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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군(昏君)을 향해 세운 절의 - 조선 후기 광해조(光海朝) 절신(節臣)의 사적(史的) 형상화 양상 -

          鄭用健 ( Chung¸ Yong-gun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8

          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 사회에서 ‘광해조 절신’으로 기억된 인물들의 면면과 그 사적 형상화 양상에 대해 살핀 글이다. 조선은 유교적 국가관을 표방하며 세워진 나라였던만큼 건국 초기부터 유가 이념의 근간을 이루는 ‘忠’을 강조하였고, 군신 간의 의리를 중시한 역대 인물을 지속적으로 기억·현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節臣’에 대한 관심은 ‘昏君’이라 일컬어진 光海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본 고에서는 그러한 ‘광해조 절신’의 존재 양상을 ‘柳夢寅과 北人系 인물’, ‘金坽’, ‘金興國’ 등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들은 北人, 南人(金坽), 西人(金興國) 등 각기 다른 당파 출신으로 仁祖反正 당시에도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의리를 지킨 방식 역시 일정한 차이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들을 절신으로 높이고자 한 주체와 그 시기 및 방법에 있어서도 저마다의 변별적 국면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각 인물에 따라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절신 현양 양상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 속에는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 역시 일정하게 존재하였다. 먼저, 이들에 대한 추숭 작업이 시기적으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각 인물들은 대체로 17세기 이래 절신으로서의 점진적인 기억 과정을 거쳐 문인 사회에서 ‘광해군을 위한 충신’으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그러한 노력이 최종적인 완성을 보았다. 다음으로, 이들의 절신 현양에는 정보의 추가·삭제·윤색 등 일정한 조탁의 과정이 동반되었다는 점이다. 김흥국은 18세기까지만 해도 광해군에 대한 절행의 내용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절신 서사를 부여받았거니와, 유몽인과 김령이 역사적으로 기억되어 온 과정을 추적해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특정한 일화와 사건이 조금씩 덧붙여지거나 제외되면서 보다 완정한 절신으로서의 모습이 조형되어 온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유몽인과 북인계, 김령, 김흥국 등은 그들이 가진 서로 다른 배경과 행적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사적 형상화 과정을 거친 끝에 19세기에 이르러 ‘광해조 절신’이라는 담론장 안에 느슨하게나마 포섭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군주의 明暗 여부에도 불구하고 신하로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광해군의 遺臣으로 후대적 인정을 받았으며, 나아가 절의의 상징 ‘伯夷’를 비롯하여 ‘吉再·死六臣·金時習·燕山朝節臣’ 등 동방 절신과도 그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유가 이념의 진작과 확립을 위해 조선만의 伯夷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조선 문사들의 의식 활동은, 이처럼 광해군 때의 신하들을 대상으로도 분명한 성취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고의 논의를 통해, 그간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광해조 절신에 대한 이해의 증진은 물론, 鄭夢周·吉再·死六臣·金時習 등 일부 인물만을 대상으로 언급되었던 ‘조선조 절신 서사’의 발굴과 확충에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is thesis examines the aspects of the characters who were remembered as ‘Gwanghaegun(光海君)'s Loyalist’ and their historic imagery in the literary societ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s Joseon was founded with Confucianism, it emphasized ‘loyalty’ and continuously honored the historical figures who showed loyalty. This interest in loyalist was also applied to Gwanghaegun called tyrant. This thesis especially paid attention to the three categories of Gwanghaegun's Loyalist: ‘Yu Mong-in(柳夢寅) and buk-in(北人)’, ‘Kim Ryeong(金坽)’ and ‘Kim Heung-guk(金興國)’. They were in different situations at the time of the rebellion of Injo(仁祖反正) due to their different party colors. Not only that, they each had their own distinctive aspects in terms of the subjects who wanted to raise them, timing and methods. In spite of the aspect of the commemoration made independently according to the figures, there were also certain commonalities that penetrated them. First, in terms of time, it can be said that the commemoration work on them was completed in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Second, the commemoration was accompanied by a certain process of arranging, such as adding, deleting, and embellishing information. In this way, despite their different backgrounds and activities, the three men showed a pattern of being loosely included in the discourse of Gwanghaegun's Loyalist in the 19th century after going through a gradual commemoration process. Not only they received recognition from posterity as the loyalists of Gwanghaegun, but also stood shoulder to shoulder with the symbols of loyalist such as Jeong Mong-ju(鄭夢周), Gil Jae(吉再), Sayuksin(死六臣), Kim Si-seup(金時習) and Yeonsangun's loyalists(燕山朝節臣). For the promo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Confucian ideology, the activities of the Joseon scholars who worked tirelessly to find Joseon's Baek Yi(伯夷) were able to achieve clear results even for the subjects of Gwanghaegun. Through the discussion of this thesis, it is hoped that not only the understanding of Gwanghaegun's loyalist can be improved, but also the ‘Epic of the Joseon's loyalist’, which was mentioned only for a few people such as Jeong Mong-ju, Gil Jae, Sayuksin and Kim Si-seup can be discovered and expa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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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대시학문헌종술(韓國歷代詩學文獻綜述)

