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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우(崔淳雨) 선생의 공예 연구

        최응천 ( Choi Eung Chon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8 강좌미술사 Vol.51 No.-

        최순우 선생의 공예 분야의 연구 성과는 비록 개설의 성격이지만 최초로 우리나라 공예 분야를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시대별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을 소개한 미술서적이 전무하였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 공예에 관한 소개서를 일본에서 출간한 공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에 일찍부터 한국 목공예품이나 민속공예품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의 저술을 남겼고 『韓國의 木漆家具』라는 역저를 출간하여 조선시대 목공예품을 비롯한 나전칠기를 민예품의 차원을 떠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당당한 예술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선생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미술사의 업적은 도자기와 회화 부분에서 단연 돋보이며 특히 국립박물관의 조사 성과를 토대로 초기 고려청자 요지를 밝힌 것도 주요한 업적이다. 白磁 大壺를 ‘달 항아리’, 玉璧底 굽을 ‘햇무리 굽’ 이라는 도자 관련 용어를 우리말로 고쳐 부른 것도 선생의 천부적인 어휘력과 탁월한 미감에서 창출된 것이다. 선생의 고려나 조선의 도자기 논고를 제외한 공예 관련의 단편 논문은 5 편 정도가 확인되며 주로 고려 범종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일찌감치 선생 역시 한국 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틈틈이 조사하여 자료를 남기고자 했음이 파악된다. 나머지 글들은 대체로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비교적 짧은 글들이지만 여기에 선생이 지닌 평소의 미의식과 탁월한 식견, 나아가 일반 독자들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여 한국 공예의 우수성을 소개한 점은 공예사 분야의 숨은 성과로 판단된다. 지면상의 한계와 학술 논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전문가적 식견은 선생의 평소 여러 분야에 노력을 경주한 학문적 깊이가 느껴진다. 논문의 성격을 띤 글들이 주로 회화와 도자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공예에 관한 글들은 수필이나 에세이 성격을 지닌 단편적인 글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공예 분야의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미술사학자들이 추구하지 못했던 다양한 분야의 공예품을 고대부터 조선시대라는 통시대에 걸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선생이 지닌 통찰력과 타고난 심미안을 통해서 가능했지만 평생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울였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선생은 그동안 외국인과 일본인이 지녔던 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이고 명쾌한 우리의 시각으로 한국미술을 설명하고 한국 공예의 특질과 아름다움을 도출해내는데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미를 일본과 미국 유럽에 알리고자 국립박물관 재직시절 기획하고 총괄하였던 <한국미술 오천년>전시는 가난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5000 년이라는 유구한 문화를 지녔음을 전 세계에 알린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바로 이 전시의 중심에서 한국 문화재를 세계 속에 알린 가장 훌륭한 문화 외교관이셨다. Research accomplishment in the craft history field of Choi Sun-woo is introductory in nature, but it is the first time that the Korean arts fields were organized by period from Three Kingdoms Period to Joseon era. In a situation with the absence of an art book introducing Korea, he would publish introducing books about Korean crafts overseas in Japan. Early on, he focused on Korean woodwork and folk crafts, and left the books in a field that was not very noticeable to upgrade them to the representative artworks of our country beyond simple folk art crafts. Among his accomplishments related to craft history are conspicuous in ceramic history studies. It is also one of the major accomplishments that based on the survey results of the National Museum, he clarified the kiln site of the early Goryeo celadon, and revised the ceramics related terms 'Dalhangari' and 'Haetmurigup' in Korean. The short articles related to crafts, except for his papers on ceramics, are about five, and it is understood that the contents of Goryeo bells mainly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Korean bells early at the time. The rest of the articles related with crafts are relatively short essays published in newspapers and magazines, but the point that his aesthetic sense, excellent insight, and easy-to-understand explanations for everyone in general, introduced the excellence of Korean crafts is a hidden achievement in the field of craft history. Although it is not an academic paper, his works reveal the depth of the profession through the contents of the expert’s opinion. It is noteworthy that the arts of various fields, which were not pursued by other scholars of art history, have been interested from ancient times to the Joseon period. It was because of his insight and innate aesthetics that he spent his entire life at the National Museum, so that he could express his deep affection for Korean cultural assets. Away from Korean art, which was depicted by perspectives of foreigners, through our concrete and clear vision, he devoted his life to deriving the qualities and beauty of Korean crafts. The exhibition of “Five Thousand Years of Korean Arts”, which was planned and organized by him when he worked at the National Museum to inform the beauty of Korea to Japa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is an excellent opportunity to show the world that Korea was a cultural nation with a 5000 year old culture. He was the greatest cultural diplomat who informed the world of Korean cultural assets in the very center of this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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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반기 제2,3기 불교미술의 조성사상

