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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退溪의『大學』解釋과 그 意味

          최석기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5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6

          이 논문은 퇴계 이황의 『대학』 해석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내용과 특징을 살핀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퇴계의 釋義類 經書解釋과 『대학』에 대한 인식을 먼저 살펴보고, 그의 『대학』 해석을 『대학석의』의 해석과 기타 자료에 산견되는 문인들과 문답한 해석으로 크게 나누어 고찰하였다. 퇴계의 석의류 경서해석은, 15-6세기 학자들이 大全本을 텍스트로 사서삼경을 정밀히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종류의 釋義를 모아 정리하고 비평한 것으로, 후대 校正廳本 諺解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점에서 퇴계의 석의류 경서해석은 우리나라 경학사상 釋義時代에 생산된 釋義類의 集大成이라 하겠다. 퇴계는 『대학』을 大廈에 비유하고, 여타 경서는 그 대하를 수식하거나 장식하는 부속물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대학』을 경학의 根幹으로 보는 그의 經學觀이다. 또한 그는 『대학』을 修己治人之道를 담은 政治書로 보지 않고, 存心出治之本에 해당 하는 修身書로 보았다. 『대학석의』의 내용과 해석성향을 분석해 본 결과, 가장 큰 특징은 총 101항목 중 98항목이 字句의 諺解을 정리한 것이므로 註보다 本文 字句의 정확한 언해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퇴계는 이를 위해, 첫째 語助辭 하나에도 신중을 기하였으며, 둘째 언해로 판가름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한문으로 그 의미를 정밀히 논변했으며, 셋째 字義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虛辭 등을 분변하였다. 이 가운데 한문 해석이 곁들여진 대목이 그의 『대학』 해석에 있어 주요한 설들이다. 기타 편지글 등에 수록된 『대학』 해석에 관한 자료를 살펴본 결과, 퇴계 『대학』 해석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퇴계는 '知止而后有定' 이하를 格物致知傳으로 보는 설에 대해 반대하였다. 둘째, 格物·物格의 해석에 있어 一身의 주재자인 마음이 대상에 있는 이치를 認知하는 것에 대해 정밀하게 논하였다. 셋째, 知止·定·靜·安·慮·得의 해석에 있어, 예컨대 誠意의 경우 誠意가 그칠 바를 알아 意誠을 얻는데 定·靜·安은 그 중간에 있는 것이라고 하여, 주자의 설보다 진전된 해석을 하였다. 넷째, 팔조목 중 誠意·正心·修身에 대한 해석에 있어 성의는 靜時의 存養工夫로 정심과 수신은 動時의 省察工夫로 보아, 意誠한 뒤에도 四有의 偏私處를 없애는 正心을 해야 하고 五僻의 偏私處를 없애는 修身을 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섯째, 正心章의 兼體用說에 대해서는 주자의 설에 따라 心之用만을 말한 것으로 보고, '心不在焉'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心在軀殼說·心在視聽說 등을 모두 부정하고 主內應外說을 주장하였다. This paper is a detailed research on the contents and features of the Toi-gye(退溪), Yi Hwang(李滉)'s interpretation of [Dae-hak]. In this paper, I inquired into the Toi-gye's classics interpretation of Seok-eui-ryu(釋義類) and his cognition about it at first, and I studied classifying into the interpretation of [Dae-hak-seok-eui(大學釋義)] and several scattered datum like Q&A exchange letters with his pupils. The Toi-gye's classics interpretation of Seok-eui-ryu(釋義類) is a study way of arranging and commenting several kinds of Seok-eui(釋義) while minutely interpret the books of '四書三經' in 15~16th century, and he influenced very greatly in the Korean interpretation of '校正廳本' of next generation. In this point of view, the Toi-gye's classics interpretation of Seok-eui-ryu(釋義類) is a compilation of Seok-eui-ryu which produced in Seok-eui-rye period of Korea. Toi-gye regarded that many other classics are decorations or ornaments if [Dae-hak] is a mansion. This is his very viewpoint of the classics that of [Dae-hak] is the root and the trunk of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And he thought that [Dae-hak] is the moral culture textbook of '存心出治之本' not to the political theory of '修己治人之道'. In view of the results so far achievements, the most outstanding feature is that he concentrated to the accurate Korean literal text interpretation of [Dae-hak] judging from that the 98 items of his book is consisted of Korean interpretation arrangements. Regard for this, Toi-gye paid attention to the choice of each character, and detailed commented with Chinese character on the difficult point of Korean interpretation, and classified the expletive concerning about the exact meaning of each character. The additional Chinese interpretation among this are his major theories of [Dae-hak] interpretation. The result of several datum inspection like other private letters, the major features of the Toi-gye's interpretation of [Dae-hak] is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oi-gye opposed the theory that regard [格物致知傳] below the text of '知止而后有定'. Second, he discussed minutely the principle that the mentality is aware of its object while interpreting of '格物' and '物格' Third, while interpreting '知止·定·靜·安·慮·得'. he suggested a progressed theory than Chu-tzu(朱熹)'s one, for example. '定·靜·安' exist in the middle place when achieve '意誠' in case of '誠意'. Forth, in interpretation of '誠意·正心·修身' among '八條目', he regarded '誠意' as '靜時 存養工夫', and '正心' and '修身' as '動時 省察工夫', more over he insisted that it needs not only '正心' which exclude '四有 偏私處' but also after achieve ‘修身’ which exclude '五僻 偏私處' after achieve '意誠'. Fifth, he followed the Chu-tzu's theory that mentioned about '心之用' for '兼體用說' of the chapter of '正心', however, he insisted '主內應外說' denying '心在軀殼說' and '心在視聽說' for the interpretation of '心不在焉'.

