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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화성지역 3.1운동의 연구동향과 과제

        이계형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8 한국학논총 Vol.50 No.-

        Hwaseong area 3.1 Movement, unlike other areas, had a strong struggle strength and received severe repression from the Japanese emperor. It is not this relationship that the 3.1 exercise related research here was performed actively. However, there are many points that different researchers present different materials and interpretations. Therefore, this study pointed out the problems and tried to suggest some suggestions. First, although the protests have occurred at the same place and time, researchers have described them differently. There are differences in historical interpretation among researchers, but if the contents of the basic facts are different, the reliability of the research will decrease so much. This is because thorough historical criticism was not preceded. Secondly, the characteristic of the Suwon area 3.1 movement is to mention that the arrests were made by fire at the village office, which is the colonial governance body, and the residential area. It is concluded that the demonstration was planned or that different religions were united. But I think this is a hasty conclusion. It was because the religion of the demo was diversified, not acting with religious beliefs. Third, the study of the 3.1 Movement in the Hwaseong region focuses mainly on the ‘Jeam-ri Massacre’, focusing on the development process, the leading forces, and repression of the Japanese occupation. The study should also take into account the social background and political and economic circumstances of the slaughtered people. Fourth, it is also necessary to conduct research on areas where 3.1 movement is not developed in the Hwaseong area. This is to find the cause 3.1 movement occurs. This also reveals what kind of historical significance the 3.1 movement in the Hwaseong area has in the 3.1 movement history as a whole, and for why and for what reason, unlike other areas, the fighting power is strong It is because it is done. Fifth, it is necessary to integrate the 3.1 movement in Hwaseong. In this regard, it is necessary to prepare a chronology of the 3.1 Hwaseong Movement by region and time, and analyze the differences among the research data. This will make the Seoul 3.1 movement more clear, and it will also help in reconstructing and restoring it. Sixth, future research should neglect the discovery of people who are not rewarded. Many people participated in the Hwaseong Area 3.1 movement and although the sacrifice was large, there were fewer number of honors than others in the same scale. Seventh, I would like to establish 3.1 movement research institute in Hwaseong area. It is the fact that there are no such laboratories or memorials as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The March 1stMovemen. This is because the central ministry has to make it, but it is clear why Hwaseong city will lead it. It is hoped that Hwaseong City will be reborn as a mecca of 3.1 movement research Institute. 화성지역 3.1운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투쟁 강도가 거세 일제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곳의 3.1운동 연구가 활발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자료를 제시하거나 해석이 다른 점도 적지 않다. 이에 본 연구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하였다. 첫째, 시위가 같은 장소, 시간에 일어났는데도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연구자에 따라 역사적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사실 내용이 다르면 연구에 대한 신뢰도가 그만큼 떨어진다. 이는 철저한 사료 비판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측면에서 연구자 본인과 다를 경우에는 이를 각주를 달아 독자들에게 차이점을 알게끔 하고 나름 이유나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둘째, 화성지역 3.1운동의 특징은 식민통치 기관인 면사무소나 주재소를 방화하고 순사를 처단한 것을 꼽는다. 이에 대해 시위가 계획적이었다거나 각기 다른 종교인들이 연합하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결론이라 생각한다. 시위자들의 종교가 다양했을 뿐이지 종교 신념에 의해 움직였다고 보고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시위자의 개별적인 연구가 부족하여 생긴 문제라 보인다. 개인과 개인 간의 연결 고리를 이어가면 이러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 생각한다. 셋째, 이곳 3.1운동의 연구가 주로 ‘제암리의 학살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 전개과정, 주도세력, 일제의 탄압 등에 집중되어 있다. 이와 관련한 연구는 학살된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이나 정치적·경제적인 상황 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넷째, 화성시 송산면, 장안면, 우정면, 발안면, 향남면 등지에서 3.1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를 밝혀내야 한다. 이는 3.1운동이 일어나는 동인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화성지역의 3.1운동이 전체 3.1운동사에서 어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지, 또한 어떤 이유에서 다른 지역과 달리 투쟁성이 강하였는지를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화성지역 3.1운동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한 연구는 지역별, 시간별로 화성지역 3.1운동의 연표를 작성하고 연구 자료 간에 차이점을 분석해야만 한다. 이는 화성 3.1운동을 좀 더 명확하게 할 것이고 이를 재현, 복원할 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섯째, 미포상자 발굴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화성지역 3.1운동에 참가하였고 희생도 컸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규모로 3.1운동이 전개된 다른 지역보다 수훈자가 적기 때문이다. 일곱째, 화성지역에 3.1운동 연구소가 건립되었으면 한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다되어 가지만 이렇다 할 연구소나 기념관 하나 없는 실정이다. 이는 중앙부처가 나서서 만들어야 하겠지만, 화성시가 이를 주도해 나갈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화성이 3.1운동 연구의 메카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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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부인회 결성과 활동 연구(1948~50)

