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후보

          英祖의 御製詩文에 나타난 圃隱에 대한 認識

          박용만(Park Yong-man) 포은학회 2011 포은학연구 Vol.7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영조가 포은 정몽주와 관련하여 지은 시문이 많지는 않다. 역대 조선의 국왕들이 포은을 현양했던 것처럼 영조 역시 포은을 백성들의 사표로 삼고자 하였다. 영조가 주목한 것은 善竹橋詩의 표현처럼 포은이 지닌 ‘道德’과 ‘精忠’의 상징성이었다. 御製詩帖에서는 포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많지 않다. 포은의 후손이나 愼守勤과 관련하여 영조가 품고 있던 포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포은의 후손에 대한 관심과 우대는 영조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포은에 대한 尊慕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또 愼守勤의 충절을 ‘心正志高’와 ‘古今同忠’이라 하여 포은에 견주고 있는데, 이것은 영조가 인식하였던 고금의 역사에서 포은이 지닌 위상을 보여주는 예이다. 御製冊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포은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善竹橋詩의 일화를 비롯하여 충절과 도덕의 사표로 포은을 인식하였다. 영조가 말한 도덕은 우리 유학의 宗匠으로서 포은에 대한 존모의 정서였으며, 포은의 절의는 역사의 귀감으로써 국가경영의 요체라고 생각했다. 영조는 당시 현실을 時流를 좇아 몰려다니고 침묵과 아첨이 가득 찬 세상이며, 그 현실 속에서 영조 자신만이 홀로 깨어 있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국왕으로서 자신의 의지를 기탁할 만한 典範이 필요했고, 그 전범을 포은으로 설정하였다. 영조의 존모는 개인적 숭앙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정치술로 활용하였다. 더욱이 임금이자 백성의 스승인 君師를 자처했던 영조에게 포은의 道德과 精忠은 자신이 추구할 궁극적인 귀결점이었다. There is not much Simun of King Youngjo related to Poeun Chung Mong-ju. As the Kings of many generations in Joseon made Poeun famous, King Youngjo also intended to make Poeun the role model for the people. What Youngjo focused on was the symbolism of ‘morality’ and ‘loyalty’ of Poeun as expressed in Seon-juk-kyo si. In Uje-sichup, there is not much direct mentioning about Poeun. The perception of Youngjo about Poeun related to the descendent of Poeun or Shin Soo-geun is revealed. His interest and special treatment towards the descendent of Poeun enables one to know how much he respected Poeun in his mind. In addition, he expressed the loyalty of Shin Soo-geun with the words, ‘Shim-jung Ji-go’ and ‘Go-geum Dong-chung’ to compare with that of Poeun, which is an example of the status of Poeun during all ages which Youngjo perceived. In Uje-chaek, the consideration about Poeun is actively revealed. Including the anecdote of Sun Juk Kyo Si, he perceived Poeun as the role model of loyalty and morality. The morality mentioned by Youngjo was the emotion of respect towards Poeun as leader of our Confucianism, and also, he thought that the integrity of Poeun is the key factor of management of the nation as the role model of history. At that time, Youngjo perceived that the world is full of people following trends and showing silence and flattery, and in such reality, he perceived that he was the only awakened person. Therefore, as the King of the nation, he needed a role model whom he could rely his will, and as such role model, he selected Poeun. Youngjo’s such respect did not stop at personal respect and admiration, but through this, he utilized it as political technique which could reform the people and integrate the society. Besides, to Youngjo who called himself Kun Sa, the King as well as the teacher of the people, the morality and loyalty of Poeun was the ultimate result he pursued.

