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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희의 도연명의 시가 수용과 인격 비평 -주희에 의한 도연명의 충신으로서의 전범화-

        노우정 ( Woo Jeung Roh ) 온지학회 2013 溫知論叢 Vol.0 No.35

        도연명은 중국문학사와 문화사의 특수한 인물로, 송대 이후는 물론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도 ‘충신의 전범’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성리학의 집대성자로서 중국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희의 영향이 크다. 주희는 도연명의 인격을 유교적 인격을 가진 인물로 규범화하였다. 주희는 도연명을 유교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현인과 군자로 인식하였고, 나아가 충신의 전범으로 평가하였다. 주희의 도연명의 인격에 대한 평가는 시인 도연명을 이상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心性學의 관점에서 도연명의 작품을 그의 인격과 연관 지어 비평함으로써, 도연명의 自然과 超脫은 배우려 해도 배울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주희가 도연명을 유교적 인격의 전범이자 후천적인 노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의 시인으로 규범화 한 것은 신유학으로써 중화적 정통사상과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주희의 시대적 사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희는 군신관계가 와해되고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한 남송 시기의 지식인으로서, 정통유학을 계승한 성리학을 시대사상으로 확립하고, ‘天理’로 이루어진 군신관계를 정립하여 왕조의 통치를 정당화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기치 아래 주희는 유교적 인격의 모델을 모색하는 체계를 진행하였다. 주희는 도연명의 인격을 유교적인 인물의 범위 안에서 규정화하였고, 도연명의 시문에 대해서도 유가의 덕목인 충심, 정절, 의리가 반영된 작품에 특별히 주목하고 <귀거래사>를 정전으로 평가하였다. 주희는 도연명을 성인의 경지라고는 받들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주희가 특별히 도연명의 시문에 드러난 유가사상과 ‘충’의 덕목을 주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희에 의한 도연명의 유교적 인격으로의 규범화는 남송의 정치현실에서 유학적 이념으로 중국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왕조의 통치를 정당화하여 이를 중국 문화의 표준으로 삼고자 한 체계로서 진행된 것이며, 그 영향은 주희의 성리학을 지식권력으로 수용한 조선에까지 미쳤다. Song Dynasty, after the course, Taoyuanming has got enduring prestige that is "Idolization of the personality" in East Asian cultural area of chinese character, which was greatly influenced by Sushi in the Northern Song and Zhuxi in Southern Song. Zhuxi had played thinkers, as well as actively as a literary critic. He accepted Taoyuanmingg`s archaism poem and criticized the retreat, lineage, personality, philosophy of life,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poetry of Taoyuanming. In this process, Zhuxi standardized Taoyuanming`s personality into sage, gentleman, and loyalist, which is progressed to recover the identity of confucianism as system to seek to confucian model of personality. Highly rated Taoyuanming`s personality by Zhuxi affected the idealized poet Taoyuanming. Zhuxi suggested and imitated Taoyuanming`s archaism poem which has no rhetorical embellishments and reflect rich philosophy as the rules of the poetry. And Zhuxi as Song Dynasty scientist idealized that Taoyuanming`s nature and detachment from the point of view crane plutonic is best stage which can be reached after the holy Spirit and the moral training you need to combine and future generation can not even learn to. However, Zhuxi did not evaluate Taoyuanming`s personality as the state of a saint. Zhuxi regulated Taoyuanming`s personality within the scope of the confucian figures, and also evaluated his poetry and prose like "Guiqulaici(Homecoming Song)" as canon while paying attention to his poetry and prose to reflect loyalty, fidelity and sincerest. With this point in view, we can know that Zhuxi pay attention to virtues like confucianism and loyalty especially.