        양동숙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4 No.-

        본 논문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서 한국전쟁 전까지 단일 여성단체로 통합 결성된 관제관변 여성단체, 대한부인회의 결성과정과 활동을 살펴보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자파 중심의 협소한 조각으로 인하여 한민당과 분열하게 되었다. 대한국민당 결성을 둘러싸고 독촉국민회 세력도 분열하자, 이승만은 독촉국민회 조직 강화사업에 주력하였다. 그것은 곧 독촉국민회의 반관반민단체로의 전환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여순사건 후 반공주의를 전 국민에게 확산시킬 필요성을 강하게 가져, 정부 관계 장관들의 동의를 얻어 관민합작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승만은 대한국민회를 시작으로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다른 우익 대중단체도 반관반민 단체로 전환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은 부녀 행정조직의 여성단체 활동 개입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곧 여성단체의 동원을 통해 전 국민적으로 국민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독촉부인회는 서울시 관제 부인회와 통합된 후 대한부인회로 재조직되었다. 대한부인회 결성으로 종전 독촉부인회를 중심으로 한 군소 여성단체는 단일체가 되었다. 대한부인회 성원과 지부는 미군정기 우익 여성단체들의 성원과 지부를 대부분 그대로 승계하였다. 미군정기 독촉부인회와 부녀국의 협력 체제도 대한부인회와 부녀국의 조직적인 연계로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부녀국 직원은 대한부인회 회원을 겸하였다. 여성단체와 여성정책 담당 공무원 사이에는 상호 겸직이 가능하였다. 여성단체 활동은 곧 부녀과 업무이면서 동시에 민간의 여성운동이었다. 대한부인회의 부서는 결성 당시 5개 부서로 출발하였지만, 제1공화국 후기로 오면서 부서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조직부서의 확대는 대한부인회의 정부사업에의 참여와 동원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대한부인회는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국민운동비 또는 대한부인회 등 각 사회단체 유지비라는 명목의 기부금 형태였는데, 이는 점차로 반(半)공식적인 세금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각 지방, 각 지부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매월 국민운동비를 의무적으로 납부해야만 하였다. 대한부인회는 정부로부터 일정액의 운영비(보조금)를 받는 대신 정부의 주요 정치활동이나 여성대상 계몽운동 및 구호․원호사업 등에 동원되었다. 이승만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러 대중단체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반공주의 의제를 전국적으로 공론화하였다. 대한부인회는 여기에 부응하여 반공활동, 반공투쟁을 지상 목표로 내세웠다. 대한부인회의 친정부․친이승만적인 성격은 반공주의 의제의 전국적 공론화라 할 수 있는 주한미군 철수 반대운동과 내각책임제 개헌안 반대운동에서 잘 나타났다. 대한부인회는 서울시 부녀국과 함께 신생활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대한부인회의 신생활운동은 다양하고 광범위하며 세세한 일상생활의 규율을 만들어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시행한 생활규제의 메커니즘과 흡사한 외양을 띠었던 대한부인회의 국민운동은 주민생활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주의를 여성들에게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대한부인회는 행정조직과 결합을 구축하여, 반관반민 성격의 단체로 변화한 후에도 여전히 의회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대한부인회는 제2대 국회 구성을 위한, 1950... This study aims to analyze how Daehan Buinhwe that supported Syngman Lee government in Korea in 1948 before the Korean War emerged and changed and how its political and social activities were. After the establishment of government, the creation of Daehan Buinhwe was accomplished because Dokchok National Association was transformed into an organization half official and half civil. Moreover, there was the need to spread anti-communism among the people after the Yeosun incident. Accordingly, Daehan Buinhwe was created by integrating Dokchokbuinhwe with the Seoul city government's Buinhwe. The various women's associations centering on Dokchokbuinhwe was restructured into a system of a unified association upon the creation of Daehan Buinhwe. The members and branches of Daehan Buinhwe were not changed from those of the rightist women's organizations during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 systematic relationship between Daehan Buinhwe and Bunyogook also followed the mutual assistance system between Dokchokbuinhwe and Bunyogook during the US military government. Especially the employees at Bunyogook were also members of Daehan Buinhwe. Moreover, Daehan Buinhwe received funding from the government. On the surface, it was in the name of National Movement Funding, Maintenance Funding for various social institutions such as Daehan Buinhwe. Daehan Buinhwe was mobilized and used in key government political activities, enlightenment movements for women, and relief and support activities with operational money (support money) from some of the money received from the government. The nature of pro-government and pro-Lee of Daehan Buinhwe is well reflected in the movement to oppose the withdrawal of the US Armed Forces in Korea, and the movement to oppose the legislation of the parliamentary cabinet system. They were the public agendas of anti-communism. Whenever Syngman Lee faced a political crisis, he mobilized various public associations such as Daehan Buinhwe to spread the discussions of anti-communism agendas throughout the country. Daehan Buinhwe in meeting his demands chose anti-communistic activities and anti-communistic struggles as their central objective. The New Living Movement of Daehan Buinhwe approached the political goal of national movement through indirect methods. Daehan Buinhwe lead the New Living Movement along with Seoul City Government's Bunyogook. Movements such as the New Living Life, Save Energy Movement, Rebuild National Life Movement, and so on created various, comprehensive, and specific rules for ordinary lives. On the surface, it was similar to the mechanism by the Japanese Empire to regulate daily lifes during the late period of the Pacific War. The purpose of the national movements of Daehan Buinhwe was to control the whole aspects of the lifes of citizens to instill anti-communism deeper. On the other hand, Daehan Buinhwe tried to enter the parliament even after it was transformed to an organization half official and half civil working with administrative institutions to commence various systematic projects for the nation. Daehan Buinhwe participated in the 5.30 general ection in 1950 to constitute the second national assembly. The number of candidates was reduced to 11 from the first assembly, but Youngshin Lim from the Women's Nationalist Party and Suncheon Park of Daehan Buinhwe won. Daehan Buinhwe controlled a vast sphere of influence based on the administrative power of a system with Syngman Lee on the top even when it insisted it was non-political, non-party, and non-faction, and tried to control the institutional political space represented by the national assembly. Based on the analysis of organization and activity of the Daehan Buinhwe, its main characteristics are as the following. First, the Daehan Buinhwe that performed important roles in the processes to establish the government by the Syngman Lee political section and the formation processes to found the state were gradually unified. Second,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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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의 민족운동과 민족운동지도론

