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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영당의 건립과 변천

        홍순석(hong, soon seuk) 포은학회 2021 포은학연구 Vol.28 No.-

        포은을 제향하는 곳은 서원(書院), 사(祠), 영당(影堂)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데, ‘영당’이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은 용인시 모현읍의 포은영당 뿐이다. 지척에 충렬서원이 있는데 별도로 포은영당이 존치되고 있음을 보면, 사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가묘에 영정을 봉안한 사례인 셈이다. 포은영당의 경우 몇 가지 점에서 이례적이다. 처음 건립 당시에는 종가의 가묘(家廟)와 별도로 영당이 존치되었고, 한때는 종가의 가묘와 혼재된 상태에서 제향을 행하였다. 현재는 한 채의 건물을 3칸으로 구분하여 중앙에 영정을 봉안하고, 좌측 칸에는 신위와 제구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한다. 우측 칸은 종손의 4대 봉사를 행하는 가묘로 사용한다. 포은영당은 포은종택과 함께 역대 사손(嗣孫)이 관리해 왔던 것 같다. 포은영당은 포은종택과 함께 수차 이건하였다. 포은영당의 건립과 운영 등을 살피기 위해선, 포은종가의 세거지와 종택, 봉사손의 입계(入繼), 영정의 이모(移模) 등이 우선 살펴져야 하는 이유이다. 조선시대의 중종 이후 고종 때까지 역대 임금은 포은선생의 영당과 묘역에 예관(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특히 숙종은 여러 관료들과 논의한 끝에 제문(祭文)의 두사(頭辭)를 ‘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로 쓰게 하였다. 19세기 이후 포은 종손이 용인에 거주하면서 포은영당을 포은종가 좌측에 별도로 건립하고, 제례를 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포은영당 초기 건립시 문제되었던 것처럼 종가의 가묘(家廟)와 포은영당이 구분되지 않은, 한 채의 건축물이다. 포은영당을 포은종가의 가묘와 분리해서 독립적 사우(祠宇)로 복원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의 제의(祭儀)도 사시제(四時祭)로 복원하여 묘제(墓祭)가 아닌 묘제(廟祭)로 환원해야 마땅하다. 포은영당의 의례는 우리나라 사대부가(士大夫家) 부조묘(不祧廟)의 의례에 규범이 되어야할 사례라고 생각한다. 향후 독립된 포은영당의 복원과 의례의 규범이 정립되길 기대한다. A place to hold memorial services of Poeun has used name Seowon(書院), shrine(祠), portrait hall(影堂), just Poeun’portrait hall, located in Mohyeon-eup in Yongin si, uses the name ‘portrait hall(影堂)’. Even if Chungnyeol Seowon is located close, Poeun’portrait hall is maintained separately. Poeun’portrait hall is not a case of Sawoo s point of view but a case that the picture of the deceased is preserved in families shrine. Poeun’portrait hall is anomalous in some respects. When it was built first, a shrine hall is maintained separately from families shrine of the head family. Holding memorial services is conducted once in the mixed state of family shrine of the head family. Now, the picture of the deceased is enshrined in the center of a building separated in three. On the left room, deity and ritual utensil is kept while the right room is used as families shrine performing the four-ceremonies of direct descendant of Poeun. Poeun’portrait hall and the head house of Poeun seem to be managed by former direct descendant of Poeun. Poeun’portrait hall and the head house of Poeun moved and rebuilt in several times. In order to examine the construction and management of Poeun’portrait hall, family settlement of Poeun’head family and the head house, inherit of a descendant offering sacrifice to his ancestors, copy of the picture of the deceased should be examined first. Former kings, from Jungjong(中宗) to Gojong(高宗) in Joseon Dynasty, sent Ye-gwan(禮冠) and conducted ceremonies in Poeun’portrait hall and cemetery. Especially, King Sukjong ordered to write a funeral oration of headword as ‘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 after debating with several officials. Since the 19th century, the descendants of Poeun have been living in Yongin, and the Poeun’portrait hall(圃隱影堂) has been built separately on the left side of the Poeun’royal family(圃隱宗家) to hold ancestral rites. As was the problem with the early construction of Poeun’portrait hall in the Joseon Dynasty, it is a single building that does not distinguish between the royal family and Poeun’portrait hall. It is proposed to separate the Poeun’portrait hall from the Poeun’royal family and restore it as an independent private residence. The present ritual should also be restored to the four seasons system and reduced to a shrine rites (廟祭) rather than graveyard ritual (墓祭).

