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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부산지역의 수산물 어획고와 수산업인구 동향

          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99 No.-

          식민지시기 부산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수산업은 그동안의 선행연구에 의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산지역 수산업의 전반적인 것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결과 각 시기별 수산물의 어획량과 주요 어종, 수산업인구의 민족별 현황, 수산가공업과 수산물의 유통 등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는 우선적으로 부산지역 수산물의 생산과 수산업인구의 동향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하였다.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단일 어항으로서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특히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그 비중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부산의 수산물 어종은 전국적으로 많이 잡혔던 어종과 차이가 있었다. 특히 상어, 해삼, 우뭇가사리 등이 많이 어획되었는데, 상어와 해삼은 전근대시기부터 한중일 삼국간 교역되고 있던 다와라모노(俵物)의 유통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시기별 차이는 있었으나 조선인이 54~78%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총어획고에서 민족별 어획고를 보면, 일본어민의 어획고는 80~90%였고 조선어민의 어획고는 10~20%에 불과하였다. 총어획고에서 드러난 이러한 불균형은 당시 경남의 상황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편차가 컸다. 한편 1937년 이후 부산거주 어민(조선인+일본인)의 어획고 중 경남에서의 어획고는 감소한 반면에 경남 이외 지역에서의 어획고는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 부산거주 일본 어민들의 어로활동이 부산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본고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부산의 수산업에서 일본어민과 조선어민의 경제적 간격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39~1940년 경남의 수산업인구가 정체하고 있을 때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증가함을 보였다. 이는 식민지 말기에도 수산업이 부산 경제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The following are the key findings of this paper. Firstly, in Gyeongnam, Busan"s amount of catch represented approximately 10%(refer to <graph 3>) in the early 1920"s, and this increased incrementally to show 43.8% in 1939, and 37.7% in 1940. Through this, it could be seen that during the colonial period Busan"s fishery industry had gained recognition not only in Gyeonnam but also across the whole nation. Second, the trend of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The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showed a different trend from that of the whole nation and Gyeongnam. First, considering the entire population of Busan"s fishery population, it increased until 1932, decreased during 1933-1939, and increased in 1940. Such changes in population in Busan"s fisheries industry showed a correlation with the changes in Chosun workers in the fisheries industry. That is, the overall increase/decrease of population of Busan"s fisheries industry was the main cause of the increase/decrease of the entire population of Chosun"s fisheries industry. Meanwhile,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creased until 1932 and later showed a falling trend. The decrease of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Busan in 1932 showed different results from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the whole nation which began to fall from 1926. Thirdly, the trend of nationality of workers in Busan"s fisheries production. Although there are some differences for each year, in average Japanese fishers contributed to 80-90% of the entire fisheries production and the rest, and Chosun fishers contributed to 10-20%. Also, for Japanese fishers in regions aside from Busan, there were more Japanese fishers who came from Japan than Japanese fishers from fishing village in Gyeongnam. Fourth, the fisheries production trend in Busan. The ratio of fisheries production amount between Japanese and Chosun people was 63% to 37% by the early 1920"s. However, in 1930, the Japanese captured the industry, showing a shift in ratio to 91% to 9%. Afterwards Chosun people"s contribution rebounded; in 1933 the ratio became 65% to 35%, and in 1935 53% to 47%. However, in the late period of the colonial period, Japanese fisheries companies continued to grow, so it is likely that Chosun people"s contribution to production amount had decreased again. Fifth, distribution of fisheries products. Busan was the largest export port during the colonial period. A large part of the various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were being distributed through Busan Fisheries market which was run by Busan Fisheries Corporation. In the 1910"s, among the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20% were exported and 80% were distributed to the Japanese residing in the Korean Peninsula. The fisheries products were being exported to Osaka, Gobe, Fukuoka, Okayama, and even to Shanghai, Tianjin, Dalian, and other regions in China as well. In particular,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amount of fisheries being exported to China and Manju increased. In regards to fisheries products consumption in Busan, the products were mostly distributed through public markets authorized by the Busan metropolitan government(釜山府). However, in considering the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across multiple aspects, it is deemed that Chosun people"s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was low compared to that of other reg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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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부산의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 현황

