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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왜구의 경계침탈로 본 한·일 관계

        김보한(Bo-han Kim) 한일관계사학회 2012 한일관계사연구 Vol.42 No.-

        우리는 역사에서 어떤 국가의 내부 혼란이 주변의 다른 국가의 정치와 정책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로서 왜구의 출몰로 시작된 고려와 조선의 대왜(對倭)정책을 들 수 있다. 13세기 이후 왜구의 등장은 고려와 조선으로 하여금 왜구의 경계침탈을 막기 위한 대왜 외교를 적극 추진하게 만들었다. 왜구의 경계침탈과 그로 인해 전개된 외교의 양상을 몇 가지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 가마쿠라 왜구는 조큐의 난의 발발과 관련되어 있으며, 고려군과의 군사적 충돌을 염두에 두지 않은 소규모 집단의 약탈에서 출발하였다. 또 가마쿠라 왜구가 고려에 등장하는 시점과 마쓰우라당이 고려의 경계를 침탈하는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가마쿠라 왜구는 마쓰우라당이 주도적으로 가담한 약탈 행위였다. 둘째, 다자이후는 가마쿠라 왜구의 경계침탈을 막아줄 것을 요구하는 고려의 왜구 금지 사신이 도착하였을 때, ‘악당’ 을 참수하거나 약탈한 물품을 변상하는 등의 매우 호의적인 자세로 임하였다. 셋째, 무로막치 막부는 조선에 보낸 첩장에서 무로마치 왜구가 남북조 내란기의 규수의 정치 혼란과 직접 관련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로막치 막부는 고려와 조선에서 왜구의 경계침탈 금지를 요구하는 사신이 오자, 고려에 능동적으로 답례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러한 무로마치 막부의 적극적인 대(對)조선 외교 자세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경계침탈이 즉각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넷째, 무로마치 왜구의 금지는 해적 금지령의 공포와 같은 막부의 의지와 재지세력의 자구적 노력, 그리고 조선의 대(對)왜인 강온정책 등의 상호 촉매 작용을 통하여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In general, the certain situation of a country influenced on foreign relations among neighbor countries. For example, this problem belongs with the diplomacy between Japan and Goryeo and Joseon that are related to Wakou. The diplomacy between Korea and Japan is as follows. Firstly, Wakou in the early Kamakura Bakuhu age is related to the rise of Joqui’s rebellion and is the small group that is not related to the military confrontation between Goryeo and Wakou. Also, the time that Matsuura Tou disseise the boundary of Goryeo. Therefore, Wakou in the Kamakura Bakuhu age means that Matsuura Tou plunder autonomously Goryeo kingdom. Secondly, When the envoy of Goryeo kingdom come and demand to resist the boundary disseisin of Wakou, Kamakura Bakuhu decapitate Ackutou and reimburse looted goods. Thirdly, Wakou in the Muromachi Bakuhu age was related to the political crisis of Kyushu in Japanese North and South Dynasties according to the letters to Joseon from Muromachi Bakuhu. When envoys of Goryeo and Joseon kingdoms came and demanded to resist the boundary disseisin of Wakou, Kamakura Bakuahu sent replying envoys to Goryeo and Joseon. Nevertheless, the boundary disseisin of Wakou was perfectly eradicated. Fourthly, Wakou in the Muromachi Bakuhu age was annihilate through the volition and political stability of Bakuhu, and Joseon’s policy based on toughness and moderateness. Moreover, Muromachi Bakuful has been announced a low prohibiting pirate from plundering and tried to annihilate Wakou.

      • KCI등재

        중세 일본의 외교권

        高銀美 ( Go Eun-mi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1 大東文化硏究 Vol.113 No.-