        • KCI등재

          圃隱 鄭夢周의 節義와 文學的 形象化

          金榮洙(Kim Young-Soo) 포은학회 2007 포은학연구 Vol.1 No.1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高麗史」 열전에 포은의 시문을 ‘豪放峻潔’하다고 평했다. ‘豪放峻潔’ 은 “意氣가 壯하여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으며, 엄하고 결백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전하는 포은의 漢詩 가운데는 호방한 풍격을 현저히 드러내는 시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호방의 이면에 고향이나 가족, 그리고 고국을 그리워하거나, 인생의 의미나 신하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면서 느끼는 진솔한 감정을 읊은 시가 많은 듯하다. 이는 아마도 생전의 그의 모습과 피살당한 후의 시문 수습의 어려움, 그리고 충신으로 현양되면서 그에 대한 사후의 호평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BR>  포은의 삶은 신하의 직분에 충실했다. 개인과 나라의 운명을 함께 한 포은은 「논어」에 나타난 正名思想에 철저했던 인물이다. 정명사상은 언행이 일치하는 군자의 삶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이른바 名實相須한 삶을 추구한다. 포은의 위대한 점은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긴 점이다. 實踐躬行의 자세를 견지하고 온 몸을 던져 기울어가는 고려사직을 회복하기 위한 곳에 포은이 있었던 것이다. 포은은 학문과 인격, 경륜에서 불세출의 人豪였지만, 병권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혁명파에게 제거당하는 한계를 보였다.<BR>  필자는 포은의 시를 1)豪放詩, 2)使行詩, 3)述懷詩로 나누어 살폈다. ‘호방’이라는 평어는 포은시의 대명사로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용어이다. 기회주의적인 소인배들을 온 몸으로 배격한 포은에게 이같은 평가는 적절하다. 그러나, 그의 호방시에는 겉으로 드러난 호기 외에 이면에 자리한 우수도 감지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혼란기에 명철보신에 급급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경멸이자, 자기연민이라고 볼 수 있다.<BR>  使行詩는 중국과 일본에 사행하면서 지은 시다. 포은은 명나라에 6차례, 일본에 한 차례 使行을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모두 꺼리는 사행이었지만 소임을 완수하고 돌아온 공이 지대하다. 사행시는 포은의 역할과 경륜으로 볼 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원, 명, 왜에 대한 사행은 그들을 압도하고 제압할만한 호기와 경륜, 그리고 문장을 지닌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포은은 외교에 능했고, 문장도 탁월했으며, 논리정연한 언변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포은의 사행시는 겉으로는 긍지와 報國의 의미가 강하지만, 이면에는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것도 감지된다.<BR>  述懷詩는 포은의 현실지향적인 입장에서 보면 호방시에 대비된다. 학문과 경륜, 그리고 외교적 능력까지 갖춘 그였지만, 그는 이른바, 黨與를 두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임금을 받들어 은택을 백성들에게 입히는 신하로서의 임무와 역할에 충실할 뿐, 그 자신이 권력의 중심을 지향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술회시는 자수성가형 인물인 포은의 완벽주의와 고고함이 일정 부분 세속과 거리를 두고 인생의 고독과 자기변명을 술회하는 시이다.<BR>  〈단심가〉는 포은의 절의를 형상화한 절창이다. 시조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는데, 첫째, 應口輒對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酒宴에서 기생들이읊은 시조는 대부분 응구첩대한 것들로서 재치와 처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둘째, 발생기의 시조는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속성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념전달이 강한 장르가 바로 시조였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단심가〉와 〈하여가〉 두 노래의 작자는 포은과 태종이 맞다고 본다. 다만, 현전하는 것처럼 세련되게 다듬어진 형태가 아니라, 투박하고 직설적 형태였던 것이 세인(기녀)의 입을 거치면서 다듬어진 것으로 봄이 옳다고 본다.   In a series of biographies of ‘Koryosa’(「高麗史」 列傳) we can find that the evaluation of Po"eun(圃隱)"s poem and prose are ‘豪放峻潔’. On the contrary it seems that there are more poems which include the contents of missing his home-town, family and country or feeling of the significance of life and honest emotion as a subject doing his duty to country than large-minded poems.<BR>  A great achievement of Po"eun(圃隱) is that he practiced what he had learned.<BR>  Po"eun(圃隱) he was a matchless and large-minded talent in studies, personality and statecraft field, but as he couldn"t take over the reins of military power, finally he couldn"t help setting limits of being eliminated by evolutionary party. I grouped his poems into 3 classes-豪放詩, 使行詩, 述懷詩 - and studied those poems. But in his 豪放詩 we can also find not only outward stout heart but also inward sorrow. The Po"eun"s 使行詩 outwardly have strong meaning of pride and patriotism, but inwardly also have the nostalgia for family and home-town. 述懷詩 are poems that Po"eun who had nothing but succeeded in life reminisced the loneliness of life and self-excuse as he was too noble and pursued perfectness. <Danshimga:丹心歌> is an excellent piece of his poems of figuring his integrity. Shijo(時調) has two big special feature, first 應口 輒對 is possible. Second in the period of starting to write Shijo, it has a strong feature of expressing political opinion. In this point of view I regard the writers of <Danshimga:丹心歌> and <Hayeoga:何如歌> as Po"eun (圃隱) and Taejong(太宗). And its original form was not as polished as today"s, but a clumsy and plain form. Finally through official kisaengs(妓 生) those two shijo have been more and more polished.

        • KCI등재후보

          조선시대 통신사들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인식 : 『해행총재(海行摠載)』 소재 관련기록을 중심으로

          강지희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1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에 사신으로 간 것은 1377년 9월의 일이었다. 우왕(禑王) 대에 이르러 더욱 잦아진 왜구의 침략은 고려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고, 이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토벌과 외교적 교섭,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377년 7월 일본의 패가대(覇家臺)에서 사신을 보내와 왜구 소탕 계획을 알리며 고려·일본 간의 우호 증진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대한 보빙사(報聘使)로 파견된 이가 포은이었다. 포은은 앞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사행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어 현장에서 직접 왜구의 침해와 그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목도하였기 때문에, 왜구에 대한 대책이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치적인 계략과 현실적인 위험 부담이 뒤얽힌 사행길이었지만 그는 사신으로 떠날 것을 단호하게 결심하였다. 포은은 구주탐제(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금적(禁賊)을 요구하는 한편, 교린관계의 이해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 결과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마가와 료슌을 비롯한 일본인들은 정몽주의 박학다식과 인품에 감복하여 예우를 다해 대접했다. 포은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포로 송환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성과로 인해 왜인들까지도 그를 칭송하고 사모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일본과의 교린관계는 지속되었고, 통신사(通信使)가 파견된 것도 20회에 달하였다. 통신사는 그들이 방문한 곳마다 서화·시문·글씨 등을 많이 남겼고, 귀국한 후에는 일본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들의 견문록과 통신사일기를 한데 모아 편집한 책이 『해행총재(海行摠載)』이다. 포은도 일본에 갔을 때 13편의 시를 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 이는 고려 때의 유일한 일본왕환기록(日本往還記錄)이다. 포은이 남긴 시와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이후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이는 포은의 일본왕환기록이 일본에 다녀온 고려 사신의 유일한 기록이며, 그가 거둔 외교적 성과가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해행총재』에 남아 있는 포은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여, 조선 통신사들이 포은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양상은 대체로 네 가지, 즉 패가대에서의 포은에 대한 기억, 외교관으로서의 훌륭한 임무 수행, 이국의 풍물과 나그네의 정취를 절묘하게 표현한 시인으로서의 포은, 경술과 충렬을 겸비한 문신의 면모 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It was in September 1377 that Jeong Mong-ju went to Japan as a delegation. Frequent invasion from Japan was serious matter which Goryeo had to solve. Action of Goryeo about this proceeded in two ways: suppression and negotiation. In July 1377, an envoy was sent from Paegadae of Japan and he tried to promote friendly relations between Goryeo and Japan announcing a plan to sweep Japanese raiders. It was Jeong Mong-ju that Goryeo sent as an envoy to Japan. Jeong Mong-ju knew the risk of going to Japan as an envoy because previously he went adrift in the way of going to China. However he had become a governor of Gyeongsang-do and had witnessed invasion of Japanese raiders and the people's suffering so he deeply realized urgency to take a step against Japanese raiders. He firmly determined to go to Japan as an envoy although there was a danger of wind and waves in the sea. He met Imagawa Ryoshun, the governor of Kyushyu in Japan. He made a request for forbidding Japanese raiders from invading Goryeo's territory and explained benefits of a good-neighbor policy point to point. As a result, he could let fellow countrymen as a war prisoner return home. Imagawa and Japanese people admired him for his wide knowledge and noble character. They hosted him with devotion and care. Since then he consistently made efforts for the repatriation of prisoners of war. His diplomatic success made him a hero not only in Goryeo but in Japan. In the Joseon dynasty, we adhered to a good-neighbor policy against Japan and sent diplomatic delegation to Japan as many as twenty times. The Joseon envoys left poems, paintings or calligraphic works in every place they visited. In addition, after homecoming they recorded their knowledge and experience in Japan. Their records of personal experience and diaries of a trip are included in Haehang-chongjae. Jeong Mong-ju also wrote thirteen poems when he went to Japan. His poems are included in the front part of Haehang-chongjae. This is only record of an envoy to Japan in the Goryeo dynasty. The Joseon envoys often mentioned poems of Jeong Mong-ju and his diplomatic ability in their records and diaries. Because they regarded his poems wrote in Japan and his diplomatic success as very important results in literature and history. In this paper, I analyzed Joseon envoys' perception of Jeong Mong-ju by examining related mentions in Haehang-chongjae. To sum up, there are four aspects: first, the memory about him at Paegadae; second, his diplomatic success in Japan; third, his poems including an exotic mood and the feeling of a lonely traveler; forth, his personality as a civil servant having both learning and loyalty.