      • KCI등재후보

        陶淵明의 <飮酒> 詩에 나타난 人生과 自然觀

        尹壽榮 한국중국문화학회 2004 中國學論叢 Vol.17 No.-

        陶淵明是中國有名的田園詩人. 他的詩裏面有其獨特的特性. 本稿特別以他的飮酒詩二十首中選十首爲討論範圍, 來考察其中所反映的人生觀與自然觀. 在<飮酒> 其一【1) 達觀的意義 - 以東陵候爲例】裏面, 出現曾經秦國東陵候邵生和他所種的瓜. 陶淵明以爲, 人生是不斷地流轉的. 那是好像大自然旱暑之代謝一樣, 誰也無法拒否或者改變的. 在<飮酒> 其二【2)固窮節的意義 - 以伯夷·叔齊和榮啓期爲例】裏面, 陶淵明所描寫的是, 是非·善惡問題. 他設, 伯夷·叔齊是흔善良而正直的人, 却活得흔苦, 死得흔孤獨. 榮啓期是年老而흔貧窮, 可是他過得흔快樂. 在<飮酒> 其五 【3)情景交融裏的眞理發見】是人口膾炙的有名的一首詩.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這兩個名句就是在這首裏面. 可是我們以爲, 在這首詩裏面更重要而含意更深刻的詩句是「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妄言」這四個詩句. 因爲飛鳥正代表的人生, 辛苦一天而帶着疲倦身體回到巢寓的鳥, 就是暗示工作一天而回到家裏的人生. 在<飮酒> 其七 【4) 逍遙自適的生活 - 「聊復得此生」】裏面, 陶淵明借菊花和酒, 來表現超然塵世的境界. 在陶淵明, 菊花是象徵傲霜孤節的士人精神, 酒是使他超然引導於理想境界的媒體. 在<飮酒> 其八 【5)隱遁的意義】裏面, 陶淵明借靑松, 平時被衆草和灌木遮蔽而看不見, 可是의凝霜一下而別的草木飄零凋落, 則靑松的形象, 正如亂世裏的隱士一樣, 淸節高潔, 卓然可見. 在<飮酒> 其九【6)兩種人生行路-(1) 追求慾望之路和淨化慾望之路】裏面, 出現陶淵明與田父的對面. 田父是懷着好意而來訪問陶淵明的, 可是他也是代表俗人心情的人物之一. 這흔像楚辭<漁夫>裏所出現的屈原與田父的對面. 在<飮酒>其十七【(2) 幽蘭和蕭艾之路】裏面, 陶淵明使幽蘭和蕭艾這兩種植物出現, 來描寫兩種人生形象. 幽蘭雖然在蕭艾裏生長, 可是他還是淸風吹來的時候, 與蕭艾是裁然不同地表現他那淸香高潔的品格的. 裁<飮酒> 其十九【(3) 世路和歸田路】裏面, 陶淵明把人生之路分爲世路和歸田路, 而他更支持歸田路, 勸讀者走歸田路. 裁<飮酒> 其十三【醉醒之間 - 是非的意義】裏面, 陶淵明描寫了兩類人物形象, 是「一士」與「一夫」. 一士是長獨醉的人, 而一夫是終年醒的人. 他門互相嘲笑, 互相不了解. 在<飮酒> 其十五【無限宇宙裏的有限人生】裏面, 陶淵明提起無限的宇宙和有限的人生之間的對比, 而感到無限的悲哀. 處在亂世而生活, 對像陶淵明似的文人而言, 其生活應當是흔困苦的. 懷才不遇的悲哀和人生無常的悲哀同時包圍着他, 使他感到無限的悲哀.