        한지연 ( Jee Yeon Han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3 강좌미술사 Vol.40 No.-

        조선후기 산문중심의 불교에서 지향했던 정통성 수립과 왕실의 능침사찰화는 유교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과 동시에 신앙적 차원이 고양된 것이 내포되어 있다. 교단 내에서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사찰의 중건, 불상 및 불화의 새로운 제작 국면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사상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단 내부의 정통성 수립에 치중하던 이러한 움직임과는 달리 민간이 주도적으로 불교를 이끌어가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민간 주도하의 불교는 주로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온 結社의 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결사에 사용될 불교전적을 새롭게 편찬하는 작업도 이루어져 조선후기 불교발전의 또 다른 양상을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간 주도의 불교발전에 따라 의례부분도 상당히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불교 역사 상 굽타시대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선후기 불교와 불교미술이라 생각된다. 불교사상은 급격하게 쇠락하고 민간신앙과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민간의 적극적인 불교참여활동이라는 측면은 인도 굽타시대, 불교사상보다는 민간에서 종교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된다는 측면과 흡사한 부분이다. 표면적으로 불교교단이 쇠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미술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도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조선후기 불교사와 불교미술 발전의 측면을 동시에 조명 하는데 주력했으나,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조명한 연구성과가 미비하기 때문에 시론적 입장에서 전개된 논문이다. This research is focused on the historical facts and the artistic development of Buddhism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Buddhist order tried to establish the legitimacy and to find a way to survive by making Lingqinfocha(陵寢寺刹). The religion suppressed by the social order based on Confucianism needed to inspire the religious level. What the order did in the society at that time could not bring out ideological development. However the need of remodelling of the religious facilities consequently made outstanding progress on the religious art such as statues, paintings and temples. Buddhism among people had been gone on through the associations. As they had made progress with scriptures, the religious ritual formation became stronger. In this way, Buddhism in the late Joseon and that in the Gupta period are very much alike. Both in Gupta era and in the late Joseon, the religion connected with folk believes was flourishing among people when the doctrines were getting weakened. As a result, in both period, the changes of its statues became a turning point in Buddhist art history. However this research is introductory for its inadequate result of focusing on both the religious history and its artistic developm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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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문화재를 통한 조선시대미술의 도상해석학적 연구 특집 : 조선 전반기 불교미술의 조성사상 연구

        한지연 ( Jee Yeon Han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1 강좌미술사 Vol.36 No.-

        성리학 중심의 유교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시대 불교는 억불시책으로 인해 교단사적으로 결국 산중불교라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불교 전래 이후 국가 공인 하에 전개되었던 불교사상, 신앙의 전개는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결국 그 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때문에 현존하는 문헌자료 상에서는 불교발전상을 찾기 힘들며, 더욱이 위정자들의 불교 폄하 태도가 기록에 묻어나 문헌자료만으로는 당시의 불교 발전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문헌자료와 함께 불교미술 造成記를 통해 생동감 있게 접근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고려왕조에서는 사상의 전개, 여러 신앙의 공존 등을 통해 불교사상·문화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불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 문제, 건국과 함께 조성된 불안정한 사회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이 아닌 불교였다. 오히려 천년에 이르는 시기동안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던 불교사상을 ``선교양종 승려``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하나로 통합해 나아가는 새로운 결과를 낳았다. 조선 초기에는 기존의 정토계 신앙이 그대로 흡수되어 민간신앙에까지 깊숙이 파고 들며, 동시에 왕실에서는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법화경』『원각경』『화엄경』사상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불화, 불상, 불탑조성에서 나타나고 있을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서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이에 반해 불교교단 내부에서는 승과제도를 통한 법계형성이 비교적 단순화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승과과목으로 지정된 경전 이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대승경전 가운데 『법화경』『원각경』 『능엄경』 등을 이력과목으로 선택한다. 이리한 교단 내부의 변화는 곧 禪이나 敎,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 양쪽을 모두 섭렵하는 총체적인 교단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불교에 관해 억불시책과 관련지음으로써 그 발전양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합적인 불교로의 발전과 민간신앙으로 완전히 정착해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긍정적 평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Buddhism in the Joseon Dynasty had been suppressed by the confucian government. As the Neo-Confucianists established the new dynasty, they claimed Buddhism for the failure of the previous Dynasty, Goryeo. Consequently Buddhism had to get away from the open society avoiding the anti-Buddhism policies. The official documents recorded by governors had been so critical on Buddhism that it is hard to understand how Buddhism survived and developed during the Joseon Dynasty through official historical records. It is possible to find out how Buddhism developed in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e documents about the Buddhist artworks. Buddhism had made remarkable progress in both ideological and cultural ways until the Goryeo Dynasty collapsed. But under the Joseon Dynasty`s anti-Buddhism policies, Buddhism had had to endure and had few chance to develop itself for centuries. Even though the government had suppressed it so harshly, Buddhism stabilized the insecure society of the new Dynasty and the relationship with China. The sufferings rather became a chance to unite the sects of the religion and to develop the Zen and non-Zen sects together. In early years of the Joseon, the Pure Land school`s thought was absorbed into folk beliefs. Judging from the historical records and Buddhist arts such as paintings, statues and sutras at that time, the Royal family accepted the ideas from Lotus Sutra, Complete Enlightenment Sutra and Sutra of the Garland of Buddha based on the Pure Land school`s one. On the contrary, the Buddhist order had simplified the organization. The Buddhist education curriculum of the course was also expanded, so Lotus Sutra, Complete Enlightenment Sutra and Sutra of the Heroic Ones were included. It means the order managed to keep the balance between Zen and non-Zen and furthermore unified them to create unique Korean Buddhism. The anti-Buddhism policies of the Joseon Dynasty had caused disadvantage to Buddhism with no doubt. But they also gave it a foothold for settling down in the common people`s life and unifying the separated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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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우 선생의 회화사 연구