          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101 No.-

          본 논문은 그 동안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던 식민지시기 부산지역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의 현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경남의 수산가공업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192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하여 1937년이 되면 32%를 차지했다. 이후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갖는 비중은 1940년을 전후해서 14%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런 하락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전반기 부산의 전체 수산어획고 중에서 수산가공품 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26% 수준을 유지할 만큼 수산가공업은 수산업 관련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한편 부산의 수산가공업 사업체들을 보면 공장은 1910년대와 1920년대, 주식회사와 합자 · 합명회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수산가공업와 관련된 수산조합은 1930년대에 각각 많이 세워졌다. 공장 형태의 수산가공업 회사로서는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 주력을 이루었다. 수산가공품 생산액의 각 시기별 민족간 비율을 보면 1920년대 전반까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산액 비율이 63% 대 37%로 일본인들이 앞섰다. 그러나 1935년이 되면 민족간의 격차는 일본인 53% 대 조선인 47%로 감소하고 있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의 수산가공업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수산가공업 공장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 것은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었다. 재제염공장은 영도에 많이 밀집하였는데, 영도에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일찍부터 생겼으며 조선업 관련 주물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산가공품 중에서 절반을 차지한 것은 통조림과 어묵 ‧ 튀김 ‧ 포(脯) 등이었다. 시기별로 보면 1920년대는 통조림이 1930년대는 어묵 · 튀김 · 포(脯) 등의 생산이 많았다. 이들 품목 모두 일본인들이 많이 생산하였으며 조선인들의 경우는 우뭇가사리(寒天)를 중심으로 해조류 생산이 월등히 앞섰다. 이들 해조류는 부산 영도와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제주해녀들이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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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부산부 하수도 건설사업의 진행과정과 한계(1929~1932)

          박민주(Park, Min-Ju)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98 No.-

          부산에서는 1929년부터 ‘제1기 부산 하수도 건설사업’(이하 제1기 사업)이 진행되었다. 제1기 사업은 1927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부산부협의회에서 50만 5천 원 규모의 5개년 공사를 내용으로 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1929년에 총 공사비 26만 원의 3개년 사업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사업구역은 대창정,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좌등정, 영정이었다. 이들 지역은 일본인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었으며, 상업 중심지였다. 사업 내용이 확정된 이후, 192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영정, 좌등정, 대창정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1기 사업은 1932년 종료되었고, 소요된 공사비는 25만 6500원이었다. 부산부는 사업 종료 이후 독자적인 세출 항목으로 「하수비(下水費)」를 편성하여 하수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제1기 사업은 이전의 하수도 공사와 마찬가지로 민족 차별적인 성격을 띠어 조선인 거주 지역을 제외한 채 이루어졌다. 조선인들은 부산에서 일본인 거주지 외곽에 주로 거주하였다. 이들 지역은 낙후된 지역이었으며, 도시 기반시설건설에서도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적인 시정(市政)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 표출의 한 사례가 1934년 부산부회에서의 조선인 의원 사퇴였다. 1934년 부산부회에서 조선인 의원들은 조선인 지역의 위생 시설 확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부회 내에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지지 못했고, 의원들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 의원 사퇴는 이후 부산부의 설득에 의해 끝내 철회되었지만, 부산의 조선인들이 도시 기반시설 정비를 절실하게 원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In 1929, Busan initiated the First Phase Project for Busan Sewerage System Construction (hereafter referred to as the FPP). The FPP had been discussed at Busan-bu Council since 1927 and was planed to be proceeded with the cost of 505,000 won for five years. The final decision was made in 1929 by making the FPP as a 3-year-long project with the cost of 260,000 won. The project area included Daechangjeong, Bonjeong,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Jwadeungjeong, and Yeongjeong. These regions were commercial centers populated by many Japanese people. The FPP was initiated in 1929. The construction works were carried out with Bonjeong followed by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Yeongjeong, Jwadeungjeong, and Daechangjeong in order. The total cost of construction amounted to 256,500 won. As soon as the project was completed, Busan-bu began to manage the sewage system systematically by organizing independent expenditure items. Meanwhile, the FPP had an ethnic disclamatory character with exclusion of Koreans’ residential areas from it, as in the cases of the earlier swage system construction projects. In 1934, a Korean representative of the Busan-bu council resigned, which was one of the cases where Koreans’ grievances were expressed against the ethnic disclamatory administration at that time. In the same year, the Korean representatives at the Busan-bu council were demanding for an expansion of the sanitary facilities in Koreans’ residential areas. However, this demand was dismissed, and the representative resigned from the council in protest. The representatives withdrew their resignations by persuasion from the Busan-bu authorities, but this case was a striking example demonstrating that the Koreans in Busan-bu at that time desperately wanted the maintenance of the urban infra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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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도시 부산의 ‘시나마찌(支那町)’와 화교들