      • KCI등재

        조선조 문인의 陶淵明 四言詩 수용 양상 연구

        이훈 한국한문고전학회 2018 漢文古典硏究 Vol.37 No.1

        본고는 陶淵明의 四言詩를 和作한 조선조 문인의 작품을 ‘和陶四言詩’로 명명하고, 도연명 사언시를 수용한 양상을 구명하면서 수용의 내부적 발전 정도와 문학사적 의미를 탐색한 것이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삼은 조선조 ‘화도사언시’ 문인은 김시습⋅신흠⋅유계⋅김수항⋅김창협⋅조유수․⋅조종진⋅이만수 등으로, 분석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연명의 사언시는 형식과 수사적 측면에서 의식적으로 『詩經』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復古 내지 尙古的인 성향을 지닌다. 이에 대한 조선조 ‘화도사언시’는 창작 과정에 古風을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적 지향이 내포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문인별 문학성의 차이로 인해 古風 추구 인식에 편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조선조 ‘화도사언시’는 詩題와 형식에서부터 다채로운 양상을 보이는데, 화도사언시 문인들은 도연명 사언시의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편 자신만의 개성으로 변주하기도 하였다. 개인별 창작 시기는 대체적으로 중년 이후이며 작가가 처한 상황은 심적인 고뇌를 겪던 시기였다. 이러한 양상은 도연명의 사언시가 言志와 述懷에 특장이 있음을 반증한다. 아울러 조선조 ‘화도사언시’의 창작 연대가 17세기에 집중된 것은 특기할 점으로, 이는 17세기에 들어와 古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한시사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도연명 사언시와 조선조 ‘화도사언시’ 간에는 韻字에 차이가 있다. 조종진과 이만수의 경우는 마지막 운자를 原詩의 운자와 동일한 韻目에 속한 다른 글자로 전환하는 依韻의 방식을 구사하여 주제의식의 내면화를 구현하였다. 김창협의 경우는 도연명의 사언시가 지닌 주제의식에 부합하여 和作하되 和韻하는 방식으로 창작하지 않았다. 조선조 ‘화도사언시’에 있어서 가장 특색 있는 부분은 수사적 측면이다. 김시습의 경우는 도연명 사언시의 모든 수사적 특징을 함유한다. 그러나 17세기 신흠․유계․김수항․김창협의 경우에는 수용과 변주에 편차가 있다. 18세기 조유수의 경우에는 수용의 정도가 희박해졌으며, 19세기 전반기 조종진과 이만수의 경우에는 수용의 정도가 다시 높아졌다. 김창협이 도연명의 詩題를 활용하지 않은 점과 和韻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그의 작품은 조선조 ‘화도사언시’의 역사적 轉變 과정에서 전환점이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창협은 17세기에 대두한 복고주의 시풍에 비판을 가했고, 이로 인해 18세기는 개성주의가 주된 문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8세기 조유수의 작품이 수사적 측면에서 도연명의 사언시를 수용한 정도가 낮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정조의 문체반정과 詩選集 편찬 사업에 영향을 받은 19세기 전반기 관료문인들은 복고주의 내지 상고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것이 19세기 전반기 조종진과 이만수의 작품에 도연명의 사언시를 수용한 정도가 다시 높아진 이유이다. 이와 같이 조선조 ‘화도사언시’는 도연명의 사언시가 지닌 제특성을 시대별 문풍과 작가별 문학적 지향으로 재구성하는 내면화의 轉變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조선조 ‘화도사언시’의 창작 방식은 압운과 詩意의 수용 양상에 따라 ‘和韻和意’ 유형, ‘和意不和韻’ 유형, ‘和韻和意’와 ‘和韻不和意’ 결합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和韻和意’의 유형은 도연명 原詩의 韻字를 재사용하고 詩意를 수용하여 내면화한 것으로... This study named the works by the literati in the Joseon Dynasty as 'He Tao Si Yan Shi(和陶四言詩)' which were written to a given set of rhymes of Tao Yuan-ming(陶淵明)'s four words poems(四言詩), and explored the level of internal development and the significance of literary history while examining the acceptance patterns of Tao Yuan-ming's poetry. In this study, several writers were selected as the literati of 'He Tao Si Yan Shi' in the Joseon Dynasty: Kim Si-seup(金時習), Shin Hum(申欽), Yu Gye(兪棨), Kim Su-hang(金壽恒), Kim Chang-hyeop(金昌協), Jo Yu-su(趙裕壽), Jo Jong-jin(趙琮鎭), Lee Man-su(李晩秀), etc.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summarized as follows. Tao Yuan-ming's four words poems, in terms of form and rhetoric, consciously inherited the style of『Shi Jing(詩經)』, which had an inclination to restoration or tended towards classicism, that is to say the worship of ancient. In comparison 'He Tao Si Yan Shi' showed literary intentions to pursue the archaism, but on the other hand, there's a deviation in the perception of archaism due to the difference in individual literary inclinations. Hence 'He Tao Si Yan Shi' displayed varied aspects in the title and form, some writers accepted Tao Yuan-ming's format while others made some variations on it with their own personalities. The year in which poems were created generally coincided with the time when the writers suffered after middle age; this proves that Tao Yuan-ming's poems were effective in expressing one's personal feelings and intentions. It is also noteworthy that the creation period of 'He Tao Si Yan Shi' was concentrated in the 17th century. There seem to be observable differences in the rhyming words(韻字) between 'He Tao Si Yan Shi' of the Joseon Dynasty and Tao Yuan-ming's four words poems. Jo Jong-jin and Lee Man-su mainly changed their last rhyming words into different words which were in the same rhyme group(韻目) of the original poems, in order to realize the internalization of thematic consciousness. Kim Chang-hyeop wrote poems in accordance with the thematic consciousness of Tao Yuan-ming's four words poems, but he did not create poems in the way of bouts-rimes(和韻詩). The most distinctive feature of 'He Tao Si Yan Shi' in the Joseon Dynasty is the rhetorical aspect. Kim Si-seup embraced every rhetorical expression technique of Tao Yuan-ming. In the 17th century, however, Shin-Hum, Yu-Gye, Kim Su-hang and Kim Chang-hyeop had different ways of accepting and making variations of it. Jo Yu-su, in the 18th century, accepted it at a very low level, but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Jo Jong-jin and Lee Man-su absorbed it again at a high level. Considering that Kim Chang-hyeop did not use any title of Tao Yuan-ming's poems and even avoided the way of bouts-rimes, his works can be estimated to be located at a inflection point in the transformation process of 'He Tao Si Yan Shi'. Kim Chang-hyeop criticized the restoration in poetry of the 17th century, which made it possible for individualism to become a main literary trend of the 18th century. That's the reason why Jo Yu-su's acceptance level of Tao Yuan-ming's four words poems in the 18th century was so low in terms of rhetoric. Furthermore,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government official-literary men who were influenced by Munchebanjeong(文體反正) of King Jeongjo(正祖) claimed to support restoration or classicism. That's why the level of acceptance of Tao Yuan-ming's four words poems in the works of Jo Jong-jin and Lee Man-su was increased again. As such, 'He Tao Si Yan Shi' experienced a process of transformation that was internalized by reconstructing the poetic qualities of Tao Yuan-ming's four words poems according to the periodical writing style and individual literary intention. Therefore the composition methods of 'He Tao Si Yan Shi' in the Joseon Dynasty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types depending on the r...

