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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趾源의 ‘眞’ 문학론 一考 : 金聖嘆과 袁宏道의 영향관계를 통해서

        권진옥(Kwon, jin-ok) 동양한문학회 2011 동양한문학연구 Vol.32 No.-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자료는 燕巖 朴趾源(1737~1805)의 『孔雀館集』으로, 안의현감 재직[1792년 이후] 중에 필사해 간직했던 手澤本이다. 이 책은 박지원의 개인 저작이 아니고 金聖嘆(1608~1661)과 袁宏道(1568~1610)의 글을 모은 것이다. 본고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두 작가의 특정 작품을 대상으로 비교분석하여 박지원의 “眞”과 관련된 문학론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이 비록기존의 연구 성과를 재확인하는 데에 머물 수 있지만, 박지원이 ‘특수한’ 이유로 엮은 자료집을 대상으로 하여, ‘자료집에 수록된 두 작가의 작품’을 통해 박지원의 그것과 비교하는 일은 특수성과 신빙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다고 본다. 또한, 박지원이 만년에 이르도록 김성탄.원굉도의 문장을 애독했다는 물증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제공하고, 나아가 타자와의 영향관계에서 박지원을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첫 번째로, 박지원의 “寫眞”을 김성탄의 “창작자의 현재성과 특수성”과 비교분석하였다. 박지원은 古法.格式 등과 같은 엄정하고 근엄한 작법을 긍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글을 창작하는 주체의 개성과 더불어 작품 창작시에 일어나는 현재성.일회성을 강조한 김성탄과 무관하지 않다. 두 번째로, 박지원의 “眞法”을 원굉도의 “창작자의 주체적 정신”과 비교분석하였다. 박지원은 法을 따르지 않음을 法으로 삼고 古를 따르지 않음을 古로 여기는 眞法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창작자의 주체적 정신을 그대로 유출시키는 데 요체가 있는 원굉도의 문학론과 무관하지 않다. 18세기 후반에 박지원을 비롯한 개성적 작가들이 사유했던 창작관과 비평관이, 시내암과 김성탄 그리고 원굉도를 위시한 공안파의 자장 안에서 논의되고, 또 그 실체를 확인하는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 연구 성과들의 결과로 인해, 더 이상 ‘내재적 발전론’을 거론하기가 힘들어졌고, 수수관계-일방적이든-를 통한 발전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발전론이 아니라, 투사론.반영론까지 운위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의 진정성은 타자와의 영향관계를 통한 면밀한 비교분석을 통해 확보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영향관계의 범주 및 비교 대상을 주제나 내용에 기초한 의론과 사유를 기초로 작법 기술상에 기인한 제반 수사법까지 확대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study Park, Ji-won(朴趾源, 1737~1805)'s 'Jin(眞)' literature theory, by comparing Kim, Seong-tan(金聖嘆, 1608~1661) and Won, Goeng-do(袁宏道, 1568~1610)'s prose that is included in Gongjakgwanjib(孔雀館集). This research becomes another opportunity that can offer wide sight about evidence that Park, Ji-won(朴趾源) read two writers' sentence, and also see Park, Ji-won(朴趾源 in effect relation with China writer. First, this treatise compares Park, Ji-won(朴趾源)'s "SaJin(寫眞)" with Kim, Seong-tan(金聖嘆)'s "currency and peculiarity of the writer". This is related with Kim, Seong-tan(金聖嘆) who emphasizes character of writer and currency that happen at work production. Second, this report compares Park, Ji-won(朴趾源)'s "Jinbeok(眞法)" with Won, Goeng-do(袁宏道)'s "autonomous mind of writer". He stresses "Jinbeok(眞法)" that resisting rule is considered the real rule and uncomplying old is considered the real old, this is related with Won, Goeng-do(袁宏道)'s theory of literature that debouch autonomous mind of writer just as it is. A individual writers' work and criticism in the latter half of 18th century is discussed in magnetic field of Kim, Seong-tan(金聖嘆) and Won, Goeng-do(袁宏道) and research that confirm the true also is activated. By the result, can no longer refer 'immanent development' and development through effect relation is accomplishing main current. Even, that is discussed to theory of projection and reflection. The genuineness of these argument is defined through meticulous comparative analysis with China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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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燕巖)과 형암(炯菴)의 만남과 교유에 대하여

