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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부산지역의 수산물 어획고와 수산업인구 동향

          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99 No.-

          식민지시기 부산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수산업은 그동안의 선행연구에 의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산지역 수산업의 전반적인 것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결과 각 시기별 수산물의 어획량과 주요 어종, 수산업인구의 민족별 현황, 수산가공업과 수산물의 유통 등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는 우선적으로 부산지역 수산물의 생산과 수산업인구의 동향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하였다.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단일 어항으로서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특히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그 비중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부산의 수산물 어종은 전국적으로 많이 잡혔던 어종과 차이가 있었다. 특히 상어, 해삼, 우뭇가사리 등이 많이 어획되었는데, 상어와 해삼은 전근대시기부터 한중일 삼국간 교역되고 있던 다와라모노(俵物)의 유통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시기별 차이는 있었으나 조선인이 54~78%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총어획고에서 민족별 어획고를 보면, 일본어민의 어획고는 80~90%였고 조선어민의 어획고는 10~20%에 불과하였다. 총어획고에서 드러난 이러한 불균형은 당시 경남의 상황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편차가 컸다. 한편 1937년 이후 부산거주 어민(조선인+일본인)의 어획고 중 경남에서의 어획고는 감소한 반면에 경남 이외 지역에서의 어획고는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 부산거주 일본 어민들의 어로활동이 부산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본고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부산의 수산업에서 일본어민과 조선어민의 경제적 간격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39~1940년 경남의 수산업인구가 정체하고 있을 때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증가함을 보였다. 이는 식민지 말기에도 수산업이 부산 경제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The following are the key findings of this paper. Firstly, in Gyeongnam, Busan"s amount of catch represented approximately 10%(refer to <graph 3>) in the early 1920"s, and this increased incrementally to show 43.8% in 1939, and 37.7% in 1940. Through this, it could be seen that during the colonial period Busan"s fishery industry had gained recognition not only in Gyeonnam but also across the whole nation. Second, the trend of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The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showed a different trend from that of the whole nation and Gyeongnam. First, considering the entire population of Busan"s fishery population, it increased until 1932, decreased during 1933-1939, and increased in 1940. Such changes in population in Busan"s fisheries industry showed a correlation with the changes in Chosun workers in the fisheries industry. That is, the overall increase/decrease of population of Busan"s fisheries industry was the main cause of the increase/decrease of the entire population of Chosun"s fisheries industry. Meanwhile,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creased until 1932 and later showed a falling trend. The decrease of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Busan in 1932 showed different results from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the whole nation which began to fall from 1926. Thirdly, the trend of nationality of workers in Busan"s fisheries production. Although there are some differences for each year, in average Japanese fishers contributed to 80-90% of the entire fisheries production and the rest, and Chosun fishers contributed to 10-20%. Also, for Japanese fishers in regions aside from Busan, there were more Japanese fishers who came from Japan than Japanese fishers from fishing village in Gyeongnam. Fourth, the fisheries production trend in Busan. The ratio of fisheries production amount between Japanese and Chosun people was 63% to 37% by the early 1920"s. However, in 1930, the Japanese captured the industry, showing a shift in ratio to 91% to 9%. Afterwards Chosun people"s contribution rebounded; in 1933 the ratio became 65% to 35%, and in 1935 53% to 47%. However, in the late period of the colonial period, Japanese fisheries companies continued to grow, so it is likely that Chosun people"s contribution to production amount had decreased again. Fifth, distribution of fisheries products. Busan was the largest export port during the colonial period. A large part of the various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were being distributed through Busan Fisheries market which was run by Busan Fisheries Corporation. In the 1910"s, among the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20% were exported and 80% were distributed to the Japanese residing in the Korean Peninsula. The fisheries products were being exported to Osaka, Gobe, Fukuoka, Okayama, and even to Shanghai, Tianjin, Dalian, and other regions in China as well. In particular,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amount of fisheries being exported to China and Manju increased. In regards to fisheries products consumption in Busan, the products were mostly distributed through public markets authorized by the Busan metropolitan government(釜山府). However, in considering the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across multiple aspects, it is deemed that Chosun people"s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was low compared to that of other reg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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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의 부산 숙영 시행과 지역 변화

