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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부산지역의 수산물 어획고와 수산업인구 동향

        김승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99 No.-

        The following are the key findings of this paper. Firstly, in Gyeongnam, Busan's amount of catch represented approximately 10%(refer to <graph 3>) in the early 1920's, and this increased incrementally to show 43.8% in 1939, and 37.7% in 1940. Through this, it could be seen that during the colonial period Busan's fishery industry had gained recognition not only in Gyeonnam but also across the whole nation. Second, the trend of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The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showed a different trend from that of the whole nation and Gyeongnam. First, considering the entire population of Busan's fishery population, it increased until 1932, decreased during 1933-1939, and increased in 1940. Such changes in population in Busan's fisheries industry showed a correlation with the changes in Chosun workers in the fisheries industry. That is, the overall increase/decrease of population of Busan's fisheries industry was the main cause of the increase/decrease of the entire population of Chosun's fisheries industry. Meanwhile,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creased until 1932 and later showed a falling trend. The decrease of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Busan in 1932 showed different results from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the whole nation which began to fall from 1926. Thirdly, the trend of nationality of workers in Busan's fisheries production. Although there are some differences for each year, in average Japanese fishers contributed to 80-90% of the entire fisheries production and the rest, and Chosun fishers contributed to 10-20%. Also, for Japanese fishers in regions aside from Busan, there were more Japanese fishers who came from Japan than Japanese fishers from fishing village in Gyeongnam. Fourth, the fisheries production trend in Busan. The ratio of fisheries production amount between Japanese and Chosun people was 63% to 37% by the early 1920's. However, in 1930, the Japanese captured the industry, showing a shift in ratio to 91% to 9%. Afterwards Chosun people's contribution rebounded; in 1933 the ratio became 65% to 35%, and in 1935 53% to 47%. However, in the late period of the colonial period, Japanese fisheries companies continued to grow, so it is likely that Chosun people's contribution to production amount had decreased again. Fifth, distribution of fisheries products. Busan was the largest export port during the colonial period. A large part of the various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were being distributed through Busan Fisheries market which was run by Busan Fisheries Corporation. In the 1910's, among the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20% were exported and 80% were distributed to the Japanese residing in the Korean Peninsula. The fisheries products were being exported to Osaka, Gobe, Fukuoka, Okayama, and even to Shanghai, Tianjin, Dalian, and other regions in China as well. In particular,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amount of fisheries being exported to China and Manju increased. In regards to fisheries products consumption in Busan, the products were mostly distributed through public markets authorized by the Busan metropolitan government(釜山府). However, in considering the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across multiple aspects, it is deemed that Chosun people's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was low compared to that of other regions 식민지시기 부산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수산업은 그동안의 선행연구에 의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산지역 수산업의 전반적인 것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결과 각 시기별 수산물의 어획량과 주요 어종, 수산업인구의 민족별 현황, 수산가공업과 수산물의 유통 등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는 우선적으로 부산지역 수산물의 생산과 수산업인구의 동향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하였다.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단일 어항으로서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특히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그 비중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부산의 수산물 어종은 전국적으로 많이 잡혔던 어종과 차이가 있었다. 특히 상어, 해삼, 우뭇가사리 등이 많이 어획되었는데, 상어와 해삼은 전근대시기부터 한중일 삼국간 교역되고 있던 다와라모노(俵物)의 유통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시기별 차이는 있었으나 조선인이 54~78%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총어획고에서 민족별 어획고를 보면, 일본어민의 어획고는 80~90%였고 조선어민의 어획고는 10~20%에 불과하였다. 총어획고에서 드러난 이러한 불균형은 당시 경남의 상황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편차가 컸다. 한편 1937년 이후 부산거주 어민(조선인+일본인)의 어획고 중 경남에서의 어획고는 감소한 반면에 경남 이외 지역에서의 어획고는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 부산거주 일본 어민들의 어로활동이 부산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본고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부산의 수산업에서 일본어민과 조선어민의 경제적 간격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39~1940년 경남의 수산업인구가 정체하고 있을 때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증가함을 보였다. 이는 식민지 말기에도 수산업이 부산 경제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 KCI등재

