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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대 禦戎論과 華夷論

        朴志焄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8 역사문화연구 Vol.30 No.-

        북송의 禦邊政策과 그 중점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변화가 있었다. 이는 대체적으로 초기(太祖, 太宗, 眞宗代), 중기(仁宗, 英宗代), 후기(神宗, 哲宗, 徽宗代) 등 삼단계로 나눌 수 있다. 본고에서는 북송대의 禦戎論과 더불어 禦戎論의 근저를 이루는 사상원칙, 즉 華夷論을 규명하였다. 여기에서 어융론이란 邊防論, 邊務論이라고도 하는데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방법, 국경지대를 방비하는 책략에 관한 주장과 논의이다. 특히 禦戎의 戎은 오랑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용어상에서도 중국인의 화이론적인 인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북송대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각 시기마다 민족관계의 중심적인 추이, 어융론의 대표적인 내용 및 화이론의 특징 등을 고찰한 것이다.. 먼저 북송초기 遼에 대한 어융론은 단순방어관념 즉 “來則禦之, 去則勿逐”를 기본으로 하여 1) 邊防 주둔군의 대량증가와 2) 屯田 혹은 方田, 3) 무역회복 등이 논의되었고, 군대훈련과 장수선택, 군비를 정예하게 하는 것, 간첩의 이용, 鄕兵 모집, 군량확보, 邊民 구휼 등이 제시 되었다. 특히 먼저 內政을 공고하게 해야 한다는 安內의 입장과 安民을 강조하고 있다. 요에 대한 관점을 볼 때 차별적인 표현이 주류를 이룬다. 契丹족을 蜂蠆, 豺狼, 犬羊, 蛇豕 등 동물로 묘사하고, ‘비리고 누린내 나는 小蕃’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德으로 진무해야한다는 원칙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목적인 특징을 가진 이민족을 정복해도 중국에게 실익이 없고 단지 중국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 된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북송중기의 西夏에 대한 어융론도 성채를 쌓고, 군대훈련과 장수선택, 冗兵을 줄이며, 군량확보, 요새의 수비, 民兵 훈련, 戰馬의 보충 등으로 대체적인 요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어융의 기본 원칙이 계속 되풀이 되었다는 것은 북송대 내내 효과적으로 내정이 완비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華夷論的인 면에서 보면 邊備가 제대로 되어야 四夷가 저절로 복종한다는 전제 하에서 화이가 다르다는 원칙을 강조하였다. 또한 은혜를 베풀고 懷柔에 힘써야 한다는 당위론과 반역하면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이 공존하고 있다. 끝으로 북송후기에 가면 요나 서하와 같은 强敵이 아니라 서남지구의 交趾나 靑唐 정권이 변경을 침입하는데 따른 화이론을 볼 수 있는데 이민족의 형세에 따라 힘과 경중을 다르게 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특히 蠻性은 很悍하고, 蠻夷는 殘暴하다고 하였으며, 민족에 따라 지형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파악하고 이에 대해 대비하고자 하였다. 또한 부족별로 서로 흩어질 때 중국의 이익이 되며, 중국을 배신하면 번속국의 지위에서 배제하자고 하였다. 또한 羈縻를 계속 할 수 있으면 은혜와 신의로써 맺고, 위엄을 보여 德으로서 품어야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德化를 미치기보다는 중국에 대한 태도에 따라 대우를 다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북송대의 관료들은 국세 부진과 현실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타개하고 군비를 강화해야한다는 원칙론과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송의 국세 부진을 인정하면서도 이민족을 제압해야하고, 제압할 수 있다는 중화 중심적인 자존심이 포기되지 않고 있다. 원칙에 대한 강조는 사실 공론에 불과한데도 중국의 뿌리 깊은 中華意識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민족에 대해서 오직 중국위주의 주관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며, 상대방의 국력이나 세력에 따라 어융의 방법을 달리하는 면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어변의 방법이 각 민족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요나 서하 등이 중국을 공격할 때 군비를 강화하고 국세를 늘려야한다는데 모아지고 있다. 교지나 청당과 같은 소수민족 정권에 대해서는 관념론적인 중화사상의 원칙이 강조되고 있고, 중국을 받들지 않고 침략하는 데 대해서 더욱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북송대의 화이론은 이민족에 비해 열세라는 현실과 자존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당위론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는 어융론에서도 계속 견지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北宋时代的御边政策及其重点, 根据时期的不同有着不同的变化,大体分为初期(太祖,太宗,真宗代),中期(仁宗, 英宗代),后期(神宗,哲宗,徽宗代)等三阶段。在本稿里阐述了北宋时代的御戎论以及作为御戎论思想原则的华夷论。御戎论也被称为边防论,边务论,是有关防止其他民族侵略的方法、防备过境地带的策略的主张与议论。特别是御戎的戎是指夷狄,它的词义上也内含着中国人对华夷论的认识,所以这两者有着密切的关系。因此, 本論文拟把北宋时代分为初期, 中期, 后期,来考察各个时期民族关系的中心趋势、御戎论代表性内容以及华夷论的特征等。首先,北宋初期对辽国的御戎论是以单纯防御观念,即“来则御之,去则勿逐”为基础,探讨了1)边防驻军的大量增加 2)屯田或方田 3)贸易恢复等,提示出了军队训练和将帅选择、军备精锐化、间谍的利用、募集民兵、囤积粮食、抚恤边疆居民等。特别强调了巩固内政的安内立场和安民政策。在辽国的立场而言,不平等的表现方式形成了主流观点可以说是不公平的, 把契丹族描写成蜂蠆、豺狼、犬羊、蛇猪等动物,还被称为腥膻小蕃。虽然也不抛弃以德镇压的原则, 但仍然展示了就算征服了具有游牧特征的其他民族对中国也无益,只要不危害中国就可以的观点。其次,针对北宋中期的西夏的御戎论而言,修建城堡、选将练兵、节省兵力、广积粮食、控守险要、训练民兵、补充战马等基本原则大体上没有发生大的变化。如此, 御戎的基本塬则的反复实行,就反映了北宋时代一直没有完备有效的内政体系。从华夷论的角度上看的话,只有防备完备,四夷才会自觉地服从,在这种前提下,强调了华夷不同的塬则。另外共存着给与恩惠、致力于软化的正当论和如果叛逆也将无法对应的现实论。最后进入北宋后期, 出现了不同层次的华夷论. 对于不像辽或西夏这样的强敌,而是西南地区交趾或青唐政权的侵入边境,华夷论也根据其他民族的形式而采取或轻或重的防御战略。特别是传言蛮性很悍、蛮夷残暴,根据民族掌握地形和风俗的差异,然后采取相应的对策。当时北宋政府充分理解各个民族互相分散对中国有利,而背叛中国卽将废除藩属国的地位。如果能够继续从属,必须结以恩信、畏威怀德,与其说是德化,不如说是具有根据对中国的态度而给于不同待遇的意义。从以上内容可以看出,北宋时代的官僚对国势不振的现实具有正确地认识。进而提出了强化军备的原则和方法。但是在认识到宋的国势不振的情况,而没有抛弃要制压其他民族的野心, 也没有放弃以中华为中心的自尊心。对于原则的强调实际上只不过是空谈,而仍旧显示出了中国根源深远的中华意识。对于其他民族,仍然保持只有以中国为主的主观评价,但开始出现了根据对方的国力或者势力选择制定御戎方法的新的一面。另外掌握各个民族的特性,根据这些特性开始出现了不同的御戎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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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연의>와 한국 고전소설 군담의 비교 연구

