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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근(權近)이 추구한 유교국가의 국왕상(國王像) 고찰

        안장리(An, Jang-Li) 포은학회 2015 포은학연구 Vol.1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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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조선이 유교국가가 되는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교국가의 키워드를 국왕으로 보고 조선 초기 대표적인 유학자 권근이 정립하려고 하는 국왕상을 조명해 보았다. 권근은 유학관련 저술과 상소를 통해 유교국가의 이상적인 국왕의 면모를 제시하였다. 본고에서는 권근의 저술중『서천견록(書淺見錄)』과『시천견록(詩淺見錄)』, 그리고 상소 중에는 우왕에게 올린 3편의 상소와 정종에게 올린 1편의 상소 그리고 태종에게 올린 3편의 상소를 대상으로 하였다. 본고에서는 권근이 이들 상소에서‘하늘, 부모, 백성, 자신, 신하’ 등 5요소에 대한 국왕의 태도 정립을 요구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국왕상의 면모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권근이『서천견록』, 『시천견록』등 경서에 대한 견해에서 제시한 국왕상은 공경의 마음과 구덕(九德)을 갖추고 전조(前朝)의 신하들을 포용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18세의 혈기방정한 나이에 권신의 꾀임으로 정사를 게을리 하고 놀이에 빠진 고려 우왕에게 요구한 국왕상은 밤에 자고 낮에 깨어있으며 바른 자세로 덕성을 함양하는 수양의 자세였다. 그러나 우왕은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다 결국 24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정종에 대해서도 재미에 탐닉하지 말고 국왕으로서의 체통을 지킬 것을 건의하였다. 정종은 2차례의 걸친 왕자의 난이라는 격동 속에 곧 왕좌에서 물러났다. 태종에게는 국왕으로서의 자기 성찰과 학문정진, 부지런한 정사 외에 전조에 절의를 지킨 신하에 대한 포상과 왕과 백성을 위해 죽었음에도 제사할 후손이 없는 인물에 대한 여제(厲祭) 등을 베푸는 국왕상을 제시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태종은 정몽주와 같이 자신이 죽인 전조의 신하를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조 위에 ‘절의’라는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유교국가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권근은 우왕대부터 끊임없이 경연을 강조하는데 이는 성리학을 뿌리내리려는 조선 초기 상황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국왕을 만들려는 성리학자 권근의 기본적인 의도였다. 태종은 권근이 건의한 효의 강조 그리고 전조의절의에 대한 포상 등을 통해 유교국가의 기틀인 충효를 장려하고 실천하는 국왕상을 정립하게 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process of Joseon becoming a Confucian country. Under the goal, the study set kings as one of the keywords of Confucian country and examined the image of kings that Gwon Geun, one of the utmost Confucian scholars in the early days of Joseon, tried to establish. Gwon proposed the aspects of ideal king in a Confucian country by writing Confucianism-related books and submitting memorials. The study looked into two of his books, Seocheongyeonrok and Shicheongyeonrok, and seven of his memorials, which include three submitted to King Woowang, one to King Jeongjong, and three to King Taejong. Recognizing that he demanded that kings should establish an attitude toward five elements of “Heaven, parents, people, themselves, and subjects” in his memorials, the investigator examined what kind of attitude requested by him. In his views of Confucian classics in his Seocheongyeonrok and Shicheongyeonrok, he proposed an image of kings that had a heart of respect and nine virtues and was capable of embracing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In his memorial submitted to King Woowang of Goryeo, he especially emphasized cultivation of “oneself” to the king that was idle with political affairs and immersed in play at the age of hot-blooded 18 due to the temptations of a powerful courtier. Although he stressed that the king should cultivate his virtues in the right posture, sleeping at night and being awaken during the day, the king kept leading a dissipated life and ended up being killed by poison ordered as a death penalty at the age of 24. Gwon also suggested to King Jeongjong that he should prevent himself from indulging in fun and maintain his dignity as a king. The king was faced with a turmoil of prince’s uprising twice and ended up coming down from the throne. He proposed to King Taejong that he should work on self-reflection, devotion to study, and diligence with political affairs as a king, give rewards to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that adhered to their principles, and hold a memorial service for those who died for the king and people and had no descendents to hold such a service for them. Gwon wanted that the king would grant rewards to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that he killed such as Jeong Mong-ju, establish a concept of “fidelity” above country and dynasty, and solidify a foundation for a Confucian country that placed the highest values on ideology. Gwon continued to emphasize lecturing and study with kings since the reign of King Woowang, which was his basic intention as a Neo-Confucian scholar to equip a king with Neo-Confucianism in the early days of Joseon when Neo-Confucianism was about to take root in the country. By proposing an image of kings to Kings Jeongjong and Taejong, he established an image of kings that encouraged and practiced loyalty and filial piety, which were parts of the foundation of a Confucian country, by stressing filial piety and giving rewards for loyalty to the previous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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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의 인물전(人物傳) 일고(一考)

