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高麗 義天과 宋 楊傑의 불교 교류에 대한 재검토

        저경하(Chu, Qingxia)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4 역사문화연구 Vol.49 No.-

        義天과 宋 僧侶의 교류에 대한 연구와 대조적으로, 義天과 宋 居士의 교류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본 연구는 義天과 宋 居士 楊傑의 교류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구체적으로 다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義天과 楊傑의 교류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을 하였다. 여기서 義天과 楊傑이 적어도 1085년 8월부터 10월(혹은 11월)까지 東京으로부터 杭州까지 동행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다음에 蘇軾의 詩 「送楊傑」을 통하여 義天과 楊傑의 관계를 살펴보았는데 특히 "两勍敌" 개념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수정하고 義天과 楊傑은 모두 아주 깊은 불교에 대한 조예에 이르렀고 서로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깊은 교류와 정확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도 강조하였다. 그리고 蘇轍의 詩 「次韻」을 통하여 義天과 楊傑의 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주로 "屬國"과 "戴角魚"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하여 정확히 밝힘으로써 義天과 楊傑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였다. 蘇轍은 여기서 義天과 楊傑을 같이 높이 평가하였고, 이 두 사람은 초월적인 佛敎의 높은 지경에 이르렀고 더 이상 세상의 명예욕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극찬하였다. In contrast to studies about the exchanges between Goryeo Uicheon and Song Buddhist monk, there are hardly any studies about Uicheon and Song Jushi(confucian buddhist lay). This study focuses extensively about Goryeo Uicheon and Song Jushi Yangjie in three ways. The initial discussion confirms the encounter between Uicheon and Yangjie and the fact that they accompanied each other from Dongjing to Hangzhou during August to October (perhaps November), 1085. The following part furthermore investig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Uicheon and Yangjie, while exploring the conventional concept of "Liangjingdi" more clearly, through the poem "Songyangjie" by SuShi. It is noted here that not only did both Uicheon and Yangjie had profound knowledge in Buddhism and held each other in high regard, but they also had clear understanding of each other in their deep intellectual exchange. Lastly, the relationship between Uicheon and Yangjie is explored through the poem "Rhyming" by SuZhe. Here the relationship is reassessed based on the distinction of who "Shuguo" and "Daijiaoyu" are. In this poem, SuZhe evaluates Uicheon and Yangjie highly and praised that both attained higher plane of transcendence in Buddhism and no longer bound by worldly fame.

      • KCI등재

        古代 韓中佛敎交流의 一考察 - 高麗의 義天과 浙江의 淨源 : 古代 韓中佛敎交流의 一考察

        辛奎卓(신규탁) 한국동양철학회 2007 동양철학 Vol.0 No.27

        高麗의 義天(1055-1101년)과 北宋의 淨源(1011-1088년)과의 교류는 韓中 양국의 佛敎交流 歷史의 중요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義天僧統은 淨源法師의 학문을 깊이 흠모하여 몸소 정원법사가 살고 있던 浙江을 방문하여 교류를 하였다. 귀국 후에는 天台宗을 세우니 그가 入寂하기 4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정원법사는 華嚴宗의 宗師라는 점이다. 화엄종사인 정원법사와 교류하고, 또 출가도 화엄종 寺刹로 했고, 그 후 본인 저술활동에서도 ‘海東傳華嚴大敎沙門’이라고 自述한 의천승통이 천태종을 開創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본 논문의 問題意識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필자는 당시 의천승통이 교류한 정원법사의 화엄사상을 이해하는 것에서 해결의 단서를 찾아보았다. 정원의 화엄사상은 크게 둘로 요약이 되는데 첫째는 懺悔思想이고 둘째는 端坐思惟이다. 그는 이 두 사상을 통하여 화엄의 禮敬, 懺悔, 供養, 發願, 念佛 등의 儀式을 整備했고, 한편으로는 ‘一心’의 體驗과 確信을 갖도록 하였다. 淨源法師는 중생들의 ‘一心’에 本來的으로 구비되어 있는 ‘無障碍法界’를 자각하라 한다. 이러한 ‘一心’의 활동에 의해 드러나는 ‘無障碍法界’에 稱合하여, 그 작용 속에서 生來的으로 활성화되는 普賢菩薩의 誓願을 실천하라고 한다. 의천승통이 방문한 당시의 杭州는 바로 이런 불교의 修行法들이 유행하던 지역이었고, 정원법사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杭州에서 宋代 華嚴宗을 再興한 學僧이었다. 바로 이 정원법사를 고려의 의천승통이 만나고 온 것이다. 따라서 의천의 불교사상 속에는 이러한 정원법사의 사상, 다시 말하면 敎學과 懺悔와 觀行과 普賢行이 調和를 이루는 그런 화엄이 들어있다. 의천승통이 배워 온 것은 唐代의 화엄이 아닌, 이미 天台와 淨土 그리고 南宗禪의 綜合的으로 收容한 宋代의 화엄이었다. 그리하여 杭州의 求法旅行을 마치고 돌아온 의천승통은 敎學, 懺悔, 觀行과 普賢行이 서로 調和하는 불교수행에 입각하여, 당시 開京에서 전개되던 불교계의 葛藤을 融和的으로 統一調和하려는 의도에서 天台宗을 開創한 것이다.