        가마쿠라시대에는 막부 측이 외교 안건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형식적인 외교권은 여전히 천황에게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에 반해 무로마치시대에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일본 국왕’에 책봉되는 점을 들어, 가마쿠라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외교관계가 형성된 시대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천황에게 있었던 권한조차 쇼군이 흡수해가는 권력집중과정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무로마치시대의 외교방식이 가마쿠라시대의 방식을 기본적으로 계승하는 것이었으나, 중국의 교류 방식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차이점이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양자 간의 차이는 천황과 쇼군 간의 권력 구조 변화가 아니라 일본을 둘러싼 주변 지역의 상황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다만 쇼군이 외교사절과 접촉하고 답서를 전달하는 등 외교의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 이전처럼 외교 안건을 조정에 보고하는 절차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게 된다. 외교 안건이 막부 관할 내에서 완결되게 되면서 조정은 형식적으로 외교 안건에 대해 심의하는 기능마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In the Kamakura period, it is assumed the shogunate held the de facto decision-making authority over diplomacy, while formal diplomatic authority ostensibly remained in the hands of the Japanese emperor. On the other hand, in the Muromachi period, there was a qualitative difference in the way in which foreign relations were established in comparison to the Kamakura period, given that the shogun, as the head of the military government, was referred to as the "king of Japan". This change occurred against the backdrop of the centralization of power in which even some powers held by the emperor were absorbed by the shogun. However, this paper contends that, although Japan's diplomatic direction in the Muromachi period fundamentally succeeded that of the Kamakura era, there were differences that arose in the process of responding to changes in China's style of foreign relations. Thus, this paper places emphasis on the fact that the difference between two periods was caused due to circumstances in the region surrounding Japan, rather than changes in the internal power structure of Japan. In the latter era, however, the previous practice of reporting diplomatic issues to the Japanese imperial court was no longer identified, as the shogun came to the front of diplomacy and took on roles such as meeting diplomatic envoys from other countries and conveying official diplomatic responses. This implies that Japan’s diplomatic agenda was completely handled within the jurisdiction of the shogunate, thus leading to the loss of the Japanese imperial court’s nominal function of deliberating on diplomatic issues.

      • KCI등재후보

        고려 ‘무신’ 정권과 가마쿠라(鎌倉) 막부 ‘무사’ 정권의 비교를 통한 역사 교수-학습의 이론과 실제

        김보림 한국일본교육학회 2009 한국일본교육학연구 Vol.13 No.2

        본고는 비교학습의 특징, 비교학습 모형 개발 등의 이론적 측면과 함께, 고려 ‘무신’ 정권 과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 정권비교를 통한 실제 수업 적용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을 주 요한 연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본고에서 다룰 고려와 가마쿠라 시기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무신’과 ‘무사’ 정권이 성립 되어 몽고의 침입을 받는 시기로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기에 좋은 역사 주제가 된다. 비교방법은 일치법(method of agreement)과 차이법(method of difference)에 따라 가려 진다. 이러한 비교 방법을 사료를 활용한 개념 학습에 이용한 실제 비교 교수-학습은 학 습목표의 선정-자료의 제시-속성의 추출(차별된 속성, 중요요인의 형성 변수, 공통된 속 성)-개념의 인지 및 정의-공통 속성의 확인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본고에서 제시한 개념학습을 통한 비교학습을 이용한다면, 역사적 사건, 사회적 현상, 시대적 개념 등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함으로써 다양한 역사적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가마쿠라 시대의 전투와 신비현상

        이세연 ( Lee Seyun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0 人文論叢 Vol.77 No.4

        본 논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의 전투에 즈음하여 나타난 신비현상을 검토하여 중세 무사들의 정신세계에 한 발 더 다가서 보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전투의 성격과 신비현상의 연관성, 동국(東國) 고실(故實)의 형성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했다. 가마쿠라 무사들은 전투의 성격에 따라 신비현상이 차별적으로 출현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공전(公戰)과 ‘성전’(聖戰), 사전(私戰)이 기준선이 되었는데, 공전과 사전의 경우 형식 못지않게 전투의 실태가 중시되었다. 형식과 내용을 고루 갖춘 공전, 그리고 ‘성전’에서는 저명한 신들의 신이가 관찰되었다. 이에 반해 형식과 내용면에서 사전임이 명백했던 전투에서는 신비현상의 로컬화라 할 만한 양상이 관찰되었다. 한편 공전과 사전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전투에서는 색다른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전의 면모가 강했던 공전, 즉 오슈[奧州] 전투에서는 지역색 짙은 신비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반해 광역의 내란에 접속된 까닭에 공공성을 강하게 표방했던 1180년대 초반의 사전에서는 저명한 신들의 신이가 출현했다. 한편 동국에 거점을 두는 강력한 정치권력의 출현과 장기지속은 동국의 신비현상을 구전의 세계에서 기록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 되었다. 신비현상에 관한 동국의 독자적인 고실은 막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오슈 전투를 기억의 원점으로 삼아 형성되어갔다. In this paper, I tried to take a step closer to the mentality of medieval warriors by examining the mysterious phenomena that appeared during the battles of the Kamakura period. Specifically, the discussion was focused on the aspec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nature of the battles and the mysterious phenomena, and the formation of the ancient practices of Togoku (東國). The Kamakura samurai maintained the perception that mysterious phenomena appeared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battles. Kamakura Bakufu became the driving force to move the mystery of Togoku from the oral world to the world of record. Togoku’s own ancient practices on mysterious phenomena was formed from the memory on the Battle of Oshu (奧州), which confirmed the identity of the Kamakura Baku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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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송의 선승 난계도륭(蘭溪道隆)이 중세 일본에 전한 임제선