        권정원 ( Jung Won Kwon ) 韓國漢字漢文敎育學會 2009 漢字 漢文敎育 Vol.22 No.-

        본고는 연암 박지원과 형암 이덕무의 만남과 교유를 통해 백탑시사 문인들 간의 영향관계를 살필 수 있는 선행 작업의 일환이다. 형암 이덕무는 북학파의 일원으로 연암 박지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두 사람의 문학관이 흡사하고 사용한 비평 용어 또한 동일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박지원의 문학관은 `법고창신`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덕무의 문학관 또한 의고와 창신의 `절충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당시 크게 유행하던 명대 전후칠자의 의고주의와 공안파의 창신주의를 절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논리이다. 그런데 박지원이 법고창신의 문학관을 개진한 것은 1768년이고, 이덕무의 절충론은 1765년의 기록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덕무가 「영處稿自序」에서 힘주어 말한 영兒와 處女의 비평적 이미지는 박지원의 「영處稿序」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물론 박지원의 「영처고서」는 이덕무가 연암에게 보여준 원고에 쓴 것일 터이다. 그러므로 이덕무의 문학관은 박지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박지원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과 이덕무의 만남은 이들이 대사동 「백탑부근」으로 이사한 1768년 이후부터 라고 한다. 박지원이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1768년 이고, 이덕무가 대사동으로 이사한 것은 1766년 5월 27일 이었다. 그러므로 박지원이 대사동으로 이사한 이후 이들의 교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1768년 이전에 이들이 만났거나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이덕무의 초기 교유관계는 대체로 서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덕무가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것은 그의 외숙 박순원의 집이었는데, 이덕무의 외가는 반남박씨로 박순원은 박지원과 같은 항렬을 사용하는 인척관계였다. 이덕무의 처남 백동수는 이덕무와 처남매부 사이이자 매우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이윤영에게 『주역』을 배웠는데, 이 시기 박지원 역시 이윤영에게 주역을 배우고 있었다. 즉 1758년 무렵 백동수와 박지원의 교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덕무가 경제적 도움을 많이 받았던 서상수 또한 1765년 이전에 박지원과 교유가 있었다. 이렇듯 이덕무 주변의 여러 인물들이 박지원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당시는 嫡庶의 구분이 엄격했기에 긴밀한 교유가 이루어지지는 못했겠지만, 동시대 같은 서울 도성 내 거주했던 사람들이기에 서로 알고 지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박지원과 이덕무 두 사람의 문집 어디에도 이들이 1768년 이전에 교유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들이 서로를 알고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This paper is part of a preliminary research that examines encounter and personal exchanges between Yeonam(燕巖) Park Ji-won(朴趾源) and Hyeongam(炯菴) Lee Deok-mu(李德懋) in order to understand relationships among members of the White Tower poet coterie. Hyeongam Lee Deok-mu was a member of the Northern Practical Learning School and was largely influenced by ideas of Yeonam because the two had shared views on literature and used same terms for critique. Yeonam`s philosophy of literature can be summarized as `creation of the new based on the old「法古創新」,` and that of Hyeongam can be summarized as `eclecticism「折衷論」` between classical and new style. In was in 1768 that Park Ji-won made a statement on `creation of the new based on the old` as his philosophy of literature, while Lee Deok-mu`s eclectic philosophy can be found in historical records as early as 1765. In other words, Lee`s philosophy was formed even before he met Park Ji-won. The two are known to have met sometime after 1768 when they moved to Daesa-dong(大寺洞). Is there a chance that they met earlier or wielded influence on the other indirectly? Lee Deok-mu`s initial circle of friends mostly consisted of people who were not legitimate member of their families. Lee spent most of his teenage years at Park Sun-won(朴淳源)`s house, who was his uncle on the mother`s side. The clan`s place of origin was Bannam, same with Park Ji-won, and they were distant relatives. Lee was very close with his wife`s brother Baek Dong-su(白東脩), who got acquainted with Park Ji-won around 1758. Also, Lee provided generous financial support to Seo Sang-su(徐常修), who had personal relationship with Park Ji-won before 1765. Like this, many friends of Lee Deok-mu were also acquainted with Park Ji-won. Since the distinction between legitimate and illegitimate children was rather strict at the time, exchanges between the two groups were not active. However, it is not entirely impossible that certain people who lived within the realm of Seoul palace got to know one another. The exchanges between Park Ji-won and Lee Deok-mu took offwith activities of the White Tower poet coterie after 1768. Main members included Park Ji-won, lee Deok-mu, Seo Sang-su, Park Je-ga(朴齊家), Yu Deuk-gong(柳得恭) and Lee Seo-gu(李書九). They often had poem-reading meetings, drank spirits and tea, composed poem and enjoyed music and chat together. They wrote foreword and critique for one another`s writing collections. Sometimes they went on excursions to other provinces and wrote about the scenery and impression of the new place. It is reasonable to think that members of the Northern Practical Learning School influenced one another to create their own literary world rather than to insist that Park Ji-won had sole influence on all of the school members. Influence is more a result of interactive exchanges than one-sided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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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 되살리기 : 박지원의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한 편지」 연구

