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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조선(朝鮮) 초(初),명(明)으로의 왜구침구(倭寇侵寇) 정보 제공에 대한 조선(朝鮮)의 태도 -1419년의 왜구사건을 중심으로-

        윤성익 동국사학회 2013 동국사학 Vol.54 No.-

        1419년(朝鮮 世宗 元·明 永樂17)은 朝鮮과 明에서의 倭寇문제 및 조선·일본(對馬島) 관계에서도 큰 획기를 맞은 해였다. 그 직접 계기가 된 사건은 明에서의 望海鍋대첩과 조선에 의한 對馬島정벌이었다. 그런데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 대부분은 왜구근거지의 토벌에 의한 왜구소멸을 들어왔지만, 정벌이 행해졌던 무렵 조선에서의 왜구상황, 조선과 명의 관계, 그리고 정벌과정 중에 나타난 조선측의 태도 등을 생각해보면, 「대마도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단순히 왜구소멸이나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에 대해 주변국과의 관계와 조선 초 대외정책의 목표 등에 주의하면서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에서는 對馬島정벌을 조선과 왜구의 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고 명과의 관계까지 포함해서 살펴보고, 정벌의 원인을 明의 조선에 대한 압력과 征倭論·北伐論에서 찾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런 설명에는 크게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조선으로부터 명에 전달된 ``倭寇의 침구 정보``이다. 조선이 ``倭寇 정보``를 明에 전하는 과정을 통해 정보를 전한 조선의 의도, 나아가 對馬島정벌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종래 연구에 따르면 1419년 이전에는 朝鮮이 明으로 倭寇가 침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명으로 전하지 않았지만, 1419년 초를 기점으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朝鮮이 明으로의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적극성이야말로 대마도 정벌의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표 본 것처럼 1419년을 기점으로 조선이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졌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 朝鮮이 明으로 전했던 정보가 望海鍋 대첩에 도움이 되었다고 明과 朝鮮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이 명으로 전한 정보가 어떤 명확한 의지를 통해 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望海鍋 대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朝鮮이 이때 明으로 왜구와 관련된 정보를 전한 것은 통상적인 ``被擄人``의 처리문제와 연관된 부가적인 행위였다고 판단된다. 또한 對馬島 정벌이 이루어지기 직전, 조선은 倭寇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明으로의 침구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이에 대해 정보전달과 관련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明에의 ``왜구 정보 제공``에 대한 조선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즉 조선의 입장은 이전과 비교해 특별히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1419년 이후에도 朝鮮은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전시기처럼 明에 대해 필요이상의 정보제공은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았단 것이다. 이를 被擄人의 문제와도 함께 생각해보면 조선은 조선 내부의 사정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혹은 유리한 정도만의 정보를 명 측에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는 존선 초의 對明관계 및 ``對明事大``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19年(朝鮮 世宗 元·明 永樂17)は朝鮮と明における倭寇問題幷び、朝鮮と日本(對馬)との關係のおいても大きな畵期を迎た年である。その直接な切っ掛けになった事件は明においての「望海鍋大捷」と朝鮮による「對馬征伐(已亥東征·應永外倭)」であった。「對馬征伐」の原因及び目的に關して旣存硏究の多くは倭寇根據地の討伐による倭寇消滅を擧げて來たが、征伐が行われた當時の朝鮮での倭寇狀況、朝鮮と明との關係、征伐進行中に現れる朝鮮側の態度などを考えると朝鮮の「對馬征伐」の原因と目的を倭寇消滅とか倭寇問題解決のような單純な說明だけでは理解できないどころが多い。これに對し、朝鮮と周邊國との關係と朝鮮初對外政策の目標などに注意しながら「對馬征伐」の原因と目的を解明しようとする試みもある。これらの硏究では「對馬征伐」の原因を明から朝鮮への壓力と征倭論·北伐論から探ぃ求めている。自分もこういう考え方は正しいと思う。どころが、その論說で重要な倫理根的據提として提示されるのが朝鮮から明へ傳わった「倭寇侵寇關情報」である。朝鮮が「倭寇情報」を明へ 傳える過程を通じて情報を提供した朝鮮の思惑、進んで「對馬征伐」の意圖を明かしている。以前の硏究での說明によると1419年の以前まで朝鮮は明へ倭寇が侵寇するという情報を入手した場合、その情報を明へ傳えなかったが、1419年初から突然方針を變え、朝鮮が明への情報提供に積極性を持つようになったという。そしてこの積極性こそ「對馬征伐」の眞の目的を語ってくれるものだと主張する。しかし、本稿で明かした所、1419年を轉機として朝鮮が情報提供で積極性を持つようになったとみるべき根據は微弱である。朝鮮が明へ傳えた情報が「望海鍋大捷」の助けになったと明と朝鮮ともに認識してはいたが、朝鮮が明へ 傳えた情報はある明確な意思の基で明へ渡され、それが「望海鍋大捷」という結果を産み出したとは言難い。この時、朝鮮が明へ「倭寇情報」を傳えたのは通常の‘被擄人’處理問題と關連した付加的行爲であったと判斷される。また、「對馬征伐」の實行の寸前、朝鮮は朝鮮の西海岸を侵入した倭寇から極めて具體的な明への侵寇情報を入手したが、これに對して朝鮮は何の行動もしなかった。こういう狀況はなによりも明への「倭寇情報」提供にたいしての朝鮮の立場をよく表してくれる。すなわち、朝鮮の態度は以前と比べ別に變化はなかったのである。ちなみに1419年以後も朝鮮はこういう態度を堅持していった。以前の時期と同じく明へ必要以上の情報提供は敢えてしようとはしなかった。それを被擄人の問題と評せて考えると朝鮮は朝鮮の內部都合に從って自分達に必要な、或は有利な程だけの情報を明側に傳えてい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朝鮮の態度は朝鮮初の對明關係と「對明事大」の實態が反映されたものだと言える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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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初, 明으로의 倭寇侵寇 정보 제공에 대한 朝鮮의 태도

