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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순회전도가 영남지역의 3.1만세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
배재욱 ( Bae Jae Woog ) 한세대학교 영산신학연구소 2020 영산신학저널 Vol.0 No.51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민족사적으로 중요하고 획기적인 일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민족정신은 구국운동으로 번져갔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거사 실행단계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배위량의 열정적인 복음 전도 활동이 영남지역의 3.1만 세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에 대하여 탐구했다. 배위량은 1891년 1월 29일에 부산항에 도착함으로 한국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다. 그는 부산에서 선교 지부를 개척할 땅을 사기 위하여 1891년 2월 25일에 부산으로 내려왔다. 배위량은 영남지역의 3.1만세운동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남지역에서 행한 그의 선교 사역이 영남지역의 3.1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가 3.1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점에 주목하여 배위량과 영남지역의 3.1운동의 관련성을 찾고자 한다. 그는 부산에 터전을 마련하고 1891년 9월 24일부터 부산 선교 지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892년 6월에 완공했다. 배위량은 처음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1) 순회전도, 2) 사랑방 전도, 3) 수세자들과 초량교회 설립, 4) 한문학교 설립 등을 통하여 한국 선교의 기틀을 놓았다. 배위량은 부산과 대구를 근거지로 하여 원대한 선교 계획으로 일했다. 배위량은 1896년 4월에 평생 살 생각으로 대구로 이사하여 대구를 근거지로 영남지역을 선교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북장로교 선교부는 그의 임지를 서울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래서 배위량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의 후임인 안의와(安義窩=아담스, James Edward Adams, 1867∼1929), 장인차(張仁車=존슨, Dr. Woodbridge O. Johnson, 1869∼1951) 그리고 부해리(傅海利=브루엔, Henry Munro Bruen, 1874∼1959)는 배위량의 선교 정신을 이어 받아 영남지역 선교를 위하여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대구와 부산 등 도시에서 먼저 시작되어 농촌으로 확대되어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운동이 되었다. 그런데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선도했던 그룹은 기독교 인사들과 학생들이었다. 대구 3.8운동은 대구 교계 지도자들에 의하여 계획되고 시작되었다.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길은 영남 북부지역을 복음화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영남지역의 3.1운동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데서 다른 지역과 다른 특색을 가진다. 배위량은 영남지역 전 지역을 대상으로 다니면서 순회전도를 감행했다. 이 점에서 영남지역의 교회 탄생은 배위량과 깊이 연관되고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순회전도 여행을 다닌 지역과 관련된다. 그래서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한 연구에서 배위량과 관련된 개연성을 찾는 것이 영남지역의 3.1운동의 특색을 찾는 데 중요한 길이 될 것이다. The centenary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falls in the year of 2019. The March First Movement is an important and epoch-making event in the history of Korea. The national spirit derived from this incident spread to a save-the-nation movement. The Korean Church took a leading role from the preparation stage of the uprising to the execution stage. In this paper, the author explores how the passionate evangelical activities of Bae We Ryang affected the March First Manse (“hurrah”) Movement in the Gyeongsang (or Youngnam) region. Bae We Ryang was the first person to make a connection with Korea by arriving at Busan port on January 29, 1891. He came down to Busan on February 25, 1891 to buy land for a missionary branch in Busan. Although Bae’s misssionary work may not be directly related to the March First Manse Movement in the Gyeongsang region, his import- ance should not be overlooked in focusing on how the results of his missionary work affected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e region. The author attempts to seek relevance between his role and the March First Movement in Gyeongsang region. After he set up a base in Busan, he began building the structure of the Busan Mission Branch on September 24, 1891 and completed it in June of 1892. Bae We Ryang first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the mission in Korea by conducting missionary work mainly in Busan through 1) Itinerating travel; 2) conducting guests to a reception room in a house; 3) establishing Choryang Church with all the baptized persons; 4) establishing a Chinese literary school. He did missionary work with Busan and Daegu as centers having a far-reaching plan in mind. Bae We Ryang moved to Daegu in April 1896, hoping to preach the gospel there all his life, but before long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PCUSA) made him move to Seoul and Pyongyang. His successors, James Edward Adams (1867∼ 1929), Dr. Woodbridge O. Johnson (1869∼1951) and Henry Munro Bruen (1874∼1959) were given many missionary roles to evangelize people in the Youngnam region. In the Youngnam region, the March First Movement starting first in cities such as Daegu and Busan expanded to rural areas and then became the most powerful movement in the country. The demonstrations in the Gyeongsang region were led by Christian leaders and students. Daegu’s March Eighth Movement (대구 3.8운동) was planned and started by Daegu’s Christian religious leaders. Bae’s second missionary journey has been viewed as a major source of evangelization for the northern part of Youngnam areas. During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e Gyeongsang region, Christian leaders and believers played pivotal roles. Bae preached the gospel throughout the entire Youngnam region and the birth of churches there could all be deeply related to him. The March First Movement in Youngnam is connected with the regions where he made his rounds for the gospel. Therefore, it remains an important source for research in relating Bae We Ryang with studies on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e Youngnam region.