        • 영남지역 퇴계학맥과 그 문화

          김광순 慶北大學敎 退溪硏究所 2005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37 No.-

          오늘 본교 퇴계연구소와 국제퇴계학회대구경북지부가 공동 주최하는 춘계학술발표대회에서 "영남지역 퇴계학맥과 그 문화"라는 큰 주제로 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함에 있어 기조강연을 맡은 김광순입니다. "영남지역 퇴계학맥과 그 문화"의 본래 과제 명제는 "영남지역 퇴계학맥과 그 문화의 데이터 베이스 구축"임을 양지 하시고 연구진은 본인이 연구책임교수이고, 박영호, 이문기, 강민구 교수가 공동연구원, 5명의 전임연구원, 박사과정 7명, 석사과정8명으로 구성되었다. "영남지역 퇴계학맥과 그 문화의 데이터 베이스 구축"이라는 원래의 과제 명칭에서 오늘 논문발표대회는 "데이터 베이스 구축"의 전 단계이므로 "영남지역 퇴계학맥과 그 문화"라고 편의상 붙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개최하는 학술 발표대회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2002년도 8월 1일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인문사회분야 기초학문 육성사업단으로 선정된 "영남지역 퇴계학맥과 그 문화의 데이터 베이스 구축"이라는 과제 수행의 연구계획과 목적, 그리고 연구 방법과 내용,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내용 및 실적 등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한 후에, 오늘 학술발표대회에서 발표한 5편의 주제에 대한 기본 연구 방향을 언급함으로써 기조강연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기조강연을 마치면 임종진교수의 사회로서 발표자는 이군선박사의 <매헌 금보의 도산기 고증과 정존재 잠고증에 대하여>, 김인철박사의 <퇴계학맥 문집소재잠명류에 대한고찰>, 이정화박사의 <퇴계문인의 학퇴계정신이 누정제영에 반영된 계승양상>: 서신혜박사의 <선산지방 서원의 훼철과 오유거사전>, 유영옥박사의 <학봉 김성일의 제례의식과 행례>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게 될 것이다. 오늘 다섯 분의 주제발표를 마치면 곧 이어서 이문기 교수를 좌장으로 하여 김종철 교수, 오용원 교수, 우인수 교수, 이수환 교수, 정우락 교수의 종합토론이 진행되고, 또한 방청석의 질문을 함께 받아 논문완성에 참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발표를 맡아 주실 다섯 분의 전임 연구원과 종합토론에 참가해 주실 교수님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It's my honor to make a keynote speech in Spring Conference of The Toegyehak(退溪學) in Yongnam(嶺南) area and its specific culture held by Toegye Studies Institute in Kyungbuk National University and Daegu and Kyungbuk branch of the Society of International Toegye Studies. The conference included in prior step on The construction of data base for the Toegyehak in Yongnam are and its specific culture was named as such for convenience. The research team is composed of 3 professors as coworkers-Park Youngho. Lee Moongi. Kang Mingu and 5 full-time researchers. 7 Ph.D course students. 8 master's course students, and me as principal researcher. The subject of The construction of data base for the Toegyehak in Yongnam area and its specific culture was elected as one of the national policy subject by Korea Research Foundation in term of basis learning supporting program in August 1. 2002. Prior to the presentation of papers, it will be announced that the purpose and plan of the subject. research way and results up to now. And the basic research directions of today's papers being announced are as bellows. At first, professor Lee Kunsun will announce the results of the investigation of Dasangi of Maeheon Geumbo. And next we will have the presentation about Self-cultivation Characteristics displayed in Exhortation and Inscription Works in Anthology of Toegye School Scholars by professor Kim Incheol. Professor Lee Jeonghwa will announce The aspects of succession of Nujeong Jeyoung in respect for the spirit of Toegye of Toegye's scholastic lineage then. And the next presentation by professor Seo Shinhye will be A Study on the removal of lecture-hall in Seonsan and Oyugeosajeon. With the presentation by professor Yu Youngog in the name of Hakbong Kim, Sung-il's thoughts and performance of the memorial services for the ancestors the presentation session will be ended. After presentation by 5 people, open debate will be held with professor Lee Mungi as chairperson, professor Oh Yongwon, professor U Insu and professor Jung Ulak. And also there will be session of receiving hearer's question. I think it will be great helpful to accomplish this project's purpose. Lastly. I'd like to show my special thank you for their great efforts to prepare presentation and discussion session. Thank you again.