          조세현(Cho, Se-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3 역사와 경계 Vol.87 No.-

          일제 강점기 부산지역 화교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당시 일본인들은 초량에 있던 청국 조계지를 지나(支那)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시나마찌(支那町)’라고 불렀다. 본문에서는 우선 식민지도시 부산지역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화상(華商)을 상징하는 포목점과 음식점, 화공(華工), 화농(華農)의 순으로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 시기의 상황을 소개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노동력 부족에 따라 산동성 출신 다수의 화공이 부산에 진출하여 조선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산동계가 주류를 구성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화교사회는 북한지역이나 인천 서울 등지에서 꾸준히 팽창한 것과는 달리 부산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1930년대부터는 민족주의의 대두와 정치적 압박이 강화되면서 다른 지역처럼 숫자가 급감했는데, 특히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은 부산화교가 대량 본국으로 귀국하던 시기였다. 나중에는 소수의 화교만이 초량동과 중앙동 지역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사회를 유지하며 해방을 기다렸다. How was the life of overseas Chinese who lived in Busan a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those days, Japanese used to address a Qing concession which was located in Choryang as ‘Sinamajji: Sino Street (支那町)’ as it was the place where many Chinese(支那)people used to live together. The body of this study will first arrange the life of overseas Chinese who lived in Busan a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order of dry goods store and restaurant representing Chinese merchant(華商), Chinese laborer(華工) and Chinese farmer(華農). Next, this study will give an introduction on situations during the era of The Uprising on Manbo Mountain(萬寶山事件) and the Sino-Japanese Wa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 great many Chinese laborer from Shandong Province made their way due to the shortage labour and a shift in generations was made as Chinese laborer from Shandong formed mainstream same as in other regions of Joseon. Unlike continuous expansion in North Korean region, Incheon or Gyeongseong, overseas Chinese society in Jos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had not grown much in Busan area. As nationalism was on the rise and political pressure was strengthened from 1930s, the number of overseas Chinese in Busan drastically decreased just as in other areas and especially, the period of The Uprising on Manbo Mountain and the Sino-Japanese War was the time when numerous overseas Chinese in Busan returned to their home country. Later, only a small minority of overseas Chinese waited for liberation maintaining a closed society centering around Choryang-dong and Junga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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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의 부산 숙영 시행과 지역 변화

