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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祖御製 帖本 律文의 종류와 주제

        안장리(An Jang-li)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장서각 Vol.0 No.16

        이 논문은 영조어제 첩본 율문의 종류와 주제에 대해 고찰하였다. 영조어제는 간본과 첩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년 영조의 작품은 대부분 첩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영조어제가 첩본으로 보존된 것은 일차적으로 영조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즉 선왕인 숙종보다 많은 시문을 지을 수 없다고 하여 작품마다 첩으로 만들도록 하였던 것이다. 영조는 전통적인 시문을 짓지 않은 대신 독특한 산문과 율문의 작품을 남겼는데 율문의 형식은 3언, 4언, 5언, 6언, 잡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중에는 3언율문이 가장 많이 있는데 본고에서는 영조가 왜 굳이 3언 율문을 선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갈래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율문 3언 형식과 연관된 자료로는 실록의 비망기, 3언 한시, 악장, 가사 등을 들 수 있는데 비망기에는 신하와의 문답에서 3언으로 기록된 경우가 산견되었다. 3언한시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별로 유행하지 않았던 형식임을 확인하였다. 악장에서는 3언으로 이루어진 면이나 음악적 성격 등에서 관련성을 찾았다. 3언 율문의 교술성과 내외 3언을 1구로 설정하여 100언으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을 가사에 가까운 특성으로 보았다. 이처럼 다양한 갈래와 연관성을 보이는 영조어제첩의 율문은 영조에게는 눈어둡고 귀어두운 만년임에도 하루에 몇 편씩 지을 정도로 익숙한 글쓰기였다. 영조어제 첩본의 주제는 늙고 병들어 늘 약을 끼고 살았던 만년의 한탄이 주조를 이룬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노년의 처지, 질병의 고통, 가족에 대한 추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조 어제 첩본의 독특한 양식은 효심에서 시작되었으나 자기에게 맞는 문체의 창조로 나아갔다. 즉 3언 율문은 오랜 실험 과정을 거쳐 80세에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는 한문으로 표현되었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가창 방법 모색의 일환으로 수립되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영조어제 첩본 5천여편이 십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창작될 수 있었던 것은 대상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전이되었으며, 특별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일상적 경험과 추억을 그대로 읊었기에 하루에도 몇 편씩 자술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The paper intends to explain the form and subject of the poetry in King Yongjo's album. The works of King Yongjo was composed with book and album. and the most of that is album. Yongjo did not want to write more works than his father. So he write differnet style. It is composed with three chinese charicters, four chinese charicters, five chinese charicters, six chinese charicters, mix chinese charicters. The most of that is three chinese charicters, At first, he write four chinese charicters for the most part. But after A.D.1771, he write three chinese charicters, The form of three chinese charicters is various. The first is the Bi mang gi (備忘記) that is recorded in Veritable Records of Choseon dynasty. The second is three chinese charicters which was ancient chinese poems. The Third is music texts which existed at early Choseon dynasty. The forth is Gasa(歌辭) which was extended until 100 characters. The subject of three chinese charicters is four. The first is lamenting for the later life. The second is physical pain with disease. The third is look back upon the memory of his late familly. The forth is discontented with the way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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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장르변형 글쓰기

        안장리(Jang Li An)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5 동방학지 Vol.130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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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근(權近)이 추구한 유교국가의 국왕상(國王像) 고찰