        • 퇴계(退溪) 가서(家書)에 나타난 화법(話法)에 대한일고(一考) -손자(孫子) 안도(安道)에게 부친 서찰을 중심으로

          정시열 ( Si Youl Jeong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3 No.-

          본고는 퇴계 이황이 손자 안도에게 보낸 서찰 가운데 현전하는 125통에 나타난 화법에 대한 연구이다. 맏손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던 만큼 서찰 곳곳에서 묻어나는 조부의 애정 어린 어조는 15년의 세월 속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지만 전하는내용에 따라 진술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것을 화법의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서찰에 등장하는 내용 중에서도 비교적 비중이 큰, 세 가지 사안인 제수된 관직의 사직, 손자의 학업에 대한면려, 처세나 처신에 관한 언급 등을 연구 대상으로 했다. 서찰에 나타난 퇴계의화법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 바탕을 둔 표현적 진솔함이라는 말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러한 그의 화법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구체적 사안에 따라 보다 효과적인전언을 위해 일정한 변화의 양상을 보이는데, 본고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여 그 각각의 세부적 사항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퇴계의 자탄 속에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퇴계는 외형상으로는 자기 처지에 대해 탄식하는 자탄의 화법으로 일관했지만 문맥상에 나타난 의미를 보면 상소나 차자로 허락받기 어려운경우 직접 임금을 뵙고서라도 원하는 바를 이루겠다는 집념 어린 면모를 보였다. 제3장에서는 퇴계의 신랄한 어조와 그로 인해 손자와의 사이에 형성된 객관적거리에 대해 살펴보았다. 퇴계는 사정을 두지 않는 신랄한 화법을 통해 손자와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학업을 독려하는 데 있어 祖孫관계가 초래할수 있는 감정적 매몰을 경계했다. 제4장에서는 전지적 입장에서 내리는 퇴계의 판단과 이로 인한 이성적 환기에대해 살펴보았다. 퇴계는 전지적 위치에서 손자의 처신에 대해 충고하고 조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도 보여줌으로써 젊은 손자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처세하기를 촉구했다. 학자로서의 퇴계는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 유학의 巨星이요,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巨儒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적 권위만을 생각한다면 퇴계에 대한정확한 이해는 요원한 일이 된다. 퇴계의 인간적 면모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의내밀한 생각과 일상사가 기록된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장르적 성격상 사적인 기록의 비중이 높은 서찰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적절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KCI등재

          退溪九曲과 退溪九曲詩 연구

          김문기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2 No.-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discuss an academic investigation into Toegyegugok(退溪九曲) conducted last summer in an attempt to ascertain historical evidence for each spot of it and its natural characteristics, and it’s also meant to look into Toegyegugok poems and the lives and learning of the poets. An academic investigation was implemented into Toegyegugok in August 2007 to confirm its existence, and that made it possible to find out the exact location of it. In general, that remained intact, though it was partly damaged to some extent. That was 5.5㎞ long and along Togye River, a branch stream of Nakdong(洛東) River where Toegye’s remains were rampant. It is not sure whether this spot was designated while he was alive. There were two poets who wrote poems about Toegyegugok:Lee Ga-sun(李家淳) and Lee Jong-hyu(李宗休). In Lee Ga-sun’s poem, each valley’s scenary and scenic beauty were portrayed in the first two lines, and he described his affection for Toegye(退溪) and the uprightness of man allegorically by using things in the second two lines. So his poem could be said to depict how he was elated by things. Lee Jong-hyu composed poems about Toegyegugok(退溪九曲), Oksangugk(玉山九曲) and Dosangugok(陶山九曲) as well. In the poem about Toegyegugok, he allegorized human nature. Overall, however, his Toegyegugok poem described more principles of moral philosophy than that of Lee Ga-sun. 본고는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지난해 여름의 학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퇴계구곡 원림의 각 지점을 고증하고 그 원림적 특징과 퇴계구곡시 작자의 생애와 학문, 퇴계구곡시의 작품세계를 고찰하였다. 퇴계구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계 이가순의 퇴계구곡시를 통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그 후,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조사와 퇴계구곡 관련시를 두루 찾는 과정에서 하암 이종휴의 퇴계구곡시도 창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2007년 8월에 퇴계구곡 원림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퇴계구곡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고 퇴계구곡의 정확한 지점을 고증할 수 있었다. 퇴계구곡 원림의 제1곡은 사련진, 제2곡은 양진암, 제3곡은 죽동, 제4곡은 장명뢰, 제5곡은 고등암, 제 6곡은 임부동, 제 7곡은 양평, 제8곡은 청음석, 제9곡은 쌍계인데 이들 퇴계구곡은 부분적으로 훼손된 바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산구곡이 낙동강의 큰 물줄기에 설정된 것과는 달리 퇴계구곡은 퇴계선생의 유적이 산재하는, 낙동강의 지류인 퇴계, 즉 토계천을 따라 5.5km에 걸쳐 설정되어 있다. 퇴계구곡 원림이 퇴계선생 생존 시에 지정되고 경영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퇴계구곡시는 하계 이가순과 하암 이종휴, 두 사람이 남겼다. 이가순은 전국의 명산과 대찰, 명현의 유적지를 두루 편답하고 수많은 기행시를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무이구곡도가의 차운시와 퇴계구곡시를 비롯한 도산구곡시, 옥산구곡시, 원명구곡시, 소백구곡시 등 5편의 원림 구곡시를 지었다. 이가순의 퇴계구곡시는 전 2구에서는 주로 각 곡의 주위 경관과 풍치를 묘사하고 후 2구에서는 퇴계선생에 대한 회고의 정이나 성정지정을 탁물우의하여 읊고 있어서 그의 이 구곡시는 인물기흥적인 시라 할 수 있다. 이종휴도 무이구곡도가 차운시를 남긴 것을 비롯하여 퇴계곡시와 옥산구곡시, 도산구곡시를 창작하였는데 이종휴의 퇴계구곡시도 서경과 서정을 통해 탁물우의의 수법으로 음영성정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가순의 퇴계구곡시에 비하여 도학의 묘리를 담은 작품이 많다.