        김성순(Sung-soon kim) 보조사상연구원 2022 보조사상 Vol.64 No.-

        이 글에서는 난계도륭이 일본으로 건너갈수 밖에 없었던 당시 남송의 정치와 선종교단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고, 일본에서의 그의 족적을 확인하는 역사적 시각에 중심을 두기로 한다. 난계도륭이 활동지 국가를 옮겼던 것은 13세기 중반의 남송에서 몽골군대에 의한 침략전쟁이라는 외부상황에 기인했던 정황이 더 커보인다. 또한 입송 일본 유학승들로 인해 일본 불교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선택을 돕는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일본불교계에서는 에이사이에 의해 1차적으로 임제선이 전래된 이후, 1246년 난계도륭이 일본에 건너가게 되면서 일본의 선불교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송의 선승과 입송 유학승들에 의해 선뿐만 아니라, 중국 강남의 종교문화와 유학까지 소개되어 일본사회에서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선승들은 일본의 구불교 종단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치국(治國)과 치심(治心)을 겸비한 불법으로서 선종의 의미를 부여하고, 막부정권의 정치 자문에 응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가 있었다. 정리하면, 가마쿠라 무사정권의 입장에서는 기존 황권이나 귀족세력과 결탁된 구불교종단보다는 남송의 선법, 즉 총림청규에 기반한 중국 임제선을 환영했으며, 난계도륭 등의 선승들은 이에 충실히 부응하면서 중국의 문예와 유학까지 일본에 전파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studies the politics of South Song Dynasty and the situation of the Seon Buddhist order during the time when Lanxi Daolong had no choice but to travel to Japan. It also examines the historical evidence that confirms Lanxi Daolong’s legacy in Japan. Lanxi Daolong’s decision to relocate his base of activities was likely due to the external circumstance of the Mongol Army’s invasion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in the middle of the 13th century. It is also possible that his prior knowledge of Japanese Buddhism, which came from Buddhist monks who came to the Song to learn Buddhism (hereafter “visiting Buddhist scholars”), influenced his decision to go to Japan. In Japanese Buddhism, the Rinzai school of Buddhism was first introduced by Eisai. Afterwards, Lanxi Daolong traveled to Japan in 1246, and it can be said that a fundamental change began to occur in the world of Japanese Zen Buddhism at this time. Seon monks of the South Song Dynasty and visiting Buddhist scholars not only introduced Seon Buddhism but also brought with them the religious culture and Confucianism of the Jiangnan area of China, which had a considerable influence on Japanese society. In their conflict with the old Japanese Buddhist order, Seon monks granted Seon Buddhism the meaning of being a dharma practice that contained the principles of both ruling the nation (治國) and ruling the soul (治心), and there was a true need to respond to the political advice of the shogunate government. In summary, the warrior government of the Kamakura Shogunate was more welcoming of the dharma of the Southern Song Dynasty—that is, the Chinese Rinzai school founded on the monastic codes—than it was of old order Buddhism, which was conspiring with Imperial powers and the nobility class. It can be argued that Seon monks such as Lanxi Daolong responded faithfully to this situation and spread Chinese literature and Confucianism t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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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環海長城’과 규슈 ‘元寇防壘’의 역사적 고찰

