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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의 인물전(人物傳) 일고(一考)

        안장리 ( Jang Li An ) 연민학회 2012 淵民學志 Vol.17 No.-

        본고에서는 연민의 『韓國名人小傳』과 『李朝名人列傳』 등 인물전을 통해 역사서 기술의 기반이 되는 역사관과 인간관을 고찰하였다. 연민의 인물전은 인물사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669명이라는 많은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역사 전개에 있어서 다양한 계층, 다양한 역량의 필요성을 인정한 연민의 역사관 때문으로 여겨진다. 연민 인물전은 개개 인간의 총체적인 면모를 밝히기 보다는 역사적 상황에서의 거취를 중시하고 있다. 연민의 인물전에서 정몽주는 대의를 위해 순절한 인물로, 정도전은 고려를 배반하고 나아가 조선에서도 반역의 기치를 올린 출세주의자로 부각되어 있다. 연민은 인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혈통과 학통을 연계지어 역량을 평가하였고, 성리학·문장·벼슬 등 당대의 잣대를 인물 평가의 기본으로 삼았지만 미천한 신분의 중인, 하찮게 여겨지던 예술가 그리고 반역자의 경우도 과학이나 문장 등에 있어서 실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작품을 남겼거나 세상의 부조리를 개혁하려 하였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국애족의 거취에 최상의 가치를 두었다. 본고에서는 연민의 인물전이 신분이 높은 기득권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 즉, 사화와 당쟁으로 점철된 역사, 정치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안용복과 같은 미천한 애국자가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연민은 인재가 쓰이지 못하는 시대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 우리나라가 인재가 많은 나라라는 자부심을 그려냈는데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아울러 본고에서는 연민이 인물전에서 野史에 전하는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이면적 모습을 흥미있게 소개하였음을 밝혔다. Yeonmyeon tried to write a history like Sima Quan`s 『Shiji (historical records)』. But, he didn`t leave a history. Therefore, this study considered Yeonmyeon`s view of history and man through his 『Brief biographies of Korea Master 』and 『Lee Dynasty Master series 』. Because it is the basis of describing a history. Even though Yeonmyeon`s Inmuljeon(Peoples) is not a figure dictionary, it has a characteristic to treat a large quantity of 1669 figures. This is due to Yeonmyeon`s view of history in which he recognized the necessary of different class and ability. This article determined that Yeonmyeon`s Inmuljeon(Peoples) has the characteristic to consider very important in one`s position in the historical context rather than define the total aspect of an individual people. Then, Yeonmyeon estimated that Jeong mong-ju was the man who died for his loyalty, on the contrary to this, Jeong do-jeon was a status seeker who betrayed the Kingdom of Goryeo, furthermore raised up the treason to Joseon Dynasty also. For explaining a man, he estimated an ability connecting a family to a scholastic mantle, and a people based on the criterion that was used in that time such as Neo-Confucianism, a sentence and government post, however, he also estimated a man who was a lowly status such as the public, or an artist who was supposed to be non-person, and even a betrayer as being worth enough, if they had a good ability in a science and a sentence, or left a good work, or tried to revise the irrationality in the World. Moreover, he had put the devotion to one`s country and to ones people on the best value. This is also because the purpose of writing the Inmuljeon was based on the devotion to Yeonmyeon`s country and to his people. This paper determined that Yeonmyeon`s Inmuljeon carried on the spirit of scholar of the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in the lad of Joseon Dynasty, which drew the country where has the absurdity of the age when a talented person is not used and great pride what the country has many talented person. In addition, this study has found that in the Inmuljeon, Yeonmyeon interestingly introduced various peoples and the hidden side of them who appeared in a history by understanding that the humble patriot, such as An yong-bok, didn`t have a post to stand in the historical presentation based on history and politics which was riddled with a series of a historical story and political strife recorded by the privileged class of high sta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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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근(權近)이 추구한 유교국가의 국왕상(國王像) 고찰