      • KCI등재

        포은 한시를 통해 본 포은의 불교 인식

        변종현(Byun, Jong-hyun) 포은학회 2014 포은학연구 Vol.14 No.-

        포은 정몽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포은은 교조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불교에 대한 이해 역시 깊다고 보았고, 불교와의 교섭·조화 등의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호불(好佛), 지불(知佛), 친불적(親佛的)인 인물로 거론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에 의문점을 가지고 포은이 남겨 놓은 시 작품 가운데 친불교적이라는 시들과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낸 시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포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조선 초기 태종대에 이르러 권근의 상소에서 변화가 시작되어, 포은을 송의 문천상에 비유하여 절의(節義)지사로 추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포은에 대한 인식은 난신과 충신의 인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완결이 고려사의 제신전(諸臣傳) 입전이라는 것이다. 즉, 특히 반역전도 충신전도 아닌 제신전(諸臣傳)의 입전은 이러한 이중적 구도가 반영된 결과물로 볼 수가 있겠다. 포은은 중국과 일본에 사행을 다니면서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중국 중심의 천하를 마음에 두면서 일찍부터 중국의 한족(漢族)이 이룩한 문물을 고려가 받아들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포은은 이처럼 친명(親明)외교를 통하여 고려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감을 이룩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였던 것 같고,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성리학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도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고려말 포은의 이러한 친명외교 전략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한족이 이룩한 중화(中華)중심의 문화와 제도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조선 후기 우리 선조들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포은은 우리나라의 성리학의 터전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소중화 의식을 갖게 만든 원천적 정신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라 여겨진다. 『고려사』정몽주전에 나타난 포은의 주요한 업적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사회를 유학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수도인 개성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하여 유학(儒學)하는 분위기를 진흥시키려 했다. 그리고 성균관(成均館)의 교관(敎官)을 맡으면서 학자들이 모여 서로 토론하면서 성리학적 이치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나가게 되었다. 포은이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인식을 관물(觀物)과 궁리(窮理)를 통해 체득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등의 작품은 춘추․주역․시경․중용 등의 경전을 읽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보기도 하고, 경전의 이치를 시를 통해 다시 음미해 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찰은 종교적인 공간을 넘어서 학습의 공간이나 수양의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관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있었지만 개경에 십이도가 설립되어 사학이 발달한 시기였다. 사학의 학습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하천도회(夏天都會)였다. 즉, 십이도(十二徒)들은 제각기 속해 있던 재에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여름철이 되면 개성의 귀법사(歸法寺)와 용흥사(龍興寺) 등에 모여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찰이라는 공간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학습과 수양, 그리고 안신(安身)의 공간 등으로 활용되었다. 스님과의 교류도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포은은 스님들에게 준 시에서 불교의 진리를 찾는 방법이나 불교 교리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시들이 있다. 에서는 우왕과 공양왕 때 국사(國師)를 지낸 보각국사 혼수(混修)에게 포은은 불교의 진리체계가 환망(幻妄)으로 귀착된다고 비판하였고, 에서는 현상적인 자연을 버려두고 참선에 들어가는 스님의 구도(求道) 방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암권자(古嵒卷子)>는 고암스님의 설법이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고, 에서도 포은은 원조스님에게 불교에서 말하는 도와 마음을 비유한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처럼 포은은 불교문화가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던 고려 후기에, 성리학적 세계 인식으로 사상을 전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한족(漢族)이 이룩한 중화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포은이 당대 고승(高僧)이었고, 국사(國師)였던 혼수 스님에게 써 준 시는 포은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뚜렷이 보여 주었고, 스님에게 준 시나 고암과 원조스님의 두루마리에 써 준 시에서도 스님들의 구도(求道) 방법이나 참선 태도, 불교의 교리 등에 문제가 많다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Poeun, Jeong Mong-ju was a politician and philosopher in the late Goryeo. According to the previous studies of Poeun, he, unlike dogmatic confucian scholars, was in favor of Buddhism and had a profound understanding of Buddhism. In addition, he was referred to as a figure who had been favorable, knowledgable and friendly of Buddhism. This study has a question for the previous studies and examines his Buddhist-friendly poetry and Buddhist-unfriendly poetry among his works. Historically, Poeun started to be reappraised by Kwongeun during the era of King Taejong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the light of this, Poeun was recognized as both loyal subject and traitor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result, his works were included in Jesinjeon (stories including every subject) in the history of Goryeo. That is, they were not included in either loyal subject stories or traitor stories. Due to this dual structure, his poems might have been included in Jesinjeon. Privately traveling to China and Japan, Poeun experienced their advanced civilization and he considered China as the center of the world. Therefore, he expressed that Goryeo adopted Han chinese’s advanced civilization at a proper time and it had pride in sharing their civilization. Poeun seemed to appreciate that Goryo could have got cultural and political stability through this Myoung-friendly diplomacy. His thoughts could be based on Hwairon world view of Neo-Confucianism. Having been to Myoung several times, he experienced the change of international situation and its culture and institutions in person. It led him to insist on Myoung-friendly diplomacy. Since then Chosun kept adopting Han chinese’s culture and institutions based on sinocentrism(the belief that China was literally the center of the Earth) and people in the late Chosnn had lived with small sinocentrism. Eventually, Poeun can be evaluated as the scholar who arranged our Neo-confucianism and from whom small sinocentrism was mentally originated. In Jeong Mong-ju story of History of Goryeo, Poeun’s main achievement was in that he made an attempt at changing Goryeo’s buddhist-centric society into confucianist-centric society. That is, to encourage and teach confucianism he built Obuhakdang in Gaesung, capital of Goryeo, and established Hyang-gyo in the provinces. Besides, he, as a trainer of Seonggyungwan, could strengthen Neo-confucianism theories, debating about Neo-confucianism with other scholars. Poeun wanted to learn the neo-confucianism view of world through guanmul(觀物) and gungli(窮理). In , , and of his works, he tried to apply the theories of Chunchu, Juyeok, Sigyoung and Jungyong to his life , and to recite their theories through his poetry. In the era of Goryeo, temples played a role as a study place, a character building place as well as a religious place. In other words, there was a government educational institution called Gukjagam and 12 private schools called Sibido, which were built in Gaesung, were prosperous in the period. Private schools focused on hacheondohoe(夏天都會) in their curriculums. That is, students usually studied at Sibido which belonged to each Jae but they periodically got together to study in the summer. It was called hagua or hacheondohoe(夏天都會). They usually studied at Guibeobsa(歸法寺) and Yongheungsa(龍興寺). In the era of King Gojong, it was recorded that Hagua was carried out at Yeonmijung, Gangwha. Considering this cultural heritage, we can recognize that temples in the era of Goryeo had functions for studying, character building and relaxing, let along religious function. Interacting with buddhist monks w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function. The heritage has been succeeded until today. Like the previous temples, today’s temples are used as test-preparation and school trip places for students and as relaxing and comforting places for ordinary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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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선생 祭禮에 관한 고찰

