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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전북지역의 화재발생과 소방조의 결성

          김상욱 전북사학회 2018 전북사학 Vol.0 No.53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의 미곡산지에 거주하였다. 전북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미곡을 군산으로 실어내기 위한 철도가 1912년에 설치되면서 인구증가와 함께 화재가 다발하였다. 이시기 전북지역의 화재발생과 손해액은 1920년대에 비하면 아직은 적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1910년대에는 1920년대에 비하여 전북에 정착한 일본인의 경제적인 정착이 아직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의 전북지역의 화재는 발생 건수로 보면 한국인이 많았지만 손해액은 일본인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일인의 경제력의 차이와 인구거주의 多寡에서 기인하였다. 일본인 소유의 정미소, 면화공장 등에 화재가 발생할 경우 재산손실이 많이 발생하였다. 또한 인구가 많고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지역에는 화재가 늘어났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 제도 개편에 착수하면서 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府제 실시와 함께 거류민단도 해체하였다. 1915년에 발포한 「조선총독부소방조규칙」은 소방조를 일제의 경찰보조기관으로 만들었다. 소방조의 구성도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한일공동소방조의 결성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소방조의 구성원은 한국인이 다수였지만 소방조의 운영권과 주도권은 일본인이 행사하였다. 전북지역에도 한일공동소방조의 결성이 늘어나면서 일본인이 소방조 운영을 주도하였다. 미곡이출의 중심 항구였던 군산이나 전북의 행정중심지였던 전주 그리고 김제·정읍·이리 등 일본인 지주들의 토지침탈이 활발한 지역에서 소방조의 결성이 이루어졌다. 전북지역의 소방조결성은 전북이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라는 특수성을 배경으로 결성되었다. 일본인들은 전북내륙평야의 미곡을 실어내기 위한 철도 인근에 농장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농장과 사업을 기반으로 지역에서 학교조합, 번영회를 만들고 소방조를 결성하여 소방조가 그들의 이익과 안전을 받침대가 되도록 하였다. After Korean ports were opened to foreign countries, Japanese people stayed in rice producing area of the Honam Plains. As railroads were built to deliver rice from the rice producing area of Jeonbuk to Gunsan in 1912, the population increased and many fires broke out. In 1910s, fires and the amount of damages were still not big in comparison with damages of 1920s as the economic settlement of Japanese people in Jeonbuk was still progressing in 1910s. At Jeonbuk in 1910s, more fires broke out to Korean people, but Japanese people had relatively more damages from fires. It was derived from difference in economic power between Korean and Japanese people and the quantity of the population. When fires broke out in rice mills and cotton plants owned by Japanese people, many damages were caused. Also, fires increased in the areas where many Japanese people staye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rganized the governing body as it began to reorganize its colonial rule system after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disorganized a residents association along with execution of the Bu system in 1914.「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ire Fighting Service Rules」 which was announced in 1915 made the fire fighting service as a subsidiary organ of Japanese imperialism. Although the fire fighting service was composed of both Korean and Japanese people and most of the members were Koreans, but Japanese people managed it. As more Korean and Japanese fire fighting services were formed in Jeonbuk, Japanese people dominated the management. Fire fighting services were usually formed at Jeonju, Kimje, Jeongeup and Iri where Japanese landholders took Korean land by force. Fire fighting services in Jeonbuk were organized based on particularity that Jeonbuk was the nation’s top rice producing area. Japanese people managed farms near railroads to transport rice from the inland. Based on the farms and business, they organized school unions, prosperity projects and fire fighting services to use them as tools for their interest and saf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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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전북노회의 설립과 교세 확장