      • KCI등재

        의천의 『圓宗文類』 編纂과 그 의의

        朴鎔辰(Park Yong-Jin) 한국사학회 2006 史學硏究 Vol.- No.82

        본고는 의천의 『圓宗文類』의 체제와 내용분석을 통하여 의천의 화엄사상은 물론 고려중기 화엄학 이해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원종문류』는 의천이 편찬체제와 내용을 편정하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의 의학사문(義學沙門) 처연(處淵)과 이기(理琦)등이 교정하였다. 의천의 화엄교학은 이기, 낙진(樂眞) 등에 의해 이끌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들과 함께 『원종문류』를 편찬하였다. 『원종문류』의 편찬시기는 「시신참학도치수(示新參學徒緇秀)」, 의천의 법호, 국왕 선종의 이름 피휘(避諱) 등으로 보아 1087년 이후 1088년경이다. 의천은 『원종문류』를 편찬하여 화엄종의 여러 가지 이설을 종합 정리하고, 새로 배우는 학도가 면학에 참고토록 하였다. 『원종문류』는 모두 22권이었지만 제1권 제문발제류(諸文發題類), 제14권 제문행위류(諸文行爲類), 제22권 찬송잡문류(讚頌雜文類)만이 현전한다. 『원종문류』 권1은 〈제문발제류〉로서 화엄종 관련 문류에서 주제를 나타내는 ‘발제(發題)’의 문류를 유취한 것이다. 『원종문류』 권14 〈제문행위류〉는 탐현기, 오교장, 수현기, 공목장, 지상문답의 화엄 장소에서 ‘행위(行位)’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원종문류』 권22 〈찬송잡문류〉는 『원종문류』의 마지막 권에 해당하며, 화엄경과 고승 대덕에 대한 찬문, 송, 화엄결사문 등 잡문을 수록하였다. 『원종문류』 편찬의 불교사적 의의는 의천 당대에 유행하였던 동아시아 불교계를 포함한 고려중기에 유행한 다양한 화엄 문류를 종합 정리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의천은 『원종문류』를 편찬하면서 중국의 화엄 조사의 장소를 참고하고 인용하였다. 이 가운데 지엄, 법장, 징관 등의 저술을 주로 인용하였으며, 이들의 찬술을 통하여 화엄교학을 정리하였다. 의천의 화엄사상은 초기 징관의 화엄교학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입송구법 이후 법장계 정통 화엄종 승려인 정원으로부터 법을 받아 계승하였다. 즉 의천의 화엄교학에 대한 이해의 범위가 법장 등으로 보다 확대되었는데 바로 『원종문류』를 통하여 당대의 화엄학을 정리한 것으로 판단된다. Wonjong-munryu(圓宗文類) was edited between 1087 and 1088 (before editing the Sinp'yon-Chechong Kyochang Ch'onglog). Wonjong-munryu was an easy guide book for the students who start to learn Hwaom sect, and aims to comprehend the sacred book and to convince himself of a truth through Jangso(章疏). The name, Wonjong-munryu, came from the king. Wonjong-munryu is a work for which Uichon compiled its editing formation and content, and his disciple, Hwaeomgyogwan(華嚴敎觀)'s Uihaksamun(義學沙門) took charge of its revision. Wonjongmunyu consists of 22 volumes, but the first, Jemunbaljeryu(諸文發題類), the fourteenth, Jemunhangwiryu(諸文行位類), and the twenty second, Chansongjapmunryu(讚頌雜文類) currently have been handed down. The commentaries in Wonjong-munryu were mostly the collection of the writings from the famous Chinese priests, for example Beopjang, Jinggwan, Jongmil and Jiom, in Hwaom sect(華嚴宗). The study abroad in Song enlarged Uichon's understanding of Hwaom, from Jinggwan-Hwaom to Beopjang-Hwaom after. With this understanding, he set up a HwaomKyohak (華嚴敎學) in the middle Koryo dynasty. Saying that comprehensive arrangement of various Hwaom Munryu which was in fashion in the middle Koryo dynasty was carried out has a meaning.