      • KCI등재

        『箋註靖節先生集(전주정절선생집)』 에 실린 金제(김제)(1524~1593)의 陶淵明(도연명)의 초상화와 귀거래도

        선승혜 ( Seunghye Sun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3 民族文化硏究 Vol.60 No.-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 (陶淵明: 365~427)의 시문집이 조선 1583년(宣祖16)에 간행되면서, 선조는 도화서 김시(金시: 1524~1593)에게 그린 도연명의 반신 초상화 인 <정절선생상(靖節先生像)>과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리게 하여 삽화를 추가 시켰다. 선조가 도연명집을 발간한 것은 충절이나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도덕적이 며 미적 가치관을 성균관의 유생에게 권장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은「도정절집발응제(陶靖節集跋應製)」에서 도연명의 "성정의 진실함이 지극하고, 출처가 바르다 (至於性情之眞, 出處之正)"라는 출간의의를 밝히고 있다. 도연명집의 내사본을 대조하여, 조선시대의 도연명시문집의 내사본에 김시의 삽화가 추가되었음을 본 논문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숙종과 영조 초에 목판본이 간행되면서 1583년에 실린 김시의 삽화를 다시 목판으로 복제하여 삽화가 지속적으로 유포되었다. 이와 같이 도연명집의 조선에서 간행되면서, 도연명의 반신상 초상과 귀거래도의 삽화가 추가되어 이해를 돕는 방식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조 선식 도연명의 수용방식으로서 그 연구의 가치가 있다. Tao Yuanming (365-427) is the most popular poet in East Asia forever. Most visual forms of his poetry and prose in pre-modern Korean art tend to emphasize his spiritual liberty through his portrait and returning home. The little attention was paid to the origins of visual expression repeated in Joseon paintings. The Korean version of Tao Yunming Anthology, published by King Seonjo`s order in 1583, attempted to add a court painter Kim Si (1524-1593)`s illustration depicting Tao Yuanming`s portrait and Returning Home. Kim Si`s style of Tao Yuanming portrait was to demonstrate a Tao Yuanming bust portrait without quoting from other poems like Chrysanthemum from Drinking Wine. While the text stresses the first scene of the Returning Home, late Joseon painters actually referred to Kim Si`s illustration in the various format of paintings. Kim Si`s visual images provide a model of illustrations for publishing the Korean version of Tao Yaunming Anthology in the 18th century. On the basis of surviving Kim Si`s illustration of Tao Yaunming, this paper attempts to point out Korean aesthetical way to appreciate image and text in Joseon society.