          정석동 전북사학회 2017 전북사학 Vol.0 No.51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서 시작된 전라북도 지역의 선교는 먼저 군산과 전주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 본고에서 교회란 지역에 설립된 개신교에서 장로교회를 주로 의미하며, 기독교는 개신교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 학교, 병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진행하였다. 목사들로 구성된 선교사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함으로써 전라북도 지역에 기독교를 확산하였다. 교세가 확산됨에 따라 목사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사들을 치리하고 파송하는 상위기관으로서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전북 초기교회는 독노회 시기에는 전북대리회로 편재되었다가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성립하면서 전남과 광주,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노회에 소속하였다가 1917년 제7회 총회 때 전남노회와 전북노회로 분노회 하였다. 전북노회는 전북지역과 충남·제주 일부지역을 선교지역으로 삼았다. 전북노회는 전주·완주를 비롯한 익산과 군산 등 도시는 물론이고 군읍까지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교회는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분포하였다. 전북노회는 주요지역에 거점교회를 설립하고 이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교회들을 분립 개척함으로서 전북지역에 교세를 확장하였다. 전주·완주지역, 익산, 김제 지역의 교회와 교인수가 많이 증가하였다. 교인 현황은 1919년 3·1운동 여파로 감소를 제외하고 매년 6-8백명 증가하였다. 특히 세례로 입교한 교인은 1935년 868명이었는데, 이는 대사경회의 결과이었다. 전북지역교회는 세례로 입교하는 교인을 늘리기 위해 교회들은 사경회, 시장전도, 전도부인 동원 등 다양한 선교방법을 사용하였다. 전북노회 초기 교회 확산과 함께 각 지역별 교인 증감의 현황을 비교하였다. 감소된 군산, 진안지역과 증가된 여타 지역에 대하여 연도별 인구수와 교인수를 비교할 때, 평균 인구증가율을 초월하는 교인증가비율이었다. 교인 증가는 지역의 경제활동이나 도시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전북교회 직원 증가는 곧 기독교 교세 확장이었다. 대표직원인 목사와 장로, 그리고 꾸준히 증가한 장립집사와 서리집사는 맡은 역할과 임무를 통해 기독교 교세의 확장은 물론 지역사회에 기독교의 영향력을 높였다. 본고는 전북노회회의록에 기록된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기초하여 전북 초기선교에서 전북노회를 통한 교회 설립 및 교인의 증가와 교세 확장을 연구하였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이용한 전라북도 전체 교회에 관한 연구는 본 논문이 유일하다. 앞으로 교세 확장에 따른 교회의 활동과 재정운용을 통해 전북 초기선교에서 전북노회가 전북 지역에 기여한 바를 연구할 것이다. After years of the united ecumenical councils, Jeonbuk presbytery had been included in Jeonbuk agency at the time of the Korea presbytery, after then, it belongs to Jeolla presbytery by the formation of the general assembly of presbyterian of Chosun. With the division of Jeolla presbytery into Jeonnam and Jeonbuk presbytery at the seventh general meeting in 1917, Jeonbuk presbytery made the Jeonbuk province and the part of Jeju province as the missionary area. Jeonbuk presbytery was distributed over a wide area of Jeonbuk not only Jeonju and Wanju but also the very small towns and the newly formed cities such as Iksan, and Gunsan. Although there are some local variations, with the decrease in believers in Gunsan and Jinan, with the increase in believers in some area in Jeonbuk, comparing the number of the believers with the annual population, the rate of believers growth was found higher than the average rate of population growth. The increase the number of believers varied with the activities and situations of local churches. It is regarded the increase the officers of the churches as the rise and influence of Christians. It is regarded as the expansion and the increased influence power of Christianity over the area of Jeonbuk presbytery that the steady increase of the number of church service members such as the ministers, the elders, deacons and intern deac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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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전북지역’ 진출 과정과 추이 변화

