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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학술원 20년 철학방면 연구성과 ― 유학과 경학 방면 연구를 중심으로

        李昤昊 ( Lee Young-ho ),金渡鎰 ( Kim Doil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0 大東文化硏究 Vol.0 No.112

        동아시아학술원의 대표적 연구공간은 대동문화연구원, 유교문화연구소, 학술원 산하 인문한국연구소 등이다. 이 세 단위 연구기관에서 이루어진 철학 방면 연구는 주로 저술(저역서, 영인출판)을 통해 수행되었으며, 학술대회와 자료구축을 통해서도 그 연구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유교문화연구소에서는 학술원 개원 이래 ‘유교문화번역총서’와 ‘유교문화연구총서’를 통해 유학의 현대화 문제에 천착하였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루어진 학술대회에서도 ‘경학(유학)’의 현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연구소에서는 한국유학(경학)을 기반으로 하는 동아시아 고전철학의 모색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활동을 하였는데, 최근에 이르러서야 동아시아적 연대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동문화연구원에서는 영인총서를 통하여 조선유학(경학)의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였는데,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학술적 자산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한편 자료구축의 측면에서는 유교문화연구소의 ‘유경정본화사업’, 인문한국연구소의 ‘한국경학자료시스템’, ‘한국주자학용어시스템’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세 사이트에서는 한국 유학, 특히 한국 경학에 관한 자료 구축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향후 한국고전철학연구에 있어 필수불가결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학술원은 지난 20년 동안 이룩한 고전철학 방면의 성과를 토대로 앞으로 연구의식의 심화와 자료구축의 확장을 도모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현재까지 진행된 동아시아 고전철학연구에 대하여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혹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자생의 학술담론은 이러한 관점과 의식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Three representative research institutes of the Academy of East Asian Studies ar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Institute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s, and Humanities Korea Project Institute. Their philosophy research was mainly conducted through writing (publication of books, translated works, and photocopy editions) by these three and has been expanded its scope through academic conferences and establishing database. Since its opening of the Academy, the Institute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s has published Confucian Culture Translation Series and Confucian Culture Research Series to address the issue of the modernization of Confucianism. Also, academic conferences held since the 2000s focused on the modernization of the Confucian studies (Confucian Classics). In contrast, the research by the Humanities Korea Project Institute has been focused on East Asian classical philosophy based on Korean Confucianism, and only recently has the foundation of East Asian solidarity been established. In addition, the publication of Classic Photocopy Series by th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tudy of Joseon Confucian classic, which has become a very important academic asset, both at home and abroad. On the other hand, in terms of database establishment, the Institute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s 유경정본화사업 Project, the HK's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and the Terminology Data System of Zhu Xi's Learning can be discussed. These three sites are good examples of the establishing database on Korean Confucianism, especially Korean Confucian Classics. This is indispensable database for future research on Korean classical philosophy. The Academy aims to deepen research awareness and expand its database archiving based on the achievements in classical philosophy over the past two decades. In this process, we will maintain a critical view of East Asian classical philosophy research so far and endeavor to identify problems. Based on this, we will ultimately seek out a self-sustaining academic discourse that is recognized in East Asia of glob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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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경전주석학의 모색 ―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을 중심으로

        이령호 ( Lee Young-ho ),함영대 ( Ham Young-dae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8 大東文化硏究 Vol.0 No.101