        윤성익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동국사학 Vol.54 No.-

        1419년(朝鮮世宗元?明永樂17)은 朝鮮과 明에서의 倭寇문제 및 조선?일본(對馬島) 관계에서도 큰 획기를 맞은 해였다. 그 직접 계기가 된 사건은 明에서의 望海?대첩과 조선에 의한 對馬島정벌이었다. 그런데 ⌈대마도정벌⌋ 의 원인 및 목적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 대부분은 왜구근거지의 토벌에 의한 왜구소멸을 들어왔지만, 정벌이 행해졌던 무렵 조선에서의 왜구상황, 조선과 명의 관계, 그리고 정벌과정 중에 나타난 조선측의 태도 등을 생각해보면, ⌈대마도정벌⌋ 의 원인과 목적을 단순히 왜구 소멸이나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에 대해 주변국과의 관계와 조선 초 대외정책의 목표 등에 주의하면서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에서는 對馬島정벌을 조선과 왜구의 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고 명과의 관계까지 포함해서 살펴보고, 정벌의 원인을 明의 조선에 대한 압력과 征倭論?北伐論에서 찾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런 설명에는 크게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조선으로부터 명에 전달된 ‘倭寇의 침구 정보’이다. 조선이 ‘倭寇정보’를 明에 전하는 과정을 통해 정보를 전한 조선의 의도, 나아가 對馬島정벌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종래 연구에 따르면 1419년 이전에는 朝鮮이 明으로 倭寇가 침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명으로 전하지 않았지만, 1419년초를 기점으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朝鮮이 明으로의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적극성이야말로 대마도 정벌의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것처럼 1419년을 기점으로 조선이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졌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 朝鮮이 明으로 전했던 정보가 望海?대첩에 도움이 되었다고 明과 朝鮮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이명으로 전한 정보가 어떤 명확한 의지를 통해 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望海?대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朝鮮이 이때 明으로 왜구와 관련된 정보를 전한 것은 통상적인 ‘被擄人’의 처리문제와 연관된 부가적인 행위였다고 판단된다. 또한 對馬島정벌이 이루어지기 직전, 조선은 倭寇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明으로의 침구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이에