        김용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논총 Vol.37 No.-

        이 논문은 그간의 연구성과를 활용하고, 또 각 방면에서 펼친 도산 안창호의다양한 활동을 연대기적으로 좇아가면서, 역동적인 민족운동의 양상을 복원하고그에 담긴 민족운동지도론을 밝힌 것이다. 도산은 개항 직후 봉건사회가 급속히 해체되어 가던 시기에 서북지방의 평민출신으로 태어나 성장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지만 사상형성에 크게기여하지 못했고, 오히려 밀러학당에서 서구의 근대학문을 익히고 자유 평등의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근대적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도산은 한말 독립협회에 가담해 민권신장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펴면서 근대민족운동에 뛰어들었고, 또 미국으로 유학하여 주경야독하면서 상항 한인친목회와공립협회를 창설하여 재미 한인의 계몽과 권익보호, 나아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더욱이 을사늑약 이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되자 구국계몽운동을 위해홀연히 귀국하여 한말 최대의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또 서북학회를 창립하고 대성학교를 개설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벌였다. 아울러 태극서관과 자기회사 등을 설립해 실업진흥운동을 벌이며, 국권회복운동의건전한 주체 육성을 위해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도산은 독립전쟁전략을 구상하여 만주 밀산에 독립군 기지개척을 추진하였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대한인국민회의 최고기관으로 중앙총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지방총회, 하와이지방총회,시베리아지방총회, 만주지방총회 등을 거느린 다국적인 한인 자치조직이자 ‘準정부’ 조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신국민의 건전 인격 양성과 지도자 육성을위해 한말 청년학우회를 잇는 흥사단을 조직하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료로 취임하여 초기 임시정부의 기틀을 잡았다. 노선과 이념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약화되자 도산은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앞장 서 제창하고 개최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족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의 파쟁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재야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면서 ‘대독립당’ 결성을 위해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이것마저도 어려워지자 도산은 먼저 우파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독립당’ 건설을 지향해 갔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진보적 민족주의로 대공주의를 정립하고 좌파 민족운동 세력과 통합을 모색해가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민족운동 조직과 이념을 정비해 가면서 ‘대독립당’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以黨治國’의 방침을 선두에서 추진한 것이다. 그러다가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에게 피체됨으로써 원대한 꿈이 꺾이고 말았다. 이 같은 도산의 민족운동을 관통하고 있는 지도이론은 기독교적 도덕주의에 입각한 무실역행론과 그에 따른 솔선수범의 리더쉽으로 생각된다. 특히 무실역행론은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도산의 생활철학이자 민족운동지도론으로, 미주한인의 생활윤리는 물론 독립운동 참여논리로 기능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이와 함께 기독교적 도덕주의에 입각한 공동주의와 이를 발전시킨 대공... Literature on Ahn Chang Ho(Dosan)’s independence movement and his leadership to descripted. Dosan was born and came of age in the north-western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which during the Chosun Dynasty had been marginalized as the kingdom’s backwater. The Christian faith that Dosan embraced was American Protestantism, specifically Puritanism. While attending the Miller Academy, of Presbyterian affiliation, Dosan absorbed and internalized such principles as the just administration of the law, freedom of thought,personal integrity, and industry (the Puritan work ethic), all integrated within the context of the social culture of his native northwestern Korea and the historical circumstances of his time. Later in life, Dosan continued to uphold these ideals in pursuing social activism and nationalist movement activities. Dosan developed civil rights movements and national rights movements after joined Independence Association. Also, Dosan formed Sanghang Korean Social Gathering(桑港親睦會) and Gong-Rip Association(共立協會) since studied abroad The U.S.A. He advocated an ethically practiced principle of action-oriented truth-and-knowledge-seeking. Through such a principle, he sought to promote the formation of a sovereign citizenry of sound character who would be taken to task for finding solutions to the many deep-seated problems of historical nature facing the Korean nation and individual Koreans of his time. To this end, Dosan helped found a number of social and industry organizations, among them the well-known Hung Sa Dan and other national independence activity groups. The geographical and social environment in which Dosan developed as a young man, as well as the historical backdrop, importantly influenced Dosan’s independence movement and his leadership. Owing to these roots, Dosan’s development was quite different in nature from what was common among the children of the aristocratic elite of the southeastern region, for example, which was under the strong control of the neo-Confucian ideology and system of social order, founded upon such ideals asmoral justification and righteousness. As a result of both his commoner social status and his regional identity,Dosan developed in an open and free space of flourishing activity. This developmental background was one of the key causes for Dosan’s converting at an early age to Christianity and embracing the Christian worldview, and for his rejection of the Confucian belief system in favor of embracing modern rationalism. The time period into which Dosan was born was moreover one in which his country’s diminished viability for sovereign self-rule hung precariously on the balance following recent invasions by foreign powers. Deeply reflecting on these historical conditions, Dosan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dangers facing his nation resulted from its earlier failure to achieve economic prosperity buttressed by strong national defense. Dosan was convinced that the only way to overcome the dangers facing his nation was to grow independently in strength. Such growth in strength would be ultimately realizable through each Korean national’s transformation into a New Citizen (Modern Citizen) actualizing the ideas of Dosan’s truth philosophy, thereby helping to establish a New Nation (Modern Nation). It was from these thoughts that Dosan formulated his theory of sound individual character development as a necessary condition for achieving and safeguarding the sovereignty of his New Nation and advocated his philosophy of truth as a standard of ethical living for his New Citizen. Dosan’s truth philosophy was the basic spiritual principle underpinning the national improvement and citizen enlightenment movements he led from the time of the founding of the Young Persons’ Learning Society organized during the waning years of the Chosun Dynasty. The idea of vigorous truth-seeking is well elaborated in Dosan’s own words: "let there be no deception or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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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공 신익희와 대한민국