          김병남 전북사학회 2020 전북사학 Vol.0 No.58

          전통적인 시각에서 전북 권역은 백제의 일부분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백제 전 시기에 걸쳐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의 일부로 써 중요한 지역이 되기 이전 전북 권역의 실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1~3세기 사이의 전북 지역은 백제가 아니라 마한의 일원으로 지역별 소정치체들이 산재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와는 별개로 전북 동부권에는 가야와 연계된 세력이 존속하였다는 고고학적 인 증거가 나타난다. 따라서 고대 시기 전북 권역의 실재적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새로운 추 적과 이해가 필요하다. 나아가 지역 분산적인 형태의 다양한 정치체들이 어 떠한 과정을 거쳐 백제라는 하나의 국가적 틀 속으로 흡수·통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전북지역사라는 시각에서 접근이 요구된다. 이것은 결국 중앙 중심 의 백제사 인식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며, 특히 고대 시기의 전북 권 역의 역사·문화적 원천 모습에 좀 더 접근하여 지역의 다양성을 강화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고대 국가 백제와 전북 권역의 마한 그리고 가야 세력이 어떻게 존재하였고, 또 그들이 어떻게 융합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우선 2장 에서는 백제에게 복속하기 이전 시기 전북 지역의 존재 양상을 간략하게 알 아보았고, 3장은 전라도 지역이 언제 백제와 조우하여 그 영향권 아래 들어 가게 되는 지를 추정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서는 백제의 웅진 천도 이 후 백제가 전라도 지역을 어떻게 재복속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From the traditional perspective, the Jeonbuk region has been understood as part of Baekje. However, this aspect does not apply throughout the pre-Baekje period.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grasp the reality of Jeonbuk area before becoming an important area as part of Baekje. However, the remaining records show that the Jeonbuk area between the 1st and 3rd centuries was not a Baekje but a part of Mahan, where certain localities were scattered. Apart from this, there is archeological evidence that the forces associated with Gaya survived in the eastern part of Jeonbuk. Therefore, in order to know the actual state of the Jeonbuk area in ancient times, new tracking and understanding is necessary.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approach from the perspective of Jeonbuk regional history on how various politics in the form of regional dispersion were absorbed and integrated into a national framework called Baekje. This will eventually lead to a departure from the central center's perception of Baekje history, In particular, it can help to strengthen the diversity of the region by getting closer to the historical and cultural sources of the Jeonbuk region in ancient times. This paper examines the existence of the ancient national Baekje, Mahan and Gaya forces of the Jeonbuk region, and how they merged. First, in Chapter 2, we briefly reviewed the existence of Jeonbuk area before the subjugation to Baekje. Chapter 3 estimated when the Jeolla Province area would encounter Baekje and fall under its sphere of influence. And in the last chapter, we looked at how Baekje was re-submitted to Jeolla Province after Baekje moved to Woo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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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60년대 전북영화사 - 한국영화, 그 고향을 찾아서 -

          김건,김용 전북사학회 2013 전북사학 Vol.0 No.43

          The birth of realism in Korean cinema of the 1950s and the rising of cinema movement based on literature in the 1960s led to the first renaissance in the Korean cinema history. In this situation, Jeonlabuk-do, especially Jeonju-city, occupied a special place in Korean film industry of the 1950s. Jeonju is a place in which not only the major works in Korean Cinema history, such as Gang-Cheon Lee's masterpiece <Arirang> (1954), <Piagol> (1955), are produced, but also the first 16mm colour film, <Princess Seonhwa> (1957) as well. In the 50~60s, moreover, the majority of Korean cinema were made by filmmakers coming from Jeonlabuk-do, and also was mostly shot there. There are plenty of papers and books on Korean cinema history today, but, in fact, there has only few studies on the local film history. While investigating situation of the 50~60s at Jeonju, Jeonlabuk-do as a mecca for Korean film industry, the study examines the works of the filmmakers working there, especially the director Gang-Cheon Lee. Even though filmmakers coming from Jeonbuk left an indelible footprint in Korean film history, taking the lead in the Korean cinema renaissance of the 1950~60s, but they have underestimated due to the shift in the center of its activity to Seoul. It is very important that the cinema of Jeonbuk should receive credit for its role in Korean cinema history, and for that, to restore its originality and succeed to its legiti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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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지역 항일 유림의 인적 교류 - 염재 조희제를 중심으로