        안장리(An, Jang-Li) 포은학회 2015 포은학연구 Vol.1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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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조선이 유교국가가 되는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교국가의 키워드를 국왕으로 보고 조선 초기 대표적인 유학자 권근이 정립하려고 하는 국왕상을 조명해 보았다. 권근은 유학관련 저술과 상소를 통해 유교국가의 이상적인 국왕의 면모를 제시하였다. 본고에서는 권근의 저술중『서천견록(書淺見錄)』과『시천견록(詩淺見錄)』, 그리고 상소 중에는 우왕에게 올린 3편의 상소와 정종에게 올린 1편의 상소 그리고 태종에게 올린 3편의 상소를 대상으로 하였다. 본고에서는 권근이 이들 상소에서‘하늘, 부모, 백성, 자신, 신하’ 등 5요소에 대한 국왕의 태도 정립을 요구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국왕상의 면모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권근이『서천견록』, 『시천견록』등 경서에 대한 견해에서 제시한 국왕상은 공경의 마음과 구덕(九德)을 갖추고 전조(前朝)의 신하들을 포용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18세의 혈기방정한 나이에 권신의 꾀임으로 정사를 게을리 하고 놀이에 빠진 고려 우왕에게 요구한 국왕상은 밤에 자고 낮에 깨어있으며 바른 자세로 덕성을 함양하는 수양의 자세였다. 그러나 우왕은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다 결국 24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정종에 대해서도 재미에 탐닉하지 말고 국왕으로서의 체통을 지킬 것을 건의하였다. 정종은 2차례의 걸친 왕자의 난이라는 격동 속에 곧 왕좌에서 물러났다. 태종에게는 국왕으로서의 자기 성찰과 학문정진, 부지런한 정사 외에 전조에 절의를 지킨 신하에 대한 포상과 왕과 백성을 위해 죽었음에도 제사할 후손이 없는 인물에 대한 여제(厲祭) 등을 베푸는 국왕상을 제시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태종은 정몽주와 같이 자신이 죽인 전조의 신하를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조 위에 ‘절의’라는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유교국가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권근은 우왕대부터 끊임없이 경연을 강조하는데 이는 성리학을 뿌리내리려는 조선 초기 상황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국왕을 만들려는 성리학자 권근의 기본적인 의도였다. 태종은 권근이 건의한 효의 강조 그리고 전조의절의에 대한 포상 등을 통해 유교국가의 기틀인 충효를 장려하고 실천하는 국왕상을 정립하게 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process of Joseon becoming a Confucian country. Under the goal, the study set kings as one of the keywords of Confucian country and examined the image of kings that Gwon Geun, one of the utmost Confucian scholars in the early days of Joseon, tried to establish. Gwon proposed the aspects of ideal king in a Confucian country by writing Confucianism-related books and submitting memorials. The study looked into two of his books, Seocheongyeonrok and Shicheongyeonrok, and seven of his memorials, which include three submitted to King Woowang, one to King Jeongjong, and three to King Taejong. Recognizing that he demanded that kings should establish an attitude toward five elements of “Heaven, parents, people, themselves, and subjects” in his memorials, the investigator examined what kind of attitude requested by him. In his views of Confucian classics in his Seocheongyeonrok and Shicheongyeonrok, he proposed an image of kings that had a heart of respect and nine virtues and was capable of embracing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In his memorial submitted to King Woowang of Goryeo, he especially emphasized cultivation of “oneself” to the king that was idle with political affairs and immersed in play at the age of hot-blooded 18 due to the temptations of a powerful courtier. Although he stressed that the king should cultivate his virtues in the right posture, sleeping at night and being awaken during the day, the king kept leading a dissipated life and ended up being killed by poison ordered as a death penalty at the age of 24. Gwon also suggested to King Jeongjong that he should prevent himself from indulging in fun and maintain his dignity as a king. The king was faced with a turmoil of prince’s uprising twice and ended up coming down from the throne. He proposed to King Taejong that he should work on self-reflection, devotion to study, and diligence with political affairs as a king, give rewards to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that adhered to their principles, and hold a memorial service for those who died for the king and people and had no descendents to hold such a service for them. Gwon wanted that the king would grant rewards to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that he killed such as Jeong Mong-ju, establish a concept of “fidelity” above country and dynasty, and solidify a foundation for a Confucian country that placed the highest values on ideology. Gwon continued to emphasize lecturing and study with kings since the reign of King Woowang, which was his basic intention as a Neo-Confucian scholar to equip a king with Neo-Confucianism in the early days of Joseon when Neo-Confucianism was about to take root in the country. By proposing an image of kings to Kings Jeongjong and Taejong, he established an image of kings that encouraged and practiced loyalty and filial piety, which were parts of the foundation of a Confucian country, by stressing filial piety and giving rewards for loyalty to the previous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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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英祖) 궁궐 인식의 특징

