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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珠寺 〈三世佛會圖〉의 祝願文 解釋과 製作時期 推定

        강관식 국립중앙박물관 2019 미술자료 Vol.- No.96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유교적 이념과 불교적 이념, 궁중화원 양식과 산문화승 양식, 고유한 전 통화법과 외래적 서양화법 같은 다양한 이원적 요소들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이룩된 기념비적 걸 작으로서 조선 후기의 회화 발달과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畫 記가 없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와 작가를 비정하고 양식 특징을 분석하는 문제를 놓고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심해 지난 50여 년 간 논쟁이 끊이지 않음으로써 회화사적 의미와 가 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모든 논의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특 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畫記가 없고, 작가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다르 며, 화승들의 전통적인 불화 양식과 화원들의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혼재되어 있어 작가와 양식을 일 치시켜 이해하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특히 논란이 많은 쟁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현존 〈삼세불회도〉는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수미단 중앙에 王室 尊位의 祝願文을 써놓아 주목되며, 애초에 썼던 “主上殿下, 王妃殿下, 世子邸下”의 三殿 축원문을 지우고 ‘慈宮邸下’를 ‘王妃殿下’ 앞에 추가해서 고쳐 써넣어 더욱 주목된다. 따라서 이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객관적 단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최근에 새롭게 제시된 19세기 후반 제작설은 1790년의 용주사 창건 당시에는 純祖가 ‘元子’ 신분이었고 1800년 1월 1일에야 ‘世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世子’라는 존호가 쓰여있는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세자 책봉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형식과 도상이 19세기 후반 기 화승들이 그린 청룡사나 봉은사의 〈삼세불회도〉와 유사하고 서양화법은 후대에 개채된 것일 가능 성이 많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는 19세기 후반기의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佛畫 畫記의 축원문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불화 제작 시점에 왕실에 실 존한 인물의 身分과 生年, 姓氏까지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처럼 수십 년 전에 승하한 사람들을 생전의 尊號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790년 전후에는 元子나 世子의 有無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主上殿下, 王 妃殿下, 世子邸下”의 三殿 축원문을 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에 ‘世子 邸下’의 존호가 쓰여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왕실 위계와 달리 ‘慈宮邸下’가 ‘王妃殿下’보다 앞에 쓰여있는데, 이는 思悼世子의 비극으로 인한 정조와 혜경궁(慈宮), 왕비 세 사람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정조가 혜경궁의 왕실 위상을 왕비 앞에 오도록 하여 정조대에 만 사용된 특별한 왕실 전례였기 때문에 현존하는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정조대에 改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불화 축원문처럼 의례적인 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지우고 다 시 ‘慈宮邸下’라는 특별한 존호를 넣어 改書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顯隆園의 齋宮 인 용주사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부인인 惠慶宮(慈宮)임에도 불구하고 축원문에 의뢰적인 三殿만 쓰여있고 혜경궁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정조가 지시하여 改書했던 것이 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改書는 정조가 현륭원과 용주사가 준공된 뒤 처음으로 현륭원에 園幸하여 園所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용주사에 들러 〈삼세불회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견 했던 1791년 1월 17일에 정조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특수한 내 용과 형태로 이루어진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진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Samsaebulhoedo(三世佛會圖) at Yongjusa Temple(龍珠寺), regarded as a monumental masterpiece consisting of different elements such as Confucian and Buddhist ideas, palace academy garden and Buddhist artist styles, unique traditional and western painting styles,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that symbolically illustrate the development and innovation of paint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the absence of painting inscriptions raised persistent controversy over the past half century among researchers as to the matters of estimating its production period, identifying the original author and analyzing style characteristics. In the end, the work failed to gain recognitions commensurate