        안장리 ( Jang Li An ) 연민학회 2012 淵民學志 Vol.17 No.-

        본고에서는 연민의 『韓國名人小傳』과 『李朝名人列傳』 등 인물전을 통해 역사서 기술의 기반이 되는 역사관과 인간관을 고찰하였다. 연민의 인물전은 인물사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669명이라는 많은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역사 전개에 있어서 다양한 계층, 다양한 역량의 필요성을 인정한 연민의 역사관 때문으로 여겨진다. 연민 인물전은 개개 인간의 총체적인 면모를 밝히기 보다는 역사적 상황에서의 거취를 중시하고 있다. 연민의 인물전에서 정몽주는 대의를 위해 순절한 인물로, 정도전은 고려를 배반하고 나아가 조선에서도 반역의 기치를 올린 출세주의자로 부각되어 있다. 연민은 인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혈통과 학통을 연계지어 역량을 평가하였고, 성리학·문장·벼슬 등 당대의 잣대를 인물 평가의 기본으로 삼았지만 미천한 신분의 중인, 하찮게 여겨지던 예술가 그리고 반역자의 경우도 과학이나 문장 등에 있어서 실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작품을 남겼거나 세상의 부조리를 개혁하려 하였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국애족의 거취에 최상의 가치를 두었다. 본고에서는 연민의 인물전이 신분이 높은 기득권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 즉, 사화와 당쟁으로 점철된 역사, 정치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안용복과 같은 미천한 애국자가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연민은 인재가 쓰이지 못하는 시대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 우리나라가 인재가 많은 나라라는 자부심을 그려냈는데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아울러 본고에서는 연민이 인물전에서 野史에 전하는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이면적 모습을 흥미있게 소개하였음을 밝혔다. Yeonmyeon tried to write a history like Sima Quan`s 『Shiji (historical records)』. But, he didn`t leave a history. Therefore, this study considered Yeonmyeon`s view of history and man through his 『Brief biographies of Korea Master 』and 『Lee Dynasty Master series 』. Because it is the basis of describing a history. Even though Yeonmyeon`s Inmuljeon(Peoples) is not a figure dictionary, it has a characteristic to treat a large quantity of 1669 figures. This is due to Yeonmyeon`s view of history in which he recognized the necessary of different class and ability. This article determined that Yeonmyeon`s Inmuljeon(Peoples) has the characteristic to consider very important in one`s position in the historical context rather than define the total aspect of an individual people. Then, Yeonmyeon estimated that Jeong mong-ju was the man who died for his loyalty, on the contrary to this, Jeong do-jeon was a status seeker who betrayed the Kingdom of Goryeo, furthermore raised up the treason to Joseon Dynasty also. For explaining a man, he estimated an ability connecting a family to a scholastic mantle, and a people based on the criterion that was used in that time such as Neo-Confucianism, a sentence and government post, however, he also estimated a man who was a lowly status such as the public, or an artist who was supposed to be non-person, and even a betrayer as being worth enough, if they had a good ability in a science and a sentence, or left a good work, or tried to revise the irrationality in the World. Moreover, he had put the devotion to one`s country and to ones people on the best value. This is also because the purpose of writing the Inmuljeon was based on the devotion to Yeonmyeon`s country and to his people. This paper determined that Yeonmyeon`s Inmuljeon carried on the spirit of scholar of the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in the lad of Joseon Dynasty, which drew the country where has the absurdity of the age when a talented person is not used and great pride what the country has many talented person. In addition, this study has found that in the Inmuljeon, Yeonmyeon interestingly introduced various peoples and the hidden side of them who appeared in a history by understanding that the humble patriot, such as An yong-bok, didn`t have a post to stand in the historical presentation based on history and politics which was riddled with a series of a historical story and political strife recorded by the privileged class of high standing.