        안장리(An Jang-li)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한국학 Vol.29 No.3

        본고에서는 영조 이전 시기 위정자들이 궁궐명명의 기준을 국가의 공적공간임을 표상하여 ‘국가의 융성,’ ‘유가 덕목,’ ‘승경의 향유,’ ‘건물의 기능’ 등에 두었으나 영조는 궁궐의 일부 건물을 사적 공간으로 인식하여 개인적 추억과 추모를 궁궐 명명의 기준으로 두었음을 밝혔다. 또한 이와 같은 명명의 배경으로 영조 만년 생활의 특징인 정침이 아닌 집경당에서의 30년 생활, 어제의 다작(多作)과 독특한 문체 창조 등을 들었다. 영조가 경희궁의 정침(正寢)인 융복전(隆福殿) 보다 회상전(會祥殿)을 숙종(肅宗)의 상징물로 여긴 이유는 영조가 7년간 ‘억석와(憶昔窩)’라 이름 붙인 사알방(司謁房)에서 회상전의 선왕을 시탕(侍湯)했기 때문이며, 보경당(寶慶堂)을 ‘탄생당(誕生堂)’이라 명명한 이유는 생모에 대한 예우로 붙인 것으로 보았다. 경선당(慶善堂)은 왕자의 거처였는데 영조는 부모에게 귀여움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부모에 대한 ‘추모당(追慕堂)’이라 명명하였다. 집경당(集慶堂)은 영조 만년의 생활 공간으로 본래 예연당(蘂淵堂)이던 이름을 숙종이 집경당으로 개명하였고 영조는 종용당(從容堂), 정와당(靜臥堂) 등의 별명을 붙였다. 함일재(咸一齋)는 창의궁(彰義宮)의 한 건물로 영조는 이 ‘구저(舊邸)’를 자식과 손자까지 추모하는 가족 추모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이외에도 영조는 궁궐 주변 경물 중 본인과 관계된 곳을 ‘추모동(追慕洞),’ ‘추모현(追慕峴)’ 등으로 명명하여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특성을 일반성으로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는 궁궐을 왕으로서의 위정 공간으로 여기거나 개인적 건물을 사대부의 자성공간으로 삼아 명명하던 방식과는 아주 달라진 양상이다. 이로 볼 때 조선후기의 구체적 실상과 일상성을 중시하던 풍조는 왕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This thesis is intended to show the trait of King Youngjo. Jeong do jeon (鄭道傳), King Saejo(世祖), King Injo(仁祖), King Sukjong(肅宗), the politician thought the palace as governmental place. So each building in the palace was called as 'prosperity of nation', 'Confucianism', 'participate with beautiful scenery', 'the purpose of each building'. King Youngjo regarded the palace as a symbol of his private place. He named Salbang(司謁房) Eokseokwa(憶昔窩). That was continuous with his father. He named Bokyungdang(寶慶堂) Tansaeingdang(誕生堂) not as an expression of self-pride but as a filial gesture to his birth mother. He named Kyungsondang(慶善堂) Choomodang(追慕堂) as it reminded him of his childhood. Jipkyungdang(集慶堂) was a place where King Youngjo worked at his advanced age. He named it Jongyoungdang(從容堂) or Jeongwadang(靜臥堂). This testifies to the trend of the late Chosun dynasty when routines were highly regarded both outside and inside of the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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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韓中) 시문선집에 수록된 정몽주 시문의 위상과 특징