          장백위 동방한문학회 1999 東方漢文學 Vol.0 No.16

          고대 동국인은 독서를 즐겼으며, 그 책들은 한서적이 많았던지라 역사상 한시학이 널리 발달되어 왔다. 淸代 王士禎은 "과연 시를 알고 읊을 수 있는 동국인"이 라며 감탄했었다. 크게 보아 시학은 창작과 평론으로 나된다. 본문은 한국 역대 시학 문헌을 종합 서술하되 평론 방면에 치중하였다. 관련된 문헌을 6가지로 나누어 간술하면 아래와 같다. Ⅰ. 詩 話 시화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 형성기를 鍾嶸의 《詩品》으로, 심지어 더 거슬러 을라가《詩經》중의 몇 구절에서 잡을 수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시화의 성립은 歐陽修의《六一詩話》의 출현을 그 시점으로 본다.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최초의 시화가 생겨났으며 지금 능히 알아 볼 수 있는 것으로 4가지 종류가 있다. 구양수가 시화를 쓴 목적을 "재료에 따라 한담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태도는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가짐이었다. 고려시대의 시화는 그 책 이름으로 보아 이 전통이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국시화의 기본 창작 태도가 되었고, 체제상 필기·잡설에 더욱 가까우니, 다시 말해 진정 시화로 불릴 만한 저작은 겨우 40종뿐이다. 조선시대 徐居正의 《東人詩話》두 권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화"라 이름 지은 저작이다. "동인"이 시화라 하여 동인 시를 동인이 논한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작자의 동방시학(문학)에 대한 자각의식을 나타내었음이다. 동국 시와 중국 시의 아름다움을 서로 겨루어 보려는 것 역시 이후 시화 작자의 저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시학이 극히 발달한 시대로 洪萬宗이 엮은《詩話叢林》 4권은 최초의 한국 역대 시화 選編이라 할 수 있다. 단, 홍씨의 편록 안목이 너무 좁아 본국 시가 평론 부분만 취했으니 많은 양의 중국 시인·작품의 평론, 중한 시가 비교 평론 부분은 모두 절록되었다. 현대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가치에 적잖은 손상을 입혔다. 趙鍾業 교수가 편찬한《韓國詩話叢編》 17권은 지금까지 가장 완비된 한국시화재료집이다. 조 교수의 시화편찬은 광의의 시화 정의에 착안하였다 광의의 표준으로 따져 본다면 이 책에도 보충할 점들이 더 있다고 본다. 한국시화의 내용은 이론 비평과 실제 비평의 두 종류로 나뉜다. 이론 비평의 각도에서 보면 시의 기본 관념은 물론이고 시의 체제와 작법, 시의 미학 취미 등 모두 중국 전통 시학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비평의 각도로 보면 또 그 비평 대상을 근거로 한국 비평, 중국 비평, 한중점유 비평 3가지로 나눈다. 이런 문헌들은 모두 한국시학 연구, 중국시학 그리고 중한시학비교 연구에 아주 중요한 참고 자료이다. Ⅱ. 文 集 한국 역대 문집의 수량은 아주 많은데 序跋, 尺牘, 雜說, 專論, 論詩詩 등 체제에 시학 문헌이 대량 포함되어 있다. 모든 문헌 중 문집이 차지하는 위치야말로 가장 중시할 가치가 있다. 위에서 말한 시화도 사실 문집에서 떼 내어 나온 것이 적지 않다. 서발은 문체로 말하자면 작자의 의도를 끌어내어 그것으로 전체를 볼 수 있는 작용을 한다. 만약 서발의 대상이 시학과 관계가 있다면 그 중에는 평론의 내용이 꼭 포함되어 있다. 척독, 잡설, 전론, 논시시의 자료들은 아직 체계 있는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문집 중의 논시시(시를 시로 논함)는 중요한 시학 문집이다. 중국의 논시시와 비교하면 한국의 논시시는 詩體상으로 보아 절귀 위주가 아니라 고언율시 절귀 형태가 공존한다. 한국 역대 문집 중 논시시의 수량은 많은데 "論詩" "學詩"로 제목을 붙인 것 외에 "누구누구의 시를 읽고"라고 제목이 붙여진 것도 연구자들이 마땅히 중시해야 할 것이다. 문집 중의 잡설, 전론들에는 가끔 강렬한 이론 색채를 띤 것도 있는데 시화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Ⅲ. 筆 記 필기와 시화는 문체상으로 보아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다. 만약 중국시화를 章學誠의 의견에 따라 "論詩而及事"와 "論詩而及辭"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한국시화의 대다수는 전자에 속한다. 따라서 체제상 시화와 필기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다. 한국의 필기는 아주 풍부한데 어떤 것은 문집 중에 산재하거나 혹은 彙編된 것도 있는데 주로《稗林》과《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다. 시학 문헌상 필기의 중요성은 이미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으나 전체를 망라한 문헌 요구상으로 볼 때 아직 더 많은 작업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다. Ⅳ. 選 本 선본은 중요한 문학 史料이다. 한국 최초의 선본은 崔瀣의《東人文》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책은 이미 소실되었으나《東文選》에 그 서문이 보존되어 있다. 그 選編 동기를 들자면 첫째 한국은 고래로 중화풍을 흠모하여 이미 문장이 찬란하였음이고 둘째로 중국 문사와 교제할 때 "동인 문자를 보고자 하는 이가 있었으나 여태 책으로 만들어 내어 보인 적이 없었으니 부끄러움을 느껴 돌아와 이런 류의 책을 지을 뜻을 가졌다"하였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보면 이것은 "집성된 책" 한 부이다. 