        • KCI등재후보

          포은 설화의 전승 현황과 그 유형

          윤승준(Yoon, Seung-joon) 포은학회 2012 포은학연구 Vol.9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와 한계를 토대로 하여 포은 설화의 전반적인 전승 양상을 확인하고 그 내용에 따른 유형 분류를 목적으로 하였다. 본고에서 필자가 정리한 포은 설화는 문헌전승 자료 32편, 구비전승 자료 28편 등 총 60편이었다. 현재 파악된 60편을 기초로 할 때, 포은 설화의 유형은 그 내용에 따라 ① 포은의 誕生 및 改名, ② 포은의 殉節과 善竹橋, ③ 포은의 묘 자리와 墓碑, ④ 포은의 祠堂과 神主, 祭文, ⑤ 포은의 豫知力, ⑥ 포은의 忠節과 오목대, ⑦ 기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포은의 순절과 선죽교 설화가 가장 많이 전승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포은의 탄생과 개명, 그리고 포은의 묘 자리와 묘비 설화가 널리 전승되고 있다. 설화 속에 각인된 포은은 그 어떤 것보다도 충절의 표상이라는 이미지가 두드러지며, 포은의 숭배와 관련하여 포은을 신비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양상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누락된 자료나 연구 성과가 있을 줄 안다. 추후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I researched the status of Poeun Jeong Mong-ju tales and classified those tales according to the content of stories in this paper. I collected 60 pieces of Poeun Jeong Mong-ju's tales, composed of 32 pieces of literary traditions and 28 pieces of oral traditions. Poeun tales were classified into 7 types as following ; ① the Birth and Naming of Poeun, ② the Death of Poeun and Seon-juk bridge, ③ the Grave of Poeun and his Gravestone, ④ Shrine of Poeun, ⑤ the Foresight Power of Poeun, ⑥ Omokdae(梧木臺) and Poeun's Loyalty, ⑦ Unclassified. Tales of the death of Poeun and Seon-juk bridge were told widely and extensively, and tales of his birth and naming and tales of his grave were told also extensively. The image of Poeun imprinted in tales was his loyalty for Korea Dynasty. According to this image, Poeun had been told as a symbol of loyalty, sometimes his activities in tales were not correspond with historical facts.

        • KCI등재

          포은의 출처(出處)와 풍류적 유배의식 고찰

          손흥철 포은학회 2019 포은학연구 Vol.23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This article aims to review the viewpoint on taking and retirement public post(出處觀) of Poeun(圃隱) Jeong Mong-ju(鄭夢周. 1337-1392) and the talented in letters and unconventional in life style(風流) of exile. So far, Poeun’s assessment of its source has been clearly mixed with positive and negative. I think it is necessary to review the politics of ‘serving but one king(不事二君)’ in order to understand the source of Poeun correctly. And it is believed that Poeun’s values can be seen through his brief exile and his own interpretation of the exile of historical figures. To this end, several famous scholars of the Joseon Dynasty evaluated Poeun and looked at the main points. This is because their assessment contains the sexual criteria for assessing Poeun’s ‘the viewpoint on taking and retirement public post’. The important criterion was ‘serving but one king(不事二君)’. However, I believe that the criteria for evaluating Poeun’s source should not be set in the ‘serving but one king’, but rather the ‘serving but one Country(不事二國)’. Because the Country is more important than the king and his subjects, not the center. Poeun is a scholar who does not value personal resonance and spirituality. He overcame exile, tortuous practices, and political hardships with a free spirit. He also expressed his concerns about the grim adjustment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 affection of ‘the ardent patriotic sentiment(憂國衷情)’ through poetry. Instead of evaluating Poeun’s spirit and values as a royal inspector, the main building aims to reevaluate Poeun’s spirit and values to a modern perspective that puts the people and the state first. 이 글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출처관과 그의 유배생활에 나타난 인생관을 재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동안 포은의 출처(出處)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선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필자는 포은의 출처관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치관을 다시 분명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포은의 가치관은 그의 짧은 유배시기와 역사적 인물들의 유배에 대한 그의 소회와 해석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 포은에 대한 조선시대 여러 유명학자들의 평가와 그 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그들의 평가에 포은의 출처관에 대한 성리학적 평가 기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기준이 바로 ‘불사이군’이다. 그러나 포은의 출처관에 대한 평가 기준이 불사이군 보다 불사이국(不事二國)에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국가는 왕과 신하가 중심이 아니라, 국가 혹은 백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포은의 시를 중심으로 그의 유배의식을 살펴보았다. 포은은 개인의 공명(功名)과 영달(榮達)을 중시하지 않은 학자이다. 그는 유배와 험난한 사행(使行)과 정치적 시련을 호방하고 자유로운 풍류정신으로 극복하였다. 또한 암울한 고려조정에 대한 근심과 우국(憂國)의 정을 시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본고에서는 포은의 정신과 가치관을 왕조사관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우선으로 하는 근대적 시각으로 재평가하고자 한다.