        안장리(An, Jang Li) 포은학회 2020 포은학연구 Vol.26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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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는 정몽주의 작품이 수록된 조선과 중국의 시문선집을 고찰하였다. 정몽주 시문이 수록된 선집으로 우리나라 김종직의 『청구풍아』와 서거정의 『동문선』, 남용익의 『기아』, 장지연의 『대동시선』 그리고 중국 남방위의 『조선시선』, 오명제의 『조선시선』, 전겸익의 『열조시집』, 주이존의 『명시종』등을 고찰하였다. 『청구풍아』와 『동문선』은 모두 정몽주의 시를 많이 수록하였는데 『청구풍아』는 125명 중 제9위였고, 『동문선』은 388명 중 제6위였다. 내용상으로는 모두 사행시가 많았으나 『청구풍아』는 철리시와 악부시, 『동문선』에는 종군시, 변새시, 자연시 등을 수록한 차이가 있었다. 『기아』와 『대동시선』은 수록내용이 비슷한데 기존 시선집에 비해 적은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호방함을 드러내는 시 위주로 선정하는데 그쳤다. 남방위와 주이존의 선집에는 오류가 많아 오명제와 전겸익의 선집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오명제의 『조선시선』에 수록된 113명의 우리나라 시인 중 정몽주의 작품수는 제2위였으며, 『열조시집』은 제3위였다. 그러나 허균의 영향이 컸던 이 시선집에서 허균의 스승인 이달과 누이인 허난설헌을 제외하면 정몽주가 모두 제1위이다. 중국시선집의 경우 우리나라에 비해 적은 편수가 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제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열조시집』은 충신 정몽주의 면모를 강조한 특징이 있다.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collections of poetry and prose works containing Jeong Mong-ju s works published in Joseon and China. The collections containing his poems include Cheonggupunga by Kim Jong-jik, Dongmunseon by Seo Geo-jeong, Gia by Nam Yong-ik, and Daedongsiseon by Jang Ji-yeon in Joseon and Anthology of Joseon by Nambangwi, Anthology of Joseon by Omyeongje, Yeoljo Collection of Poems by Jeongyeomik, and Myeongsijong by Juijon in China. Both Cheonggupunga and Dongmunseon have many of Jeong Mong-ju s poems. He ranked No. 9 of 125 writers whose works were published in Cheonggupunga and No. 6 of 388 in Dongmunseon. In terms of content, many of his poems in these collections are envoy poems. Cheonggupunga also presents his Cheoli and Akbu poems, while Dongmunseon features his poems about service in a war, soldiers in the frontier, and nature, as well. Gia and Daedongsiseon chose Jeong s poems similar in content. They contain relatively fewer poems of Jeong than previous collections and focus on his poems displaying his magnanimous nature. Since there were many errors with the collections by Nambangwi and Juijon, the present study reviewed mainly the collections by Omyeongje and Jeongyeomik. Of 113 Korean poets whose works are published in Anthology of Joseon by Omyeongje, Jeong recorded No. 2. He also recorded No. 3 in Yeoljo Collection of Poems, which was deeply influenced by Heo Gyun. Except for Lee Dal, Heo s teacher, and Heo Nanseolheon, his sister, Jeong recorded No. 1 in terms of works published in the collection. The collections published in China contain a smaller number of Jeong s works than their Joseon counterparts, but there are his poems of more diverse topics published in them. Yeoljo Collection of Poems, in particular, puts an emphasis on Jeong s aspects as a loyal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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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신에 대한 서민층과 사대부층의 인식 비교