이 후의 선본들 즉《靑邱風雅》, 《東文選》역시 이런 기능을 갖추고 있다. 중국 선본의 기원과 작용은《隋書·經籍誌》의 기재에 의하면 비평의 기능을 갖추었으니 이 점이 중한선본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초기 한국선본의 편선초에는 모두 문헌 보조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신라, 고려조 시학 연구의 기본 재료가 된다. 한국 고대 선본을 선별 대상으로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한국시선, 중국시선, 중한시 겸선초이다. 조선시대 어떤 선본들은 문헌 輯存의식이 강하지 않아 종종 일정한 선편 취지를 드러낸다. 御旨를 받들어 만든 《杜陸千選》, 민간에서 유행된《百聯抄》등의 선본에서 시풍의 변화를 고찰할 수 있다. 선본 중의 비평어·주석들 역시 주의를 기울일 만한 시학 재료이다. 한국 최초의 비평어 선본으로는《三韓詩龜鑒》을 들 수 있다. 《靑邱風雅》의 주석 중에는 가끔 중국 시인의 시귀가 있으니 당시 중국시 학의 전래 상황을 잘 짐작할 수 있다. 주석 이외에도 평론을 가한 것도 있다. 평론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李稙의 《纂注杜詩澤風堂批解》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는 師古, 王洙, 崔夢弼, 趙次公, 劉辰翁들의 비평 주석을 집록한 외에 가끔 자기의 평론도 더하였다. 또 자기의 견해를 밝히거나 앞사람들의 의견을 검토하는 등 정독하는 정신을 나타내었다. 이 비평에 나타난 시학 관념은 주자나 명대 전후 7자를 계승한 듯하니 그것은 그의 학문 근원과 처한 시대 상황과 관계가 있는 듯 하다. Ⅴ. 類 書 류서는 백과전서의 성질을 띠고 있으나 가끔 시학 내용을 포함한 것도 있다. 중국의 류서는 魏 文帝 시의《皇覽》을 시조로 그 찬술이 끊이지 않고 卷帙 수가 방대해졌다. 현존하는 한국의 류서는 모두 조선시대에 생겼으며 그 중 시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李 光의《芝峰類說》, 李瀷의《星湖僿說》, 安鼎福의 《星湖僿說類選》, 權文海의《大東韻府群玉》, 李裕先의 《林下筆記》등이 있다. 한국류서는 모두 개인 저술인지라 일반적으로 중국의 《太平脚覽》, 《冊府元龜》, 《永樂大典》, 《古今圖書集成》들과 같은 방대한 규모의 권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학 저술 중 류서에 관한 관심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류서 중의 문헌은 더욱 발굴해 낼 것이 많으니 두 가지 상황으로 나누어 볼 때, 집을 하였으되 다하지 못한 것, 또 여태 이용되지 못한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류서는 재료를 집록했을 뿐 작자 본인의 판단이 적은 것이 중국 류서의 통례이다. 허나 한국의 류서에서는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들면서 작자의 고증과 견해를 더한 경우가 있다. 시학문헌학의 각도에서 볼 때 이것은 재료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작자 본인의 시학관을 드러낸 점이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Ⅵ. 行 紀 중한 양국은 역대로 使者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파견된 사자는 기행 중 "朝天錄" 혹은 "燕行錄"이란 이름으로 견문을 기록하였으며, 그 내용은 당시 중국의 정치, 경제, 전장제도, 사회습속, 사상, 학술 등 여러 방면으로 언급하였다. 문체상으로 보아 연행록은 운문과 산문으로 나뉜다. 현존 복사 출판된 연행록은 산문체가 많으며 작자 미상의《계산기정》, 李宜顯의《陶谷集·紀行詩》, 李時秀의《續北征詩》등은 모두 시체이다. 각종 문자 중에 흩어져서 보이는 "조천록", 柳得恭의《熱河紀行詩注》 는 운문과 산문의 결합체라 할 수 있다. 조선 사자는 중국에 와서 중원의 문인 학자들과 교류하며 "필담으로 화답하고 서찰로 소식을 전하였다." 특히 건륭조의 연행록 중에 이런 류의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 비교 시학의 연구에서는 매개체의 작용을 아주 중시하는데 이런 문헌들은 바로 가장 생동감 넘치는 문학 교류 생활 기록이라 하겠다. 기행문 중의 시학 재료는 비록 몇몇 학자들이 주의를 기울였으나 아직 연구가 미흡하다. 예로《韓國詩話叢編》제 11권에 수록된 朴趾源의《楊梅詩話》는 바로《熱河日記》에서 나왔다. 그러나 《熱河日記》중의 시학 재료들은 "시화"라고 표제하지 않았으며, 제4권의《避署錄》에도 상당히 풍부한 재료들이있다. 또 박장암이 집찬한《縞紵集》의 범례에서 말하기를 "이 책은 《巾衍集》에서 시작되어《貞藝稿略》에서 끝난다. 옆으로 아래로 緯經을 이루며, 시화라 할 수도 있고 제목들 모음이라 할 수도 있다"하였다. 또 《湛軒燕記》중의〈乾淨筆談〉, 洪大容과 嚴誠, 潘庭筠들의 담화에서 시학에 관해 언급한 것이 많다. 이러한 필담의 재료를 조선인들이 가지고 귀국한 것이다. 한국 역대 연행록의 문헌적 가치는《비단 시학 방면뿐만 아니라》학술계의 큰관심과 중시를 일으켜야 마땅할 것이다. 이상 열거한 시화, 문집, 필기, 선본, 류서, 기행문 등 여섯 가지 서적을 통해 한국 역대 시학 문헌을 종합 서술하였다. 그 밖의 史書, 碑刻 등의 문헌중 시학 재료들은 너무 자질구레하여 여기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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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현주(洪顯周)와 청(淸) 문단의 신교(神交)와 그 의미