      • 여말선초 사대부의 奉使詩에 나타난 세계관 비교

        안장리(An, Jangli) 포은학회 2009 포은학연구 Vol.3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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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는 여말선초의 대표적 사신인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의 봉사시를 통해 이들이 세계관을 비교하였다. 봉사시의 내용을 異國의 風物, 고향에의 그리움, 역사유적지, 皇都의 웅장함 등으로 나누어 다루었다. 정몽주는 황도의 웅장함과 그 주인인 황제의 역량에 대해 강조하였으며, 당대 천하가 同文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신의 역할은 고단하다고 하여 은연중에 안정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는데 이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에 대한 불만으로 볼 수 있다. 이숭인은 당대 천하가 동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사신의 역할이 고단하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아침과 저녁이 다른 세태를 비판하였을 뿐이다. 당대 세계에 대해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는 중국 때문이 아니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셈이다. 정도전은 중국에서 본 자연의 웅장함을 칭송하고 천하동문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역사적 교훈을 강조하였다. 중국 중심의 웅장한 세계에서 왕이나 세태가 중요한 게 아니고 역사에 남을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권근은 명나라 황제에 대한 만국의 추대와 신하로서의 구실에 대해 강조하였고 萬國異語의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 보다는 각국의 사정이 다름을 중시했고 당대 각 나라들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당시 세계상의 정립에 있어서 정몽주가 중국의 역할을 중시했다면 이숭인은 고려의 한계를 비판했으며, 권근은 조선의 역할을 중시했고, 정도전은 중국과 조선에 상관없이 역사에 남을 행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사신 역할에 있어서 정몽주는 중국으로부터 포로석방 조공감면 등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어려움을 헤cusk가려 했고, 이숭인은 당대 고려의 세태타락을 비관했다. 권근은 중국에 대해 조선의 독자성을 드러내어 평가를 받았으며, 정도전은 중국의 역량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조선건국사업에 매진하였다. This thesis compares global outlooks of important diplomatic representatives of the Last years of the Goryeo, Jeong Mong Ju, Lee Seoung In, Jeong Do Jeon, and Gwan Gun through Envoy poetry. The contents of Envoy poetry are divided as things foreign, yearning for home, landmarks, a magnificent view of imperial metropolis. Jeong Mong Ju emphasized a magnificent view of imperial metropolis and an ability of an emperor. He thought that the writing of the world was identical, but the role of a representative was exhausting. It furtively reflected his dissatisfaction on the unstable world, and it could also read as the dissatisfaction on China, the center of the world of the time. Lee Seoung In thought the writing of the world was identical and the role of a representative was not exhausting. However, he criticized social conditions which changes everyday. He was unsatisfactory on the world, but it was not because of China, but it was the problem of him. Jeong Do Jeon praised a magnificent view of nature, represented the recognition of Common Written Language, and emphasized the historical instruction. He thought that the important thing was not an emperor or social conditions in China centered world, but doing something that could be remained in the history. Gwan Gun focused on dignified Ming dynasty and the role of retainers and had the recognition of National language. He emphasized the condition of every country and role of them rather than the centered view of China.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world view, Jeong Mong Ju emphasized the role of China, Lee Seoung In criticized the limitation of Koryo, Gwan Gun focused on the role of Chosun, and Jeong Do jeon only stressed the achievement for the hostory rather than focusing on China or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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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약재 김구용 유배시에서 교유의 의미