        안장리(An, Jang-Li) 한국역사민속학회 2010 역사민속학 Vol.- No.33

        설화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설화는 허구이기도 하지만 사대부들이 집필한 역사의 이면을 드러냄으로써 총체적인 역사를 완성하게 한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본고는 이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설화연구의 문제점을 짚어보려 하였다. 즉, 설화연구에서는 서민과 사대부를 분리시켜 이해하되 설화 연구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다른 부분을 평가하려는 편파적 태도가 노정되는 듯하다. 이는 동아시아문명권 시대인 중세에 대한 근대적 평가의 왜곡과 궤를 같이한다. 근대에서는 중국과 한국이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국가 간의 차별의식이 엄연했고 중국은 언제나 문명의 중심지요 대국이었으며, 한국은 문명의 주변이요 小國임으로써 조선에는 언제나 상대적 열등감이 내재해 있지 않았겠냐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중세는 근대와 같은 국기위주의 차별성보다는 문명단위의 동질성을 중시한 시대였다. 본고에서는 중세 한중관계의 대표적 통로인 ‘중국사신’과 이에 대한 사대부층과 서민층의 ‘기록’과 ‘설화’를 비교하여 위와 같은 평가의 진위를 가리고자 하였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동아시아문명권에 속해있었으므로 문명권의 중심인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였고 그 직접적 통로라 할 수 있는 사신과의 교류는 중요한 역사기록의 대상이었다. 또한 중국사신의 내왕은 서민설화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중국사신에 대한 식자층의 ‘기록’과 서민층의 ‘설화’를 비교하여 중국사신과 우리 접반사의 관계에 대한 당대 지배층과 서민의 인식을 살펴보았다. 朝明時期를 특별히 선택한 이유는 양국교류에서 당대 사신교류의 의미가 가장 컷기 때문이다. 조명시기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국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설화연구에서 평가한 것처럼 중국사신설화를 현실적 패배를 정신적으로 극복한 ‘허구적’ 민중의 설화로 평가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 사대부들은 漢文儒敎文明圈으로서의 동질성을 확보한 뒤에 비로소 우열 경쟁이 가능했던 당대 상황을 인식하고 동질성 확인을 거쳐 우월성을 차지하려하였고 서민들은 우열성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간 것뿐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문장 수창을 통해 외교적 관계에 대처한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고, 서민들은 중국사신을 물리치는 설화를 통해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강화한 셈이다. Fictional oral tradition is seen to have contributed to showing the whole history, revealing the other side of what was recorded. The thesis is intended to explore the problems with the study on fictional oral tradition. Fictional oral tradition is discussed from the two discrete perspectives of ordinary men and the men of noble birth. The modern evaluation of the middle ages, which is characterized by Chinese character civilization, has been less than perfect. It has been argued that despite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Korea, China always remained the center of civilization, a world power and Korea was on the periphery of civilization and a small country with an inferiority complex. But the middle ages put more emphasis on homogeneity of civilizations than on the national identity. This study attempts to verify the evaluation, making comparison between the "record" of men of noble birth and "fictional oral tradition" of ordinary men regarding "Chinese envoys," the main channel between China and Korea. Belonging to Confucius Chinese civilizationfor a long time, Korea valued the relationship with China. Envoy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not only the object of historical record but also the main theme of ordinary fictional oral tradition. By making the comparison, the study attempts to show the perceptions of the ruling elite and the general public on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ese envoy receivers and Chinese envoys. The ruling elite of the Chosun at the age of Ming was very proud of their civilization. Therefore, the view that Korean elite overcame their inferiority complex with fictional oral tradition should be challenged. The ruling elite of Chosun dynasty tried first to affirm homogeneity and then superiority. On the contrary, the ordinary people tried to confirm and reinforce superiority of Chosun. The rulingelite of Chosun tried to resolve diplomatic issues by exchanging poems while ordinary men tried to confirm Chosun"s pride through the fictional oral tradition in a practical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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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增東國輿地勝覽』의 《新都八景》과 『大明一統志』의 《京師八景》 비교