          김윤미 부산경남사학회 2018 역사와 경계 Vol.109 No.-

          The modern history of Korea was a period of war. The war did not take place directly on the Korean Peninsula, but it played a role in the rear for the Japanese war. How did this affect the Korean Peninsula? The answers under the subjects of Japanese army and logistics, military and region, war and transportation will be discovered. This thesis determined the area of Busan in the perspective of war and army. Japan opened Gyeongbu Line and Gyeongui Line in 1905, and used the railroad of Joseon as a means of military transportation. Despite the difference in scale and mean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continued until 1945. Busan also served as military camps. Camp is a place where the troop takes a rest or gathers in the rear to prepare for future movement. Japan started the dispatch of Siberian troops in 1918, Manchurian Incident in 1931, Sino-Japanese War in 1937, and Asia-Pacific War in 1941, and implemented a massive emergency transportation. All the soldiers of considerable size passed through Busan. As it was unable to find any data from the 1940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immediately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was considered the research period and subject. This is because transportation reports are still remaining that recorded the Japanese army's military quarters, food service, hygiene, military horse, and support of local people in September 1937. As a result, many influences to the region by the army were identified, including the social economy of Busan, lifestyles of residents and urban planning. 부산은 일본 군사수송의 중계지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개월간 3차례에 걸쳐 병력 20.9만명, 말 4.5만필, 후방부대, 물자 등을 긴급수송 했다. 부산에서 수송을 총괄한 것은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 부산지부였다. 부산병참지부는 부산 내 각 단체들과 숙영 전반의 지원을 협의했고, 부산부의 전 일본인 가옥을 대상으로 군인들을 숙영시켰다. 급히 마계장도 설치하여 군마 숙영도 시행했다. 이 글은 군의 숙영지가 없는 지역에 어떻게 군인과 군마가 숙영하고, 군사수송은 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부산병참지부의 보고서를 토대로 군사수송과 지역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안을 주목했다. 첫째는 대규모의 부대가 부산에 숙영하면서 이들을 통제할 장치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지역의 사회적 문제로 내재되어 있었다. 둘째는 소비가 확대되면서 물가가 급등했고, 부산병참지부는 부산부청과 함께 물가를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셋째는 부산병참지부의 대규모 예산이 부산부민과 부산 지역에 직접 지출되면서 지역 경제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넷째는 군사수송을 우선하여 보통열차의 운행 횟수 감소, 철도 화물취급 제한, 선박의 부두 사용 통제 등의 일련의 제제는 상업 도시인 부산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다섯째는 부산병참지부에서 향후 숙영지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것은 1937년 부산시가지계획 시행과 1940년대 부산에 들어선 군사시설과 무관하지 않다. 여섯째는 민가숙영지 설정시 제외된 조선인들에게는 지역의 경제 활성화의 영향이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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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의 부산 숙영 시행과 지역 변화

          김윤미(Kim, Yun-Mi) 부산경남사학회 2018 역사와 경계 Vol.109 No.-

          부산은 일본 군사수송의 중계지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개월간 3차례에 걸쳐 병력 20.9만명, 말 4.5만필, 후방부대, 물자 등을 긴급수송 했다. 부산에서 수송을 총괄한 것은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 부산지부였다. 부산병참지부는 부산 내 각 단체들과 숙영 전반의 지원을 협의했고, 부산부의 전 일본인 가옥을 대상으로 군인들을 숙영시켰다. 급히 마계장도 설치하여 군마 숙영도 시행했다. 이 글은 군의 숙영지가 없는 지역에 어떻게 군인과 군마가 숙영하고, 군사수송은 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부산병참지부의 보고서를 토대로 군사수송과 지역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안을 주목했다. 첫째는 대규모의 부대가 부산에 숙영하면서 이들을 통제할 장치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지역의 사회적 문제로 내재되어 있었다. 둘째는 소비가 확대되면서 물가가 급등했고, 부산병참지부는 부산부청과 함께 물가를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셋째는 부산병참지부의 대규모 예산이 부산부민과 부산 지역에 직접 지출되면서 지역 경제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넷째는 군사수송을 우선하여 보통열차의 운행 횟수 감소, 철도 화물취급 제한, 선박의 부두 사용 통제 등의 일련의 제제는 상업 도시인 부산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다섯째는 부산병참지부에서 향후 숙영지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것은 1937년 부산시가지계획 시행과 1940년대 부산에 들어선 군사시설과 무관하지 않다. 여섯째는 민가숙영지 설정시 제외된 조선인들에게는 지역의 경제 활성화의 영향이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 modern history of Korea was a period of war. The war did not take place directly on the Korean Peninsula, but it played a role in the rear for the Japanese war. How did this affect the Korean Peninsula? The answers under the subjects of Japanese army and logistics, military and region, war and transportation will be discovered. This thesis determined the area of Busan in the perspective of war and army. Japan opened Gyeongbu Line and Gyeongui Line in 1905, and used the railroad of Joseon as a means of military transportation. Despite the difference in scale and mean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continued until 1945. Busan also served as military camps. Camp is a place where the troop takes a rest or gathers in the rear to prepare for future movement. Japan started the dispatch of Siberian troops in 1918, Manchurian Incident in 1931, Sino-Japanese War in 1937, and Asia-Pacific War in 1941, and implemented a massive emergency transportation. All the soldiers of considerable size passed through Busan. As it was unable to find any data from the 1940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immediately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was considered the research period and subject. This is because transportation reports are still remaining that recorded the Japanese army"s military quarters, food service, hygiene, military horse, and support of local people in September 1937. As a result, many influences to the region by the army were identified, including the social economy of Busan, lifestyles of residents and urban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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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부산의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 현황