          변주승 전북사학회 2018 전북사학 Vol.0 No.52

          염재 조희제는 임실군 덕치면 절골 산골에서 지내며 한말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및 항일활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염재야록』을 편찬했다. 그러나 1938년 임실경찰서에 강제 연행되면서 조희제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모두 압수당해, 문집이나 일기 및 기타 자료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조희제를 중심으로 ‘전북지역 항일 유림의 인적교류’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조희제와 동시대를 살았던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림들의 문집 속에서 조희제와 교류 흔적이 담긴 서찰, 시, 제문, 만사 등등 자료를 통해 조희제의 인적 교류의 일부나마 살펴보았다. 먼저 조희제가 노사 기정진과 송사 기우만의 문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우만을 중심으로 형성된 호남 지역 전체 유림의 교유망에 조희제도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조희제의 교유관계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지만 비슷한 사례인 전남 장성의 유학자 산암 변시연의 일기를 통해서 유학자의 교유관계를 알 수 있다. 또한 간재 문인들의 문집에 수록된 간찰과 만사 등을 근거로 이들과의 교류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염재야록』의 편찬은 결코 조희제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서문을 썼던 최병심, 발문을 썼던 이병은, 교정을 보았던 김영한의 행적과 공로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밖에도 자료를 빌려주고 정보를 나누었던 김교준, 이태현 등 여러 유림들이 있었다. 이들은 송사 기우만과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서 항일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실천했던 전북지역 항일 유림들이었다. 이들 유림은 직접 무장투쟁이나 항일투쟁의 길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학문을 통해 연마했던 유학 가치관을 몸소 지키면서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항일의식을 공유하고 묵묵히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염재 조희제를 중심으로 한 ‘전북지역 항일 유림의 인적 교류’의 일단이나마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Living in the mountainous district of Jeolgol, Deokchi-myun, Imsil-gun, Yeomje Jo Hui-je published Yeomjeyarok, the book which recorded the activities of the patriots involved in the 'Righteous Army' movement,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nti-Japanese movement at the end of the Great Han Empire. But taking Jo Hui-je to Imsil police station in 1938, the police seized all the data he owned. So collections, diaries, and other data were hardly handed down. Because of this, it is not easy to figure out the anti-Japanese Confucians' human interchange with Jo Hui-je as a central figure. This study reviewed the data such as letters, poems, funeral orations and so on regarding the exchange with Jo Hui-je in the collections from contemporary Confucians in Jeonbuk where he lived. Above all, given that Jo Hui-je was a pupil of Nosa Gi Jung-jin and Songsa Gi Woo-man, it was found out that Jo hui-je was involved in the social intercourse network of the Confucians in Honam area, which was formed around Gi Woo-man. Though the data about Jo Hui-je's social intercourse were insufficient, it was possible to identify the Confucians' social intercourses through the diary of Sanam Byun Si-yeon, a Confucian in Jangsung, Jeonnam, a similar case. Also it was possible to identify the exchange with Ganje writers based on the letters and funeral songs included in their collections of literary works. So Yeomjeyarok was not published only by Jo Hui-je. Choi Byung-sim wrote its preface taking a risk, Lee Byung-eun wrote its epilogue, and Kim Young-han proofread it. In addition, Kim Gyo-jun, Lee Tae-hyun and other Confucians shared data and information. As writers of Songsa Gi Woo-man and Ganje Jeon Woo, they were anti-Japanese Confucians who shared and fulfilled anti-Japanese spirit. They didn't participate in armed struggles or anti-Japanese struggles in person, but they lived their own lives while adhering to the Confucian values mastered through learning, shared anti-Japanese spirit and sought the way to fulfill it. Therefore this study has a signification in that it figured out some of human intercourse of the anti-Japanese Confucians around Yeomje Jo Hui-je in Jeonbuk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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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전라북도 지역 콜레라 만연과 정치・경제학