        호주장로교의 부산지역 의료선교: 맥켄지의 부산나병원 운영과 부산부의 나환자 대책을 중심으로

        이가연 부산경남사학회 2021 역사와 경계 Vol.121 No.-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선교지 분담협정에 따라 부산·경남 지역에서 활동 하면서 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전도, 교육, 의료, 구제, 자선사업 등을 시행하였다. 특히 1902년부터 시작한 의료선교는 당시 조선인들이 서양과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일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이 관심을 가진 의료선교 분야는 나환자들의 구료 활동이었다. 1909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어을빈이 현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상애원(부산나병원)과 상애교회를 건립하였고 1910년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이듬해부터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이 이곳을 인계받아 운영하였는데, 1912년 맥켄지가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시설이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이곳의 환자들은 ‘격리 수용’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서 일반 사회와 다름없는 작은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맥켄지의 구료 활동과 부산나병원의 상황이 소문이 나자 이 부근에는 치료를 받기 위한 환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이 모든 나환자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거나 부랑 나환자로 살아가야만 했다. ‘문둥이’라고 불리며 공공연하게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 된 나환자 및 이들의 집단 거주를 바라보는 부산부민들의 시선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부산나병원의 이전, 부랑 나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 요구는 일제강점기 내내 끊임없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부산부에서는 부산나병원의 시설을 확충할만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부랑 나환자에 대해서도 단속 후 훈방 조치를 하거나, 소록도 자혜의원이 확장되고 나서는 그곳으로 일부 환자를 송환하는 것 외에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환자에 대한 편견, 차별, 혐오는 계속해서 깊어져 갔고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해방 이후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The Australian Presbyterian Church's medical mission, which began in 1902, eliminated the Koreans had against Christianity at the time. In particular, they were interested in treating leprosy. In 1909, a missionary of the North Presbyterian Church in USA, established Sangaewon and Sangae church, and officially opened in 1910. And next year, this operated by missionari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and the facilities have been expanded since 1912 when Mackenzie was appointed as the director. The patients here were "isolated", but they lived in a small community, just like the general community. This Hospital became popular, there was a constant procession of patients around here to receive treatment. But the hospital couldn't accommodate all the lepers. Therefore, they had to live in a community near the hospital or as a vagrant leper. Busan citizens were anxious and terrified as they looked at the patient, who was subject to social hatred. Throughout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relocation of hospitals and a strong crackdown on vagrant lepers were required. However, the Busan Government did not have enough budget to expand the facilities of the hospital. It also stopped short of taking disciplinary measures against patients with vagaries and leprosy after cracking down on them. However, Sorokdo Jahye Hospital was expanded and some patients were repatriated there, but no other measures were taken. In this situation, prejudice, discrimination, and hatred of leprosy continued to deepen, and this negative perception continued until relatively recently after liberation.

