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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0년대 대구지역 경제변화와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제인의 동기
주지훈 대구사학회 2023 대구사학 Vol.153 No.-
본 연구의 목적은 1900~10년대 독립운동에 관여한 대구지역 경제인들의 동기와 활동 배경을 밝히는 것이다. 개항을 비롯한 사회변동은 대구지역 경제인들에게 기회와 위기를 모두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경부선 부설 이후, 일본인의 세력 확장이 대구의 기존 상권을 잠식해 나가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면서 대구의 토착세력과 개항 이후 대구지역에서 특수를 누린 세력 모두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에 대한 한국인 경제인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독립운동 참여는 적극적인 대응이다. 당시 일부 경제인들은 상업을 통해 독립운동의 자금을 확보하고 단체 간의 연락을 기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지역 독립운동의 연속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지역 독립운동세력과 다른 독립운동세력을 연결하는 교점을 마련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주요 인물의 행보를 살펴볼 때, 1900~10년대 대구지역 경제인들이 각자의 이익과 신념에 따라 얽혀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입체적인 행보는 친일과 반일의 명확한 구분이나 경제인들의 친일 활동을 단순히 독립운동의 좌절에 따른 타협의 산물이라 이해하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대구지역 경제인들의 활동은 국권 회복 활동과 일본인 실업가와의 협업 등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지역에서의 상업 활동 유지 및 주도권 확보라는 현실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사례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것은 지역사회에서 독립운동에 관여한 인물의 위상을 ‘오피니언 리더’로서 이해할 계기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추가적인 사례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인물들의 관계 역시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motives and activities of homo economicus(economic man) in Daegu who were involv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1900-1910s. Social changes, including the opening of a port, brought both opportunities and crises to economic man in Daegu. However,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yeongbu Line, the expansion of the Japanese power took place in the direction of encroaching on Daegu's existing commercial districts, posing a threat to both the indigenous forces of Daegu and those who enjoyed benefits in Daegu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There were various reactions from Korean economic man to this. Among them, participation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s an active response. At that time, economic man secured funding source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commerce and attempted to communicate between organizations. Their activities can be evaluated as ensuring the continuity of the local independence movement and at the same time establishing a point of connection between local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and other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Next, when looking at the actions of major figures at the time, it can be seen that economic man in Daegu in the 1900-1910s were intertwined according to their own interests and beliefs. Their three-dimensional moves raise questions about the existing views that understand the clear distinction between pro-Japanese and anti-Japanese, or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economic man as simply a product of compromise due to the frustr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t that time, the activities of economic man in Daegu appeared as the restoration of national sovereignty and cooperation with Japanese businessman, which was due to the realistic motive of maintaining local commercial activities and securing leadership. Finding their cases is meaningful in that it not only provides an opportunity to understand the status of people involv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community as “opinion leaders,” but also provides a clue to reveal “unrevealed” parts in the histor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If additional cases are discovered, it will be possible to reconstruct their relationships in three dimensions.
김문기 대구사학회 2014 대구사학 Vol.115 No.-
本文是一????地?魚類博物學的?究, 也是一?其在交流流程中呈?的?史意?的?究. 因???地???博物?里包括着?多??, 本文想把主要?究?象??到三?寒流性魚種, ?靑魚、大口、明太. 本文之所以把?三???放在眼里是, 其具有?史上代表意?的. 今天, 日本?靑魚、大口、明太各用?、?、介黨?的正式??, 中?各有?魚、?魚、狹?的正式??. 但是, 在出??些??之前, 有靑魚、大口、明太等朝?方面的????一直影?到中日??. 中?本无靑魚、大口、明太, 自然无有??些??的文字. 十七世?前后, 在中?沿海?始?出靑魚和大口, 才借用‘靑魚’和‘大口’等朝?的??. 日本的情??之不同, ?有?、?、?等固有名?, 但朝?的‘靑魚’、‘大口’等名?却占在正式??的地位. ‘明太’??魚名, 在十七世?的朝?才出?, 直到二十世?初影?了中日??. 十七世?, 有什?原因???些寒流性魚種的知??亮出台? 博物?的?展就?藏在其背后. 溯源而?, 其根本原因?是在‘小氷期’??氣候變動中可?. 小氷期?海洋?成寒冷??, 又?寒流性魚種大大?到??沿海. ??, 人???于小氷期的‘危機’之中, 但?些寒流性魚種???地??富多彩. 所以, 靑魚、大口、明太就是全球?候??中的‘无言的??人’. (Dept. of History, Pukyung Natural Univesity / bluetrain999@hanmail.net)
1907년 대구에서 작성・배포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의 종류와 특징
이문기 대구사학회 2024 대구사학 Vol.155 No.-