        • 퇴계학파 학문방법에 대한 일고찰 -매헌(梅軒) 금보(琴輔)의 「도산기고증(陶山記考證)」과 「정존재잠고증(靜存齋箴考證)」을 중심으로-

          이군선 ( Goon Seong Lee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5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37 No.-

          조선 중기 퇴계의 문하에는 유수의 학자들이 모여 학문에 잠심하였다. 한 학자에게서 이렇게 많은 학자와 문인이 배출되어 학단을 형성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이 학맥은 꾸준히 전개되어 조선 학술사에 유래가 없는 풍성한 업적을 남겼다. 퇴계의 학맥이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梅軒 琴輔의 陶山記考證과 靜存齋箴考證은 그 단서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도산기고증과 정존재잠고증은 스승인 퇴계의 글에 주석 작업을 한 것이다. 우리는 고전을 연구하며 작품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찾는데 치중해 왔다. 문집에 대한 주석 작업을 소홀히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퇴계 문하의 학문 방법은 원문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러한 방법은 퇴계에서 시작하여 퇴계 일문의 공부하는 정통적인 방법으로 굳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이와 같이 스승의 글에 주석을 단 자료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자신의 시문에 주석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도산기고증과 정존재잠고증처럼 스승의 글에 대하여 주석을 단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퇴계와 같이 공부했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원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도이다. 이러한 원전에 대한 꼼꼼한 주석 작업이 퇴계의 문인들이 퇴계의 학맥을 이어나가며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이러한 공부방법이 전통으로 굳어져 학문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이루어졌기에 퇴계의 학맥이 끊임없는 생명력을 가지고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산기고증과 정존재잠고증은 퇴계 일문의 학문 방법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금보의 퇴계에 대한 존모의 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In Mid-Choisun Period, there were many foremost scholars gathered to study under Thoike. It’s not a usual situation that one scholar influences these many students. In addition, this Thoike doctrine has kept developing and leaving abundant achievements in academic history for the first time. Then, what is the motive power that Thoike’s doctrine has maintained? We think that Dosankigozeung(陶山記考證) and Jeongjonjaejamgozeung(靜存齋箴考證) of Maeheon(梅軒) Kumbo(琴輔)can be the key to solve this question. Dosankigozeung and Jeongjonjaejamgozeung is students’ annotated works to his teacher’s work. We have been trying to observe and analyze to find the meanings of Thoike’s doctrine and his work. It is true that we, somewhat, ignored about annotated works. To know Thoike’s doctrine, it is basedon the completion of understanding of ways of the doctrine. This system had started from Thoike, so it became to be recognized as a legitimate way of studying. As a result, students’ annotated works and documents have been formed in this manner. Of course, often, scholars annotate to their own works, but there are not many cases that students annotated to their teacher’s work, such as Dosankigozeung and Jeongjonjaejamgozeung. This is one of the ways, which was generated under Thoike’s teaching, which makes to understand Thoike’s work perfect. We believe that this thorough annotated work is the motive power that lets Thoike’s doctrine has developed and left historical achievements. After that, these ways of studying in this elaborate annotation works have become the tradition, so that is the reason how this way of studying has been developing continuously. Dosankigozeung and Jeongjonjaejamgozeung are the perfect documents that have shown the Thoike’s doctrine. At the same time, this can be the document that makes sure of the affection between Thoike and his following students.