          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101 No.-

          본 논문은 그 동안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던 식민지시기 부산지역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의 현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경남의 수산가공업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192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하여 1937년이 되면 32%를 차지했다. 이후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갖는 비중은 1940년을 전후해서 14%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런 하락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전반기 부산의 전체 수산어획고 중에서 수산가공품 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26% 수준을 유지할 만큼 수산가공업은 수산업 관련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한편 부산의 수산가공업 사업체들을 보면 공장은 1910년대와 1920년대, 주식회사와 합자 · 합명회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수산가공업와 관련된 수산조합은 1930년대에 각각 많이 세워졌다. 공장 형태의 수산가공업 회사로서는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 주력을 이루었다. 수산가공품 생산액의 각 시기별 민족간 비율을 보면 1920년대 전반까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산액 비율이 63% 대 37%로 일본인들이 앞섰다. 그러나 1935년이 되면 민족간의 격차는 일본인 53% 대 조선인 47%로 감소하고 있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의 수산가공업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수산가공업 공장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 것은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었다. 재제염공장은 영도에 많이 밀집하였는데, 영도에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일찍부터 생겼으며 조선업 관련 주물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산가공품 중에서 절반을 차지한 것은 통조림과 어묵 ‧ 튀김 ‧ 포(脯) 등이었다. 시기별로 보면 1920년대는 통조림이 1930년대는 어묵 · 튀김 · 포(脯) 등의 생산이 많았다. 이들 품목 모두 일본인들이 많이 생산하였으며 조선인들의 경우는 우뭇가사리(寒天)를 중심으로 해조류 생산이 월등히 앞섰다. 이들 해조류는 부산 영도와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제주해녀들이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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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부산부 하수도 건설사업의 진행과정과 한계(1929~1932)

          박민주(Park, Min-Ju)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98 No.-

          부산에서는 1929년부터 ‘제1기 부산 하수도 건설사업'(이하 제1기 사업)이 진행되었다. 제1기 사업은 1927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부산부협의회에서 50만 5천 원 규모의 5개년 공사를 내용으로 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1929년에 총 공사비 26만 원의 3개년 사업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사업구역은 대창정,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좌등정, 영정이었다. 이들 지역은 일본인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었으며, 상업 중심지였다. 사업 내용이 확정된 이후, 192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영정, 좌등정, 대창정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1기 사업은 1932년 종료되었고, 소요된 공사비는 25만 6500원이었다. 부산부는 사업 종료 이후 독자적인 세출 항목으로 「하수비(下水費)」를 편성하여 하수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제1기 사업은 이전의 하수도 공사와 마찬가지로 민족 차별적인 성격을 띠어 조선인 거주 지역을 제외한 채 이루어졌다. 조선인들은 부산에서 일본인 거주지 외곽에 주로 거주하였다. 이들 지역은 낙후된 지역이었으며, 도시 기반시설건설에서도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적인 시정(市政)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 표출의 한 사례가 1934년 부산부회에서의 조선인 의원 사퇴였다. 1934년 부산부회에서 조선인 의원들은 조선인 지역의 위생 시설 확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부회 내에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지지 못했고, 의원들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 의원 사퇴는 이후 부산부의 설득에 의해 끝내 철회되었지만, 부산의 조선인들이 도시 기반시설 정비를 절실하게 원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In 1929, Busan initiated the First Phase Project for Busan Sewerage System Construction (hereafter referred to as the FPP). The FPP had been discussed at Busan-bu Council since 1927 and was planed to be proceeded with the cost of 505,000 won for five years. The final decision was made in 1929 by making the FPP as a 3-year-long project with the cost of 260,000 won. The project area included Daechangjeong, Bonjeong,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Jwadeungjeong, and Yeongjeong. These regions were commercial centers populated by many Japanese people. The FPP was initiated in 1929. The construction works were carried out with Bonjeong followed by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Yeongjeong, Jwadeungjeong, and Daechangjeong in order. The total cost of construction amounted to 256,500 won. As soon as the project was completed, Busan-bu began to manage the sewage system systematically by organizing independent expenditure items. Meanwhile, the FPP had an ethnic disclamatory character with exclusion of Koreans' residential areas from it, as in the cases of the earlier swage system construction projects. In 1934, a Korean representative of the Busan-bu council resigned, which was one of the cases where Koreans' grievances were expressed against the ethnic disclamatory administration at that time. In the same year, the Korean representatives at the Busan-bu council were demanding for an expansion of the sanitary facilities in Koreans' residential areas. However, this demand was dismissed, and the representative resigned from the council in protest. The representatives withdrew their resignations by persuasion from the Busan-bu authorities, but this case was a striking example demonstrating that the Koreans in Busan-bu at that time desperately wanted the maintenance of the urban infra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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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개발 개시연도의 부산 제조업에 관한 연구 - 1962년 『전국기업체총람』의 분석 -