          김윤미(Kim, Yun-Mi) 부산경남사학회 2018 역사와 경계 Vol.109 No.-

          부산은 일본 군사수송의 중계지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개월간 3차례에 걸쳐 병력 20.9만명, 말 4.5만필, 후방부대, 물자 등을 긴급수송 했다. 부산에서 수송을 총괄한 것은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 부산지부였다. 부산병참지부는 부산 내 각 단체들과 숙영 전반의 지원을 협의했고, 부산부의 전 일본인 가옥을 대상으로 군인들을 숙영시켰다. 급히 마계장도 설치하여 군마 숙영도 시행했다. 이 글은 군의 숙영지가 없는 지역에 어떻게 군인과 군마가 숙영하고, 군사수송은 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부산병참지부의 보고서를 토대로 군사수송과 지역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안을 주목했다. 첫째는 대규모의 부대가 부산에 숙영하면서 이들을 통제할 장치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지역의 사회적 문제로 내재되어 있었다. 둘째는 소비가 확대되면서 물가가 급등했고, 부산병참지부는 부산부청과 함께 물가를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셋째는 부산병참지부의 대규모 예산이 부산부민과 부산 지역에 직접 지출되면서 지역 경제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넷째는 군사수송을 우선하여 보통열차의 운행 횟수 감소, 철도 화물취급 제한, 선박의 부두 사용 통제 등의 일련의 제제는 상업 도시인 부산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다섯째는 부산병참지부에서 향후 숙영지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것은 1937년 부산시가지계획 시행과 1940년대 부산에 들어선 군사시설과 무관하지 않다. 여섯째는 민가숙영지 설정시 제외된 조선인들에게는 지역의 경제 활성화의 영향이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 modern history of Korea was a period of war. The war did not take place directly on the Korean Peninsula, but it played a role in the rear for the Japanese war. How did this affect the Korean Peninsula? The answers under the subjects of Japanese army and logistics, military and region, war and transportation will be discovered. This thesis determined the area of Busan in the perspective of war and army. Japan opened Gyeongbu Line and Gyeongui Line in 1905, and used the railroad of Joseon as a means of military transportation. Despite the difference in scale and mean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continued until 1945. Busan also served as military camps. Camp is a place where the troop takes a rest or gathers in the rear to prepare for future movement. Japan started the dispatch of Siberian troops in 1918, Manchurian Incident in 1931, Sino-Japanese War in 1937, and Asia-Pacific War in 1941, and implemented a massive emergency transportation. All the soldiers of considerable size passed through Busan. As it was unable to find any data from the 1940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immediately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was considered the research period and subject. This is because transportation reports are still remaining that recorded the Japanese army"s military quarters, food service, hygiene, military horse, and support of local people in September 1937. As a result, many influences to the region by the army were identified, including the social economy of Busan, lifestyles of residents and urban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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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화교의 가족 분산과 국적의 함의

          안미정(An Mi-Jeong) 부산경남사학회 2011 역사와 경계 Vol.78 No.-

          이 글은 한국 부산에 거주하는 화교 여성의 생애사를 통해 20세기 동북아 국가 간 정치적 변동이 개인의 생애에 미친 영향과 그 양상의 문화적 함의를 밝혀 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대다수의 한국화교들은 지역적으로는 중국 산동성 출신이거나 그 후손들이며, 이들의 국적은 대만(중화민국)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고향, 거주지, 귀속 국가가 서로 다른 복합성은 이들의 역사가 동북아의 20세기 역사와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화교이주사에서 나타나듯이 한반도를 오갔던 초기의 화교들은 경제적 활동을 목적으로 한 이동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부산의 화교들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대규모의 집단적 거주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후 냉전 체체 하에서 한국화교 인구는 계속 감소해왔다. 이글에서 제시한 화교여성의 사례는 한국화교의 인구감소가 어떠한 맥락 속에서 전개되는 것인지 보여준다. 즉 부산에 거주하는 H씨와 R씨의 사례에서 이들의 가족은 부산에 거주하는 모친을 중심으로 대만에 사는 자식들과 하나의 생활세계를 형성해 간다. 가족 간에는 분산 양상이 나타나며 국적도 서로 다르다. 화교가족이 모두 함께 이주하는 것은 아니며, 모친은 현재의 거주지가 가족의 정주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처럼 화교인구의 감소는 가족의 집단적 이동형태가 아니라 가족의 분산 이동형태라 하겠으며, 이것은 동북아의 식민주의, 전쟁, 냉전체제 등이 낳은 정치변동과 국가 간의 불연속적 관계에 따른 가족집단의 대응이 아닌지 고려된다. 또한 가족 성원끼리 국적에 의한 갈등과 긴장은 여전히 동북아 역사적 긴장이 개인의 삶에도 배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부분의 출신국과 거주국, 귀속국이 서로 다른 한국화교의 크로스보더성은 동북아의 역사와 정치적 지형을 반영하며, 민족국가에 의해 구분되는 국민이 아니라 ‘현지’의 거주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History of the Overseas Chinese(Hwagyo) in Korea has deeply been related to history of North-East Asia and the Cold War in 20th century. This thesis addresses one's life history which was developed in political movement among Korea. China, Japan and Taiwan. Macroscopic social changes among those countries led dramatic changes of the Overseas Chinese population in Korea. This thesis examined microscopic aspects of the changes through the life history of the Overseas Chinese in Busan. Unlike the early stage, political aspect(Korean War) is the most influential factor on formation of group habitation in Busan which was evacuation during the Korean War. Busan was the biggest area for the Overseas Chinese however its population has been decreased since the Korean War. In case of Ms. H. Chinese Civil War and Korean War and Cold War have intervened to her family immigration. Although these political background has made her movement, she hopes to settle down in local society. The Overseas Chinese in Korea are regarded as different nationality or different ethnic group but it does not necessarily means that the Overseas Chinese are 'Chinese (or Taiwanese)'. Ms. R is Korean but has Taiwan nationality and a member of Overseas Chinese community. However social boundaries which divides by nationality has become main factor that foments internal conflicts and tension among families. Likewise, most Overseas Chinese people who happened to have Taiwan nationality through the Korean War have different one's native place, current residence and nationality. This cross-border reflects history and political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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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경남지역 가내공업의 변동