wit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and value. It is the particularly vital issue in that estimating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existing masterpiece is the beginning of all other discussions. However, this issue has caused the ensuing debates since all details are difficult to be interpreted to a concise form due to a number of different records on painters and mixture of traditional buddhist painting styles used by buddhist painters and innovative western styles used by ordinary painters. Contrary to other ordinary Buddhist paintings, this painting, Samsaebulhoedo, has a praying letter for the royal establishment at the center of the main altar. It should be noted that regarding this painting, its original version―His Royal Highness King, Her Majesty, His Royal Crown Prince主上殿下, 王妃殿下, 世子邸下―was erased and instead added Her Love Majesty慈宮邸下 in front of Her Majesty. This praying letter can be assumed as one of the significant and objective evidence for estimating its production period. The new argument of the late 19th century production focused on this praying letter, and proposed that King Sunjo was then the first-born son when Yongjusa Temple was built in 1790 and it was not until January 1, 1800 that he was ascended to the Crown Prince. In this light, the existing praying letter with the eulogistic title―Crown Prince世子―should be considered revised after his ascension to the throne. Styles and icons bore some resemblance to Samsaebulhoedo at Cheongryongsa Temple or Bongeunsa Temple portrayed by Buddhist painters in the late 19th century. Therefore, the remaining Samsaebulhoedo should be depicted by them in the same period as western styles were introduced in Buddhist painting in later days.Following extensive investigations, praying letters in Buddhist paintings in the late 19th century show that it was usual to record specification such as class, birth date and family name of people during the dynasty at the point of producing Buddhist paintings. It is easy to find that those who passed away decades ago cannot be revised to use eulogistic titles as seen by the praying letters in Samsaebulhoedo at Yongju Temple. As “His Royal Highness King, Her Majesty, His Royal Crown Prince” was generally used around 1790 regardless of the presence of first-born son or Crown Prince, it was rather natural to write the eulogistic title “His Royal Crown Prince” in the praying letter of Samsaebulhoedo. Contrary to ordinary royal hierarchy, Her Love Majesty was placed in front of Her Majesty. Based on this, the praying letter was assumed to be revised since King Jeongjo placed royal status of Hyegyeonggung before the Queen, which was an exceptional case during King Jeongjo's reign, due to unusual relationships among King Jeongjo, Hyegyeonggung and the Queen arising from the death of Crown Prince(思悼世子).At that time, there was a special case of originally writing a formal tripod praying letter, as can be seen from ordinary praying letter in Buddhist paintings, erasing it and adding a special eulogistic title: Her Love Majesty. This indicates that King Jeongjo identified that Hyegyeonggung was erased, and commanded to add it; nevertheless, ceremony leaders of Yongju Temple, built as a palace for holding ceremonies of Hyeonryungwon(顯隆園) are Jeongjo, the son of his father and his wife Hyegyeonggung (Her Love Majesty)(惠慶宮(慈宮)). This revision is believed to be ordered by King Jeongjo on January 17, 1791 when the King paid his first visit to the Hyeonryungwon since the establishment of Hyeonryungwon and Yongju Temple, stopped by Yongju Temple on his way to palace and saw Samsaebulhoedo for the first and last time. As shown above, this letter consisting of special contents and forms can be seen an obvious, objective testament to the original of Samsebulhoedo painted in 1790 when Yongju Temple was bui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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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조시대의 불교와 한양

