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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水操」에 나타난 李舜臣 戰術 -기동항해(尖字陣)와 전투진형(鶴翼陣)을 중심으로-

            장학근(Jang Hak-geon)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9 이순신연구논총 Vol.- No.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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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은 조선이 건국 이후 처음 맞는 국제 전쟁이었다. 일본 수군이 수십 혹은 수 백 척의 선단을 이루고 침략했음으로, 조선수군도 상응한 선단을 동원하여 대처해야 했다. 이런 변화를 예측하고 혼신을 다해 전비태세를 갖춘 조선의 수군지휘관이 바로 이순신이다. 그는 중국의 선진 병법과 조선 전통의 진법을 응용해 기동항해 전술인 첨자진(尖字陣)을 창안했고, 우리 함포의 단점인 사격 공백을 줄이기 위해 지상전 전술인 학익진(鶴翼陣)을 해전의 전술로 응용했다. 첨자진(尖字陣)의 전술적 장점은 항해 중 지휘통신이 용이하며, 기동선단의 군선 증감이 쉽고, 항해 중 적을 만나면 곧바로 전투체제로 전환이 용이한 것이다. 해전술로서 학익진의 장점은 횡렬로 벌려선 군선의 앞 열이 함포를 발사하면, 대기하고 있던 뒤 열의 군선이 앞으로 나와 화력을 구사하여 사격의 공백을 최소화하고, 공격을 진행하면서 반원형으로 공격대형을 만들어 명 중률이 낮은 아군 측 총통의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첨자진과 학익진을 사용해 임진년(1592년) 한 해 동안 4차 출전하여 10여 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부산의 적 선단 규모가 500여 척이라는 원균의 통보를 받고 그가 지휘하고 있는 군선 수가 부족함을 절감했다. 그는 부족한 군선 수를 이억기 함대와 합동함대를 구성해 보완하려 했다. 그러나 이억기 함대의 도착이 지연되고 원균의 다급한 지원요청이 거듭되자 이순신 예하 군선(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만으로 기동함대를 구성하여 첫 출전을 단행했다. 다행히 일본 수군은 일본지상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선 수군의 존재를 인식치 않고 수십 척 씩 무리지어 조선 연해를 약탈해 전리품을 작만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일본수군이 전투체제를 갖추기 전에 일본선박을 공격해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이룩했다. 이순신 함대의 2차출전은 일본군의 수륙병진(水陸竝進) 전술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 일본 군부는 속전속결로 조선의 중요도시를 점령한 것과 같이 그들의 수군도 조선의 포구를 점령하면 그 일대 해역이 그들의 통제에 놓일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군부의 지시에 따라 일본 선단은 무리지어 남해안 포구로 진입해 선박을 정박시킨 후 포구의 지상과 정박한 선상에서 조총 으로 ‘선단 엄호사격 망'을 구축해 조선 함선의 접근을 저지하였다. 이것은 이순신함대의 1차 출전 때 이순신 함대에게 패전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이순신은 불리해진 전장 환경을 거북선을 이용해 극복했다. 즉 적의 선단엄 호사격으로 판옥선이 적 선단으로 접근할 수 없자,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진 시켜 적 지휘선을 격파해 적의 지휘통신을 마비시켰다. 그 다음 판옥선을 출전시켜 나머지 적선을 격파했다. 이순신은 이와 같은 전술로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순신의 연이은 해전승리로 일본지상군은 군수품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본지상군이 더 이상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없게 되자, 조선에 강화회담을 제의하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을 강화하여 제해권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하게 되었다. 이 지시에 따라 지상전에 참전하고 있던 세 명의 수군장수가 일본 수군에 복귀하여 조선수군과 대항체제를 구축했다. 이순신은 3차 출전해 일본수군과 일전을 전개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협수로에 있던 일본선단을 한산도 내해로 유인하여 협공전술로 적 선단을 격파했 다. 영의정 유성룡은 “한산대첩은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마비시켜, 충청 도와 전라도가 보전되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세 명의 일본 수군장이 패전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수군과 더 이상 해전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순신은 3차 출전에서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 장악했다. 반면 제해권 회복을 목표로 했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 함대 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되어 일본 지상군은 전투를 중단하고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일본 수군은 해전을 기피해 그들의 군선은 부산포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 같은 일본군의 변화를 목격한 조선 조정은 일본 침략군이 조선에서 퇴각할 것으로 추측하여 이순신에게 해상퇴로를 차단해 일본군이 일본 본토로 퇴각 할 때 해상에서 섬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정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4차 출전하여 부산포의 일본선단을 공격했다. 조선의 합동함대는 적선 100척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을 사살했으나 일본 수군의 해전 기피로 부산포의 일본군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가덕도에서 몰운대까지 군함을 벌려 세워 군함시위를 함으로써 일본군의 해상 활 ounded. As Japanese navy invaded with hundreds of ships in group, Korean navy had to mobilize ships for countering a strong enemy in quantity. One of admirals in Korean navy, Yi Sun-Sin(East Jeolla region), anticipated war and prepared operation readiness by all means. He studied traditional Chinese and Korean naval formation and invented the Chumjajin(Delta formation) as an maneuver and navigation tactic. and applied the Hagikjin(Crane-wing formation), an army tactic in origin, for naval battle to be able to reduce time interval between salvo fire at sea. Tactical advantages of Chumjajin are command and control in cruise, flexibility in size of maneuver fleet, ease to convert combat formation. Tactical advantages of Hagikjin, as a naval tactics, are using multi-line abreast and move forward alternatively to provide continuous fire support with long-range cannon. And both line proceed to encircle enemy formation to increase hit probability greatly. Admiral Yi Sun-Sin employed Chumjajin and Hagikjin formation and won ten naval battle during four sorties in 1592. Followings are process of those sorties in detail. Admiral Yi Sun-Sin recognized his inferiority in number of warships from information sent by Admiral Won Gyun(West Gyoungsang region) that Japanese navy had strong five hundreds warships. He want to build combined fleet by joining Admiral Yi Uk-Gi fleet(West Jeolla region) to be able to compete strong Japanese fleet. Due to delay of Admiral Yi Uk-Gi s arrival, Admiral Yi Sun-Sin had to sortie with only 24 warships (plus 61 supporting small ships) because of demanding emergency call from Admiral Won Gyun in frontal sea. Fortunately, Japanese navy became arrogant with their overwhelming land war victory and indulged in robbery, killing, rape, and neglected Korean navy. Admiral Yi Sun-Sin gained one-sided victories at Okpo, Happo, Jeokjinpo against scattered and unprepared Japanese navy in initial stage. Admiral Yi Sun-Sin s second sortie was aimed to disrupt enemy s army-navy parallel advance strategy. Japanese military leaders thought that once they conquered major ports just like they had occupied major cities, eventually the whole area would fall under their control. Japanese navy consisted flotillas and anchored at major ports in southern area, and arranged escort network for convoy armed with musket gun. That was Japanese response not to repeat failures during Admiral Yi Sun-Sin s first sortie. Admiral Yi Sun-Sin s counterpunch was the famous Turtle ship to overcome