      • KCI등재

        朝鮮 初, 明으로의 倭寇侵寇 정보 제공에 대한 朝鮮의 태도 -1419년의 왜구사건을 중심으로-

        윤성익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동국사학 Vol.54 No.-

        1419년(朝鮮 世宗 元․明 永樂17)은 朝鮮과 明에서의 倭寇문제 및 조선․일본(對馬島) 관계에서도 큰 획기를 맞은 해였다. 그 직접 계기가 된 사건은 明에서의 望海堝대첩과 조선에 의한 對馬島정벌이었다. 그런데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 대부분은 왜구근거지의 토벌에 의한 왜구소멸을 들어왔지만, 정벌이 행해졌던 무렵 조선에서의 왜구상황, 조선과 명의 관계, 그리고 정벌과정 중에 나타난 조선측의 태도 등을 생각해보면, 「대마도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단순히 왜구소멸이나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에 대해 주변국과의 관계와 조선 초 대외정책의 목표 등에 주의하면서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에서는 對馬島정벌을 조선과 왜구의 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고 명과의 관계까지 포함해서 살펴보고, 정벌의 원인을 明의 조선에 대한 압력과 征倭論․北伐論에서 찾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런 설명에는 크게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조선으로부터 명에 전달된 ‘倭寇의 침구 정보’이다. 조선이 ‘倭寇 정보’를 明에 전하는 과정을 통해 정보를 전한 조선의 의도, 나아가 對馬島정벌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종래 연구에 따르면 1419년 이전에는 朝鮮이 明으로 倭寇가 침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명으로 전하지 않았지만, 1419년초를 기점으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朝鮮이 明으로의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적극성이야말로 대마도 정벌의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것처럼 1419년을 기점으로 조선이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졌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 朝鮮이 明으로 전했던 정보가 望海堝 대첩에 도움이 되었다고 明과 朝鮮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이 명으로 전한 정보가 어떤 명확한 의지를 통해 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望海堝 대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朝鮮이 이때 明으로 왜구와 관련된 정보를 전한 것은 통상적인 ‘被擄人’의 처리문제와 연관된 부가적인 행위였다고 판단된다. 또한 對馬島 정벌이 이루어지기 직전, 조선은 倭寇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明으로의 침구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이에 대해 정보전달과 관련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明에의 ‘왜구 정보 제공’에 대한 조선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즉 조선의 입장은 이전과 비교해 특별히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1419년 이후에도 朝鮮은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전시기처럼 明에 대해 필요이상의 정보제공은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았단 것이다. 이를 被虜人의 문제와도 함께 생각해보면 조선은 조선 내부의 사정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혹은 유리한 정도만의 정보를 명 측에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는 조선 초의 對明관계 및 ‘對明事大’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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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

        김일환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Vol.31 No.3

        본 논문은 조선조 세종 1년(1419)에 단행한 대마도정벌을 전쟁사적 시각에서 연구한 것이다. 이 전쟁은 고려 말부터 자주 우리 해안을 침탈하던 倭寇를 근절 하기 위한 군사적 토벌이었다. 이 전쟁은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왜인들이 식량을 약탈할 목적으로 중국의 요동지역을 공격하러 가는 가운데 충청도 비인의 도두음곶을 급습하면서 시작되 었다. 기습적인 왜구의 침탈로 인한 엄청난 인명피해에 놀란 조선정부는 군사적 보복을 위해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 전쟁은 두 가지로 작전계획을 짰는데, 첫째는 왜구의 주력부대가 중국으로 떠난 상황에서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급습하여 이들의 가족을 포로로 잡는다 는 것과, 둘째는 왜구들의 귀환을 기다려 해상에서 요격한 후 궤멸시킨다는 것이 었다. 이 때문에 대마도 정벌은 시간적으로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이종무를 최고지휘관으로 한 1만7천여명의 조선군이 대마도의 아소만으로 진 입하여 요충지인 두지포에 상륙하자 놀란 대마도주와 왜인들은 산속으로 도망을 하였고 원정군은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 사이 원정군은 대마도의 육상통로의 요 충지인 훈내곶을 장악한 후 목책을 치고 대마도를 양분한 후, 수색을 통해 왜인 의 잔당을 토벌하였다. 그 가운데 上縣지역의 니로군에 왜인들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하여 매복 하고 있던 왜인들의 기습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두지포로 철수하였다. 두지포에 돌아온 이종무 원정군은 7월 3일 결국 귀환을 결정한다.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귀환한 것은 요동으로 북상한 왜구 주력부대가 귀환할 시기 가 되어 이들을 조선 연안에서 요격해야할 2차 작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東征을 준비 중에 극적인 상황전환이 일어난다. 왜구의 요동 侵寇에 대한 정보를 전해 받은 중국정부가 복병을 이용해 금주 망해과에서 왜구를 궤멸 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조선정부는 2차 동정을 중단하고 외교적 압박으로 대마도주를 굴복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과 중국 명나라의 共助에 의해 대마도 왜구를 궤멸시키고 대마도를 조선에 복속시키는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토벌전쟁의 결과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의 요동, 산둥 반도에 대한 왜구출몰이 종식되었다.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간에 입장을 달리 하지만, 이후 對馬島主 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 도주는 또한 신하 의 예로서 조선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 옴에 따라 각종 통교제한 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포가 왜인들의 교역항구로 정립되었고 왜관을 설치하고 흥리선이 도박하여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KCI등재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