        한상길 한국정토학회 2023 정토학연구 Vol.39 No.-

        조선은 신왕조의 운영 기조를 숭유억불로 내세웠으나 초기의 국왕들은 한양의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 전통과 문화를 지속하였다. 도성 안에는 흥 천사와 흥복사, 지천사, 그리고 흥덕사 등을 중심으로 초파일 때면 거리마 다 연등이 넘실댔다. 가뭄이나 전염병 등의 국가적 위기에는 사찰에서 기 우제와 수륙재, 경행, 그리고 재난을 물리치기 위한 소재도량을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양 불교의 성행은 불과 1백 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지 천사를 시작으로 폐사가 시작되어 연산군대(1494~1506) 이후에는 한양의 모든 사찰이 사라졌다. 사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던 기우제와 수륙재, 경 행과 연등 등의 불교 행사는 모두 사라졌다. 이와 같은 한양의 무사찰시대 는 19세기말까지 거의 4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본 고는 이러한 무사 찰시대, 영⋅정조시대(1724~1800)의 한양 불교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영⋅정조시대의 불교를 사찰의 지역(紙役)을 통해 영⋅정조의 입장이 어떠했는가를 이해하였다. 이어 정조시대의 불교를 규장각의 불서와 용주 사 창건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각종 지리지와 지도의 한양 사찰, 외 국인들의 본 한양 불교, 그리고 한양민들의 시주활동을 통해 사찰이 없었 던 시대의 한양불교 모습을 고찰하였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조선의 불교는 유물로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양은 장안사를 비롯한 사찰들의 중요한 시주처였다. 지방에서 승도가 권선문을 들고 한양에 찾아와 시주를 구하면 한양민들은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사찰과 승도가 사라진 현실이 었지만 한양의 불교 전통과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Joseon Dynasty put forward the national management principle of worshiping Confucianism and suppressing Buddhism, but the early kings continued the buddhist tradition and culture centered on the temples in Seoul. On Buddha's birthday, the streets of Seoul were filled with lotus lanterns, centered on Heung-cheonsa Temple, Heung-boksa Temple, Ji-cheonsa Temple, and Heung-deoksa Temple. In addition, during national crises such as drought or epidemics, buddhist rites were held at temples to pray for rain, amphibious rites, parading sutras, and to ward off disasters. However, the prevalence of Hanyang Buddhism did not exceed 100 years. Starting with Ji-cheonsa Temple, all temples in Seoul disappeared after the Yeon-sangun Dynasty(1494-1506). Buddhist rites such as prayer for rain, Suryukjae, parading sutras, and lotus lanterns that were performed based on temples all disappeared. The disappearance of temples in Seoul continued for nearly 400 years until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aspects of Buddhism in Seoul during the reigns of King Yeong-jo(1724-1776) and King Jeong-jo(1776-1800), when these temples disappeared. First of all, I understood what Yeong ⋅Jeongjo's stance was on Buddhist paper manufacturing in this era and various other compulsory labors. Next, Buddhism in the era of King Jeong-jo was examined through the buddhist books of the Kyujanggak and the establishment of Yongju-sa Temple. In addition, various aspects of buddhism in Seoul in the era when there were no temples were examined through various geography and map temples, buddhism observed by foreigners, and donation activities of Seoul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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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반기(朝鮮後半期) 불화(佛畵) 특집(特輯) : 조선후기 화승 관허당 설훈 연구

        최학 ( Hak Choi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2 강좌미술사 Vol.39 No.-