          • 이순신을 폄훼하는 ‘원균 명장론'의 실체

            송우혜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6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학술세미나 자료집 Vol.8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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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이순신을 폄훼하는 풍조의 기본 논리가 되고 있는 ‘원균 명장론'은 두 장수의 육진 시절에 대한 역사의 왜곡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육진 시절의 두 장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현재 오해와 왜곡이 만연한 상태여서, 당시 원균은 빠르게 승진하던 명장이었던 반면 이순신은 미관말직으로 전전하던 이름 없는 무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역사의 실체와 전혀 다르다. 실제로는 육진 시절부터 이미 이순신은 원균보다 빠르게 승진하고 있던 무장이었다. 특히 이순신은 국가를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선조 16년(계미년)의 니탕개란 진압전에서 적군의 수뇌부 3인 중 제2인자였던 우을기내를 유인하여 처단함으로써 전쟁 종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탁월한 무장이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앞두고 불온한 일본측의 전쟁 움직임에 대응하여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의 요청에 의해서 조정의 대신과 중신들이 뛰어난 무장감을 추천할 때, 이순신은 현직 병조판서인 정언신과 이조판서 이산해에 의해서 추천되었지만 원균은 아무에게서도 추천받지 못했다.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역사적 근거로 삼는 것은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선조 29년 10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나온 조인득의 발언으로서 “소신이 일찌기 종성에서 그(원균)를 보았는데, 비록 만군(萬軍)이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뜻이 있었고 행군이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雖有萬軍, 有橫突之意, 行軍甚朴實).”라는 말인데, 그것을 근거로 “원균은 만군 앞을 횡돌하던 맹장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록의 원문에 있는 ‘뜻'을 ‘행동'으로 바꿔치기한 오역에 따른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원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자가 원균이 육진 시절에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음을 명확하게 증언한 사료도 있다. 김응남이 원균을 위해서 선조에게 건의한 것이 『선조실록』 선조 29년 5월 7일조에 실려 있는데, “원균은 보장(步將:육군의 장수)이 아니라 수장(水將:수군의 장수)의 재주를 지닌 무장이니 수군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원균 명장론'은 이처럼 부당한 역사 왜곡에 의해 날조된 허구일 따름이다.