        황정수 ( Hwang Jeong-soo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21 민족문학사연구 Vol.77 No.-

        본고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한 편지」를 분석함으로써 박지원이 하층 여성 대상 성폭력 사건의 심리에서 어떠한 점을 중시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고는 작품 분석에서 다음의 측면에 유의하였다. 첫째, 성폭력 사건 판결에서 중시되어야 할 피해자의 목소리를 박지원이 어떻게 담아냈는지 주목하였다. 둘째, 이 작품은 문학사, 생활사, 법제사가 교차하는 텍스트로서, 학제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심층 분석을 수행하였다. 이 작품에서 박지원은 성폭력 피해자 한조롱이 자살하기 전 남긴 머리카락에 주목하였다. 한조롱의 머리카락은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자 한 한조롱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머리카락의 의미를 서술함으로써 박지원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대신 말하기’의 책무를 수행하였다. 이를 통해 박지원은 피해자를 비난하며 사건을 왜곡하려던 가해자의 시도를 차단하였으며, 공적 담론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피해 여성의 감정과 목소리를 표면화하였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중시해야 한다는 박지원의 지향은 그의 법적 판단에도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박지원은 『대명률』의 위핍인치사 조에 따라 가해자 장수원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성폭력 사건에서 위핍인치사 조 적용에 보수적이었던 정조의 입장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사법 관행을 염두에 두면서 피해자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박지원은 위핍인치사에 버금가는 강간 미수의 죄율을 적용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은 머리카락에 담긴 한조롱의 목소리에 근거한 것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박지원의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 준다. This article examines Yeon-am(燕巖) Park Ji-won(朴趾源, 1737∼1805)’s perspective on sexual violence toward low class women by analyzing The Letter to Sunchal-sa(巡察使) on Hamyang Jang Soo-won’s Case. The analysis of this prose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the following aspects. First, how Park Ji-won expressed the victim’s voice in this letter, which is a crucial element in the case of a sexual violence. Second, taking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to this work, since it is a literary, life history, as well as a legal history text. In this work, Park Ji-won paid attention to the sexual violence victim Han Jo-rong’s hair, which she left before committing suicide. Han Jo-rong’s hair represents Han’s voice and desire to testify her pain as a victim of sexual violence. Through narrating the meaning of her hair, Park Ji-won carried out his responsibility for ‘speaking for the other.’ It blocked the assailant’s attempt to blame the victim and distort the truth and allowed the female victim’s voice heard, which was often neglected in public discourse. Park Ji-won’s belief that the victim’s voice should be regarded important was also reflected in his legal judgment of this case. Though he thought that the assailant Jang Soo-won should be executed according to wee-peep-in-chi-sa(威逼人致死: harassment leading to death) clause of The Great Ming Code(大明律), Park practically had to consider Jung-jo’s conservative attitude in applying this clause to sexual violence cases. Park tried to consider the position of the victim as much as possible when determining Jang’s sentence, while keeping in mind the judicial practice of the time. Therefore, he concluded Jang should be punished for attempted rape, which was second in severity to the wee-peep-in-chi-sa crime. His conclusion was based on the voice of Han Jo-rong which was implied in her hair, and it shows his keen sensitivity to the pain of the sexual violence vict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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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巖(연암) 朴趾源(박지원)의 漢詩文學(한시문학)