        • KCI등재

          郑梦周与朱子理学东传

          육진혜(陆,振慧)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2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포은 정몽주는 한국의 유학사상 매우 특수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정몽주는 주자학을 조선에 도입한 첫 사람은 아니지만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정몽주는 죽을 때까지 이씨 왕조에 굴하지 않았지만 이씨 왕조는 정몽주에게 지고지상의 영예를 수여하였다. 정몽주는 후세에게 유학이론저작을 남기지 않았지만 후세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의 유학은 주자이학의 도입을 기준으로 전후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자학이 도입되기 전의 한국유학은 한당유학으로 고려 초, 중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유가를 수행했지만은 사상적으로는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수행하였다. 특히 불교를 숭상하면서 유가 경서에 대한 연구는 미약하였다. 주자학의 도입으로 고려 및 한국 전체 사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정몽주 이전에 많은 고려학자들 즉 안향(安珦), 백신정(白颐正), 이제현(李齐贤), 이곡(李榖) 등 주자학자들도 주자학을 고려로 도입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의 동국 정통 지위의 확립은 이색, 정몽주 등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이색은 주로 '기화' 및 '수양' 등 면에서 주자학을 해석하고 전개하였으며 정몽주는 성리학적 면에서 주자학을 계승하고 발전하였다. 포은은 의리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배운 것을 실제에 응용하도록 강조하였다. 포은은 유가학설을 적극적으로 창도하면서 정주이학 교육을 추진하였다. 포은은 사서인으로 하여금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가묘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하도록 했으며 사회적으로 유가예속을 널리 보급하여 불교의 문화습속을 대체하도록 하였다. 포은은 유가의 충효의리를 강조하면서 유교강상으로 몰락해가는 고려 말을 만회하려고 하였다. 포은은 공민왕16년(1367)에 성균박사에 임명되었다. 포은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의하면서 가장 먼저 주희의 "사서집주"을 해석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해석이 잘 되었는지 의심했었는데 그뒤 호병문(胡炳文, 호는 云峰) 의 '사서통(四书通)'이 고려에 들어온 후 참조해보니 포은이 주희의 성리학 사상에 대한 이해가 호씨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모두 포은의 이론에 탄복했다.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였지만 피살된 후 모든 가산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문헌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실전되어 시문 300여수와 문집 20여 편 밖에 없다. 포은에 대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문집이나 포은의 시문을 통해 포은의 주자이학에 대한 이해, 공맹 사상에 대한 발양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포은은 "사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유학의 도통을 전개하였다. 포은은 "대학" 과 "중용"을 통하여 유학을 파악하였으며 "논어"와 "맹자"를 통하여 신심을 닦고 교양을 쌓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포은이 "오경"에 대한 연구도 정주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포은은 "以默识心融为要, 以践履躬行为本"의 기본 사상으로 성리학 정신을 구현하였다. 포은은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국안민하는 사공(事功)으로도 기여하였다. 포은은 절의, 대의의 정치인이자 고려의 입지를 위해서 유세를 했던 탁월한 외교관이기도 하다. 포은의 일생을 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충효절의 사상이다. 이 또한 포은의 정주이학사상이 밑바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은은 君臣父子(군신부자)의 논리관계를 가장 우선시하였고 효를 행하고 충을 다하는 것을 인도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사신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포은의 충효절의는 성리학을 연구한 결과이며 성리학의 승화이기도 하다. 포은이 한국 성리학에 미친 영향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자이학의 전개로 불교에 대한 숭상을 바로잡았으며, 둘째, 주자이학을 창도함으로써 여말 학자들의 학문 방향을 바로잡았으며, 셋째, "默识心融"과 "践履躬行"를 하나로 통일하여 "义理派"적 정통유학지위를 확고하였다. 따라서 '有德有言, 名实相孚, 文道兼备'가 포은에 대한 가장 좋은 평가가 아닐까 싶다. 在韩国儒学史上, 郑梦周(圃隐)是一位地位非常特殊而重要的人物。他虽非朱子学引入朝鲜半岛第一人, 却被尊为"东方理学之祖";他誓死不仕李氏王朝, 李氏王朝却给予他至高无上的荣誉;他未留下传世的儒学理论著作, 当时及后世诸多名儒却对他敬仰备至。 韩国儒学以朱子理学传入为界, 分为前后两个阶段。朱子学传入前的韩国儒学为汉唐儒学, 及至高丽初、中期时, 儒者文士虽在政治上奉行儒家, 在思想上则儒、释、道三教兼修, 尤其崇尚佛教, 皆能通词章, 对经学却无深入研究。朱子学的输入, 不仅对高丽时代, 而且对韩国整个思想带来重大的转折与影响。在郑梦周之前, 已有不少丽朝学者接触到了朱子学, 安珦、白颐正、李齐贤、李榖等均在朱子学引入高丽方面, 做出了不可磨灭的贡献。但程朱性理学在东国正统地位的确立, 则要归功于李穑、郑梦周等人的努力, 其中李穑主要在"气化"和 "修养"等方面阐释与发展了朱子学, 郑梦周则是在性理学方面继承与发展了朱子学。 圃隐始终强调以义理思想为根本, 强调学以致用, 极力倡导儒家学说, 推行程朱理学教育, 并令士庶仿朱子家礼立庙奉祀祖先, 向社会推广儒家礼俗, 以取代佛教的文化习俗;他尤其重视儒家的忠孝义理, 力求以之扶持纲常, 挽救高丽末期的衰落之势。圃隐自恭愍王十六年(1367)兼成均馆学官后, 第二年拜成均司艺知制教, 恭愍二十年又拜宝文阁应教兼成均直讲, 年底再拜为成均司成, 而至辛禑元年(1375)时则拜为成均大司成。圃隐在成均馆讲授性理学, 是最早为朱熹≪四书集注≫作训解之人, 时人未知其训解正确与否, 心中尚有疑惑。及至胡炳文(号云峰)之≪四书通≫传来, 人们发现, 圃隐对朱熹理学思想之理解竟与胡氏完全吻合, 从而对圃隐钦佩不已。 郑梦周虽被尊奉为 "东方理学之祖", 但由于被杀害后没收家产, 所著文献大多遭毁失传, 仅留下诗文300 余首和书、铭、记等不足20篇, 这给后人开展圃隐研究带来不小的困难。然而尽管如此, 从别人的记述及先生本人的诗文中, 我们仍可感知圃隐对朱子理学的深切领悟、对孔孟思想的积极发扬, 以及对佛老之言的严厉批判。圃隐通过研究 "四书"来接受性理学并发扬儒学道统:从≪大学≫、≪中庸≫中把握了 "儒学为身心之学"的宗旨;从≪论语≫、≪孟子≫中获得了修身养性的方法。圃隐之研究 "五经", 同样是本于程朱思想。更为重要的是, 他 "以默识心融为要, 以践履躬行为本", 他用平时的身体力行, 来体现性理学精神。圃隐不仅在性理学上为时人所推崇, 而且其事功方面亦为人们所称道, 被誉为 "天人之学, 王佐之才。"考其一生, 可谓是屡建奇功:振文风, 立国礼, 整纪纲;革胡服而袭华制,立义仓以赈穷乏, 设水站以便漕运。他还以过人胆识和卓越的外交智慧, 数度挽救国运于危亡。而使圃隐先生的名字在韩国儒学史上彪炳千古的,