배재욱(Jae-Woog Bae) 영남신학대학교 2016 신학과 목회 Vol.45 No.-
부산항을 통해 미지의 세계인 한국으로 와서 이 땅에서 선교하고자 노력했던 배위량(裵偉良/윌리엄 M. 베어드/ William M. Baird, 1862~1931)은 1893년 4월부터 5월까지 경상도 땅 일원을 탐방하여 선교지부를 개척하고자 경상도 지역 순회 전도여행을 떠나 1,240리나 여행하면서 순례했다. 배위량은 1894년 4월 22일 많은 위험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모험과 인내와 열정으로 극복하고 대구에 도착했다. 그는 나중에 남성로에 있는 대구제일교회 옛 본당의 교회 부지를 구입하여 경상도 선교의 기틀을 닦았다. 그가 주님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고자 다녔던 그 길을 다시 찾는다면 인생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 한국교회의 젊은이들과 한국교회에게 주는 좋은 선물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속화의 물결 앞에서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한국교회를 건강하고 새롭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배위량은 “믿음으로 호랑이 굴속에 뛰어든 선교사”처럼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의 2차 전도여행은 동래 - 밀양 - 청도 - 대구 - 상주 - 안동 - 의성 - 신령 - 영천 - 경주 - 울산을 거쳐 동래에까지 이어졌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선교 터전인 부산 선교지부에 머물렀지만, 부산에서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에 정착하는 것으로 제 2차 전도여행의 결실을 맺었다. 배위량의 길은 섬기는 마음으로 그리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Bae We Ryang (William M. Baird, 1862~1931) came to the unknown world of Korea through Busan Harbor for missionary work. He visited all of Gyeongsang Province from April to May in 1893, and made a pilgrimage, going on a 486.981818km evangelical journey to make a local branch of the mission. Although Bae We Ryang endured many hardships, he overcame his difficulties with his adventurous spirit and passion, and arrived in Daegu on April 22, 1894. He established the Gyeongsang Province ministry by buying the land, on which the old main hall of Daegu Jeil Church on Namsung Street is built, for his church site. Bae’s mission of spreading the Lord’s Gospel is an inspiration for the Korean Church and its youths. Looking to Bae’s example, the Korean Church can find its identity and stand strong against the waves of secularization. Bae We Ryang carried out his mission, enduring risk and hardship, like “a missionary who put his head into the lion’s mouth by faith.” After his second evangelical journey through Busan - Dongnae - Miryang - Cheongdo - Daegu - Sangju - Andong - Uiseong - ShinRyoung - Yeongcheon - Gyeongju - Ulsan - and Busan once more, he settled down in Daegu again. Bae We Ryang’s mission was to prepare a strong foundation and be an example for the Korean Church; following Bae, the Korean Church should also strive to serve and be an example for the Korean people with dedication.