          장지용(Jang Ji-Yong) 부산경남사학회 2011 역사와 경계 Vol.78 No.-

          본 논문은 1930년대 가내공업에 관한 자료를 정비하고 변화-할당분석을 이용하여 경남지역 가내공업의 변동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첫째, 경남지역의 1930년대 공업화는 가내공업에 의해 견인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내공업이 발전한 지역이었다. 둘째, 경남지역의 가내공업은 대분류를 기준으로 하연 통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셋째, 생산액과 생산호를 동시에 고려한 변화-할당 분석의 결과 1930년대 초반, 혹은 공업화가 시작된 시점에 이르기 까지 경남지역 가내공업의 성장은 외연적 확장의 과정이었다. 반면 1930년대 후반에는 전형적인 ‘정리’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였고, 주로 식료품공업과 기타공업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넷째, 소분류 및 세분류 기준의 분석결과 경남지역 가내공업은 정리가 진행된 식료품과 기타공업의 경우는 상품생산이 강화되는 움직임이 뚜렷이 관찰되었고, 그것도 전국적으로 특화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학의 경우, 비록 지역 내 비중이 낮았지만 1930년대 후반에 성장을 이어갔고, 전국적으로 특화된 상품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는 기계기구공업도 마찬가지이며, 금속공업은 기계기구공업의 성장과 관련하여 산업연관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For this study I correct the errors in the 1939's data about household industry. And analysis the change of KyungSangNamDo's household industry. As a result, First KyungNam's household industry had a important role in the growth of whole industry. Second, in early 1930's KyungNam's household industry has progressed by the increase of producer, but in the late 1930's was very activity and at least was not self-sufficiency. Some of them grown up to factory industry and some of them was return to scale. And the growth was based on return to sc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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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부산 유곽의 실태와 일본군과의 관련성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8 역사와 경계 Vol.109 No.-

          개항과 동시에 일본의 성매매업이 진출한 부산은 조선의 침략을 위한 군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본 관리관, 영사관, 그리고 이사청에 의해 줄곧 성매매업의 관리 감독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성매매업은 1902년 단계에서 집창 형태의 일정 지구(佐須土原, 牧島, 草梁)에 설정되었고, 이를 일본은 조선의 식민화와 도시화 과정 속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어 기존의 綠町으로의 통합을 전제로 草梁洞, 瀛仙洞(牧島의 洲岬과 東部) 등 4곳이 지정되었다. 부산유곽은 192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성장세에 있다가 이후 경제적 불황, 근대적 유흥·위락시설의 확대, 관리기관인 부산경찰서의 제한정책에 의해 하락세가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전시체제는 군과의 관련성으로 말미암은 공창에 대한 느슨한 통제가 오히려 유곽의 안정세 또는 성장세를 추동했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군대 파견과 만주사변 이후의 상시화는 유곽과 일본군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유곽과 관련된 제반 사항에 대한 관리감독은 지방행정기구와 함께 파견 부대의 병참을 맡은 부산병참지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애초 요원의 파견에 의한 임시적인 기구였던 병참기관이 1937년 조선임시병참사령부 부산지부로 설치되고 1938년 상설화되면서 군부대의 부산 숙영과 급영에 관한 업무 가운데 유곽 등 화류병과 관련된 사항을 지방행정기구의 협조를 받아 직접 관리 감독했다. 오히려 기존의 관리감독기관인 도와 부는 협조 협력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군은 개항이후 줄곧 성매매업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었고 전시체제가 되면 더욱 적극적인 관리감독의 주체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The Japanese prostitution business, which entered Busan with the opening of the port, was determined to grow and decline in connection with the Japanese army that entered the Korean invasion. The prostitution business was set up in 1902 in a certain district. Japan needs to manage it more systematically in the process of colonization and urbanization of Joseon, and four sites(Nogjeong, Choyangdong, Yeongseonjeong) have been designated on the premise of integration into the existing one(Nogjeong). Busan"s red-light districts was growing until around 1920, and the decline was accelerated by the economic recession, the expansion of modern entertainment and amusement facilities, and the restriction policy of Busan Police Station, the management agency. However, according to the wartime system, the direct relationship between the army and the red-light districts was deepened, and busan"s red-light districts became stable or growing. In particular, the temporary dispatch of troops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and the regular dispatch of troops after the Sino-Japanese War further deepen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ed-light districts and the Japanese army. The management supervision of the red-light districts was led by the Busan Provisional Organization of the Japanese Army, which was in charge of the dispatching unit together with the local administrative organization. The logistical agency, which was originally a temporary organization, was established in 1937 as the Busan branch of the Chosun Temporary logisticts Command and was established in 1938. In addition, the Busan branch directly supervised and supervised matters related to the red-light districts and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along with the work of the dispatching unit on the stay and meal in Busan. Rather, Gyeongsangnam-do and Busan-bu, which are existing management supervisory agencies, were merely cooperating agencies. As such, the Japanese army has been in close relationship with prostitution since its opening, and when it became the wartime system, it became more active as a subject of management supervision.