        서정현 한국고소설학회 2022 古小說 硏究 Vol.53 No.-

        In this stud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ilitary narratives of Chinese novel <Bei Song Zhi zhuan(北宋志傳)> and its Korean translation <Buksongyeonui(北宋演義)> was to check the correlation between the military narratives of the Korean classic novels through a detailed comparative review. In Chapter 2, we review the records related to the int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Bei Song Zhi zhuan> and <Buksongyeonui>, suggesting the possibility that this novels may have been widely known among the literate of Joseon. In addition, it reconfirmed the influence it had on the creation of <Sohyeonseongnok(蘇賢聖錄)>, which had already been raised in previous studies. In Chapter 3, we compares and examines the specific contents of the military narratives in <Buksongyeonui> and the Korean classic novel. As a result, <Buksongyeonui> had a great influence on Korean novels in the point of embodying the division of "Hwai(華夷)" and confrontation with foreign enemies based on hostility to foreign enemies and a sense of national protection, and the type and development of military confrontation centered on Dosuljeon(道術戰; the magic-battle). It was inferred that And by comparing it with Seonghyungongsookryeolgi(聖賢公淑烈記)>·<Imssisamdaerok(林氏三代錄)> novel series, a new clue could be obtained regarding the problem of the formation of female heroes in classical novels. Nevertheless, it was also confirmed that the acceptance of <Buksongyeonui> in the military narratives of the classic Korean novel was not just a simple borrowing. In the antagonistic composition of the main character and the antagonist, both of them presupposed the distinction of "Hwai", but there was a difference due to the issue of exclusivity. In the development of military confrontation, the method of military confrontation was different depending on the level of the protagonist's ability. In the figure of a female hero, <Buksongyeonui> was more radical, whereas the Korean classic novel captured the individual figure of a character and the life of a woman more delicately. It was estimated that the basis of these distinguishing points was the difference in the historical context that accepted the theory of "Hwai", the difference in the narrative function and usage method of the military story in the play, and the problem of concern about women's self-consciousness. Until recently, several works such as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三國志演義)> and <Legends of Xue Rengui(薛仁貴傳)> have been limitedly mentioned as Chinese epic literature that influenced the formation of military discourse in Korean classic novels. Now, it is necessary to expand the research category and work together to deal with various Chinese narrative literature including <Buksongyeonui>. It should also be kept in mind that this influence relationship was not achieved through one-sided acceptance of Chinese novels, but rather through the independent transformation and development of Korean classic novels. 본 연구에서는 중국소설 <북송지전>과 그 국문 번역본 <북송연의>의 군담이 한국 고전소설의 군담과 지니는 상관관계를, 구체적인 비교 검토를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2장에서는 <북송지전>·<북송연의>의 국내 유입과 유통 관련 기록을 재검토하여 당대 조선의 식자층 사이에서 이 작품이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선행 연구에서 제기되었던 <소현성록> 창작과의 연관성을 재확인하고 보충하였다. 3장에서는 <북송연의>와 한국 고전소설 군담의 구체적인 내용을 비교 검토하였다. 그 결과 외적에 대한 적개심과 호국의식에 바탕하는 화이구분 및 이민족 적대자와의 대결을 형상화하는 점, 그리고 군사적 대결의 유형과 전개 방식 중 도술전을 중심으로 한 제반 요소들에서 <북송연의>가 한국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장편소설 <성현공숙렬기>·<임씨삼대록> 연작과의 비교를 통해 고전소설 속 여성영웅의 형성 문제에 관한 새로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 고전소설 군담의 <북송연의> 수용이 단순한 차용에 그친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확인하였다. 주인공-적대자의 대립 구도에서는 둘 모두 화이의 구분을 전제하면서도, 이민족에 대한 태도의 배타성에서 편차가 있었다. 군사적 대결의 전개 방식에서는 주인공의 능력 수준에 따라서 대결의 서술 양상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여성영웅의 형상에서는 <북송연의>가 좀 더 파격적인 반면, 한국 고전소설은 인물의 개별 형상과 여성의 삶을 보다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별점의 바탕에는 화이론을 수용하는 역사적 맥락의 차이, 작중 내 군담의 서사적 기능과 활용 방식의 차이, 여성의 자의식에 대한 관심사의 문제 등이 자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최근까지도 한국 고전소설의 군담 형성에 영향을 끼친 중국 서사문학으로 <삼국지연의>와 <설인귀전> 등의 몇몇 작품이 한정적으로 거론되어 왔다. 이제는 연구 범주를 확장하여 <북송연의>를 포함한 여러 중국서사문학을 함께 다루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영향관계가 일방적인 중국소설의 수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고전소설의 독자적인 변용과 발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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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사행(北宋使行)을 통해서 본 박인량(樸寅亮)의 문학사적 위상