      • KCI등재

        소식(蘇軾)과 도연명(陶淵明)의 `만남` ― 소식(蘇軾)에 의한 도연명(陶淵明) 전범화(典範化)를 중심으로

        김보경 한국중국어문학회 2010 中國文學 Vol.62 No.-

        陶淵明是中國文學史上最偉大的詩人之一, 這一槪念已經被人們普遍地接受, 只有極少人會對此持有異見。 在南北朝時期, 陶淵明已經成爲著名的隱士, 但他作爲詩人的名氣相對小一些。 經隋唐五代到北宋, 陶淵明在文學史上的地位逐漸上升, 借助不少文人的大力提倡, 陶淵明終於獲得了今天這樣的歷史地位。 在樹立這個典範的過程中, 蘇軾扮演了最爲重要的角色。 他在前人的基礎上, 將陶淵明其人其詩的地位推到了極點, 使得陶淵明成爲達到最高人生境界,幷具備理想人格的賢人, 和中國詩歌史上最偉大的典範詩人。 蘇軾對陶淵明一直推崇備至, 他不僅在許多詩文中頻繁地提到陶淵明, 幷且在欣賞陶的人品和文學成就之餘, 幾乎遍和陶淵明詩, 留下109首“和陶詩”。 蘇軾在這個過程中, 逐漸體會到陶淵明平淡詩風的深刻內涵, 把?視爲藝術的頂峰, 最後提出任何詩人都比不上陶的獨特看法。 盡管蘇軾對陶淵明的接受帶有些較爲濃厚的理想化傾向, 但是這幷不意味著蘇軾盲目地崇拜陶淵明。 事實上, 蘇軾在接受陶淵明的同時, 一直保持非常淸醒的頭腦, 結果時時呈現出與陶淵明頗爲不同甚至截然相反的思想面目和藝術風貌。 本文認爲, 這是蘇軾立足于現實的自我, 與陶淵明所留下的精神遺産進行誠懇的對話所使然。 因此, 筆者以“蘇軾與陶淵明之會晤”這個槪念, 來槪括這種接受所具有的特徵。 通過這個“會晤”, 蘇軾與這位異代知音促膝談心, 不追求個別思想觀點的附和與藝術風貌的模擬, 而力求在更高 層次上的契合。 “蘇軾與陶淵明之會晤”對陶淵明典範地位的確立也起到了非常重要的作用。 首先, 在“會晤”的過程中, 蘇軾以非常敏銳的眼光, 對陶淵明其人其詩給予了具體而深刻的評價。 其次, 有些評語說得有點嚴重, 結果惹起一些爭議, 這使得陶淵明成爲人們關注的焦點。 最後, 作爲“會晤”的主要通道, 蘇軾的“和陶詩”創作也在陶淵明典範地位的確立上具有較爲重要的意義。 需要指出的是, 這個“會晤”的眞實目的在於蘇軾按照自己的意圖來重新闡釋陶淵明, 幷從中獲得一些滋養和權威。 而在這“闡釋”的過程中, 未免有一些誇張和歪曲。 同時, 這 個“會晤”在某種意義上還呈現出有些拘泥於過去的傾向, 這也會産生一些負面作用。 這些都體現出這個“會晤”的局限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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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陶淵明門第再探討 : 基於職官制度的考察

        劉奕,崔智英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20 泰東古典硏究 Vol.45 No.-

        도연명(陶淵明)의 출신 가문에 대한 의견은 학계에서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혹자는 귀족 가문의 출신이라 주장했거나 혹자는 비천한 가문 태생이라는 의견을 펼쳤으며, 몰락한 하급 귀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난한 가정환경과 고위관리로의 진출 가망이 희박하여, 어쩔 수 없이 은둔의 길로 들어섰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본고는 당시의 관직 제도의 재고찰 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설정하여, 도연명의 초기 관직인 강주(江州)의 좨주종사(祭酒從事)의 성질을 고찰 후, 좨주(祭酒)가 비록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높지는 않지만, 여전히 국가의 높은 지위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그 시대의 민중 상황을 더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지방 고위 공직자의 자녀만이 초임 관료 등의 직책을 맡을 자격이 있음을 도출하였다. 따라서 도연명은 순조롭게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호히 포기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주류 이론에 오류가 있음을 밝혔으며, 도연명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역사적인 상황,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도연명 개인의 인생 등 다양한 요소를 융합하는 연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출신 가문에 대한 의견은 학계에서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혹자는 귀족 가문의 출신이라 주장했거나 혹자는 비천한 가문 태생이라는 의견을 펼쳤으며, 몰락한 하급 귀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난한 가정환경과 고위관리로의 진출 가망이 희박하여, 어쩔 수 없이 은둔의 길로 들어섰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본고는 당시의 관직 제도의 재고찰 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설정하여, 도연명의 초기 관직인 강주(江州)의 좨주종사(祭酒從事)의 성질을 고찰 후, 좨주(祭酒)가 비록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높지는 않지만, 여전히 국가의 높은 지위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그 시대의 민중 상황을 더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지방 고위 공직자의 자녀만이 초임 관료 등의 직책을 맡을 자격이 있음을 도출하였다. 따라서 도연명은 순조롭게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호히 포기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주류 이론에 오류가 있음을 밝혔으며, 도연명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역사적인 상황,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도연명 개인의 인생 등 다양한 요소를 융합하는 연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KCI등재