안새부리(Ansaipyuri)에 대한 역사·지리학적인 탐구
배재욱(Bae, Jae Woog) 주안대학원대학교 2024 주안신학논단 Vol.2024 No.2
영남지역 최초의 복음 전도자인 배위량 선교사는 대구·경북지역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대구·경북지역의 교회는 3.1운동 시기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대구·경북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발상지는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한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대구·경북 지역 교회에 끼친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나는 마을 이름인 ‘Ansaipyuri’(‘안새부리’)는 선교·문화사적인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이 마을이 배위량의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열쇠어(Schlüsselwort)가 되고 한국 초기 선교 역사를 이해하는 데 기본적이고, 중요한 토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안새부리(Ansaipyuri)에 대한 역사·지리학적인 탐구”를 통하여 다음 2가지 소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1. 안새부리에 대한 연구가 왜 필요한가? 2. 안새부리가 어디인가? 3. 안새부리가 왜 신촌리 안마을인가? “안새부리의 위치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이해”를 통하여 안새부리의 위치를 찾고자 배위량의 일기 본문을 분석하고 인문학적인 분석과 현장 탐방를 통하여 “안새부리(Ansaipyuri)에 대한 역사·지리학적인 탐구”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팔조리의 출발점은 팔조령에 그 기원이 있다. 자연부락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팔조리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상당히 늦게 형성된 마을이므로, 팔조리를 1893년 4월 21일에 배위량이 잠을 잤던 마을인 안새부리로 보는 것은 역사·지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그리고 몇 가지 정황상 팔조리가 배위량이 말하는 안새부리라는 주장은 역사적인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안새부리의 위치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이해”를 통하여 안새부리의 위치를 찾고자 배위량의 일기 본문을 분석하고, 현장 탐방과 인문학적인 사고를 통하여 “안새부리(Ansaipyuri)에 대한 역사·지리학적인 탐구”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배위량은 안새부리(Ansaipyuri)라는 산골마을에서 1893년 4월 21일 밤에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에 팔조령을 넘어서 대구를 향하였다. 역사·지리학적인 판단으로 볼 때 안새부리는 ‘신촌리의 안 마을’로 추정할 수 있다. 1893년 4월 21일에 배위량이 여행한 경로는 청도 읍치에서 나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학산리 방향으로 향하다가 토평리와 고철리를 거쳐 당시에 차북면 소재지인 상당동(현재 신촌리 상당마을)을 거쳐 청도 역사의 현장인 ‘신촌리 안 마을’로 와서 하룻밤을 쉬어 갔다고 본다. 옛날부터 ‘새벌’로 불리던 신촌리는 배위량이 처음으로 청도를 방문했던 1893년 당시에는 ‘새불’ 또는 ‘새부리’로 불렸고, 지금은 그 말의 후기 변화 형태인 ‘새월’이란 지명으로 불린다. 이런 논증에 따라 ‘안새부리’는 ‘신촌리의 안동네’로 추정된다. Missionary Bae Wi-ryang(William M. Baird, 1862-1931, 베어드) was the first evangelist in Youngnam province. Missionary Bae Wi-ryang was the first evangelist in Youngnam province. He is a pathfinder who greatly influenced the culture of the Daegu-Gyeongbuk area. Churches in Daegu and Gyeongbuk area play an important role during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By the way, the birthplace of the 3.1 movement in Daegu-Gyeongbuk area is almost the same as the area where Bae Wi-ryang’s second round trip traveled. From this point of view, we can infer the influence he had on the churches in Daegu-Gyeongbuk area. The name of a village in his diary, ‘Ansaipyuri’, is significant keyword (Schlüsselwort) in missionary and cultural history. The name of this place is an important keyword in Bae’s missionary activities and is fundamental to understanding early missionary history in Korea. In this paper, through a historical and geographical exploration of Ansaipyuri, I would like to address the following two subtopics. The first is: “Why is the study of Ansaipyuri necessary?” The second is: “Where is Ansaipyuri?”