        전통시대 유학의 근간이었던 경학은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에 이르기까지 그 기본 원리를 제공한 학문이다. 이러한 경학 저술에 대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목록의 정리에서 자료의 회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의 전통이 마련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경학자료의 회집이 없지는 않았으나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은 1988~1998년에 조선조에 단편적으로 이루어졌던 한국경학자료를 회집하여 『韓國經學資料集成』이라는 명칭으로 출간했다. 또 이 총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정부의 지원하에 2004년부터 단계적으로 DB화를 진행하여, 현재 한국경학자료시스템(http://koco.skku.edu/)이라는 명칭으로 공개하고 있다. 이 글은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완간한 『한국경학자료집성』과 그 DB화의 성과인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을 검토하고, 이어서 한국의 경학자료를 DB화한 또 다른 사이트를 살펴보면서 한국의 경학DB를 활용한 경학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 것이다. ‘디지털 경학주석학’이라고 명명한 이 연구방법론을 수립하기 위해 그 현황과 성과를 점검했으며, 보완한 몇 가지 사항을 짚어보았다. 검토 결과 『한국경학자료집성』의 완성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에 비해 그 회집의 역사가 일천했던 한국 경학자료의 규모와 위상을 확인한 학술적 진전이었다. 한국유학의 저력을 구체적인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 문헌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산화한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은 中日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주석별 검색이라는 방식을 전산화 과정에 도입함으로써 경학자료를 활용한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나 보완작업 역시 요청되고 있다. 원천자료에 대한 수습과 정리의 보완, 이본대조를 통한 교감과 정본화, 표점작업,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원전자료의 국역본의 제시가 그것이다.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의 활용성을 확장하고 디지털 경학주석학 연구의 발전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그 지속적인 보완은 여전히 요청된다.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which was the basis of Confucianism in the traditional era, provided the basic principles from thoughts and cultures to politics and economies in East Asia. For the writings about Confucian Classics, a variety of research traditions was developed in China and Japan earlier on. It ranged from cataloging the writings to assembling them. In contrast, there was a traditional assemblage of the writings of Confucian Classics in Korea. However, it was relatively insufficient. Finally, this insufficient work which was carried out fragmentarily in the Joseon Dynasty was completed in 1998 after beginning the work in 1988 by th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of Sunkyunkwan University(DIKSSU). DIKSSU gathered Korean Confucian Classics materials and published it under the title of The Complete Collection of the Korean Study of Confucian Classics. Furthermore, with the support of Korean government which recognized the value of the Collection, DIKSSU has gradually developed the digital database and opened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http://koco.skku.edu/) and opened to the public. This paper examined The Complete Collection of the Korean Study of Confucian Classics, which was completed by th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of Sunkyunkwan University, and also examined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which was the result of its database. Also it pursued for a new horizon through searching another similar websites. In order to establish the research methodology named 'a Commentary Study of Confucian Classics in Digital Form', we checked its current status and achievements and several details that were improved later.The paper finds that the completion of The Complete Collection of the Korean Study of Confucian Classics made an academic progress that confirmed the size and status of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materials, which has insufficient history of gathering compared to them of China and Japan. The Collection provides a literal basis for verifying the strength of Korean Confucianism with concretely established data. An effectively computerized <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 has innovated the field of relevant researches by introducing the searching method by classified annotations, which had never been available in China and Japan. However, additional works are also needed to improve the system. In order to expand the applicability of <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 and to improve the Commentary Study of Confucian Classics in Digital Form, it is necessary to gather and arrange original materials, to correct errors by comparing different versions, to work for marking and to provide Korean versions of the original materials for interacting with public. And these works continuously needs to be impr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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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논문 : 조선후기 부세수취 관행과"중간비용" ; 대동법(大同法) 시행 이후 중간비용의 처리양상과 과외별역(科外別役)의 문제

        최주희 ( Joo Hee Choi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5 大東文化硏究 Vol.0 No.92