        안장리(An, Jang-Li) 포은학회 2015 포은학연구 Vol.1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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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조선이 유교국가가 되는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교국가의 키워드를 국왕으로 보고 조선 초기 대표적인 유학자 권근이 정립하려고 하는 국왕상을 조명해 보았다. 권근은 유학관련 저술과 상소를 통해 유교국가의 이상적인 국왕의 면모를 제시하였다. 본고에서는 권근의 저술중『서천견록(書淺見錄)』과『시천견록(詩淺見錄)』, 그리고 상소 중에는 우왕에게 올린 3편의 상소와 정종에게 올린 1편의 상소 그리고 태종에게 올린 3편의 상소를 대상으로 하였다. 본고에서는 권근이 이들 상소에서‘하늘, 부모, 백성, 자신, 신하’ 등 5요소에 대한 국왕의 태도 정립을 요구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국왕상의 면모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권근이『서천견록』, 『시천견록』등 경서에 대한 견해에서 제시한 국왕상은 공경의 마음과 구덕(九德)을 갖추고 전조(前朝)의 신하들을 포용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18세의 혈기방정한 나이에 권신의 꾀임으로 정사를 게을리 하고 놀이에 빠진 고려 우왕에게 요구한 국왕상은 밤에 자고 낮에 깨어있으며 바른 자세로 덕성을 함양하는 수양의 자세였다. 그러나 우왕은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다 결국 24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정종에 대해서도 재미에 탐닉하지 말고 국왕으로서의 체통을 지킬 것을 건의하였다. 정종은 2차례의 걸친 왕자의 난이라는 격동 속에 곧 왕좌에서 물러났다. 태종에게는 국왕으로서의 자기 성찰과 학문정진, 부지런한 정사 외에 전조에 절의를 지킨 신하에 대한 포상과 왕과 백성을 위해 죽었음에도 제사할 후손이 없는 인물에 대한 여제(厲祭) 등을 베푸는 국왕상을 제시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태종은 정몽주와 같이 자신이 죽인 전조의 신하를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조 위에 ‘절의’라는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유교국가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권근은 우왕대부터 끊임없이 경연을 강조하는데 이는 성리학을 뿌리내리려는 조선 초기 상황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국왕을 만들려는 성리학자 권근의 기본적인 의도였다. 태종은 권근이 건의한 효의 강조 그리고 전조의절의에 대한 포상 등을 통해 유교국가의 기틀인 충효를 장려하고 실천하는 국왕상을 정립하게 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process of Joseon becoming a Confucian country. Under the goal, the study set kings as one of the keywords of Confucian country and examined the image of kings that Gwon Geun, one of the utmost Confucian scholars in the early days of Joseon, tried to establish. Gwon proposed the aspects of ideal king in a Confucian country by writing Confucianism-related books and submitting memorials. The study looked into two of his books, Seocheongyeonrok and Shicheongyeonrok, and seven of his memorials, which include three submitted to King Woowang, one to King Jeongjong, and three to King Taejong. Recognizing that he demanded that kings should establish an attitude toward five elements of “Heaven, parents, people, themselves, and subjects” in his memorials, the investigator examined what kind of attitude requested by him. In his views of Confucian classics in his Seocheongyeonrok and Shicheongyeonrok, he proposed an image of kings that had a heart of respect and nine virtues and was capable of embracing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In his memorial submitted to King Woowang of Goryeo, he especially emphasized cultivation of “oneself” to the king that was idle with political affairs and immersed in play at the age of hot-blooded 18 due to the temptations of a powerful courtier. Although he stressed that the king should cultivate his virtues in the right posture, sleeping at night and being awaken during the day, the king kept leading a dissipated life and ended up being killed by poison ordered as a death penalty at the age of 24. Gwon also suggested to King Jeongjong that he should prevent himself from indulging in fun and maintain his dignity as a king. The king was faced with a turmoil of prince’s uprising twice and ended up coming down from the throne. He proposed to King Taejong that he should work on self-reflection, devotion to study, and diligence with political affairs as a king, give rewards to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that adhered to their principles, and hold a memorial service for those who died for the king and people and had no descendents to hold such a service for them. Gwon wanted that the king would grant rewards to the subjects of the previous dynasty that he killed such as Jeong Mong-ju, establish a concept of “fidelity” above country and dynasty, and solidify a foundation for a Confucian country that placed the highest values on ideology. Gwon continued to emphasize lecturing and study with kings since the reign of King Woowang, which was his basic intention as a Neo-Confucian scholar to equip a king with Neo-Confucianism in the early days of Joseon when Neo-Confucianism was about to take root in the country. By proposing an image of kings to Kings Jeongjong and Taejong, he established an image of kings that encouraged and practiced loyalty and filial piety, which were parts of the foundation of a Confucian country, by stressing filial piety and giving rewards for loyalty to the previous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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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鄭夢周)의 '단심(丹心)'과 이정(李婷)의 '무심(無心)' 비교