        이규보의 도연명 인식에 대하여

        이희영 한국시가문화학회 2023 한국시가문화연구 Vol.- No.51

        This study set out to examine how Lee Gyu-bo perceived Tao Yuanming throughout his life and how his life was oriented to him. His perceptions of Tao Yuanming were examined according to the three periods of his life including the "period of activities to seek a government post," "period of activities as a government official," and "period after his resignation." Lee made constant efforts to seek a government post before serving as a government official. Like Tao Yuanming, he discussed the "living" issue as his cause of going into government service and stated that he could "return to the country" after entering the royal court and ending his life as a government official. This cause was the driving force for him to endure the difficult process of seeking a government post. Serving as a government official, he read Tao Yuanming's biographies and anthologies, sorted out his thoughts, and wrote poems and Chans. He thought of Tao Yuanming to keep and ruminate on his strait-laced nature. This life attitude became the driving force for him to keep certain distance from fame and wealth. In the winter of 1237, he submitted a "Geoltoipyo" four times and resigned after royal permission. After resignation, he created a space called "Namheon" and called himself "Namheon Geosa" or "Namheon Jangro." He tried to maintain his "Gojol" nature and achieve "Sujol" in his own country of "Namheon." His life attitude penetrating into his entire life can be summed into "Jol." He exhibited the loneliness that he felt in his life as well as his nature through "strait-laced" and "Gojol." This aspect of his life has something in common with the life attitude pursued by Tao Yuanming. Since Tao Yuanming was an established model for medieval literary figures, there is nothing special about Lee's efforts to emulate his life. There is, however, no denying that he was aware of Tao Yuanming through his specific works at every turning point of his life and made efforts to resemble his life. 본고는 이규보가, 전 생애에 걸쳐, 도연명을 어떻게 인식하여 삶의 지향으로 삼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생애는 ‘구관 활동 시기‧관인 활동 시기‧치사 이후 시기’로 구분하여 도연명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이규보와 도연명은 한소(寒素) 사인(士人)이라는 출신의 유사성이 있으며, 문벌과 가문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관직에 진출하는 한계가 명확하였다. 또한 고려는 무신들에 의하여 조정이 움직이는 시대였고, 晉‧宋 교체기는 군벌 세력의 등장으로 황제가 시해당하는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양자(兩者)는 신분과 시대의 유사성이 있으며, 또한 각각의 삶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天性을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규보는 도연명을 삶의 전형으로 삼아서,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도연명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였다. 이규보는 관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부단히 구관(求官)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도연명이 그랬던 것처럼 출사의 명분으로 ‘口腹’의 문제를 거론하고, ‘歸田園’은 조정에 진출하여 관인으로서 삶을 마무리한 이후에 가능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명분은 구관의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이규보는 관인으로 활동하면서 도연명의 본전(本傳)과 시집(詩集)을 읽은 뒤, 생각을 정리하여 시와 찬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졸직한 천성을 유지하고 되새기기 위하여 도연명을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삶의 자세는 名利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었다. 이규보는 1237년 겨울 4번의 <걸퇴표(乞退表)>를 올리고 윤허를 받아 치사(致仕)한다. 그는 치사한 이후에 ‘南軒’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고 스스로를 ‘南軒居士’ 혹은 ‘南軒長老’라고 부르며 생활한다. 그는 ‘남헌’이라는 자신만의 전원에서, ‘孤拙’의 천성을 유지하며 ‘守拙’하고자 하였다. 이규보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삶의 자세는 ‘拙’이라고 할 수 있으며, ‘拙直’과 ‘孤拙’이라는 말로 자신의 천성과 삶 속에서 느끼는 고독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도연명이 추구한 삶의 자세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중세 문인에게 도연명은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규보가 그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 특별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규보가 삶의 전환점마다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도연명을 인식하고 있으며, 도연명의 삶에 다가서는 노력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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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연명 시에 나타난 술의 의미