        17세기 후반부터 전국에 확대 시행된 대동법은 현물납에 따른 民役의 부담을 대폭 완화시켜준 조치였다. 각도 대동사목이 작성되는 과정에서 운송비[船馬價·태價]와 수수료[作紙·役價]의 일부가 大同儲置米(餘米)와 上納米내에 포함되었다. 문제는 선혜청이라는 대동세의 출납기구가 신설되고, 중앙의 공물조달체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중간비용이 창출되었다는 점이다. 군현에서 대동세를 상납할 때 선혜청에 人情米를 바쳤으며, 공인들이 왕실과 정부각사에 공물을 진배할 때에도 人情·作紙를 별도로 납부하였다. 또 대동세 수취시 잉미[1,000석 당 20석]를 더 거두고 공인에게 공물가를 지급할 때에도 空石價[1석당 2승]를 추가로 징수하여 선혜청의 청사유지비와 관원의 인건비로 썼다. 특히 공인들에게는 무상의 과외별역이 부과되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이후 공인들이 조달시장을 이탈하는 배경이 되었다.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공인들이 시장에서 공물을 구매하여 왕실과 중앙각사에 진배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였다고 하더라도, 공물조달의 최종단계에 있는 왕실과 중앙각사는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로 현물[공물·진상]을 진배 받는 구조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로 인해 궐내·외 각사에서 각종 수수료·잡비를 징수하는 관행이 계속 유지되었으며, 공인들에게 공물을 추가징수하고 과외별역에 동원하는 폐단이 18세기 이후 가시화되었다. 정부로서도 한정된 대동세입을 가지고 정부관서와 지방관아의 행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양란 이후 왕실과 정부기구가 재편되고 관서행정에 필요한 각종 역을 고립해 쓰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중앙의 재정규모는 긴축재정을 표방하는 정부의 정책과는 달리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이에 중앙정부는 貢弊의 간행과 貢市人詢막을 통해 이러한 과외별역을 스스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19세기까지 지속해갔다. 18세기 이후 정부의 대공시인정책이 ``詢막``의 형태로 전개된 것은 이처럼 정부재원을 조달시장에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인들이 겪는 과외별역의 폐단을 개선해줌으로써 공물조달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타협책에 다름 아니었다. Existing transportation costs, fees, and labor costs linked to the collection of the Uniform Land Tax(Daedongse) were rolled into the Uniform Land Tax following the expansion of the related law(Daedongbeop) nationwide during the late 17th century. The collection en bloc of various spot goods as well as military and corvee labor services under the Uniform Land Tax led to an easing of the abuses associated with the collection of surtaxes and miscellaneous expenses. However, the Joseon government found itself having to run the central and local governments based solely on the amounts collected through the Uniform Land Tax. In this regard, the government sought to overcome the deficit in general expenses by assigning extra corvee labor to the tribute men who paid the costs of tribute products in conjunction with important national events. However, this extra corvee labor privately assigned by government officials on top of the official national corvee labor had the effect of significantly increasing the burden bore by tribute men. In this regard, the government organized consultative meetings that had as their objective the resolution of the problems faced by tribute men and merchants. It also published records related to the situation of tribute men in a book called < Tribute Malpractice(gongpye) >. As such, following the implementation of the Uniform Land Tax Law, the Joseon government continued to try to find ways to alleviate the exploitative nature of the extra corvee labor arbitrarily implemen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agencies and bo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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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학술원 20년의 고전학 연구 성과

        韓榮奎 ( Han¸ Young-gyu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0 大東文化硏究 Vol.0 No.112

        2000년 3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의 설립과 출범은 한국 근대 대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분과 학문으로 고착된 한국 대학제도의 오래된 장벽을 허물고 ‘동아시아’라는 21세기의 새로운 화두를 대학이라는 제도 내부에서 집중적으로 문제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학술원의 연구 성과 가운데 주로 고전학, 고전문학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영인본, 자료집, 학술회의, 학술논문, 학술저서, 연구과제 수주 등의 사안을 정리하며 지난 20년간의 성과를 점검하고, 아울러 향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간단한 제언을 덧붙였다. 이 과정에서 연구 성과에 대한 평가는 자제하고, 지난 업적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데 주력했다. 동아시학술원이 지난 20년 동안 고전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은 임형택, 김시업, 신승운, 진재교, 안대회, 김영진 등 문헌과 고전에 밝은 연구자들이 리더십과 협업을 발휘한 결과였다. 또한 학술원이 변화되는 시대 현실에 맞춰 고전학 핵심 연구기관으로서 타 대학과 견주어 어떠한 특성을 지속시킬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학 분야에서 동아시아학술원이 영인한 자료, 출판한 연구서, 구축한 DB 등은 지난 20년간의 지난한 노력의 결과로서 향후 지속적인 확대 발전이 요청된다. In March 2000, the establishment and launch of Sungkyunkwan University's East Asian Studies Institute was a meaningful 'event' in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universities. It is assessed to be true in two respects. First, it broke down the old barriers of the Korean university system, which has been fixed by sub-disciplinary studies, and proposed a new agenda for East Asia. Second, it was because it sought a new system to combine education and research. Among the achievements of the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this article comprehensively reviewed materials, academic papers, and academic books focusing on the field of East Asian Classical Literature. In this process, I tried to refrain from evaluating research achievements and describe them chronologically. The research achievements made by the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are certainly noteworthy. This is the result of the researchers' efforts. However, rather than being carried out under a consistent and systematic plan, the efforts of individual research subjects were generally gath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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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속성’ 개념의 분화/분단과 문화평등주의