      • KCI등재후보

        의천의 宋 天台敎學 交流와 天台敎觀

        박용진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4 No.-

        의천은 입송구법시 천태교학자 가운데 山家派의 南屛梵臻과 廣智尙賢, 慈雲遵式系와 긴밀하게 교류하였는데, 南屛系 慈辯從諫에게 受法하였다. 山家派 三家 가운데 廣智尙賢의 문도와도 교류하였고 尙賢의 법손이 明智中立이며 中立의 제자가 慧照法隣이다. 또한 의천은 遵式系 元淨과도 교류하였다. 元淨은 遵式系로 정토신앙을 강조하였고, 從諫은 知禮系로 禪的 실천을 강조하였다. 송대 천태교학자의 논쟁사를 중심으로 의천이 『敎藏總錄』에 수록한 천태교학자의 저술과 志磐의 『佛祖統紀』 「山家教典志」의 그것과 비교한 결과, 『敎藏總錄』에 知禮 이후 천태교학서를 수록하였는데 모두 19명 109부 282권에 이른다. 『藏總錄』에 이른바 산외파, 후산외파의 자료가 수록되었다고 하여 의천이 산외파의 사상에 주목한 근거자료로 제시되었지만, 실제 의천은 관련 자료를 가능한 수록하였고, 이는 志磐의 『佛祖統紀』「山家教典志」에도 수록되었던 바, 의천의 사상경향을 산외파에 두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山家․山外의 구분은 후대의 계파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의천 입송구법 당시 계파인식에 대한 그의 이해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의천의 天台敎觀은 敎相門과 觀門으로 구분되며, 圓明한 止觀은 의천의 天台觀門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의천은 空에 집착하거나 아울러 경서에 빠지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止觀은 語黙이 自在하기 때문에, 經文을 탐구하여 敎理를 나타내고 깨닫는 것이다. 의천의 天台敎觀 즉, 敎相門에 대하여는 會三歸一의 ‘圓妙한 一法’을, 觀門으로는 三觀이 천태종의 瓔珞이 된다. 이들의 경전적 근거는 法華經, 智度論 등이지만 부처로부터 직접 전승받은 金口親承, 기타 佛經 등에서 天台敎觀의 주요 근거를 찾았다. 의천의 天台敎觀은 고려초 천태종이 개립되지는 않았지만 학적 전통을 남긴 諦觀의 『천태사교의』교학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澄觀의 華嚴經疏에서 천태종 개창의 근거와 화엄종과의 상통 근거를 확보하였다.