        안장리(An Jang-li)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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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는 시조 <단심가>와 <무심가>로 알려진 정몽주와 이정의 문학작품을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이정이 지닌 '무심'의 세계를 밝히고 단심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 하였다. 이정의 생애를 졸기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정은 조선 성종의 동생으로 지적이고 문학적 역량이 있었으며,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모든 벼슬과 교유를 포기하고 늘 동생인 성종을 왕으로서 섬기며 신하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살아야 하였다. 성종의 태평시대, 이정은 가장 바람직한 왕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중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늘 국가를 대표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리학을 받아들여 국가 이념을 세웠고 고려를 위해 죽은 정몽주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정몽주와 이정의 문학세계를 봄, 가을, 이상향, '단심'과 '무심' 등으로 나누어 다루었다. 첫째, 봄에 대해 이정이 아쉬움을 노래하였다면 정몽주는 언제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읊었다. 둘째, 가을에 대해 이정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한탄을 읊었다면 정몽주는 사신으로서의 긍지와 도덕적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를 읊었다. 셋째, 이상향에 대해 이정에게는 이상향 강남이 술과 그림을 통해 현실을 탈피하여 찾아가고픈 공간이라면 정몽주에게 강남은 실제공간으로 중국의 수도이며 천자가 사는 곳이었다. 넷째, '무심'이 역량은 있어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이정이 선택해야만 했던 마음이었다면 정몽주에게 '단심'은 국내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해서 모든 역량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하는 마음이었다. 본고에서는 '단심'과 '무심'이 정몽주와 이정이 각각 자신들이 처한 시대와 신분에 맞는 최상의 심상이었음을 밝혔다. This article compared the literary works of Jeong mong-ju and Lee jeong what are famous as <Dan-sim ga> and <Mu-sim ga> of the progenitors. With this, this study tried to find the world of 'Mu-sim' of Lee jeong who is relatively not famous well and recall the meaning of <Dan-sim>. This paper reviewed life of Lee jeong with 'Jol-ki (the record of his death). As Lee jeong was a brother of King Seong-jong in Joseon Dynasty, he was intelligent and had literary capability and was of high standing. However, he gave up all government post and companionship and had to live for being content with the life as a vassal that took care of his younger brother, King Seong-jong. During the King Seong-jong' time of quiet, Lee jeong lived his life as the best prince. He always was busy himself for going to China and Japan and coming back as a representative of a nation and established the Korean ideology to accept Neo-Confucianism, so he lived the exact opposite of Jeong mong-ju who died for Goryeo Dynasty. This paper examined to divide the literary world of Jeong mong-ju and Lee jeong into spring, autumn, utopia, 'Dan-sim' and 'Mu-sim'. Firstly, Lee jeong song a sense of frustration for spring, on the other hand, Jeong mong-ju wrote first his devotion for the nation always. Secondly, Lee jeong recited his own misfortune in the world where nobody understood him well for autumn, otherwise, Jeong mong-ju recited his will that tried to make the ethical world with the pride of an envoy. Thirdly, utopia was a gangnam where Lee jeong wanted to go out of the reality through alcoholic drink and painting, on the other hand, for Jeong mong-ju a gangnam was the capital city of China where an emperor lived as a real space. Fourthly, 'Mu-sim' was Lee jeong's heart which he had to select who couldn't open his capability even if he had, otherwise, for Jeong mong-ju, 'Dan-sim' was his devotion that had to open actively all his competences in outside and inside a nation as a representative of a nation. This article found that 'Dan-sim' and 'Mu-sim' were the best image in which Jeong mong ju and Lee jeong, respectively, faced the age and the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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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英祖) 궁궐 인식의 특징

        안장리(An Jang-li)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한국학 Vol.29 No.3