          • 첨단 조선 수군과 이순신 제독의 혁신

            임원빈(Lim, Won-Bin)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7 이순신연구논총 Vol.- 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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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경쟁력의 실체를 첨단 수군과 이순신의 혁신 역량의 결합에서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Ⅱ. 첨단 조선 수군'에서는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드러난 막강한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까지 조선 수군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병력, 무기, 함선의 준비 측면에서 개관해 보았다. 이를 통해 수적 측면에서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지만 판옥선, 거북선으로 대표되는 조선 함선의 질적 전투력은 일본의 함선을 압도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수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열세의 함대가 아니라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질적으로는 우세한 함대를 이끌어 모든 해전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무도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우리의 역사 인식은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지상군의 경우는 준비가 미흡해서 개전초기부터 곤욕을 치렀지만, 수군의 경우는 나름대로 착실한 전쟁 준비가 있었다는 역사인식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Ⅲ 이순신의 혁신'에서는 당파전술, 거북선의 돌격전술, 학익진 전술, 이순신의 해전 전술 종합 등 이순신 혁신의 성과를 해전 전술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당파전술은 충돌전술이 아니라 함포 포격전술이었고, 거북선의 돌격전술은 근접포격전술이었으며, 학익진 전술은 집중포격전술임을 밝혔다. 거북선의 근접포격전술과 학익진을 활용한 집중포격전술은 모두 함포의 명중률을 향상시키기 위해 창안 한 이순신의 혁신의 산물이었다. 이순신은 활과, 화공(火攻)을 중심으로 한 재래식 전술과 신무기인 천자총통, 지자총통을 중심으로 한 첨단 전술을 적절히 결합하여 조선 수군을 당대 최고의 질적 전투력을 지닌 수군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This paper aims to show the realities of the Chosun Navy s competitiveness through its high-tech navy and the Admiral Yi Sun Sin s capacity for reformation. The strength of the Chosun Navy in the early Naval Battles of the Imjin Waeran was examined In II. Chosun s High-Tech Navy . And the up to the point where the Imjin Waeran began, the development of the Chosun Navy was analyzed through its military forces, weapons, and readiness of the warships. Through this analysis, it was shown that though the Chosun Navy was heavily outnumbered compared to the Japanese Navy, the Chosun Navy was able to overcome its numerical inferiority through its high quality warships such as the Pan-Ok-Sun and the Turtle Ship. Admiral Yi was able to lead his fleet to victory in all of the naval battles as he had a higher quality fleet compared to the Japanese Navy. The common view that there were no preparations prior to wars need to be revised based on this. At the beginning of the war, the ground forces were suffered due to the lack of preparation, but the navy was well-prepared on its own. In III. Admiral Yi s Revolution , from the perspective of naval tactics, Admiral Yi s revolutionary achievements were examined in terms of the Dangpa(당파) tactic, the Turtle Ship s Dolgyeok(돌격) tactic, the Hakikjin(학익진) tactic, and Admiral Yi s combined naval tactics, and more. Through this examination, it was revealed that the Dangpa(당파) tactic was naval gun bombardment, not a collision tactic, while the Turtle Ship s Dolgyeok(돌격) tactic was a proximity firing tactic, and the Hakikjin(학익진) tactic was a saturation bombing tactic. The Turtle Ship s proximity firing tactic and a saturation bombing tactic s use of Hakikjin(학익진) was all Admiral Yi s innovations to increase the accuracy of the naval guns. Admiral Yi, with the use of arrows and fire strikes, transformed Chosun s navy into a superior state by adequately merging tactics of conventional tactics and new weapons such as the Cheonjachongtong(천자총통) and Jijachongtong(지자총통).