이 논문은 지금까지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던 1907년에 대구에서 작성・배포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의 종류와 그 특징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본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07년 대구에서 작성・배포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는 모두 4종이었다. ㉮대구광문사가 1907년 1월 31일에 작성한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1차 취지서」), ㉯대동광문회가 2월 중순 경에 수정한 「국채보상취지서」(「2차 취지서」), ㉰‘대구금연상채회’가 2월 21일에 작성한 「국채담보취지서」 및 ㉱이와 동시에 작성한 「통문」이 그것이다. 이 4종의 취지서는 국채보상의 필요성과 방법론 등 대의 면에서는 상통하는 바가 많지만, 교정과 윤문, 필요에 따른 구절의 첨삭 등으로 서술에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엄연히 구별되는 별도의 문건이었다. 둘째, 대구광문사가 작성한 「1차 취지서」인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는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 명의의 공함 형식으로 국내외에 널리 배포된 문건이었다. 발의 직후인 1907년 1월 31일에 발표된 이 「1차 취지서」에는 대표 발기인인 김광제・서상돈 외에도 광문사 사원 장상철 등 14명이 발기인으로 함께 참여하여 그 수는 도합 16명이었다. 이 「1차 취지서」의 개요는 국민들의 충의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원론, 우리 민족의 현실에 대한 자책, 국채로 인한 국가적 위기와 국채보상의 필요성, 금연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방법론의 제시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주지(主旨)는 이후 「2차 취지서」와 「국채담보취지서」 및 「통문」에까지 계승되어 국채보상운동의 불변의 지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건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 에 게재되어 대구에서 전국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발기되었음이 전국에 알려져 운동의 확산과 동참을 이끌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셋째, 대동광문회가 「1차 취지서」를 수정한 「2차 취지서」는 「국채보상취지서」라는 제목으로 1907년 2월 중순 경에 발표되었다. 발기인은 대표 발기인이었던 김광제와 서상돈을 필두로 하여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과 회원 13명이 참여하여 외형상 도합 17명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김광제가 중복 포함되어 사실상 16명이었다. 다만 「1차 취지서」의 발기인 중 광문사 사원 권석우・최일홍・김봉준・박병옥 등 4명이 제외되고 그 대신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회원 서병오・정재덕・추교정 등 4명이 새로 참여하는 변화가 있었다. 「2차 취지서」는 글의 형식을 편지글에서 취지서 형식으로 바꾸었고 새로운 제목을 내세웠으며 자구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과 윤문을 가하여 작성한 새로운 문건이었다. 넷째, 1907년 2월 21일 ‘대구금연상채회’는 「국채담보취지서」와 「통문」이라는 제목으로 2종의 취지서를 동시에 작성・발표하였다. 이 2종의 취지서는 이전의 「1・2차 취지서」의 대의를 그대로 계승했지만 가상 독자층을 서로 다르게 상정한 점이 특징이었다. 전자는 보다 읽기 쉬운 현토(懸吐)한 국한문 혼용체의 평이한 문장을 구사하여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삼은 데 비해, 후자는 유교 경전의 구절이나 역사고사 등을 인용한 순한문체의 문장을 사용하여 지역 향교를 거점으로 하는 향촌 지식인들을 그 독자층으로 설정하였다. 이 2종의 취지서는 주로 경북 내 대구 등 41개 향교를 중심으로 배포되어, 이후...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eal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prospectus written and distributed in Daegu in 1907, which has not been properly reviewed until now. A summary of what was revealed is as follows. First, there were a total of four types of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prospectus written and distributed in Daegu in 1907. ①Daegugwangmunsa's 「National debt 13million-won repayment prospectus(國債一千萬圓報償趣旨)」(「the 1st prospectus」) prepared on January 31, 1907, ②「The the National debt repayment prospectus(國債報償趣旨書)」(「the 2nd prospectus) revised by Daedonggwangmunhoe in mid-February, ③「The National debt collateral prospectus(國債擔報趣旨書)」 prepared by the ‘Daegugumyeonsangchaehoe’ on February 21st, and ④「The Public Document(通文)」 prepared at the same time by the same organization. Although these four types of prospectus have much in common in terms of the purpose, such as the necessity and methodology of national debt repayment, they were clearly separate documents with partial differences in description due to proofreading, revision, and correction of passages as necessary. Second, 「the 1st prospectus」 written by DaeguGwangmunsa was a document widely distributed in the name of President Kim Gwang-je and Vice President Seo Sang-don. In this 「the 1st prospectus」 announced on January 31, 1907, including Gwangmunsa employee 14people participated as promoters. The outline of this prospectus can be summarized the main note passed down to later prospectus and became an immutable indicator of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In addition, this document was published in the DaehanMaeil Shinbo on February 21, 1907, making it known throughout the country that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as first initiated in Daegu, and became a catalyst for the spread and participation of the movement. Third, 「the 2nd prospectus」, which was a revised version of the 「1st prospectus」 by Daedonggwangmunhoe, was announced around mid-February 1907 under the title 「The the National debt repayment prospectus」. The promoters were 16 people in total, led by Gwangmunsa President Kim Gwang-je and Vice President Seo Sang-don, who were the main promoters, as well as Daedonggwangmunhoe Chairman Park Hae-ryeong, Vice Chairman Kim Gwang-je, and association members. However, this is a change in which four of the 16 promoters of the 「the 1st prospectus」. 