        홍순석(Hong, Soon-Seuk) 포은학회 2010 포은학연구 Vol.5 No.-

        본고는 圃隱先生 祭禮의 연원을 살피고, 정통성을 재확인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같은 작업은 우리나라 士大夫家 제례의 변천을 살피는 방편이기도 하다. 宋時烈에 의하면 ≪高麗史≫ <禮志>의 기록은 포은선생이 찬술하였던 것이라 한다. 포은선생은 조선시대에 文廟에 배향되었다. 역대 왕들은 禮官을 보내 致祭토록 하였다. 포은선생의 선양사업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李縡는 ≪四禮便覽≫을 저술하였다. ≪朱子家禮≫를 바탕으로 정리한 포은선생의 <祭儀>, 이재의 ≪四禮便覽≫이 무관하지 않음을 가늠할 수 있다. 적어도 18세기 이후에는 포은선생의 제례가 ≪사례편람≫에 의거하였을 것임이 자명하다. 그런데 현재 봉행하고 있는 제례의 양상은 근간이 되었을 儀禮書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傳統社會에서 祭禮를 중시한 이유는 死後奉養과 家系繼承의 의미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家系繼承보다 死後奉養이라는 점이 더 중시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주자가례≫에서 중시한 四仲月의 時祭보다 墓祭와 忌祭를 중시하게 하였다. 포은선생의 제례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의 포은선생 四季節墓祭는 이러한 변모과정에서의 한 양상이다. This paper aims at checking the origin of the ritual formalities for Poeun(圃隱), and establishing it's legitimacy. Such a task also is means of checking the vicissitudes of Korea's ritual formalities. According to Song Si-yeol(宋時烈),《Koryusa(高麗史)》<Yeji(禮志)>are the records written by Poeun. Poeun was oriented on Munmyo(文廟)of the Joseon Dynasty(朝鮮時代). Many choseon kings sent to the grave of Poeun the secretaries serving as a memorial. with efforts to promote the extraordinary Poeun, Yi Jae(李縡) wrote《Sarye pyeollam(四禮便覽)》. Poeun's <Jeeu(祭儀)>, Yi Jae's《Sarye pyeollam》is not irrelevant. Both of which are organized on the basis of 《Chuja Garye(朱子家禮)》. It is clear that a least since the 18th century, the ritual formalities for Poeun was based on《Sarye pyeollam》. However, the ritual aspects of the current implementation has shown the difference. In ritual formalities for Poeun, Myoje(墓祭: a memorial service held before the tomb) and Gije(忌祭: a memorial service held on an anniversary of death) have beeen mphasised. Four Seasons'ritual formalities(四季節祭祀) which are performed in Poeun (圃隱)'s family, are the pattern in the process of this transformation.

      • KCI등재

        포은 이적(異蹟)의 서사와 전승

        홍순석(Hong, Soon-seuk) 포은학회 2016 포은학연구 Vol.17 No.-

        포은의 이적은 출생·순절·혈교읍비, 그리고 사후의 다양한 이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본고에서는 포은 순절과 혈교읍비 이적의 서사와 전승을 정리하였다. 포은 순절에 관련한 문헌자료를 살피면, 후대의 기록자에 의해 순절 당시의 정황이 점차 구체적으로 서사되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서는 위정자의 시각에서 기록하고 있음이 뚜렷하다. 야사류에서는 포은과 녹사의 충절을 기리는 시각에서 서사하고 있다. 반면 포은의 후손가에 전승되는 자료에서는 조선 개국 세력의 의도적인 숙청사건임을 부각하고 있다. 포은이 순절하던 당시의 정황에서도 기록자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다. <선생사략>에서는 포은의 죽음을 구차하게 기록하여 순절의 존엄성을 삭감하려는 위정자 시각의 의도가 내포해 있다. 이에 반해, 후대의 기록에서는순절의 존엄성을 부각하고 있다. 포은을 동반한 인물로 녹사의 실체를 거론하며, 그 역시 주군인 포은을 위해 순절하였음을 표출하고 있다. 이덕무의<서해여언>에서는 포은과 녹사가 조영규의 무리에 의해 타살되고, 3일간 효수하였다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단순한 타살이 아니라 조선개국에 반역한 인물로 각인하려는 위정자들의 행위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처럼 포은 순절은 기록자의 시각과 의도에 따라 변개되어 나타난다. 포은 순절 이후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들이 송도를 탐방하며 선죽교의 혈흔과 읍비에 관심을 기울였다. 혈교읍비의 이적은 기록자나 구비전승자의 감회가 추가될 뿐 서사적 화소의 변이가 없이 전재되는 양상이다. 그리고,서사적 전승보다는 선죽교를 탐방하는 문인들의 시편에서 부단히 전승되고있는 셈이다. <선죽교>라는 시제의 한시가 대부분 그러하다. 일제 침략기의 문인들은 국권이 강탈당한 정황에서 우국의 심정을 담아내는 매체로 선죽교를 부각하였다. 선죽교의 혈흔은 포은의 고려에 대한 충절을 상징하는 실체이며, 읍비는 주군인 포은에 대한 충절을 상징하는 실체이다. 혈흔과 읍비가 충절의 표상으로 선죽교에 실재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이적은 부단히 전승되어질것이다. Poeun’mysteries divide into birth, sacrifice, a blood bridge(血橋) and a weep monument(泣碑), and various mysteries of after one’s death. In this paper, it is arranged as Poeun’s sacrifice, and description and tradition of the mysteries of blood bridge and a weep monument. According to the related literature materials of Poeun’s sacrifice, it is narrated more specifically at the time of circumstances of sacrifice by later recorders. It is obvious that it was recorded from administrator’s viewpoint on historical record. In unofficial history, that is narrated from a viewpoint which is to admire loyalty of Poeun and a faithful servant. Whereas, according to the sources which have passed down to descendents of Poeun, it accentuated that event was an intentional purge event which was caused by Joseon’s founding forces. One can make a guess about writer’s intention even at the time of circumstances of sacrifice himself, Poeun. <Sunsengsarock(先生史略)> involve an intention of administrator’s viewpoint which try to discredit Poeun’s sacrifice of dignity by recording his death miserably. By contrast, it highlights sacrifice of dignity in later report. Referring a faithful servant’s true nature as being accompanied Poeun, it shows the faithful servant sacrifices himself for his master, Poeun. In the Lee deok moo(李德懋)’s Seo hai yeu un(西海旅言), it was recorded a story that Poeun and his faithful servant were murdered by a bevy of Jo yeong gyu(趙英珪) and they were hanged on gibbet. It is to expose administrator’s deed trying to imprint them as not just a murder but traitors. Poeun’s sacrifice is changed and construed depending on viewpoints and intentions of recorders. After Poeun’s sacrifice, many writers of Chosun Dynasty paid attention a bloodstain and a weep monument of Sunjoogyok making inquiries Song Do(松都). It is an aspect which is merely added emotion of the blood bridge and weep monument’mysteries of recorder and reprinted without mutation of descriptive motif. And, it has passed down ceaselessly on the side of the writer’s poetry than descriptive tradition. A Chinese poem entitled <Sunjookgyok(善竹橋)> usually do that wa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writers highlight Sunjookgyok as a medium which captures patriotism in the context of national rights extortion. A bloodstain of Sunjookgyok is the true nature which symbolizes Poeun’s loyalty to Goryeo(高麗), a weep monument is the true nature which stands for loyalty to Poeun, master. Mysteries of a bloodstain and a weep monument would be passed down ceaselessly because these exist in Sunjookgyok as a symbol of loyal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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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郑梦周与朱子理学东传