        박수천 ( Soo Cheon Park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5 石堂論叢 Vol.0 No.61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최고 문장가였지만 여타의 문인들에 비해 한시는 많이 짓지 않았다. 평소에 그가 한시 짓기를 그리 즐겨하지 않았고, 그가 지었던 한시 작품도 보관이 잘 되지 않아현존하는 한시 작품들은 모두 50수 정도이다. 그러나 박지원의 한시작품이 이루어낸 문학성은 일찍부터 그의 문장들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현존하는 박지원의 한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古調장편의 작품들이다. 그의 古調장편 작품들은 모두 매우 긴 편폭으로 구성되어, 탁월한 문장가로서의 필력과 역량이 한시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하겠다. 박지원이 시를 즐겨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때에 따라 거침없는 필력으로 도도한 氣勢의 장편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박지원은 한시를 지을 때 근체시의 격률에 얽매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律詩와 絶句는 그 형식의 구속으로 인해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어 항상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근체의 율조를 벗어나 古風으로 여러 편의 작품을 창작해냈다. 박지원이 써낸 단형의 고체 작품들은 그가 평소 지향한 ‘朝鮮之風’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영處稿』에 서문을 쓰면서 李德懋가 조선의 森羅萬象을 시편에 담아내었으니 그것을 ‘朝鮮之風’이라 부를 만하다고 말했다. 李德懋의 시에서는 우리나라 말을 시로 적고 민요에 다 운을 달아 자연스런 작품을 이루었던 점을 지목했는데, 박지원 스스로도 그의 시작품에서 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적거나 우리나라만의 풍속을 작품에 그려내고자 하였다. 박지원은 근체시의 격률에 구속되어 詩想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여 근체시를 짓다가는 그만두어 버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지원도 조선 시대를 살았던 문인이라 修學期에는 과거를 염두에 두면서 근체시 형식의 작품 쓰기를 배제하지 않았고, 燕行시기에도 근체의 작품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燕巖集』에는 고체시보다 근체시 형식의 작품이 더 많이 남겨져 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근체시는 5언보다 7언의 작품이 많아, 그가 근체시를 쓸 때 7언의 형식을 더 선호했다고 이해된다. 7언은 5언보다 글자 수를 더 많이 쓸 수 있어서 가슴속의 회포를 막힘없이 드러내기에 한결 편리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의 한시 작품에서는 寫實적 繪畵性이 두드러진 典實함의 풍격이 돋보인다. Yeonam Park Ji-won was a famous prose writer of the later period of Chosun dynasty(especially the king Yeongjo and Jeongjo period). His poems are not so much, but the literary level was estimated very highly. The conspicuous point is the Old style long form poem on the Park Ji-won’s poems. His the Old style long form poem was created very long, that showed his force of writing as an excellent prose writer. Park Ji-won didn’t like the restriction of the New style poem. So he wrote many poems using the Old style which broke rules of the New style. His the short Old style poem showed the Chosun style which he wanted to make on his literary works. Park Ji-won hated restriction of the New style poem, so he quit writing that form works very often. But he was a writer of Chosun dynasty, he did not exclude writing the New style poems. Actually there are many the New style poems on his works collection 『Yeonamjib』. He wrote more poem works as 7 letter form than 5 letter form. On his poem works, the realistic inclination is remarkable such as realistic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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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論文) : 18세기 후반 조선(朝鮮) 지식인 박지원(朴趾源)이 청(淸)제국을 이해하는 방식