          임종명 전북사학회 2021 전북사학 Vol.- No.61

          1946년 콜레라가 남한 전역으로 확산하던 5월 말 6월 초, 전라북도 지역은 남한에서 주요 발병지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6월 말 홍수로 말미암아 그 지 역에서는 콜레라 발병이 폭증해 7월 상반기에 전북 지역은 남한 9개 시・도 단위 지역 중에서 수위(首位)의 발병세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하반기 집중적인 방역 조치 등으로 전북 지역에서는 8월 이후 발병세가 약화 된 반면 당시 경북이나 경남 지역의 발병세가 계속해서 악화함에 따라 ‘최악 의 발병세’라는 타이틀은 경북 지역이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북 지역의 인구 대비 발병세는 경남・북 지역의 그것보다도 악성의 것이었다. 1946년 전북 지역의 콜레라 유행과 관련해 주목되는 곳은 군산이었다. 군 산은 당시 동아시아 콜레라 병원지(病源地)였던 중국에서 오는 송환민의 착항 이었다. 또 그 지역은 중국과의 밀무역의 중심지로 그곳과의 인적・물적 교류 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군산은 주요 콜레라 발병지가 될 잠재 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군산의 콜레라 발병세는 상대적으로 미 약했다. 이것은 식민지 도시로서 상수도 등 도시 기반 시설이 상대적으로 구 비되어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미약한 발병세는 직접적 으로는 콜레라 발병 초기 발병과 확산 시기부터 선제적 방역 조치가 집중적 으로 이루어졌던 결과였다. 전북 지역의 주요 발병지는 동진강 유역의 정읍과 김제, 부안 지역이었다. 동진강 연안 지역의 콜레라 만연 현상은 기본적으로 농촌 지역의 의료 및 사 회 기반 시설 부족과 관련된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그 현상은 빈한한 가 운데 농업 노동을 생계로 하는 그 지역민의 농가 경제라는 경제적 맥락을 가 진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 지역은 당시 곡창지대로서 당시 심각했던 식량 문제의 해결처였다. 이로 말미암아, 콜레라가 창궐함에도 그 지역에 대해서는 발병지와 외부 지역 간의 교통차단과 발병지 봉쇄・격리라는 당시의 기본적 방역 조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콜레라 창궐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In late May and early June, 1946 when the cholera spread across South Korea, North Chŏlla Province was one of the national centers of the cholera epidemic. However, the late-June flooding brought forth the massive outbreak of cholera in the province, and thus it ranked 1st place in 9 metropolitan city and provinces altogether. The concentrated quarantine measures at late July lessened the pandemic situation of the province in August while the pandemic in North and South Kyŏngsang Provinces continued to be exacerbated. Thus, the title of ‘1st place of the pandemic’ was transfered from North Chŏlla Province to North Kyŏngsang Province. Even so, in relationship to population the pandemic situation in North Chŏlla Province was continually the most virulent in South Korea Kunsan, a contemporary major port city in North Chŏlla Province is note-worthy. Its port worked as the port on which Korean repatriates coming from China, the contemporary regional center of East Asian cholera pandemic, landed. Also, the city as the center of the contemporary contraband trade with China was activated with its human and material exchanges with China. Given this, it could be said that Kunsan could work as a center of the pandemic. However, its pandemic situation was comparatively tenuous. This was due to the fact that the city as ex-colonialist city was relatively well-equipped with urban infrastructures such as water supplies. More significantly, the pandemic situation was under control by the concentrated quarantine measures by the national and local authorities from the time of the initial outbreaks of cholera. The center of the pandemic in North Chŏlla Province was the area of Chŏngŭp, Kimje, and Puan, neighboring upon the Tongjin River. The pandemic of the area was basically due to the fact that the farm belt was poorly-equipped with medical and other social infrastructures. More direct was the economic situation of those destitute peasants who tilled the land even in the midst of the pandemic for their living. More significant was the locality of the area. It was a grain belt in South Korea upon which contemporary South Korean economy troubled with food shortage relied. The South Korean economic context of the farming region exposed its people to the outbreak of the cholera without any basic quarantine measures such as a sanitary cordon around plague spot, or traffic blockade. This constituted the context of the outbreaks of the pandemic cholera in the farm b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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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철기시대 전북 지역의 정치세력