「The 2nd prospectus」 was a new document written by changing the format, introducing a new title, and adding partial corrections and revisions to the wording. Fourth, on February 21, the Daegugumyeonsangchaehoe simultaneously prepared and announced two types of statements titled 「The National debt collateral prospectus」 and 「The public document」. These two types of prospectuses inherited the purpose of the previous 「1st and 2nd prospectus」, but were characterized by assuming different virtual readerships. The former targeted the majority of the public by using simple sentences, while the latter used sentences in a pure Chinese writing style that quoted passages from Confucian scriptures or historical events. Local intellectuals based at local Confucian schools(鄕校) were selected as the readership. These two types of statements were mainly distributed to 40 local schools in the Gyeongbuk, contributing to the revitalization of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in the Gyeongbuk region.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은행 경영과 식민지 주주자본주의-1920년대 경상공립은행의 설립과 경영-
김명수 대구사학회 2022 대구사학 Vol.147 No.-
This paper have two goals. The first goal is to examine the founders, the establishment process, the management fluctuation,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f Gyungsang Public Bank(GPB). The second is to make it clear that the case of GPB is nothing but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because GPB was faithful only to the interest of shareholders. This is different from research results which existing studies have stressed on financing for colonial development. The resul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ly, Founded in July 1920, GPB was a purely Japanese bank in the sense that most of its shareholders were from Kagawa Prefeture Japan. If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at many banks have Korean and Japanese shareholders commonly, the case of GPB was a rare one because GPB consisted of only Japanese shareholders. Secondly, Masakazu Miyai, who led the establishment of GPB, amassed a fortune from money-lending business, pottery manufacturing, warehousing, financial business, rice-cleaning business. Also, he was famous as a rice dealer in Daegu. Miyai’s path of wealth accumulation was true of the Japanese wealthy people in Daegu at that time. Thirdly, GPB existed exactly for 1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in July 1920 until the approval of its merger with Gyungil Bank in September 1930. Instead of thinking about the public nature of the bank, Miyai focused on only making money thoroughly. GPB appreciated secured property offered by borrowers very conservatively and lent at most about 60% of appraised value. Loans were also made centering around bill discount and loans on bills, which guaranteed high commissions. Miyai tried to quit banking and go back to Japan when monitoring on banks became strict since revision of bank act in 1929. He could not manage GPB like a money lender under the new reinforced regulations on banking. It was the reason why Miyai responded positively the offer of acquisition to Gyungil Bank by Chosun Bank, which was the central bank of colonial Korea. In conclusion, GPB’s case was the typical case of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이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1920년 7월부터 10년 동안 대구에 존재했던 경상공립은행을 대상으로 설립주체, 설립과정, 경영변동, 조선총독부의 은행합동정책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다. 둘째, 식민지 개발을 위한 자금조달의 측면을 강조했던 선행 연구와 달리 일본인들에 의한 공립은행의 경영 사례가 일제강점기라는 정치적 상황 하에서 오직 일본인 주주들의 이익에만 충실했던 주주자본주의였음을 해명하고자 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0년 7월에 설립된 공립은행은 대구에 본점을 두었지만 주주의 대부분이 가가와현에 거주하는 ‘순수한’ 일본인 은행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설립된 은행들이 그 구성비율에 차이가 있어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주주로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했음을 고려한다면 공립은행은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이례적인 은행이었다. 둘째, 공립은행의 설립을 주도한 미야이(宮井正一)의 축재 경로는 대금업, 도기제조업, 창고금융업, 정미업, 미곡거래업이었다. 당시 대구의 주요 일본인들이 종사했던 분야였다. 미야이의 축재 경로는 당시 대구의 일본인 자산가들이 걸었던 전형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공립은행은 1920년 7월에 설립되어 1930년 9월 임시주주총회에서 경일은행과의 합병안을 승인할 때까지 정확히 만 10년 동안 존재했었다. 은행의 ‘공공적 성질’을 생각하지 않고 ‘철두철미 실리 본위’로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공립은행의 퍼포먼스는 ‘주주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넷째, 대출도 상대적으로 높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어음할인이나 어음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담보물도 지극히 보수적으로 평가했으며, 평가한 금액에 대해서도 대체로 60%만을 대출해 주었다. 하지만 1929년 개정 은행령에 의해 감독이 강화되면서 대금업자식의 ‘미야이식’ 은행 경영이 어려워졌다. 미야이가 은행업을 폐업을 고려한 것도 경일은행과의 합병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낙재일기(樂齋日記)』를 통해본 대구지역 임진왜란 의병의 활동과 성격