        • KCI등재

          포은 정몽주의 사행시에 나타난 문명의식

          박양호(Park, Yang-Ho) 포은학회 2021 포은학연구 Vol.27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포은 정몽주는 역사적으로 대전환기였던 고려 말 수차례 명(明)과 일본을 다녀왔다. 뛰어난 외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포은은 사행 중에 많은 시를 남겼다. 본고는 사행시를 중심으로 포은의 천하 인식과 문명에 대한 인식 양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포은은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책으로 왕권 강화를 도모하던 시기에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민왕의 친명 정책과 명 사행의 영향으로 포은은 친명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절반만 입경(入京)하였지만 6차례나 명 사행에 나서, 중원을 지배한 명나라의 강한 정세와 우수한 문물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은 한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성리학적 사고에 비추어 볼 때 정통성도 갖추었다. 포은에게 명은 「원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기를 청하는 소」에 표현한 것처럼 천하의 의주(義主)로 대접할 만한 대상이었다. 성리학에 기반한 명분론적 화이관과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형세·문화적 화이관에 따라, 포은은 명나라를 천하의 중심이자 문명 질서의 중심으로 인식하였다. 이는 사행 중에 지은 시에 잘 나타나는데, 명 사행시와 일본 사행시에 나타난 포은의 태도와 표현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포은의 문명의식을 둘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먼저 명 사행시를 살펴, 포은이 명을 중화 문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따르려 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포은은 명 방문과 황제와의 만남에 감격했고, 명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에 감탄하였다. 또 명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태평한 시절이 오리라 희망하며, 중화와 이적이 한집안이 되었음을 여러 시에서 강조하였다. 명 중심의 문명 질서를 인식하고, 고려도 같은 질서를 따르고 있으니 중화와 다를 것이 없다는 문화적 동질감과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 사행시 「홍무 정사년에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지은 시」를 살펴, 오랑캐의 풍속이 남아 있는 일본에 대한 포은의 이질감과 우월감을 확인하였다. 일본에 머무르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 향수(鄕愁), 낯선 풍속에 대한 이질감이 시 전체에 걸쳐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포은은 중화 문명을 따르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민족의 문화에는 거리감을 느끼고 고향을 더욱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Po-Eun, one of the newly emerging confucian bureaucrats in the late period of the Koryo dynasty, was highly knowledgeable in Neo-Confucianism, and had a deep consciousness of civilization. He also participated in the realpolitik actively by awakening the people, and expressed his deeds and emotions in his Chinese poems. The late period of Koryo in which Po-Eun took the office was unstable in domestic politics, and China was also unstable due to the transition period from the Yuan to the Ming dynasty. Po-Eun started to take office as ho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60 (the 9th year of King Gong Min rule). King Gong Min tried to reform politics with the idea of Ming-friendly policies, which Po-Eun supported. After King Gong Min was assassinated, he was banished because he made an appeal against influential families such as Lee In-Im trying to reopen the relationship with Yuan dynasty. Even though Po-Eun was a literati, he serviced in a war four times and traveled to China and Japan in disguise seven times. As a confucian scholar, Po-Eun had a Sino-center view, centering on Chinese culture built by Han people. He considered Ming dynasty Sino-center, praised advanced culture of Ming, and included his praise for Ming emperor, palace, and capital city in his poems he left when he traveled to China in disguise. However, this attitude was different from blind worship to the power in that he praised Ming dynasty only after he experienced extremely strong power and civilization of the Ming. Because of this, world view of Po-Eun is seen as situational and cultural Sino-centralism. Po-Eun, who had the consciousness of distinguishing Chinese people from barbarians based on culture, wrote many poems which emphasized that Koryo was not different from China in that Koryo people recognized and followed truth and virtue. On the other hand, his poems he wrote when he traveled to Japan revealed his sense of difference toward Japanese culture. In these poems, he expressed his longing for hometown and his sense of superiority of Koryo culture, which shows his sense of civilization.