        김보한(Kim, Bo-Han) 한일관계사학회 2016 한일관계사연구 Vol.55 No.-

        13세기 몽골의 고려 침공 이후 고려 조정에서 항복의사를 밝히고 본격적으로 개경환도를 추진할 때, 삼별초가 고려의 항복결정에 불만을 품고 진도로 내려가 대몽항전을 지속해 나갔다. 이 무렵 고려 조정은 진도 삼별초의 거점이 제주도로 확대되는 것을 미리 저지하기 위해 제주도 해안에 성곽 축조를 추진하게 된다. 이것이 고려 조정에서 삼별초가 제주도에 상륙하는 것을 방비할 목적으로 쌓은 제주도 ‘환해장성(環海長城)’의 시원이다. 한편 몽골의 1차 침공을 막아낸 가마쿠라 막부는 무사를 동원하여 규슈의 하카타(博多) 북쪽 해안에 성곽 축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몽골의 2차 일본침공을 막아낸 이후에도 수십 년간 계속해서 해안성곽의 보수 및 확장 공사를 진행하였다. 즉 여몽연합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규슈의 북쪽 연안과 도서지역에 쌓은 해안성곽이 ‘원구방루(元寇防壘)’이다. 제주도의 환해장성과 규슈의 원구방루는 현재까지도 섬의 해안과 그 내륙 지역에 몽골 팽창의 역사적 흔적으로 남아있다. 특히 제주도의 환해장성과 규슈의 원구방루는 해안가 평지에 길게 쌓은 방어용 성곽으로서 몽골의 팽창 전쟁과의 관련성을 설명해 주는 매우 독특한 해안성곽들이다. 특히 제주도의 환해장성은 삼별초가 진도에서 제주도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 개경정부에서 쌓았지만, 삼별초가 제주도를 장악한 다음에는 여몽연합군에 대항하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규슈 북쪽해안의 원구방루는 몽골의 1차 일본침공이 끝난 직후에 쌓기 시작하여 몽골의 2차 일본침공이 끝난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개축된 방어용 해안성곽이다. 따라서 제주도의 ‘환해장성’과 규슈의 ‘원구방루’는 공통적으로 해안가 평지에 길게 쌓은 방어용 성곽이며, 몽골의 팽창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대표적인 해안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두 성곽은 몽골의 대륙적 특성과 제주도와 규슈의 해양적 특성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쌓아진 성곽으로서 동아시아의 해양성을 대표하는 역사 흔적들이다. In the 13th century, the Mongol Empire expanded leading influence in Central Asia, Europe, Goryeo and Japan. Goryeo court yielded to the Mongol Empire in 1270 but Sambyeolcho continued the resistance against Mongol Empire in Jindo. Goryeo court built a castle in the coast of Jejudo in order to block the expansion of Sambyeolcho’s influence. This is Hwanhe-Jangsung in Jejudo. Meanwhile, Kamakura Bakuhu resisted the first invasion of Mongol Empire in 1274 and began to build a castle at the coast of Hacata in 1276. Also, Bakuhu checked the first invasion of Mongol Empire in 1274, and constructed the coastal fortresses. This is the origin of Wonku-Bangru in the northern coast of Kyusyu. Hwanhe-Jangsung in Jejudo and Wonku-Bangru in Kyusyu are the defensive castle which is built in the flatland of shoreline and are the typical coastal fortresses of East Asia which is related to the expansionist war of Mongol Empire. These castles are historical tracks representing the ocean type that is formed in the conflict process between the continentalism of Mongol Empire and the marine character of Goryeo and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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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世日本の「戦後」 : 『増鏡』を中心に