        이원복 ( Lee Won Bok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8 강좌미술사 Vol.51 No.-

        국립중앙박물관 4 대 관장을 역임한 崔淳雨(1916-1984)는 국립박물관에 40 년 넘게 봉직한 博物館人으로 문화예술 행정가이자, 큰 美術史學者이다. 그의 繪畵史 연구업적은 ‘한국미술 5 천년전’ 국외전시, 1972 년과 1977 년 개최한 ‘한국회화 5 백년전’과 ‘국립박물관소장비장회화특별전’ 등 수많은 전시기획, 資料發掘調査, 발표한 논고, 그 나름의 독자적으로 개척한 문화재관련 수필 등을 통해 확인된다. 회화사는 陶磁史와 함께 그의 연구에서 비중이 크다. 첫째, 현존하는 조선시대 그림 전체에 대한 聚合에 각별한 관심과 이에 대한 일련의 사업들을 들게 된다. 연구에서 가장 긴요한 기초 작업으로 개인소장 서화와 寺刹 내 佛畵照査 두 사업을 각기 5년씩 연차적으로 기획했다. 둘째, 조선시대 회화사적 비중이 큰 조선중기 화풍을 연 金禔(1524-1593)와 李慶胤(1545-1611)의 작품발굴이 주목된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인 보물 제 783 호 <童子牽驢圖>와 호림박물관 소장 20점으로 된 화첩 내 9 점에 화가와 동시대를 산 선배 崔笠(1539-1612)이 1598 과 1599 년에 직접 쓴 跋文과 讚詩가 있다. 화적이 드문 李楨(1578-1607)의 실경과 관념의 두 산수화첩,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인화가 鄭遂榮(1743-1831)이 금강산을 그린『海山帖』등 한둘이 아니다. 조선 말 김수철과 洪世燮(1832-1884), 李喜秀(1836-1909)의 발굴은 새로운 감각으로 이異色畵風으로 지칭되는 전통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시사점이 큰 화가들이다. 이들 작가에 대해선 박물관 내 李泰浩, 李源福 등 후학에 의해 본격적인 논고로 발표되었다. 작품발굴은 국외까지 이어져 미국 필라델피아 박물관 소장 李巖(1507-1566) 계열의 <狗子圖>, 영국 대영박물관의 肖像畵 草本과 불화도 있다. 셋째, 그는 우리나라 회화 전반에 대해 통시대적으로 살피되 일반회화 외에 불화와 民畵, 현대회화 평론까지 참여했습니다. 한국동란으로 부산 피난 중에 ‘제 1 회 현대작가 초대전’(1953.5.1-5.31)과 ‘한국현대회화 특별전’(1954.1.1-1.31)을 열기도 했다. 이들 그림을 함께 살필 때 우리 옛 그림의 眞面目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고대 한국회화 발달의 요람이 초기 불교회화에 바탕을 두었고 고대회화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화가를 망라해 시대별, 화가별 화풍의 특징을 추출했다. 넷째, 공예분야의 연구와 더불어 도자가 문양의 繪畵性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림의 전래가 드문 고려와 조선 초기에 있어 이들을 工藝文樣을 회화사의 補完資料로 원용한 점을 들게 된다. 다섯째, 국립박물관을 비롯해 사립박물관과 수많은 개인 소장품 등, 매 작품마다 오랜 세월 장기간에 보고 또 본 후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분석과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과 작가를 간결하고 길지 아니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정리했다. 일견 짧은 에세이이나 그 안에 쉽고 아름다운 文體로 서술하여 읽는 이에게 美感의 본질에 도달케 한다. 우리 조형예술 전반에의 따듯하며 예리한 시선으로 찾은 공통분모는 같은 한자문화권의 동질성을 전제로 살펴 편협하지 않은 國際的 시각이 아니다. 風土와 미감의 차이에서 빚어진 미적 差別性까지 살폈다. 결국 우리 회화의 독자성과 특징 나아가 韓國美의 특징의 추출로 귀결된다. As a fourth Director of National Museum of Korea, Choi Sunu(崔淳雨,1916-1984) had been dedicated himself to the museum over 40 years and now known as a diligent Museum Man, Culture and Art Administrator and great Art Historian. His achievements on Art History are remarkable from international exhibition ‘Korean Arts in 5000 years’, domestic renowned exhibitions such as ‘Masterpieces of 500 Years of Korean Painting’, ‘Korean Paintings selected from collection of the National M useum - to be shown