        • 退溪『論語』解釋의 經學的 特徵과 그 繼承樣相

          이영호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5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6

          『논어』는 유가의 비조인 공자의 언설이 기록되어 있는 경전이기에 동아시아 각국의 수많은 경학자들이 주석을 내곤 하였다. 이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논어』 주석서는 朱子의 『論語集注』인데, 주자는 이 책에서 경전해석학의 중요 방법인 義理와 훈고를 반영해내었다. 그런데 주자 이후 중국의 주자학파는, 양명학과의 사상 투쟁 과정에서 그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자연히 주자의 경전해석방법 중 의리에만 치중하고 훈고는 소홀히 하였으며,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그들의 『논어』 해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편 조선의 退溪는 『論語釋義』를 저술하면서 주자의 『논어』 주석을 준거로 삼았다. 때문에 그는 『논어』를 해석할 때 기본적으로 주자학적 의리에 충실하였지만, 때로는 經典의 本旨를 찾고자 노력했으며, 또한 경문의 자구를 조선어로 풀이하는 훈고에도 매진하였다. 퇴계 이후 영남 퇴계학파와 근기 퇴계학파는 주자와 퇴계의 영항 아래 각기 다른 경학적 특징들을 내포하는 『논어』 주석서들을 집필하였다. 영남 퇴계학파의 李德弘은 『論語質疑』를 통해 스승의 『논어』설을 준수하는 방향에서 『논어』를 해석했으며, 柳長源은 『論語纂註增補』에서 중국 주자학파의 『논어』설을 집성하였고, 柳健休는 『東儒論語集解評』에서 조선 주자학파의 『논어』설을 집대성하였는데 그 공통적 특징으로 주자학적 의리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들 수 있다. 한편 근기 퇴계학파의 종장인 李翼은 『論語疾書』에서, 주자의 의리정신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주자학적 의리와는 다른 새로운 의리-예컨대 현실과 이익의 중시-를 그의 『논어』해석에 투영시켰다. 또한 동아시아 『논어』 주석사에서 특기할 만한 『논어』주석서인 『論語古今註』를 남긴 丁若鏞도, 훈고만을 고집하는 한학을 배척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주자학을 존숭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이기심성론이 중심에 놓여있는 주자의 『논어집주』와는 달리, 『논어고금주』에서 경세치용을 지향하는 해석체계를 수립하였다.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이룩한 훈고와 의리의 종합이라는 경학적 성과는 중국주자학파에서는 계승이 되지 않고, 조선의 퇴계에 와서야 계승이 되었다. 이후 퇴계학파는 의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중국의 주자학파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영남 퇴계학파의 경우는 주자학적 의리를 정치하게 파고들었고, 근기 퇴계학파의 경우는 조선후기 역사적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의리를 그들의 『논어』 주석에 투영시켜 놓았다는 점을 차이점 내지 특색으로 들 수 있다. Many scholars in East Asian countries have written numerous annotations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since <the Analects of Confucius> is the scripture that wrote down the remarks of Confucius who is a founder of Confucianism. Among all those annotations, the most influential annotation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is the <NoneoJipJu> written by Chu Hsi. Chu Hsi reflected the scholia and trend of focusing on contents in the context which are important methods for the studies of scripture interpretation. The Chu Hsi school in China after Chu Hsi, however, had tried to establish its identity during the philosophical dispute with the Wang Yangming school. The philosophical dispute with the Wang Yangming school made the Chu Hsi school to focus on not scholia but trend of focusing on contents in the context. The Chu Hsi school's attitude towards trend of focusing on contents in the context had been reflected on their interpretation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Meanwhile, ToeGye in Choson used the Chu Hsi's annotation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when he wrote <NoneoSukEui>. He was basically loyal to the way of focusing on the contents in the context. But sometimes he tried to make an effort to find out the original meaning of the scripture. He also made an effort to scholia that translated the sentences of the scripture in Choson language After ToeGye, YoungNam ToeGye school and KeunKi ToeGye school had written several annotations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that included different characteristics based on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under the influence of Chu Hsi and ToeGye. Lee, DukHong in YoungNam ToeGye school interpreted <the Analects of Confucius> with the accordance of his master's theory in his book, <NoneoJilEui>. In his book, <NoneoChanJuJeongBo>, Yoo, JangWon compiled the theories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of Chinese Chu Hsi school. Yoo, KeonHyu collected the theories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of Korean Chu Hsi school in his book, <DongYuNoneoJipHaePyung>. Their common characteristics were based on finding out the contents in the context of the scripture. Meanwhile, the master of KeunKi ToeGye school. Lee, Ik had a different view of the trend of finding out the contents in the context of the scripture from that of Chu Hsi although he highly evaluated Chu Hsi's spirit for finding out the contents in the context of the scripture. He developed a new way of finding out the contents in the context of the scripture - for instance, putting on the importance of reality and profit - in his annotation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Chong, Yagyong who wrote <NoneoKoKeumJu>, that was a special annotation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in the history of annotation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in East Asian countries, excluded exegetical studies and showed his respect to the studies of Chu Hsi classics. Having Difference from Chu Hsi's <NoneoJipJu> that focused on less practical issues, he, however, built on the interpretational system that pointed to practical usage of running the state in his <NoneoKoKeumJu>. Chu Hsi's scholaristic outcome that combined scholia and the way of focusing on the contents in the context had been succeeded not in Chinese Chu Hsi school but in Choson Chu Hsi school. The ToeGye school made little difference with the Chinese Chu Hsi school in terms of putting on the importance on the way of focusing on contents in the context of the scriptures. YoungNam ToeGye school, however, was different from the Chinese Chu Hsi school in terms of studying the way of focusing on contents in the context of the scriptures in detail. KeunKi ToeGye school was different from Chinese Chu Hsi school in terms of developing new theory of seeing the way of finding out the contents in the contexts of the scriptures. That new theory corresponded to the historical situation in the late era of Choson dynasty.