      • KCI등재

        일제 강점기 부산나병원에 대한 연구(Ⅰ) : 개원과 운영주체의 변경 그리고 수용 나환자 변동을 중심으로

        배대호(Bae, Dae-Ho) 부산경남사학회 2021 역사와 경계 Vol.121 No.-

        부산나병원은 1909년 대한제국 시대 개원하여 일제 강점기인 1941년 폐원한 한국 최초의 나병 전문 치료기관이다. 이 글은 연작으로 계획 중인 ‘일제 강점기 부산나병원에 대한 연구’의 첫 논문으로 나병원의 설립, 운영 주체의 변경 그리고 수용 나환자의 변동을 먼저 다룬다. 특히 부산나병원을 폐원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작성된 『처분관계문서철』에 기재된 정원, 현원, 입원, 퇴원, 사망, 도주, 기타, 사망률 등의 수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이상의 숫자는 부산나병원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후 살펴볼 이 병원의 예산·토지·시설·운영조직·부설 교육기관·위성 나환자촌·기념비 건립, 폐원 등을 이해하는 기본 자료로도 활용할 예정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산나병원은 개원할 때부터 나환자들이 장기간 거주하면서 치료와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둘째, 1912년 이후 운영을 맡은 호주장로교는 제한된 예산과 인력으로 경남이라는 넓은 지역선교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산나병원에 대한 교단차원의 적극적 지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호주장로교 선교사 매견시는 1938년까지 관리자로서 부산나병원의 발전을 이끌었다. 셋째, 일제에 의해 작성된 『처분관계문서철』의 나환자 현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일제는 현원보다 정원을 크게 설정하여 부산나병원이 나환자를 충분히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부산나병원 강제 폐원에 대한 정당성을 일부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현원을 통해서는 부산나병원의 변화를 도약기, 확장기, 안정기로 구분해 보고, 변화 과정도 살펴볼 수 있었다. 입퇴원 현황에서는 ‘자발적 교체(voluntary exchanges), ‘재입원(readmission)’ 등 나병원 운영의 특징이 반영된 다양한 제도를 검토해 보았다. 부산나병원의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는 치료제인 대풍자유에 반응한다고 믿었던 경증환자 위주의 입원이 가지고 온 결과였다. Busan Leper Hospital was opened in 1909 during the era of the Korean Empire and closed in 1941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article is the first thesis of the ‘A study on Busan Leper Hospital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hich is planned as a series. In particular, in the process of closing Busan Leper Hospital, the figures such as capacity, current hospitalization, hospitalization, discharge, death, flight, etc., etc. recorded in 『Documents on Disposal Relations』 written by the Japanese Empire were critically reviewed. The above numbers are meaningful in and of themselves in that they reflect changes in Busan Leper Hospital. It will also be used as a basic material for understanding. The main points mentioned in the text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from the time of opening, Busan Leper Hospital was designed so that lepers could live for a long time and live together with treatment. Second, the Presbyterian Church in Australia, which was in charge of operation since 1912, failed to provide active support for Busan Leper Hospital at the denomination level in a situation where it had to do missionary work in a wide area called Gyeongnam with a limited budget and manpower. However,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ary Mae Gyeon-shi led the development of Busan Leper Hospital as a manager until 1938. Third, it was necessary to critically review the status of lepers in 『Documents on Disposition Relations』 written by the Japanese. By setting the size of the garden larger than the current one, it seemed that Busan Leper Hospital did not sufficiently accommodate lepers. Through this, it seems that it was used as a device to give the legitimacy of forcibly closing the Busan Leper Hospital. Through Hyunwon, I was able to classify the changes of Busan Leper Hospital into the leaping phase, expansion phase, and stabilization phase, and also examine the process of change. In the status of hospitalization and discharge, we reviewed various systems that reflect the characteristics of Leper Hospital operation, such as ‘voluntary exchanges’ and ‘readmission’. The sharp decrease in the death rate at Busan Leper Hospital was the result of hospitalization centered on mild patients who believed they would respond to the treatment, Chaulmoogra.

      • KCI등재

        호주장로교의 부산지역 의료선교 : 맥켄지의 부산나병원 운영과 부산부의 나환자 대책을 중심으로

        이가연(Lee, Ga-Yeon) 부산경남사학회 2021 역사와 경계 Vol.121 No.-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선교지 분담협정에 따라 부산·경남 지역에서 활동 하면서 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전도, 교육, 의료, 구제, 자선사업 등을 시행하였다. 특히 1902년부터 시작한 의료선교는 당시 조선인들이 서양과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일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이 관심을 가진 의료선교 분야는 나환자들의 구료 활동이었다. 1909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어을빈이 현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상애원(부산나병원)과 상애교회를 건립하였고 1910년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이듬해부터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이 이 곳을 인계받아 운영하였는데, 1912년 맥켄지가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시설이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이곳의 환자들은 ‘격리 수용’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서 일반 사회와 다름없는 작은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맥켄지의 구료 활동과 부산나병원의 상황이 소문이 나자 이 부근에는 치료를 받기 위한 환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이 모든 나환자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거나 부랑 나환자로 살아가야만 했다. ‘문둥이’라고 불리며 공공연하게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 된 나환자 및 이들의 집단 거주를 바라보는 부산부민들의 시선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부산나병원의 이전, 부랑 나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 요구는 일제강점기 내내 끊임없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부산부에서는 부산나병원의 시설을 확충할만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부랑 나환자에 대해서도 단속 후 훈방 조치를 하거나, 소록도 자혜의원이 확장되고 나서는 그곳으로 일부 환자를 송환하는 것 외에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환자에 대한 편견, 차별, 혐오는 계속해서 깊어져 갔고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해방 이후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The Australian Presbyterian Church"s medical mission, which began in 1902, eliminated the Koreans had against Christianity at the time. In particular, they were interested in treating leprosy. In 1909, a missionary of the North Presbyterian Church in USA, established Sangaewon and Sangae church, and officially opened in 1910. And next year, this operated by missionari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and the facilities have been expanded since 1912 when Mackenzie was appointed as the director. The patients here were "isolated", but they lived in a small community, just like the general community. This Hospital became popular, there was a constant procession of patients around here to receive treatment. But the hospital couldn"t accommodate all the lepers. Therefore, they had to live in a community near the hospital or as a vagrant leper. Busan citizens were anxious and terrified as they looked at the patient, who was subject to social hatred. Throughout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relocation of hospitals and a strong crackdown on vagrant lepers were required. However, the Busan Government did not have enough budget to expand the facilities of the hospital. It also stopped short of taking disciplinary measures against patients with vagaries and leprosy after cracking down on them. However, Sorokdo Jahye Hospital was expanded and some patients were repatriated there, but no other measures were taken. In this situation, prejudice, discrimination, and hatred of leprosy continued to deepen, and this negative perception continued until relatively recently after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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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부산의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 현황