        • KCI등재

          포은 한시를 통해 본 포은의 불교 인식

          변종현(Byun, Jong-hyun) 포은학회 2014 포은학연구 Vol.14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포은 정몽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포은은 교조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불교에 대한 이해 역시 깊다고 보았고, 불교와의 교섭·조화 등의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호불(好佛), 지불(知佛), 친불적(親佛的)인 인물로 거론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에 의문점을 가지고 포은이 남겨 놓은 시 작품 가운데 친불교적이라는 시들과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낸 시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포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조선 초기 태종대에 이르러 권근의 상소에서 변화가 시작되어, 포은을 송의 문천상에 비유하여 절의(節義)지사로 추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포은에 대한 인식은 난신과 충신의 인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완결이 고려사의 제신전(諸臣傳) 입전이라는 것이다. 즉, 특히 반역전도 충신전도 아닌 제신전(諸臣傳)의 입전은 이러한 이중적 구도가 반영된 결과물로 볼 수가 있겠다. 포은은 중국과 일본에 사행을 다니면서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중국 중심의 천하를 마음에 두면서 일찍부터 중국의 한족(漢族)이 이룩한 문물을 고려가 받아들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포은은 이처럼 친명(親明)외교를 통하여 고려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감을 이룩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였던 것 같고,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성리학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도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고려말 포은의 이러한 친명외교 전략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한족이 이룩한 중화(中華)중심의 문화와 제도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조선 후기 우리 선조들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포은은 우리나라의 성리학의 터전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소중화 의식을 갖게 만든 원천적 정신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라 여겨진다. 『고려사』정몽주전에 나타난 포은의 주요한 업적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사회를 유학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수도인 개성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하여 유학(儒學)하는 분위기를 진흥시키려 했다. 그리고 성균관(成均館)의 교관(敎官)을 맡으면서 학자들이 모여 서로 토론하면서 성리학적 이치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나가게 되었다. 포은이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인식을 관물(觀物)과 궁리(窮理)를 통해 체득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등의 작품은 춘추․주역․시경․중용 등의 경전을 읽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보기도 하고, 경전의 이치를 시를 통해 다시 음미해 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찰은 종교적인 공간을 넘어서 학습의 공간이나 수양의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관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있었지만 개경에 십이도가 설립되어 사학이 발달한 시기였다. 사학의 학습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하천도회(夏天都會)였다. 즉, 십이도(十二徒)들은 제각기 속해 있던 재에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여름철이 되면 개성의 귀법사(歸法寺)와 용흥사(龍興寺) 등에 모여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찰이라는 공간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학습과 수양, 그리고 안신(安身)의 공간 등으로 활용되었다. 스님과의 교류도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포은은 스님들에게 준 시에서 불교의 진리를 찾는 방법이나 불교 교리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시들이 있다. 에서는 우왕과 공양왕 때 국사(國師)를 지낸 보각국사 혼수(混修)에게 포은은 불교의 진리체계가 환망(幻妄)으로 귀착된다고 비판하였고, 에서는 현상적인 자연을 버려두고 참선에 들어가는 스님의 구도(求道) 방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암권자(古嵒卷子)>는 고암스님의 설법이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고, 에서도 포은은 원조스님에게 불교에서 말하는 도와 마음을 비유한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처럼 포은은 불교문화가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던 고려 후기에, 성리학적 세계 인식으로 사상을 전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한족(漢族)이 이룩한 중화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포은이 당대 고승(高僧)이었고, 국사(國師)였던 혼수 스님에게 써 준 시는 포은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뚜렷이 보여 주었고, 스님에게 준 시나 고암과 원조스님의 두루마리에 써 준 시에서도 스님들의 구도(求道) 방법이나 참선 태도, 불교의 교리 등에 문제가 많다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Poeun, Jeong Mong-ju was a politician and philosopher in the late Goryeo. According to the previous studies of Poeun, he, unlike dogmatic confucian scholars, was in favor of Buddhism and had a profound understanding of Buddhism. In addition, he was referred to as a figure who had been favorable, knowledgable and friendly of Buddhism. This study has a question for the previous studies and examines his Buddhist-friendly poetry and Buddhist-unfriendly poetry among his works. Historically, Poeun started to be reappraised by Kwongeun during the era of King Taejong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the light of this, Poeun was recognized as both loyal subject and traitor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result, his works were included in Jesinjeon (stories including every subject) in the history of Goryeo. That is, they were not included in either loyal subject stories or traitor stories. Due to this dual structure, his poems might have been included in Jesinjeon. Privately traveling to China and Japan, Poeun experienced their advanced civilization and he considered China as the center of the world. Therefore, he expressed that Goryeo adopted Han chinese’s advanced civilization at a proper time and it had pride in sharing their civilization. Poeun seemed to appreciate that Goryo could have got cultural and political stability through this Myoung-friendly diplomacy. His thoughts could be based on Hwairon world view of Neo-Confucianism. Having been to Myoung several times, he experienced the change of international situation and its culture and institutions in person. It led him to insist on Myoung-friendly diplomacy. Since then Chosun kept adopting Han chinese’s culture and institutions based on sinocentrism(the belief that China was literally the center of the Earth) and people in the late Chosnn had lived with small sinocentrism. Eventually, Poeun can be evaluated as the scholar who arranged our Neo-confucianism and from whom small sinocentrism was mentally originated. In Jeong Mong-ju story of History of Goryeo, Poeun’s main achievement was in that he made an attempt at changing Goryeo’s buddhist-centric society into confucianist-centric society. That is, to encourage and teach confucianism he built Obuhakdang in Gaesung, capital of Goryeo, and established Hyang-gyo in the provinces. Besides, he, as a trainer of Seonggyungwan, could strengthen Neo-confucianism theories, debating about Neo-confucianism with other scholars. Poeun wanted to learn the neo-confucianism view of world through guanmul(觀物) and gungli(窮理). In , , and of his works, he tried to apply the theories of Chunchu, Juyeok, Sigyoung and Jungyong to his life , and to recite their theories through his poetry. In the era of Goryeo, temples played a role as a study place, a character building place as well as a religious place. In other words, there was a government educational institution called Gukjagam and 12 private schools called Sibido, which were built in Gaesung, were prosperous in the period. Private schools focused on hacheondohoe(夏天都會) in their curriculums. That is, students usually studied at Sibido which belonged to each Jae but they periodically got together to study in the summer. It was called hagua or hacheondohoe(夏天都會). They usually studied at Guibeobsa(歸法寺) and Yongheungsa(龍興寺). In the era of King Gojong, it was recorded that Hagua was carried out at Yeonmijung, Gangwha. Considering this cultural heritage, we can recognize that temples in the era of Goryeo had functions for studying, character building and relaxing, let along religious function. Interacting with buddhist monks w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function. The heritage has been succeeded until today. Like the previous temples, today’s temples are used as test-preparation and school trip places for students and as relaxing and comforting places for ordinary people.