        안장리(An, Jang-Li) 포은학회 2018 포은학연구 Vol.2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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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는 고려시대 유배의 특징과 김구용 유배시의 의미에 대해 고찰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이나 외가 등으로 유배시키는 연고지 유배형이 있었고, 유배지에서 지방관의 각별한 대우를 받기도 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교유를 할 수 있었다. 김구용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일찍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이집 등 당대 관료들과 돈독한 유대를 갖고 있었다. 원말명초의 혼란한 국내외 정세에서 두 차례의 유배를 당하였으며, 첫 번째는 연고지인 여흥에 유배되었고, 두 번째는 중국의 운남에 유배되게 된다. 여흥유배시와 운남유배시는 유배환경의 차이로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본고에서는 이를 교유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여흥유배에서 김구용은 이숭인, 정몽주 등 의기투합하는 동료와의 교유를 통해 유배의 고통을 극복하였다면 운남유배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힘들었던 상황을 상기하고 자신의 고난이 이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함으로써 유배길의 고통을 견디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구용은 유배의 고통을 지인과의 교유시 그리고 고인과의 교감을 통해 극복하였고 이는 고려시대 유배문학을 풍성 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the characteristics of exile during Goryeo and the meanings of Kim Gu-yon s exile poems. In Goryeo, there was an exile sentence to the hometowns of the convicted such as their birth places and relatives homes on the mother s side. They were allowed to engage in relatively free social intercourses at the place of exile, being treated specially by local officials. Kim Gu-yong was a descendent of a prestigious family and passed the state exam at an early age, forming close relationships with government officials of his time including Jong Mong-ju, Lee Sung-in, Jong Do-jeon, and Lee Jip. In the middle of the chaotic situations home and abroad between the end of Yuan and the beginning of Ming, he was exiled twice: he was exiled to his hometown Yeoheung the first time and Yunnan, China the second time. His exile poems created in Yeoheung and Yunnan showed completely different aspects due to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exile environments. The present study examined them in the aspect of social intercourse. During his exile in Yeoheung, Kim overcame the pain of exile by having a social intercourse with his peers of mutual understanding such as Lee Sung-in and Jeong Mong-ju. During his exile in Yunnan, he endured suffering along his exile path by recalling the difficult situation of historic figures in Chinese history and checking that his hardship was not different from theirs. Kim overcame the pain of exile by writing social intercourse poems with his acquaintances and the deceased, and his exile poems made a contribution to the enrichment of exile literature during Goryeo.