          •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의 부산진공작전

            송우혜(Song, Woo Hye)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7 이순신연구논총 Vol.-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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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이순신에 관한 역사 서술 중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술 중 하나가 “선조 30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부산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진공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이순신이 지녔던 진정한 리더십의 실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확대 해석되면서 크게 곽광받고 있다. 이순신은 부당한 것이면 임금의 명령까지도 거부할 정도로 소신이 확고했던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매우 터무니 없는 오해 내지는 역사의 왜곡에 불과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진행되고 있던 화의가 깨어진 결과 일본군이 재침공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할 무렵에 선조와 조정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부산진공작전을 명했었고, 이순신은 그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성공했다. 이순신은 정유년(1597) 2월 10일에 부산진공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이순신 함대의 부신진공작전은 수군 삼도 통제사 이순신과 도체찰사였던 우의정 이원익이 합의하여 조정에 보고한 뒤에 실행했던 작전으로서, 선조는 이원익의 보고에 의하여 정유년 1월 23일 이전에 이미 그 작전에 대하여 알고 있었음이 사료에 의해서 확인된다.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진격하여 몸소 최전방에 나서서 왜적을 공격하여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무사히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귀환한 뒤에 이순신은 선조가 보낸 선전관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부산진공작전을 성공시킨 일은 이후 조선 수군의 운용과 군사전략의 수립에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선조와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인 원균에게도 같은 형태의 군사작전을 계속 추진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원균의 전사와 조선 수군의 멸망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One of the most widely distributed and accepted facts about Yi Sun Sin today is that “in the 30th year of King Sunjo period when Jung-Yoo-Je-Ran occurred, Yi Sun Sin was ordered to attack Busan with his fleets, but he denied the order of the royal court and did not proceed.” This account is over-interpreted as an exemplary case for his true leadership, and is gaining much attention and popularity. This account demonstrates that Yi Sun Sin was a leader of firm belief such that he would even deny the order of a king if it is wrong. However, this account is a clueless, misunderstood claim completely different from a historical fact or just a case for distortion of history. As a result of the failure of peace conference between Japan and China, Japanese troops re-invaded Joseon to cause Jung-Yoo-Je-Ran. At that time, King Sunjo and his royal court order Tongjesa (=admiral) Yi Sun Sin a mission to mount on Busan, and he fulfilled the order and succeeded in his mission. Yi Sun Shin started his mission on February 10th, Jung-Yoo year (1597). The mission of Yi Sun Sin's fleets to mount on Busan was actually an operation that was carried out after Sugun(navy) Samdo(three island) Tongjesa (admiral in chief) Yi Sun Sin and DoJechalsa Wueuijeong Lee Wonik reported to the royal court and obtained its approval. According to the historical accounts it is found that King Sunjo was already aware of the operation before January 23rd, 1597 via the report sent by Lee Wonik. Yi Sun Sin took his fleets to the sea in front of Busan and led them at the frontline of the battlefield to attack the Japanese enemy, completing his mission. However, after returning to his base with his fleets secured, Yi Sun Sin was arrested by sentry sent from King Sunjo. Nevertheless, the successful mission that mounted on Busan led by Yi Sun Sin had a great influence in establishing military strategies and operating the Joseon sugun(navy) afterwards. Therefore, King Sunjo and the royal court of Joseon forced Won Gyun, who succeeded the Tongjesa position of Yi Sun Sin, to carry out the same type of military operations. As a dreadful result, however, Won Gyun was killed, and Joseon's sugun(navy) was eliminated.