        안장리(An Jang-Li) 한국역사민속학회 2011 역사민속학 Vol.36 No.-

        본고는 조선의 《新都八景》과 명나라 《京師八景》이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조선과 명나라 양국에서 도읍을 대상으로 창작되었으며, 모두 국가편찬 지리지에 수록한 점에 착안하여 창작 및 수록 배경, 수록 내용 등은 물론 시의 내용을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는 한편 그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瀟湘八景을 전범으로 삼아 탈속한 세계를 주제로 히는 팔경시의 경향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명나라와 조선은 건국 후 수도를 옮긴 뒤 새로운 도읍의 타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팔경시를 창작하였다. 또한 지리서 편찬에 있어서도 국토에 대한 찬시를 첨부하는 방식이 채용되어 관련 시들이 지리서에 수록되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에는 '題詠'條가 신설되어 국토를 대상으로 하는 팔경시가 대량으로 수록되었다. 이는 조선이 중국문화 수용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면모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新都八景》과 《京師八景》을 비교하면 명나라가 국방의 강화, 인재초빙, 자연스런 왕화 실현을 통한 선계 향유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조선에서는 국방의 강화나 성리학의 교화에 있어서 왕과 신하, 백성들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천년간 지속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이 지향한 세계상이 보다 실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新都八景》은 조선에서, 《京師八景》은 청나라는 물론 조선에까지 계속 창작되었는데 이와 같은 지속과 국가 편찬 지리지의 수록 등은 한중양국에서 팔경시의 유행을 공고히 하고 확대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This thesis compare 《Sin-do pal-gyeong》 in 『Dong-guk yeo-ji-seung-nam』 with 《Gyeong-sa pal-gyeong》 in 『Tae-myeong il-tong-ji』. Because the poets' subject is the capital of Joseon and Myeong. These were reported in the geography book compile by government. The 'pal-gyeong-si 八景詩', with capital was created by bureaucrat of the Joseon and Myeong for propaganda. Also pal-gyeong-si was considered a poem of the country praise. An 'je-yeong'contents was added in 『Dong-guk yeo-ji-seung-nam』, because chinese culture is embraced korea. The subject of 《Gyeong-sa pal-gyeong》 is three. The first is the reinforcement of national defence. The secend is a invitation of talented person, The third is enjoyment of an ideal world. The subject of 《Sin-do pal-gyeong》 is constructing an ideal world by king, bureaucrat and people. The ideal world of Joseon is more need participation. Since then, 《Sin-do pal-gyeong》 and 《Gyeong-sa pal-gyeong》 is created continuously. And it has enfluence the fashion of pal-gyeong-si in korea and china.

      • KCI등재후보

        英祖御製 帖本 律文의 종류와 주제

        안장리(An Jang-li)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장서각 Vol.0 No.16

        이 논문은 영조어제 첩본 율문의 종류와 주제에 대해 고찰하였다. 영조어제는 간본과 첩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년 영조의 작품은 대부분 첩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영조어제가 첩본으로 보존된 것은 일차적으로 영조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즉 선왕인 숙종보다 많은 시문을 지을 수 없다고 하여 작품마다 첩으로 만들도록 하였던 것이다. 영조는 전통적인 시문을 짓지 않은 대신 독특한 산문과 율문의 작품을 남겼는데 율문의 형식은 3언, 4언, 5언, 6언, 잡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중에는 3언율문이 가장 많이 있는데 본고에서는 영조가 왜 굳이 3언 율문을 선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갈래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율문 3언 형식과 연관된 자료로는 실록의 비망기, 3언 한시, 악장, 가사 등을 들 수 있는데 비망기에는 신하와의 문답에서 3언으로 기록된 경우가 산견되었다. 3언한시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별로 유행하지 않았던 형식임을 확인하였다. 악장에서는 3언으로 이루어진 면이나 음악적 성격 등에서 관련성을 찾았다. 3언 율문의 교술성과 내외 3언을 1구로 설정하여 100언으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을 가사에 가까운 특성으로 보았다. 이처럼 다양한 갈래와 연관성을 보이는 영조어제첩의 율문은 영조에게는 눈어둡고 귀어두운 만년임에도 하루에 몇 편씩 지을 정도로 익숙한 글쓰기였다. 영조어제 첩본의 주제는 늙고 병들어 늘 약을 끼고 살았던 만년의 한탄이 주조를 이룬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노년의 처지, 질병의 고통, 가족에 대한 추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조 어제 첩본의 독특한 양식은 효심에서 시작되었으나 자기에게 맞는 문체의 창조로 나아갔다. 즉 3언 율문은 오랜 실험 과정을 거쳐 80세에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는 한문으로 표현되었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가창 방법 모색의 일환으로 수립되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영조어제 첩본 5천여편이 십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창작될 수 있었던 것은 대상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전이되었으며, 특별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일상적 경험과 추억을 그대로 읊었기에 하루에도 몇 편씩 자술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The paper intends to explain the form and subject of the poetry in King Yongjo's album. The works of King Yongjo was composed with book and album. and the most of that is album. Yongjo did not want to write more works than his father. So he write differnet style. It is composed with three chinese charicters, four chinese charicters, five chinese charicters, six chinese charicters, mix chinese charicters. The most of that is three chinese charicters, At first, he write four chinese charicters for the most part. But after A.D.1771, he write three chinese charicters, The form of three chinese charicters is various. The first is the Bi mang gi (備忘記) that is recorded in Veritable Records of Choseon dynasty. The second is three chinese charicters which was ancient chinese poems. The Third is music texts which existed at early Choseon dynasty. The forth is Gasa(歌辭) which was extended until 100 characters. The subject of three chinese charicters is four. The first is lamenting for the later life. The second is physical pain with disease. The third is look back upon the memory of his late familly. The forth is discontented with the way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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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장르변형 글쓰기