      • KCI등재

        정몽주(鄭夢周)의 '단심(丹心)'과 이정(李婷)의 '무심(無心)' 비교

        안장리(An Jang-li)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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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는 시조 <단심가>와 <무심가>로 알려진 정몽주와 이정의 문학작품을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이정이 지닌 '무심'의 세계를 밝히고 단심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 하였다. 이정의 생애를 졸기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정은 조선 성종의 동생으로 지적이고 문학적 역량이 있었으며,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모든 벼슬과 교유를 포기하고 늘 동생인 성종을 왕으로서 섬기며 신하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살아야 하였다. 성종의 태평시대, 이정은 가장 바람직한 왕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중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늘 국가를 대표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리학을 받아들여 국가 이념을 세웠고 고려를 위해 죽은 정몽주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정몽주와 이정의 문학세계를 봄, 가을, 이상향, '단심'과 '무심' 등으로 나누어 다루었다. 첫째, 봄에 대해 이정이 아쉬움을 노래하였다면 정몽주는 언제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읊었다. 둘째, 가을에 대해 이정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한탄을 읊었다면 정몽주는 사신으로서의 긍지와 도덕적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를 읊었다. 셋째, 이상향에 대해 이정에게는 이상향 강남이 술과 그림을 통해 현실을 탈피하여 찾아가고픈 공간이라면 정몽주에게 강남은 실제공간으로 중국의 수도이며 천자가 사는 곳이었다. 넷째, '무심'이 역량은 있어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이정이 선택해야만 했던 마음이었다면 정몽주에게 '단심'은 국내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해서 모든 역량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하는 마음이었다. 본고에서는 '단심'과 '무심'이 정몽주와 이정이 각각 자신들이 처한 시대와 신분에 맞는 최상의 심상이었음을 밝혔다. This article compared the literary works of Jeong mong-ju and Lee jeong what are famous as <Dan-sim ga> and <Mu-sim ga> of the progenitors. With this, this study tried to find the world of 'Mu-sim' of Lee jeong who is relatively not famous well and recall the meaning of <Dan-sim>. This paper reviewed life of Lee jeong with 'Jol-ki (the record of his death). As Lee jeong was a brother of King Seong-jong in Joseon Dynasty, he was intelligent and had literary capability and was of high standing. However, he gave up all government post and companionship and had to live for being content with the life as a vassal that took care of his younger brother, King Seong-jong. During the King Seong-jong' time of quiet, Lee jeong lived his life as the best prince. He always was busy himself for going to China and Japan and coming back as a representative of a nation and established the Korean ideology to accept Neo-Confucianism, so he lived the exact opposite of Jeong mong-ju who died for Goryeo Dynasty. This paper examined to divide the literary world of Jeong mong-ju and Lee jeong into spring, autumn, utopia, 'Dan-sim' and 'Mu-sim'. Firstly, Lee jeong song a sense of frustration for spring, on the other hand, Jeong mong-ju wrote first his devotion for the nation always. Secondly, Lee jeong recited his own misfortune in the world where nobody understood him well for autumn, otherwise, Jeong mong-ju recited his will that tried to make the ethical world with the pride of an envoy. Thirdly, utopia was a gangnam where Lee jeong wanted to go out of the reality through alcoholic drink and painting, on the other hand, for Jeong mong-ju a gangnam was the capital city of China where an emperor lived as a real space. Fourthly, 'Mu-sim' was Lee jeong's heart which he had to select who couldn't open his capability even if he had, otherwise, for Jeong mong-ju, 'Dan-sim' was his devotion that had to open actively all his competences in outside and inside a nation as a representative of a nation. This article found that 'Dan-sim' and 'Mu-sim' were the best image in which Jeong mong ju and Lee jeong, respectively, faced the age and the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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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增東國輿地勝覽』의 《新都八景》과 『大明一統志』의 《京師八景》 비교