        김일환 ( Il Hwan Kim )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Vol.31 No.2

        본 논문은 조선조 세종 1년(1419)에 단행한 대마도정벌을 전쟁사적 시각에서 연구한 것이다. 이 전쟁은 고려 말부터 자주 우리 해안을 침탈하던 倭寇를 근절하기 위한 군사적 토벌이었다. 이 전쟁은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왜인들이 식량을 약탈할 목적으로 중국의요동지역을 공격하러 가는 가운데 충청도 비인의 도두음곶을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습적인 왜구의 침탈로 인한 엄청난 인명피해에 놀란 조선정부는 군사적 보복을 위해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 전쟁은 두 가지로 작전계획을 짰는데, 첫째는 왜구의 주력부대가 중국으로 떠난 상황에서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급습하여 이들의 가족을 포로로 잡는다는 것과, 둘째는 왜구들의 귀환을 기다려 해상에서 요격한 후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마도 정벌은 시간적으로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이종무를 최고지휘관으로 한 1만7천여명의 조선군이 대마도의 아소만으로 진입하여 요충지인 두지포에 상륙하자 놀란 대마도주와 왜인들은 산속으로 도망을 하였고 원정군은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 사이 원정군은 대마도의 육상통로의 요충지인 훈내곶을 장악한 후 목책을 치고 대마도를 양분한 후, 수색을 통해 왜인의 잔당을 토벌하였다. 그 가운데 上縣지역의 니로군에 왜인들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하여 매복하고 있던 왜인들의 기습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두지포로 철수하였다. 두지포에 돌아온 이종무 원정군은 7월 3일 결국 귀환을 결정한다.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귀환한 것은 요동으로 북상한 왜구 주력부대가 귀환할 시기가 되어 이들을 조선 연안에서 요격해야할 2차 작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東征을 준비 중에 극적인 상황전환이 일어난다. 왜구의 요동 侵寇에 대한 정보를 전해 받은 중국정부가 복병을 이용해 금주 망해과에서 왜구를 궤멸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조선정부는 2차 동정을 중단하고 외교적압박으로 대마도주를 굴복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과 중국 명나라의 共助에 의해 대마도 왜구를 궤멸시키고 대마도를 조선에 복속시키는 결정적 전기가 된것이었다. 따라서 이 토벌전쟁의 결과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의 요동, 산둥 반도에 대한 왜구출몰이 종식되었다.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간에 입장을 달리 하지만, 이후 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 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조선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 옴에 따라 각종 통교제한 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포가 왜인들의 교역항구로 정립되었고 왜관을 설치하고 흥리선이 도박하여 무역을 할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sider the process of military operation regarding the conquest of Tsushima(對馬島) conducted in 1419, the first year of King Sejong during the early Chosun Dynasty period. The Tsushima conquest, also called Gihedongjung(己亥東征) in Chosun, is named Oeinogaiko(應永の外寇) in Japan. The aim of this military action was to eradicate Japanese plunder such as arson and murder that had been conducted in coastal areas since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高麗王朝). Several phenomena observed in the process of this war played a great role to fully destroy the Japanese army staying in Tsushima. This was done by the allied forces of the Chosun? and Ming(明) Dynasty of China, which returned Tsushima to the Chosun Dynasty. Thus as a result of this war, the appearance of the Japanese army to Liaotung(遼東), Shantung peninsula(山東半島) in China as well as the Chosun territory ended. This has been thought to be a distinguishing point between the before-Japanese raiders and the after-Japanese raiders. However, the historical point of view towards this war are different between two nations: Korea and Japan. In Korea, this war is considered as victorious in general, regardless of the 180 victim soldiers of ethChosun army, which rose in the later during the expedition. Yet, in Japan, it is believed to be their most successful victory since they defeated Chosun army in the fight of Nirogun, while protecting Japan. After the expedition groups returned, this war was put to an end by Tsushima`s voluntarily surrendering. The owner of Tsushima also swore to serve Chosun as a royal subject whilst asking himself to be a part of the Kyoung-sang province, promising to pay a tribute and control to Japanese raiders. After Sejong allowed this promise, a peaceful relationship was built by giving the authority of trade to the owner of Tsushima when three ports of southern part of Korea were opened. This became a base for Chosun to operate a policy to let Japanese conduct free trades on the Korean peninsula; to freely come and go, leading to the effect of protecting the invasion of Japanese raiders for a long period of time after Gihedongjung.