        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101 No.-

        본 논문은 그 동안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던 식민지시기 부산지역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의 현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경남의 수산가공업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192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하여 1937년이 되면 32%를 차지했다. 이후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갖는 비중은 1940년을 전후해서 14%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런 하락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전반기 부산의 전체 수산어획고 중에서 수산가공품 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26% 수준을 유지할 만큼 수산가공업은 수산업 관련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한편 부산의 수산가공업 사업체들을 보면 공장은 1910년대와 1920년대, 주식회사와 합자 · 합명회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수산가공업와 관련된 수산조합은 1930년대에 각각 많이 세워졌다. 공장 형태의 수산가공업 회사로서는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 주력을 이루었다. 수산가공품 생산액의 각 시기별 민족간 비율을 보면 1920년대 전반까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산액 비율이 63% 대 37%로 일본인들이 앞섰다. 그러나 1935년이 되면 민족간의 격차는 일본인 53% 대 조선인 47%로 감소하고 있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의 수산가공업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수산가공업 공장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 것은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었다. 재제염공장은 영도에 많이 밀집하였는데, 영도에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일찍부터 생겼으며 조선업 관련 주물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산가공품 중에서 절반을 차지한 것은 통조림과 어묵 ‧ 튀김 ‧ 포(脯) 등이었다. 시기별로 보면 1920년대는 통조림이 1930년대는 어묵 · 튀김 · 포(脯) 등의 생산이 많았다. 이들 품목 모두 일본인들이 많이 생산하였으며 조선인들의 경우는 우뭇가사리(寒天)를 중심으로 해조류 생산이 월등히 앞섰다. 이들 해조류는 부산 영도와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제주해녀들이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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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부산지역의 수산물 어획고와 수산업인구 동향