        김용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4 No.-

        다양한 新舊학문 수학과 탁월한 재능과 뛰어난 雄姿를 지녔던 해공은 독립운동시기나 해방공간의 정부수립기에 거침없는 행동철학을 드러냈다. 때로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때로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때로는 강렬한 반공주의자로 다양한 모습을 표출한 것이다. 독립운동 노선도 다양했다. 해공은 상해 임정의 수립을 선도하고 헌법을 기초하여 초기 임정의 기틀을 닦았다. 나아가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상해로 부임시켜 임정의 분란을 잠재우고 지도력을 확보하려 했지만, 이승만의 돌연한 미국행으로 좌절되었다. 더욱이 이승만 대통령의 불신임안을 통과시키면서까지 큰 기대를 걸고 추진했던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계의 대립과 갈등만 증폭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정을 떠난 해공은 섬서성 군벌 호경익 부대를 거쳐 중국국민당 남경정부의 심계원에 근무하다 1932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면서 독립운동계로 돌아왔다. 독립운동계로 복귀한 해공의 행로는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에는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면, 복귀한 뒤에는 임정이 아닌 독립운동 정당, 그것도 임정과 대립하던 진보적인 독립운동 정당과 급진적인 좌파 청년 무장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를 통해 해공은 초기 우파 독립운동가의 모습과 함께 좌파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겸비한 주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독립운동 정당의 좌우합작 통일전선운동이 좌절되면서, 나아가 자신의 세력 기반인 조선청년전위동맹이 화북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해공은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해공은 화북 중국공산당 지역이 아니라 중경 국민당 지역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으로 해공은 세력기반을 상실하였고, 또 독립운동계의 위상도 추락하여 외로운 시절을 맞이했던 것이다. 외로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의 주객관적인 정세가 그를 도왔다. 특히 동경 유학시절부터 지기로 지내온 조소앙의 우의와 후원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조소앙은 임정과 떨어져 있던 해공을 자신이 위원장으로 겸임하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발탁하였고, 나아가 외무차장으로 추천하였다. 이렇게 해서 해공은 중경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1944년 4월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연합정부가 출범할 때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어 중심인물로 부상하면서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환국 직후 불과 한 달여 만에 전국적인 파괴력을 갖춘 계선조직으로 정치공작대를 키운 사실은 해공의 뛰어난 조직 수완과 탁월한 능력을 말해준다. 더욱이 정치공작대는 바로 임정의 활동 기반인 동시에 해공의 세력기반이었으니, 해방 정국에서 해공의 영향력을 상상할 수 있다. 국자 1, 2호 발표를 기폭제로 하는 임정 중심의 반탁운동의 전개는 해공이나 김구를 비롯한 임정의 성가를 높이며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좌파세력은 임정 환국 전에 이미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고, 산하의 지방 조직으로 각급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정국의 대세를 잡아가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의 여망과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은 반탁운동으로 임정은 일순간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해공은 반탁 입장에서 찬탁으로 급선회한 좌파세력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과거 자신이 관여하던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연안행을 둘 ... Shin Ik Hi who studied new and old studies had diverse political line in time of independence movement and government establishment. Shin established first provisional government through leading establishing provisional government and on the basis of the Constitution. Furthermore, Shin tried to appoint Syngman Rhee as an interim president of Shanghai provisional government, but that was frustrated by Syngman Rhee's sudden retuning to U.S. Moreover, national representative conference was amplified confrontation and dissension in power of independence movement. Shin left provisional government after national representative conference. In 1932, He returned to power of independence movement by founding the Korea Revolutionary. After he returned to power of independence movement, he had different political path from the previous. Shin became leader of party of progressive independence movement and radical youth left-wing armed independence movement that was opposed to Provisional government. Through this career, Shin emerged leader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who was endowed with left-wing and right -wing. However, Joint independence movement was frustrated, Shin forced to stand at a crossroads. At that time, Shin chooses for China Nationalist Party Chongqing instead Communist Party of the North China. These choices make him losing of power base and also falling of status. However, the situation after the outbreak of World War II that helped him. Especially, Cho-So-Ang chooses Shin as a member of foreign research committee and even recommended as a junior foreign minister. Thus, Shin could involve in provisional government of Chongqing and was appointed senior Interior Ministry in April 1944 when launching left and right coalition government. After returning to Korea, Shin had a states great influence in political situation of liberation in so much that raise the political group of underground activists in a month. In this situation, party of provisional government could lead political leadership through gain support of most people and confidence by opposing Trusteeship for the Korea. While led opposing Trusteeship for the Korea, Shin could not believe communist activist. Therefore, Shin became anticommunist. Moreover, dissolution action of political group of underground activists was crucial opportunity that drifted apart Shin between parties of provisional government. In addition, Shin thought that construction of independence and unified country was not realistic after he realized power of U.S. military government in South Korean during Coup of opposing Trusteeship in Korea. Then Syngman Rhee commented that South Korea should establish government alone at Jeongeup. Although, Most of the political power had critical attitude about it, Shin began to separate with provisional government through in favor of Syngman Rhee. Finally, Shin emerged as an influential person of right-wing camp with Syngman Rhee through end joining party of Independence Promotion Patriotic in June 1946. Furthermore, Shin promoted the sole government with Syngman Rhee, and leads to establish the Republic of Korea by participating in election on May,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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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연변대학의 설립 및 체제 개편과 북한