          李宗哲 전북사학회 2020 전북사학 Vol.0 No.58

          청동기시대의 정치세력은 개인이나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적 교섭이나 활동 을 통해 사회적 위계를 형성하고, 주변 세력과의 연계망을 구축함으로써 정 치·경제적 구도를 완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철기시대는 전쟁, 이주, 문물교류와 문화적 파급 등 이전 시대보다 좀 더 동적인 정치세력의 설정과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세력을 압 축·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북 지역에서 정치세력의 형성은 고창 지석묘 사회, 만경강 유역과 진안 용담댐 수몰지구의 송국리형문화 취락사회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특히 만경강 유역은 전주천을 배경으로 하는 동산동 취락, 진안 용담댐 일원은 여 의곡 취락으로 특정할 수 있다. 두 취락은 청동기시대에 거점취락으로서 지역 연계망을 통해 정치·경제·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정치세력은 철기시대에 들어와 「國」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사회조직 과 위계체계로 공식화된다. 이러한 정치세력의 원초적인 중심지는 전주·완 주 혁신도시 일원으로 판단되며, 황방산을 배경으로 하는 이 지역 일대는 전 북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정치의 오리진(Origin)이었다고 사료된다. 특히 청 동기시대에는 가까운 거리에 만성동 취락과 동산동 거점취락이 형성되어 있 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 전통성과 역사성은 더욱 공고하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전주·완주 혁신도시 일원과 익산 일원을 포괄하는 만경강 유역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의 동일 분포권으로서 토착민들 과 유이민들의 통합과 견재가 존재했던 지역적 역사성을 가지며, 무덤의 다 양성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준다. 특히 마한 54국 중 여러 「國」들의 형성과 궤를 같이할 뿐만 아니라 별읍인 소도의 존재가 결부되기 때문에 신지와 천 군의 관계 속에서 정치·사회적 관계가 주목된다. Political forces in the Bronze Age formed social hierarchy through social negotiations and activities centered on individuals and groups. In addition, it is estimated that the political and economic structure was completed by establishing a network with surrounding forces. In contrast, during the Iron Age, war, migration, cultural exchange, and cultural expansions can be identified as more dynamic and more specific than the previous period. the political forces of Jeonbuk province have the following characteristics. First, the formation of political forces in the Jeonbuk region took place first in the Gochang Dolmen society, the Songgukri Culture Village in the Mangyeong River basin and the Jinan Yongdam lake area. In particular, there is Dongsan-dong site in the Mangyeong River basin and Yeoegok site in the Jinan Yongdam lake area. The two villages are believed to have served as the centers of politics, economy, and society. Second, political forces are formulated into a concrete social and hierarchical systems in the Iron Age. The primary center of these political forces is considered to be the Jeonju-Wanju Innovation Citiy area. This region can be regarded as the most prominent origin of politics in Chonbuk. Third, the Mangyeong River basin is the same distribution area of bronze and iron culture representing Korea. In addition, it is closely related to the formation of several states of Mahan(馬韓)’s 54 countries. Especially related to Sodo(蘇塗), political and social relations are note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political forces and pri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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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왜구의 전북지역 침입 연구 - 全州를 중심으로 -