        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99 No.-

        식민지시기 부산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수산업은 그동안의 선행연구에 의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산지역 수산업의 전반적인 것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결과 각 시기별 수산물의 어획량과 주요 어종, 수산업인구의 민족별 현황, 수산가공업과 수산물의 유통 등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는 우선적으로 부산지역 수산물의 생산과 수산업인구의 동향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하였다.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단일 어항으로서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특히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물 어획고는 그 비중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부산의 수산물 어종은 전국적으로 많이 잡혔던 어종과 차이가 있었다. 특히 상어, 해삼, 우뭇가사리 등이 많이 어획되었는데, 상어와 해삼은 전근대시기부터 한중일 삼국간 교역되고 있던 다와라모노(俵物)의 유통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시기별 차이는 있었으나 조선인이 54~78%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총어획고에서 민족별 어획고를 보면, 일본어민의 어획고는 80~90%였고 조선어민의 어획고는 10~20%에 불과하였다. 총어획고에서 드러난 이러한 불균형은 당시 경남의 상황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편차가 컸다. 한편 1937년 이후 부산거주 어민(조선인+일본인)의 어획고 중 경남에서의 어획고는 감소한 반면에 경남 이외 지역에서의 어획고는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 부산거주 일본 어민들의 어로활동이 부산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본고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부산의 수산업에서 일본어민과 조선어민의 경제적 간격이 식민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39~1940년 경남의 수산업인구가 정체하고 있을 때 부산의 수산업인구는 증가함을 보였다. 이는 식민지 말기에도 수산업이 부산 경제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The following are the key findings of this paper. Firstly, in Gyeongnam, Busan"s amount of catch represented approximately 10%(refer to <graph 3>) in the early 1920"s, and this increased incrementally to show 43.8% in 1939, and 37.7% in 1940. Through this, it could be seen that during the colonial period Busan"s fishery industry had gained recognition not only in Gyeonnam but also across the whole nation. Second, the trend of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The population in Busan"s fishery industry showed a different trend from that of the whole nation and Gyeongnam. First, considering the entire population of Busan"s fishery population, it increased until 1932, decreased during 1933-1939, and increased in 1940. Such changes in population in Busan"s fisheries industry showed a correlation with the changes in Chosun workers in the fisheries industry. That is, the overall increase/decrease of population of Busan"s fisheries industry was the main cause of the increase/decrease of the entire population of Chosun"s fisheries industry. Meanwhile,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creased until 1932 and later showed a falling trend. The decrease of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Busan in 1932 showed different results from Japanese fisheries population in the whole nation which began to fall from 1926. Thirdly, the trend of nationality of workers in Busan"s fisheries production. Although there are some differences for each year, in average Japanese fishers contributed to 80-90% of the entire fisheries production and the rest, and Chosun fishers contributed to 10-20%. Also, for Japanese fishers in regions aside from Busan, there were more Japanese fishers who came from Japan than Japanese fishers from fishing village in Gyeongnam. Fourth, the fisheries production trend in Busan. The ratio of fisheries production amount between Japanese and Chosun people was 63% to 37% by the early 1920"s. However, in 1930, the Japanese captured the industry, showing a shift in ratio to 91% to 9%. Afterwards Chosun people"s contribution rebounded; in 1933 the ratio became 65% to 35%, and in 1935 53% to 47%. However, in the late period of the colonial period, Japanese fisheries companies continued to grow, so it is likely that Chosun people"s contribution to production amount had decreased again. Fifth, distribution of fisheries products. Busan was the largest export port during the colonial period. A large part of the various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were being distributed through Busan Fisheries market which was run by Busan Fisheries Corporation. In the 1910"s, among the fisheries products that were collected in Busan, 20% were exported and 80% were distributed to the Japanese residing in the Korean Peninsula. The fisheries products were being exported to Osaka, Gobe, Fukuoka, Okayama, and even to Shanghai, Tianjin, Dalian, and other regions in China as well. In particular,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amount of fisheries being exported to China and Manju increased. In regards to fisheries products consumption in Busan, the products were mostly distributed through public markets authorized by the Busan metropolitan government(釜山府). However, in considering the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across multiple aspects, it is deemed that Chosun people"s consumption of fisheries products in Busan was low compared to that of other regions.