        염인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3 No.-

        Leaders of the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had requested Chinese Communist Party(CCP) to establish the Ethnic Koreans University since the spring of 1948. In those days Korean students in Manchuria was not able to speak or listen the chinese language, so they could not enter chinese universities. Leaders of the Korean residents claimed that Koreans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Revolution of China, and it would be only fair that the Chinese Communist Party(CCP) establish the Ethnic Koreans University in yanbian. The leaders of the Korean residents sought for a way to foster competent people who will guide the development of both Yanbian and North Korea, by establishing an Ethinic University. At that time, the leaders of the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had a close connection with North Korean leaders, and one of them even spoke on behalf of the North Korean leaders. On March 20, 1949, the opening of Yanbian University took place. In the front of the scene, there were North Korean national flag, as well as the Chinese's communist flag. The portrait of Kim Il-Sung was also hung along with that of Mao Tse-Tung, and Stalin. This demonstrates that North Korea had much interest in running Yanbian University, and played a role in establishment of the school to some extent. The president of Yanbian University left for Pyungyang, in Summer of 1949, to visit North Korean universities. After closely checking Kim Il-Sung University and others, the president came back from the trip. In the following fall of 1949, Yanbian University went though substantial reorganization of system, copying Kim Il-Sung Univeristy on the whole. 만주의 조선인 지도자들은 1948년 봄부터 중국공산당에게 민족대학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만주의 조선인 학생들은 중국어를 말하거나 듣지를 못했기 때문에 중국의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조선인 지도자들은 조선인들이 중국 혁명에 공헌을 많이 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당연히 연변에 민족대학을 세워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인 지도자들은 연변에 민족대학을 세워 한편으로는 연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려 하였고 다른 한편 북한에서 필요한 인재도 양성하려 하였다. 당시 만주의 조선인 지도자들은 북한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고 심지어 어떤 만주의 조선인 지도자는 북한 지도자의 의사를 대변하기 까지 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길에서 연변대학 개교식(開校式)이 거행되었다. 이때 개교식장 정면에는 중국공산당 기빨만이 아니라 북한 국기도 걸려 있었다. 또 김일성의 초상화가 모택동 스탈린의 초상화와 함께 내 걸려 있었다. 이러한 점은 연변대학의 설립에 북한이 일정 부분 관여했고 북한이 연변대학의 운영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연변대학의 총장 등은 북한의 대학을 견학하기 위해 1949년 여름에 평양으로 갔다. 그리고 김일성 대학 등을 상세히 살피고 돌아왔다. 이어서 1949년 가을 연변대학은 크게 체제를 개편하였는데 주로 김일성 대학을 모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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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8도 관찰사의 재임실태