for the first time to the public-’ in 1972 and 1977. Apart from those results, his personal researches on art histories, documentations and research essays show his great interest on museum and its material cultures. Art History is one of his main research areas as much as history of Celadon. First of all, Director Choi did gather all exist paintings of Joseon and had been organised several works for these paintings. As a pivotal base works for his research, personal collections of Joseon Paintings and paintings that owned by temples were thoroughly studied in five years terms. Second, Choi focused on painters Kim Si(金禔,1524-1593) and Lee Kyeong Yoon(李慶胤,1545-1611) who both are crucial to understand intermediate term of Joseon Period. To a certain extent, Director Choi also uncovered Choi Rip(崔笠,1539-1612) who directly wrote poet on painting in Horim Museum and Leeum, Samsung Museum of Art and Lee Jeong(李楨,1578-1607) whose writings are rarely found and Jeong Soo Young(鄭遂榮,1743-1831) who draw Mount. Geumgang. Painters such as Kim Soo Chul, Hong Se Sup(洪世燮,1832-1884), and Lee Hee Su(李喜秀,1836-1909) whose works were mainly found in late Joseon are all famous for unique style which suggest the provision of traditional paintings. Those painters are all highlighted by younger researchers Lee Tae Ho, Lee Won Bok from National Museums. Third, Choi rigorously overviews not only traditional paintings of Korea but also Buddhist, Folk, and Modern paintings. ‘The First Invitation Exhibition of Korean Modern Paintings(1953.5.1-5.31)’ and ‘Special Exhibition of Korean Modern Arts(1954.1.1-1.31)’ had been organised in Busan even during the Korean War. Fourth, with the research on crafts, Choi comprehended the artistic perspectives of Celadon. As of its uniqueness of paintings in Goryeo and Joseon, it is hard to be descended for long time and so Choi tried to use the craft arts to understand the paintings. Finally, Choi’s summaries on paintings from national, private museums and even from personal collections are simply made based on thorough researches on them that helps readers comprehend real value of paintings. His researches on Korean paintings are well shown its traditionality and distinctiveness of original but unique Korean styles, not just like other Asian 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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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불교문화 원형 연구 -실크로드와 경주를 중심으로-

        문무왕 ( Mu Wang Mun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4 강좌미술사 Vol.43 No.-