      • KCI등재

        조선전기 한일관계와 對馬

        한문종 동북아역사재단 2013 東北亞歷史論叢 Vol.- No.41

        對馬 宗氏가 대마도로 들어오기 이전인 1008년경 대마도에는 阿比留氏가 대재부의 재청관이었으며, 이들은 고려와 대마사이에 진봉선무역이 정례화 될 때 대고려 무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말부터 惟宗氏의 세력이 점차 성장하였으며, 13세기 중엽 이후에는 惟宗氏가 對馬國地頭代로서 막부계의 현지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 대마도에서는 도주직을 둘러싸고 대마 종씨와 仁位 宗氏가 대립하고 있었지만, 결국 宗貞茂가 도주직을 차지하였다. 대마 종씨는 13세기 후반부터 小二氏의 被官으로, 14세기 중엽부터는 筑前守護代를 겸하고 있었다. 북구주에 나가있던 宗貞茂는 1408년에 동생 宗貞澄에게 筑前州守護代職을 물려주고 대마도에 정착함으로써 宗氏家督과 축전주 수호대직을 실질적으로 분리하고 대마도내의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조선조정의 다양한 왜구대책의 실시 결과 1409년을 전후로 하여 왜구의 침입은 급격히 감소한 반면에 일본의 ‘통교자’는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통제에 적극 협력하였던 대마도주 宗貞茂가 죽은 이후부터 다시 왜구의 침입이 증가하자 조선에서는 대마도정벌을 단행하였다. 대마도정벌은 왜구를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이 왜구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대일외교를 주도적으로 정비하거나 운영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짧은 기간이지만 대마도가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됨에 따라 이후 조선에서는 ‘對馬藩屛意識’과 ‘對馬屬州意識’이 일반화되었으며, 대마도가 조일외교의 중간세력으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대마도정벌은 조선조정이 주도권을 가지고 대마도와 기미관계의 외교체제를 실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에 양속되어 외교관계를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에서는 통교자의 증가에 따른 치안상의 혼란과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다양한 왜인통제책을 실시하였다. 이 왜인통제책은 대마도주를 기미관계의 외교체제에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여러 가지 통교상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특히 문인제도와 계해약조는 조선과 대마도간의 외교관계를 정례화 함으로써 이후 대일통교체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기본이 되었고, 대마도주를 비롯한 일본의 지방호족들을 조선중심의 정치·외교질서인 기미관계의 외교체제 속에 편입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대마도주는 왜인통제책을 기반으로 조선과 일본사이에서 양속관계를 강화할 수 있었으며, 조일외교에서 그의 역할을 더욱 더 증대해 갈 수 있었다. 조선전기의 대마도사행은 모두 33회에 이르렀으며, 주로 조선초기인 태조-세종대에 집중되었다. 조선에서 대마도주에게 파견한 사행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 경차관과 선위사, 체찰사 등은 조선의 대지방관이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된다. 이는 조선이 대마도를 조선의 번병 또는 속주로 인식하고 있었던 반증이며, 대마도의 양속관계가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조선조정에서는 대마도주에게 문인 발행권을 주었으며, 관직을 제수하려 하고, 세견선의 정약과 도서의 사급 등 통교상의 특권을 부여한 것은 아닐까?대마지방의 통교는 조선전기 일본지방의 통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대마도주의 통교가 가장 많았으며, 또한 지속적이며 안정적으로 유지 ... As the Sō family (宗氏) were officials of the Shoni family (小貳氏) from the late thirteenth century and held the additional post of Vice Governor of Chikuzen Province (J. Chikuzen shugodai 筑前守護代) from the midfourteenth century, Sō Sadashige (宗貞茂) advanced in to northern Kyushu as Vice Governor of Chikuzen Province. Later, in 1408,Sadashige passed this position to his younger brother Sō Sadazumi (宗貞澄) and settled in Tsushima and established his rule over Tsushima. Due to the Joseon government’s various policies against Japanese pirates and the domestic political stability in Japan, pirate attacks rapidly decreased from around 1409, while the number of people who were qualified to sail to Joseon from Japan increased. However, attacks resumed after Sadashige, who had actively cooperated to control Japanese pirates, died in the fourth lunar month of 1418. The Joseon government thus determined to conquer Tsushima. With this military action, the Joseon government eradicated Japanese pirates. This was significant because the Joseon government had an excellent opportunity to establish an advantageous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sushima. This situation greatly improved diplomacy with Japan. Meanwhile, to reduce the financial burden and to eliminate the confusion of public peace and order caused by Japanese, the Joseon government implemented several policies. It reduced the ports the Japanese could use; controlled their entrance by requiring specific documents, certificates for trade, or entry permits; and introduced strict limits on trade ships. The control policies of the Joseon government were implemented to place the governor of Tsushima under a system of control, in other words, a Joseon-centered political or diplomatic order,while giving the governor several privileges to establish diplomatic relations with Joseon. In the early Joseon period, thirty-three envoys sent to Tsushima are recorded. Among these, twenty were sent from the reign of King Taejo (r. 1392-1398), who was the founder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reign of King Sejong (r. 1418-1450). Diplomatic relations with Tsushima account for about half of those with Japan in the early Joseon period. Among them, the amicable relations with the governor of Tsushima were the most, at 48.2%, and were maintained continuously and securely. This means that the Joseon government highly valued and respected the governor of Tsushima. Considering the facts above, the characteristics of Joseon’s diplomacy with Japan in the early Joseon are: first, Joseon’s negotiations with Japan were active and progressive; second, the Joseon government thought so much of Tsushima’s geographical location that it made the most of the governor of Tsushima rather than the shogun of Japan’s feudal government; third, differing from its relationship with Japan’s feudal government, the Joseon government could maintain a more controllable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sushima. In addition, the roles of Tsushima in the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early Joseon period were, first, as the southern military base of the Joseon government; second, as the intermediary in trade between Joseon and Japan; third, as the base for spreading the culture of Joseon; and lastly, as the location to collect information about not only Tsushima but also the whole of Japan.