        • 退溪 人性論에 있어서 善惡과 道德意志

          李永慶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2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1

          퇴계는 인성론에서 心性情의 선악과 인격형성의 문제를 理氣, 개념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데, 이는 도덕선천성과 道德意志의 문제와 연결된다. 퇴계는 理氣對論的 관점에서 인성의 善惡과 心性情의 문제를 다루면서 氣에 대한 理의 主宰가 강하면 善이 발출되고, 理에 대한 氣의 지배가 강화되면 惡이 발출된다고 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理를 통해 인간의 至純한 善性을 확보하고 惡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명한다. 퇴계는 氣의 淸濁 정도에 따라 인격 유형을 上智·中人·下愚로 나누고,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실천 능력이 천부적인 氣의 淸濁·粹駁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된다고 하는 도덕 선천성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퇴계는 '下愚는 粹駁한 氣를 받고 태어났으므로 邪惡하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퇴계는 동시에 '下愚라고 하더라고 天理를 성찰하는 수양으로 上智가 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퇴계는 下愚에서 上智로 변화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의지가 推動되는 마음의 主體力으로 惡을 善으로 轉變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한편, 퇴계는 인간 본성의 善함이라는 천부적 특성과 본성상의 惡의 단초 문제를 후천적 도덕의지와 관련하여 설명함에 있어서, 七情이 과연 善惡의 특성을 가진 것인지를 검증하지 않았고, 후천적 도덕의지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理氣의 특성에 의해서 인간의 도덕성이 어느 정도 결정된다고 하는 모순적 양상을 분명히 해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퇴계는 下愚가 도덕의지로써 上智로 될 수 있다는 논지를 비교적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The Toegye's viewpoint of human nature is based upon the relation of li(理) and chi(氣), which confront each other. The li and chi consist of human nature and body, and the two factors have moral properties. Toegye thought that human beings innately have good nature, and have the probability that they can devote to the evil. So Toegye intends to conquer the evil and to reinforce the good to build up moral character. Toegye asserts that every human is granted an individual characteristic of li & chi in born, and the li & chi decide the good & evil of the human nature. Toegye recognizes that li and chi are struggling each other in human mind. Then, Toegye asserts that the essence of moral problem is in the control of chi, so his aim of study set the focus on the correction of chi. Toegye insists that the lowest moral man can and must become the highest moral man, He, therefore, strengthen moral will to take the initiative against chi.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리주기자설(理主氣資說)과 그 사상사적(思想史的) 의미(意味)

          전성건 ( Sung Kun Jeon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6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8 No.-

          퇴계의 四端七情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互發說의 타당성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渾淪說과 分開說 가운데, 퇴계학파는 분개설에, 율곡학파는 혼륜설에 무게중심을 두고 비판과 재비판의 과정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과 재비판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적 입장차이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차이로까지 진행되었다. 正學의 수호라는 명목 아래 互發說과 氣發理乘一途說의 학문적 대립이 學派와 黨派의 정치적 대립물이 되고 만 것이다. 정치적 권력에서 소외된 영남남인의 차선책은 학문적 권위를 빌어 정치적 소생의 기회를 찾는 일이었다. 17세기 퇴계학파는 葛菴을 필두로 하여 ``율곡의 호발설 비판``에 대한 재비판을 통해 영남남인을 규합하여 정치적 활로를 찾으려 하였지만, 영남남인의 정계진출은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게다가 18세기에는 노론 중심의 정국이 견고해지고 영남남인을 회유하려 그들의 근거지까지 노론세력이 침투하는 상황이 본격화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大山이다. 그는 퇴계학파의 적통으로서 퇴계학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특히 그가 주장한 理主氣資說은 영남남인은 물론 근기남인의 학문에도 사상사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에 본 논문은 18세기 퇴계학파의 적통인 대산의 理主氣資說의 논리구조와 그것이 갖는 사상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대산의 理主氣資說 형성에 직간접적인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되는 사상을 考究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산의 학설이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간략하게 다룰 것이다. 葛菴과 密菴을 계승하여 18세기 퇴계학파의 큰 스승으로 자리한 대산이 그들과는 구별되게 퇴계의 사단칠정론을 해석하였다는 점은, 학문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국면에 대응해야 했던 한 지식인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Daesan`s position on the four-seven debate between T`oegye and Yulgok school is not only built on the T`oegye`s but also reflect Yulgok`s to some degree. In this regard, his theory of principle and material force, so-called liju-kija is has uniqueness in the history of thought in 17∼18th century. The key point is how to interpret T`oegye`s mutual issuance of principle and material force. The main stream was attached to the aspect of dissociating the two emotion which are moral sense and physiological sense like theory of Cheongdae. By the way, Daesan made an effort to synthesize each other`s differences, and both Woodam and Seongho have a little different and analogous role. Most important is that Daesan tried to negotiate T`oegye and Yulgok school in the history of thought. And his trial is to bind T`oegye school when T`oegye school was going to be cajoled by Yulgok school, and to expand T`oegye school to the Sungho school in the academic and political aspects.