우인수 ( In Soo Woo ) 대구사학회 2016 대구사학 Vol.123 No.-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formation process and activities o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after Japan invaded Joseon in 1592 and to ascertain its nature. Here, the Daegu region refers to the areas under the governance of Daegu Dohobu(大丘都護府) during the war since the army was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based on consultation with the Daegu Busa(大丘府使) with the noblemen of Daegubu(大丘府) forming such an army and fighting in and around Daegubu, which clearly shows a characteristic aspect of activities that the army carried out in the Daegu region. Recent studies o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ave made new attempts to recognize the certain roles of royal forces without damaging the significance of the army. The present study also followed the recent flow in its research efforts.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is a good case of such armies and in connections with the royal forces. The major source of the present study was Nakjaeilgi, a journal kept by Nakjae Seo Sa-won that was a member of a prominent noble family in Daegu. He was the general o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and got involved in the army from the beginning, thus holding a position to get detailed information about its circumstances. His journal offers a good description about the process and activities of the army in the Daegu region, thus claiming great value as a historical material. The first characteristic o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was a relatively smooth cooperation system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from the early days of its formation. Seo Sa-won, the leader of the army, discussed its formation with the Busa, who, in turn, showed his interest and concern for the army by observing its training. The next characteristic was that the organization of the army covering the entire Daegubu was based on the basic units of Myeon(面) and Ri(里), the administrative units of Daegubu, deployed the general and the secretary, and thus encompassed the entire Daegubu. The system was originally implemented by Anjipsa(安集使) Kim Reuk in some towns in Gyeongsangjwado(慶尙左道) and later accepted by Daegu. Even though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Daegu region did not perform meritorious service during the war, it deserves high evaluation in that it established a collaborative system with the royal forces, stayed in the Daegu region, and tried to protect the life and property of people in Daegubu. Those aspects of the army will be of assistance to the research on the entire history of armies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iswoo@knu.ac.kr)
두사충(杜師忠)의 생애와 모명재(慕明齋)에 대한 역사적 고찰
진병용 대구사학회 2015 대구사학 Vol.119 No.-
Historical review on the Du Sachung and Momyeongjae Jin Byung yong [Abstract] Du Sachung was one of the assistance forces of Ming Dynasty to save Joseon Kindom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952(Imjin War). He took in charge of building barracks and military camps as an advisor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Li Ru-song. After two years of making a contribution in the war, he returned to his native country in a truce. And he went to Joseon with his two sons to support Joseon forces when Japanese army invaded again in 1597. This time he was assigned to navy forces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Chen Lin, his sister’s husband. After the war was over he remained in Joseon and settled down in Daegu. He was granted a land by the royal court of Joseon and lived at central part of Daegu area with his two sons. He moved to Gyesan-Dong area in 1601 and finally went to Daemyeong-Dong which was located under Choijeongsan Mountain. He was knowledgeable about geomantic theory. He socialized with many high-level scholar-officials including Admiral Yi Sunsin and helped them choose resting places. Du Sachung also made friends with Japanese General Kim Chungseon who was naturalized to Joseon Dynasty in 1592 and Woo Seongbeom, Confucian scholar lived at a small village in Daegu. He was buried at the foot of Hyeongjebong Mountain where he decided as his nursery beds when he was alive. Momyeongjae, the memorial hall of Du Sachung is located on the south side of the foot of the mountain. Momyeongjae was rebuilt and has been repaired several times since it was destroyed in 1912. His life was historically reviewed and revealed only after 300 years of his life which was around 1907 by Du Byeongha who is 10th generation of Du Sachung while he was studying and arranging the trace of his past. There is not enough information about his ancestors, birth date and his hometown. For preservation of the historical and cultural resources of the region, it is high time to study the trace of his life and shed new light on the contribution to our country. Du Sachung and Momyeongjae have a great historical and cultural meaning as a bridge of understanding between three countries, Korea, China and Japan. In this respect we need to grow these values as our local cultural assets. Finally Du Sachung will also play a big role in attracting Chinese tourists to this region by storytelling marketing and connecting other places of relevance to China. (Professor of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 byjin@cu.ac.kr) 두사충은 1592년 12월 명(明)의 조선원군(朝鮮援軍)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참모인 수륙지획지사(水陸指劃主事)로 병영과 진터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아 활약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본국으로 돌아갔던 두사충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유정(劉綎)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조선원군의 일원으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조선에 왔다. 