        육진혜(陆,振慧)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2 No.-

        포은 정몽주는 한국의 유학사상 매우 특수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정몽주는 주자학을 조선에 도입한 첫 사람은 아니지만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정몽주는 죽을 때까지 이씨 왕조에 굴하지 않았지만 이씨 왕조는 정몽주에게 지고지상의 영예를 수여하였다. 정몽주는 후세에게 유학이론저작을 남기지 않았지만 후세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의 유학은 주자이학의 도입을 기준으로 전후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자학이 도입되기 전의 한국유학은 한당유학으로 고려 초, 중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유가를 수행했지만은 사상적으로는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수행하였다. 특히 불교를 숭상하면서 유가 경서에 대한 연구는 미약하였다. 주자학의 도입으로 고려 및 한국 전체 사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정몽주 이전에 많은 고려학자들 즉 안향(安珦), 백신정(白颐正), 이제현(李齐贤), 이곡(李榖) 등 주자학자들도 주자학을 고려로 도입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의 동국 정통 지위의 확립은 이색, 정몽주 등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이색은 주로 '기화' 및 '수양' 등 면에서 주자학을 해석하고 전개하였으며 정몽주는 성리학적 면에서 주자학을 계승하고 발전하였다. 포은은 의리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배운 것을 실제에 응용하도록 강조하였다. 포은은 유가학설을 적극적으로 창도하면서 정주이학 교육을 추진하였다. 포은은 사서인으로 하여금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가묘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하도록 했으며 사회적으로 유가예속을 널리 보급하여 불교의 문화습속을 대체하도록 하였다. 포은은 유가의 충효의리를 강조하면서 유교강상으로 몰락해가는 고려 말을 만회하려고 하였다. 포은은 공민왕16년(1367)에 성균박사에 임명되었다. 포은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의하면서 가장 먼저 주희의 "사서집주"을 해석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해석이 잘 되었는지 의심했었는데 그뒤 호병문(胡炳文, 호는 云峰) 의 '사서통(四书通)'이 고려에 들어온 후 참조해보니 포은이 주희의 성리학 사상에 대한 이해가 호씨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모두 포은의 이론에 탄복했다.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였지만 피살된 후 모든 가산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문헌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실전되어 시문 300여수와 문집 20여 편 밖에 없다. 포은에 대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문집이나 포은의 시문을 통해 포은의 주자이학에 대한 이해, 공맹 사상에 대한 발양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포은은 "사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유학의 도통을 전개하였다. 포은은 "대학" 과 "중용"을 통하여 유학을 파악하였으며 "논어"와 "맹자"를 통하여 신심을 닦고 교양을 쌓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포은이 "오경"에 대한 연구도 정주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포은은 "以默识心融为要, 以践履躬行为本"의 기본 사상으로 성리학 정신을 구현하였다. 포은은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국안민하는 사공(事功)으로도 기여하였다. 포은은 절의, 대의의 정치인이자 고려의 입지를 위해서 유세를 했던 탁월한 외교관이기도 하다. 포은의 일생을 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충효절의 사상이다. 이 또한 포은의 정주이학사상이 밑바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은은 君臣父子(군신부자)의 논리관계를 가장 우선시하였고 효를 행하고 충을 다하는 것을 인도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사신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포은의 충효절의는 성리학을 연구한 결과이며 성리학의 승화이기도 하다. 포은이 한국 성리학에 미친 영향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자이학의 전개로 불교에 대한 숭상을 바로잡았으며, 둘째, 주자이학을 창도함으로써 여말 학자들의 학문 방향을 바로잡았으며, 셋째, "默识心融"과 "践履躬行"를 하나로 통일하여 "义理派"적 정통유학지위를 확고하였다. 따라서 '有德有言, 名实相孚, 文道兼备'가 포은에 대한 가장 좋은 평가가 아닐까 싶다. 在韩国儒学史上, 郑梦周(圃隐)是一位地位非常特殊而重要的人物。他虽非朱子学引入朝鲜半岛第一人, 却被尊为"东方理学之祖";他誓死不仕李氏王朝, 李氏王朝却给予他至高无上的荣誉;他未留下传世的儒学理论著作, 当时及后世诸多名儒却对他敬仰备至。 韩国儒学以朱子理学传入为界, 分为前后两个阶段。朱子学传入前的韩国儒学为汉唐儒学, 及至高丽初、中期时, 儒者文士虽在政治上奉行儒家, 在思想上则儒、释、道三教兼修, 尤其崇尚佛教, 皆能通词章, 对经学却无深入研究。朱子学的输入, 不仅对高丽时代, 而且对韩国整个思想带来重大的转折与影响。在郑梦周之前, 已有不少丽朝学者接触到了朱子学, 安珦、白颐正、李齐贤、李榖等均在朱子学引入高丽方面, 做出了不可磨灭的贡献。但程朱性理学在东国正统地位的确立, 则要归功于李穑、郑梦周等人的努力, 其中李穑主要在"气化"和 "修养"等方面阐释与发展了朱子学, 郑梦周则是在性理学方面继承与发展了朱子学。 圃隐始终强调以义理思想为根本, 强调学以致用, 极力倡导儒家学说, 推行程朱理学教育, 并令士庶仿朱子家礼立庙奉祀祖先, 向社会推广儒家礼俗, 以取代佛教的文化习俗;他尤其重视儒家的忠孝义理, 力求以之扶持纲常, 挽救高丽末期的衰落之势。圃隐自恭愍王十六年(1367)兼成均馆学官后, 第二年拜成均司艺知制教, 恭愍二十年又拜宝文阁应教兼成均直讲, 年底再拜为成均司成, 而至辛禑元年(1375)时则拜为成均大司成。圃隐在成均馆讲授性理学, 是最早为朱熹≪四书集注≫作训解之人, 时人未知其训解正确与否, 心中尚有疑惑。及至胡炳文(号云峰)之≪四书通≫传来, 人们发现, 圃隐对朱熹理学思想之理解竟与胡氏完全吻合, 从而对圃隐钦佩不已。 郑梦周虽被尊奉为 "东方理学之祖", 但由于被杀害后没收家产, 所著文献大多遭毁失传, 仅留下诗文300 余首和书、铭、记等不足20篇, 这给后人开展圃隐研究带来不小的困难。然而尽管如此, 从别人的记述及先生本人的诗文中, 我们仍可感知圃隐对朱子理学的深切领悟、对孔孟思想的积极发扬, 以及对佛老之言的严厉批判。圃隐通过研究 "四书"来接受性理学并发扬儒学道统:从≪大学≫、≪中庸≫中把握了 "儒学为身心之学"的宗旨;从≪论语≫、≪孟子≫中获得了修身养性的方法。圃隐之研究 "五经", 同样是本于程朱思想。更为重要的是, 他 "以默识心融为要, 以践履躬行为本", 他用平时的身体力行, 来体现性理学精神。圃隐不仅在性理学上为时人所推崇, 而且其事功方面亦为人们所称道, 被誉为 "天人之学, 王佐之才。"考其一生, 可谓是屡建奇功:振文风, 立国礼, 整纪纲;革胡服而袭华制,立义仓以赈穷乏, 设水站以便漕运。他还以过人胆识和卓越的外交智慧, 数度挽救国运于危亡。而使圃隐先生的名字在韩国儒学史上彪炳千古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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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암 송시열을 통해 살펴본 포은 정몽주의 지성사적 위상