          • 이순신 정론Ⅰ

            제장명(Je Jang Myung)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2 이순신연구논총 Vol.- No.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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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tablishing broadly accurate thesis on Admiral, Yi Sun Sin, there should come to study the previous theories. Which I examined again is 3 themes; The numbers of naval battles in the Imjin war, Death excemption card[免死帖], and Serving with no rank in the army[白衣從軍]. First, I could emphasis on The numbers of naval battles in the Imjin war is there had not been correct definitions on each naval battle which the most previous studies. Yi's 23victory battles of none to be defeated is know to most Korean population by the TV drama, ‘Immortal Admiral, Yi', however, there is hard to agree on his 23 victories. Still it is hard to define even the sum of naval battles Yi faced. Furthermore, there still do not have extent of each naval battle. Thereupon, I would like to classify the naval battles macroscopically and microscopically. I hypothesized the microscopic battles to Yi faced. With this hypothesis, I would conclude that Yi took in 45 times microscopic battles and he had never defeated after all. My second point is again from some TV works have made stories about Death exemption card[免死帖] system. Death excemption card[免死帖] is not the system originated in Joseon but the system is brought from Ming, China assisting the Imjin War. The only one reason how Yi got the document is the document is not directed Yi himself, but the Ming, China general Yang Ho sent the document to Yi to save the citizens pro-enemied. Thus, we could fully clear the incorrect sources of materials released about Yi connected on getting the Death exemption card[免死帖]. Finally, serving with no rank in army[白衣從軍] system is a punishment applied during the early Joseon era. This punishment is firstly conducted the bastinado and send back him to camps with no official position. At least, this punishment is applied to one who had passed the national examinations. However, it is known that this demotion system is targeted mostly to the bureaucrats who ran away while not defending the enemy. Yi's first serving with no rank in army[白衣從軍], he distinguished on a such small village battles taking a part in a low graded solider. On his second serving small with no rank in the army[白衣從軍] case he also did some work distinguished in battles that he was on advisory on battles, cultivated the garrison farms, and practised the naval troop's works. It can easily tell the works had been done during the serving with no rank in the army [白衣從軍], period was a low class bureaucrat was hard to cough. 이순신 정론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다양한 주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필자가 검토한 주제는 3가지로, 해전횟수, 면사첩, 백의종군에 관해서이다. 먼저 해전횟수에 대해 검토한 결과 기존의 주장들은 해전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없이 자의적으로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된 ‘23전 23승'이라는 일반적 주장은 더욱더 그 근거가 맞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전횟수는 아직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임진왜란 전체 해전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진행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전의 범위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립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자는 기존에 밝혀진 해전에 한해 대표해전과 세부해전으로 구분하였고, 세부해전의 횟수를 이순신 참가해전으로 간주하였다. 그럴 경우 45회의 세부해전에 이순신이 참가했고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두 번째로 최근 이순신 관련 드라마나 저작물들에서 발견되는 조선시대 면사첩제도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면사첩 관련 사료들을 검토하여 소개하는 장을 마련하였다. 면사첩은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시행한 제도가 아니라 임진왜란 중 명나라로부터 도입된 제도이다. 아울러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잘못 알려진 이순신이 면사첩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이 면사첩을 받은 것은 이순신 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적에게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사실이 있는 사람들을 이순신더러 구제하라고 명의 경리 양호가 보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백의종군은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적용했던 형벌의 일종으로서 장형(杖刑)을 집행한 다음 ‘관작(官爵)과 보직 없이 충군(充軍)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형벌은 적어도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 이상에게만 적용되던 것이었다. 한편으로 조선시대 백의종군 사례들을 살펴보면 주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을 막지 않고 도주하거나 패한 경우 적용한 사례가 가장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평소에는 중형을 집행해야 하지만 임진왜란 시기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적을 맞아 싸울 장수가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여 전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는 의미로 부과된 비교적 가벼운 형벌로 볼 수 있다. 이순신의 경우 첫 번째 백의종군 중일 때는 시전부락 전투에 우화열장이란 전투 편제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두 번째 백의종군 중일 때도 이순신은 백의종군 여정에서 전관예우를 톡톡히 받았다. 아울러 백의종군 중일 때 이순신의 역할은 전쟁지휘부의 군사자문 역할과 둔전 경영, 그리고 수군상황 파악이었다. 이것은 결코 낮은 신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이순신의 牙山 낙향과 무과 수련과정