          林映吉 ( Yim Young-gil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7

          이 논문은 洪顯周(1793~1865)가 청 문사들과 서신을 통해 교유한 경위와 그것이 19세기 한중 문인 교류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고찰하였다. 홍현주는 正祖의 부마로, 중국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1812년 서장관 申緯가 홍현주를 북경 문단에 소개한 이래로 오랜 기간 청 문사들과 서신 왕래를 지속하며 교제를 이어갔다. 홍현주는 중국으로 가는 사행편을 적극 활용하여 신위와 동일한 인맥을 공유하는 한편, 『豐山世稿』와『永嘉三怡集』, 그리고 자신의 시집인 『海居齋詩鈔』와 「淸潭別業圖」 등의 그림을 중국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신위의 중국 내 인맥과 차별되는 대청 교류망을 구축하였다. 홍현주는 김정희와 신위를 매개로 하여 翁樹崑ㆍ吳嵩梁ㆍ蔣詩ㆍ陳文述ㆍ張深 등 翁方綱 문하의 동인들과 神交를 맺었으며, 權永佐ㆍ許櫟ㆍ鄭元容ㆍ姜溍 등을 매개로 하여 陶澍와 卓秉恬 등 1802년(嘉慶 7) 진사 동방생과 신교를 맺음으로써 조선과 청 양국의 문학 교류에 직ㆍ간접으로 참여한 구성원을 다양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홍현주의 교유 활동은 秋史 金正喜로 대표되는 19세기 전반기 한중 문인 교유의 주요 흐름과 합치하면서도 한중 교류망의 군소 지류가 형성되고 확장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details of epistolary communications of Hong Hyeon-ju(洪顯周) with Qing litterateurs, and its meaning in the history of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Qing in the 19th century. Hong Hyeon-ju was a son-in law of the king Jeongjo(正祖) and had never been to China, but since Shin Wi(申緯) of Seojanggwan introduced Hong Hyeon-ju to the Beijing literary in 1812, he continued to communicate with the Qing litterateurs for a long time. Hong Hyeon-ju actively utilized the delegation trips to China to share the same personal connections with Shin Wi, while he spread his 『Pungsan-sego(豐山世稿)』 and 『Yeonggasamyi-jip(永嘉三怡集)』, as well as his collections of poems 『Haegeojae-Sicho(海居齋詩鈔)』 and his painting 「Cheongdambyeoleopdo(淸潭別業圖)」 to China, forming an exchange network in China that was differentiated from Shin Wi's personal connections. Hong Hyeon-ju formed an epistolary communications with Wu Songliang (吳嵩梁), Jiang Shi(蔣詩), Chen Wenshu(陳文述), Zhang Shen(張深), who were members of a literary coterie under Weng Fanggang(翁方綱), through Kim Jeong-hui(金正喜) and Shin Wi. In addition, by forming a epistolary communications with Tao Zhu(陶澍), Zhuo Bingtian(卓秉恬) who were fellows of JinSa in 1802 through Gwon Yeong-jwa(權永佐), Heo Ryeok(許櫟), Jeong Won-yong(鄭元容) and Gang Jin(姜溍), Hong Hyeon-ju contributed to diversifying the number of members who directly or indirectly participated in literary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Qing. Hong Hyeon-ju's activities have important meaning in that they played a certain role in the formation and expansion of minor branches of the Joseon-Qing literary exchange network while being consistent with the main flow of the Joseon-Qing literary exchange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which is represented by Kim Jeong-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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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韓末)의 전쟁서사시 「망금성백오십운(望金城百五十韻)」 연구