        조창규(Jo, Chang Gyu) 포은학회 2016 포은학연구 Vol.17 No.-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한국유학사에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조(祖)’로 기억되는 위대한 지성이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포은의 인격과 학문을 경모(敬慕)했던 거대한 학자였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포은의 경우도 이와는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암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포은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우암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포은과 관련된 많은 기록들이 있다. 이를 검토한 결과 이미 알려진 ‘동방이학의 조’ 외에도 ‘도학연원(道學淵源)의 일대종맹(一代宗盟)’으로서의 포은과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수건자(首建者)’로서의 포은이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우암에게 있어 포은은 한 마디로 ‘문명의 시발점’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앞으로 포은에 관한 예학적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Jeong Mong-ju(鄭夢周, 1337∼1392) is being remembered as a loyal person in history. And on the other hand, he is also remembered as the first Neo-Confucian. But the real assessment of Jeong Mong-ju will not end there. Great scholar Song Si-yeol(宋時烈, 1607∼1689) of the later is Jeong Mong-ju to make another assessment. His assessment of the Jeong Mong-ju is as follows. Jeong Mong-ju was the mentor of all the Joseon Dynasty scholar, and he was first practicing just and great cause[春秋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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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 정몽주의 사행시에 나타난 문명의식

        박양호(Park, Yang-Ho) 포은학회 2021 포은학연구 Vol.27 No.-

        포은 정몽주는 역사적으로 대전환기였던 고려 말 수차례 명(明)과 일본을 다녀왔다. 뛰어난 외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포은은 사행 중에 많은 시를 남겼다. 본고는 사행시를 중심으로 포은의 천하 인식과 문명에 대한 인식 양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포은은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책으로 왕권 강화를 도모하던 시기에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민왕의 친명 정책과 명 사행의 영향으로 포은은 친명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절반만 입경(入京)하였지만 6차례나 명 사행에 나서, 중원을 지배한 명나라의 강한 정세와 우수한 문물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은 한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성리학적 사고에 비추어 볼 때 정통성도 갖추었다. 포은에게 명은 「원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기를 청하는 소」에 표현한 것처럼 천하의 의주(義主)로 대접할 만한 대상이었다. 성리학에 기반한 명분론적 화이관과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형세·문화적 화이관에 따라, 포은은 명나라를 천하의 중심이자 문명 질서의 중심으로 인식하였다. 이는 사행 중에 지은 시에 잘 나타나는데, 명 사행시와 일본 사행시에 나타난 포은의 태도와 표현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포은의 문명의식을 둘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먼저 명 사행시를 살펴, 포은이 명을 중화 문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따르려 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포은은 명 방문과 황제와의 만남에 감격했고, 명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에 감탄하였다. 또 명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태평한 시절이 오리라 희망하며, 중화와 이적이 한집안이 되었음을 여러 시에서 강조하였다. 명 중심의 문명 질서를 인식하고, 고려도 같은 질서를 따르고 있으니 중화와 다를 것이 없다는 문화적 동질감과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 사행시 「홍무 정사년에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지은 시」를 살펴, 오랑캐의 풍속이 남아 있는 일본에 대한 포은의 이질감과 우월감을 확인하였다. 일본에 머무르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 향수(鄕愁), 낯선 풍속에 대한 이질감이 시 전체에 걸쳐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포은은 중화 문명을 따르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민족의 문화에는 거리감을 느끼고 고향을 더욱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Po-Eun, one of the newly emerging confucian bureaucrats in the late period of the Koryo dynasty, was highly knowledgeable in Neo-Confucianism, and had a deep consciousness of civilization. He also participated in the realpolitik actively by awakening the people, and expressed his deeds and emotions in his Chinese poems. The late period of Koryo in which Po-Eun took the office was unstable in domestic politics, and China was also unstable due to the transition period from the Yuan to the Ming dynasty. Po-Eun started to take office as ho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60 (the 9th year of King Gong Min rule). King Gong Min tried to reform politics with the idea of Ming-friendly policies, which Po-Eun supported. After King Gong Min was assassinated, he was banished because he made an appeal against influential families such as Lee In-Im trying to reopen the relationship with Yuan dynasty. Even though Po-Eun was a literati, he serviced in a war four times and traveled to China and Japan in disguise seven times. As a confucian scholar, Po-Eun had a Sino-center view, centering on Chinese culture built by Han people. He considered Ming dynasty Sino-center, praised advanced culture of Ming, and included his praise for Ming emperor, palace, and capital city in his poems he left when he traveled to China in disguise. However, this attitude was different from blind worship to the power in that he praised Ming dynasty only after he experienced extremely strong power and civilization of the Ming. Because of this, world view of Po-Eun is seen as situational and cultural Sino-centralism. Po-Eun, who had the consciousness of distinguishing Chinese people from barbarians based on culture, wrote many poems which emphasized that Koryo was not different from China in that Koryo people recognized and followed truth and virtue. On the other hand, his poems he wrote when he traveled to Japan revealed his sense of difference toward Japanese culture. In these poems, he expressed his longing for hometown and his sense of superiority of Koryo culture, which shows his sense of civ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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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下何人不夢周? -鄭夢周在中國本土的影響