      • KCI등재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의 부산 숙영 시행과 지역 변화

        김윤미 부산경남사학회 2018 역사와 경계 Vol.109 No.-

        The modern history of Korea was a period of war. The war did not take place directly on the Korean Peninsula, but it played a role in the rear for the Japanese war. How did this affect the Korean Peninsula? The answers under the subjects of Japanese army and logistics, military and region, war and transportation will be discovered. This thesis determined the area of Busan in the perspective of war and army. Japan opened Gyeongbu Line and Gyeongui Line in 1905, and used the railroad of Joseon as a means of military transportation. Despite the difference in scale and mean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continued until 1945. Busan also served as military camps. Camp is a place where the troop takes a rest or gathers in the rear to prepare for future movement. Japan started the dispatch of Siberian troops in 1918, Manchurian Incident in 1931, Sino-Japanese War in 1937, and Asia-Pacific War in 1941, and implemented a massive emergency transportation. All the soldiers of considerable size passed through Busan. As it was unable to find any data from the 1940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immediately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was considered the research period and subject. This is because transportation reports are still remaining that recorded the Japanese army's military quarters, food service, hygiene, military horse, and support of local people in September 1937. As a result, many influences to the region by the army were identified, including the social economy of Busan, lifestyles of residents and urban planning. 부산은 일본 군사수송의 중계지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개월간 3차례에 걸쳐 병력 20.9만명, 말 4.5만필, 후방부대, 물자 등을 긴급수송 했다. 부산에서 수송을 총괄한 것은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 부산지부였다. 부산병참지부는 부산 내 각 단체들과 숙영 전반의 지원을 협의했고, 부산부의 전 일본인 가옥을 대상으로 군인들을 숙영시켰다. 급히 마계장도 설치하여 군마 숙영도 시행했다. 이 글은 군의 숙영지가 없는 지역에 어떻게 군인과 군마가 숙영하고, 군사수송은 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부산병참지부의 보고서를 토대로 군사수송과 지역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안을 주목했다. 첫째는 대규모의 부대가 부산에 숙영하면서 이들을 통제할 장치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지역의 사회적 문제로 내재되어 있었다. 둘째는 소비가 확대되면서 물가가 급등했고, 부산병참지부는 부산부청과 함께 물가를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셋째는 부산병참지부의 대규모 예산이 부산부민과 부산 지역에 직접 지출되면서 지역 경제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넷째는 군사수송을 우선하여 보통열차의 운행 횟수 감소, 철도 화물취급 제한, 선박의 부두 사용 통제 등의 일련의 제제는 상업 도시인 부산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다섯째는 부산병참지부에서 향후 숙영지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것은 1937년 부산시가지계획 시행과 1940년대 부산에 들어선 군사시설과 무관하지 않다. 여섯째는 민가숙영지 설정시 제외된 조선인들에게는 지역의 경제 활성화의 영향이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KCI등재

        일제강점기 부산부 하수도 건설사업의 진행과정과 한계(1929~1932)

        박민주(Park, Min-Ju)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98 No.-

        부산에서는 1929년부터 ‘제1기 부산 하수도 건설사업’(이하 제1기 사업)이 진행되었다. 제1기 사업은 1927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부산부협의회에서 50만 5천 원 규모의 5개년 공사를 내용으로 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1929년에 총 공사비 26만 원의 3개년 사업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사업구역은 대창정,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좌등정, 영정이었다. 이들 지역은 일본인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었으며, 상업 중심지였다. 사업 내용이 확정된 이후, 192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본정,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영정, 좌등정, 대창정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1기 사업은 1932년 종료되었고, 소요된 공사비는 25만 6500원이었다. 부산부는 사업 종료 이후 독자적인 세출 항목으로 「하수비(下水費)」를 편성하여 하수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제1기 사업은 이전의 하수도 공사와 마찬가지로 민족 차별적인 성격을 띠어 조선인 거주 지역을 제외한 채 이루어졌다. 조선인들은 부산에서 일본인 거주지 외곽에 주로 거주하였다. 이들 지역은 낙후된 지역이었으며, 도시 기반시설건설에서도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적인 시정(市政)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 표출의 한 사례가 1934년 부산부회에서의 조선인 의원 사퇴였다. 1934년 부산부회에서 조선인 의원들은 조선인 지역의 위생 시설 확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부회 내에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지지 못했고, 의원들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 의원 사퇴는 이후 부산부의 설득에 의해 끝내 철회되었지만, 부산의 조선인들이 도시 기반시설 정비를 절실하게 원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In 1929, Busan initiated the First Phase Project for Busan Sewerage System Construction (hereafter referred to as the FPP). The FPP had been discussed at Busan-bu Council since 1927 and was planed to be proceeded with the cost of 505,000 won for five years. The final decision was made in 1929 by making the FPP as a 3-year-long project with the cost of 260,000 won. The project area included Daechangjeong, Bonjeong,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Jwadeungjeong, and Yeongjeong. These regions were commercial centers populated by many Japanese people. The FPP was initiated in 1929. The construction works were carried out with Bonjeong followed by Seojeong, Bupyeongjeong, Seobupyeongjeong, Yeongjeong, Jwadeungjeong, and Daechangjeong in order. The total cost of construction amounted to 256,500 won. As soon as the project was completed, Busan-bu began to manage the sewage system systematically by organizing independent expenditure items. Meanwhile, the FPP had an ethnic disclamatory character with exclusion of Koreans’ residential areas from it, as in the cases of the earlier swage system construction projects. In 1934, a Korean representative of the Busan-bu council resigned, which was one of the cases where Koreans’ grievances were expressed against the ethnic disclamatory administration at that time. In the same year, the Korean representatives at the Busan-bu council were demanding for an expansion of the sanitary facilities in Koreans’ residential areas. However, this demand was dismissed, and the representative resigned from the council in protest. The representatives withdrew their resignations by persuasion from the Busan-bu authorities, but this case was a striking example demonstrating that the Koreans in Busan-bu at that time desperately wanted the maintenance of the urban infrastructure.