        李하나 ( Lee Ha-na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1 大東文化硏究 Vol.- No.113

        이 글은 식민지시기부터 해방후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 문화예술 및 교양오락 분야에서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정의되었던 개념 중 하나인 ‘통속’과 ‘통속성’ 개념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감성의 분단사’라는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남북의 분단이 단지 국토의 분단, 체제의 분단일 뿐만 아니라 개념의 분단, 나아가 감성의 분단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식민지시기 ‘통속’의 개념은 처음엔 ‘보통’, ‘누구에게나 통하는’ 등의 일상개념으로 시작되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예술 개념으로서의 ‘통속’은 현저하게 ‘저급’과 ‘저속’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일상 개념으로서의 ‘통속’과 예술개념으로서의 ‘통속’은 해방후 각각 북한과 남한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북한에서는 ‘통속’의 긍정적 의미가 확대되어 문화예술에서도 ‘통속성’이 지향되었으나, 남한에서는 ‘통속’의 긍정적 의미가 사상되고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되어 ‘통속성’은 지양되어야할 무엇으로 치부되었다. 북한에서 ‘통속성’은 ‘인민성’의 중요한 내용으로서 여겨진 반면, 남한에서는 ‘통속성’의 문제가 ‘대중성’과 함께 거론되어 ‘대중성’에 포함되어 이해되기도 하고 ‘대중성’의 하위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어느 쪽이든 ‘통속성’은 대중의 저급한 취향을 뜻하는 말로서 부정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20세기 초 평등의 관념이 한국사회에 들어오면서 대중 누구나 계몽과 각성을 통해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는 문화평등주의가 대두하였는데, 당시 ‘통속교육’의 활성화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처음엔 결과의 평등이 중시되었지만 점차 과정의 평등 쪽으로 강조점이 옮겨갔다. 일상개념으로서의 ‘통속’이 대중의 성장을 전제로 결과의 평등을 중시하는 평등주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문화예술 개념으로서의 ‘통속’은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위계를 전제로 기회 균등이라는 과정의 평등을 중시하는 평등주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남한은 후자를, 북한은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남북은 두 개의 평등주의에 기반한 두 개의 ‘통속성’을 갖게 되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ical transition process of the concept of 't'ongsok'(popularity), one of the concepts that has been constantly mentioned and redefined in the field of culture, arts and entertainment during the period from colonial period to the 1990s through liberation. It aims to reveal that the division of the North and the South is not only the division of the country, the division of the system, but also the division of the concept, and further the division of affect. The concept of 't'ongsok'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itially began with the concept of life such as 'normal' and 'connected to everyone', but since the mid-1930s, 't'ongsok' as an art concept remarkably understood the meaning of 'low grade' and 'low taste'. 't'ongsok' as a concept of life and 't'ongsok' as an artistic concept were developed into North Korea and South Korea respectively after liberation. In North Korea, the positive meaning of 't'ongsok' was expanded to the culture and arts, but in South Korea, the positive meaning of 't'ongsok' was thought and used only as a negative meaning, so 't'ongsok' was regarded as something to be avoided. In North Korea, 't'ongsok' was regarded as an important content of 'inminsŏng', whereas in South Korea, the issue of 't'ongsok' was discussed along with 'taejungsŏng' and understood as being included in 'taejungsŏng' and understood as subordinate to 'taejungsŏng'. It also became, either way, 't'ongsok' has been used negatively as a term referring to the poor taste of the public. As the notion of equality entered Korean society in the early 20th century, cultural egalitarianism emerged, saying that anyone in the public could enjoy a high level culture through enlightenment and awakening, and the activation of 't'ongsok gyoyuk' at that time came from this atmosphere. From the point of view of equality, at first, equality of outcomes was emphasized, but the emphasis gradually shifted toward equality of process. While 't'ongsok' as a concept of life is based on an egalitarian sentiment that emphasizes equality of outcomes on the premise of the growth of the public, 't'ongsok' as a concept of culture and art is based on a process of equal opportunity on the premise of a hierarchy between intellectuals and the public. It was based on an egalitarian sensibility that values equality. By choosing the latter for South and the former for North Korea, the South and North have two concepts of 't'ongsok', or two kinds of egalita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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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쏘련을 향하여 배우라 ― 1945~1948년 조소문화협회(朝蘇文化協會)의 조직과 활동