        정선모 ( Sun Mo Jung ) 한국한문학회 2010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46

        본 논문은 한·중 양국의 각종 문헌자료에 산재해 있는 樸寅亮의 북송사행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그의 사행시기 및 경로를 밝혀내고, 그의 시문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박인량의 문학사적 위상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문학사에서는 박인량이 文宗34년(1080) 柳洪을 정사로 하는 북송사행에 副使신분으로 한 번 다녀왔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때 金覲등과 함께 지은 시문을 중국인들이 수집하여 小華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문학사적 위상을 논의해왔다. 그러나 박인량의 존재가 북송의 지식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처음 書狀官의 신분으로 북송에 갔던 문종 25년(1071)의 일이었다. 박인량은 이때의 1차 북송사행에서 자신의 뛰어난 시문 창작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북송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박인량의 1차 북송사행에서의 활약이 이후에 전개되는 고려와 북송과의 문화교류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북송 지식인들은 고려 지식인들의 시문 창작 능력을 비롯한 문화적 수준이 대단히 고양되어 자신들의 중화에 버금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북송의 神宗황제는 고려에 보내는 조서작성에 매우 주의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사신들이 머무르는 곳을 `小中華之館`이라고 호칭하면서 고려사신에 대한 대우도 성대해졌다. 그리고 박인량이 북송을 다시 찾은 2차 사행 때는 그가 지은 시문들을 수집하여 편찬하면서 소화집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박인량은 1차 사행 때 귀국 도중 신종황제의 축수재를 올리기 위하여 泗州의 龜山寺와 閏州의 金山寺를 방문했는데, 이때 <使宋過泗州龜山寺>와 <金山>시를 지었다. 또한 1차 사행 때 사행원들의 창화시 70여 편을 모아 서상잡영을 편찬했다. 그리고 2차 사행 때의 시문으로는 <伍子胥廟>와 <舟中夜吟>시가 현존하며, 소화집은 박인량의 시문을 수집하여 출판할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박인량의 국내 활동은 주로 외교문서 작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거란과의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성한 외교문서 「上大遼皇帝告奏表」와 「入遼乞罷교場狀」에는 박인량의 자주적 역사의식이 강하게 드러났다. 또한 박인량이 「文王哀冊」에서 문왕의 덕을 기리면서 `小中華`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고려의 문화수준이 중화와 같다는 `同文`의식에 기인했다. 이러한 `小中華`의식은 그의 2차에 걸친 북송사행을 통해 형성되었다. This thesis has revealed in regards to Park Inrayng`s diplomatic envoy to North Song Dynasty of period and process through in between South Korean and Chinese literature material and clarified his diplomatic envoy. And It was illuminated again through an integrated examination of all poetry and prose of Park Inrayng. It has been considered up to now that 樸寅亮participated in diplomatic envoy to North Song Dynasty only once with sub-traffic of 柳洪in the 34th year of 文宗(1080) in a history of South Korea literature. And, his historical literature phase has only been discussed by the fact of Chinese`s collected poetry and prose, made with 金覲 etc. that period and has been published it by the name `小華集`. However, 樸寅亮was known to North Song Dynasty as an intellectual in the 25th year of 文宗(1071) where he went to North Song Dynasty for the first time by the position of 書狀官. 樸寅亮demonstrated his ability in the field of poetry and prose with great creation skills and It made his deep impression to North Song Dynasty`s intellects. The first activity of 樸寅亮, with the diplomatic envoy to North Song Dynasty, influenced cultural exchanges between Korean Dynasty and North Song Dynasty of big literature development. As to Korean Dynasty`s intellect creation skills was developed a lot including the poetry and prose, the North Song Dynasty intellects had to consider of literary works they made. Moreover, the treatment to Korea Dynasty diplomatic envoy became grand while naming lodgings of Korea Dynasty`s diplomatic envoy `小中華之館`, too. And,樸寅亮`s poetry and prose what he made will be collected and be named `小華集` while compiling at the second of visited North Song Dynasty again by the diplomatic envoy. Thus, 樸寅亮was shown to Chinese diplomatic envoy in North Song Dynasty for his great literature talents and they recognized cultural level of Korea Dynasty again. As a result, Chinese started to consider that the cultural level of Korea Dynasty follows Chinese and called Korea Dynasty `小華` or `小中華`. And, intellects of Korea Dynasty including 樸寅亮also were formed `the same script consideration(同文意識)` that the cultural level of Korea Dynasty was the same as Chinese, and came to admit by `小中華` with the pride to the home country culture. This study related to diplomatic envoy`s traffic was collecting arranged to the North Song of 樸寅亮that lay scattered in various document material of the Korea and China two countries in this thesis. And, time and the route of his diplomatic envoy`s traffic were clarified, and the re-lighting to his literary historical position was t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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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논문 : 북송회화에 있어 문인화론의 역할과 의미 연구

