record prior to this time in 1749(the 25th year of the King Yeongjo) that while editing Sangsan Ji(『商山誌』), Gwon Sangil(權相一) attempted to compile Sanyang Ji, the local record of Sanyang-hyeon(山陽縣), the Sangju-mok(尙州牧) Sokhyeon, but it does not exist. There exists only Danmil-hyeon Ji(『丹密縣誌』), which seems to have been produced while supplementing Sangsan Ji. The main contents of Geumseong Jipeon focused on Hwawon-hyeon related topics in Gyeongsan Ji(『京山志』), the Seongju Eupji(the Seongju town record) and supplemented the omitted contents of local records in the Yeojidoseo(『輿地圖書』, the national Eupji) and Daegu Eupji(『大丘邑誌』) according to their categories. Geumseong Jipeon was compiled mainly by the Sokhyeon gentry who rebelled because it felt its area was being ignored while the local records were compiled. By compiling its own local record, the gentry wanted to promote its local gentry family names while attempting to expand their influence and promote their local identity. Compared to Daegu Eupji, the Gemeseong Jipeon is rich with many passed-down stories of the Hwawon area including the village scenic spots, mysterious and interesting folk tales and rumors. However, against the original enthusiasm, the people in the record were limited to local figures in the Hwawon-hyeon which did not satisfy the Daegu Eupji compiling standards. It was lacking in the attempt to discover the national figures such as Ilyeon(一然), Lee Sungin(李崇仁) and Jeong Gu(鄭逑). This shows its limited judgement in trying to discover the local figures by focusing solelyon the local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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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사회사업 전개와 대구 사례

          김명구 ( Kim Myungoo ) 대구사학회 2017 대구사학 Vol.128 No.-

          본고에서는 일제시기 총독부의 빈민 및 근로 대중의 사회적 위험에 대한 정책의 전개를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대구지역의 사례를 검토하였다. 1910년대 사회사업은 노동능력이 부족한 요구호자(要救護者)를 중심으로 한 자선 · 구휼사업이 전개되었고, 대구부의 사회사업 역시 자연재해로 임시 생계위협에 처해 있거나 노동능력을 결여한 요구호자 집단을 대상으로 한 구휼사업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구빈사업과 다를 바 없다고 보여진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서 `쌀소동`이후 사회사업 개념이 형성되면서 조선에도 `방빈적`사회사업을 시행하였다. 이는 1차 대전이후 `전후공황에 따른 중하층의 경제적 몰락에 대한 대응으로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구에서도 이와 관련 직업소개, 공설질옥(公設質屋), 공설세탁장 등 사회복지서비스류의 정책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공장법, 건강보험법 등은 도입되지 않았고, 복지정책이라기보다 사회시설의 미비, 시장의 미발달에서 비롯된 정책에 가까웠다. 방빈적 사회사업은 1920년대 후반부터 파급된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급증하고 있었던 빈곤의 문제에 대응할 수 없었으며, 이에 1930년대 전반에는 궁민구제라는 명목으로 궁민구제사업이 도입되었다. 대구에서도 1910~20년대 시구개정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토목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공업의 미발달이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인데다 저임금 문제, 청부업자의 농간 등으로 실제적 구호가 되지 못하였다. 한편 1935년을 전후 식민지 조선도 준전시체제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는데, 이와 관련 서북조선의 공업화와 개발을 위해 남부 지역 노동력의 동원이 주요과제로 부각되었고, 대구지역에서도 직업소개소가 중심이 되어 노동력을 이동시켰다. 아울러 세궁민에 대한 관리 강화를 위해 방면위원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대구에서도 1936년 방면위원제가 도입되었다. 전시체제기에 이르러 사회사업은 총동원체제 이념에 종속되어 전쟁승리라는 국가의 목표하에 노동력 강제동원과 후생사업으로 변질되었다.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가혹한 노동조건하의 노동 수탈은 사회사업 본래 개념과 전면 상반된 것으로 사회사업의 파탄이라는 점에서 파악이 가능하다. 대구에서도 총동원체제의 구축과 더불어 노동력의 강제 동원, 후생사업개념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This research reviewed the case of Daegu region on the division of period into relief business during 1910s, poverty-relief(防貧的) social work during 1920s, poverty-relief(窮民) business during the early 1930s and change to quasi-state of war system, compulsory mobilization of labor during the wartime and public welfare, mainly with the policy on poverty and social risk of public labor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general. Social works during 1910s progressed charity·relief work mainly with relief-requiring people(要救護者), lacking labor ability, and the social work of Daegu region also was the relief business targeting relief-requiring groups which were facing livelihood threat or lacking labor ability. This seems to be exactly the same as the traditional relief business. Japanese public relief policy during this period was also based on 「Poverty relief rule(恤救規則)」, however this partly recognized governmental relief policy. During 1920s, as the concept of social welfare was formed since `rice disturbance` in Japan, and `poverty-relief` social work was also implemented in Joseon. This can be said adoption as the response to economic fall of lower-middle class along with after-war crisis since the First World War. In Daegu, also, social welfare services such as relevant job introduction, Gongseoljilok(公設質屋), Gongseol laundry field, etc. were introduced. However, differently from Japan, Factory law and public health insurance law were not adopted in Joseon, which was close to a mere policy out of insufficient social facility and underdevelopment of market. Poverty-relief social work was not able to respond to the problem of poverty, which rapidly increased due to the influence of global economic crisis that was spread since the late 1920s, accordingly, a poverty-relief work was adopted in the name of poverty-relief during the early 1930s. In Daegu, also, civil engineering business was progressed in the extension of city reorganization business during 1910s~20s. However, this was basically based on the condition of underdevelopment of industry, which was not the actual relief due to low pay problem and contractors` trick, etc. On the other hand, in 1930s, Japanese all-out war began since the Manchurian incident, and around 1935, the colony Japan also was reorganized as quasi-state of war, accordingly, mobilization of southern region labor stood out as a major task for industrialization and development of northwest Joseon, also in Daegu, labor was moved mainly with employment agency. Also, relief committee was spread on the whole nation for the reinforcement of management over the poor, Daegu, also, introduced relief committee in 1936. During the wartime, social work changed to compulsory mobilization of labor and welfare work under the national goal, war victory, subordinated to the idea of general mobilization system. Compulsory mobilization of labor and labor exploitation under severe labor condition were contrary to the original concept of social business on the whole, which can be comprehended as the view of breakdown of social business. In Daegu, also, it changed to compulsory mobilization of labor and welfare business concept along with establishment of general mobilization system. (ASIATIC RESEARCH Institute Korea University / gm9gm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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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수창사의 활동과 국채보상운동