        송미령 중국사학회 2015 中國史硏究 Vol.99 No.-

        本文主旨在於考察樸趾源在淸期間與淸文人進行交流時的"態度", 以及他提出的批判與提議. 17-18世紀, 對於朝鮮文人來說, 淸朝的漢文人是以"對明義理"爲媒介, 通過共享他們的遺民情節從而形成同類意識的壹種存在. 령外, 樸趾源對於漢文人的態度與他審視淸朝的視線息息相關, 這種態度與對明朝的義理和華夷觀主張的受用淸朝文物不相矛盾, 而是相互關聯的紐帶. 通過本文的討論, 不僅僅要考察朝鮮與淸文人在交流時對於學問的感悟和熱情, 同時更進壹步地摸索他們對於當時現實政治的批判和對策. 樸趾源與漢族文人間的筆談內容不是被抹掉, 便是被서毁ㆍ焚燒掉的情況比比皆是. 但是, 在這些小心翼翼的筆談中, 有趣的是樸趾源的反應. 用毛筆劃去內容或是銷훼用紙都沒能附加對他的評價或是想法. 不僅如此, 在熱河太學館與王民호的對話中, 還有樸趾源所用"大國有전味"這壹言語使對方흔困惑壹事. 樸趾源也認爲說了不該說的話, 隨卽便用墨劃去了字跡幷向對方道겸. 령外, 樸趾源對藏傳佛敎非常好奇, 因此希望能獲取更多的有關這壹方面的信息, 但由於對方似乎比較忌諱, 便不再詢問, 結束了筆談. 在熱河的太學館, 他們幷沒有回避與奇豊額, 或是敬旬彌這些滿族人或是蒙古人的會面ㆍ對話. 不僅如此, 他們還對雖是蒙古人, 但作爲講官出身, 精通漢文化的破老回回圖作出了相當高的評價. 除此以外, 入關之後, 還詢問了有關代替順治帝進行治國的攝政王多爾袞的相關事宜;也言及了被視爲漢文人專屬物的書法, 乾隆帝的叔父果親王允禮的書法可謂時下名跡, 與漢人於敏中ㆍ滿族人阿克敦相比, 有過之而無不及. 之前的燕行使們多數都憑借印象來評價滿族人, 這與將淸的君主貶低?"胡皇"的態度截然不同. 樸趾源在針對漢文人的態度中不失冷靜, 從始至終幷未參雜任何個人感情. 他肯定和受用文人, 特別是漢文人所處的淸朝現實情況, 他幷沒有問"爲何如此?", 而是將問題的焦點集中於"爲何會變爲這樣?"他之所以會采取這種態度, 是因爲他與過去左右現在的情況劃淸界限, 試圖通過對現在的理解和分析, 來指向未來的意誌. 要對亡明保持義理的名分已經成爲過去, 在通過試圖擺脫宏觀的分析和遺民的連帶關系時, 接受現實情況. 不是明朝遺民, 而是淸的臣民這種宣言, 這不僅僅是單純針對淸漢文人的나喊, 也是呼우朝鮮文人以更廣闊的視野去審視與淸朝的關系. 1780年樸趾源所經歷的淸朝正處於擴充版圖時期, 經濟上也是極爲富饒繁榮的時代. 樸趾源幷沒有轉變其態度, 因爲他判斷出根本無法接近淸朝的實際情況. 因此, 他的言辭幷未止於批判, 而是期望有所變化. 他正視與淸朝締結ㆍ維持關系已經成不可避免的事實, 通過觀察後得出的淸朝之力量所在, 幷依次爲根據進行了批判和提出了需要改善的要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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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박지원의 수령관과 지방정치운영

        홍해뜸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4 동방학지 Vol.206 No.-

        이 글은 연암 박지원의 지방관 활동에 나타난 수령관과 정치운영 방안을 검토한 논문이다. 박지원은 당시 수령을 도신(盜臣)으로 평가하면서 이들이 인순고식하고 미봉책만 시행한다고 비판하였다. 수령이 그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를 촉구하였다. 단 이 과정에서 일시적인 시혜가 아닌 수령이 대체(大體)를 파악하여 장기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를 기대하였다. 박지원은 수령의 태도뿐 아니라 수령이 적극적으로 다스리기 어려운 구조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박지원은 수령이 상부의 명령만을 집행하여 향촌의 병폐를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처지라고 보았다. 이에 수령에게 많은 자율적 권한이 부여되어 수령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근거한 박지원의 정치를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이 진휼이다. 박지원은 감사에게 사진(私賑)을 요청하면서 감사의 개입과 관리 대신 수령에게 오롯한 책임을 부여해달라고 하였다. 수령의 자율적 판단에 따른 시행을 중시한 것이다. 이외에도 기근이 들었을 때 국가의 시장 개입과 균역법의 어·염·선세의 정액화를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행위 주체가 융통성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합당하다 여겼다. 아울러 박지원은 선정의 방법으로 교화의 확대와 예치를 모색하였다. 조선후기는 교화의 주재자로서 수령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상황임에도 박지원은 수령이 그 교화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박지원은 형벌과 포상의 정치는 한계가 있어 인간 내면의 명예를 바라는 욕구를 높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박지원은 형장이 아닌 교화로서 군현을 다스렸다. 향리를 대하는 방식, 문제를 일으킨 관속과 천주교인을 처리할 때 교화로서 이들을 감화하고 권면하였다. 교화를 통한 깨달음을 얻은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하여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하였다. 더 나아가 박지원은 교화의 확장과 풍속 개조를 위하여 군현 의례를 정비하였다. 이는 국왕인 정조의 정치를 군현에서 실현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수령이 군현의례를 정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사족을 교육하여 사족의 역량이 강화되기를 기대하였다. 아울러 수령이 진휼 현장에서 발생하는 백성의 범분(犯分)과 무질서를 교정하고 예를 깨우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례의 형식이든 수령이 시행하는 구체적인 행정이든 예에 맞는 질서를 보여주고 가르쳐, 사족과 백성 모두 예를 체화하기를 기대하였다. This article discusses Park Ji-won's thoughts on local governance and practical administrative measures as manifested in his activities as a Suryeong(守令). Park Ji-won criticized the Suryeong at the time for only implementing minor measures and called for an active role. In the process, he argued that long-term solutions should be sought, not temporary relief. He pointed out the limitations of the Suryeong's power. He argued for more autonomy for the Suryeong, allowing them to make their own decisions. Park advocated for the autonomous judgment of the Suryeong instead of the intervention and management of Gamsa(監査). He argued that the politics of punishment and reward had its limits and that human beings' desire for honor should be increased. Therefore, Park Ji-won tried to govern the county through edification rather than punishment. This was evident in his treatment of Hyangri(鄕吏), as well as in his punishment of troublemakers and his treatment of Catholics. He hoped that the enlightened people would act autonomously and solve their own problems by sensitizing and exhorting them as a edification. Furthermore, He reorganized the rituals of the county to expand edification. Park Ji-won expected the Suryeong to strengthen the capabilities of the Sajok(士族) by educating them in the process of implementing the rituals of the county. He also insisted that the Suryeong should correct the disorder of the people in Relief. By demonstrating and teaching proper order, whether in the form of rituals or specific administrative practices, the people attempted to internalize court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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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趾源의 詩文學論과 詩文學