        본고에서는 한국불교문화원형의 한축인 신라불교문화의 성립을 간다라로부터 중앙아시아 중국을 잇는 문화원형 형성에 관한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부분은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실시해 온 불교문화 조사를 바탕으로 본 논문의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실크로드의 불교에 관한 연구는 한국불교의 원류를 밝히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등으로 분류된 개략적인 지역학적 불교연구방법을 원용하여 연구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전파와 수용에 관한 문제가 실크로드지역에서 발생한다. 불교가 고대한국사회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므로 문화의 전파와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크로드라는 교류의 흔적을 살펴야 한다. 고대역사에 있어서 A.D 1 세기부터 A.D 8 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세계는 활발한 교류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이러한 활발한 교류의 흔적에서 우리는 불교의 전파, 수용, 변용의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한국에서 가장 깊이 받아들였던 신라는 불국토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신라가 곧 불국토임을 인식하면서 신라의 불교적 세계관을 내재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중고기에 왕실인들이 석종임을 주장함으로써 신라 왕실은 불교 발상지인 인도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정착하게 되는 과정이며 문화원형으로 정립되어 지는 과정인 것이다. This paper seeks to discuss the Buddhist culture of Korea established the prototype of the Buddhist culture of the Silla culture circle formed to connect Central Asia China from Gandhara.The study of Buddhism on the Silk Road can be a crucial way to find the origin of Korea Buddhism.Buddhism has had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the ancient South Korea has received that rating, so there is a huge debate. Thus, when viewed in terms of propagation and reception of culture Observe for signs of exchanges of the Silk Road. World during the period ranging from AD 1 to AD 8 century century in ancient history has left a trail of lively exchanges. In this process, we will actively exchange that can watch the waves, acceptance, transformation of Buddhism. Buddhism in South Korea is one of the most deeply accepted ideology of the refining bulgukto 佛國土Silla Silla will soon recognize that the bulgukto 佛國土was used to establish the Buddhist values. Mid-old (中古) period of their royal Silla royal family``s descendants by claiming that the Buddha was acceptable to share the worldview of Buddhism originated in India. There is a royal As such, could be successful in the work of sanctification itself Silla Buddhism while accommodating the previous step, from the establishment of the royal authority, centralized identity enemy, can also be seen that due to economic footing has been accomplished. Through this process, Silla Buddhism came via the Silk Road in ancient societies can be seen as a celebration of the Korea Culture and Well bui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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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수영 박사의 한국 범종 연구와 성과

        최응천 ( Eung Chon Choi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4 강좌미술사 Vol.43 No.-

        황수영 선생이 평생에 걸쳐 집필한 한국 범종 관련된 자료소개나 논문은 대략 29 편 정도이다. 물론 여기에는 같은 종류의 범종을 중복해서 다른 곳에 소개하거나 여러 편을 묶어 고찰한 논고도 포함된다. 범종의 제작 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국 범종의 기원과 형태 문제를 다룬 3 편의 글과 統一新羅鍾5 편, 高麗時代鍾18 편, 朝鮮時代鍾3 편과 연구 현황을 다룬 1 편이 확인된다. 그 가운데 高麗時代鍾연구가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統一新羅鍾의 경우 일찍부터 알려져 왔고 많은 연구 현황이 이루어지 반면에, 당시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한 개인 소장 高麗鍾이나 새로이 출토된 高麗鍾은 선생 외에는 잘 파악할 수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소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범종 연구사에서 더욱 돋보이는 성과는 우리나라 최고의 鍾인 上院寺鍾이 安東에서 옮겨 진 것을 밝혀 上院寺鍾의 원 소재지 문제를 다룬 논문과 3 년 만에 소실된 禪林院址鍾의 현황과 명문, 출토 상황 등을 자세히 밝혀놓음으로써 자칫 사라질 뻔 하였던 統一新羅鍾의 귀한 사례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한 세 편의 논고, 實相寺鍾의 중요성을 고찰한 글들을 통해 統一新羅美術에서 新羅鍾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부각시킨 일이다. 또한 일본에 소재한 한국 범종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여 틈나는 대로 그들을 소개하고 명문을 실어 자료로 활용토록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성과는 .韓國金石遺文.에 다시 정리되어 간행됨으로써 한국 범종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집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아울러 선생에 의해 설립되어 이후 한국 범종 연구의 중심이 된 韓國梵鍾硏究會(현 梵鐘學會)와 .梵鐘.지의 창간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미술사에서 유독 한국 범종 연구를 독립된 분야로 연구될수 있도록 가치를 정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미술사에서 범종 연구지나 범종연구회의 경우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앞설 수 있게 된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공로의 하나이다. 이처럼 한국 범종 연구에 있어 선생이 이룩한 한국 범종 관련의 업적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더욱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Dr. Hwang Soo Young wrote 29 research papers including introduction of materials for Korean Buddhist bell throughout his lifetime. There are three articles which was dealing with the problem of the origin and form of Korean Buddhist bell, five articles related to Buddhist bells of Unified Silla dynasty, eighteens articles related to those of Goryeo dynasty, three articles related to those of Joseon dynasty, one article about the research status. Among the 29 research papers a study on Buddhist bells of Goryeo dynasty have accounted for most quantities. The outstanding achievements in his study about Korean Buddhist bell is to highlight the meaning and value of Buddhist bell of Unifed Silla dynasty through three articles related to the original location Buddhist bell of Sangwonsa temple, three articles about status, inscription, and excavated situation of Seonrimwon temple bell destroyed by fire, and one article dealing with the significance of Silsangsa temple bell. Also he appreciated the significance of Korean Buddhist bells located in Japan, and introduced them ever put to excellent advantage in resources. It is re-published from 『韓國金石文(Korean epigraphs left by a deceased)』 that played the most basic role for researching Korean Buddhist bells. Also the foundation of Research Group of Korean Buddhist Bell(now The Association of Korean Buddhist Bell) and journal Beomjong(Korean Buddhist bell) established by him played important role in boosting value as an independent field in Korean art history. In additionResearch Group of Korean Buddhist Bell and journal Beomjong became the important momentum to lead in studying Buddhist bells. Thus, his achievements of studying Korean Buddhist bell have the important significance and value than any other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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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 석굴 금강역사의 도상 연구