          박희진 ( Park Heejin ), 김영호 ( Kim Yongho ), 엄창옥 ( Changok Um ) 대구사학회 2018 대구사학 Vol.131 No.-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시발은 근대지식인과 상인 집단의 결합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대구광문사가 대구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상징이라면, 수창사는 대구지역 상인세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최근에 발견된 수창사의 각종 자료를 통해 수창사의 설립 경위와 수창사 사원의 성격을 살펴봄으로써 수창사가 어떤 경위로 국채보상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개항과 경부선이 개통된 1904년 이후 낙동강 상권은 일본 상인층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다. 부산항과 낙동강 무역에서 일본상인과의 경쟁에 위협을 느낀 대구지역 상인은 수창사를 설립하고 엄궁과 하단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수창사는 기본적으로 비특권적 민간 상회사이고, 사원이 각자의 지분을 가지고 거래창구를 통일화한 합명회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창사의 사업영역은 사원들의 사업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대금업무와 중개업 및 창고업이었다. 그러나 일본상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면서 수창사의 규모는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히 축소되었고 1905년에는 부산지역의 지점을 철수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계몽사상이나 자강운동과 연계되어 이들을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였다. 수창사 사원의 상당수가 국채보상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수창사는 대구민의소 사무소나 국채보상운동의 수전소로 활용되었다. 또한 수창사 사원의 인적 네트워크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도 기여했다. It is generally agreed that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NDRM) was started by the coalition between the leader of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and the Merchant class in Daegu region. ?The Daegu Gwangmunsa? is the symbol of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and ?The Suchangsa? is the symbol of the Merchant class in Daegu. By examining the resources of Suchangsa which were founded recently, this Paper focuses on the process of the Suchangsa' establishment, the characteristics of the Suchangsa and how the Suchangsa came to play a central role in NDRM. After the Opening of Joseon and since 1904 when the Gyeongbu Train-line opened, the trade business of the Nakdong River has been dominated by Japanese Merchant group. At that time, the Daegu Suchangsa installed its branch at Eomgung and Hadan area because of feeling threatened by competition with Japanese merchants in the Nakdong River trade. This fact was confirmed in ?The Suchangsa Rule? and ?The Suchangsa business diary(座目)?. According to these resources, the Suchangsa is basically ‘a non-specialized private enterprise', and ‘the ordinary partnership' in which the employees unified the transaction lines with their respective shares. And then Suchangsa's business scopes were limited to Loan and Brokerage and Warehousing in order to providing convenience to its employees. Scale of Suchangsa's Capital has drastically decreased since 1900's and it withdrew its branch offices from Busan in 1905. Suchangsa was finally liquidated in 1935. The employees of Suchangsa, who were defeated by the Japanese merchant's power expansion, used Suchangsa as a office for A civilian assembly, and also accepted the role of a collection center for NDRM. The Daegu merchant responded to the expansion of the Japanese merchant in this way. At a circumstance which they were losing ground from competition with Japanese merchants, the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for Resumption of the National Sovereignty in connection with the Self-reliant Movement. This sentiment is well expressed in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s promotion statement. Consequently, many of the company's member played a central role in NDRMt, the personnel network of the head of the company also have contributed to the nationwide expansion of ND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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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사충(杜師忠)의 생애와 모명재(慕明齋)에 대한 역사적 고찰