        박수천 동남어문학회 2014 동남어문논집 Vol.1 No.37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北學과 實學을 지향한 그의 문학에 대한 수많은 연구 성과들이 학계에 보고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한시 작품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박지원이 한시를 많이 짓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었던 작품은 그 당대에서부터 높은 수준을 인정받았다. 박지원의 문학론을 논의한 기존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문장론에 초점을 두고 있으나, 그의 문학론은 문장과 시를 한데 아울러 논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를 시문학의 측면에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박지원의 문학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모방의 배격과 독자적인 개성의 확립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관점은 시문학에 있어서도 그대로 수용된다. 박지원은 시문학이 포착해야 할 것은 바로 현재 눈 앞에 있는 경물이며 구태여 옛날의 작품들에서 그 모범을 구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박지원은 자신의 새로운 문학 창작방법론을 제시했다. 옛날의 법도를 지키면서도 변화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고, 새롭게 창작을 하면서도 典範을 넘지 않을 수 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法古而知變’과 ‘創新而能典’의 문학론은 비단 문장만이 아니라 시문학 작품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唐詩와 宋詩의 문학성을 가능하게 한 그 때의 올바른 시정신을 배워 지금 현재에 적합하도록 변화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독자적인 개성으로 創新의 작품을 창작하더라도 唐詩와 宋詩의 바탕이 된 근본적인 시정신에 기반을 해야 높은 경지의 문학성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박지원은 法古와 創新의 문학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작품에 있어서 ‘朝鮮之風’의 문학성을 강조한다. 그는 朝鮮의 시문학이 중국의 唐宋을 모방하지 않은 朝鮮의 독자적인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李德懋의 시작품이 『詩經』의 國風과 나란히 할 수 있는 한 편의 朝鮮風이라 지목을 했는데, 그가 말한 ‘朝鮮之風’의 의미는 우리나라의 시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할 수 있다. 박지원은 그의 시문학론을 자신의 실제 시작품에서도 실천하였다. 그의 시작품은 일반적인 의고의 대상인 唐詩나 宋詩가 아니었다. 박지원은 그의 시문학의 독자성을 ‘朝鮮之風’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燕巖集』에 실려 있는 박지원 한시의 풍격은 雄健과 典實함이 두드러진다. 雄健함의 굳세고 기운 찬 모습과, 전아하면서도 사실적인 면모의 典實함이 그의 한시 작품의 대표적 풍격이라 하겠다. 그의 古調 장편 한시 작품에는 雄建하고 典實한 풍격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고, 단형의 근체시 작품들에서도 그런 모습이 여실하게 나타난다. 그의 시작품은 唐詩나 宋詩 어느 쪽으로도 소속시키기 어렵다. 박지원이 李德懋의 시를 ‘朝鮮之風’이라 평가를 했듯이, 그가 쓴 한시 작품에서는 독자적인 시법을 이용해 ‘朝鮮之風’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Park Ji-won was a famous writer of the later period of Chosun dynasty. Many reports submitted about his prose works, but there are few reports on his poems. His poems are not so much, but the literary level was estimated very highly. On the literary theory of Park Ji-won, that were the most important thing ‘reject of mimicry’ and ‘establish of individuality’. This view point was applied his poem works. Park Ji-won insisted a new theory of literary creation. He made his theory such as that the writer must obey the model and know the change at the same time. And the writer must make a new works obeying the standard model. Park Ji-won stressed the literariness of the Chosun style on the poems. He thought that Chosun’s literary must have it’s own individuality. He insisted Chosun’s literary must not imitate the Chinese T’ang-Song style. Park Ji-won practiced his literary theory writing his own poem works. His poems were not T’ang-Song style as any general imitation. He wanted to show his ndividuality of poems such as the Chosun style. The style of Park Ji-won’s poems was conspicuous a tendency of the magnificent and the realistic. That was a representative style of his po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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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沔川)군수 박지원(朴趾源)의 활동과 체험