        송용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1 人文論叢 Vol.65 No.-

        陶淵明是晉宋交替時期活躍在詩壇上的大詩人,在他的詩歌裏頻頻出現有關酒的詩句。陶淵明在他的詩歌裏把酒的象征意義加以擴展與深化,使酒不僅成爲表現詩人思想感情的手段,而且象征了詩人的人生觀和世界觀。此後,酒在後人的詩歌中其意義不斷豊富,不斷加深。這應該歸功於陶淵明。在中國文學史上,陶淵明第一次拓寬了酒的含義,升華了酒的價値,直接或間接地影響了包括李白在內的中國古代無數詩人。因而,才能構使我們今天吟誦中國古代詩歌的時候,感觸更加豊富,渲染更加深刻。酒在陶淵明的詩歌中所表現的意義具體分析如下:一酒是撫慰辛勤勞作後的饑餓與疲倦的飮料。二酒是謳歌田園生活的悠閑與快樂的手段。三酒是擺脫暗淡的現實與煩惱的手段。四酒是쟁脫死亡給予的憂愁與恐怖的力量。五酒是溝通隣裏,實現心連心的通路。六酒是獲得精神自由,達到物我相忘境界的拐杖。七酒是最理解自己的知己,也是人生路上的同伴。八酒是保持固窮節意志的精神支柱。九酒是揮棄胸中憂憤的象征,表現了爲解脫憤怒而寫作的心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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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말선초 한문학(漢文學)에 나타난 도연명의 귀거래 모티프 인식 변화

        이지후(Lee, Ji-Hoo) 포은학회 2020 포은학연구 Vol.26 No.-

        이 글은 여말선초 문학 속 도연명 귀거래 모티브 인식이 정치집단별로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도연명의 수용은 통일신라말 최치원을 시작으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그 대상도 문학이란 한 측면이 아닌 전 인격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도연명을 향유한 무수한 개별 간 교집합의 생성은 요원했다. 개개인의 정치적 상황, 시대정신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도연명과 그의 귀거래는 수용자의 현실 속 삶의 원리나 자아의 양상에 따라 저마다 굴절되었다. 이색과 정몽주는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고려 말에 활동하며, 그들과 유사한 처지였던 도연명의 문학과 인격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향유 태도가 실제 귀거래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군주를 보필하고 민생을 살피기 위해 재조(在朝) 지향의 태도를 견지했다. 이에 그들의 문학 작품 속 도연명과 귀거래는 정신적 안식처로 머물렀다. 조선전기도 정치적으로 혼란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이는 내부 왕위계승의 문제였다. 왕자의 난·계유정난·반정 등 정치적 변란 가운데 즉위한 군주는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협력 집단의 창출이 필수적이었다. 이 영향으로 훈구파는 공업의 실현을 그들의 궁극적 지향으로 삼았다. 이에 그들의 작품 내 도연명과 귀거래의 활용은 출사와 공명의 실현을 강조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관직을 그만둘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수사적 활용에 그쳤다. 이어진 사림파는 군신관계에서 의를 최우선 가치로 두었다. 그리하여 출사를 지향한 훈구파와 달리, 그들은 출과 처를 의에 따른 종속적 결과물로 인식했다. 그 결과 그들의 작품에서 귀거래를 행한 도연명은 반대의 행보를 보인 제갈량, 장량과 동일하게 평가됐다. 더불어 당위성이 제공된다면 출사해 모국의 멸망을 막았을 것이라 추론됐다. 이는 의에 부합한다면 상반된 행적이더라도 동질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이 도연명의 수용과 작중 활용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This paper sets its purpose on how different Tao Yuanming s returning to the home motif in literature was perceived between various political groups at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Starting with Choi Chi-won at late unified Silla through late Joseon, Tao Yuanming was embraced consistently and also the subject was not in a single aspect of the literature but also all over his personality. During this, a formation of intersections between countless individuals who enjoyed Tao Yuanming was still far-off. It was because each individual s state of affairs and spirit of the age did not coincide. As a result Tao Yuanming and returning to the home were respectively taken upon how different readers rule of life and aspect of their ego. Lee Saek and Jeong Mong-Joo, working in the chaotic state of affairs of the late Goryeo, highly appreciated Tao Yuanming s returning to the home and his way of living. But the attitude of enjoying like this did not actually lead to real returning to the home . Rather, they adhered the attitude of a government position orientation, to assist their king and take care of the livelihood of people. For this Tao Yuanming and returning to the home in their literature works remained as a psychological haven. Early Joseon was in the chaotic state of affairs too, however it was because of the interior problem of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Among a series of political conflicts like Gyeyu-Jeongnan, Strife of Princes and Jungjong restoration, the king was indispensable to create a cooperation organization for protecting his sovereignty. To this impact, Hungu faction set fulfilling of accomplishment as their ultimate direction. Hence, Tao Yuanming and returning to the home in their literature works had a function of emphasizing to fulfil working for the government and honor. Or it was rhetorically expressed a pity which one cannot retire his government position due to his nonexistent financial difficulty. Sarim faction, after them, set righteousness in a relationship of the lord and the vassal as their priority value. Therefore, unlike Hungu faction who pursued working for the government, they perceived working for the government and living in seclusion as a subordinate output from righteousness. As a result, Tao Yuanming pursuing returning to the home in their works, was criticized same as a Zhang Liang and Zhang Liang who showed an opposite traces. Also, when appropriateness was given, it is inferred he would have worked for the government and prevent mother nation s collapse. A perspective of opposite trace could be perceived as same nature If it accords with righteousness influenced acceptance and application of Tao Yuanming in the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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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시에서의 도연명 <擬挽歌辭> 수용과 변주