      • KCI등재

        식민지시기 부산지역 주조업(酒造業)의 현황과 의미

        김승 부산경남사학회 2015 역사와 경계 Vol.95 No.-

        The Korean liquor industry underwent significant changes while the country experienced colonial rule in the modern er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liquor industry in Korea was very important, accounting for 19% of industrial production in 1929. In particular, the liquor tax made up only 1.8% out of the tax revenues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llected in 1910. The liquor tax accounted for 29.5% of the total tax revenue and became the leading tax source, surpassing the land tax in 1934. As such, the liquor industry was very critical not only for the industrial production but for financial management of the colonial authority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liquor industry developed by the Japanese in Busan started in 1883 when Imanish(今西峰三郞) began producing Cheongju(淸酒), Japanese liquor.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Japanese liquor industry in Korea. In 1912, there were 22 stores related to liquor production that produced liquor, and soy and sesame oil. Almost 8,000 seoks and 40 different types of grains were used for the liquor industry. Products made by these producers were sold through coastal islands in southern part of Korea and several ports in northern part of Korea and sold to as far as Woongki(雄基). 4 out of the 10 producers were founded before 1900 and the remaining 6 were established between 1904 and 1911. 4 of these producers were located in Bupyeongjeong(富平町) near the Bupeyong Market(富平市場) today and 2 were in Seojeong(西町) which is Shinchangdong(新昌洞) today. The remaining liquor producers were located in Chojangdong(草場洞), Busanjin(釜山鎭), Choryang(草梁), and Bosudong(寶水洞). Except for Busanjin(釜山鎭), all the other were located within Choryang Waekwan(草梁倭館) during the Chosun Dynasty and the Japanese Concession(日本專管居留地) after the port was opened. The brief history of the Japanese who operated the liquor producers in Busan and their sons who succeeded in family business shows that they were not only business people but representatives of Japanese Residents Association(釜山居留民團) and Busan Board of Trade(今西峰三郞・福田增兵衛・松岡甚太) and Busan Council(釜山府協議會), which suggests they were community leaders who had great social and political influence in Busan. First, the distillers accounted for 13.6% in 1919, 18% in 1929 and 23% in 1933 in the total number of plants in Busan. As indicated, the number of distillers was on the rise. Second, capital size of the distillers has an important implication. The capital share of the distillers jumped to 6% in 1926 and further to 21% of the total industrial capital in Busan in 1929. This large share suggests the liquor business and the distilling industry attracted high capital investments. In 1929, The gap in the capital size between the two types of business had widened since 1929, which also confirms that the distilling industry in Busan was focused on the liquor business. In addition, Japan had been more active in making an entry into the continent since the middle of the 1930s. This entry helped the heavy chemical industry in Busan to grow rapidly. Under this circumstance, the distilling production output in Busan accounted for an average of 7% of the total industrial production output in the city, which confirms that the distilling industry focusing on liquor production was critical business until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Cheongju(淸酒) is Japanese liquor. From the open of the port to the end of the colonial rule, Cheongju was the leading liquor of the liquor business. Busan became the center of Cheogju production because of its geographic proximity to Japan. As the city is located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 which is close to Japan, its climate conditions are similar to those of Japan. The Japanese produced Japanese liquor in Choryang Waekwan(草梁倭館) located in the city during the Chosun Dynasty... 일제하 일본인들에 의해 근대식 주조업이 확산되면서 한국인의 전통적 민속주들은 많이 사라지게 되며 그 결과 현재와 같은 소주 중심의 주류문화가 정착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일제하 주조업에 대한 연구는 한국인의 고유한 술맛들을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일제하 주조업은 산업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조업 연구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부산은 일제하 “반도 청주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청주를 비롯한 각종 ‘술의 도시’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산지역 주조업에 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점들을 염두하면서 근대 주조업의 발상지였던 부산에서 생산된 청주, 소주, 탁주 등을 중심으로 각 주류의 생산 현황과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부산에서 생산된 청주는 1920년대 중반까지 전국 1위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부산의 청주는 1930년대 들어와서도 마산과 함께 1,2위를 다투며 여전히 그 명성을 유지하였다. 소주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926년 여름 부산의 마스나가양조소(增永釀造所)에서 생산한 신식소주(주정식소주=희석식소주)는 국내 소주시장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여기에 1929년부터 신식소주를 대량 생산하게 되는 대선양조주식회사가 부산에 창업하면서 부산은 평양과 더불어 국내 소주시장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편 탁주는 청주, 소주 등과 달리 대부분 조선인 토착자본가에 의해 생산되고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부산과 함께 동래지역의 탁주 현황을 살펴보고 탁주 제조업자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조선인 탁주 제조업자들의 동향을 파악하였다. 나아가 그 동안 일제하의 주조업과 관련하여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문제, 즉 일제하 탁주 제조업자들이 해방 이후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하는 의문에 일정 정도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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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의 부산 숙영 시행과 지역 변화