        유근자 ( Geun Ja Yoo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5 강좌미술사 Vol.44 No.-

        본 연구는 토함산 석굴의 전실(前室)과 본실(本室)을 연결하는 연도(羨道) 입구에 배치된 금강역사의 도상적 연원을 고찰한 것으로, 특히 한쌍으로 표현되고 금강저를 들지 않은 권법(拳法) 자세의 도상 파악에 주안점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 금강역사상은 삼국시대 분황사 모전석탑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통일신라시대 부터는 석탑·사리기·토함산 석굴 등 불교미술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 까지 이어지는 데, 조선후기에는 사찰입구의 금강문과 명부전에도 배치되기에 이른다. 이 때의금강역사의 역할은 석가모니불을 호위(護衛)하거나 불법(佛法)을 수호(守護)하는 것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금강역사에 대하여 크게 세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첫째, 금강역사에 대한 다양한 명칭과 역할에 대해 고찰한 것으로, 시대에 따라 금강역사의 역할이 붓다의 호위자에서 도량신(道場神)으로 확대되어 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금강역사의 도상에 관한 고찰로 금강역사의 지물(持物)인 금강저(金剛杵)의 특징 및 금강역사의 수(數)의 변화에 주목하였다. 셋째, 토함산 석굴의금강역사의 배치와 도상에 대한 해석으로, 이 금강역사 도상은 634 년에 조성된 분황사 모전탑의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추정하였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은 우락부락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상(像)과 입을 다물고 있는 상(像)이 쌍으로 배치되어 있고, 지물인 금강저를 들고 있지 않다. 이는 5 세기 후반에서 6 세기 경에 나타난 중국의 금강역사 상을 반영한것으로 보인다. 토함산 석굴에 나타난 신장상들의 배치법(팔부중, 금강역사, 사천왕, 제석천·범천 순)과 가장 유사한 예는 화엄사 4 사자삼층석탑의 부조상이다. 토함산 석굴의 금강저를 들고 있지 않은 권법(拳法)자세의 금강역사 도상은 화엄사 4 사자삼층석탑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화엄사 4 사자석탑에서는 1 명은 권법 자세, 1 명은 금강저를 들고 있는데, 권법 자세를 취한 금강역사가 제석천과 함께 배치된 경우에는 제석천이 금강저를 들고 있기 때문에 금강역사는 금강저 대신 권법 자세를 취하고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This study was focused on the iconographic origin of Vajrapani reliefs on both walls of the entrance to corridor connecting front chamber and main chamber of Tohamsan Grotto(Seokguram), which were represented as pair and as empty hands. In Korea, Vajrapani first appears on the Stone Brick Pagoda of Bunhwangsa Temple at the period of the Silla Dynasty. From the period of United Silla through Joseon Dynasty, Vajrapani appears very frequently in Buddhist arts such as Stupa, Sarira Reliquary, and Tohamsan Grotto.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Vajrapani was represented in Geumgangmun (金剛們) and even in Myungbujeon (冥府殿). This study was focused on the iconographic origin of Vajrapani reliefs on both walls of the entrance to corridor connecting front chamber and main chamber of Tohamsan Grotto(Seokguram), which were represented as pair and as empty hands. In Korea, Vajrapani first appears on the Stone Brick Pagoda of Bunhwangsa Temple at the period of the Silla Dynasty. From the period of United Silla through Joseon Dynasty, Vajrapani appears very frequently in Buddhist arts such as Stupa, Sarira Reliquary, and Tohamsan Grotto.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Vajrapani was represented in Geumgangmun (金剛們) and even in Myungbujeon (冥府殿). This study was focused on the iconographic origin of Vajrapani reliefs on both walls of the entrance to corridor connecting front chamber and main chamber of Tohamsan Grotto(Seokguram), which were represented as pair and as empty hands. In Korea, Vajrapani first appears on the Stone Brick Pagoda of Bunhwangsa Temple at the period of the Silla Dynasty. From the period of United Silla through Joseon Dynasty, Vajrapani appears very frequently in Buddhist arts such as Stupa, Sarira Reliquary, and Tohamsan Grotto.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Vajrapani was represented in Geumgangmun (金剛們) and even in Myungbujeon (冥府殿). This study was focused on the iconographic origin of Vajrapani reliefs on both walls of the entrance to corridor connecting front chamber and main chamber of Tohamsan Grotto(Seokguram), which were represented as pair and as empty hands. In Korea, Vajrapani first appears on the Stone Brick Pagoda of Bunhwangsa Temple at the period of the Silla Dynasty. From the period of United Silla through Joseon Dynasty, Vajrapa.i appears very frequently in Buddhist arts such as Stupa, Sarira Reliquary, and Tohamsan Grotto.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Vajrapani was represented in Geumgangmun (金剛們) and even in Myungbujeon (冥府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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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문화재를 통한 조선시대미술의 도상해석학적 연구 특집 : 조선전반기 불상 조각의 도상해석학적 연구