. The third is: “Why is Ansaipyuri an inner village of Sinchonri?” In order to locate Ansaipyuri through a historical-geographical understanding of the location of Ansaipyuri, I analysed the diary texts of Bae Wi-ryang and conducted a historicalgeographical exploration of Ansaipyuri through field visits. The origin of Paljori is the starting point of Paljoryeong. Paljori, which does not have a natural village name, is a village formed quite late in various circumstances. So it is not timely for Paljori to become ‘Ansaipyuri’, the village where Bae Wi-ryang slept in a mountain village called Ansaipyuri on 21 April 1893 and left for Daegu the next morning, crossing the Paljoryeong. In some contexts, the claim that Paljori is the amount of coordination ‘Ansaipyuri’ is very poor in historical basis. Based on historical and geographical research, Ansaipyuri is believed to be the ‘inner village of Sinchonri’. The route taken by Bae Wi-ryang on 21 April 1893 is believed to have been from ‘Cheongdo-eupchi’(‘청도 읍치’[邑治]) to Haksanri along the road on the left, then through ‘Topyeongri’, ‘Gochulri’ and ‘Sangdang-village’, the seat of the district office of ‘Chabuk-myeon’, to an ‘inner village in Sinchonri’, the historical site of Cheongdo, where he stayed overnight. Sinchonri, which called ‘Saebeol’, When Bae Wi-ryang first visited Sinchonri in 1893, it was later ‘saebul’ or ‘saebuli’, and now ‘Saewol’, a later form of the place name. From this it can be concluded that ‘Ansaipyuri’ was an ‘inner village of Sinchonri’.
태권도의 전자호구 충격값과 포스플랫폼 충격력과의 관련성
배영상 ( Young Sang Bae ) 한국운동역학회 2013 한국운동역학회지 Vol.23 No.2
1. 엘리트 태권도선수와 태권도학 전공학생의 충격력 태권도 발차기에 대해 충격력을 측정한 연구는 Bae, Shibukawa와 Ishijima (1989), Pieter, F.와 Pieter, W. (1995), Bae와 Lee (2006), Pedzich, Mastalertz와 Urbanik (2006), O`Sullivan 등 (2009)의 보고가 있으며, 발차기기술에 대한 연구보다 발차기 충격력 연구는 상대적으로 거의 발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그러나 매년 국기원에서 실시하는 태권도한마당대회의 격파왕 선발대회에는 많은 참가자들이 격파왕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도전하는 등 태권도의 위력이라고 말한다면 격파의 위력을 지칭할 정도로 태권도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까지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충격력에 관련된 연구가 적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충격력 측정에 참가하는 피험자가 부상을 우려하여 참가를 기피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포스플랫폼 등의 신뢰성과 정밀성을 갖춘 장비라고 하더라도 표면이 철판이기 때문에 직접 충격력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표적면에 완충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그때의 충격력 값은 측정조건에 따라 상대값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본 연구에서는 연구방법의 실험방법에서 제시한 충격력의 산출과정을 거쳐 데이터를 확보하였기에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데이터의 안정성을 확보할 의도로 많은 피험자를 동원하고자 엘리트태권도선수군 21명과 태권도학 전공학생군 20명을 피험자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두 집단 모두 숙달된 태권도 수련군이지만 수련군별 특성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동질집단으로 간주해도 좋을지를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고자 엘리트태권도선수군과 태권도학 전공학생을 비교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Table 1>에서 보면 앞차기와 뒤차기의 최대충격력에서 두 그룹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를 나타냈는바, 발차기 기술에 따라 엘리트 태권도선수군이 우수한 능력을 발휘한 기술(뒤차기)과 태권도학전공 학생군이 우수한 능력을 발휘한 기술(앞차기)이 다르게 나타났다는 점이 주목 된다. 