        김윤미(Kim, Yun-Mi) 부산경남사학회 2018 역사와 경계 Vol.109 No.-

        부산은 일본 군사수송의 중계지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개월간 3차례에 걸쳐 병력 20.9만명, 말 4.5만필, 후방부대, 물자 등을 긴급수송 했다. 부산에서 수송을 총괄한 것은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 부산지부였다. 부산병참지부는 부산 내 각 단체들과 숙영 전반의 지원을 협의했고, 부산부의 전 일본인 가옥을 대상으로 군인들을 숙영시켰다. 급히 마계장도 설치하여 군마 숙영도 시행했다. 이 글은 군의 숙영지가 없는 지역에 어떻게 군인과 군마가 숙영하고, 군사수송은 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부산병참지부의 보고서를 토대로 군사수송과 지역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안을 주목했다. 첫째는 대규모의 부대가 부산에 숙영하면서 이들을 통제할 장치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지역의 사회적 문제로 내재되어 있었다. 둘째는 소비가 확대되면서 물가가 급등했고, 부산병참지부는 부산부청과 함께 물가를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셋째는 부산병참지부의 대규모 예산이 부산부민과 부산 지역에 직접 지출되면서 지역 경제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넷째는 군사수송을 우선하여 보통열차의 운행 횟수 감소, 철도 화물취급 제한, 선박의 부두 사용 통제 등의 일련의 제제는 상업 도시인 부산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다섯째는 부산병참지부에서 향후 숙영지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것은 1937년 부산시가지계획 시행과 1940년대 부산에 들어선 군사시설과 무관하지 않다. 여섯째는 민가숙영지 설정시 제외된 조선인들에게는 지역의 경제 활성화의 영향이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 modern history of Korea was a period of war. The war did not take place directly on the Korean Peninsula, but it played a role in the rear for the Japanese war. How did this affect the Korean Peninsula? The answers under the subjects of Japanese army and logistics, military and region, war and transportation will be discovered. This thesis determined the area of Busan in the perspective of war and army. Japan opened Gyeongbu Line and Gyeongui Line in 1905, and used the railroad of Joseon as a means of military transportation. Despite the difference in scale and mean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continued until 1945. Busan also served as military camps. Camp is a place where the troop takes a rest or gathers in the rear to prepare for future movement. Japan started the dispatch of Siberian troops in 1918, Manchurian Incident in 1931, Sino-Japanese War in 1937, and Asia-Pacific War in 1941, and implemented a massive emergency transportation. All the soldiers of considerable size passed through Busan. As it was unable to find any data from the 1940s, the military transportation immediately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was considered the research period and subject. This is because transportation reports are still remaining that recorded the Japanese army"s military quarters, food service, hygiene, military horse, and support of local people in September 1937. As a result, many influences to the region by the army were identified, including the social economy of Busan, lifestyles of residents and urban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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