매부인 수군 도독 진린(陳璘) 휘하의 비장(裨將)의 직책으로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남아 대구에 터를 잡고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조선 조정이 하사한 현 경상감영공원 일대에 살았으나 선조 34년(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해 오자 거처를 계산동 일대로 옮겼고, 나중에는 다시 최정산(현 앞산으로 추정됨) 아래로 이사하여 호(號)를 모명(慕明)이라 짓고, 동네 이름도 대명동(大明洞)이라 하고 동구 밖에 단을 쌓아 초하루와 보름마다 관복을 갈아입고 북녘을 향해 절했다고 한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매우 밝아 조선에 귀화한 후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양반사회의 많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명당(明堂)의 묘터를 봐주었다. 두사충은 항왜장군 김충선(일본명 沙也可)과 고려말 충신 우탁(禹倬) 선생의 후손인 백록당 우성범(禹成范)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대구에서 살다가 죽은 두사충은 그가 살아있을 때 잡아놓은 묏자리인 형제봉 기슭(현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묻혔으며, 묘소는 지금까지 잘 보전되고 있다. 두사충의 묘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산기슭 아래에 모명재(慕明齋)가 자리 잡고 있다. 모명재가 있는 만촌동 느지마을은 두사충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두릉두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두 세 가구만이 살고 있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구해 짓고 그 후 몇 차례 중수한 것이다. 모명재의 정문은 만동문(萬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모명재 안에는 여러 개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모명재 경내에는 두 개의 비(碑)가 서 있는데, 그 하나는 이순신의 7대손으로 행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를 지낸 이인수(李仁秀)가 지은 신도비(神道碑)이고(1802년 두사충 묘 옆에 건립한 신도비의 비문과 동일한 비문을 새긴 신도비를 1969년에 새로 건립함), 또 다른 하나는 모명재 중수에 공이 큰 10대손 두병선의 공덕비다. 두사충에 대한 역사 문헌과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두사충이 살던 때로부터 거의 300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러 10대손인 두병하(杜炳夏)가 두사충의 삶과 행적을 정리한 실기(實紀)와 족보 등을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두사충의 행적이 밝혀지고 역사적 조명을 다시금 받게 되었다. 그의 선조와 고향, 귀화 후의 구체적인 행적 등에 관한 연구가 부족할 뿐더러 두사충과 모명재가 지닌 역사적 의의와 그의 공적에 대한 현창(顯彰) 노력도 미흡했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간 관계개선과 협력체제의 구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에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두사충과 모명재를 지역의 문화자산으로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구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의 수가 날로 늘어나는 때에 모명재를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 속현 단위 읍지 편찬의 배경과 목적- 대구 화원현 읍지 『금성집언』(1788)을 중심으로 -
이재두 ( Lee Jae-doo ) 대구사학회 2016 대구사학 Vol.125 No.-
This paper analyzed Geumseong Jipeon(『錦城輯言』), the local record of Hwawon-hyeon(花園縣), compiled by Lee Suwan(李壽完) in 1788(the 12th year of King Jeongjo). Hwawon-hyeon used to belong to Seongju-mok(星州牧) since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but in 1685(the 11th year of the King Sukjong) came to belong to Daegu-dohobu(大丘都護府), where the Gyeongsang-do government office was located. A hundred years since then in 1788(the 12th year of the King Jeongjong) Lee Suwan, the Hwawon-hyeon gentry compiled Geumseng Jipeon, the local record of Hwawon area. This book derive sits value and significance in that it was the local record compiled in Sokhyeon(屬縣), the small administrative division. There is a record prior to this time in 1749(the 25th year of the King Yeongjo) that while editing Sangsan Ji(『商山誌』), Gwon Sangil(權相一) attempted to compile Sanyang Ji, the local record of Sanyang-hyeon(山陽縣), the Sangju-mok(尙州牧) Sokhyeon, but it does not exist. There exists only Danmil-hyeon Ji(『丹密縣誌』), which seems to have been produced while supplementing Sangsan Ji. The main contents of Geumseong Jipeon focused on Hwawon-hyeon related topics in Gyeongsan Ji(『京山志』), the Seongju Eupji(the Seongju town record) and supplemented the omitted contents of local records in the Yeojidoseo(『輿地圖書』, the national Eupji) and Daegu Eupji(『大丘邑誌』) according to their categories. Geumseong Jipeon was compiled mainly by the Sokhyeon gentry who rebelled because it felt its area was being ignored while the local records were compiled. By compiling its own local record, the gentry wanted to promote its local gentry family names while attempting to expand their influence and promote their local identity. Compared to Daegu Eupji, the Gemeseong Jipeon is rich with many passed-down stories of the Hwawon area including the village scenic spots, mysterious and interesting folk tales and rumors. However, against the original enthusiasm, the people in the record were limited to local figures in the Hwawon-hyeon which did not satisfy the Daegu Eupji compiling standards. It was lacking in the attempt to discover the national figures such as Ilyeon(一然), Lee Sungin(李崇仁) and Jeong Gu(鄭逑). This shows its limited judgement in trying to discover the local figures by focusing solelyon the local community.