        한방임 한국미학예술학회 2011 美學·藝術學硏究 Vol.34 No.-

        본고는 북송회화에 있어 문인화론의 역할과 그 의미를 연구고찰해 보았다. 과거의 문인화 연구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서 탈피하여 중국미술사의 다양한 시각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북송은 문인화론이 형성되었으며, 문인화가가 활동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북송 회화사에 있어 산수화가 문인화가 가장 발달한 것은 당말과 오대이후 수묵화의 출현에 기인하였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북송시대 문인화론이 북송회화와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에서 출발하였다. 오대 이후의 수묵화 등장과 수묵산수화의 세계를 통해, 북송시기 문인화론의 성립배경과 문인화의 회화이상을 조망해보았다. 당말 오대의 수묵화의 출현은 문인화론의 형성에 비교적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곽약허의 기운비사론은 당 장언원의 서화용필동론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화가의 창작정신에 기반한 기운론을 강조하였다. 곽약허의 문인화론은 직업화가와 문인화가를 구별함으로써 송대 이후 문인화의 우세를 규정하였다. 한편, 그의 문인화론은 문인화론의 한계를 잘 드러냈다. 장언원의 용필론을 고집함으로써 오대 형호의 필묵론과 북송 수묵화의 발전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한졸이 기운론의 병폐를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문인화의 수묵화풍은 북송중기에 이르러 만연하였으며, 또한 화가의 기운을 강조하는 수묵화풍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아 북송시대의 주된 화론경향을 왜곡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소식을 중심으로 한 문인화론의 회화이상은 위진시대의 현학으로부터 유래한 ``음영성정(吟詠性情)``에 따른 회화세계를 보인다. 대상의 본질을 강조함에 있어 ``전신``의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의 주체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화가 자신이 화가자신이 조물자가 되려는 의기를 표현했다. 소식 등 문인화가는 북송 이학체계의 궁극적인 가치인 ``도``와 무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북송시대 대표적인 산수화가인 이성의 수묵산수화의 세계는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도``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성은 ``천기(天機)를 가진 화가로, 문인화가들이 주장하는 ``생지(生知)``론과 구별된다. 이성은 당 오도자와 함께 포정과 윤편의 ``기예로써 도에 나아간(技進乎道)`` 고사에 적합한 화가였다. 이처럼 이성의 수묵산수화의 세계는 문인화론의 회화이상과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這本是在北宋繪畵,關於文人畵論的作用和其意味硏究考察了.從而意在多經過反省所過去文人畵論硏究的認識不足,試圖把樣方面的接.北宋是那個時代形成文人畵論,還有那個文人畵家活躍. 在北宋的畵史,山水畵與花鳥畵最大發展,因爲唐末及五代以後水墨畵的出現.這本是從北宋文人畵論和畵史的關系出發.在唐末及五代以後, 把水墨畵的出現和水墨山水畵的意識作爲硏究對象,在北宋時文人畵論的成立背景和文人畵的思想.唐末及五代水墨畵的出現,對形成文人畵論有較大的影響.郭若虛的``氣韻非師``之說,來源於唐張産遠的書畵用筆同論,而以畵家的創作情神爲主調的氣韻論. 郭若虛的文人畵論,以區分職業畵家和文人畵家,模式化宋代以後文人畵區位優勢.一邊,他的氣韻論露出有限文人畵論,以死固執了張産遠的用筆之論,逆行了五代荊浩的筆墨論和北宋水墨畵的發展.因此,韓拙痛陳氣韻論的弊端.文人畵把水墨畵風氣延到了北宋中期以後.且以畵家的氣韻爲主調水墨畵風氣,有方面歪曲北宋時代的畵論傾向.蘇軾的文人畵論的理想,顯示了吟詠性情的繪畵意識,來源於魏晉時玄學.他捕捉物象背後的實質,導入傳神槪念,重視人間的主體意識,終究表現出畵家本身成爲造物主的意志.蘇軾等文人畵家不關心北宋理學體系的價値體系,這就是道.從령一方面來看,北宋代表的山水畵家,李成的水墨山水畵意識,到達自然法則的道.他有天機,就是畵家的積好在心,久而化之.在本身和自然界間的隔離,以他和自然呼應,認識直觀性的宇宙法則.李成的繪畵意識,與文人畵論的``生知``之論有著區別.李成與吳道子,像疱丁和輪遍一樣,就是以技進乎道的畵家.如此李成的水墨山水畵意識和文人畵的繪畵理想不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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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宋 女性詞 試論

        윤혜지(Yun, Hyeji)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15 외국문학연구 Vol.- No.59