        사이토 아유미(Saito Ayumi)(斎藤歩) 韓國外國語大學校 外國學綜合硏究센터 日本硏究所 2015 日本硏究 Vol.0 No.65

        「마스카가미」(増鏡)는 일본 중세 가마쿠라(鎌倉)시대를 서술 대상으로 하는 역사 이야기이다. 본 논문에서는 중세 초기의 전란이 종식된 시기를 검토했다. 「후지고로모(藤衣)」「미카미야미(三神山)」 두 권이다. 이 두 권은 귀족이 대두하고 있던 무사 정권에 도전했다가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조큐의 난(承久の乱」 직후에 위치하고 있다. 필자는 이 시기를 전국적인 전란이 끝나고 또한 귀족 정권에서 무가 정권으로 넘어가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에서 「중세 일본의 전후(戰後)」 라고 정의했다. 이 과도기를 귀족층의 저서인 문학작품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그 서술은 직접적으로 사실을 검토하고 비판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전통적인 문학 작품의 방법을 사용하고 어떤 때에는 사실을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단순히 인식하고 있지 않은 상태와 의식하고 그러한 서술을 선택하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인식은 역사가 왕조에서 무가정권으로 이행해가는 흐름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본 논문이 다룬 시대는 가마쿠라 시대 중에서 전란기와 안정기의 사에에 해당한다. 그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서 이 시대를 직접 고찰한 논고는 아직 찾아 볼 수 없다. 본 논문은 그 검토의 실마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Masukagami" is a historical story depicting the Japanese medieval Kamakura era.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time the war ended in the first half of the middle ages. Two volumes "Fujigoromo" "Mikami-Yama" are equivalent to that period These volumes has been located after the Jōkyū war. Nobility was overwhelmingly defeated by samurai in that war. I have defined this period as the "post-war in medieval Japan." During this time, national war was over, and aristocrat regime have sifted to samurai regime. In this paper, I investigated how did this literary works (written by the nobility) depict this transition. The narrative does not consider historical fact directly. Critics also does not exist. The author has followed the way of traditional literary works. He represented the historical facts vaguely. On one occasion, the author might not recognize simply. But at other times, he chose that method consciously. Two cases are mixed. I think this recognition of the past is related to the transition to the samurai regime from dynasty. This paper dealing with the valley between the war period and the stable period of the Kamakura period. Its historical significance is never small. However, there is no paper discussed the period in connection with the literature directly. This paper is positioned as a beginning of that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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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온난기의 작은 V 계곡 : 12세기 동아시아의 기후변동

        김문기 한국생태환경사학회 2022 생태환경과역사 Vol.- No.9

        지난 밀레니엄에서 12세기의 동아시아 기후변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글에서는 12세기 기후변동에 대한 한·중·일 3국의 연구를 비교하면서 그 특성을 찾고자 했다. 첫째, 동아시아 3국의 연구 역량에는 일정한 격차가 있었다. 중국은 주커전의 기초적인 연구 이후에 만즈민, 거촨성 등으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발전이 있었다. 일본은 1970년대 야마모토가 제시했던 페어브리지(Fairbridge) 곡선 등의 표본들이 오랫동안 영향을 끼쳐 왔다. 최근 일본에서 쿡(Cook)의 곡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한국은 일본·중국·유럽의 연구에 일정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12세기의 기후가 한랭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중국에서 12세기의 한랭화는 많은 물후(物候) 증거들이 있어, 의심받지 않았다. 이정호는 동아시아 3국의 연구를 비교하여, 동아시아에서 12세기의 한랭화는 공통의 현상이었다고 했다. 일본은 페어브리지 곡선의 영향을 받아 12세기를 온난기로 인식해왔다. 최근 쿡의 곡선을 수용하면서, 12세기 전반은 확연한 한랭기, 후반은 기온이 상승했지만 동시에 한랭현상도 빈번했던 시기로 평가했다. 셋째, 12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은 한랭한 기후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12세기 초반의 한랭화는 북송의 멸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북송의 멸망으로 인구가 대거 남하함에 따라, 거시적으로 중국 경제중심의 남천이 완성되었다. 고려에서도 12세기는 14세기와 더불어 한랭화와 자연재해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 고려의 무인정권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다. 12세기 전반의 한랭화와 12세기 후반의 이상기후는 장기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에도 영향을 끼쳤다. 12세기의 기후변동은 동아시아가 ‘문(文)’의 시대에서 ‘무(武)’의 시대로 전환되는 ‘배경’이 되었다. 넷째, 12세기의 한랭화는 중세온난기의 작은 ‘V’ 계곡이었다. 12세기의 한랭화는 중세온난기 안에서 짧은 한랭기에 속한다고 보았다. 지난 밀레니엄 동안 기후는 ‘중세온난기 ‒ 소빙기 ‒ 20세기 온난기’로 이어지는 ‘V’ 모양으로 변화했다고 했다. 12세기의 한랭화는 11세기와 13세기의 봉우리 사이에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12세기의 한랭화는 중세온난기 속의 작은 ‘V’ 계곡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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