        안장리(Jang Li An)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5 동방학지 Vol.130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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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상팔경(瀟湘八景) 수용과 한국팔경시의 유행 양상

        안장리(An, Jang-Li)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4 한국문학과 예술 Vol.13 No.-

        중국 소상팔경 문화는 한국에 유행하여 문학, 미술, 조경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소상팔경문화가 한국에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문학 분야 한국팔경시를 대상으로 그 이유를 살펴보았으며, 일상성과 전범성의 원리에 의해 한국팔경시가 유행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고려 명종대 유입된 소상팔경은 중국 명승인 소상강지역의 여덟 경승을 시와 그림으로 향유하는 탈속적이고 고고한 문화의 전범이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소상팔경시를 시재를 겨루는 도구로 인식하게 하고 소상팔경에 등장하는 기러기를 사람들의 주살을 두려워하는 생활속의 경물로 변화시켜 친근하고 일상적인 경관으로 만들었다. 이제현은 중국에 있으면서 고국의 수도 송도를 팔경시의 대상으로 삼아 팔경의 한국화를 이루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고향, 부임지 등 주변 경관의 일상적인 모습을 팔경시로 읊는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한산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아 한산팔경시를 지었고 안축은 자신의 부임지인 삼척을 대상으로 삼척팔경시를 지었다. 한국팔경시의 유행은 한국팔경시의 전범화를 촉진시켜 자신의 목적을 선전하는 도구로서 한국팔경시를 활용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정도전은 새로운 도읍을 팔경시로 노래하였고, 김종직은 자기 고향 사람들의 유교 생활 실천을 천양하였다. 심지어 수양을 중요시한 사림들이 은거지에서의 수양생활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는데 까지 이르렀으며, 임금 또한 자신의 후원공간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는 등 한국팔경시는 일상화와 전범화의 원리에 의해 지역과 계층을 초월하여 유행하게 되었다. The Chinese culture of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was in vogue in Korea and had enormous impacts on Korean culture, art, and landscaping. What were the reasons behind its fashion in Korea? This study examined the reasons through the Palgyeong poetry of Korea and found that the poetry was in vogue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ordinariness and canonicity. Being introduced in Goryeo during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were a canon of unworldly and aloof culture to enjoy the eight picturesque sceneries of the Xiaoxiang River, one of the scenic spots in China, through poems and paintings. Lee Gyu-bo made the poetry of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perceived as a tool to compete over poetic materials and turned the wild geese in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into the natural features in life that were afraid of human arrows, thus making them as part of the familiar daily landscape. Staying in China, Lee Je-hyeon made Palgyeong a Korean style with the Palgyeong poems on Songdo, the capital of his home country. There was a trend in vogue which depicted the daily aspects of surrounding landscape such as one"s hometown and new post with Palgyeong poems. Lee Saek wrote Hansan Palgyeong poems with Hansan, his hometown, as the object of Palgyeong. Ahn Chuk wrote Samcheok Palgyeong poems with his new post Samcheok as the object. The fashion of Korean Palgyeong poetry facilitated its canonization and thus resulted in cases of using it as a tool to promote one"s goals. Jeong Do-jeon sang about the new capital with Palgyeong poems, and Kim Jong-jik spread the practice of Confucian life among the people of his hometown. Even the Sarims that valued cultivation made their cultivation life at the retirement places the object of Palgyeong, and the kings made their back gardens the object of Palgyeong. Those cases indicate that the Korean Palgyeong poetry was in vogue regardless of region and social clas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popularization and cano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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