      • 전쟁 원인효과(War-causing effects)의 관점에서 본 세종 대 대마도 정벌의 결정요인

        이병일(Lee. Byoung-Il)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1 이순신연구논총 Vol.- No.15

        이 글은 전쟁의 촉발 요인에 대한 스테판 반 이브라(Stephen Van Evera)의 ‘전쟁 원인효과(War-causing effects)’를 토대로 1419년(세종 1년) 조선이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게 된 원인에 대해 이론적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전쟁 원인 효과’는 위협과 취약성, 외교적 노력의 한계, 전쟁 승리의 자신감 등에 대한 인식적 판단이 특정 국가로 하여금 보다 쉽게 전쟁을 결심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전쟁 원인효과’의 주요 가설들을 1419년 조선의 상황에 적용하여, 당시 조선의 대마도 정벌 결정에 관한 주요 요인들을 추론하였 다. 즉 당시 조선은 왜구위협의 증폭과 對왜구 취약성의 재고, 외교적 對왜구 정책의 한계, 정벌의 효과와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 것이다. 대마도 정벌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정벌의 원인과 배경을 왜구가 발생했기 때문으로 단순화했던 기존의 일반적 견해에 보다 논리적 이고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This thesis gives an theoretical explanation of determinants of the Daemado Conquest of Joseon in 1419 based upon Stephen Van Evera s War-causing effects hypothesis that accounts for a primary factor leading to war. In War-causing effects hypothesis, the judgment on threat, diplomatic false and the likelihood of a victory of war can lead to war more easily. This thesis infers decisive factors of Joseon s determination to conqust of Daemado from applying War-causing effects hypotheses to Joseon in 1419. In other words, at that time, Joseon determined to conquest of Daemado by strengthening Waegu s threat and perception of Josoen s vulnerability against Waegu, a limit upon a diplomatic policy false to Waegu, and through being sure of an effectiveness of the conquest and a possibility of victory against Waegu in Daemado. This approach about the conquest of Daemado has value in points of being distinct from other studies about the conquest of Daemado because this apporach can infer a more logical and concrete explanation of a background and causes of that event.