        김동석 ( Kim Dong-suk ) 연민학회 2016 연민학지 Vol.25 No.-

        본고에서는 면천군수 시절 연암 박지원의 활동과 체험을 그의 저술과 연관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관직 생활은 북경에 다녀온 이후에 시작되었다. 1780년 44세로 북경에 다녀온 연암이 수년 동안에 걸쳐 저술한 『열하일기』는 사람들이 필사하여 서로 돌려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열하일기『가 완성될 즈음벼슬길로 들어서게 된다. 면천군수로 오기 전에 이미 안의현감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주로 북학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각종 농기구를 제작하기도 하였고 북학사상을 이어 받기 위하여 안의현에 누각이름을 써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에 『열하일기』의 문체 때문에 정조로부터 지적을 받은 적도 있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정한 글로 저술을 지어 바치라는 명령을 하였고, 박지원은 이후 『과농속초』와 『한민명전의』 같은 결과물을 면천군수 시절에 완성한다. 연암이 면천군수로 오기 직전 이 고을에는 천주교도가 있었다.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교도들은 교화시켜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하급관리들은 대체로 엄격하게 처벌 위주로 일처리를 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사람을 찾던 중에 연암을 적임자로 보고 직접 만나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면천군수로 나가게 하였다. 연암은 정조와 만났던 감회를 집안에 돌아와 이야기 하였고, 그 내용의 일부가 『과정록』에 있으며, 동시에 『승정원일기』에도 나타나 있다. 면천군수시절 연암은 감사와 불화를 겪은 적이 있었고, 그곳에서 아전들과의 일화도 있었다. 그리고 인생의 만년에 이른 연암은 작고한 홍대용을 그리워한 나머지 홍대용의 별장의 이름을 모방한 `건곤일초정`을 면천에 지어 놓았다. 그런데 연암이 면천군수로 있었을 때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연암이 이때 슬퍼했던 모습이 『과정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때 감사를 대신하여 정조의 進香文을 썼다. 면천현감 시기의 저술은 안의현감으로 있었을 때에 비하여 그 편수가 현저하게 적다. 하지만 이 시기를 통해 그의 만년 활동과 생각을 조명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research on the Activity and experience of Park Ji-Won(朴趾源) when he was country govener in Myeoncheoneupseong Fortress(唐津沔川邑城). `Park Ji- Won(朴趾源) was the important literary man in 18 century in the Zosun(朝鮮) dynasty. When he visited BeiJing in 1980, he wrote `YUL HA IL GYI(熱河日記)`. And this book is very popular among scholar partly because it is very similar narrative[敍事]. King Jeong-jo(正祖) was the 22nd ruler of the Joseon Dynasty of Korea showed a special interest about his writing. King Jeong-jo(正祖) asked Park Ji-Won(朴趾源) to write books which based on classical chinese word as a substitutingly of `YUL HA IL GYI(熱河日記)`. Because `YUL HA IL GYI(熱河日記) is very similar to vernacular Chinese. So Park Ji-Won(朴趾源) wrote some books such as GuaNongSoCho(課農小抄) During he was on duty as a country govener in Myeoncheoneupseong Fortress [唐津沔川邑城], `Park Ji-Won(朴趾源) conciliate Catholic not to become a Catholic. He did not willing to punish them, and it was the entrusted meaning of King Jeong-jo. Even though his writing is not abundant during this time, to underestand what he had he done because he was more than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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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의 朴趾源 연구 현황과 전망