          김대래 부산경남사학회 2019 역사와 경계 Vol.110 No.-

          This paper analysed the business directory in 1962 when the economic development plan began to be carried out, to see the characteristics of Busan's manufacturing. Business directory is very important source but not used before because of the difficulty to utilize. According to the analysis, the sectors with the largest number of businesses in Busan's manufacturing sector were the textile, machinery and food industry. The total number of workers was 50,113, many in the textile industry, rubber industry, food industry and transportation machinery industry. The textile industry followed with the overwhelming dominance of the rubber industry in terms of average. According to the distribution of manufacturers by Gu, Busan Jin-gu, Jung-gu and Dong-gu ranked first. As 67.5% of businesses were distributed in the old city center, so the Busan industries were still based on the old city center. And by Dong, Bumil-dong, Bujeon-dong, Choryang-dong and Chungmu-dong had more firms than others. On the other hand, cross-analysis was conducted to see if businesses are more likely to be located in specific districts or districts, and the location of districts is different depending on the industry. It was also found that the size of businesses varies depending on the industry. On the other hand, the analysis of the top 100 companies showed that most of them were textile, rubber, machinery and food. The distribution of the top 100 companies were in Busan Jin-gu, Dong-gu and Dongnae-gu. As 58 industrial firms were located in Busan Jin-gu and Dongnae-gu, it was confirmed that the industrial center was moving to Busan Jin-gu and Dongnae-gu from the old city. 『기업체명부』를 이용한 연구는 자료부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제조업의 특질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이 논문은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1962년 부산 제조업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기업체명부』를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부산의 제조업에서 가장 많은 사업체가 있는 업종은 방직업과 기계공업 그리고 식료품 공업이었다. 총 종사자수는 50,113명이었는데, 섬유공업, 고무제품, 식료품공업 그리고 수송기계에 많은 종사자가 있었다. 평균종사자 규모에서는 고무공업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보인 가운데 섬유공업이 뒤를 잇고 있었다. 부산 제조업체의 분포를 구별로 분석한 결과 부산진구, 중구, 동구의 순이었다. 구도심에 67.5%의 사업체가 분포하여 아직 전체 부산 공업의 입지는 원도심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동별로는 범일동, 부전동, 초량동, 충무동 순이었다. 업종별로 사업체들이 특정구나 특정동에 더 많이 입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를 보기 위해 교차분석을 한 결과 업종에 따라 구 및 동별 입지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업종에 따라 기업규모도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편 100대 기업을 분석한 결과 방직업, 고무공업, 기계공업, 식료품 공업 순서로 많은 기업을 보유하고 있었다. 100대 기업의 구별 분포를 보면 부산진구, 동구, 동래구의 순서로 구도심이 아닌 부산진구와 동래구에 58개가 입지하고 있었다. 100대 기업을 통해 볼 때 이 시기 공업중심지는 부산진구와 동래구였다. 휴전이후 1950년대 후반부터 나타났던 공업중심지 이동은 1960년대 초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 KCI등재