          진병용 대구사학회 2015 대구사학 Vol.119 No.-

          Historical review on the Du Sachung and Momyeongjae Jin Byung yong [Abstract] Du Sachung was one of the assistance forces of Ming Dynasty to save Joseon Kindom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952(Imjin War). He took in charge of building barracks and military camps as an advisor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Li Ru-song. After two years of making a contribution in the war, he returned to his native country in a truce. And he went to Joseon with his two sons to support Joseon forces when Japanese army invaded again in 1597. This time he was assigned to navy forces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Chen Lin, his sister's husband. After the war was over he remained in Joseon and settled down in Daegu. He was granted a land by the royal court of Joseon and lived at central part of Daegu area with his two sons. He moved to Gyesan-Dong area in 1601 and finally went to Daemyeong-Dong which was located under Choijeongsan Mountain. He was knowledgeable about geomantic theory. He socialized with many high-level scholar-officials including Admiral Yi Sunsin and helped them choose resting places. Du Sachung also made friends with Japanese General Kim Chungseon who was naturalized to Joseon Dynasty in 1592 and Woo Seongbeom, Confucian scholar lived at a small village in Daegu. He was buried at the foot of Hyeongjebong Mountain where he decided as his nursery beds when he was alive. Momyeongjae, the memorial hall of Du Sachung is located on the south side of the foot of the mountain. Momyeongjae was rebuilt and has been repaired several times since it was destroyed in 1912. His life was historically reviewed and revealed only after 300 years of his life which was around 1907 by Du Byeongha who is 10th generation of Du Sachung while he was studying and arranging the trace of his past. There is not enough information about his ancestors, birth date and his hometown. For preservation of the historical and cultural resources of the region, it is high time to study the trace of his life and shed new light on the contribution to our country. Du Sachung and Momyeongjae have a great historical and cultural meaning as a bridge of understanding between three countries, Korea, China and Japan. In this respect we need to grow these values as our local cultural assets. Finally Du Sachung will also play a big role in attracting Chinese tourists to this region by storytelling marketing and connecting other places of relevance to China. (Professor of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 byjin@cu.ac.kr) 두사충은 1592년 12월 명(明)의 조선원군(朝鮮援軍)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참모인 수륙지획지사(水陸指劃主事)로 병영과 진터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아 활약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본국으로 돌아갔던 두사충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유정(劉綎)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조선원군의 일원으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조선에 왔다. 매부인 수군 도독 진린(陳璘) 휘하의 비장(裨將)의 직책으로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남아 대구에 터를 잡고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조선 조정이 하사한 현 경상감영공원 일대에 살았으나 선조 34년(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해 오자 거처를 계산동 일대로 옮겼고, 나중에는 다시 최정산(현 앞산으로 추정됨) 아래로 이사하여 호(號)를 모명(慕明)이라 짓고, 동네 이름도 대명동(大明洞)이라 하고 동구 밖에 단을 쌓아 초하루와 보름마다 관복을 갈아입고 북녘을 향해 절했다고 한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매우 밝아 조선에 귀화한 후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양반사회의 많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명당(明堂)의 묘터를 봐주었다. 두사충은 항왜장군 김충선(일본명 沙也可)과 고려말 충신 우탁(禹倬) 선생의 후손인 백록당 우성범(禹成范)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대구에서 살다가 죽은 두사충은 그가 살아있을 때 잡아놓은 묏자리인 형제봉 기슭(현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묻혔으며, 묘소는 지금까지 잘 보전되고 있다. 두사충의 묘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산기슭 아래에 모명재(慕明齋)가 자리 잡고 있다. 모명재가 있는 만촌동 느지마을은 두사충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두릉두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두 세 가구만이 살고 있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구해 짓고 그 후 몇 차례 중수한 것이다. 모명재의 정문은 만동문(萬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모명재 안에는 여러 개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모명재 경내에는 두 개의 비(碑)가 서 있는데, 그 하나는 이순신의 7대손으로 행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를 지낸 이인수(李仁秀)가 지은 신도비(神道碑)이고(1802년 두사충 묘 옆에 건립한 신도비의 비문과 동일한 비문을 새긴 신도비를 1969년에 새로 건립함), 또 다른 하나는 모명재 중수에 공이 큰 10대손 두병선의 공덕비다. 두사충에 대한 역사 문헌과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두사충이 살던 때로부터 거의 300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러 10대손인 두병하(杜炳夏)가 두사충의 삶과 행적을 정리한 실기(實紀)와 족보 등을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두사충의 행적이 밝혀지고 역사적 조명을 다시금 받게 되었다. 그의 선조와 고향, 귀화 후의 구체적인 행적 등에 관한 연구가 부족할 뿐더러 두사충과 모명재가 지닌 역사적 의의와 그의 공적에 대한 현창(顯彰) 노력도 미흡했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간 관계개선과 협력체제의 구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에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두사충과 모명재를 지역의 문화자산으로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구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의 수가 날로 늘어나는 때에 모명재를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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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혁명 시기 대구지역 혁신 정치세력의 형성과 활동