        본고에서는 영조 이전 시기 위정자들이 궁궐명명의 기준을 국가의 공적공간임을 표상하여 ‘국가의 융성,’ ‘유가 덕목,’ ‘승경의 향유,’ ‘건물의 기능’ 등에 두었으나 영조는 궁궐의 일부 건물을 사적 공간으로 인식하여 개인적 추억과 추모를 궁궐 명명의 기준으로 두었음을 밝혔다. 또한 이와 같은 명명의 배경으로 영조 만년 생활의 특징인 정침이 아닌 집경당에서의 30년 생활, 어제의 다작(多作)과 독특한 문체 창조 등을 들었다. 영조가 경희궁의 정침(正寢)인 융복전(隆福殿) 보다 회상전(會祥殿)을 숙종(肅宗)의 상징물로 여긴 이유는 영조가 7년간 ‘억석와(憶昔窩)’라 이름 붙인 사알방(司謁房)에서 회상전의 선왕을 시탕(侍湯)했기 때문이며, 보경당(寶慶堂)을 ‘탄생당(誕生堂)’이라 명명한 이유는 생모에 대한 예우로 붙인 것으로 보았다. 경선당(慶善堂)은 왕자의 거처였는데 영조는 부모에게 귀여움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부모에 대한 ‘추모당(追慕堂)’이라 명명하였다. 집경당(集慶堂)은 영조 만년의 생활 공간으로 본래 예연당(蘂淵堂)이던 이름을 숙종이 집경당으로 개명하였고 영조는 종용당(從容堂), 정와당(靜臥堂) 등의 별명을 붙였다. 함일재(咸一齋)는 창의궁(彰義宮)의 한 건물로 영조는 이 ‘구저(舊邸)’를 자식과 손자까지 추모하는 가족 추모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이외에도 영조는 궁궐 주변 경물 중 본인과 관계된 곳을 ‘추모동(追慕洞),’ ‘추모현(追慕峴)’ 등으로 명명하여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특성을 일반성으로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는 궁궐을 왕으로서의 위정 공간으로 여기거나 개인적 건물을 사대부의 자성공간으로 삼아 명명하던 방식과는 아주 달라진 양상이다. 이로 볼 때 조선후기의 구체적 실상과 일상성을 중시하던 풍조는 왕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This thesis is intended to show the trait of King Youngjo. Jeong do jeon (鄭道傳), King Saejo(世祖), King Injo(仁祖), King Sukjong(肅宗), the politician thought the palace as governmental place. So each building in the palace was called as 'prosperity of nation', 'Confucianism', 'participate with beautiful scenery', 'the purpose of each building'. King Youngjo regarded the palace as a symbol of his private place. He named Salbang(司謁房) Eokseokwa(憶昔窩). That was continuous with his father. He named Bokyungdang(寶慶堂) Tansaeingdang(誕生堂) not as an expression of self-pride but as a filial gesture to his birth mother. He named Kyungsondang(慶善堂) Choomodang(追慕堂) as it reminded him of his childhood. Jipkyungdang(集慶堂) was a place where King Youngjo worked at his advanced age. He named it Jongyoungdang(從容堂) or Jeongwadang(靜臥堂). This testifies to the trend of the late Chosun dynasty when routines were highly regarded both outside and inside of the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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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상팔경(瀟湘八景) 수용과 한국팔경시의 유행 양상

        안장리(An, Jang-Li)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4 한국문학과 예술 Vol.13 No.-

        중국 소상팔경 문화는 한국에 유행하여 문학, 미술, 조경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소상팔경문화가 한국에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문학 분야 한국팔경시를 대상으로 그 이유를 살펴보았으며, 일상성과 전범성의 원리에 의해 한국팔경시가 유행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고려 명종대 유입된 소상팔경은 중국 명승인 소상강지역의 여덟 경승을 시와 그림으로 향유하는 탈속적이고 고고한 문화의 전범이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소상팔경시를 시재를 겨루는 도구로 인식하게 하고 소상팔경에 등장하는 기러기를 사람들의 주살을 두려워하는 생활속의 경물로 변화시켜 친근하고 일상적인 경관으로 만들었다. 이제현은 중국에 있으면서 고국의 수도 송도를 팔경시의 대상으로 삼아 팔경의 한국화를 이루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고향, 부임지 등 주변 경관의 일상적인 모습을 팔경시로 읊는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한산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아 한산팔경시를 지었고 안축은 자신의 부임지인 삼척을 대상으로 삼척팔경시를 지었다. 한국팔경시의 유행은 한국팔경시의 전범화를 촉진시켜 자신의 목적을 선전하는 도구로서 한국팔경시를 활용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정도전은 새로운 도읍을 팔경시로 노래하였고, 김종직은 자기 고향 사람들의 유교 생활 실천을 천양하였다. 심지어 수양을 중요시한 사림들이 은거지에서의 수양생활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는데 까지 이르렀으며, 임금 또한 자신의 후원공간을 팔경의 대상으로 삼는 등 한국팔경시는 일상화와 전범화의 원리에 의해 지역과 계층을 초월하여 유행하게 되었다. The Chinese culture of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was in vogue in Korea and had enormous impacts on Korean culture, art, and landscaping. What were the reasons behind its fashion in Korea? This study examined the reasons through the Palgyeong poetry of Korea and found that the poetry was in vogue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ordinariness and canonicity. Being introduced in Goryeo during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were a canon of unworldly and aloof culture to enjoy the eight picturesque sceneries of the Xiaoxiang River, one of the scenic spots in China, through poems and paintings. Lee Gyu-bo made the poetry of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perceived as a tool to compete over poetic materials and turned the wild geese in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into the natural features in life that were afraid of human arrows, thus making them as part of the familiar daily landscape. Staying in China, Lee Je-hyeon made Palgyeong a Korean style with the Palgyeong poems on Songdo, the capital of his home country. There was a trend in vogue which depicted the daily aspects of surrounding landscape such as one"s hometown and new post with Palgyeong poems. Lee Saek wrote Hansan Palgyeong poems with Hansan, his hometown, as the object of Palgyeong. Ahn Chuk wrote Samcheok Palgyeong poems with his new post Samcheok as the object. The fashion of Korean Palgyeong poetry facilitated its canonization and thus resulted in cases of using it as a tool to promote one"s goals. Jeong Do-jeon sang about the new capital with Palgyeong poems, and Kim Jong-jik spread the practice of Confucian life among the people of his hometown. Even the Sarims that valued cultivation made their cultivation life at the retirement places the object of Palgyeong, and the kings made their back gardens the object of Palgyeong. Those cases indicate that the Korean Palgyeong poetry was in vogue regardless of region and social clas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popularization and cano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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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어제의 봉모당 소장 양상 고찰