        • KCI등재후보

          포은종가의 계승과 세거지

          홍순석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1 No.-

          포은종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포은의 위상에 비해 종가의 실상은 극히 미미하다. 여말선초의 벌족 가운데 포은종가처럼 부침(浮沈)이 많은 종가는 없으리라 본다. 포은의 순절 이후, 세조 때 손자 보(保)의 참화, 성종 때 증손 윤정(允貞)의 참화 등으로 역대 임금의 시혜(施惠)에도 불구하고 고려말기 포은종가의 성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포은종가의 봉사손은 조선 태종 때 포은이 신원되고 추증된 이후, 조선 말기까지 역대 임금으로부터 여러 차례 복호(復戶)와 녹용(祿用)의 시혜를 받았다. 숙종 재위 기간에는 이정구, 송시열의 각별한 배려로 봉사손의 녹용은 물론, 포은의 현양을 위한 여러 사업이 추진되었다. 무엇보다도 단종 복위와 함께 정보에게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포은과 설곡의 충절이 크게 부각되고 칭송되었다. 충렬서원의 건립, 포은영당의 중건 등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재위기간의 이 같은 특별한 배려로 16세기에는 무관직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온 영일정씨 포은공파 가문이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여러 명의 명망 있는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종가의 봉사손에서는 명망 있는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 포은 봉사손의 입계 양상에서 살폈듯이 포은종가는 11세손 찬광(纘光) 이후 22세손 의열(義烈)까지 13대에 걸쳐 6차례나 입계하여 봉사손을 계승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 같은 불운이 포은종가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포은종가의 통혼관계에서도 조선 전기에는 포은의 명성이 그대로 반영되었던 반면, 후기에서는 한미한 가문으로 몰락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포은의 장남 종성(宗誠)은 정종의 4남인 선성군(宣城君)과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順城君)을 사위로 맞아 왕실과 혼척관계를 맺었다. 이 당시야말로 통혼관계에서도 영일정씨 포은공파의 최대 성세였다. 손자 보(保)의 당대까지도 통혼관계는 벌족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설곡의 참화 이후에는 그같은 성세를 살필 수 없다. 포은공파 종가의 경우 죽산박씨, 경주이씨, 창녕성씨, 전의이씨, 청주한씨 등의 가문과 통혼하였다. 그 가운데 용인지역에 세거하는데 상호 영향을 미쳤던 가문은 죽산박씨, 용인이씨, 연안이씨, 순흥안씨, 한양조씨 등이다. 특히 연안이씨 저헌공파(樗軒公派)와의 통혼은 모현면 능원리에 정착하여 세거하는데 상호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에는 은진송씨(恩津宋氏)와의 통혼관계가 주목된다. 포은종가 봉사손의 세거지는 조선 건국 이래 말기까지 한양 도성 안에 있었다. 세조 때 정보가 참화를 당하기 이전에는 중부 견평방(堅平坊) 의금부 자리에 거주하였다. 정보의 참화로 포은종택이 적몰된 이후, 두 아들 윤정(允貞)․윤관(允寬)은 정보의 적소(謫所)인 단성(丹城) 문태촌(文泰村)에서 함께 거주하였다. 정보가 단성 적소에서 졸한 이후에는 장남 윤정은 선조의 향사를 모시기 위해 용인에 거주하였으며, 3남 윤관은 단성에 남아서 정착하였다. 5세손 희(熹)가 성종의 시혜로 사옹원 참봉으로 탁용되면서 다시 한양 도성 안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7세손 진(震)의 집이 한성의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었다는 기록을 전제하면, 희(熹)-세건(世健) 부자가 거주한 곳도 낙선방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8세손 응선(膺善)․명선(明善)․종선(從善) 모두 낙선방에서 출생하였다. 1640년(인조18)경 9세손 준(儁)의 집을 방 ...