        고대 중국사회에서는 여성문학이라는 고유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여성들의 희노애락은 남성화자의 시야에서 한번 걸러져 묘사되어 왔고 이는 때때로 중국고대사회에서 여성성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성에 의해 묘사된 작품들로는 당시 여성들의 실제 목소리와 삶의 모습들을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회고하기가 쉽지 않다. 본고는 이점에 착안하여 실제 여성작가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여성작가의 사작품만이 지닌 특징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고대사회의 여성들의 삶을 모습을 재현해 보려하였다. 북송대 여성사인들의 사작품에서는 내용상 사랑과 애환, 저항의 주제를 담고있는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이별과 고독, 그리움을 다루고 있는 애환의 작품이 많다. 풍격상 이시기 여성사인 사작품에서는 청신하고 완약하거나 처량하고 서글픈 풍격이 주를 이루며, 표현수법상 사실적이고 여성 감성을 토대로 한 감정위주의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북송대 여성사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그동안 중국문학에서는 이청조를 제외한 나머지 사인들을 저평가해 왔지만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진실된 감정을 읊어 온 당시 여성사인들의 사작품은 훨씬 호소력 있게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끝으로 본고는 북송대 여성사를 통해 중국여성문학에 대한 초보적 단계의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본문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북송대 여성사인들과 그 작품들을 주로 소개하였다. 또 중국여성문학 연구는 이청조와 같은 유명작가에 집중되어 왔는데 본고는 그 대상을 조금이나마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iterature written by women was nonexistent in ancient Chinese society. During this period, women"s emotions and feelings were filtered out and depicted by male writer"s view. As result of that, it made Femininity set in. However, from male-written literatures which published, it is not easy to understand women"s true feelings. In this paper, I propose a reconstruction for women"s lives in ancient Chinese society through analyzing female writer"s Ci(詞) and essays of ancient literature. Most Women Ci-poems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describe three-major themes, which are Love, Joys and sorrows, Resistance through the direct expression of inner feelings. And the works often deal with feelings of separation, solitude and longing. From angle of style, there are creations of exquisiteness and realistic descriptive of inner feminine nature with rising emotions, including what seems to be depression of that time. Although the works from this period tended to be undervalued except Li Qingzhao"s works, most of women Ci-poems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express sincere feeling of their everyday life and that inspires sympathy with readers. Lastly, this paper gives a brief introduction of the little-known literature written by women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period. Therefore, further research is needed due to studies conducted in the past being mostly focused on well-known writers such as Li Qingzhao(李淸照) as opposed to the less-known authors. 고대 중국사회에서는 여성문학이라는 고유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여성들의 희노애락은 남성화자의 시야에서 한번 걸러져 묘사되어 왔고 이는 때때로 중국고대사회에서 여성성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성에 의해 묘사된 작품들로는 당시 여성들의 실제 목소리와 삶의 모습들을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회고하기가 쉽지 않다. 본고는 이점에 착안하여 실제 여성작가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여성작가의 사작품만이 지닌 특징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고대사회의 여성들의 삶을 모습을 재현해 보려하였다. 북송대 여성사인들의 사작품에서는 내용상 사랑과 애환, 저항의 주제를 담고있는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이별과 고독, 그리움을 다루고 있는 애환의 작품이 많다. 풍격상 이시기 여성사인 사작품에서는 청신하고 완약하거나 처량하고 서글픈 풍격이 주를 이루며, 표현수법상 사실적이고 여성 감성을 토대로 한 감정위주의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북송대 여성사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그동안 중국문학에서는 이청조를 제외한 나머지 사인들을 저평가해 왔지만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진실된 감정을 읊어 온 당시 여성사인들의 사작품은 훨씬 호소력 있게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끝으로 본고는 북송대 여성사를 통해 중국여성문학에 대한 초보적 단계의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본문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북송대 여성사인들과 그 작품들을 주로 소개하였다. 또 중국여성문학 연구는 이청조와 같은 유명작가에 집중되어 왔는데 본고는 그 대상을 조금이나마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iterature written by women was nonexistent in ancient Chinese society. During this period, women"s emotions and feelings were filtered out and depicted by male writer"s view. As result of that, it made Femininity set in. However, from male-written literatures which published, it is not easy to understand women"s true feelings. In this paper, I propose a reconstruction for women"s lives in ancient Chinese society through analyzing female writer"s Ci(詞) and essays of ancient literature. Most Women Ci-poems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describe three-major themes, which are Love, Joys and sorrows, Resistance through the direct expression of inner feelings. And the works often deal with feelings of separation, solitude and longing. From angle of style, there are creations of exquisiteness and realistic descriptive of inner feminine nature with rising emotions, including what seems to be depression of that time. Although the works from this period tended to be undervalued except Li Qingzhao"s works, most of women Ci-poems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express sincere feeling of their everyday life and that inspires sympathy with readers. Lastly, this paper gives a brief introduction of the little-known literature written by women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period. Therefore, further research is needed due to studies conducted in the past being mostly focused on well-known writers such as Li Qingzhao(李淸照) as opposed to the less-known auth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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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학부(史學部) : 북송(北宋) 개봉(開封)의 사묘신앙(祠廟信仰)과 도성사회(都城社會)

        김상범 한국중국학회 2016 중국학보 Vol.75 No.-

        傳統都城基本上以皇帝權力的象徵性和國家制度的運作爲中心著想而設計,而政治都市、禮儀都市的特性頗强。那마,都市居民的自發性因素,如何反映於都城史的開展上面?本論文主要以基層和地域背景흔强的民間祠廟信仰爲中心,多方面來探討這些社會文化因素對於北宋開封都市史開展的影響。北宋政府繼承了唐末、五代以來開放而包容的祠廟政策。這些政策與人口、物産日益集中的地理位置結合,全國的祠廟信仰也流入到都城開封,幷如``聖水事件``所見一般,在都城裡面持續出現新的崇拜對象,開封的祠廟信仰成爲前所未有的盛況。對於祠廟信仰的急速膨脹,北宋政府逐漸感到憂慮,自十一世紀後期以來,北宋政府的祠廟政策上面,開始發生變化。到了政和一年(1111),在都城裡爆發了毁滅1038所神祠的淫祠撤廢事件。這次事件與道敎敎團也有關系,他們利用在朝廷裡面的後援勢力,推行撤廢淫祠行動,吸收受到打擊的民間神祇,作爲道敎下屬神,而擴大道敎在民間社會的影響力。祠廟信仰與民間社會的關系非常密切,撤廢淫祠的行動經常無法獲得預期的效果,這次撤廢事件也是如此,但至少反映出祠廟信仰在都城社會裡面的影響力。當時祠廟已成爲都城居民的信仰空間,多種階層的開封居民,個人或家人遇到困境,就隨時拜神。在北宋時期,隨著社會影響力的增强,都城祠廟的公共角色也逐步提高,値得注目。遇到國家大事或公共危機時,政府主導下在都城的有力祠廟,正式進行公共禮儀,而這些禮儀逐漸擴大。這種情況下,崔府君廟、二郞神廟等都城祠廟的廟神誕辰日所擧行之廟會,也成爲開封居民日常生活中具有重要意義的年節活動。如春節、立春、佛誕日一般,廟會也正式成爲節日活動,都城居民以多樣多色的結社來準備廟會,諸司及諸行組織社會,準備奉獻。根據≪東京夢華錄≫等資料所載,廟會時政府機構也多方面來積極支持後援。廟會中,除了一些公式的祭祀儀禮之外,扮演不少種類的雜居娛樂活動,這些祭祀及表演活動,使信徒們體會到同類意識和文化上的認同感。如此,北宋都城祠廟,不僅是都城的主要宗敎空間,也是通過多種節日活動來,形成人際關系,形成共同的文化意識,强化紐帶的社會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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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식문학초기수용양상고(蘇軾文學初期受容樣相考)