          朴貞珉 ( Park Jeong-min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7

          본 연구는 한말 전기의병으로 활약한 小雲 金會鍾(1852~1916)의 전쟁서사시 「望金城百五十韻」을 고찰한 것이다. 이 시는 1896년에 봉기한 의성의 병진이 해산한 4년 뒤에 작성된 298句 1490字의 五言古詩로, 세칭 ‘望金城詩’라고도 불리운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이 시의 서사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의병의 활동상을 회고하여, 개인의 전쟁 경험을 핍진하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褒貶을 동반한 역사 인물의 用事를 통해, 한말 지식인의 서정을 함축적이고 비유적으로 그려내었다. 이 시는 ‘현재-과거-현재’의 구성을 취한다는 점에서 한문서사시로서 전형성을 띠며, 사실 준거와 역사의식을 드러내는 注의 활용이 대폭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한말 한문서사시로서 특수성을 띤다. 그리고 조탁과 기교를 배제한 채 시대적 고뇌와 개인적 심회를 시에 담박하게 담아낸 점, 전쟁의 공포와 時事에 대한 불만 등의 부정적 정서와 긍정적 정서를 함께 반영한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전쟁의 실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한말의 시대상과 지식인의 의식을 그대로 반영한 「望金城百五十韻」은 諸家의 평가대로 ‘詩史’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으며, 한말에도 한문학이 문학적 기능이 여전히 활발히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This study aims to explore the war epic 「Manggeumseong Baegosibun(望金城百五十韻)」 written by Soun(小雲) Kim Hoejong(金會鍾, 1852~1916) who used to work as the early Righteous Army soldier at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period. Also known as ‘Manggeumseongsi(望金城詩)’, the poem, based on a Oeon Gosi(五言古詩) format composed of 298 verses and 1490 characters, was written four years after the disbandment of the Uiseong(義城)-based Righteous Army in 1896. The narration of the poem with repetitive tension and relaxation is focused on looking back on the Righteous Army’s activities, coming and going between the present and past, and describing the individual’s war experience realistically. It also shows the lyricism of the intelligentsia at the end of Korean Empire in an implicative and metaphorical way through quotation(用事) from historical persons and criticism(褒貶). The time frame of “Present-Past-Present” shows a typical feature of classical Chinese epic poem. Particularly, it has a distinct characteristic of classical Chinese epic poem as well, of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period, with enhanced use of notes(注) exposing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conformity to fact. Furthermore, it is worthy of special mention as it describes the agony of the times and individual's emotion plainly, without poetic elaboration and technique, and shows the negative emotionality such as the fear of war and dissatisfaction over current affairs(時事), and the positive one like pride and hope. Clearly reflecting the times of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period and the consciousness of the intelligentsia on the basis of actual war experience, 「Manggeumseongsi(望金城詩)」 shows its distinct characteristics as the ‘poetical history(詩史)’ in many aspects. It has an enormous value as a proof that Sino-Korean Literature still performed a literary function even at the end of Korean Empir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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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열사의 순국에 대한 시각의 층위 변화와 그 의미

          金英珠 ( Kim Young-ju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7

          본고는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열사의 순국에 대한 黃玹의 인식의 층위 변화와 그것에 대한 의미를 분석하였다. 분석 대상인 閔泳煥에 대한 황현의 다양한 인식 층위는 일제의 강점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열사에 대한 당대인으로서의 인식의 편린을 문학적으로 형상했다는 역사적 인식과 문학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열사의 순국에 대해 기왕에 일반적으로 제시되던 ‘捨生取義’ 논의에서 탈피하여 열사 개인의 태생적인 신분과 사회적인 지위, 정치적인 위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열사의 순국에 대한 의미를 차별적으로 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의해 밝혀진 열사의 순국에 대한 의미는 ‘贖罪’와 ‘免避’에서부터 ‘本分’과 ‘職務’의 당위적 의미를 거쳐 ‘大義’, ‘忠憤’의 의미와 함께 ‘군주의 龜鑑’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황현의 개인적 평가와 의미 부여가 아니라 당시 문인들의 작품에서도 부분적으로 확인되는 인식임을 확인하였다는 측면에서 열사의 순국에 대한 황현의 인식 층위가 기록문학으로서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s the meaning and the stratified changes in Hwang-Hyeon’s perception. Hwang-Hyeon’s various perceptions of Min Young-hwan, the subject of analysis, have historical and literary implications for the convenience of the perception of patriots who sacrificed themselves for the sake of the na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reaking away from the generally presented ‘Sa-Saeng-Chui-ui(捨生取義)’discussion about a patriot who laid down one's life for his country, considering the patriot's natural status, social status, and political status, it was confirmed that he gave discriminatory meaning to the patriot's martyrdom. He said the meaning of patriot’s death was a natural task, indulgence, natural duty, great cause, anger from loyalty, and a model of a king. The point is that this is not his personal assessment and meaning. In terms of confirming that it was partially identified in the works of writers at that time, the stage of his perception of the patriot's death can be regarded as an important opportunity to confirm the meaning and value of documentary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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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정당(晩靜堂) 서종태(徐宗泰)의 연행시(燕行詩) 연구(硏究) -『만정당유고(晚靜堂遺稿)』 소재(所載) 연행록(燕行錄)을 중심으로 -