      • KCI등재

        義天의 入宋求法과 宋 僧侶들과의 교류

        박현진 전북사학회 2019 전북사학 Vol.0 No.55

        본고에서는 의천과 관련된 사료에서 확인되는 송나라 승려와 그들과의 교류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의천은 1085년 4월에 송나라에 가서 송나라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만나고, 불교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1086년 5월에 고려로 돌아왔다. 의천은 1085년 입송 이전부터 송나라 화엄승인 정원과 이미 교류를 하며 관계를 형성하였다. 정원과는 당시 송과 고려 사이를 왕래하던 제3의 인물을 통해 양국의 상황과 불교계 흐름을 파악하였다. 의천과 정원은 단지 서신만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화엄경 관련 서적도 주고받았다. 특히 의천은 입송 전에 정원에게 ‘교승목록’을 전해주는 등 이미 교장 수집 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 의천은 고려에서 정원의 초상화도 보았으며, 둘은 입송 전에 이미 사제관계를 형성하였다. 입송한 후에는 의천은 밀주~개봉~항주~개봉~명주로 이어지는 입송구법 여정 속에서 화엄, 천태, 선, 율, 범학 등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과 교류하였다. 교류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 의천 귀국시 송별시와 글을 보내 교류사실을 알 수 있는 인물은 약 40여명이다. 입송 당시에 의천은 고려에서 ‘장소목록’을 가지고 갔다. 귀국한 후에도 이들 대부분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비롯하여 서로 필요한 불교 관련 서적을 주고받았으며, 또 서로가 만든 서적을 교감, 교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088년에는 정원이 입적하였는데, 정원의 입적과 관련하여 다른 승려들과의 서신 교류도 주목되며, 의천이 귀국하고 나서 10년이 지난 후에도 몇몇 송나라 승려들과 꾸준히 교류한 것이 확인된다. 의천이 몸소 송나라에 있었던 기간은 1년 남짓이었지만, 그의 구법은 입송하기 전부터 귀국한 이후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실은 신편제종교장총록의 편찬 등으로 나타났다. In the present manuscript, Buddhist monks in the Song Dynasty who can be confirmed in historical records as being related to Uicheon, and his interactions with them, are reexamined. Uicheon went to Song in April 1085; he met with Buddhist monks of various denominations and collected Buddhism-related books, returning to Goryeo in May 1086. Uicheon had already interacted and established a link with Jeongwon, a Huayan monk in Song, before he went there in 1085. Uicheon understood the situation of the two countries and the flow of Buddhism by communicating with Jeongwon through a third person who traveled between Song and Goryeo. Uicheon and Jeongwon exchanged not only letters, but also books related to the Avatamska Sutra. In particular, Uicheon was already performing “gyo-jang” collection activities such as sending Jeongwon “Gyoseungmongnok.” In addition, Uicheon saw Jeongwon’s portrait in Goryeo, and they had already formed a student-teacher relationship even before Uicheon went to Song. After Uicheon went to Song, he interacted with Buddhist monks of various denominations including Huayan, Tiantai, Zen, vinaya, and Buddhist studies during his journey of seeking Dharma in Song from Milju to Gaebong, Hangju, Gaebong, and Myeongju. Uicheon interacted with approximately 40 Buddhist monks in Song, including those whose time of interaction can and cannot be specified, and those whose interaction can be identified by farewell poems or works of writing sent to him when he was returning to Goryeo. Uicheon took a “catalog of writing and commentaries” with him when he went to Song and collected writing and commentaries from Buddhist monks in Song. He corresponded with most of those monks even after he returned to Goryeo. They maintained contact, asking after each other, exchanging Buddhism-related books they needed, and requesting the proofreading of each other’s books. In 1088, Jeongwon passed into nirvana; correspondence with other monks regarding Jeongwon’s passing is worth noting, and it can be confirmed that correspondence with some of the monks in Song continued even 10 years after Uicheon returned to Goryeo. Even though Uicheon’s stay in Song only lasted a little over a year, his visit to Song was meaningful in that his seeking for truth continued from before he went to Song to after returning to Goryeo, significantly affecting his activity after his trip.

      • KCI등재후보

        義天에 대한 연구의 현황과 그 전망

        박용진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9 한국학논총 Vol.32 No.-

        본고는 의천의 연구 전반을 살펴보려 의도하였으며, 의천의 생애와 정치적 입장, 의천의 편찬, 의천의 사상과 전승, 의천과 그의 사상에 관한 연구의 전망으로 대분하여 살펴보았다.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의천은 일찍부터 주목되어 온 인물이고, 연구 업적도 적지 않아 수많은 논저가 발표되었으며, 개별 주제로 다루어진 분야는 그의 정치ㆍ사회적 활동, 사상 편력만큼이나 다양하였다. 의천 당대 중앙집권적 귀족 관료제 사회에 있어 의천의 정치적 입장은 문벌귀족과 대립되는 가운데 왕권 강화를 강조하였고, 화엄이나 천태사상의 圓融이나 會通思想에 의거하였다. 의천의 현전 찬술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圓宗文類』,『新編諸宗教蔵総録』,『大覺國師文集』등으로 이들에 대한 연구성과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의천의 화엄 및 천태사상에 대하여, 會通이나 圓融思想은 꾸준히 제기되어 온 바이다. 의천사상의 중요성은 고려시대 사상사상 전기와 후기를 계기적으로 이해하는 관건이라는데 있다. 의천의 사상을 분석할 때 당시 송, 요, 일본 등 동아시아 제국의 불교계의 동향을 비교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KCI등재