        유기현 ( Ryu Kee-hyun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7 大東文化硏究 Vol.0 No.98

        본고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조소문화협회의 조직 과정과 활동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문화 건설`의 측면에서 북한의 국가 건설 과정을 분석한다. 1945년 11월에 창립된 조소문화협회는 초기에는 지식인 중심의 `문화운동 전위단체`를 지향했다. 그러나 1946년 말~1947년 초, 냉전이 공식화되고 분단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북한 지도부는 건국을 위한 `사상개혁` 운동을 한층 강화했다. 북한은 `건국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인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며, 소련의 `선진 문화`와 국가 건설 경험을 대중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그러한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라 인식했다. 이에 따라 북한 지도부는 1947년 초 대대적인 개편작업을 통해 노동자·농민 등 광범한 대중을 회원으로 포괄하는 `군중단체`로 협회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소련 `선진 문화`에 대한 학습이 전 인민적 실천운동의 지위를 부여받으면서 조소문화협회는 단기간 안에 농민·노동자 속에서 다수의 회원을 확보하고 중앙본부에서 조소반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조직체계를 완비했다. 조소문화협회는 북한이 국가 건설 과정에서 소련 문화를 매개로 인민들의 사상·의식을 환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 정권은 협회를 통해 수입한 소련 문화를 통해 자칫 모호해 질 수 있는 건국의 노선·방략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전국적으로 구축된 조소문화협회의 조직을 통해 보급된 소련의 문화적 양식은 북한 문화의 기본적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This paper analyzes North Korea`s state-building process in the viewpoint of `cultural construction`, by studying Korea-Soviet Cutural Association(KSCA)`s organization and activities from 1945 to 1948. Soviet Union`s culture had an important impact on the making of North Korea`s culture during the `state-building period`, and KSCA functioned as North Korea`s key channel to accept and study Soviet`s culture. This research examines KSCA`s overall organization and activities, analyzing the reason why North Korean regime tried to propagate Soviet`s culture and their experiences in socialistic nation building. KSCA started as a friendship organization between Soviet armed forces and Korean leaders right after Soviet`s occupation of north of the 38<sup>th</sup> parallel. KSCA changed its identity as a cultural exchange organization after `trusteeship crisis` of early 1946, setting up branch offices in North Korea`s major cities, publishing magazines, and establishing relationship with Soviet`s All-Union Society for Cultural Relations with Foreign Countries (VOKS). At this time, KSCA aimed to be an intelligentsia-oriented group professionally researching and popularizing Soviet`s culture. However, KSCA`s character fundamentally changed due to North Korea`s political changes around late 1946 to early 1947. North Korean regime initiated `ovement for Mobilizing Nation-Founding Ideology (Kunguk Sasang Chongdongwon Woondong)` to promote the people`s reformation of thoughts. North Korean people`s active participation was a key to succeed in these nation-building works, and propagating Soviet`s `advanced culture` and their historical experiences would be a great impetus for the regime to motivate the people. As a result, North Korean regime transformed KSCA from intelligentsia-centered group to mass organization embracing hundred thousands of peasants and laborers as members. In conclusion, KSCA played a key role in ideology education of North Koreans by using Soviet culture. Most of socialist countries also had similar kinds of friendship associations with the Soviet Union, but their functions were limited in the field of cultural exchanges. On the other hand, KSCA actively collaborated with North Korea`s national tasks of liquidating colonial inheritance and constructing new culture, showing clear differences over the other socialist countries` friendship assoc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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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선과 연대의 정치성 : ― 『韓中文化』와 중국발 모더니티의 수용을 중심으로

        崔珍豪 ( Choi Jin-ho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9 大東文化硏究 Vol.0 No.106