        안장리(An, Jang-li)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장서각 Vol.0 No.40

        본 논문에서는 영조어제 현황과 봉모당의 소장양상을 고찰하였다. 영조어제는 문집, 열성어제, 刊本, 帖本 등 4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문집을 시기별로 구분하면,『어제』 상(1714년~1747년 11월), 『영종대왕어제속편』(1758년 6월~1761년 6월), 『영종대왕어제』(1761년 8월~1763년 7월), 『어제』 하(1763년 8월~1764년 7월), 『集慶堂編輯』(1764년 11월~1767년 9월), 『속집경당편집』(1768년~1770년 8월). 『英宗大王御製拾遺』(1725~1776) 등이다. 이들은 정조 대 건립된 봉모당에 보관되었으며, 철종 대 이건된 봉모당에서 『집경당편집』만 후고에 보관되고 다른 어제들은 봉모당에 그대로 보관되었다. 『열성어제』의 영조어제는 先王인 숙종보다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없다는 이유로 1714년부터 1758년까지의 어제만 편찬하였고, 이를 영조 사후에 간행하였다. 이 역시 철종 대에는 후고에 보관되었다. 영조어제첩본은 『奉謨堂奉安御書總目』에 의하면 1741년부터 1776년까지의 어제로 이루어져 있으나 1770년 이후의 작품이 대부분이며 봉모당에 26개 함에 보관되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영조어제간본은 『奉謨堂奉藏書目』에 의하면 1741년 〈御製大訓〉 간행 이후 1776년까지 수시로 간행되었다. 역시 봉모당에 2개의 함에 보관되어 왔다. 현재 영조어제는 대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영조의 문집, 영조어제첩 등은 『英祖 · 莊祖文集』, 『英祖文集補遺』, 『英祖御製解題』 등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출판하였고, 영조어제간본, 열성어제 등은 『英祖御製訓書』, 『열성어제』 등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출판한 바 있다.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the current state of King Yeongjo’s creations and Bongmodang’s possession patterns of them. His creations consist of four types, which are his collections of works, Yeolseong creations, Gan versions and Cheop versions. His collections of works were divided by the period, and they were “Eoje” Sang (1714~November, 1747), “Yeongjongdaewangeojesokpyeon” (June, 1758~June, 1761), “Yeongjongdaewangeoje” (August, 1761~July, 1763), “Eoje” Ha (August, 1763~July, 1764), “Jipgyeongdangpyeonjip” (November, 1764~September, 1767), “Sokjipgyeongdangpyeonjip” (1768~August, 1770), and “Yeongjongdaewangeojeseupyu” (1725~1776). They were housed at Bongmodang that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Only “Jipgyeongdangpyeonjip” was transferred to the Hugo of Bongmodang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Cheoljong with the remaining creations preserved at the original one. In “Yeolseongeoje,” King Yeongjo’s creations only between 1714 and 1758 were published because he believed it would be wrong to publish more works than his predecessor King Sukjong. They were published after his death and housed at Hugo during the reign of King Cheoljong. According to “Bongmodangbonganeoseochongmok,” the Cheop versions of his creations included the ones created between 1741 and 1776 with most of them created after 1770. They were kept in 26 boxes at Bongmodang. According to “Bongmodangbongjangseomok,” the Gan versions of his creations were frequently published from 1741 when “Eojedaehun” was published to 1776. They were kept in two boxes also at Bongmodang. Today most of King Yeongjo’s creations are housed at Jangseogak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is personal collections of works and Eoje Cheops were published into “Collections of King Yeongjo’s and King Jeongjo’s Works,” “Boyu of King Yeongjo’s Collection of Works” and “Haeje of King Yeongjo’s Creations” by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Gan versions of his creations and Yeolseong Eojes were published into “Hunseo of King Yeongjo’s Creations” and “Yelseongeoje” by Kyujanggak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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