        • 退溪學派의 『禮記』해석에 대한 고찰

          유권종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5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No.36

          본 연구는 퇴계로부터 재전 제자까지의 학맥에서 이루어진 『禮記』에 관한 해석의 사실을 밝히고, 그 해석의 내용 및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퇴계의 학맥에서 『예기』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방식은 고증적 방식과 해석적 방식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고증적 방식은 이미 퇴계에게서 단편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예기』를 대상으로 삼아 본격적인 고증의 방식을 취한 것은 학봉과 서애의 『상례고증』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미수의 『경례유찬』, 「십이월령고정」도 그러한 전통을 잇는 저술로 인정될 수 있다. 또 해석적 방식은 지산의 「곡례수장도」와 우복의 『사문록』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사문록』은 재전제자까지의 퇴계학맥으로 볼 때에 『예기』 해석의 치밀함과 아울러 고증에 입각한 변석이 매우 돋보이는 저술이다. 퇴계의 학맥에서 이루어진 『예기』 해석의 특징은 우선 퇴계로부터 재전 제자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 저술의 전문화가 이루어지는 점, 즉 퇴계에게서는 단편적인 경문의 인용을 통해서 예설을 확정하던 방식이었던 것이 서애와 학봉 그리고 미수에 이르는 과정에서 상례와 제례를 전문적으로 고증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면서 전문화가 이루어진 점을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우복의 『사문록』과 같이 고증은 물론 치밀한 이기론적 철학적 분석에 입각한 『예기』 해석이 성취되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또 미수의 『경례유찬』과 같이 왕과 제후 대부 사 등의 신분에 따라 차등을 엄격히 강조하는 예를 『예기』 등의 경전으로부터 구성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곡례수장도」처럼 예학과 성학을 결합시킨 저작이 이루어진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이렇게 보면 퇴계의 학맥에서 이루어진 『예기』 연구는 궁극적으로는 성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 중요성을 지녔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This study has a purpose to explain the context of interpretations and commentaries of Yeki, one of old Chinese classics, on the Toegye School from 16th century to 17th centry, and to discuss the features and historical value of their works. In the Toegye School, confucians works to approach to Yeki show two different ways. The one is a bibiographical study, the other is a hermeneutic study. The bibiographical study was started by Toegye and has been regularized by Hakbong(Kim Sung-il) and Soae(Yu Sung-ryong) in their each works. Their each works had the same name, that was Sang-rye-go-jeung which meant a bibiographical study of funeral ceremony. Misu(Hu Mok) had also made bibiographical studies, which were Gyung-rye-yu-chan and Si-bi-wol-lyung-go-jung. The hermeneutic studies were made by Jisan(Jo Ho-ik) and Ubok(Jung Gyung-se). Jisan's work is Gok-rye-su-jang-do and Ubok's work is Sa-mun-lok. Specially the latter is a very important one because its hermeneutic study as well as the bibiographical method are very correct and fine. The features of Yeki stdies in the Toegye School can be explained as follow: the first is from Toegye to Misu their bibiographical studies had developed and speciallized more and more. The second is that the school had achieved a work which was the finest one of hermeneutical studies in the 17th century of Chosun Dynasty with its philosophical debates as like Ubok's Sa-mun-lok. The third is to emphasized the rites different in grades of social status in Misu's Gyung-rye-yu-chan. The last is to combine and harmonize rite studies and sage learning in Jisan's Gok-rye-su-jang-do.