        안장리(An Jang-Li) 한국역사민속학회 2011 역사민속학 Vol.36 No.-

        본고는 조선의 《新都八景》과 명나라 《京師八景》이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조선과 명나라 양국에서 도읍을 대상으로 창작되었으며, 모두 국가편찬 지리지에 수록한 점에 착안하여 창작 및 수록 배경, 수록 내용 등은 물론 시의 내용을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는 한편 그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瀟湘八景을 전범으로 삼아 탈속한 세계를 주제로 히는 팔경시의 경향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명나라와 조선은 건국 후 수도를 옮긴 뒤 새로운 도읍의 타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팔경시를 창작하였다. 또한 지리서 편찬에 있어서도 국토에 대한 찬시를 첨부하는 방식이 채용되어 관련 시들이 지리서에 수록되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에는 '題詠'條가 신설되어 국토를 대상으로 하는 팔경시가 대량으로 수록되었다. 이는 조선이 중국문화 수용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면모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新都八景》과 《京師八景》을 비교하면 명나라가 국방의 강화, 인재초빙, 자연스런 왕화 실현을 통한 선계 향유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조선에서는 국방의 강화나 성리학의 교화에 있어서 왕과 신하, 백성들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천년간 지속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이 지향한 세계상이 보다 실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新都八景》은 조선에서, 《京師八景》은 청나라는 물론 조선에까지 계속 창작되었는데 이와 같은 지속과 국가 편찬 지리지의 수록 등은 한중양국에서 팔경시의 유행을 공고히 하고 확대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This thesis compare 《Sin-do pal-gyeong》 in 『Dong-guk yeo-ji-seung-nam』 with 《Gyeong-sa pal-gyeong》 in 『Tae-myeong il-tong-ji』. Because the poets' subject is the capital of Joseon and Myeong. These were reported in the geography book compile by government. The 'pal-gyeong-si 八景詩', with capital was created by bureaucrat of the Joseon and Myeong for propaganda. Also pal-gyeong-si was considered a poem of the country praise. An 'je-yeong'contents was added in 『Dong-guk yeo-ji-seung-nam』, because chinese culture is embraced korea. The subject of 《Gyeong-sa pal-gyeong》 is three. The first is the reinforcement of national defence. The secend is a invitation of talented person, The third is enjoyment of an ideal world. The subject of 《Sin-do pal-gyeong》 is constructing an ideal world by king, bureaucrat and people. The ideal world of Joseon is more need participation. Since then, 《Sin-do pal-gyeong》 and 《Gyeong-sa pal-gyeong》 is created continuously. And it has enfluence the fashion of pal-gyeong-si in korea and china.

      • KCI등재

        영조어제의 봉모당 소장 양상 고찰

        안장리(An, Jang-li)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장서각 Vol.0 No.40

        본 논문에서는 영조어제 현황과 봉모당의 소장양상을 고찰하였다. 영조어제는 문집, 열성어제, 刊本, 帖本 등 4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문집을 시기별로 구분하면,『어제』 상(1714년~1747년 11월), 『영종대왕어제속편』(1758년 6월~1761년 6월), 『영종대왕어제』(1761년 8월~1763년 7월), 『어제』 하(1763년 8월~1764년 7월), 『集慶堂編輯』(1764년 11월~1767년 9월), 『속집경당편집』(1768년~1770년 8월). 『英宗大王御製拾遺』(1725~1776) 등이다. 이들은 정조 대 건립된 봉모당에 보관되었으며, 철종 대 이건된 봉모당에서 『집경당편집』만 후고에 보관되고 다른 어제들은 봉모당에 그대로 보관되었다. 『열성어제』의 영조어제는 先王인 숙종보다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없다는 이유로 1714년부터 1758년까지의 어제만 편찬하였고, 이를 영조 사후에 간행하였다. 이 역시 철종 대에는 후고에 보관되었다. 영조어제첩본은 『奉謨堂奉安御書總目』에 의하면 1741년부터 1776년까지의 어제로 이루어져 있으나 1770년 이후의 작품이 대부분이며 봉모당에 26개 함에 보관되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영조어제간본은 『奉謨堂奉藏書目』에 의하면 1741년 〈御製大訓〉 간행 이후 1776년까지 수시로 간행되었다. 역시 봉모당에 2개의 함에 보관되어 왔다. 현재 영조어제는 대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영조의 문집, 영조어제첩 등은 『英祖 · 莊祖文集』, 『英祖文集補遺』, 『英祖御製解題』 등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출판하였고, 영조어제간본, 열성어제 등은 『英祖御製訓書』, 『열성어제』 등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출판한 바 있다.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the current state of King Yeongjo’s creations and Bongmodang’s possession patterns of them. His creations consist of four types, which are his collections of works, Yeolseong creations, Gan versions and Cheop versions. His collections of works were divided by the period, and they were “Eoje” Sang (1714~November, 1747), “Yeongjongdaewangeojesokpyeon” (June, 1758~June, 1761), “Yeongjongdaewangeoje” (August, 1761~July, 1763), “Eoje” Ha (August, 1763~July, 1764), “Jipgyeongdangpyeonjip” (November, 1764~September, 1767), “Sokjipgyeongdangpyeonjip” (1768~August, 1770), and “Yeongjongdaewangeojeseupyu” (1725~1776). They were housed at Bongmodang that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Only “Jipgyeongdangpyeonjip” was transferred to the Hugo of Bongmodang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Cheoljong with the remaining creations preserved at the original one. In “Yeolseongeoje,” King Yeongjo’s creations only between 1714 and 1758 were published because he believed it would be wrong to publish more works than his predecessor King Sukjong. They were published after his death and housed at Hugo during the reign of King Cheoljong. According to “Bongmodangbonganeoseochongmok,” the Cheop versions of his creations included the ones created between 1741 and 1776 with most of them created after 1770. They were kept in 26 boxes at Bongmodang. According to “Bongmodangbongjangseomok,” the Gan versions of his creations were frequently published from 1741 when “Eojedaehun” was published to 1776. They were kept in two boxes also at Bongmodang. Today most of King Yeongjo’s creations are housed at Jangseogak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is personal collections of works and Eoje Cheops were published into “Collections of King Yeongjo’s and King Jeongjo’s Works,” “Boyu of King Yeongjo’s Collection of Works” and “Haeje of King Yeongjo’s Creations” by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Gan versions of his creations and Yeolseong Eojes were published into “Hunseo of King Yeongjo’s Creations” and “Yelseongeoje” by Kyujanggak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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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상팔경(瀟湘八景) 수용과 한국팔경시의 유행 양상