        의천의 성상회통(性相會通) 연구

        김용환(金容煥)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7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Vol.73 No.-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은 화엄종 계통의 승려로서 천태교학을 연구하고 천태종을 세웠다. 천태사상으로 국가기반을 공고히 하고, 성상회통에 근거하여 선(禪)과 교(禪敎)의 회통을 꾀하였다. 당시 고려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다. 의천은 교단을 정비하고 올바른 불도를 전파하고자 천태사상을 전개하였다. 천태사상에서 존재를 관찰하는 것을 공제(空諦), 공제 때문에 부정되기에 존재하는 것을 다시 ‘가(假)’로서 긍정하는 것을 가제(假諦), 그리고 가제(假諦)에 머물지 않고 가제와 공제를 상호 부정하는 것을 중제(中諦)라고 한다. 천태사상에서는 일체에서 삼제원융(三諦圓融)의 경지를 깨달음의 궁극경지로 삼는다. 이러한 삼제원융에 근거하여 의천은 성상회통을 원돈일승의 이화회통, 사찰제영의 기화회통, 전법게송의 실화회통으로 인문가치를 삼원일통으로 살리면서 일상에서 진실추구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의천은 선종여론을 주도한 이자현에게 선시로서 선(禪)과 교(敎)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펴면서 성상회통으로 선과 교를 회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선시에서 선의 세계를 제시하면서 선과 교의 대립을 부정하였다. 의천은 천태삼관으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하면서, 시적 화자로서 의천 자신의 강학(講學)과 이자현 거사의 참선(參禪)이 성상회통 가치로서 인식하였다.아울러 의천은 일방을 강조함에 따른 불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재종교장(諸宗敎藏)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성상회통의 해인(海印)이 드리워진 곳이면, 그곳이 도량이라는 관점에서 회삼귀일 의 원돈일승의 이화가치를 제시하였다. 사찰제영에 관한 선시를 통해 천태삼관을 밝혔다. 전법게송을 계기로 삼아 제종교장(諸宗敎藏)으로 구현하였다. 성상회통의 해인은 생사경계를 초월한 사사무애와 연동된다. 특히 의천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며 원종문류((圓宗文類)로 제종교장을 실천하고자 고려자료뿐만 아니라 송·요·일본의 자료까지 두루 섭렵하여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을 제작함으로써 성상회통의 새로운 금자탑을 올리게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on the communication between the Nature and the Form in the Nature form in the context of Uichon(1055-1101) as national preceptor. The Wonjong-munryu of Uichon is considered significant in the aspect of cultural exchange. The exchange mostly occurred through Song trader. The Wonjong-munryu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Buddhism in Song dynasty. Ithad been utilized Jingyuan and Shihui and Shanxi. The East Asian Buddhusm commentaries were shared among Goryeo, Song, Japan and Liao. Even though political and diplomatic relationships were not established between Goryeo and Japan, the handing down of buddhism commentaries had been transmitted for the quest of enlightened value and the conviviality of enlightened persons. The most common portrayals of enlightened persons are in a state of profound peace, tranquility and equanimity. The communication of the Nature and the form in the context of Uichon can be described as implying three principle of communication such as the reasoning change of the perfect and sudden awareness and energetic change of mutual viewpoint in ten realms and practical change of the communication of the perfect harmony in the Nature form. The public conviviality by the mutual equipment in ten realms can be happened inthe correlative linkage between three thousand of one idea to contribute to activating the private to opening the public conviviality. This study is focused in the formation and activity of the National preceptor Uichon. Uichon’s disciples had been composed of Hwaem sect and Ch’ontae sect. There is a lineage in Uichon’s sect, such as Nakjin(樂眞)-Jingom(澄儼)-Kyeeung(戒膺)-Hwaksim(廓心). In aspect of Uichon’s thought had been succeeded to Wonjong-munryu. The ideas of Hwaom. Beopjang and Jinggwan had been played a important role in developing Uichon’s Ch’ontae sect of the communication between the Nature and the Form.