        이선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9 한국학논총 Vol.31 No.-

        본 연구는 조선이 개창된 이후 8도체제 하에서 각 도에 재임했던 관찰사의 재임실태를 지역별로, 시기별로 비교하여 조선시대 관찰사제의 운영실태를 파악하려는 뜻에서 작성되었다. 검토시기는 조선이 개창된 이후 8도체제가 유지되었던 고종 32년(1895) 5월까지이다. 이때이후로 지방행정체계는 23부제로, 곧이어 다시 13도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통계의 기본 수치인 관찰사의 총수는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한국사상의 관인관직 DB를 바탕으로 『실록』과 『승정원일기』, 읍지류에 나타난 관찰사의 재직기사와 내용을 상호교차확인하고 보충하여 이를 다시 임명ㆍ재직ㆍ면직 순으로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마련하였다. 관찰사의 정비과정은 도별로 각각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직명의 정비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관찰사제의 정비시기는 충청도ㆍ강원도-황해도-경상도-전라도-경기도ㆍ함경도ㆍ평안도 순이었다.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는 군사지역이면서 행정지역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담고 있는 특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법전에 규정된 관찰사의 임기는 조선전기는 1년이었고 조선후기는 2년이었다. 실제로 8도체제하에서 도별로 재임한 관찰사의 총수를 정리한 결과 관찰사의 실제 평균재임기간은 『경국대전』에서 정한 바와 같은 1년 정도였음을 알 수 있었다. 관찰사의 왕대별 평균재임기간은 평균재임기간인 1년을 기준으로 조선전기의 왕대가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의 왕대는 관찰사의 평균재임기간이 1년이상이거나 1년 미만으로 양분되었다. 관찰사의 평균재임기간이 평균이상인 경우는 세도정치로 일컬어지는 순조-헌종-철종이었다. 반대로 평균이하인 경우는 효종으로부터 정조에 이르는 7대의 왕대가 포함되었다. 8도별 관찰사의 재임기간은 각 도별 특징과 맞물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도는 관찰사의 임기를 2년으로 연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거셀 때에도 여전히 예외적으로 1년을 항식으로 간주되었다. 반대로 함경도와 평안도는 조선초기부터 관찰사의 임기를 2년으로 해 왔다. 실제로 관찰사의 평균재임기간에서도 평안도와 함경도가 가장 높았고 경기도가 강원도 다음으로 낮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강원도가 가장 낮은 재임기간을 갖는 것은 해당 지역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를 통해 원인과 배경을 살펴야 하겠다. 관찰사의 출신성분과 성관은 4개도 이상에 여러 차례 임명된 관찰사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우선 출신성분은 대부분 문과출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은 수로나마 무과와 음관출신자가 있었지만 모두 조선전기 인물이면서 왕실의 인척관계로 인한 배경이 주요했던 예외적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해당 관찰사의 성관은 조선 전기에 비해 후기의 성관수가 줄어든 반면 해당 인명수는 늘어남으로써 성관의 집중도가 전기에 비해 후기가 높은 특징을 나타냈다. 아울러 전기에만 혹은 후기에만, 그리고 전ㆍ후기에 모두 나타난 각각의 시기별 성관 분석을 통해 볼 때 해당 관찰사의 배출 성관 중 전주 이씨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This study is about the realities of provincial governor system in Joseon, comparing regionally and periodically the actual conditions of the provincial governors under Eight Do system. The period covers from the genesis of Joseon to Ko-Jong(高宗) year of 23, when Eight Do system was dissolved on May in 1895. Statistical figures of total provincial governors were prepared from the research of <Sil-Rok(實錄)>, <Seong Jung Won Diary(承政院日記)>, and kinds of Ep-Jie(邑誌) The term of office of a provincial governor in the code of laws was one year during former period and two in during the latter period of Joseon. Under Eight Do system, my research proved that eventually the average term of provincial governors was one year as it is written in <Kyung kuk Dae jun(經國大典)>. The process of introduction of provincial governor system was not practiced simultaneously in Eight Do. According to the appearance of its position name, the order is as it follows: Chung Cheong Do(忠淸道), Kang Won Do(江原道) - Hwang Hae Do(黃海道) - Kyung Sang Do(慶尙道) - Kyung Kie Do(京畿道), Ham Kyung Do(咸鏡道), Pyung Ahn Do(平安道). Especially I discovered that Ham Kyung Do and Pyung Ahn Do characteristically had double aspects of military regions as well as administrational provinces. The one year average terms of being in office mostly showed up in the kings's regime in the former period of Joseon. In the latter period, the terms were separated between under one year and over one year. It is the regimes of Sun Jo(純祖), Heon Jong(顯宗), and Chol Jong(哲宗) when the terms of being in office were over the average. The periods are known as Sae Do Jung Chie(世道政治). Opposite to these, the periods of seven kings from Hyo Jong(孝宗) to Jeong Jo(正祖) were under the average. It is understood that the realities of being in office were related to the characteristics of each province. Kyung Kie constantly kept the one year term in the time when the voices of extending the term were loud. This research proves that actually Ham Kyung Do and Pyung Ahn Do show the highest average terms and Kyung Kie is the next to Kang Won Do in the lowest. Further research is needed synthetically about Kang Won Do's lowest average te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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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말기 초등학교, ‘황국신민’의 제작 공간- 이이다 아키라의 『반도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

        정선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논총 Vol.37 No.-

        이 논문은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생활했던 재조일본인 교사 이이다 아키라(飯田彬)가 자신의 체험을 ‘소설’ 형식으로 기록한 『반도의 아이들』을 처음으로 소개,분석한 글이다. 1929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국민학교 훈도로 재직하고 있던 이이다 아키라는 ‘대일본제국’의 국가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국가주의자였으며, 국가=천황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국민을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1942년 6월에 간행된 『반도의 아이들』은 일제 말기 초등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반도의 아이들』은 총 3부로 구성되어있다. 제1부 <국어로 살다>는 아동들이 ‘미네 선생’을 따라 ‘국어’를 익히면서 ‘건강하고 명랑한’ ‘소국민’으로 자라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며, 제2부 <마을의 기록>은 ‘미네 선생’이 학교와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구원자로서 행한 ‘미담’들을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제3부 <아이들이 있는 풍경>은 아동들이 일상생활에서‘대일본제국’의 이념을 실천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반도의 아이들』을 해체,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첫째, 국가 이념의 체현자이자 전달자인 교사의 이미지는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둘째, ‘국어’는 어떻게 습득되며 그것이 ‘국민정신’ 또는 ‘일본정신’과 갖는 관계는 무엇인가. 셋째, 조선인을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 동원하기 위한 ‘내선일체’라는 환상은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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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8’사변 후, 중국 동북지역 한인자치운동과 중국공산당 대응 -민생단자치와 국민부자치를 중심으로 -