        곡금량(曲金良)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1 No.-

        포은학, 즉 포은 정몽주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의 한 구성 부분일 뿐만 아니라, 중국학의 한 구성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전통우방으로서 같은 문화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귀속할 수 있다. 포은학은 중ㆍ한 문화공동체에 속한 문화현상으로, 포은 정몽주는 중ㆍ한 양국의 문화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명ㆍ청 시기에 포은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시기별로 전ㆍ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여말선초,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명나라에 올린 주문(奏文)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런 주문은 조선 왕조의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 때, 정몽주는 흔히 '권신(權臣)'ㆍ'간신(奸臣)'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중국 본토에서는 여말선초 때의 '권신설'ㆍ'奸臣說'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세종대부터 편찬하고, 문종대에 성서(成書)한 『고려사』는 조선왕조의 포은 정몽주에 대한 평가의 변모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중국 본토에서의 포은 정몽주의 평가도 변모하였다. 명나라 만력대(萬曆代)의 진사 전겸익(進士 錢謙益)은 『열조시집(列朝詩集)』을 편찬할 때, 포은 정몽주의 시를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전겸익은 명말청초 중국 문단의 대표 인물로서 그가 편찬한 『열조시집』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청나라 순치대(順治代), 강희대(康熙代), 선통대(宣统代)에 여러 번 간행되었다. 『열조시집』에 수록한 다른 두 조선 사람의 시도 정몽주와 관련이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당시 중국 본토에서 포은 정몽주는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다. 『열조시집』은 청나라 강희 21년(숙종 8년, 1682년)에 조선에 전입되면서 당시 문인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다. 청나라 중엽, 주이존(朱彝尊)이 명나라 시가를 모은 시가총집 『명시종(明詩綜)』에서도 포은 정몽주의 시를 필수로 선록(選錄)하였다. 주이존은 『명시종』에서 정몽주의 행적에 대해 간단히 적었고, 『고려사』에서 포은 정몽주의 행적을 간과하지 않았던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청나라 말엽, 오경지(吳慶坻)는 『조선시록(朝鮮詩錄)』의 간행경위를 자세히 소개하였다(『초랑좌록(蕉廊脞錄)』 권5). 『조선시록(朝鮮詩錄)』은 총 4책인데, 첫 책에 포은 정몽주의 시를 수록하였고, "그 뒤에 또한 정몽주의 시를 수록하였는데 대개 두 책에 달하였다(其後又錄鄭夢周詩 幾盈二冊)."라고 하였다. 이는 총 4책인 『조선시록』의 절반 즈음에 가까운 분량이다. 이로부터 포은 정몽주의 중국 본토에서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근현대에 들어서서 중국 본토에 끼친 포은 정몽주의 영향도 20세기 90년대를 기점으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차 아편전쟁'이후, '양무파(洋務派)'와 '서화파(西化派)'가 흥성되면서 점차 학술ㆍ문화 분야에서 지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 본토의 역대 문인과 걸작에 대한 정리는 거의 정체되었고, 포은 정몽주를 비롯한 역외 문인에 관한 연구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인 20세기 50~60년대, 중국 본토에서는 포은 정몽주 연구의 새로운 고조가 일어났다. 이소일(李少一)의 『정포은에 대하여(關於鄭圃隱)』는 당시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곽말약(郭沫若), 북한 부수상 홍명희, 북경대학교 저명한 사학가 전백찬(翦伯贊), 북경대학교 사학가 주일양(周一良) 등 문인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2년 중ㆍ한 수교 이후, 한국에서 붐을 일었던 포은학 연구 성과가 중국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북경대학교의 루우열(樓宇烈) 교수는 20세기 90년대 초반부터 포은 정몽주 및 한국의 성리학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이다. 이로부터 정몽주가 중국으로 사행하는 길에 투속한 곳, 교통로(해로)도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부상되었다. 한국 학계 및 영일정씨 포은공파가 포은 정몽주의 사행 경로와 사행 유적지에 대한 중시는 중국 본토의 학자, 관련 지방 정부기관의 관심을 야기하였다. 당대에 들어서서 중ㆍ한 양국관계의 발전과 더불어, 포은 정몽주의 사상ㆍ시문ㆍ행적에 관한 연구도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되고, 유가 문화에 대한 연구도 더욱 발전될 것으로 생각한다. 郑梦周在明清时代中国的影响, 可分为前后两个时期。 第一个时期, 是明初根据高丽末朝鲜建国初期对明朝廷的奏报。奏报原文见李氏朝鲜的 ≪李朝实录≫, 郑梦周是作为"权臣"、"奸臣"定性的。由此, 在中国本土, 当时对郑梦周的定性与评价, 与高丽末朝鲜初一致。李氏朝鲜对郑梦周的评价, 到了世宗时编撰、文宗成书≪高丽史≫ 彻底转变。于是在中国本土, 对郑梦周的定性与评价, 也随之彻底转变。到了明万历进士钱谦益编纂 ≪列朝诗集≫, 郑梦周诗成为重要选项。因钱谦益在明末清初是文坛盟主, ≪列朝诗集≫影响巨大。顺治、康熙、宣统等各代多次刊刻。 ≪列朝诗集≫ 所选诗, 还有另外两位朝鲜作者的诗与郑梦周有关, 可见其在中原大陆受到的广泛关注。 ≪列朝诗集≫ 于清康熙二十一年 (朝鲜肃宗八年,1682)传入朝鲜, 受到高度重视。 清中叶朱彝尊编选的明代诗歌总集 ≪明诗综≫, 郑梦周又是必选。在 ≪明诗综≫ 中, 朱彝尊对郑梦周不但作有简要的生平介绍,还在文末附有按语, 对 ≪高丽史≫ 不没郑氏事迹大加称赏。晚晴吴庆坻 ≪蕉廊脞录≫, 卷五又记有 ≪朝鲜诗录≫ 四册辗转抄阅流传的情况。 ≪朝鲜诗录≫ 四册, 不仅第一册中即录有郑梦周诗, 而且"其后又录郑梦周诗, 几盈二册", 即几占了 ≪朝鲜诗录≫ 四册的一半的篇幅份量, 可见郑梦周及其诗在中国本土一直以来的影响。 郑梦周在近现代和当代中国的影响, 同样也可分为两个时期: 一是20世纪90年代以往, 一是20世纪90年代以来。 近代中国, "洋务派"和西化派主导学术文化, 妨害了中国本土对历史上中外历代名家名作的整理、研究和评价。中国本土现代人对郑梦周的关注和研究, 是新中国即中华人民共和国成立之初的20世纪50、60年代。李少一 ≪关于郑圃隐≫ 的研究和探求, 牵动了时任中国科学院院长的郭沫若、朝鲜副首相洪命熹、北京大学著名史学家翦伯赞、周一良等的高度重视和研究、评价。 20世纪90年代以来, 自中韩两国建交, 韩国的郑梦周研究即圃隐学热感染了中国学界。像北京大学楼宇烈教授等, 是90年代较早系统梳理、研究郑梦周与韩国性理学的著名学者。郑梦周出使入朝所往返经过的海道, 也成为人们重视的"节点"。韩国郑梦周研究学界和郑氏宗亲对郑梦周在中国本土行止遗迹的重视得到了中国本土相关学者、各地政府和相关部门的积极呼应。中韩的当代合作, 将使郑梦周之思想、诗文、行迹在中韩两国得到当代"落地", 这样的儒家文化之树, 有望在当代中韩两国越来越茁壮地成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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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圃隱 鄭夢周 時와 唐風的 性格