        임준철 ( Jun Chul Lim ) 한국한시학회 2013 韓國漢詩硏究 Vol.21 No.-

        이 글은 한국 한시에서 陶淵明 <擬挽歌辭>의 수용과 변주 양상을 검토한 것이다. 동아시아 고전문학사에서 도연명은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송대의 대시인 蘇軾은 도연명 和韻詩만을 묶어 별도의 문집을 출간하려고 했으며, 조선시대 수많은 작가들이 도연명 작품에 화운시를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의만가사>란 문제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수용 빈도가 낮은 편이다. 자신의 죽음을 읊는다는 독특한 주제성격 때문이다. 따라서 도연명의 작품 중 유독 <의만가사>를 수용한 작품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금기를 위반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만가사>를 수용한 한국 한시들을 검토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적 양상이 드러난다. 첫째, 우리 문인들은 <의만가사> 중에서 특히 “但恨我在世, 飮酒不得足”이란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정기안이나 남효온의 작품처럼 해당 구절을 부연하거나 변주시킨 특징적인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심지어 이 구절을 주제로 한 과체시 작품도 존재한다. 둘째 和陶詩가 대체로 도연명의 인품과 사상에 공감하여 지어지는 반면, <의만가사> 수용 작품들 중엔 도연명의 초탈적 생사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학적 사고로 포섭하거나 별도로 윤색하는 경우들이 보인다. 권시나 전우 같은 도학자들의 화운시는 <의만가사>를 문학작품으로서만 수용했을 뿐 작품에 담긴 생사관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셋째 <의만가사> 수용 작품들 중엔 의도적으로 주제를 변주하는 경우들이 발견된다. 최기남과 남효온의 작품은 <의만가사>의 주제의식을 뒤집는 방식으로 은연중 현실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그들이 이 작품을 수용한 이유가 도연명에 대한 존숭이라기보다 <의만가사>를 빌려 자신의 내밀한 의식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선 도연명의 <의만가사>에만 한정하였지만, 이런 방식의 연구는 한국 한시가 중국문학과의 연관을 맺으면서 그 수용과 자기화의 지평을 넓히고, 각 시대 및 시인마다의 개성을 이루어 나간 양상이 어떠하였던가를 밝히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연명을 숭상하고 그의 시를 전범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하였으며 또 어떻게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우리 한시의 개별성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This paper studies Korean Chinese poetry which are written as the poetic response to Tao Yuanming`s poetic works. Tao Yuanming is the one who was poetically responded the most in East Asian poetry history. His works were constantly published and poetically responded in Chosun dynasty. But there are only few works responding to the work “Pseudo-elegy”. Because it deals with the death of the self. This paper examines how Chosun poets received this “Pseudo-elegy”, since the summoning of this works itself explains the poet`s special intend. Chosun poets were very impressed by the first self-elegy work, “Pseudo-elegy”, especially the last part of the poem, saying “Only sorry for not having drunken enough while I was alive”. And they created their own version of “Peudo-elegy” in a various way. Poets like Nam Hyo-on, Choi Ki-nam, Kwon Si, Chung Ki-an, Jun Woo inherited the work to create thir own poetic geni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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