허종 대구사학회 2019 대구사학 Vol.136 No.-
Progressive forces in the Daegu region were mobilized as political forces shortly after President Lee's visit. The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7·29 general election to build a political system of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structure. Daegu recognized its progressive forces as a bridgehead for its advancement into the National Assembly and put its full force in the hands of prominent people. However, unlike expectations, the election failed in the general election and failed to establish a political system of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structure. In the situation where citizens are familiar with democratic political consciousness and familiar with the pre-modern election form, they are overly optimistic without the elements necessary for the election, such as a hasty organization, a free and poorly appealing policy and poor publicity, It was because they relied heavily on 'wind' and 'boom' based on realistic perception. Progressive forces have been divided after the general election, in which conflicts between each of the latent lines have been revealed. And ideology and unification plan, and the initiative issue became a conflict factor,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leading person also acted. Unlike the conflicts in the center, Daegu tried to resolve conflicts, but it could not avoid the swirl of divisions and became a party of four. In addition to political mobilization, the progressive party organized a progressive social movement in cooperation with regional progressive forces. In order to prevent foreign economic invasions and to secure independence, the government conducted a campaign against the visit of the Japanese economic inspectors and against the conclusion of the Korea-US economic agreement, and opposed the enactment of anti-communist laws and demo regulatory laws that suppressed democratic demands and the rights of the public. Some progressive political parties supported and sponsored inter-Korean student talks. The progressive forces of April revolutionized various ideologies and political forces for progressive democracy and expanded the universal values of humanity such as democracy, human rights and peace. At the same time, with the preparation of soil for the emergence of new progressive forces, it was a process of disappearing into history. 대구지역 혁신세력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직후 정치세력으로 결집하였다. 이들은 보수·혁신 구도의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7·29총선에 적극 참여하였다. 혁신세력은 대구를 원내 진출의 교두보로 인식하여 저명한 인사를 내세우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총선에서 참패했고 보혁구도의 정치체제를 구축하는데 실패하였다. 시민의 민주 정치의식이 미약하고 전근대적인 선거 형태에 익숙한 상황에서 선거를 위해 급조된 조직, 대중과 유리되고 호소력이 약한 정책과 조악한 선전 방식, 선거 자금의 부족 등 선거에 필요한 요소를 갖추지 못한 채 지나치게 낙관적인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바람’과 ‘붐’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혁신세력은 총선 후 그동안 잠재된 각 계파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어 분열하였다. 통일방안 등 이념·노선 차이와 함께 주도권 문제가 작용했으며, 주도 인물과의 친소 관계도 작용하면서 이합집산 하였다. 그럼에도 중앙에서의 갈등과는 달리 대구에서는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했으나, 분열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어 4개의 혁신정당으로 분화되었다. 혁신정당은 정치세력화 활동과 함께 지역 혁신세력과 연대하여 진보적 사회운동을 벌였다. 외국의 경제침략을 막고 자주성 확보를 위해 일본경제시찰단의 방한 반대, 한미경제협정의 체결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대중의 기본권 보장과 민주주의 요구를 억압하는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일부 혁신정당은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후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혁신세력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인권·평화를 비롯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새로운 진보세력을 등장시키는 토양의 마련과 함께 지난했던 활동을 마감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최정환 대구사학회 2020 대구사학 Vol.141 No.-