            김일환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8 이순신연구논총 Vol.- No.30

            아산은 임진왜란기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수군을 격파하고 불멸의 전 공을 세운 수군명장 이순신을 배출한 고향이다. 이순신은 아동기에 서울 에서 아산으로 이주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아산과 연결되어 살았다. 그러 나 현재까지 이순신일가의 아산으로 낙향의 동기나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했고 아산에서의 삶의 기반, 이순신의 성장과정에서 보여준 학술연마, 師承관계와 무인으로 인생행로를 전환하게 되는 과정, 武學 수련의 내용 과 과정 등 어느 하나도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이순신가의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은 조부 이백록이었다. 이백록은 지금까지 통설과는 달리 중종대 사림파세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것은 기록상 그의 형 이백복과 착종된 결과였다. 그는 문음으로 관직에 나와 평시서봉사로 벼슬하다가 파직되었고 중종의 국상기간에 3자인 李 貴의 혼사를 호사스럽게 치렀다는 이유로 적발되어 綱常을 어긴 죄로 廢 錮되고 錄案에 올라 자손들의 벼슬길도 막히게 되었다. 아들인 李貞은 국 왕에게 소청을 넣어 부친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노력했지만 실패하여 허사가 되었다. 이백록의 사후에 李貞은 가족을 데리고 부인 초계 변씨의 친정이 있는 아산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아산은 제대로 된 사족사회가 형 성되지 못할 정도로 척박한 고장이어서 이순신, 이요신형제가 문과에 급 제하기에는 매우 열악한 교육적 환경이었다. 이순신이 문과시험을 준비하 다가 무과로 전향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무과로 전향하면 친가, 외가, 처가 모두 무인적 배경이 있어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21세에 무과로 전향을 결정하고 아산지역의 한량집단과 교유하 면서 무과준비에 열정적으로 노력하였다. 선조 5년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 시하였지만 낙마로 부상당하여 실패하였다. 하지만 부상을 치료하고 열심 히 재수련하여 선조 9년 식년시 무과에 급제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위난에 빠진 국가를 구해낸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아산의 지역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대 단히 큰 비중을 가진 역사인물이다. 이순신이 보여준 구국정신과 진지한 삶의 태도는 그대로 아산의 지역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이순신 은 아산과 분리할 수 없는 지역의 역사적 표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상에 걸맞게 이순신과 아산의 지역적 관계성을 해명하는데는 아직도 해결해야할 과제가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주제어 : 이순신, 이백록, 이정, 덕수이씨, 초계변씨, 무과, 임진왜란, 錄案

          • 危機管理側面에서의 李舜臣의 리더십 硏究

            김용하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4 이순신연구논총 Vol.-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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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 중 리더십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라고 하면 단연 충무공 이순신을 첫 손가락에 꼽게 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의 리더십을 단순히 위인적 관점 혹은 군사적 관점에서만 인식할 뿐 그의 리더십이 현대의 경영이론적 관점에서도 탁월한 것임을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이순신의 리더십을 상황론적으로 해석하여 이순신이라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위기가 극복되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까지도 있다. 본 연구는 이순신의 리더십이 임진왜란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평가하는데 있다. 또한 위기구조하에서의 이순신의 리더십을 특성화하여 이순신의 리더십의 유형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국내외적으로 리더십과 관련된 연구는 많이 있으며 최근 실증적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의 경우에는 이러한 실증적 연구가 한계를 가진다. 더욱이 이미 4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리더십을 실증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주제로 한 연구로서, 최두환(1992)의 연구는 이순신의 리더십을 Blake & Mouton의 Managerial Grid의 설문을 이용하여 시도되었으며, 남정집(2000)에서는 이순신의 개혁활동과 관련한 리더십의 특징을 분석한 바 있다. 이선호(2001)에서는 국가안보위기와 지도자의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이순신 리더십을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유성은(2001)에서는 리더십의 관점에서 이순신의 위대성을 고찰하였으며, 이강옥 외(2003)에서는 이순신 리더십의 특징을 분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다수 있다. 198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형석(1967, 1974), 조성도(1982), 장학근(1987), 이장희․성대경․신해순(1989), 최석남(1992) 등의 연구가 있으며,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군사전략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강영오(1993, 1997), 김종기(1993, 1997), 김일상(1996), 김현기(1997), 임원빈(1998), 임원빈․김주식(1999), 김현기(2000) 등이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큰 두가지의 연구방법론과는 별도로 이순신을 경영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최두환(1995), 지용희(1999), 김용하(2000) 등의 연구가 나오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 동안의 이순신 관련 연구를 기초로 하여 경영학적인 위기관리론과 리더십 이론의 분석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1592년~1598년 기간에 이순신의 리더십의 유효 적절성을 분석․평가하여 봄으로써 이순신 리더십의 위대성을 되살려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위기관리론과 리더십이론의 이론적 틀을 정리하고(Ⅱ), 기존의 이순신 리더십과 관련된 논의를 정리하고(Ⅲ), 임진왜란기의 이순신이 직면한 위기상황을 정리한 다음(Ⅳ), 이순신의 리더십 모형을 정립하여 보고자 한다(Ⅴ). 본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의 가장 큰 한계는 일차적 사료를 직접 접근할 수 없었다는 점이나, 이순신 관련 중요 기초사료들이 선배학자들에 의하여 충실히 번역․연구되어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연구에 각고의 노력으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신 선배 연구자들께 감사드린다.