        조춘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3 No.-

        이 논문은 ‘9.18’사변 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한 한인들의 자치운동을 살펴보고 이러한 자치운동에 대해 중국공산당의 인식과 대응책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 있다.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한인들의 처우는 예전의 군벌당국과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탄압을 받던데로부터 일제의 단독지배통치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변화 속에서 전의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워오던 수많은 한인단체들은 관내로 이동하였고 동북지역에 계속 남아서 생존하는 한인농민들은 중국인들로부터 일제의 ‘주구’ 혹은 앞잡이로 몰리면서 심한 압박과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이 시기 대부분의 한인농민들은 나라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점차 잃어가고 친일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반일을 견지해오던, 한인들은 일제와 중국인들한테 탄압받고 오지에 숨어들어가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소비에트를 건립하였다. 따라서 ‘만주국’ 시기에 와서 한인들의 집거구지역은 주로 일제에 의한 통제지역과 중국공산당의 유격근거지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한인들의 자치에 대한 노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나갔다. 북간도지역은 주로 친일에 의한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민생단의 자치운동이고 북만의 경우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관내로 이동하면서 ‘만주국’초기 사실상 본격적인 자치운동을 전개될 수 없었다. 그리고 남만지역 같은 경우에는 초기부터 대부분이 평안도에서 이주하여 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또 민족주의 기반이 강하였기에 1920년대 말에 성립된 국민부가 1930년대 초반까지 남아 한인들의 민족자치를 표방하면서 생활안정을 도모하였다. 때문에 ‘만주국’ 초반에는 주로 민생단의 자치와 국민부의 자치가 주목된다고 하겠다. 한인수가 가장 많은 북간도에서는 일제에게 의존하여 한인자치구역을 설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조선총독부에서는 간도를 조선의 연장으로 보면서 간도한인자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여 왔다. 이에 힘입어 조선국내에서 민족주의 우파분자들이 북간도로 와 친일적인 경향이 띤 한인농민들을 결집하여 한인자치구역을 성립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관동군과 외무부의 반대로 한인자치구역은 성립되지 않고 특별구로서 행정구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민생단은 중국과 항일투쟁을 외면하고 전적으로 일제에 순응하였기에 시대적 반동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5개월 밖에 존재하지 못했지만 그 영향은 그 후, 북간도 전역에 광범히 퍼졌다. 남만지역 준자치기관으로서의 국민부 자치운동은 중국당국의 지지 하에, 반공, 반일을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자치운동을 전개해왔지만 만주사변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치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1934년 통합되기 전까지 계속 준자치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특히 ‘만주국’ 성립이후 1932년 8월에 근거지인 신빈현에 독립정부를 수립하려고 계획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는 당시 상해지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독자적 정부를 세우고 항일투쟁을 지속하려 했다는 점에서가 존재동북지역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독자성을 상징하였다. 북간도와 남만지역의 자치운동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그들 지역의 특수성과 민족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This thesis is about After incident of September 18 that was carried out by Korean people of the Northeast of China in the early time of “the Puppet Manchukuo” and it also places focus on the congnitions and strategies of the Connunist Party of China as for this kind of movements. As “the Puppet Manchukuo” was found, Korean people who had been oppressed by both Warloads and Japan Imperialism was ruled only by Japan. In this situation, many Korean people who had struggled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liberation moved into the interior of China. And in the Northeast of China, Korean farmers who had not moved were constantly asked to move out and were oppressed seriousely by Japanese jakals who were Chinese. There fore, most of Korean farmers lost the hope of national independenc day by day and became pro-Japanese gradually. On the other hand, Korean people who resisted Japanese under the leadership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hided into the interior and founded Soviet with the help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So in “the Puppet Manchukuo” period, Korean people’s residence could be parted into areas under JapanandbaceareasoftheCommunistPartyofChina. In spite of this situation, Korean people still spared no effort to carry out all kinds of autonomous movements. In the North Gando area, most of autonomous movements were pro-Japanese, and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groups was Min-seng-dan. In the Pukman area, in fact, no autonomous movement was carried out in the early time of “the Puppet Manchukuo”, for most of the nationalists moved into the interior. And from the early time the Namman area, as most people who immigrated from Ping-an-do had strong national consciousness, in the last years of 1920s, anti-Japanese group Gugminbuk was founded by them which was committed to national autonomy and stable life until the early years of 1930s. So among the autonomous movements in the early time of “the puppet Manchukuo”, the most important ones are Min-seng-dan’ autonomy and the Gugminbuk’ autonomy. In the North Gando area which had the largest population of Korean people, people tried hard to establish Korean autonomous region that would depend on Japan Imperialism. Actuall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had been regarding Gando as an instrument of Korea and was in favor of the Korean autonomy in Gando with much interest. Accordingly many Right-wingers of nationalists in the country of Korea arrived in the North Gando to make efforts to establish Korean autonomous region together with Korean farmers there who had pro-Japanese tendency. However, because of the opposition of the Kwantung Army and the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only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was founded instead of Korean autonomous region. But as the Min-seng-dan averted eyes from China and Anti-Japanese Movement, it consequentially had stong reactionary character. There fore, it lasted for only 5 months, but from then on, it had widespread influence in the North Gando. In the Namman area, supported by Chinese government, the Gugminbuk which worked as an unrecognized self-government organ positively made efforts to carry out autonomous movements committed to anti-the Communist Party of China and anti-Japan. Although hard hit by the Manchu Incident, they did not give up at all and had been playing a part as an unrecognized self-government organ until the Unity in 1934.A very important example was the one that after the foundation of “the Puppet Manchukuo” in Aug, 1932, an independent government was planned to establish in the base area of Xinbin County. In spit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in Shanghai area, they established their own government by themselves and endeavoured to carry out anti-Japanese movements which stood as a symble for national liberation in the Northeast area. As for Korean people’s efforts of autonomous movements in the North Gando and Namman area,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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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 關內地域 日本軍 무장해제와 韓人 병사