        • KCI등재

          개항기 조선 생우 무역과 일본의 개입 양상 -일본 내 검역 체제 정비 및 부산 적용 과정을 중심으로-

          장윤걸 부산경남사학회 2019 역사와 경계 Vol.112 No.-

          This paper examines Japan 's intervention in live cattle trade during the Open Port Period of Korea through the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a quarantine system in Meiji Japan and its application in Busan. The aim is to underst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pre-colonial live cattle trade in the expansion of Japanese imperialism and the colonization of Korea. While the Japanese government was trying to strengthen its control over the Korean cattle trade, local communities in Japan, merchants, and overseas diplomatic missions were not only attempting to fulfil their government’s national policies but also their own private interests. Meiji Japan’s Korean cattle policies were very closely connected to the problem of rinderpest (cattle plague). Since the Meiji Restoration, the import of Korean cattle into rural areas in Japan had increased rapidly, and rinderpest from the Korean peninsula caused great damage throughout Japan. The Japanese government tried to control the spread of rinderpest by implementing related legislation but this was not an effective solution because it was limited to the Japanese mainland. As a result, a quarantine system was enforced in Busan, which was a base for exporting live cattle to Japan. This enabled Japan to gradually strengthen its control over trade. This was unified as a 'national policy'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and it gradually led to the subordination of the Korean economy by the economic structure of the Japanese empire. 본고는 개항기 조선 생우 무역에 대한 일본의 개입 양상을 근대 일본의 검역 체제 정비 및 부산에의 적용 과정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 목적은 일본 제국주의 팽창과 조선 식민지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식민지 이전 생우 무역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 정부가 조선 생우에 대한 통제력 강화를 정책적으로 꾀하는 가운데 일본 내 지역 사회와 상인들, 그리고 재외공관은 각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결국 국가 정책을 충실히 따르는 역할을 수행해갔다. 근대 일본의 조선 생우 관련 정책은 우역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래 농촌 사회로의 조선 생우 수입이 본격화 되는데 그와 함께 한반도에서 유입된 우역은 일본 전국에 큰 피해를 야기했다. 일본 정부는 관련 법령의 정비를 구체화시키며 우역 방지를 위해 힘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내적 조치였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이에 일본으로의 생우 수출 거점이었던 부산에 검역 체제를 적용시키며 점차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간다. 이러한 모습은 점차 러일전쟁이라는 국가 총력전 하에서 ‘국책’ 으로 일원화되며, 일본 제국의 경제 구조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는다.