      • KCI등재

        조선전기 동북아의 정세와 전쟁

        김경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0

        In a country, war and peace are both contradictory and very closely related concepts as well. Joseon, which inherited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turmoil as a historical heritage at the end of the Goryeo, was established in 1392 and influenced by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changing Ming from Yuan(元明交替). Under the pluralistic international order, Goryeo had many times of war to influence the national destiny, and while taking full advantage of Goryeo's capabilities, it made strategic diplomatic relations by utilizing the change of international situation. However, after the founding, Joseon focused on the Ming central international order(明 中心 國際秩序) and ignored diplomatic and military alternatives. Of course, this has the advantage of limiting the external forces that invade Joseon from the North. Since Joseon dealt with the ruling class of North, it was punished in terms of border security. In the early days of the founding, Joseon faced internal confusion in the face of changes in international affairs, which were replaced by the Ming from the Yuan, as well as domestic political and military complexity. In addition, Joseon has implemented a fierce defense policy to secure security in the Ming central international order. During the peace period, Joseon could implement long-term and systematic defense policies, but the national policy, which was the national policy for the war, changed due to the initial confusion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early Joseon perio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was the decline of Mongolia, a northern nation, and the establishment of Ming Dynasty. In this process, the international situation changed suddenly due to the North Yuan forces of the Liaodong, the Mongol forces in the grassland, the Ruzhen in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have caused frequent military conflicts around Joseon, resulting in massive wars. As a result, the Joseon changes in the defense policy and experience the Campaign against the Jurchen tribesmen(女眞征伐), Tsushima Subjugation(對馬島征伐), Japanese Riots in the Three Ports(三浦倭亂), Nitanggae Invasion(尼湯介亂), Imjin war(壬辰戰爭), Manchu War in 1636(丙子胡亂). 국가에 있어 전쟁과 평화는 상반되면서 동시에 매우 긴밀하게 연관된 개념이다. 고려말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을 역사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조선은 1392년 개국하면서 원명교체의 국제정세에 영향을 받아 전쟁에 대응하여 군사정책을 수립, 변화시켰다. 다원적인 국제질서하에서 격랑의 시대에 고려는 국운을 좌우할 전쟁을 여러차례 겪으면서 고려의 역량을 총동원하면서도 국제정세 변화를 활용하여 전략적 외교관계를 맺어 대응했다. 그러나 조선은 건국이후 명 중심 국제질서를 중시하여 외교, 군사적 대안을 무시하였다. 물론 이는 조선이 현실적으로 북방에서 침입하는 외부세력을 여진족으로 한정하는 이점이 있었고, 조선은 북방의 전쟁대상으로 조선의 통제가 가능한 여진족을 상대하였기에 대외정벌 보다 국경안정의 관점에서 토벌을 필요시 시행했다. 건국초기 조선은 국내의 정치, 군사적 복잡한 관련성 못지않게 원명교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직면하여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대외적으로 명 중심 국제질서에서 조선의 안보를 담보하기 위한 치열한 국방정책을 시행했다. 평화시기에 조선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국방정책을 시행할 수 있지만, 건국초기 혼란과 국제정세의 변혁으로 전쟁에 대한 국가정책인 국방정책이 변화했다. 조선전기 국제정세는 북방민족이었던 몽골의 쇠퇴와 한족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중국대륙에 명나라 중심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 요동의 북원세력, 초원지대의 몽골세력, 한반도 북부의 여진족, 전국시대의 혼란으로 인한 왜구의 준동 등이 발생하여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국제정세의 변화는 조선을 둘러싼 군사충돌이 빈번하여 대규모 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조선은 국방정책의 수립, 변화를 경험하고, 여진정벌, 대마도정벌, 삼포왜란, 니탕개의 난, 임진전쟁, 병자호란 등 대외전쟁을 치렀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명 중심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국가의 안위를 확보하기 위해 명과 군사외교관계를 맺었다. 명나라의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방식은 조선의 전쟁이란 군사위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명나라의 몽골정벌은 몽골의 흥망성세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으로 주변 여진족의 남하가 초래되었다. 여진족은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면서 조선의 영향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과 여진족의 갈등을 초래하여 조선의 여진정벌이란 전쟁으로 이어졌다. 또한, 명 중심 국제질서에서 일본에 대한 교역금지는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초래하여 조선은 결국 대마도정벌을 단행하였다.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과 평화의 시기가 교차하면서 삼포왜란의 전쟁이 발생했다. 지속적인 왜구와 왜관을 중심으로 한 일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군사충돌은 조선이 일본을 군사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인식을 남겼으며, 이는 임진전쟁에 대한 조선의 소홀한 준비를 가져왔다.