        • KCI등재

          晩求 李種杞의 성리학적 입장에 대한 검토 -寒洲學派와의 논변을 중심으로-

          임종진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3 No.-

          본 논문은 19세기말 영남의 성리학자인 李種杞의 성리학적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性理學에 대한 이종기의 입장은 그의 문집 속에 들어 있는 소논문들, 李震相과 그의 제자 및 다른 성리학자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글 속에서 이종기는 여러 성리학적 주제들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해 보면, 이종기는 크게 두 측면에서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첫 번째 측면은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李珥의 성리학적 입장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退溪學派로서의 자신의 사상적 좌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 측면은 퇴계학파 내에서의 성리학적 입장과 관련되어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이종기와 이진상을 비롯한 寒洲學派(許愈, 尹胄夏, 郭鍾錫)와의 논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理氣論과 心性論을 중심으로 해서 이 부분에 대한 이종기와 한주학파의 성리학적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면, 자연스럽게 당시 퇴계학파 내에서 이종기의 성리학적 입장이 가지는 의미와 평가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理氣論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양측 모두는 기본적으로 朱熹와 이황에서 비롯된 主理論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여러 가지 주제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요컨대 한주학파는 보다 주리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리와 기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이라면, 이종기는 리와 기의 조화와 공존의 측면을 보다 강조하려는 입장이다. 心性論과 관련해서도 한주학파는 心卽理說을 주창함으로써 이황의 心合理氣說을 고수한 이종기와 대립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양측의 입장 차이는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첫째는 朱熹와 같은 성리학자들의 이론 자체에서 발견되는 부정합성의 문제 때문이고, 둘째는 한 성리학자의 이론에 내재된 다면적인 함의 중에서 어떤 측면을 중요하게 보는가하는 문제가 계속 남기 때문이다. 이제 이종기의 성리학적 입장과 관련해서 약간의 평가를 덧붙이고자 한다. 이종기는 기본적으로 李滉의 理氣互發說과 심합리기설의 입장을 성리학 이해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치게 理發ㆍ氣發만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물론 기호학파의 主氣論에 대한 비판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한편으로는 퇴계학파의 주리론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리 위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경향에 대한 퇴계학파 내부의 자기반성적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진상을 중심으로 하는 한주학파가 理優位論을 근간으로 하는 觀念(idea) 위주의 理想主義的 입장에서 퇴계학을 계승했다면, 이종기는 상대적으로 氣의 존재론적 위상에 좀 더 주목하여 종래 퇴계학파의 性理思想을 보다 현실적인 입장으로 이동시켜 사상적 균형성을 회복하려는 태도를 견지한 ‘退溪學의 現實主義的 繼承者’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The main object of this article is to look over the Neo-Confucian position of Lee Jong-Gi, a Confucian scholar of Youngnam area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His position on Neo-Confucianism can be figured out through some small articles in his collection of works and his correspondences with Lee Jin-Sang and his disciples and other scholars. In these works, we can see that Lee Jong-Gi had revealed his position to the various Neo-Confucian issues in two large aspects. The first aspect is that by way of taking critical stance on the Neo-Confucian position of Lee I, the representative figure of the school of Giho, he, as a scholar of the school of Toegye, established clearly his stance of thought. The second aspect is related to his position within the school of Toegye. In regard to this point,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his argument with the school of Hanju represented by Lee Jin-Sang. This article mostly deals with this part, and thereupon meaning and evaluation about Lee Jong-Gi's Neo-Confucian position can be drawn naturally. First of all, if we look into the theory of li[principle]-ki[material force], both sides basically took the position of the theory of Juli[主理論] which was originated by Chu Hsi and Lee Hwang. However, if we take one step further, we can see that they revealed some differences in many issues. For example, while the school of Hanju(Lee Jin-Sang and his disciples like Heo Yu, Yun Ju-Ha, Kwak Jong-Seok) tried to emphasize the distinction between li and ki by way of revealing more the aspect of Juli, Lee Jong-Gi tried to emphasize the harmony and coexistence of li and ki. In regard to the theory of human mind and nature, the school of Hanju, by advocating the theory that human mind is li[心卽理說], took different stance against Lee Jong-Gi who held fast to Lee Hwang's theory of human mind as the integration of li-ki[心合理氣說]. Yet, the difference of both positions is at the same time a kind of structural problem that cannot be dissolved easily. It is due, first, to the disparity discovered from the theory itself of Neo-Confucian scholars such as Chu Hsi, second, to the fact that there still remains a problem that among various immanent implications of a scholar which aspect is to be considered most importantly. At this point, we need to add some evaluation in regard to Lee Jong-Gi's Neo-Confucian position. Basically he got his root of Neo-Confucian understanding from Lee Hwang's theory of co-arousal of li-ki[理氣互發說] and theory of human mind as the integration of li-ki. Therefore, he was skeptical to the Neo-Confucian position that had excessive emphasis on the arousal of li[理發] and the arousal of ki. This kind of position as well as the critique of the theory of Juki[主氣論] of the school of Giho has a much greater deal of weight, but in the meanwhile it is related to self-reflective attitude within the school of Toegye against the tendency to interpret everything mostly with regard to li. This tendency had been developed as the theory of Juli of the school of Toegye had been handed down to later generations. From this aspect, we can see that while the school of Hanju led by Lee Jin-Sang had taken over Toegye Studies form the idealistic position centered on idea based on the theory that li is superior, Lee Jong-Gi can be called 'a realistic successor of Toegye Studies' who adhered to the position to recover the equilibrium of thought by way of moving the school of Toegye's traditional Neo-Confucian thought into more realistic position after paying more attention relatively to the ontological location of 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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