        김종서(Kim, Jong-seo) 포은학회 2009 포은학연구 Vol.4 No.-

        본고는 圃隱 鄭夢周 시에 나타난 唐風的 모습과 그 표현미의 우수성을 밝힌 글이다. 포은은 충후한 기상과 의열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시는 그 사람됨에서 나왔다. 포은 시의 특징으로 辭語가 豪放하고 意思가 飄逸하여, 호화롭지만 지나치게 흘러가버림[流蕩]에 이르지 않았고, 곱지만 모양만 화사한 데[綺靡]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시 302편이 세상에 전하며 “豪逸雅健하고 雄深和厚하여 대부분 性情에 근본하고 物理를 갖추었다.”라고 평가 된다. 許均은 그의 시가 음영성이 강한 唐詩의 특성이 있음을 지적하였고, 洪萬宗은 性理學만 동방의 祖宗이 아니라 문장 또한 唐詩 가운데서도 高品이라고 하여 당시풍의 시를 지어 높은 품격이 있음을 밝혔다. 포은의 시는 형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감으로 형성된 경계를 표현하는데, 표면적으로 그림이나 영상처럼 시각적으로 인식되도록 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정서가 간직되어 말 밖의 뜻[言外之意]을 전달하는 唐詩의 含蓄적 표현을 잘 살려내었다. 사용된 언어는 쉽고 뜻은 심원하고 깊으며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있다. 작품의 명사구의 시행들만으로 배열하여 시적 함축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포은의 시는 언어가 간결하고 정련되어 있으며 형상이 생동적이다. 포은은 형태의 묘사를 간략하게 하고 그 안에 정감을 담아 영묘적 기법을 통해 시의 의경을 이루고 있다. 포은 시는 행간에다 다양한 모습과 색채를 담아 은근히 떠올리게 하고 말 안의 감정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시가의 다의적 효과를 구성하게 한다. 시어의 굴곡과 시의 발상이 신선하며 대상의 상황을 암시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시의 내면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중의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외적 상황을 내적 심경의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함으로써 작품이 한 곡의 구성진 노래이면서 한 폭의 그림으로 읽히게 하였다. 포은은 자신의 정감을 담아 최대한 정성을 다해 경물의 형상을 절실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는데 독자로 하여금 그 속에 담긴 흥취를 공감하게 한다. 그는 한적한 정서와 청신한 감각의 눈길에 들어온 광경을 포착시화하였는데, 묘사를 통해 작자인 ‘나’를 객관화하여 대상과 시적 화자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형상화방식을 사용하였다. 포은의 樂府詩인 「江南曲」과「征婦怨」 등의 작품은 시적 화자를 여성화 하여, 여성화자가 겪을 수 있는 감정의 변화를 상상을 통하여 표현해 내어 감정을 절실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포은은 특수한 공간의 풍광을 역동적 감각으로 포착하여 매우 생동적으로 형상화하였고, 그 시공간 속에서 자아의 경이로운 체험으로 인해 거나한 감흥을 제법 높은 목청의 유려한 가락에 실어 꾸밈없이 읊어내고 있어 대체로 풍격이 호방하다. 포은이 외적의 침입에 從軍하여 전쟁에 참여하고, 국가의 어려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에 使行으로 참여하여 평생 떠돌게 된 것은 바로 그의 타고난 장부로서의 豪氣 때문이었지만 시의 호방한 풍격 안에는 憂愁가 담겨있다. 그의 시는 雄深하면서도 雅健하며 渾厚하면서도 和平하다고 평가된다. This thesis explained Dang style(唐詩風) expressed in Poeun(圃隱) Jeong Mongju(鄭夢周)‘s poem and its excellence of expression. Poeun was honest and pure minded, his poem was resulted from his personality. There are Poeun's 302 poems and these poems were evaluated that those were vigorous upright, and grand and were originated from human nature. His poem has Dang style characteristic which could be easily recited. The poem of Poeun was simple, refined and vivid. He described the shape simply but contained implicative feeling through which he accomplished the scenery of poetry. The poetic diction of Poeun was easy but profound and expressed the implicated feeling in the shape. So he could embody the implied meaning of Dang style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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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圃隱先生의 性格豫測을 위한 四柱命理學的 接近