      • KCI등재

        義天의 불교통합 시도와 그 추이

        채상식(Chae, Sang-Sik)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5 한국민족문화 Vol.57 No.-

        義天(1055∼1101)의 행적은 불교통합 시도로 귀결된다. 이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다음의 몇 가지 방향에서 종합하고 재검토해 보았다. 첫째,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게 된 사상적인 배경은 중국 천태종의 사상체계를 慈辯從諫을 통하여 계승한 智者大師의 일승사상과 止觀에 근거한다. 그러나 화엄종의 논리가 천태종을 성립시키는데 있어 크게 작용하였다. 의천이 천태종의 개창조이지만, 화엄종 출신이라는 점에서 화엄종이 천태종 개창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의천의 사상체계와 불교통합을 위한 노력에는 왕실이라는 정치적인 배경을 밑바탕으로 하였다. 이는 보수적인 사상 기반을 더욱 강화하려는 왕실 위주의 귀족불교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곧 ‘先國家 後宗敎’의 국가적인 요청이 많이 작용한 관불교의 체제를 탈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천태종의 개창에서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숙종년간의 왕권강화책과 천태종 개창은 연관되었다. 셋째, 의천이 표방한 불교사상과 행적 중에 서민대중과 연결될 수 있는 요소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불교통합을 시도했지만, 국가와 왕실 위주였으며, 신분과 계층의 통합을 위한 신앙적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불교계를 위한 많은 노력과 성과를 이룬 의천의 행적과 사상에서 엿보이는 한계이다. The achievements of Uicheon were concluded into the unification of Buddhism. It is synthesized and reconsidered in the following ways. First, The ideological backgrounds that Uicheon founded the Cheontae Order were based on a thought system of that of China. However, logics of the Hwaom Order greatly influenced on foundation of the Cheontae Order. It could be said the Hwaom Order is becoming the basis of creation of the Cheontae Order in the way that Uicheon was from the Hwaom Order. Second, Thought system of Uicheon and his attempt to unify Buddhism had a basis of political background of the royal family. This presents a characteristic of royal-oriented aristocratic buddhism that make the basis of conservative ideas reinforce. In other words, It could not be out of a system of official Buddhism to whom national request of ‘National first, Religion later’(先國家 後宗敎) largely effected. It can be founded in creation of the Cheontae Order, which was connected to policy on strengthening of regal power in the reign of king Sukjong. Third, There was not much to show for points being able to connect to common people among the achievement and the buddhistic thought claimed to stand for by Uicheon. Although he tried to unify buddhism, it was devoted not to an attempt at positional and hierarchical merging but to nation and royal family. This shows the limitation in thought and achievement of Uicheon who had accomplished a lot of efforts and results for Buddhism.

      • KCI등재

        義天의 불교통합 시도와 그 추이

        채상식 釜山大學校 韓國民族文化硏究所 2015 한국민족문화 Vol.56 No.-

        義天(1055∼1101)의 행적은 불교통합 시도로 귀결된다. 이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다음의 몇 가지 방향에서 종합하고 재검토해 보았다. 첫째,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게 된 사상적인 배경은 중국 천태종의 사상체계를 慈辯從諫을 통하여 계승한 智者大師의 일승사상과 止觀에 근거한다. 그러나 화엄종의 논리가 천태종을 성립시키는데 있어 크게 작용하였다. 의천이 천태종의 개창조이지만, 화엄종 출신이라는 점에서 화엄종이 천태종 개창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의천의 사상체계와 불교통합을 위한 노력에는 왕실이라는 정치적인 배경을 밑바탕으로 하였다. 이는 보수적인 사상 기반을 더욱 강화하려는 왕실 위주의 귀족불교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곧 ‘先國家 後宗敎’의 국가적인 요청이 많이 작용한 관불교의 체제를 탈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천태종의 개창에서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숙종년간의 왕권강화책과 천태종 개창은 연관되었다. 셋째, 의천이 표방한 불교사상과 행적 중에 서민대중과 연결될 수 있는 요소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불교통합을 시도했지만, 국가와 왕실 위주였으며, 신분과 계층의 통합을 위한 신앙적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불교계를 위한 많은 노력과 성과를 이룬 의천의 행적과 사상에서 엿보이는 한계이다. The achievements of Uicheon were concluded into the unification of Buddhism. It is synthesized and reconsidered in the following ways. First, The ideological backgrounds that Uicheon founded the Cheontae Order were based on a thought system of that of China. However, logics of the Hwaom Order greatly influenced on foundation of the Cheontae Order. It could be said the Hwaom Order is becoming the basis of creation of the Cheontae Order in the way that Uicheon was from the Hwaom Order. Second, Thought system of Uicheon and his attempt to unify Buddhism had a basis of political background of the royal family. This presents a characteristic of royal-oriented aristocratic buddhism that make the basis of conservative ideas reinforce. In other words, It could not be out of a system of official Buddhism to whom national request of ‘National first, Religion later’(先國家 後宗敎) largely effected. It can be founded in creation of the Cheontae Order, which was connected to policy on strengthening of regal power in the reign of king Sukjong. Third, There was not much to show for points being able to connect to common people among the achievement and the buddhistic thought claimed to stand for by Uicheon. Although he tried to unify buddhism, it was devoted not to an attempt at positional and hierarchical merging but to nation and royal family. This shows the limitation in thought and achievement of Uicheon who had accomplished a lot of efforts and results for Buddhism.