        황선익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논총 Vol.44 No.-

        . 1945년 8월 2차대전 종결로 중일간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중국 정세는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전쟁과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국민정부 주도의 전후처리가 진행되었다. 중국지역 전후처리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송환을 골자로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연합국의 일원인 중국 국민정부는 패전국 일본을 상대로 항복접수를 시작하며 일본군을 해체시켜갔다. 그러나 국공간 내전이 변수로 작용하여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는 전략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민정부는 공산당과의 교전상황에서 일본군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중국에 주둔했던 일본군 사령부는 항복 후 ‘中國戰區 日本官兵善後總連絡部’로 개편되며 중국군 및 일본군간 연락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연락부는 중국군의 지휘를 받으며, 무기 및 물자 등을 인수인계하는 한편, 각 지역 일본군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중국군총사령부는 공산군과 접경지역인 華北 등지에서 일본군을 전략배치하고, ‘위수지역 확보’를 명령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군과 공산군 간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군으로서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셈이었다. 일본 측은 종전 초기에 일본군을 활용하려는 국민당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항복교섭에 적극 나섰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무장을 유지하는 것이 현지 질서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은연히 강조하면서, 일본 민간인 보호를 위해 협상을 벌여 나갔다. 그런 가운데 ‘보호’ 책임이 있던 한인에 대한 급양 등은 철저히 외면했다. 오히려 한인들에 대한 반감을 들어내며 반목을 조장하기도 했다.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의해 기획된 일본군 포로수용소는 각 전구별로 설치되었다. 포로수용소는 고도의 정치공작요원에 의해 운용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각종 군사정보 수집이 이뤄졌으며, 한편으로 전쟁책임에 대한 집중교육이 이뤄졌다. 적국민이자 패전병을 대상으로 전개된 일본군 포로수용은 초기에 한인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측은 국민정부에 이의를 제기하며 한인과 일본인의 분리수용과 우호적 대우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한인 병사는 일본인과 분리수용되었고, 이들에 대한 한국광복군의 관리가 일부 인정되었다. 1945년말에 들어서며 한인 포로에 대한 중국군의 지침은 다소 수정되었다. 한국광복군의 활동은 제약되었고, 한인에 대한 ‘집중’과 ‘관리’가 강화된 것이다. 이는 1946년초부터 계획된 중국지역 귀환계획을 앞둔 조치였다. 중국과 미국간의 협의로 진행된 중국지역 귀환은 일본-중국 관내지역간의 인구이동의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중국전선에 동원된 한인 병사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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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신흥무관학교 부흥운동과 신흥대학 설립

        이계형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한국학논총 Vol.45 No.-

        After the liberation, independence activist Lee Si-young has established the ShinHeung professional institute(新興專門學院) took over the spirit of the ShinHeung military academy in 1947 to train the human resources required for the construction of a new nation and revived the ShinHeung alumni team(新興學友團). Lee Si-young who was elected to vice President founded the Sung Jae school foundation(省齋學園) in 1949, was promoted to the ShinHeung professional institute in the ShinHeung college. However, by the Korean War, the school had a shelter in Busan, a new director was appointed to the school foundation in the confused gap, been expelled trustees of the existing foundation. Consequently the nature of the school has been altered. the name of the school foundation was changed to the GoHwang Foundation, and the University name has been renamed to Kyung Hee. In addition, even the history of the ShinHeung college got distorted. The history of Kyung Hee university should start from the ShinHeung military academy, which was founded in 1919. So, The founded spirit of Kyung Hee University will lead to democracy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This is to be initiated by establishing the image of Lee Si-young to the Kyung Hee University.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대학 설립에 공을 들였다. 서간도의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흥무관학교의 교장 이시영은 1947년 4월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한 뒤 배영대학원을 인수하고 신흥학우단을 복설하여 이를 기반으로 대학 설립의 꿈을 키워나갔다. 정부 수립 후 부통령이 된 이시영은 1949년 재단 성재학원을 구성하여 신흥전문학원을 신흥대학으로 승격시켰다. 1950년 4월 신흥대학은 동양외국어전문학관을 흡수, 합병하여 학교 운영의 안정적인 모습을 갖춰나갔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신흥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전시연합대학을 열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새로운 재단 이사들이 임명되면서 이시영 측 이사들과의 마찰이 불거졌다. 결국 이시영의 큰아들 이규창이 학장에서 쫓겨나면서 재단 분규는 최고점에 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영식 등의 이사진에 의해 성재학원은 고황재단으로, 신흥대학은 경희대학으로 개칭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흥대학의 전신인 신흥전문학원의 역사를 부정하였다. 더욱이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이 깃든 신흥대학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현재 경희대는 신흥대학 이후부터만 인정하고 있다. 경희대의 역사는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창학 정신을 이은 민족학교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야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이 해방 후 민주주의적인 국민 양성을 목표로 했던 경희대의 역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경희대학교 내에 이시영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의미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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