          • 이순신을 도운 전라좌ㆍ우수영 사람들

            정진술(Jeong Jin-sool)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5 이순신연구논총 Vol.- N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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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운 전라좌ㆍ우수영 사람들은,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람만 대략 540여명에 이른다. 이토록 많은 전라좌ㆍ우수영 사람들이 임명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이순신 막하에 와서 그를 도왔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백성들이 문무관리들 밑에 종군하는 것을 극력 회피하고 의병으로 나갔다. 그렇지만 이순신 막하에는 자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은 이순신이 부하들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통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에게 허물을 보였던 부하 장수들일지라도 그가 해전에서 힘껏 싸우면 절대 편견을 갖지 않고 공정하게 전공을 평가했다. 이순신의 이러한 공정한 전공 평가는 부하들을 진정으로 감복시켰고, 그가 리더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순신 예하의 말단 장교들인 군관이나 권관 등도 해전의 전공으로 높이 승진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순신 밑에서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면 반드시 공로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결국 이순신의 공명정대하고 불편부당한 지휘통솔이 자신의 예하로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또한 부하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만들어, 그의 위대한 해전 승리를 이룩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Jeolla jwaㆍusuyeong(全羅左ㆍ右水營) people, who helped Admiral Yi Sun-sin during Imjinwaeran(壬辰倭亂, the war of Japanese Invasion upon Korea from 1592 to 1598), reached about 540 including those who were confirmed through literature record. This way, many Jeolla jwaㆍusuyeong people came to be Admiral Yi Sun-sin's subordinates and helped him, by appointment or voluntarily. During Imjinwaeran, many people made every effort to evade war military under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and participated in the loyal troop. However, under Admiral Yi Sun-sin's command, many people gathered voluntarily. This was possible because Admiral Yi, Sun-sin commanded the subordinates within the bounds of custom. Admiral Yi, Sun-sin evaluated war contribution fairly without prejudice if only the subordinates exerted their best at the naval battle, even if they had shown faults to him. This way, Admiral Yi, Sun-sin's fair evaluation on war contribution sincerely inspired the subordinates, which again helped him to exert his power as a leader. Military officer or authorized officer, etc. who were low-ranking subordinates of Admiral Yi, Sun-sin were also highly promoted due to their contribution to the naval battle. This fact won many people's confidence that their contribution could be surely rewarded when they faithfully perform their duty under Admiral Yi, Sun-sin. Eventually, Admiral Yi, Sun-sin's fair and impartial leadership made people gather under his command, also, which made his subordinates follow him, finally, became the foundation to achieve his great victory in naval battle.

          • 이순신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

            김주식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8 이순신연구논총 Vol.- No.30

            본고는 외국에서 이순신을 어떻게 연구하고 인식하고 있는지를 한눈 에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본고에서는 세계인을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 3개 집단으로 분류하려 한다. 중국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해 군대를 파병했으며, 조‧명 연합 군을 결성하여 싸운 적이 있는 참전국 국민이다. 일본인은 조선을 침략하 여 전쟁을 일으킨 침략국의 국민이다. 서양인은 제3국들의 국민이다. 또 한 연구 대상으로 삼은 외국 자료는 2010년까지 나타난 것 중 필자가 모 은 약 68점이다. 그중에서 중국 자료는 16점, 일본 자료는 24점, 서양 자 료는 28점(미국 16, 영국 9, 호주 1, 스웨덴 1, 캐나다 1)이다. 중국에서는 이순신을 주제로 한 논문이나 저술은 아주 적어 찾아보 기 어렵고, 임진왜란을 논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 이 대부분이다. 일본에서는 조선과 중국의 침략과 정복 노력을 다시 실패 하지 않겠다는 19세기 말-20세기 전반의 목적이나 한‧일 간의 우호관계 형성을 위한 현대적인 목적에서 이순신을 연구하였다. 서양에서는 일본의 침략과 정복 시도가 실패한 원인을 군사나 전사의 측면에서 규명하려는 학술적 목적으로 이순신을 연구하였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군신(軍神)이나 전신(戰神)처럼 신과 같은 인 물, 인류의 사표나 지도자, 세계사나 동양사의 최고 위인, 한국의 구세주 나 영웅, 세계사의 영웅들과의 비교할 수 있는 인물로 구분될 수 있다. 세 계인들이 이순신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8가지이다. 1) 이순신이 조선 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동아시아 3국의 운명에 영향을 주었다. 2) 수군을 이용한 해전의 승리로 지상전은 물론 임진왜란 자체의 승패까지 좌우하 고 결정지을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 3) 해양전략 개념의 근대적인 요 소들이 이순신에게서 나타나며, 그 전략이 지상군의 전투와 전쟁까지도 좌우하였다. 4) 이순신이 근대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5) 이순신은 고매한 인격, 용감성, 애국심 그리고 희생정신을 보유하고 있었다. 6) 이순신은 전문지식, 지휘통솔력, 정치외교력을 겸비하였다. 7) 과학기술의 재능까지 보유하여 당시 세계에서 최첨단 함정을 건조하고 실전에 참여시켰다. 8) 거북선은 획기적인 함정이었다. 이를 종합하면, 무관과 문관에게 필요한 심성, 자질, 능력은 물론 과학기술자의 능력까지 갖고서 전쟁과 역사까지 좌우할 정도로 큰 영향을 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외국 자료에서 이순신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키워드 : 이순신, 거북선, 임진왜란, 군신, 인류의 사표, 세계와 한국의 영 웅, 이순신 평가 이유, 해양전략, 해군전술, 심성과 자질