          1930년대 경남지역 가내공업의 변동

          장지용(Jang Ji-Yong) 부산경남사학회 2011 역사와 경계 Vol.78 No.-

          본 논문은 1930년대 가내공업에 관한 자료를 정비하고 변화-할당분석을 이용하여 경남지역 가내공업의 변동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첫째, 경남지역의 1930년대 공업화는 가내공업에 의해 견인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내공업이 발전한 지역이었다. 둘째, 경남지역의 가내공업은 대분류를 기준으로 하연 통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셋째, 생산액과 생산호를 동시에 고려한 변화-할당 분석의 결과 1930년대 초반, 혹은 공업화가 시작된 시점에 이르기 까지 경남지역 가내공업의 성장은 외연적 확장의 과정이었다. 반면 1930년대 후반에는 전형적인 ‘정리'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였고, 주로 식료품공업과 기타공업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넷째, 소분류 및 세분류 기준의 분석결과 경남지역 가내공업은 정리가 진행된 식료품과 기타공업의 경우는 상품생산이 강화되는 움직임이 뚜렷이 관찰되었고, 그것도 전국적으로 특화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학의 경우, 비록 지역 내 비중이 낮았지만 1930년대 후반에 성장을 이어갔고, 전국적으로 특화된 상품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는 기계기구공업도 마찬가지이며, 금속공업은 기계기구공업의 성장과 관련하여 산업연관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For this study I correct the errors in the 1939's data about household industry. And analysis the change of KyungSangNamDo's household industry. As a result, First KyungNam's household industry had a important role in the growth of whole industry. Second, in early 1930's KyungNam's household industry has progressed by the increase of producer, but in the late 1930's was very activity and at least was not self-sufficiency. Some of them grown up to factory industry and some of them was return to scale. And the growth was based on return to sc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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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부산과 대마도의 관계

          하우봉(Ha Woo-Bong) 부산경남사학회(釜山慶南史學會) 2010 역사와 경계 Vol.74 No.-

          Since early Chosun Dynasty the revitalization of relations with Japan yielded Busan port, after that political and economical exchange centered on Waegwan developed Busan in the late Chosun Dynasty and modern age. In this paper I considered the history of the relations between Busan and Tsusima in the large frame of relations with Japan in the early Chosun Dynasty and pursued the historical implication. Chosun court finished a severance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Japan immediately after national foundation and reopened diplomatic relations at the governmental level. Accordingly, Dongrae and Busan received new destiny and developed trade city of the border area. Since then, Busan became a window of diplomacy and trade with Japan as one of the Sampo(three ports). By Jeongmi Agreement of 1547, Busan became the only open port and its role and importance strengthened more. In the late Chosun Dynasty, trade and diplomatic affairs between the two countries were almost conducted in Busan Waegan. After Tonsinsa(Korean delegation to Japan in Chosun Dynasty) has been stopped in 1811, the working-level diplomatic relations at Busan Waegwan continued until 1872. So We can say the exchange composed at Busan Waegwan is a symbol of good-neighbor rel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in the Chosu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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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도시 부산의 ‘시나마찌(支那町)'와 화교들

          조세현(Cho, Se-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3 역사와 경계 Vol.87 No.-

          일제 강점기 부산지역 화교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당시 일본인들은 초량에 있던 청국 조계지를 지나(支那)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시나마찌(支那町)'라고 불렀다. 본문에서는 우선 식민지도시 부산지역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화상(華商)을 상징하는 포목점과 음식점, 화공(華工), 화농(華農)의 순으로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 시기의 상황을 소개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노동력 부족에 따라 산동성 출신 다수의 화공이 부산에 진출하여 조선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산동계가 주류를 구성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화교사회는 북한지역이나 인천 서울 등지에서 꾸준히 팽창한 것과는 달리 부산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1930년대부터는 민족주의의 대두와 정치적 압박이 강화되면서 다른 지역처럼 숫자가 급감했는데, 특히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은 부산화교가 대량 본국으로 귀국하던 시기였다. 나중에는 소수의 화교만이 초량동과 중앙동 지역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사회를 유지하며 해방을 기다렸다. How was the life of overseas Chinese who lived in Busan a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those days, Japanese used to address a Qing concession which was located in Choryang as ‘Sinamajji: Sino Street (支那町)' as it was the place where many Chinese(支那)people used to live together. The body of this study will first arrange the life of overseas Chinese who lived in Busan a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order of dry goods store and restaurant representing Chinese merchant(華商), Chinese laborer(華工) and Chinese farmer(華農). Next, this study will give an introduction on situations during the era of The Uprising on Manbo Mountain(萬寶山事件) and the Sino-Japanese Wa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 great many Chinese laborer from Shandong Province made their way due to the shortage labour and a shift in generations was made as Chinese laborer from Shandong formed mainstream same as in other regions of Joseon. Unlike continuous expansion in North Korean region, Incheon or Gyeongseong, overseas Chinese society in Jos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had not grown much in Busan area. As nationalism was on the rise and political pressure was strengthened from 1930s, the number of overseas Chinese in Busan drastically decreased just as in other areas and especially, the period of The Uprising on Manbo Mountain and the Sino-Japanese War was the time when numerous overseas Chinese in Busan returned to their home country. Later, only a small minority of overseas Chinese waited for liberation maintaining a closed society centering around Choryang-dong and Junga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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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어시장 현황과 어시장 수산물의 유통