        정선모 ( Sun Mo Jung ) 동방한문학회 2008 東方漢文學 Vol.0 No.36

        본 논문은 한반도에의 蘇軾(東坡,1036~1101) 시문집 전래과정을 검증함과 동시에, 그의 시문이 高麗 문단에서 유행하게 된 요인을 구명한 것이다. 특히 고려문인이 소식의 존재를 인식했던 시기와 그 과정, 그리고 그의 어느 시문집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고려조에 전래했으며, 또한 언제쯤부터 널리 유포되어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역사문헌자료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고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문단에의 소식 초기 수용 양상을 규명했다.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에서는 소식의 존재가 고려 문단에 알려지게 된 사실에 대하여, 원풍 3년(1080) 金富軾(1075~1151)의 부친 金覲이 북송에 가는 사절단에 참가하고, 귀국하여 갓 태어난 3남과 4남의 이름에 蘇軾·蘇轍 형제의 `軾`자와 `轍`자를 차용했다고 추정되어 왔다. 이러한 선행 연구에 대해서 필자는, 그보다 7년 전의 熙寧 6년(1073) 金良鑑 일행의 고려 사절단이 杭州 지역을 통과할 때, 당시 항주의 通判에 재직하고 있던 소식을 만난 역사 사실에 근거해, 소식의 존재는 김근이 북송에 출발하기 이전에 이미 고려 문단에 알려져 있었던 사실을 검증해 냈다. 또한 희녕 9년(1076) 崔思諒 일행의 사절단이 항주 지역을 통과할 때, 저잣거리에서 소식의 시문집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온 사실과 함께, 이 시문집이 항주에 있는 어느 서점이 영리를 목적으로, 소식이 항주 통판 재임 중에 지은 시문을 임의로 편찬하여 간행한 『錢塘集』이었던 사실도 밝혀냈다. 紹聖 원년(1094)부터 북송에서 新法黨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舊法黨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식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심지어는 그의 시문집이나 그 판목까지 소각되기에 이르렀지만, 구법당 정권이 부활하는 建炎 원년(1127) 이후가 되면, 소식은 다시 송나라에서 최고의 시인으로서 평가되었다. 당시 고려조는 북송의 신법당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양국간의 정치적인 관계가 고려 문인들의 소식 수용 양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김부식이 宣和 7년(1125)에 지은 大覺國師 義天의 묘지명에서, 소식의 시를 은밀히 인용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權適이 建炎 원년(1127) 이후에 지은 시에서, 소식 시문에의 탄압 사건을 거론하면서 이전 은혜를 입었던 북송의 徽宗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사실을 그러한 예로써 제시했다. 당시 고려 지식인들은 소식 시문을 계속 은밀하게 애독하면서도, 북송과의 외교관계 등을 고려하여 북송 말기까지는 그의 이름을 표면에 드러내어 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송 조정이 금나라에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게 되자, 소식의 시문집 등을 소각한 북송의 휘종 및 신법당 정권을 성토하는 등, 중국의 정권 교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고려 문단에서의 소식 문학의 수용은, 북송에서의 신법당과 구법당의 정권 교체 및 고려와 북송과의 외교관계의 변화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었던 사실을 밝혔다. In this study, the author has attempted to clarify when Su Shi蘇軾(東坡, 1036-1101)`s anthology was first accepted in the Korea高麗 Dynasty. First, The author reexamined the time as well as the process by which Su Shi`s existence had come to be known in the Korea Dynasty. The transmission process of Su Shi`s anthology and the exact nature of the transmitted anthology were concretely verified, while the following facts were clarified. Su Shi`s existence came to be known to the Korea Dynasty for the first time in virtue of the mission of Jin Liangjian金良鑑`s party, who went to North Song北宋 Dynasty in the 6th year of Xining熙寧(1073) and returned home the following year. This mission sent their gift present to Su Shi, who worked for Hangzhou杭州 as Tongpan通判 at that time, and received a letter of thanks. This fact was confirmed through Su Shi`s prose. Jin Fushi金富軾(1075-1151)`s father Jin Jin金覲 had discovered Su Shi and his brothers` existence through the mission of Jin Liangjian party`s before going to the North Song北宋 Dynasty. It was presumed that Jin Jin`s two sons (the third son Fushi富軾, who was born in 1075, and the fourth son Fuzhe富轍, who was born in 1079) were named after Su Shi蘇軾, and Su Zhe蘇轍. Such a presumption corresponds with the record “He had respect for them.” found in 『宣和奉使高麗圖經』. Su Shi`s anthology was transmitted to the Korea Dynasty for the first time by the mission of Cui Siliang崔思諒`s party, who went to the North Song Dynasty in the 9th year of Xining熙寧(1076). Such a fact is known through the record in Su Song蘇頌`s writing "When Korea`s mission passed in Hangzhou, they bought Su Shi`s collection of poetry in the market". The anthology of Su Shi which Cui Siliang崔思諒`s party had bought was 『錢塘集』, which was arbitrarily published in the 7th year of Xining熙寧(1074) by the bookstore. It is collection of Su Shi`s works when he was in service in Hangzhou. Such a fact is known through 『烏臺詩案』, which is a the collection of records relating to the `烏臺詩案 event`, which occurred in the 2th year of Wengfeng元豊(1079). There was suppression of Su Shi`s anthology in the King Huizong徽宗(1100-1125)period, and his anthology was burnt in the North Song Dynasty. At that time, Quan Shi權適(1094-1146) had gone to the North Song Dynasty to study. However, after ten years, he criticized the North Song politicians and King Huizong, saying "Though Su Shi`s anthology was incinerated for political reasons in the North Song Dynasty, his fame spread even to the Korea Dynasty, and will never disappear." Through Quan Shi`s sentence, we can know that Su Shi`s poetry and prose became popular in the Korea Dynasty a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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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人之文四六』收錄‘樂語’·‘致語’考