      • KCI등재

        고려말 鄭地의 생애와 군사활동

        이소영(Lee, So-Young) 부산경남사학회 2020 역사와 경계 Vol.117 No.-

        정지는 1347년 羅州에서 태어났다. 恭愍王 대에 李僖와 함께 防倭策을 내세우며 정지는 수군으로서의 첫 入仕를 하게 되었다. 정지의 방왜책은 海道에서 나고 자란 사람을 훈련시켜 倭寇와의 전투를 준비하겠다는 수군 정비에 관한 상소였다. 정지의 방왜책은 수군 정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함 건조로 이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정지가 처음으로 전함을 건조했다고 나타난다. 이는 기존의 전함과 어떠한 차이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지가 건조했다는 전함은 아마도 화포가 장착된 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화약 무기를 실은 전함으로 큰 전과를 올린 鎭浦 전투를 통해, 정지는 전함에 화포를 장착하기에 이른다. 觀音浦 전투는 정지의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그 의의가 다르다 할 수 있다. 火㷁都監의 설치 이후, 관음포 전투에서는 처음으로 전함에 화포를 장착해 이동 중 해상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관음포 전투 이후 정지는 화포를 장착한 전함 건조에 힘을 쏟았다. 이것이 정지의 두 번째 방왜책이었다. 정지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왜구의 평정을 이루지 못하니 禑王은 이를 책망하였다. 이에 정지는 對馬島 征伐을 건의했다. 정지의 대마도 정벌은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지는 왜구의 근거지가 對馬島와 壹岐島임을 정확히 파악했고, 경인년 왜구 침입 이후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동정을 건의하였다. 정지는 탁월한 전략가였으며, 왜구 침입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대마도 정벌의 선구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수군의 최고 지휘자로서 큰 전공을 남긴 정지에게도 고려 말 격동기의 비운은 지나칠 수 없었다. 威化島 回軍 후 李成桂의 정변으로 이어지는 김저사건과 윤이·이초 사건에 연루되어 정지는 유배되었다. 일평생 왜구 격퇴에 앞장서며 수군의 수장으로서 백성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던 정지의 존재는 이성계에게 경계해야할 대상이었고, 이에 이성계는 정지를 포함한 위협적인 세력을 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정지는 1391년 회군의 공으로 이등공신에 선정되고, 옥에서 풀려나 명예회복에 나섰으나 광주로 은퇴해 정계에서 물러나 살다가 病死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으로, 병사의 이유는 밝혀진 바가 없다. 본고는 정지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연구이다. 정지가 방왜책으로 내세운 전함건조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후대의 기록에 처음으로 전함을 만든 이가 왜 정지가 되었는지, 이러한 전함을 언제 건조하였는지 등에 대해서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이에 필자는 정지의 전함 건조에 대해 심화된 견해를 제시하고, 더불어 정지의 대마도 정벌 건의에 대해서도 상세히 규명해 보고자 한다.

      • KCI등재

        征伐이라는 戰爭/征伐이라는 祭祀

        정다함(Chong, Da-ham) 고려사학회 2013 한국사학보 Vol.- No.52

        Contrary to the view of nationalist historiography that has deliberately concealed the aggressive character of 15th-century Joseon, the warfare against Jurchens and Tsushima people was not merely self-defense, but a concrete manifestation of the early Joseon idea concerning its position in the Northeast Asian political order, in which Joseon was deemed a rightful suzerain over Jurchen and Tsushima polities. Such violence was defined as a “war for punishment and correction of the world order”, Zhengfa(Kr. Chongb?l), to establish the self and the other as enforcer vis-a-vis disrupter. This was an appropriation of the rhetoric of the “Sinitic” universal empire by Joseon kings representing their role of an aggressor as a divinely mandated punisher carrying out retribution against those who disrupted Joseon-centered hierarchy. Thus, the proclamations of war were accompanied by assertions that Jurchens were Joseon’s vassal, and that Joseon kings were like benevolent parents, against whom Jurchens were committing parricide. Since each war was a symbolic enactment of this perceived relationship, rituals and traditional sciences during warfare functioned to emphasize this vertical hierarchy. From the departure of soldiers to their return to the capital, Joseon deployed a powerful combination of rituals and technologies, including sacrifices, clocks, calendars, and firearms, to legitimize its execution of war, representing itself as the upholder of heavenly prerogative. Warfare was not simple aggression, but an elaborate ceremony to inscribe a particular power relation, with Joseon made a “lesser suzerain” subjugating Jurchens as its vassal, even as it remained itself a subordinate to the larger Sinocentric world order located around 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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