        • KCI등재후보

          天下何人不夢周? -鄭夢周在中國本土的影響

          곡금량(曲金良)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1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포은학, 즉 포은 정몽주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의 한 구성 부분일 뿐만 아니라, 중국학의 한 구성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전통우방으로서 같은 문화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귀속할 수 있다. 포은학은 중ㆍ한 문화공동체에 속한 문화현상으로, 포은 정몽주는 중ㆍ한 양국의 문화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명ㆍ청 시기에 포은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시기별로 전ㆍ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여말선초,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명나라에 올린 주문(奏文)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런 주문은 조선 왕조의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 때, 정몽주는 흔히 '권신(權臣)'ㆍ'간신(奸臣)'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중국 본토에서는 여말선초 때의 '권신설'ㆍ'奸臣說'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세종대부터 편찬하고, 문종대에 성서(成書)한 『고려사』는 조선왕조의 포은 정몽주에 대한 평가의 변모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중국 본토에서의 포은 정몽주의 평가도 변모하였다. 명나라 만력대(萬曆代)의 진사 전겸익(進士 錢謙益)은 『열조시집(列朝詩集)』을 편찬할 때, 포은 정몽주의 시를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전겸익은 명말청초 중국 문단의 대표 인물로서 그가 편찬한 『열조시집』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청나라 순치대(順治代), 강희대(康熙代), 선통대(宣统代)에 여러 번 간행되었다. 『열조시집』에 수록한 다른 두 조선 사람의 시도 정몽주와 관련이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당시 중국 본토에서 포은 정몽주는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다. 『열조시집』은 청나라 강희 21년(숙종 8년, 1682년)에 조선에 전입되면서 당시 문인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다. 청나라 중엽, 주이존(朱彝尊)이 명나라 시가를 모은 시가총집 『명시종(明詩綜)』에서도 포은 정몽주의 시를 필수로 선록(選錄)하였다. 주이존은 『명시종』에서 정몽주의 행적에 대해 간단히 적었고, 『고려사』에서 포은 정몽주의 행적을 간과하지 않았던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청나라 말엽, 오경지(吳慶坻)는 『조선시록(朝鮮詩錄)』의 간행경위를 자세히 소개하였다(『초랑좌록(蕉廊脞錄)』 권5). 『조선시록(朝鮮詩錄)』은 총 4책인데, 첫 책에 포은 정몽주의 시를 수록하였고, "그 뒤에 또한 정몽주의 시를 수록하였는데 대개 두 책에 달하였다(其後又錄鄭夢周詩 幾盈二冊)."라고 하였다. 이는 총 4책인 『조선시록』의 절반 즈음에 가까운 분량이다. 이로부터 포은 정몽주의 중국 본토에서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근현대에 들어서서 중국 본토에 끼친 포은 정몽주의 영향도 20세기 90년대를 기점으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차 아편전쟁'이후, '양무파(洋務派)'와 '서화파(西化派)'가 흥성되면서 점차 학술ㆍ문화 분야에서 지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 본토의 역대 문인과 걸작에 대한 정리는 거의 정체되었고, 포은 정몽주를 비롯한 역외 문인에 관한 연구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인 20세기 50~60년대, 중국 본토에서는 포은 정몽주 연구의 새로운 고조가 일어났다. 이소일(李少一)의 『정포은에 대하여(關於鄭圃隱)』는 당시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곽말약(郭沫若), 북한 부수상 홍명희, 북경대학교 저명한 사학가 전백찬(翦伯贊), 북경대학교 사학가 주일양(周一良) 등 문인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2년 중ㆍ한 수교 이후, 한국에서 붐을 일었던 포은학 연구 성과가 중국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북경대학교의 루우열(樓宇烈) 교수는 20세기 90년대 초반부터 포은 정몽주 및 한국의 성리학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이다. 이로부터 정몽주가 중국으로 사행하는 길에 투속한 곳, 교통로(해로)도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부상되었다. 한국 학계 및 영일정씨 포은공파가 포은 정몽주의 사행 경로와 사행 유적지에 대한 중시는 중국 본토의 학자, 관련 지방 정부기관의 관심을 야기하였다. 당대에 들어서서 중ㆍ한 양국관계의 발전과 더불어, 포은 정몽주의 사상ㆍ시문ㆍ행적에 관한 연구도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되고, 유가 문화에 대한 연구도 더욱 발전될 것으로 생각한다. 郑梦周在明清时代中国的影响, 可分为前后两个时期。 第一个时期, 是明初根据高丽末朝鲜建国初期对明朝廷的奏报。奏报原文见李氏朝鲜的 ≪李朝实录≫, 郑梦周是作为"权臣"、"奸臣"定性的。由此, 在中国本土, 当时对郑梦周的定性与评价, 与高丽末朝鲜初一致。李氏朝鲜对郑梦周的评价, 到了世宗时编撰、文宗成书≪高丽史≫ 彻底转变。于是在中国本土, 对郑梦周的定性与评价, 也随之彻底转变。到了明万历进士钱谦益编纂 ≪列朝诗集≫, 郑梦周诗成为重要选项。因钱谦益在明末清初是文坛盟主, ≪列朝诗集≫影响巨大。顺治、康熙、宣统等各代多次刊刻。 ≪列朝诗集≫ 所选诗, 还有另外两位朝鲜作者的诗与郑梦周有关, 可见其在中原大陆受到的广泛关注。 ≪列朝诗集≫ 于清康熙二十一年 (朝鲜肃宗八年,1682)传入朝鲜, 受到高度重视。 清中叶朱彝尊编选的明代诗歌总集 ≪明诗综≫, 郑梦周又是必选。在 ≪明诗综≫ 中, 朱彝尊对郑梦周不但作有简要的生平介绍,还在文末附有按语, 对 ≪高丽史≫ 不没郑氏事迹大加称赏。晚晴吴庆坻 ≪蕉廊脞录≫, 卷五又记有 ≪朝鲜诗录≫ 四册辗转抄阅流传的情况。 ≪朝鲜诗录≫ 四册, 不仅第一册中即录有郑梦周诗, 而且"其后又录郑梦周诗, 几盈二册", 即几占了 ≪朝鲜诗录≫ 四册的一半的篇幅份量, 可见郑梦周及其诗在中国本土一直以来的影响。 郑梦周在近现代和当代中国的影响, 同样也可分为两个时期: 一是20世纪90年代以往, 一是20世纪90年代以来。 近代中国, "洋务派"和西化派主导学术文化, 妨害了中国本土对历史上中外历代名家名作的整理、研究和评价。中国本土现代人对郑梦周的关注和研究, 是新中国即中华人民共和国成立之初的20世纪50、60年代。李少一 ≪关于郑圃隐≫ 的研究和探求, 牵动了时任中国科学院院长的郭沫若、朝鲜副首相洪命熹、北京大学著名史学家翦伯赞、周一良等的高度重视和研究、评价。 20世纪90年代以来, 自中韩两国建交, 韩国的郑梦周研究即圃隐学热感染了中国学界。像北京大学楼宇烈教授等, 是90年代较早系统梳理、研究郑梦周与韩国性理学的著名学者。郑梦周出使入朝所往返经过的海道, 也成为人们重视的"节点"。韩国郑梦周研究学界和郑氏宗亲对郑梦周在中国本土行止遗迹的重视得到了中国本土相关学者、各地政府和相关部门的积极呼应。中韩的当代合作, 将使郑梦周之思想、诗文、行迹在中韩两国得到当代"落地", 这样的儒家文化之树, 有望在当代中韩两国越来越茁壮地成长。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