In the Daegu area, there are two main cultural heritages originated in Chiwon Choi(崔致遠). The first one is the Palgak-deungru-Gi(Records)(八角燈樓記) for the Hoguk-Seong(Fortress)(護國城)[also called Geomdan-Toseong(Earthen Fortress)] in Suchang-Gun(郡 province) in the age of Silla(新羅) Dynasty, and the other is Seyeon-Ji(Pond)(洗硯池), Nanga-Dae(Pavilion)(欄柯臺), and Mureung- Kyo (Bridge)(武陵橋) in the area around the Seon-sa Hermitage(仙槎菴). Leegang Seowon(Academy)(伊江書院) was built in 1636 (14th year of the King Injo) in the prehistoric ruins where Chi-won Choi visited in the end of the Silla Dynasty. Already in 1587 (20th year of the King Seonjo), however, prior to the establishment of Leegang Seowon,Sacheol Jeong(鄭師哲)had established the Seonsa Seojae(Study-Library Room)(仙槎書齋) in the same place. This Library had been a ruin during the Imjin War, and it came to be rebuilt by Sawon Seo(徐思遠) in 1599 (32th year of the King Seonjo) turning it into Study Room calld Seonsa-Jae(仙査齋). The words, ‘仙槎’ and ‘仙査’ both, pronounced the same ‘seonsa’, are related to the same meaning, ‘raft’, that is, a raft-boat on which the demi-gods ride. It had been nominated Seonsa(仙槎) in the period of Chiwon Choi, but by the days Sawon Seo lived and after, it was called ‘Seonsa(仙査)’. The traces of Chiwon Choi's visit in the Seon-sa Hermitage, Saeyeon-Ji, Nanga-Dae, and Mureung-Gyo are clearly proved in 『Shinjeung Dongguk Yeoji Seungram(新增東國輿地勝覽)』, 『Daegbbu Eupji(Village anthology)(大丘府邑誌)』, and 『Daegu Eupji(Village Anthology)(大丘邑誌)』. Also, in Hee-ji Yang's 『Daebong- Jip(Anthology)(大峯集)』 and Moonhae Kwon's 『Chogan-Jip(Anthology)(草澗集)』, poems referring to Seon-sa Hermitage, Seyeon-Ji, and Nanga-Dae are intraduced. Besides, poems about Seonsa Hermitage and Nanga-Dae appear in the Seon-sa Tmeple(仙槎寺) composed by Jongjik Kim(金宗直) and the Seohobyeung- Sipgok(Ten-Songs)(西湖屛十曲) by Seokgyu Do(都錫珪). Poems were composed of about Nanga-Dae, Mureung-Gyo, and Seyeon-Ji where Chiwon Choi had visited, and on the basis of which 『Geumho-Seonsa Seon-yu-do(Boat-Riding Picture)(琴湖仙査船遊圖)』 came to be drawn. This Seon-yu-do is a painting, where 23 people, including Hyeon-gwang Jang(張顯光) and Daero Yeo(呂大老), were invited by Sawon Seo to go boat-riding in commemoration of the establishment of Wanrak- Jae(Study Room)(玩樂齋). As such, Sensa Rock has been a famous place from which numerous literary works as well as paintings originated. Sawon Seo(徐思遠) remembers Go-Un(孤雲, Nickname of Chiwon Choi), Chiwon Choi,in his writing under the title, Seon-sa(仙査) in Nakjae-Seonsen- Munjip(Anthology)(樂齋先生文集), transmitting the facts on Seyeon-Ji and Nanga-Dae as a form of poetry. These poems by Sawon Seo played a major role in spreading the memories of the ruined Seon-sa Hermitage and the forgotten Chiwon Choi to the world. In 14th year of the King Injo (1636), 21 years after the death of Sawon Seo. Leegang-Seowon was to be rebuilt on the site of a Seon-sa Jae(仙査齋), and in the 17th year of the King Injo (1639), a commemoration tablet was settled to result in a complete dignity as a Seowon(Academy)(書院). Leegang-Seowon, built on the ruins where Choi Chiwon visited, is a significant academy which greatly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Yeongnam School of Confucian culture. This essay is intended to be exploited as a source to widely promote our history and traditional cultur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by designating these places, including Seon-sa Hermitage (仙査菴), Se-eon-Ji, Nanga-Dae, and Mureung-Gyo as formal historical- cultural properties. 최치원이 대구지역에 남긴 문화유산으로 크게 두 가지를 둘 수 있다. 첫째 하나는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를 들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선사암(仙槎菴) 일대의 세연지(洗硯池)·난가대(欄柯臺)·무릉교(武陵橋) 등을 들 수 있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선사암 옛터에 1636년(인조 14)에 이강서원이 세워졌다. 이강서원이 설립되기 이전에 정사철(鄭師哲)이 먼저 1587년(선조 20)에 선사서재(仙槎書齋)를 세웠다. 이 선사서재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어 서사원(徐思遠)이 1599년(선조 32)에 이를 다시 개축하여 강학소로 삼은 것이 선사재(仙査齋)이다. ‘仙槎’와 ‘仙査’는 발음이 같으며, 같은 의미로 둘 다 ‘뗏목’이라는 뜻으로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뗏목 배를 의미한다. 최치원 당시에는 선사(仙槎)하였는데, 서사원 때부터 선사(仙査)라 하였다. 최치원이 선사암(仙槎菴)과 새연지·난가대·무릉교 등에 머문 흔적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부읍지』, 『대구읍지』 등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양희지의 『대봉집』, 권문해의 『초간집』에는 선사암·세연지·난가대에 얽힌 시가 등장한다. 