        안장리(An, Jang-Li)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4 한국문학과 예술 Vol.13 No.-

        중국 소상팔경 문화는 한국에 유행하여 문학, 미술, 조경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소상팔경문화가 한국에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문학 분야 한국팔경시를 대상으로 그 이유를 살펴보았으며, 일상성과 전범성의 원리에 의해 한국팔경시가 유행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고려 명종대 유입된 소상팔경은 중국 명승인 소상강지역의 여덟 경승을 시와 그림으로 향유하는 탈속적이고 고고한 문화의 전범이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소상팔경시를 시재를 겨루는 도구로 인식하게 하고 소상팔경에 등장하는 기러기를 사람들의 주살을 두려워하는 생활속의 경물로 변화시켜 친근하고 일상적인 경관으로 만들었다. 이제현은 중국에 있으면서 고국의 수도 송도를 팔경시의 대상으로 삼아 팔경의 한국화를 이루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고향, 부임지 등 주변 경관의 일상적인 모습을 팔경시로 읊는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한산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아 한산팔경시를 지었고 안축은 자신의 부임지인 삼척을 대상으로 삼척팔경시를 지었다. 한국팔경시의 유행은 한국팔경시의 전범화를 촉진시켜 자신의 목적을 선전하는 도구로서 한국팔경시를 활용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정도전은 새로운 도읍을 팔경시로 노래하였고, 김종직은 자기 고향 사람들의 유교 생활 실천을 천양하였다. 심지어 수양을 중요시한 사림들이 은거지에서의 수양생활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는데 까지 이르렀으며, 임금 또한 자신의 후원공간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는 등 한국팔경시는 일상화와 전범화의 원리에 의해 지역과 계층을 초월하여 유행하게 되었다. The Chinese culture of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was in vogue in Korea and had enormous impacts on Korean culture, art, and landscaping. What were the reasons behind its fashion in Korea? This study examined the reasons through the Palgyeong poetry of Korea and found that the poetry was in vogue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ordinariness and canonicity. Being introduced in Goryeo during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were a canon of unworldly and aloof culture to enjoy the eight picturesque sceneries of the Xiaoxiang River, one of the scenic spots in China, through poems and paintings. Lee Gyu-bo made the poetry of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perceived as a tool to compete over poetic materials and turned the wild geese in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into the natural features in life that were afraid of human arrows, thus making them as part of the familiar daily landscape. Staying in China, Lee Je-hyeon made Palgyeong a Korean style with the Palgyeong poems on Songdo, the capital of his home country. There was a trend in vogue which depicted the daily aspects of surrounding landscape such as one"s hometown and new post with Palgyeong poems. Lee Saek wrote Hansan Palgyeong poems with Hansan, his hometown, as the object of Palgyeong. Ahn Chuk wrote Samcheok Palgyeong poems with his new post Samcheok as the object. The fashion of Korean Palgyeong poetry facilitated its canonization and thus resulted in cases of using it as a tool to promote one"s goals. Jeong Do-jeon sang about the new capital with Palgyeong poems, and Kim Jong-jik spread the practice of Confucian life among the people of his hometown. Even the Sarims that valued cultivation made their cultivation life at the retirement places the object of Palgyeong, and the kings made their back gardens the object of Palgyeong. Those cases indicate that the Korean Palgyeong poetry was in vogue regardless of region and social clas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popularization and cano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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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祖御製 帖本 律文의 종류와 주제