        • KCI등재

          3.1운동의 장소적 특징과 ‘유산화’ - 경남지역 3.1운동을 중심으로 -

          전성현 부산경남사학회 2019 역사와 경계 Vol.113 No.-

          The 3.1 movement was a national and all-people independence movement that rose up to the colonial rule of Imperial Japan and shouted independence. If you specify the place of the 3.1 movement as a place of historical events, the 5-day interval market is the most common in a single place, followed by the school. In the case of government offices, it was a symbol of colonial power and a target of declaration of independence, so it was the place where the demonstrations occurred most when all Myeon offices and police stations were added. The 3.1 movement in Gyeongnam was more prominent than other regions, and a massive demonstration was held based on the place called the 5-day interval market. In particular, in the representative market of the region, almost all of the 3.1 movements occurred and the scale was large. The March 1 movement in these markets did not end at once; it had a lasting characteristic, such as the protests being held or planned again when the next market opened. It also spread in a chain to the nearby market along a five-day cycle. As such, the 3.1 movement in Gyeongnam is characterized as a market demonstration, so the market can be called a 'place of history'. It is necessary to confirm how the past history is accepted with the historical place and how it is institutionalized and affects the memory of history in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This is more important because it is the present problem beyond the past problem. There are various institutional devices to remember the history based on the historical place of the 3.1 movement. The same is true for Gyeongnam. Typically, there are various monuments as a 'memorial' device related to the 3.1 movement, and there are reenactment events that are repeated every year. However, these memorial devices are managed as national memorial facilities even if they are created by the state, local governments, local organizations, and individuals. In that respect, there are two problems. First, it is being created with a distance from the historical place of the 3.1 movement. Second, these memorial devices are generally designated as cultural assets or memorial facilities by the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d local governments, and their historical meanings are converged to the nation and the country, thereby blocking the expansion of the meaning. In order to connect the past history and historical place to the present and the future, we must pay attention to the new 'Becoming heritage' of historical place. At this time, the subject of heritage should be a citizen and a local citizen who should live together with heritage as well as the nation and nation. 3.1운동은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스스로 독립을 외친 전 민족적, 전 민중적, 전 지역적 독립운동이었다. 역사적 사건의 장소로서 3.1운동의 장소를 특정하면, 단일 장소일 경우 장시 또는 시장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학교였다. 하지만, 관공서의 경우 식민권력의 상징이었고 독립 선언의 대상지였기 때문에 도청, 군청, 면사무소, 헌병대, 경찰서 등을 모두 합치면 시위 장소로서 가장 많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장시가 시위의 장소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경남의 3.1운동은 다른 지역보다 특출하게 장시라는 장소를 기반으로 대대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나 해당 부·군의 대표적인 거점 장시 또는 큰 장시에서는 거의 모두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규모도 대단위였다. 이들 장시에서의 시위는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장 또는 그 다음 장이 설 때 다시 시위가 전개되거나 계획되는 등 지속적인 특성을 지녔다. 또한 장시 시위는 장날을 기해 한 번 또는 두 번 이상 연속적으로 일어나는데 그친 것만은 아니었다. 5일장이라는 순환 사이클을 따라 인근 거점 장시 또는 중소 장시로 연쇄적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경남지역의 3.1운동이 다른 지역과 달리 장날 시위라는 특징을 지녔기에 장시는 경남의 경우 ‘역사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현재, 과거의 역사가 그 역사적 장소와 함께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되어 역사의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거의 문제를 넘어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현재 3.1운동의 역사적 장소를 토대로 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전국에 마련되어 있다. 경남도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사건, 인물, 장소의 기억을 위한 ‘기념화’ 장치로서의 각종 기념비 등은 물론, 매년 반복되는 3.1운동 재현 행사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기념 장치들은 국가에 의해 문화재 또는 기념물로 지정·조성되든, 지자체나 지역 단체, 그리고 개인에 의해 조성되든, 모두 국가의 현충시설로 관리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3.1운동의 역사적 장소가 삶의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소 거리를 두는 등 사람과 유리된 채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 기념 장치들은 대체로 국가보훈처, 문화재청, 지자체 등에 의한 문화재 또는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의미가 모두 민족과 국가로 수렴되어 버려 그 의미의 확장을 가로막는 한계도 있다. 과거의 역사와 역사적 장소를 현재와 미래에 연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기념이 아니라 역사적 장소의 새로운 ‘유산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유산화’는 역사와 인간이 함께 어울려 생활하며 또 이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유산화의 주체는 국가와 민족만이 아니라 유산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할 시민이며 지역민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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