        PIAO XIANG LAN(朴香蘭) 한국문학회 2016 韓國文學論叢 Vol.73 No.-

        7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학계의 박지원연구도 어언 40년이 다 되어간다. 박지원 연구는 이제 한국학연구자뿐이 아니라 중국문학연구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과제가 되었다. 본 고에서는 중국학계의 박지원연구사를 자세히 검토하고 새로운 연구방향과 전망에 대해 논의해 보았다. 중국학계에서의 박지원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경우와는 다르다. 박지원의 연구초기부터 중국학계에서는 『열하일기』가 실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는 대표 저술이라는 입장을 지속하면서 연행록문헌군의 실체가 구체화됨에 따라서 『열하일기』를 ‘여행문학’, ‘기행문학’, ‘여행자문학론’ 등의 입장에서 알맞은 문학적 접근 방법론을 모색하고 중국의 실상을 탐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나 산문연구도 특정작품에 치중되어, 청대의 소설과 박지원의 소설 비교연구라든지, 경향이 비슷한 작가와의 비교연구, 그리고 구체적 역사적 규명문제도 극히 드물다. 이제 한, 중, 일 세 나라의 문학을 일종의 수평적 비교의식 아래 함께 검토함으로써, 세 나라문학이 어떻게 근대성을 지향해 갔는지를 열린 마음으로 점검하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The research on Park Ji-won, started in 1970s, has been worked on for 40 years imperceptibly. Such research is not strange to Koreanology researchers as well as Chinese literature researchers. This essay investigated the history of Park Ji-won’s research among Chinese academia in detail, discussed the new direction and prospect of the research on Park Ji-won. The focus on Park Ji-won in China is quite different from that in Korea. Since the beginning of the research on Park Ji-won, the Yeolha Diary had been the representative work which sharply shows the living existence among Silhak scholars. With the reification of Yon-haeng-rok and relating references, lots of accessible methodologies were supplied for journey literature, travel description, tourists literature theories and so on from the Yeolha Diary, which shows the exploration of the living existence in China. However, regardless of novels or proses, researches are always focused on representative works. When it comes to the comparison between novels in Qing Dynasty and novels written by Park Ji-won, the comparison between Park Ji-won and similar writers, it’s quite hard to find some investigational problems and conclusions in detail. Now by the method of lateral thinking, this essay investigated the literature among Korea, China and Japan. How did those literature obtain modernity and which direction will it go to explore postmodernity All above shows the new attempt within an open mind is essent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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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딥러닝을 활용한 전략물자 판정 지원도구 개발에 대한 연구

        조재영(Jae-Young Cho),윤지원(Ji-Won Yoon) 한국정보보호학회 2020 정보보호학회논문지 Vol.30 No.6

        전략물자관리 제도의 이행 확산에 따라 전략물자 판정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으나 전략물자 제도를 처음 접하는 수출기업은 전략물자의 개념을 이해하기 쉽지 않고, 전략물자를 통제하는 기준이 다양하여 전략물자 판정에 어려움이 따른다. 본 논문에서는 전략물자 제도를 처음 접하는 기업이나 전략물자 판정시스템 이용자에게 진입장벽을 낮추어 판정이라는 과정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용자가 전략물자 판정이라는 절차를 매뉴얼이나 카탈로그의 제공만으로 판정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면, 전략물자 판정 방법과 절차에 보다 편리하고 쉽게 다가설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미지 인식 및 분류에서 연구되고 있는 딥러닝과 OCR(광학문자판독) 기술을 활용하고, 전략물자 판정 지원도구에 대한 개발과 연구를 통하여 우리 기업의 전략물자 판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한다. As the implementation of export controls is spreading, the importance of classifying strategic items is increasing, but Korean export companies that are new to export controls are not able to understand the concept of strategic items, and it is difficult to classifying strategic items due to various criteria for controlling strategic items. In this paper, we propose a method that can easily approach the process of classification by lowering the barrier to entry for users who are new to export controls or users who are using classification of strategic items. If the user can confirm the decision result by providing a manual or a catalog for the procedure of classifying strategic items, it will be more convenient and easy to approach the method and procedure for classfying strategic items. In order to achieve the purpose of this study, it utilizes deep learning, which are being studied in image recognition and classification, and OCR(optical character reader) technology. And through the research and development of the support tool, we provide information that is helpful for the classification of strategic items to our compan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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