        鄭墡謨 ( Jung Sun-mo ) 우리한문학회 2021 漢文學報 Vol.44 No.-

        본고는 睿宗 연간(1106-1122)부터 북송문학의 수용을 통해 고려문단에서 새롭게 발전하는 문체 중의 하나로 『東人之文四六』에 수록되어 전하는 ‘樂語’와 ‘致語’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문체적 특징 및 창작 배경을 밝히고자 하였다. ‘樂語’는 송나라 때 궁중 연회 중에 배우가 황제에게 올리는 敎坊致語로 문한 담당자가 제작했는데, 蘇軾이 한림원에 재직 당시 지은 6편의 樂語 작품 분석을 통해 그 형식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致語’는 ‘樂語’의 首章에 해당하는 致語·口號만으로 구성된 문체로 문인들의 연회에서 제작되었는데, 歐陽修의 「會老堂致語」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고려전기에는 북송과의 교류에서 고려문단의 중심인물들이 정사나 부사, 또는 서장관 등 사절단원의 핵심 멤버로 선발되어 북송에 파견되었다. 또한 이렇게 파견된 사행원들을 통해 북송문단의 새로운 문체도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는데, 그러한 예로 金富佾, 韓安仁, 金富儀의 북송사행과 그들이 제작한 ‘樂語’ 및 ‘致語’ 작품을 살펴보았다. 金富佾은 肅宗 5년(1100)에 서장관으로 북송에 사행하는데, 이후 예종 10년(1115)경에 ‘樂語’ 작품 「八關致語」를 지어 예종 및 북송의 휘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예종 11년(1116) 4월에는 「西京龍堰宮大宴致語」를 지었다. 韓安仁도 예종 3년(1108)에 부사로 북송에 사행한 바가 있는데, 예종 13년(1118)경의 咸寧節 연회에서 ‘樂語’ 작품 「咸寧節御宴致語」를 제작했다. 한편 金富儀는 예종 6년(1111)에는 서장관으로, 그리고 仁宗 2년(1124)에는 부사로 북송에 사행한 바 있는데, 인종 7년(1129)경에 구양수의 「會老堂致語」를 의식하면서 문인들의 연회를 기념하는 「尙州宴致語」를 지었다. 이처럼 『東人之文四六』에 수록된 ‘樂語’ 및 ‘致語’는 북송문단에서 새롭게 유행한 문체로 초기의 작품은 모두 북송에 사행한 바 있는 문인들에 의해서 창작되고 있다. 이는 고려문단의 북송문학 수용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한문학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During the reign of Emperor Yejong(1106-1122), the Korean literary world gradually developed in the process of accepting the literature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This paper analyzes the stylistic features of the new literary styles―“Yueyu” and “Zhiyu”, which are included in Anthology of Poems of Silla and Goryeo Literati(Donginjimunsayuk), and clarifies the background of their creation. “Yueyu” was made with the Song dynasty palace banquet played in the Gyobang (Musical House) by civil ministers who were good at literature. For example, So Sik wrote six “Yueyu” during his working in Hallimwon. Through So Sik’s “Yueyu”, we can roughly analyze its formal characteristics. And “Zhiyu”, on the other hand, was composed of the first chapter of “Yueyu”, namely Zhiyu·Kouhao, which was composed by scholars on the spot at banquets. Its popularity began with Koo Yangsoo’s the Zhiyu made in Hoerodang. In the early period of Koryo, in the process of communication with the Northern Song Dynasty, the central figures of Korean literary circle went to the North Song for many times as the core members of the diplomatic corps as the envoys, deputy envoys and scribes. And in the process, they were trying to study this new style in the Northern Song’s literary world. This could be proved by Kim Buil, Han Anin and Kim Bueui’s state visit to the Northern Song and their “Yueyu”and “Zhiyu”. In 1100, Kim Buil paid a state visit to the Northern Song as a scribe, and in 1115, he was praised by the Koryo Yejong and the Northern Song Hwijong because of the Zhiyu of Palgwanhoe. In April of the following year, when he went to Seokyung, he wrote the Zhiyu made on a banquet in yongeon palace in Seokyung city. In 1103, Han Anin visited the Northern Song as a deputy envoy, and in 1118, in order to congratulate Yejong’s birthday, he composed the Zhiyu made on king’s banquet on the Hamnyeong Festival. Kim Bueui entered the Song as a scribe in 1111 and then as a deputy envoy in 1124. In 1129, he imitated Koo Yangsoo’s Hoerodangchieo, and wrote the Zhiyu of Sangjuyeon to commemorate the literati banquet. So, as one of new literary forms which was popular in the Northern Song Dynasty, “Yueyu” and “Zhiyu” can be known by Anthology of Poems of Silla and Goryeo Literati(Donginjimunsayuk). Especially, all of the authors had paid a state visit to the Northern Song, and this phenomenon was of great significance in the Korean literature and the history studies of Korean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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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北宋) 사학(詞學)의 전개(展開)와 사체(詞體) 관념(觀念)의 형성(形成)