        18 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전문화사집단의 형성과 경기지역 화승 가운데 전국적으로 폭넓은 활동을 펼쳤던 관허당 설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본 논문에서는 설훈의 구체적인 화맥, 출신지, 작품 특징 등을 분석하였는데, 이를 통해 18 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활동한 설훈이 차지하는 불교회화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설훈의 화맥은 「전법게」 를 통하여 전라도 의겸에서 각총으로 이어졌으며, 이를 결국 설훈이 계승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전라도와 경기도의 융합된 화풍을 계승 받은 설훈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활동기간 동안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을 통해서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의겸의 화풍을 계승한 다른 조계산문 화승과는 차별된 점이다. 즉, 의겸파 화승은 의겸의 초본을 모본 삼아 동일한 양식의 그림을 그렸는데, 대표적인 화승이 쾌윤과 색민이다. 이들은 상호와 색채에서는 미세한 변화를 보이지만, 비례, 동세 그리고 권속의 형태에서는 여전히 의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설훈은 의겸과 각총에게서 화풍을 이어받았지만, 상호를 비롯하여 비례, 색채 등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하였다. 둘째, 스승에게서 받은 양식을 자신만의 양식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즉, 수타사 <지상시왕도>에서 보이는 권속의 배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러한 변화과정은 의겸의 화풍을 직접 계승한 화승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설훈의 실험적인 작품양식은 당시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화승인 용봉당 경환과 상겸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1790 년 상겸이 설훈을 모시고 함께 진행한 용주사 창건은 이후 상겸과 경기도 화승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설훈의 참여는 19 세기 경기도 불화양식 형성에 초석이 되었다. 넷째, 설훈의 작품양식은 용주사 화승이었던 신선에게 전수되었으며, 이후 19 세기 경기지역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되어 유행하였다. 이는 앞서 언급한 의겸파 화승 쾌윤, 색민의 제자인 평삼, 수해 등이 계속해서 의겸을 계승하는 화풍이 나타나는 것과는 차이점이다. 이렇듯 설훈은 의겸의 화맥을 계승하였으나 기타 의겸파 화승들과는 다른 불화양식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그의 신화풍이 많은 화승과의 교류를 통해 19 세기 경기지역 불화양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된 점에서 그가 차지하는 불교회화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Gwanheodang Seol-hoon is a representative monk painter who acted mainly in the Gyeonggi-do area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He attempted several experimental works in those days and left Buddhist paintings of creative styles, and one of them is Jijangbosaldo at the Suta-sa Temple, which is a Buddhist painting depicting a crowd in rows, a rare style in the Chosun Dynasty. Similar types of Buddhist paintings can be found in the late Koryo Dynasty or the early Chosun Dynasty, but are hardly found in the late Chosun Dynasty. As evidenced by this example, Seol-hoon in the late 18th century is presumed to be a monk painter who had his own style of painting and influenced many other monk painters. Materials on Seol-hoon found so far were all from Gyeonggi-do, so researchers have believed that he was a monk painter from Gyeonggi-do. With the discovery of new materials and his works, however, a number of differences from the findings of previous research have been disclosed. When the painting records of Seol-hoon`s Buddhist paintings extant were analyzed and his traces were examined, it was found that he started his career as an assistant monk painter for Samjangbosaldo at the Sinreuk-sa Temple under his teacher Gakchong. From that time on, his activities were not limited to Gyeonggi-do but extended to Gyeongsangdo, Chungcheong-do and Hamgyeong-do. In addition, praising poems for Seol-hoon in Haebungjip, records on the Buddhist project at the Yongju-sa Temple, etc. suggest that he attained a very high status as a monk painter. Based on the results of this study, it was concluded that, different from the findings of previous research, Seol-hoon inherited the lineage of Euigyeom and Gakchong and pursued his own painting style through moving from Gyeongsang-do to Gyeonggi-do. He influenced his student Shinseon as well as the painting styles of Gyeonggi-do in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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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기 수원지역 불화의 제작양상과 지역성

        이승희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구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23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46 No.-