          李承容 ( Lee Seung-yong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7

          본 논문은 晩靜堂 徐宗泰(1652~1719)가 癸未年(1703, 숙종29) 燕行 당시에 창작한 燕行詩를 고찰한 글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접근이 이루어 지지 않은 『晚靜堂遺稿』 所載 燕行詩를 중심으로 徐宗泰의 燕行詩에 드러난 주된 주제와 특징적 양상을 고찰하였다. 먼저 徐宗泰의 癸未年 燕行과 관련된 자료 가운데 『晚靜堂遺稿』에 수록된 日錄과 燕行詩는 그의 燕行記錄을 온전히 담고 있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으며, 17세기의 燕行錄 저술 방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徐宗泰의 燕行詩에 드러난 주된 주제와 특징적 양상은 “燕行路程의 인상적인 風情 묘사”와 “淸에 대한 반감과 大明義理의 고취”로 요약된다. “燕行路程의 인상적인 風情 묘사”에서 살펴본 작품에서는 燕行路程에서 거치게 된 지역의 단순한 풍광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 지역의 勝景, 역사, 경제 등 다양한 風情을 면밀히 담아내려 했던 徐宗泰의 기록의식이 돋보였다. 또 그가 이전 紀行詩에서 자주 활용하던 律詩 뿐만 아니라 古詩와 連作의 絶句 등 다양한 형식을 詩作에 활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가운데 「箕城雜詠」과 「孝娥歌」와 같은 작품은 당대에 손꼽히던 詩人이었던 昆侖 崔昌大(1669~1720)가 大家의 작품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淸에 대한 반감과 大明義理의 고취”에서는 徐宗泰가 당대에 누구보다도 崇明背淸의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였던 인물이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인식이 그의 燕行詩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徐宗泰에게 癸未年 燕行은 자신이 文明國으로 인정하기 힘든 淸왕조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는 동시에 융성했던 明왕조의 흔적과 역사를 회고하는 과정이었다. 徐宗泰는 燕行路程에서 淸나라의 천하로 변해버린 中原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면서 울분과 한탄을 금하지 못했으며, 사라져 버린 明나라의 문명에 대한 그리움과 한탄을 그가 특장을 보였던 古體詩를 비롯한 다양한 형식을 활용하여 詩作에 담아내었다. 「寧遠城感憶袁經略崇煥」과 「夜坐亡聊次金息菴燕館感懷韻」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은 낯선 異域의 풍광과 그 감회를 기록한 紀行詩의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자신이 견지했던 崇明背淸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한 작품이라 하겠다. This study explored the travel poem written by Manjeongdang(晩靜堂) Seo Jong-tae(1652~1719) when he traveled to Beijing as an envoy in 1703. This study examined the main theme and distinct characteristics of Seo Jong-tae’s travel poem by focusing on the Manjeongdangyugo-themed travel poem which has not been studied until now. First, among the materials related to travel to Beijing in 1703, the record and travel poem in Manjeongdangyugo hold the significant value for reflecting the Seo’s record of travel to Beijing and for showing how travel journals were written in 17th century. The main theme and distinct characteristics found in the travel poem by Seo are summarized as “Description on impressive aspects in paths to Beijing” and “Inspiration of Repulsion Against Qing Dynasty and Loyalty to Ming Dynasty”. For the poem about “Description on impressive appearance of paths to Beijing”, Seo tried to record not only the view of the paths but also the various aspects such as beautiful scenery, history, and economy of the regions. In the Chinese poem-style works, Seo also utilized various forms including monostrophic poem he mainly utilized in previous travel poetry and quatrain used in old style poem and serial poems. Among the works, [Gisungjapyeong] and [Hyoaga] were highly praised by Gonryun(昆侖) Choi Chang-dae(1669~1720), the best poet of the time, as the poetry works by the great master. In “Inspiration of Repulsion Against Qing Dynasty and Loyalty to Ming Dynasty”, this study focused on the point that Seo insisted a firm ground on loyalty to Ming Dynasty and rejection against Qing Dynasty more than anyone else and explored how such thoughts were expressed in his travel poem. To Seo, travel to Beijing in 1703 was the process of witnessing the reality of Qing Dynasty which he couldn’t admit as a civilized country and recollecting the remains and history of Ming Dynasty that once flourished. On his way to Beijing, he resented and lamented after witnessing the reality of China that turned into the country of Qing Dynasty and he expressed his longing and lamentation for the lost civilization of the Ming Dynasty by utilizing various forms including the old style poem in his poems. These poems are represented by [Yeongwonsung Gamukwon Kyeongraksunghwan(寧遠城感憶袁經略崇煥)] and [Yajwamangryo Chagimsikam Yeongwangamhuiwoon(夜坐亡聊次金息菴燕館感懷韻)]. These poems record the scenery of strange lands and his feelings as the travel poems while actively expressing his strong will for loyalty to Ming Dynasty and rejection against Q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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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의 판본과 어고(御考) 과부(科賦) 시권(試券)에 대한 소고(小考)