        鄭國鎔(Chung, Kook-yong) 포은학회 2011 포은학연구 Vol.8 No.-

        본 연구는 圃隱 鄭夢周선생(이하 편의상 '포은'이라 한다)의 타고난 바 天性을 사주명리학이 제시하는 성격특성의 분석체계를 이용하여 원형에 접근하는 탐색적 人性연구이다. 비가시적인 마음의 세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도 무려 675년 전에 태어나 일세를 풍미하며 살다 간 역사적 위인에 대한 그만의 타고난 바를 論衡한다는 것은 더욱 난해한 일이다. '포은'이 후세에 전한 만고불변의 지조와 선비정신은 성현에 버금될 만큼 宏闊한데 비하여 그가 출생한 시점에서 수학기의 성장과정에 대한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전무한 현실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사료와 비문, 시편 등 문헌상의 기록들만으로는 '포은'의 인간적 正體性(identity)을 정립하기에는 항시 부족감을 갖게 한다. 본 연구자는 '포은'의 나타난 행적보다 그 이전에 이미 천성자체에 녹아있는 원형의 실체에 대한 탐구의욕에서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였다. 즉, 서양의 인식론적 연구 방법의 틀에서 탈피하여 관측위치를 '포은'의 천성자체에다 설정하고 그의 행동을 설명해가는 동양의 인성론적 연구방법으로 연구 설계하였다. '포은'은 태어날 때 稟受된 천기가 어떠하였기에 그때 그곳에서 그렇게 행동하였을까? 그의 행보와 임기응변의 원동력이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라는 운명의 실체에 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역사적 기록들은 나타난 현상세계로서 마치 커다란 나무나 열매처럼 '보이는 세계'임에 반하여 출생 시부터 형성된 '포은'만의 본질적 원형은 흙속에 묻힌 뿌리처럼 '감추어진 세계'이다. 이와 같은 그의 감추어진 내면세계를 조명하는 올바른 측정도구가 만들어진다면 보다 더 가까이 진정한 '포은'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아래와 같이 접근하였다. ⑴ 연구의 초점을 '포은'의 태어난 생년월일에 설정하고 출생시간에 대하여는 四柱命理學 체계에 따라 추정함으로서 사주명식을 정립하였다. ⑵ 사주팔자가 제시하는 '포은'의 본성구조를 탐색한 후에 연구자의 성격 특성이론과 직관을 통하여 正體性을 정립하였다. ⑶ 연구자의 성격검증방식에 따라 '포은'의 타고난 천성과 性格特性類型을 도출한 결과 아래와 같은 성격유형에 속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① 신강형의 성향이 우세한 성격유형이다. • 주관이 강하다. 고집이 세다. 추진력이 강하다. 독립적이다. 자신감이 넘친다. • 독단적이다. 보스형이다. 마음보다 행동이 앞선다. ② 내향형의 성향이 우세한 성격유형이다. • 인간관계가 고립적이다. 좀처럼 마음을 보이지 않는다. 보수적이다. • 말수가 적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안일하다. 남에게 인색하다. ③ 도리형의 성향이 우세한 성격유형이다. • 암기총명과 판단재주를 겸비한 지략가이다. 지식 추구형이다. 모든 가치기준을 도리에 둔다. 외골수 기질이다. 자아실현의 목표는 명예로움에 있다. • 많은 재물보다 좋은 이름을 남기고 죽는 것을 선호한다. 선천적으로 태산도 옮길 것 같은 강한 기질의 소유자 이면서 內功을 좀체 외표하지 않고 당면한 처세와 이해관계에 대하여는 經緯에 맞도록 분별하였으며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오로지 自然的 道理에 둔 聖賢의 原型을 타고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This study was conducted to approach Poeun Jeong Mong-Ju(called as Poeun for convenience)'s natural character with the use of the analytical system for the personality characteristic which was suggested by Sajumyungri Theology. It was difficult to deal with an invisible world of someone's personality, especially, who was born 675 years ago and had overwhelmed as a great man. The historical records and document on Poeun's life did not exist nearly at all since the unchangeable virtue and the spirit of scholar delivered by him is extensive as much as saints did. Therefore, it was too insufficient to verify Poeun's natural identity using the historical records, document, inscription, and poems. I thought that the new trial to know Poeun's original identity should be introduced and the paradigm for this study should be changed. In that, the oriental treatise of human nature methodology focusing on Poeun's natural character was used for this study instead of the western epistemological research methodology. This study was conducted to answer the fundamental questions what Poeun's inborn secrets of nature was so he behaved at that time and where the motive power of his walk of life and adaptability comes from. The natural character concreted from the time he was born was in the invisible world such as the root in the ground while all of the historical records are based on the facts in the real world such as fruits grows on trees. Therefore, in accordance with my conviction that Poeun's natural character could be revealed if the proper methodology was developed, I approached the issueas shown in below: (1) Poeun's Sajumyungsik was set up by focusing on the year, month, and day of his birth while the time of his birth was estimated according to the Sajumyungri theological system. (2) Poeun's identity was defined through the researcher' spersonality theory and intuition after searching his characteristic structure suggested by Sajupalja. (3) As a result of the verification of Poeun's inborn personality and characteristic type through the researcher's verification methodology, it was concluded that he belonged to the following types. 1) "Sin-Gang" type as strong sprit was superior in Poeun's personality. - Strong subjective, unbending, have a positive drive, independent, supremely confident - Dogmatic, bossy, and behaviorism 2) Introversion type was superior in his personality. - Isolative relationship, closed-minded, and conservative. - Taciturn, stressful, live in ease, and miserly 3) "Do-ri" as the pursuit of the system and regulation was superior in Poeun's personality. - Having a good memory and intelligent, good judgment, resourceful mind, seeking truth, being consistent with what is right, being a single-minded, and having a strong desire to win fame. - Preferred to die honorably and leave his mark on history rather than to accumulate a fortune. Conclusively, Poeun was a man who had congenitallya strong disposition and characterarmor. In terms of the conduct of life for the matter in hand and relationship, he was thoughtful to conform to his career. He was born with a saint's talent whose touchstone of all of his value judgments were based on the nature of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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