          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7 역사와 경계 Vol.105 No.-

          개항장을 중심으로 생겨난 어시장은 식민지시기 수산물의 유통구조에 많은 영향 미쳤다. 이에 식민지시기 어시장 연구는 근대적 수산물 유통체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관건이 된다. 기존의 어시장에 대한 개별 연구들을 통해 수산물 유통에서 어시장이 차지했던 중요성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어시장 이외의 수산물 유통기관들과 비교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수산물 유통에서 어시장이 갖고 있었던 지위와 역할을 명확하게 부각시키지를 못했다. 본 논문은 식민지시기 어시장의 지역별 실태와 시기별 변화, 특히 식민지 시기 수산물의 전체적인 유통과정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어시장이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하였는지, 또 수산물의 수이출에서 어시장이 차지했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 등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식민지시기 전체 수산물 유통에서 어시장이 차지했던 비중은 1928년 11.8%에서 1937년 6.5%로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수산물 판매에서 어시장 비중이 감소했던 것은 어업조합과 전통시장에서 수산물 판매액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어시장의 수산물 판매에서 지역별 현황을 보면 항상 1위는 경남, 2위는 경기도였다. 이들 두 지역 어시장 수산물 판매액은 어시장 전체 판매액 가운데 56%~78%를 차지했다. 전국의 어시장에서 경남과 경기, 두 지역 어시장이 중심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어시장과 경성어시장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남과 경기 두 지역의 어시장은 수산물 유통과 판매에서 대조를 이루었다. 경기지역 어시장의 수산물은 거의 국내에서만 판매된 반면에, 경남지역 어시장 수산물은 국내 판매가 24%~44%에 불과했다. 그 외 56%~76% 수산물은 일본과 만주 등으로 수이출되고 있었다. 이는 전국 어시장 수산물의 국내외 유통에서 견인차 역할을 했던 곳이 경남지역 어시장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Fish markets were developed around open ports, affecting distribution system of marine products while going through the colonial era. Therefore, the study for fish market during the colonial area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stage for establishment of marine products distribution system in modern era. In the existing studies for fish markets by regions, it has revealed how fish markets were important for distribution of marine products. Still, the existing studies did not compare other bodies for distribution of marine products with the fish markets enough, so they did not clearly highlight the position and role of fish markets in the entire distribution system of marine products. Therefore, this study is intended to find out status by regions of fish markets during the colonial area, the entire distribution system of marine products during the era, and the feature and role of fish market in that system. Also, by further reviewing distribution in fish markets both to Korea and abroad, we"ll find out how fish market were important in distribution of marine products during the colonial era. As a result, the sales volume of marine products in fish market has been increased from 11.8% in 1928 to 6.5% in 1937. The reason of this trend is that the sales volume of those in fisherman"s union and traditional market has been increased. The sales volume of those in traditional market has been increased from 25% in 1928, in the distribution system, to 32.8% in 1937. This increase suggests double supply network, which was built in the colonial era, that fish market focused on fresh fish and traditional market focused on salted fish co-existed for a long time. So far, 1st rank of total sales volume of marine products in fish market is Gyeongnam, and 2nd rank is Gyeong-gi. They accounted for 56~78% of total sales volume of those. The reason why they became major roles in fish markets were Busan fish market and Gyeongseong fish market. Still, they were not the same in how to sell the products. The market in Gyeong-gi sold most of the products in Korea while the market in Gyeongnam sold about 24~44% of those in Korea and 56~76% in Japan and Manchuria. We can find out that Gyeongnam fish market played the critical role for distributing marine products both in Korea and abo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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