          金紀燁 ( Kim Gi-yeop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7

          『賓興錄』은 正祖代에 설행된 지방 별시의 전말을 기록하고 입격한 試券을 수록한 자료이다. 6종의 『빈흥록』 중 『嶠南賓興錄』에는 정조의 御考를 거친 영남 儒生의 우수 科賦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批點이 판각된 판본이 존재한다. 이 연구에서는 『교남빈흥록』의 판종을 살피고 御考 批點을 토대로 優等 試券에 나타난 정조의 科賦 평가 기준을 살폈다. 『교남빈흥록』은 권2 「御考優等試券」까지 수록된 판본과 여기에 「陶山試士壇碑銘」ㆍ「頖村致祭時日記」를 追刻하여 부록으로 넣은 판본이 있다. 부록이 추가된 판본과 1792년에 판각된 판본은 구성뿐만 아니라 批點의 형태도 차이를 보인다. 우등 시권에서 批點의 위치는 구절의 2ㆍ3ㆍ5 字마다 찍혀 있으나, 특정 글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句 자체에 매겨진 것으로 생각된다. 『교남빈흥록』의 「御考優等試券」에는 姜世白ㆍ金熙洛ㆍ金象九ㆍ曺深이 작성한 科賦 4편이 실려 있다. 네 사람 모두 30句로 구성된 科賦를 지었으며, 각 句의 4번째 자마다 虛辭를 넣어 6言 科賦의 형식을 준수하였다. 典故 또한 거의 모든 구마다 인용되었는데 三上의 성적을 얻은 姜世白ㆍ金熙洛의 시권에는 試題와 동일한 출처의 전고가 빈번하게 쓰였다. 三中의 성적을 얻은 金象九ㆍ曺深은 말미에 4言의 亂辭를 넣어 姜世白ㆍ金熙洛의 답안과 형식적인 차이를 보였으며, 亂辭 부분에서 정조의 批點을 전혀 획득하지 못하였다. 4언 亂辭의 활용으로 인해 조선 후기 科賦가 요구하는 6언의 規式에서 이탈하게 되는데, 批點을 통해 정조 또한 科賦에 亂辭의 출입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A binheungrok(賓興錄) is a book that contains details of local byulsi(a type of public officer test held for special occasions in Joseon Dynasty) held in Jeongjo era and the selected si-gwon(試券, answers). Among the six types of binheungrok, Gyonam Binheungrok(嶠南賓興錄) contains outstanding works of gwabu(科賦, rhymed pieces written for public officer exams) by yusaeng(儒 生)s from the Yeong-nam region, that were directly reviewed by the king(eo-go, 御考). Unlike other binheungroks, bi-jeom(批點, marks left by the reviewer)s are engraved in some versions of Gyonam Binheungrok. This study reviews the versions of “Gyonam Binheungrok” and analyzes the evaluation criteria used by Jeongjo, based on the bi-jeoms he left on the selected answers. There is a Gyonam Binheungrok(嶠南賓興錄) version that includes the second book titled “Eo-go-udengsigwon(御考優等試券, selected works reviewed by the king).” There is another version of “Gyonam Binheungrok(嶠南賓興錄)” that contains the additional appendix with the engraved “Dosansisadanbimyeong(陶山試士壇碑銘)” and banchonchijesiilgi(頖村致祭時日記). Compared to the version that was made in the year 1792, the version with the appendix not only has a different structure, but also contains bi-jeoms with different shapes due to the engraving of the bi-jeoms. In the book of selected works, the bi-jeoms are left at the second, third, and fifth letters in certain phrases, but it is thought to have been left to indicate the phrase, not the letter. The Eo-go-udengsigwon(御考優等試券) of Gyonam Binheungrok contains four gwabu(科賦)s written by Kang Se-baek(姜世白), Kim Hee-rak(金熙洛), Kim Sang-gu(金象九), and Jo Shim(曺深). Each wrote a gwabu(科賦) with 30 phrases. Each phrase contains heo-sa(虛辭, function word) as the fourth letter and consists of six words(6言), following the typical structure of gwabu(科賦). Almost every phrase contains jeon-go(典故, reference from the classics), and Kang Se-baek(姜世白) and Kim Hee-rak(金熙洛), who got sam-sang(三上) grade, quoted from the same reference that was used in the prompt. Kim Sang-gu(金象九) and Jo Shim(曺深), who got sam-jung(三中) grade, each added a four-word nan-sa(亂辭, a statement summarizing a big idea) at the end, which distinguishes the structure of their works from the works by Kang Se-baek(姜世白) and Kim Hee-rak(金熙洛). None of these nan-sa(亂辭)s won Jeongjo’s bi-jeom. The utilization of nan-sa(亂辭) makes their work sway from the six-word(6言) format that was required in gwabu(科賦)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lack of bi-jeoms shows that Jeongjo didn’t like nan-sa(亂辭)s in gwabu(科賦)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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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봉(芝峯) 리수광(李睟光)의 제자(諸子)에 대한 인식