          허종 대구사학회 2019 대구사학 Vol.136 No.-

          Progressive forces in the Daegu region were mobilized as political forces shortly after President Lee's visit. The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7·29 general election to build a political system of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structure. Daegu recognized its progressive forces as a bridgehead for its advancement into the National Assembly and put its full force in the hands of prominent people. However, unlike expectations, the election failed in the general election and failed to establish a political system of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structure. In the situation where citizens are familiar with democratic political consciousness and familiar with the pre-modern election form, they are overly optimistic without the elements necessary for the election, such as a hasty organization, a free and poorly appealing policy and poor publicity, It was because they relied heavily on 'wind' and 'boom' based on realistic perception. Progressive forces have been divided after the general election, in which conflicts between each of the latent lines have been revealed. And ideology and unification plan, and the initiative issue became a conflict factor,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leading person also acted. Unlike the conflicts in the center, Daegu tried to resolve conflicts, but it could not avoid the swirl of divisions and became a party of four. In addition to political mobilization, the progressive party organized a progressive social movement in cooperation with regional progressive forces. In order to prevent foreign economic invasions and to secure independence, the government conducted a campaign against the visit of the Japanese economic inspectors and against the conclusion of the Korea-US economic agreement, and opposed the enactment of anti-communist laws and demo regulatory laws that suppressed democratic demands and the rights of the public. Some progressive political parties supported and sponsored inter-Korean student talks. The progressive forces of April revolutionized various ideologies and political forces for progressive democracy and expanded the universal values ​​of humanity such as democracy, human rights and peace. At the same time, with the preparation of soil for the emergence of new progressive forces, it was a process of disappearing into history. 대구지역 혁신세력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직후 정치세력으로 결집하였다. 이들은 보수·혁신 구도의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7·29총선에 적극 참여하였다. 혁신세력은 대구를 원내 진출의 교두보로 인식하여 저명한 인사를 내세우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총선에서 참패했고 보혁구도의 정치체제를 구축하는데 실패하였다. 시민의 민주 정치의식이 미약하고 전근대적인 선거 형태에 익숙한 상황에서 선거를 위해 급조된 조직, 대중과 유리되고 호소력이 약한 정책과 조악한 선전 방식, 선거 자금의 부족 등 선거에 필요한 요소를 갖추지 못한 채 지나치게 낙관적인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바람'과 ‘붐'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혁신세력은 총선 후 그동안 잠재된 각 계파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어 분열하였다. 통일방안 등 이념·노선 차이와 함께 주도권 문제가 작용했으며, 주도 인물과의 친소 관계도 작용하면서 이합집산 하였다. 그럼에도 중앙에서의 갈등과는 달리 대구에서는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했으나, 분열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어 4개의 혁신정당으로 분화되었다. 혁신정당은 정치세력화 활동과 함께 지역 혁신세력과 연대하여 진보적 사회운동을 벌였다. 외국의 경제침략을 막고 자주성 확보를 위해 일본경제시찰단의 방한 반대, 한미경제협정의 체결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대중의 기본권 보장과 민주주의 요구를 억압하는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일부 혁신정당은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후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혁신세력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인권·평화를 비롯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새로운 진보세력을 등장시키는 토양의 마련과 함께 지난했던 활동을 마감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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