        After its opening, Gyeonggi-do suffered intense foreign invasions and emerged as a key region for modernisation. After being forced to open up by foreign powers and undergoing various periods of internal resistance, Gyeonggi-do emerged as a key region of modernisation. The forcible opening of the country to foreign powers, the various forms of resistance within the country, and the process of forced acceptance by foreign powers shook the foundations of traditional Korean society and culture, including the Buddhist community. Throughout the process of modernisation, the traditional production of Buddhist paintings changed in many ways, including the materials used, the iconography, and the methods of production. The change from traditional Buddhist paintings to modern Buddhist paintings is most evident in the paintings of the Gyeonggi-do region, which was in the path of foreign invasions. The Suwon region has been at the centre of Korean history since the 19th century, when Suwon Hwaseong Fortress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and Yongjusa Temple, the rising temple of King Sado, became the centre of modern Buddhist culture. In addition to Yongjusa Temple, Gwanggyo Mountain Bongnyeongsa Temple, Gwanggyo Mountain Cheongryeonam Temple, and Suwon Temple have survived to this day, preserving the history of the modern era. The production of Buddhist paintings in modern Suwon can be divided into two periods. From the opening of the port to the 1910s, all Buddhist paintings were either directly sponsored by or associated with the royal family, and most of them were painted by masters at Heungguksa Temple in Namyangju, which was a leading source of Old Korean paintings. Therefore, Buddhist paintings in Suwon share the form and style of those in Seoul and Gyeonggi. In terms of materials, such as batakcheon, there was a marked change. Instead of using cotton, wool, and burlap, which were the traditional materials for Buddhist paintings, British calico was used. This change in ground cloth is attributed to the strong Buddhist patronage of the Joseon royal family. At the centre of the production of Buddhist paintings in the Suwon a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were Yongjusa, the Suwon Pogyo Temple built by Yongjusa, and Kang Dae-ryun, who was the governor of Yongjusa. Kang Dae-ryun presided over most of the Buddha paintings, and the painters of the Geumgangsan school, which was associated with Chukyeon and Chukyeon, painted the Buddha paintings of Yongjusa and Suwon Pogyo-do. <Yongjusa Shinjungdo> is a very original discord that deviates from the tradition of late Joseon prudence and is worthy of representing the modern era. In 1933, Yongjusa Gyebul confirmed the continuity of Yongjusa’s image and tradition as a Buddhist temple founded by King Jeongjo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개항 후 경기도는 외세의 침입을 격심하게 겪으며 근대화의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외세에 의한 강제적인 개방, 조선 내부의 다양한 저항과 외세에 밀린 수용의 과정을 겪으며 조선의 전통적인 사회와 문화의 근간은 크게 흔들렸다. 이는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불화의 제작 양상은 불화의 재료를 비롯하여 도상, 제작방식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하게 된다. 전통불화에서 근대불화로의 변화는 외세침략의 길목에 있던 경기도 지역 불화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중 수원 지역은 정조대에 수원화성이 축조되는 등 19세기부터 한국 역사의 중심 지역으로 부각되었으며, 사도세자의 능침사찰인 용주사는 근대기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원지역에는 용주사 외에 광교산 봉녕사, 광교산 청련암, 수원사에 현재까지 사세를 잘 유지하며 근대기 불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 근대 수원지역의 불화 제작양상은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었다. 개항기부터 1910년대까지의 불화들은 모두 왕실로부터 직접 후원을 받거나 관련성 속에 제작되었고, 구한말의 대표적인 화소였던 남양주 흥국사의 화승들이 대부분의 불화를 그렸다. 따라서 수원지역의 불화들은 서울, 경기지역 불화의 형식과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 바탕천 등 재료적인 측면에서는 두드러진 변화가 보였다. 전통적인 불화의 바탕재료인 견, 모시, 삼베를 사용하지 않고 영국산 옥양목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바탕천의 변화는 조선왕실의 강력한 불교후원에 힘입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수원지역 불화의 제작의 중심에는 용주사와 용주사가 세운 수원포교소, 그리고 용주사의 주지였던 강대련이 있다. 강대련이 대부분 화주를 맡아 불화불사를 주관하였으며, 축연과 축연과 관련이 있는 금강산화파의 화승들이 용주사와 수원포교당의 불화를 그렸다. <용주사 신중도>는 조선후기 신중도의 전통에서 벗어난 매우 독창적인 불화로 근대기를 대표할 만 한하다. 1933년 <용주사 괘불>을 통해서는 정조가 세운 능침사찰로서의 용주사위상과 전통성이 일제강점기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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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華城 隆健陵-龍珠寺 지역 역사문화적 배경과 그 의미 - 최근의 유적발굴조사 내용을 중심으로

        이남규 미술사학연구회 2008 美術史學報 Vol.- No.31

        Surrondings of Yungkeon royal tombs and Yongju buddist Temple are ecologically very good places. It was decided to built Royal tombs in Choseon dynasty as a viewpont of the theory of division based on topography. From prehistoric age to recent time, not only many people dwelled at this place, but also in medieval age a castle was built, which was the crnter of the administration and militery affairs. Recently those obvious facts are being clarified by the excavations. Untill now, dwelling sites of the bronze age, producing site of the Proto three-kingdom age, dwelling site and tombs of ancient age, castle of medieval age and recent time were excavated. By dint of these excavations, cultural characters of the each age are being made clear continously. From the such a natural and cultural background, they could built the Yunggeon royal tombs and Yongju buddist Temple at the rulling time of great king Jeonjo in late Choseon dynasty. But because, ignoring the affluent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nts, the govermment planed to build a apartments, now the NGO named Kyunggi cultural actions protest strongly. We hope to build a policy to preserve natural environment, and to make practical applications of the historical and cultural characteristics of this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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