        본 논문은 해방기 잡지 『韓中文化』를 중심으로 한국의 중국 모더니티 수용 양상을 다루었다. 해방된 한국 사회는 당면한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과의 협력과 연대를 고민한 바 있다. 국공의 분열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중국’은 자신의 ‘운명’을 ‘신민주주의’ 속에서 탐색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치적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식인들이 중국을 통해 새로운 지적·문화적 가능성을 찾고자 한 배경이다. ‘韓中文化協會’와 『韓中文化』 역시 이런 지적 자장의 일부분을 구성했다. 그러나 냉전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신민주주의’ 관련 담론들은 공론장에서 사라진다. 해방기 한국 사회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두 모더니티가 충돌했고, 마오쩌둥으로 상징되는 모더니티는 은폐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친목과 연대를 말하는 『한중문화』는 이 충돌과 은폐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韓中文化』는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를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중국’의 변화를 사고하지 못했다. ‘문화와 전통’을 공유한 집단의 연대와 교류만을 상정하고, ‘적’으로 상징되는 ‘사회주의 중국’애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데 이로 인해 당대 중국을 이해할 전망을 상실한다. 혁명의 역동성으로 상징되는 ‘중국문제’의 정치성이 제거되자 현재의 중국이 아니라 ‘과거의 전통 중국’만이 남게 된다. 결국 해방기 ‘중국’을 다룬 종합잡지였던 『한중문화』는 현실의 중국을 사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역동적 중국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중국 문화’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중문화’의 상호 교류가 불가능하게 된 이유를 돌아본 순간, 한국인들의 통념화 된 중국이해와 대면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韓中文化』의 중국의 모더니티의 수용은 친선과 연대로 표명되는 한중교류의 한계와 가능성을 드러낸다. In this research, I analyzed the Chinese related books produced and distributed in the Liberation Period, and the 『Korean-Chinese Culture』 issuing process by the culural association of Korea-China and the discourse contained in it. It is work to materialize the historical context of understanding to China at this time. At that time, Korean society thaught about cooperation and solidarity with China in order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of Korean society. Despite the differences between left and right political positions, Korean society looked for new intellectual and cultural possibilities in China. These facts are the background of the Korea-China Cultural Association and the Korea-China culture that interested in Chinese Modernity. Under the influence of the Cold War, Chinese socialists' interest in Korean society had disappeared from the surface. 『Korean-Chinese Culture』's attitude of solidarity with 『Korean-Chinese Culture』 shows this kind of aspect well. 『Korean-Chinese culture』 did not think about the actual driving force of China despite talking about goodwill and solidarity with China. By abandoning the understanding of the enemy, it abandoned the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modern China. The political nature of the "Chinese issue" symbolized by the driving force of the revolution has disappeared. As a result, in China's intellectual discourse, real China has disappeared and only past China has remained. However, paradoxically, at the moment of thinking about conditions that China and Korea can not interact, someone were able to dismantle Korean's understanding of China's popularized China. In conclusion, China's modernity acceptance of 『Korean-Chinese Culture』 shows another possibility from the limit of Korean-Chinese exchange consisting of goodwill and solidarity names.

      • KCI등재

        북위후기(北魏後期) 낙양(洛陽) 거주 서역인(西域人)과 서역문화(西域文化)

        최진열 ( Jin Yeoul Choi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大東文化硏究 Vol.0 No.87