          허인욱 전북사학회 2015 전북사학 Vol.0 No.46

          Jeonju was invaded or fallen by Japanese raiders(Wako) four times in the 2nd, 4th, 9th, and 14th year of King Woo. Jeonju suffered not only human life damage but also the fall of Jeonju Castle and burning of government offices. Jeonju was fallen by Japanese raiders for the first time in the 2nd year of King Woo. Apart from the disorder in Japan at that time, the reason why Japanese raiders invaded Jeonju at that time is considered highly likely to be a revenge for their defeat in Hongsan battle. However, after obtaining geographical information through the invasion in the 2nd year of King Woo, Japanese raiders included Jeonju in their range of invasion and this is regarded to be the reason why Jeonju was continuously invaded until the 14th year of King Woo. Whereas the invasions in the 2nd, 4th, and 14th year of King Woo were general forms of invasions in which all or part of Japanese raiders that invaded the west coast came through the plain area to fall Jeonju, the invasion in the 9th year of King Woo is different in that Japanese raiders that invaded the east coast tried to invade Jeonju after passing through the inland area. As for the invasion in the 9th year of King Woo, it is judged that the Japanese raiders could not but select entering into the inland area of Goryeo because they could neither live on the seas nor go to Japan because Goryeo built ships to directly hit Japanese raiders while making diplomatic efforts to have the Japanese government prevent Japanese raiders' invasions. Of course, a root cause of the relatively passive responses of Goryeo to Japanese raiders' invasions is Goryeo's fear of the movements of northern powers as can be seen from the cases of the Jeongryowui issue in the 2nd year of King Woo and the Yodong(Liaodong) conquest in the 14th year. At that time, two powers named North Yuan and Ming were sharply opposing against each other in the northern region and it could directly affect the security of Goryeo. Therefore, Goryeo could not but place the first priority of vigilance on the movements of northen powers rather than the problem of Japanese raiders.

        • KCI등재

          한말 전북지역 의병의 인적 관계망 – 습재 최제학을 중심으로-

          金建佑 전북사학회 2018 전북사학 Vol.0 No.52

          이 글은 한말 태인의병 당시 습재 최제학(1882~1959)이 그의 인적 관계망을 어떻게 활용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했는지 살펴보았다. 태인의병은 진위대의 개입으로 열흘간의 짧은 항쟁을 마치고 해산되었지만 1,000여 명이 참여한 큰 규모의 항일 의병활동이었다. 본고는 최제학의 학연에 따른 의병 참여, 지역정보와 연결망 그리고 혈연 집단과의 협력이라는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는 학연을 통해 인적교류를 넓히는 동시에 사회적 연결망이 자연 강화됨을 주목하였다. 특히 창의(倡義)하기 위해 호남에 내려온 최익현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하면서 처소와 행선지 일정을 계획했으며, 임실 상이암(上耳庵)과 진안 삼우당(三友堂) 행차를 최제학이 주도적으로 수행했음을 밝혔다. 또한 최제학을 중심으로 진안 탐진최씨라는 혈연 집단이 의병 모집, 군량미 마련, 편지 전달, 침식 마련, 대마도 문후 등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본고는 의병장 중심이 아닌 의병 참여 조력자의 인적 연결망을 통해 새로운 측면을 부각하고자 했다. This paper examines how Seupjae Choi Je-hak(1882-1959), who worked hard to assist Choi Ik-hyun as an aide, formed and used his personal contacts and network in the movement of the Taein Righteous Army. In the previous study, most themes surrounding the Taein Righteous Army have already been discussed including the leaders of the movement, the nature of the troops, the process and impact as well a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movement. The record written by Choi Je-hak on the movement are frequently quoted as important historical data, but no specific research has been done on it at all. This paper examines the topics of participation in the Taein Rigteous Army according to the academic ties of Choi Je-hak, information and networks of the region, and cooperation with blood relations. Through his academic ties, Choi Je-hak broadened his connection with people, and this naturally strengthened his social network. In particular, he accompanied Choi Ik-hyun throughout the latter’s visit to Jeolla-do to raise an army against the Japanese, and arranged the schedule for Choi Ik-hyun’s accommodation and destinations. Choi Je-hak took the initiative in arranging the visit of Choi Ik-hyun, the supreme leader of the Taein Righteous Army, to Sangeuam in Imsil and Samwoodang in Jinan. Further, Choi Je-hak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recruitment of troops by the Choi clan of Tamjin, procurement of provisions, delivery of letters, the provision of housing and meals, and paying respects to Tsushima. Instead of focusing on the leaders of the righteous army, this study has tried to highlight the personal network and the perspective of a person who participated as an assistant in the anti-Japanese 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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