      • KCI등재

        송(宋)에 대한 고려(高麗)의 불전(佛典) 공여(供與)와 그 의도

        석길암 ( Gik Am Seok ) 한국사상사학회 2012 韓國思想史學 Vol.0 No.40

        본 논문은 이러한 의천의 입송구법이라는 특이한 행보와 그 행보 이후에 나타나는 의천과 고려조정의 적극적인 對宋佛典供與에 내포된 저간의 의도를 해명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의천의 입송구법(入宋求法)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 가지 측면에서의 의도를 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章疏의 수집이라는 본래의 목적일 것이고, 둘째는 송에서의 교학 특히 화엄사상의 부흥이었을 것이다. 이미 入宋 전에 송의 사정에 밝았던 의천이 구법과정에서 그리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혜인원을 후원했다는 것은 후자의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는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송 지배층 내에 존재하던 갈등을 확대시키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천의 입송구법이 처음부터 외교적인 의도를 내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교종의 章疏를 구하여 一藏으로 간행하려는 원력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졌던 의천의 입송구법은, 그러나 당시의 국제적 관계에 비추어볼 때 순수하게 구법행으로만 해석되어질 수 있는 범주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그것이 宋 불교계 특히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 계열 승려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 호응이 지속적인 교류관계로 이어졌을 때, 다시 그러한 관계에 대하여 遼가 적극적으로 반응해왔을 때, 이미 그것은 불전교류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의천의 귀국 후에 교장의 간행이 이루어지면서, 의천과 고려 조정이 적극적으로 敎藏의 章疏를 宋의 불교계에 공여하였던 것은, 이미 이러한 효용성을 인지한 후에 나타난 의도적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선종 중심의 송 불교계에서 교장을 수집하고 간행할 만한 여력이 없었던 송의 교종세력의 한계와, 지역과 국제적 관계의 한계로 인하여 교종의 章疏를 널리 수집할 수 없었던 遼의 한계를 전제로 이룩할 수 있었던 결과로 보인다. This paper is for explaining on Uicheon`s special work of entering Sung and finding commentaries, and on, after that, Goryeo dynasty`s presenting buddhist texts to Sung and its intention. Uicheon`s special work of entering Sung, either intentionally or not, achieved his intention in three kinds of respect: the first is original intention of collecting commentaries, and the second is revival of buddhist doctrine, especially Huayan thoughts in Sung. During and after his travel, Uicheon, who made his eyes open to Sung, supported Huiyin-yuan Temple continuously, which makes us understood his intention. The last is naturally to see conflicts within ruling circles of Sung more clearly. There must be not contained diplomatic intention in Uicheon`s traveling from beginning. According to his wish of collecting commentaries and integrating single storage, Uicheon travelled in Sung and sought truth, however, considering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at time, his activities couldn`t be interpreted as pure religious intention. Moreover, when his works were welcomed passionately by Sung buddhist circles, especially by monks of doctrinal sects including Huayan Sect, when such response was continued to lasting exchanges, and when Kotan responded actively to such relations, that was beyond exchanges of buddhist texts already. As publishing Doctrine Storage after Uicheon`s returning, presenting buddhist commentaries actively to Sung by Uicheon and Goryeo had much possibilities of intentional actions after noticing this usefulness. And it was the result drawn from the limitation of Sung`s doctrinal circles that couldn`t afford to collect and publish Doctrine Storage in the circumstance of zen`s leadership, and the limitation of Kotan that couldn`t collect widely owing to regional and international limit.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