        본 논문은 북위후기(北魏後期) 낙양(洛陽)에서 활동했던 서역인(西域人)과 서역상품(西域商品), 서역문화(西域文化)를 다루었다. 북위후기(北魏後期) 수도 낙양(洛陽)에는 관리(선건(善乾)과 안토근(安吐根), 화안(和安))와 무사(武士), 황제(皇帝)의 후궁(우선희(于仙姬)), 상인(商人), 악인(樂人), 무인(舞人), 승려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서역인(西域人)이 거주하였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따르면 북위후기(北魏後期) 이후 낙양(洛陽)의 인구는 10만 9천여 戶였다. 서이(西夷), 즉 西域人이 거주했던 모의리(慕義里)에 거주하는 1만 호(戶)는 洛陽 전체 호수(戶數)의 9.1%에해당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북위(北魏)의 수도 洛陽에 체류한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가 3천여 인이었고, 당시 북위(北魏)의 선무제(宣武帝)가 영명사(永明寺) 천여간(千餘間)를 세워 이들을 거주하게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명사(景明寺)에도 서역호(西域胡) 사문(沙門)이 거주하며 수도하였다. 이처럼 北魏後期의 수도인 洛陽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西域人들이 당시 洛陽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西域人들은 서역(西域)의 불교(佛敎)를 북위(北魏)에 전파하고 유리제품과 은세공품 등서역산(西域産) 제품과 호상(胡床)·호가(胡家)·비파(琵琶) 등의 악기(樂器)를 들여왔으며 서역(西域)의 잡기(雜技)와 가무(歌舞)를유행시켰다. 北魏後期 수도 洛陽에는 西域人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국인이 거주하였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성남(城南)」 선양문조(宣陽門條)에 따르면 영교(永橋) 남쪽에 김릉관(金陵館)·연연관(燕然館)·부상관(扶桑館)·엄자관(嚴自館) 등 북위(北魏)에 귀부(귀부(歸附))한 외국인들을 수용하는 사이관(四夷館)이 있었다. 北魏에 귀부한 외국인들은 이곳에서 3년을 지낸 후에 남조(南朝) 출신(원문에는 오인(吳人))은 귀정리(歸正里), 북이(北夷)는 귀덕리(歸德里), 동이(東夷)는 모화리(慕化里), 서이(西夷)는 모의리(慕義里)로 옮겨 거주하였다. 洛陽에서 출토된 도용(陶俑)을보면 洛陽에는 아프리카 흑인과 아라비아인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앙아시아나 몽골고원의 유목민과 고구려인(高句麗人)들도 거주하였다. 이처럼 ‘국제도시’ 洛陽에서 거주했던 한인(漢人)이외의 다른 종족(種族)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문화와 습속을 유지하며생활하였다. 洛陽에 거주했던 西域人과 西域文化는 洛陽에 漢人과 한문화(漢文化)만 존재했을 것같은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西域人과 西域文化는 호인(胡人)(유목민)들이 漢人과 漢文化에 일방적으로 경도(傾倒)되는 것을 막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洛陽에 살았던 북방의 유목민, 고구려(高句麗) 등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들, 남조(南朝)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앙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 西域 사람들의 고유 문화도 다른 種族들에게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北魏의 호인지배층(胡人支配層)이 일방적으로 漢文化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種族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洛陽이었다. In this essay, I analyzed the people, goods and the culture of Western Region in Luoyang in last half of BeiWei Dynasty. There were many people of Western Region such as officials, soldiers, royal concubines, merchants, musicians, dancers, and Buddhist priests etc in Luoyang, capital city of BeiWei Dynasty. According to “The Monasteries of Luoyang”(Luoyang qielan ji), population of Luoyang were 109,000 households or so, where ten thousands of people from Western Region lived, 9.1 percent of Luoyang population. Furthermore, at least 3 thousands of Buddhist priests from Western Region were engaged in missionary work and meditated in the temple of Yongming and Jingming in Luoyang. The one-tenth people from Western Region affected the culture of Luoyang. For example, they brought Buddhism into the Luoyang and around the city, sold the glassware, silver wares, table of Western Region, and the musical instruments such as the hujia, Western mandolin and so on. Many kinds of acrobat, music and dance from Western Region were spreaded in Luoyang. There were also many other foreigners in Luoyang, such as the Afiricans, the Arabs, nomads from Central Asia or the Mongolia grassland, the Koguryo people, and the Chinese from Sourther China called Souhtern Dynasties(Nanchao). They lived in Luoyang, mantaining their orginal food, clothing and shelter, languages, and other native customs. The people and the culture of Western Region in Luoyang in last half of BeiWei had the shock absorbing role between the Xianbei people and the Chinese people, or between the culture of Xianbei or nomad culture and the Chinese culture. The foreigners from the Afirica, Arab, Central Asia or the Mongolia grassland, Koguryo and Souhtern Dynasties in Luoyang made achievements in cultural interaction. Luoyang, the capital city of BeiWei in last half of BeiWei Dynasty was not a melting pot of race and culture but a salad boul of of race and culture, Which was attributed to the people of Western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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