          • 영국인과 유럽인들이 알고 있는 이순신 제독

            이안 바우어스(Ian Bowers)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7 이순신연구논총 Vol.- No.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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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인과 유럽인들은 다양한 면에서 이순신 제독의 업적과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특히 영국과 유럽에서는 노량해전과 트라팔가해전을 통해 이순신 제독의 위대한 업적을 영국의 위대한 넬슨 제독과 비교하고 있다. 많은 유럽의 전문가들은 이순신 제독이 일본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요인으로 ① 거북선을 설계·건조한 공학적 (기술적)인 마인드, ② 장거리포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원거리에서 공세적으로 공격한 전술, ③ 해전을 치른 해역의 조류 특성과 지리 적인 이점을 이용한 전략적인 식견, ④ 남다른 애국심과 용기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울러 영국의 존경받는 장군인 몽고메리 장군이 그의 명저인『전쟁의 역사』에서 이순신 제독을 전략가이면서 전술가인 동시에 기술혁신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제독이며, 아시아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하였다. 이순신 제독이 한반도 해역에서 치러진 해전에서 일본군을 패배 시키고 승리한 교훈은 유럽 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아 온 섬나라 영국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이 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지만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가 유럽과 비슷한 수준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발전하지 못한 것은 해양의 중요성에 대한 국가지도자의 인식 부족과 무관심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의 군비증강으로 동북아시아의 해양안보 불안 요인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순신 제독이 해전 사에 미친 영향은 한국해군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The British and Europeans are evaluating the accomplishments and abilities of Admiral Yi Sun Sin in a variety of ways. Especially in England and Europe, the great achievements of Admiral Yi Sun Sin are compared with Admiral Nelson of Great Britain through the Battle of Noryang and the Battle of Trafalgar. Many European experts pointed out that Admiral Yi Sun Sin could win the battle with the Japanese army with the following reasons: ① an engineering mind that designed and constructed a turtle ship, ② a tactic that attacked the Japanese army from a remote location using a long-range gun, ③ strategic insights using the characteristics of sea-tides and their geographical advantages in the battle sea area, and ④ unusual patriotism and courage. In addition, Gen. Montgomery, a respected general in Britain, in his book The History of War, evaluated Admiral Yi Sun Sin as a strategist, tactician, technological innovator and a great person who influenced Asian history. The lesson that Admiral Yi Sun Sin defeated and won the naval battle against Japan on the Korean Peninsula gave a special lesson to Britain, an island nation, that had been threatened by European countries. However, Admiral Yi Sun Sin had a great influence on Asian history, but the fact that East Asia had similar naval power in Europe at the time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did not develop much because of national leaders lack of awareness and indifference on the importance of the ocean. Today, the increase of naval power in neighboring countries such as China and Japan is adding to the maritime security uncertainty of Northeast Asia, and thus, the Admiral Yi s influence on naval warfare has a great impact on the Republic of Korea s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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