이 뿐만 아니라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선사사(仙槎寺), 도석규(都錫珪)의 「서호병십곡(西湖屛十曲)」에도 선사암과 난가대에 관한 시가 등장한다. 최치원이 머물고 노닐던 선사암·난가대·무릉교·세연지를 대상으로 시를 짓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이다. 선유도는 서사원이 장현광(張顯光), 여대로(呂大老) 등 23명을 초대하여 선사(仙査)에 완락재(玩樂齋)를 지은 기념으로 뱃놀이를 한 그림이다. 이와 같이 최치원이 머물었던 선사암 옛터에는 시와 그림 등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유명한 곳이다. 서사원(徐思遠)은 그의 문집 『낙재선생문집(樂齋先生文集)』 선사(仙査)에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추억하며 세연지, 난가대에 얽힌 사실을 시로 남기고 있다. 서사원의 이러한 시는 폐허된 선사암(仙槎菴)과 잊어져 가는 최치원에 대한 기억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서사원이 세상을 떠난 후 21년 뒤인 인조 14년(1636년) 선사재(仙査齋) 자리에 이강서원(伊江書院)을 건립하였다. 인조 17년(1639년)에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서원의 면모를 완전하게 갖추게 된 것이다. 최치원이 머물었던 선사암(仙槎菴) 옛터에 세워진 이강서원은 영남학파 유교문화의 형성과 발달에 크게 기여했던 중요한 서원이다. 선사암·세연지·난가대·무릉교를 비롯한 이곳을 역사 문화유적지로 지정하여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18세기 대구 사대부의 일상을 통해 본 가족과 관계-최흥원(1705~1786)의 사례-
김정운 대구사학회 2022 대구사학 Vol.147 No.-
This study contemplates the meanings of family in the daily life of Choi Heung-won (1705~1786) who lived in Daegu in the 18th century. In the study, discussions focus on two points. The first point is space as it was an important element in a person's way of thinking and action. The study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Daegu in the 18th century when Choi lived there. The provincial office of Gyeongsang Province was set up in Daegu in 1601. The governor would have controlled the entire province, including its administration and judicial power. Thus, Daegu became the central city of the province in administration and jurisdiction. Gyeongsang Province was the most populous administrative unit at the provincial level in Joseon in the 18th century, and Daegu was at its center. The second discussion point is family, which is a foundational group of life. The scope of family, in a narrow sense, encompasses a couple and their children, and in a broader sense, even their parents and siblings. Accordingly, one must know the description of family. The present study sheds light on the family relationships of Sadaebu in the 18th century with the case of Choi's family, whose perceptions of family and roles were reviewed based on their words and actions to each other. Choi's family consisted of a couple and their children. They lived together, and the couple shared responsibility for their children's upbringing and education. As a father, Choi was particularly devoted to the upbringing and education of his children. He taught his son everything from daily habits to interpersonal behavior styles. It was the same with his daughter. He would postpone an urgent matter to prevent her from getting hurt emotionally and even feel sorry after spending days at the house of his married daughter. The study also examines the couple's relationships with their parents and siblings. Their parents and siblings lived in separate places and worked together to serve their parents. Choi was the eldest son and lived with his mother after his father passed away early. Choi's wife also passed away early. Under these circumstances, he lived with his mother. His siblings lived in their respective homes after getting married. He and his siblings divided their roles to serve their parents. 이 논문은 18세기에 대구에서 살았던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일상생활에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이다. 논의는 두 가지 지점에 집중하였다. 첫째는 공간이다. 공간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흥원이 살았던 18세기 대구의 특징을 확인하였다. 18세기의 대구는 번화한 도회지였다. 1601년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행정과 사법의 중심이었다. 둘째는 가족과 관계이다. 가족의 범위는 좁게는 부부와 자녀이며, 확대하면 부부의 부모와 형제가 포함된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였나. 최흥원이 가족에게 표현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최흥원의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부부가 함께 분담하였다. 또 아내와 자녀, 부모와 형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