        박홍준 ( Park Hongjun ) 한국중국학회 2018 중국학보 Vol.85 No.-

        본 논문은 북송 사학의 전개 과정을 통시적으로 고찰하여 송사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전개되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송사는 송대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 장르인데 이것은 문학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 대단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즉 송대 이전 문학에서 문학사의 중심이던 시문이 송대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송사로 교체되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민간 중심의 새로운 문학에 대한 수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된다.북송 사학의 형성에서는 갑자기 문학사의 중심에 서게 된 송사의 등장에 대해서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시기별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즉 북송 초기에는 아직 송사의 출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인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음악 가사로서의 기능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북송 중기 소식의 이시위사를 주장하는 전통 문인의 공격을 받고서 비로소 송사의 체재를 정비하고 송사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을 추구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북송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시도들이 하나로 종합되면서 별시일가의 주장이 힘을 얻고 사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북송 시기 사체에 대한 인식도 이러한 사학의 전개와 궤를 같이 하여 처음에는 사체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지니지 않던 것이 북송 중기의 충격을 받고나서 북송 후기에 이르러 주방언에 이르러 집대성이라 일컬어지는 사의 규율화가 확립되게 되었던 것이다.이러한 고찰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문학 장르가 문단에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민간에서 출발한 문학이 규범화된 이후에 민간의 생명력을 흡수하지 못하고 고정화되어 다시 쇠퇴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끝으로 북송 시기는 송사의 등장과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 시기 사학의 종합적인 성격을 고려했을 때 송사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연구가 앞으로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process of development of the repatriation history and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Song-ci was formed and developed. The lSong-ci is a literary genre that represents Song’s literature, a highly revolutionary event in the course of the development of literary history. In other words, in pre-song literature, poetry, which was the center of literary history, entered Song dynasty was suddenly replaced by a Song-ci. Although various analyses can be made on the causes of this change, I think the demand for new literature centered on the private sector is the biggest one.The chapter of the formation of Northern-Song Ci’xue aims to examine how the prosecution recognized the emergence of a Song-ci that has suddenly become the center of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how it dealt with it. In other words, in the early days of the Northern-Song, they did not know about the appearance of the Song-ci, so they focused only on functions as a music lyrics. However, after being attacked by a traditional writer sh-shi, who claimed the yi-shi-wei-ci in the mid-Song period, attempts were made to organize the Song-ci and seek comprehensive recognition of the case. These attempts, which began in the latter phase of the Northern-Song, gained strength in the claims of the bie-shi-yi-jia and launched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ci.The recognition of ci-ti at the time of the Northern-Song was also accompanied by the development of a ci-xue that did not clearly hold the concept of ci-ti, but after the shock of the mid-Song era, they reached the end of Song-dynasty and established a system called the synthesis by zhou-bang-yan.This consideration revealed that a new literary genre would take considerable time to establish itself in literary circles. It was also found that literature originating from the private sector has become stagnant and declining after being standardized without absorbing the private life force.Finally, the time of Northern-Song was a critical period in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lSong-ci, and considering the general nature of the history, it was thought that more comprehensive research into the Song-ci would be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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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시기 지식인의 고뇌와 새로운 세계관의 모색 − 북송 유자들의 『노자』 제1장의 이해를 중심으로 한 有無觀의 고찰 −

        김형석 동양철학연구회 2013 東洋哲學硏究 Vol.73 No.-

        당송변혁기를 맞아 새로운 유학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북송시기의 다양한 담론을 거쳐 남송 주자에 의해 송명이학의 사유체계가 형성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중 특히 북송시기 유자들이 신유학적 담론들을 제기하며 송학의 개념과 범주들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방법론적 측면에서 북송 유자들에 의해 새롭게 제기된 『노자』 이해 방식에 주목했다. 즉 이 글은 북송시대 사상사에 관한 대부분의 선행연구와는 달리, 유교경전이 아닌 『노자』에 대한 북송시기의 주석과 이해를 통해, 정주계열 이외의 다양한 북송유자의 고민과 지적인 기획들을 검토할 기회를 가져보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특히 『노자』 제1장에 대한 북송대 지식인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그들이 새로운 유학의 이론체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제기한 몇 가지 개념들을 통해, ‘유(有)’의 범주와 ‘무(無)’의 범주를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살펴보았다. 결국 북송대(北宋代) 『노자』 주석자(註釋者)들의 공통점은 『노자』의 형이상학 체계내에서 ‘有’와 ‘無’가 동등하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주역』 등 유가경전에 입각한 배불론이나 혹은 삼교합일의 논리 등 다양한 입장에서 당시 제기되고 공유되었던 宋學관련 명제들을 운용하여 이론을 수립하고 담론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과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하겠다. There has been a revival of Confucianism during the Tang-Song transitional era, and most concepts, categories, and systems of this Confucian revival movement was formed in the Southern Song(1127~1279), through the various discourses among the Northern Song(960-1127) Confucian scholars. In this paper, we focus on these various discourses not on Confucian classics but on Laozi by the Northern Song Confucians, including Sima Guang(司馬光, 1019-1086), Wang Anshi(王安石, 1021-1086), Su zhe(蘇轍, 1039 ~ 1112), Lu Dian(陸佃: 1042-1102), Wang Pang(王雱: 1044~1076). Unlike major preceding research on intellectual history of the Northern Song period, we explore new understandings of Laozi in the their Commentaries on Laozi. Especially, they put a new perspective on the first chapter of Laozi, intergrating the categories of 有Being and 無Non-being. They tried to prove these two categories not only have equal value, but also closely intergrate in Laozi’s metaphysics, in terms of Zhouyi(Book of Changes) or unity of the three teac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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