        안장리(An Jang-li)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장서각 Vol.0 No.16

        이 논문은 영조어제 첩본 율문의 종류와 주제에 대해 고찰하였다. 영조어제는 간본과 첩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년 영조의 작품은 대부분 첩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영조어제가 첩본으로 보존된 것은 일차적으로 영조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즉 선왕인 숙종보다 많은 시문을 지을 수 없다고 하여 작품마다 첩으로 만들도록 하였던 것이다. 영조는 전통적인 시문을 짓지 않은 대신 독특한 산문과 율문의 작품을 남겼는데 율문의 형식은 3언, 4언, 5언, 6언, 잡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중에는 3언율문이 가장 많이 있는데 본고에서는 영조가 왜 굳이 3언 율문을 선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갈래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율문 3언 형식과 연관된 자료로는 실록의 비망기, 3언 한시, 악장, 가사 등을 들 수 있는데 비망기에는 신하와의 문답에서 3언으로 기록된 경우가 산견되었다. 3언한시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별로 유행하지 않았던 형식임을 확인하였다. 악장에서는 3언으로 이루어진 면이나 음악적 성격 등에서 관련성을 찾았다. 3언 율문의 교술성과 내외 3언을 1구로 설정하여 100언으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을 가사에 가까운 특성으로 보았다. 이처럼 다양한 갈래와 연관성을 보이는 영조어제첩의 율문은 영조에게는 눈어둡고 귀어두운 만년임에도 하루에 몇 편씩 지을 정도로 익숙한 글쓰기였다. 영조어제 첩본의 주제는 늙고 병들어 늘 약을 끼고 살았던 만년의 한탄이 주조를 이룬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노년의 처지, 질병의 고통, 가족에 대한 추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조 어제 첩본의 독특한 양식은 효심에서 시작되었으나 자기에게 맞는 문체의 창조로 나아갔다. 즉 3언 율문은 오랜 실험 과정을 거쳐 80세에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는 한문으로 표현되었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가창 방법 모색의 일환으로 수립되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영조어제 첩본 5천여편이 십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창작될 수 있었던 것은 대상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전이되었으며, 특별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일상적 경험과 추억을 그대로 읊었기에 하루에도 몇 편씩 자술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The paper intends to explain the form and subject of the poetry in King Yongjo's album. The works of King Yongjo was composed with book and album. and the most of that is album. Yongjo did not want to write more works than his father. So he write differnet style. It is composed with three chinese charicters, four chinese charicters, five chinese charicters, six chinese charicters, mix chinese charicters. The most of that is three chinese charicters, At first, he write four chinese charicters for the most part. But after A.D.1771, he write three chinese charicters, The form of three chinese charicters is various. The first is the Bi mang gi (備忘記) that is recorded in Veritable Records of Choseon dynasty. The second is three chinese charicters which was ancient chinese poems. The Third is music texts which existed at early Choseon dynasty. The forth is Gasa(歌辭) which was extended until 100 characters. The subject of three chinese charicters is four. The first is lamenting for the later life. The second is physical pain with disease. The third is look back upon the memory of his late familly. The forth is discontented with the way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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