        문명대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1 강좌미술사 Vol.36 No.-

        조선전반기 조각의 도상해석학적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조선전반기 조각의 조성 배경에 대해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력히 실시한 조선전반기는 유불교체기였으므로 주로 왕실 사대부 여성들의 후원과 세종 말기, 세조, 명종대의 국왕중심의 지원 등에 힘입어 불교와 불교미술이 부흥과 쇠퇴가 거듭한 교체기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조선전반기 불상조각의 도상형식은 불상과 보살상으로 나누고 불상은 독존, 삼존, 삼세불, 삼신불, 삼신삼세불, 군상 형식 등으로 나누었으며, 보살상은 독존, 협시, 동자, 군상 형식 등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셋째, 조각의 도상의미와 양식변천은 1기인 태조·성종기(15세기)와 중종·선조기(16세기) 등 두 시기로 나누어 시대별의 양식흐름을 논의했다. 넷째, 조선전반기 조각승 유파의 전개와 그 의의에 대해서이다. 불상 조각가는 국가장인 사장(私匠), 승장(僧匠) 등으로 나누이지는데 국가장인은 일찍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승장인 조각승들은 1448년 이후부터 등장하고 있다. 이 조각승들도 일찍부터 유파를 이루어 계승되었겠지만 유파형성과 계승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이다. 이때 석준·원오파와 광원파가 성립되어 불화 화원들과 함께 오랜 기간에 걸쳐 부침을 거듭하면서 조선조말까지 면면히 계승된 것으로 파악된다. This study conducted iconological analysis of sculpture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and obtained results as follows. First, with regard to the background for creating sculpture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early Chosun was a transitional period from Buddhism to Confucianism when the government promoted policies for suppressing Buddhism and advocating Confucianism. In this situation, Buddhism and Buddhist art repeated rise and fall under the sponsorship of women from the royal family and aristocratic families as well as the king`s support during the late period of King Sejong and the reigns of King Sejo and Myeongjong. Second, Buddhist sculpture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ere divided into Buddha statues and bodhisattva statues, and Buddha statues were subdivided according to style into solo, triad, three periods Buddha trinity·three periods Buddha, group images, etc. Third, the iconological meanings of sculptures and the development of style were discussed for two periods, one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 and King Seongjong (15th century) and the other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and King Seonjo (16th century). Fourth, the development and meanings of monk sculptor schools during the early Chosun Dynasty were discussed. Buddhist sculptors were largely divided into governmental sculptors and monk sculptors. Governmental sculptors appear in records from early clays, hut monk sculptors begin to appear from 1448. It is believed that monk sculptors might organize and maintain schools earlier, but clear evidence for such activities is seen from just after the war with Japan in 1592. At that time, the Seokjun-Wono School and the Gwangwon School were organized and they, together with Buddhist painters, were continued long until the late Chosun Dynasty through the repetition of rise and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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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질석굴과 골굴석굴의 비교사적 연구