          姜玟求 ( Kang Min-gu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7

          이수광의 諸子에 대한 인식은 『지봉유설』 권6, <經書部 2>, 「諸子」와 『지봉유설』 권7, <경서부 3>, 「書籍」 제4則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書籍」 제4則에서는 제자서 62종의 書名이 나열되어 있는데, 시대와 내용에 따라 분류하려는 의식이 있다. 다만, ‘雜書’와 개념이 혼용된 결과 제자의 범주가 지나치게 넓게 설정되어 있다. 한편 <經書部 2>, 「諸子」는 총 50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언급한 제자서는 모두 15종이다. 「書籍」이 다양한 제자서를 간략한 형식으로 소개한 것이라면, 「諸子」는 제자서 內의 글에 대한 논평이나 어휘에 대해 변증한 것이다. 「제자」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은 『장자』로 총 15칙(서명을 명기하지 않은 1칙 포함)이다. 그 다음은 『회남자』로 총 7칙(중복 1칙 포함)이며, 세 번째는 『노자』로 총 6칙(중복 1칙 포함)이다. 네 번째는 『관자』로 총 4칙이며, 다섯 번째는 『列子』ㆍ『文子』ㆍ『呂氏春秋』로 각각 총2칙(각각 중복 1칙 포함)이다. 그리고 『黃石公記』ㆍ『關尹子』ㆍ『公孫文』ㆍ『新序』ㆍ『說苑』ㆍ『法言』ㆍ『抱朴子』ㆍ『陰符經』이 각 1칙이다. 한편 제30칙의 『文子』는 『申子』의 오기이고 제46칙의 『新序』는 『說苑』의 오기이다. 그리고 제 41칙의 『家語』는 서명이 누락되었고, 제39칙의 ‘稗史’는 『升庵集』을 지칭한다. 「제자」에는 제자서의 글에 대한 논평이 가장 많으니 총 19칙이다. 그 다음은 제자서에 사용된 어휘의 의미에 대한 변증이 총15칙, 제자서의 내용에 대한 변증이 총9칙이다. 그리고 제자서의 내용과 老莊ㆍ불교, 유학 간의 동이점에 대한 변증이 총 4칙, 위작에 대한 변증이 총 2칙, 제자서의 서명에 대한 변증이 1칙이다. 「제자」에는 이수광의 지적 욕망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方麓集』과 『莊子翼』 등 당시로서는 최신 서적을 입수하여 활용하였으니, 이는 제자서의 문장해석ㆍ논평 및 어휘의 변증에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려는 욕망에 기인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은 문헌에서 인용한 내용을 이수광 자신의 독자적 논평 형식으로 처리한 것에서도 발견된다. Lee Sugwang's perception of scholars and philosophers are intensively reflected in 『Jibong Yuseol (Topical Discourses of Jibong)』 Vol.6, < Gyeongseobu( 經書部) 2 >, 「Jeja(諸子)」 and 『Jibong Yuseol』, Vol.7, < Gyeongseobu 3 >, and 「Seojeok(書籍)」 Chapter 4. There are 62 titles of the books of philosophers listed in the chapter 4 of 「Seojeok(書籍)」, and it seems to have been consciously categorized by the times and contents. But as the concept was used along with 'miscellaneous books(雜書)', the category of the philosophers and scholars was too extensively set. < Gyeongseobu(經書部) 2 > and 「Jeja(諸子)」 are comprised of 50 chapters and the number of the books of philosophers mentioned here is fifteen. It can be said that 「Seojeok(書籍)」 introduces various books of philosophers in a brief manner, while 「Jeja(諸子)」 demonstrates vocabulary and comments about writings in the book of philosophers. The most-mentioned book in 「Jeja(諸子)」 was 『Jangja』, which has 15 chapters in total, including 1 chapter without stating the title. The next one is 『Hoenamja』 with 7 chapters in total, including the overlapped 1 chapter, and the third one is 『Noja』 with 6 chapter including the overlapped 1 chapter. The fourth most-mentioned one is 『Gwanja』 with 4 chapters in total, and the fifth one is 『Yeolja(列子)』, 『MunJa(文子)』, and 『Yoessichunchu(呂氏春秋)』 with 2 chapters each, including the overlapped 1 chapter respectively. 『Hwangseokgonggi(黃石公記』, 『Gwanyunja(關尹子)』, 『Gongsonmun(公孫文)』, 『Shinseo(新序)』, 『Seolwon(說苑)』, 『Beobeon(法言)』, 『Phobakja(抱朴子)』, and 『Eumbugeong(陰符經)』 have 1 chapter respectively. 『Munja(文子)』 with 30 chapters is the misspelling of 『Shinja(申子)』, and 『Shinseo(新序)』 with 46 chapters is the misspelling of 『Seolwon(說苑)』. 『Gaeo(家語)』 with 41 chapters is omitted with the book title, and ‘Paesa(稗史)’ with 39 chapters refers to 『Seungamjip (升庵集)』. 「Jeja(諸子)」 has the most comments, 19 chapters in total, about the writings within the books of philosophers. Then, there are 15 chapters of demonstrations about the meaning of vocabulary used in the books of philosophers, and 9 chapters of demonstrations about the contents of the books of philosophers. There are also 4 chapters of demonstrations about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Nojang(老莊), Buddhism, and Confucianism, and the contents of the books of philosophers, and two demonstrations about pseudograph of the books of philosophers, and 1 demonstration about the titles of the books of philosophers. Lee Sugwang's intellectual appetite is well reflected in 「Jeja(諸子)」. He procured and made good use of the latest books of his time, such as 『Bangrokjip (方麓集)』 and 『Jangjaik(莊子翼)』, and this seems to be attributed to his intellectual desire to suggest a novel view on the demonstration of vocabulary, and sentence interpretation and comments of the books of philosophers. This is also well shown in the way to treat the quotes from literature in his own distinctive commenting m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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