        심주완 ( Shim Joo-wan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21 강좌미술사 Vol.56 No.-

        최근 골굴 석굴은 세계적인 석굴과 비교하는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가 주목받고 있다. 앞의 연구가 인도와 중국의 석굴을 비교하였다면, 이 글은 인도 석굴과 중국 석굴의 가교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서역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로 서역 석굴 중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키질 석굴과 골굴 석굴을 비교하는 연구 논문이다. 키질 석굴은 제38굴과 제47굴을, 골굴 석굴은 예배굴과 마애불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였다. 골굴 석굴은 세계 석굴 사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석굴 사원이라는 점이다. 석굴암 석굴이 창조적인 석굴이라면 골굴 석굴은 정통 석굴 사원을 계승하는 석굴이다. 골굴 석굴의 복원은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가치와 의미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될 것을 보인다. 키질 석굴은 서역남로 호탄과 함께 서역의 최대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에 자리하고 있으며, 3세기경 불교가 번성했던 쿠차국 시대에 개착되었다. 이 글은 키질 석굴의 위치적 특성, 열강의 약탈, 석굴의 분포, 석굴의 구조, 석굴 형식의 변천, 석굴의 의의 등을 고찰하였다. 키질 석굴의 대표적인 구조인 중심주굴 형식은 구조적 안전성의 문제로 창안된 석굴 형식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키질 석굴을 대표하는 석굴을 현장 조사하여 제38굴과 제47굴의 구조와 공간 구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마름모형 문양의 벽화는 기존의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해석 이외에 우주목의 잎인 보리수잎 혹은 연꽃잎으로 해석하였다. 키질 석굴의 정벽은 인도 초기 스투파의 상징 체계를 창조적으로 구현하여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해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골굴 석굴의 예배굴, 마애불과 키질 석굴의 제38굴과 제47굴을 비교하여 골굴 석굴과 키질 석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였다. 자연조건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배굴과 대상굴이라 형식에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Recently, the Korean Golgul Cave-temple has attracted attention as research comparing it with the world-class Cave-temple has begun in earnest. If the previous work compared the Cave-temple in India and China, this article compares the Cave-temple on the Silk Road and the Golgul Cave-temple, which served as a link between the Indian Cave-temple and the Chinese Cave-temple. The first of the Silk Road Cave-temples to emerge is the Kizil Cave-temple. This article compares the Kizil Cave-temple and the Golgul Cave-temple. The Kizil Cave-temple is studied by Cave 38 and Cave 47, while the Golgul Cave-temple is studied by Worship Cave and Rock-Cut Buddha. The Golgul Cave-temple is a famous Cave-temple temple that inherits the world's Cave-temple tradition. If Seokguram is a creative Cave-temple, the Golgul Cave-temple inherits the orthodox Cave-temple. The restoration of the Golgul Cave-temple will be an opportunity to shed light on the value and meaning of our country's Cave-temple. The Kizil Cave-temple is located in Kucha, the largest oasis city in the Western Regions, along with Hotan in the Western Regions, and was created during the Kucha Kingdom, when Buddhism flourished around the 3rd century. This article considers the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the Kizil Cave-temple, the plunder of the powers, the distribution of Cave-temple, the structure of Cave-temple, the transformation of the Cave-temple format, and the significance of Cave-temple. The typical structure of the Kizil Cave-temple is the Center Column Format. This form of Cave-temple is created as a problem of structural safety. In addition, the writer investigate the Kizil Cave-temple in the field to consider the structure and spatial composition of Cave 38 and Cave 47. Contrary to the interpretation that the diamond-shaped mural symbolizes Sumisan Mountain(Sumeru), it is interpreted as barley or lotus petals, the leaves of the spatial tree. The Kizil Cave Temple is believed to have creatively implemented the symbolic scheme of early Indian Stupa to address the structural limitations under load. In addition, the Golgul Cave-temple's Worship Cave and Rock-Cut Buddha were compared to the Kizil Cave-temple Cave 38, and Cave 47. So we looked at each other's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Although they reveal differences in structural limitations that arise in natural conditions, they were found in common in the form of worship and a large Buddha statue c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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