즉 돌려차기에서는 두 그룹 간에 비슷한 충격력(약 4,000 N)의 크기를 나타냈으나, 앞차기는 태권도학전공 학생들이 큰 충격력(약 4,700 N)을, 뒤차기는 엘리트 태권도 선수군이 큰 충격력(약 5,300 N)을 발휘하였다. 이를 좀더 세밀히 분석하고자 세 가지 발차기 기술의 최대충격력에 대한 일원배치분산분석과 다중비교검정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최대충격력의 크기는 엘리트 태권도선수군에서 통계적으로 유의(p<.01)한 차이를 나타내면서, 다중비교검정에서 뒤차기, 돌려차기, 앞차기 순으로 유의한 최대충격력의 크기(약 4,000 N)를 나타났다. 그러나 태권도학 전공 학생군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이상의 것을 미루어 볼 때 태권도에서 발차기 빈도가 가장 많은 돌려차기 기술(Bae, 1992)은 두 그룹 모두 평소의 수련에서 많은 반복연습을 실시하는 관계로 거의 동일한 수준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앞차기 기술의 경우는 태권도경기의 특성상 앞차기 기술로 발차기를 한다는 것은 차기가 아닌 밀어내기가 되기 때문에 득점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어(Bae, 1992) 대부분의 선수들은 앞차기 기술에 대한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 할 수 있다. 또한 뒤차기 기술은 앞차기나 돌려차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뒤차기 기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숙달을 위한 훈련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발차기 수련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일반 태권도학전공학생이 엘리트 태권도선수군 수준의 뒤차기 위력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2. 전자호구 충격값과 포스플랫폼 충격력데이터와의 관련성 태권도경기에 전자호구가 도입되면서 판정의 객관성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는 큰 호응을 얻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밀어차기 공격이 득점으로 인정된다는 점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태권도 현장지도자가 많다(Kim, 2012; Seo, 2012). 태권도 경기에서 사용되는 발차기 기술은 다양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발차기는 앞차기와 돌려차기 그리고 뒤차기이다. 태권도의 다양한 발차기 기술은 대부분 이들 세 가지 기본발차기 기술을 바탕으로 한 응용발차기 기술인 것이다. 이 세 가지 발차기 기술을 발차기 유형으로 보면 앞차기와 뒤차기는 지르기형의 발차기이며, 돌려차기는 치기형 발차기 기술이다. 또한 앞차기와 뒤차기는 동일한 지르기형의 발차기로 분류할 수 있지만, 엄밀히 보면 앞차기는 밀어차기형의 발차기 기술이다. 즉 앞차기는 밀어차기형, 돌려차기는 치기형, 뒤차기는 지르기로 분류할 수 있다(Kaneko & Fukunaga, 2006). 이상과 같은 발차기 기술의 특성을 바탕으로 전자호구의 충격값과 포스플랫폼의 충격력데이터와의 관련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돌려차기의 전자호구 충격값과 포스플랫폼의 충격력데이터의 관련성은 <Figure 3>에 나타난 바와 같이, 충격력의 모든 요소에서 양자 간에는 통계적인 유의성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앞차기<Figure 2>에서는 최대충격력(p<.01), 체중당 최대충격력(p<.01), 그리고 평균충격력(p<.05)에서 통계적인 유의성을 나타내었다. 또한 뒤차기<Figure 4>에서는 최대충격력(p<.001), 체중당 최대충격력(p<.001), 체중당 평균충격력(p<.01), 그리고 평균충격력(p<.05) 등 모든 충격력데이터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한 관련성을 나타내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해 본다면 지르기형인 뒤차기, 밀어차기형인 앞차기에서는 전자호구 충격값과 포스플랫폼의 충격력데이터가 높은 상관을 나타낸 반면, 치기형인 돌려차기에서는 양자 간에 통계적으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 발차기 기술이 표적에 임팩트 되는 순간을 본다면 돌려차기는 보다 비스듬하게(사선) 진입하는데 비해(Bae et al., 1989) 앞차기와 뒤차기는 보다 수직으로 표적에 진입하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즉 표적면에 대해 보다 수직으로 임팩트하는 뒤차기와 앞차기는 전자호구 충격값과 포스플랫폼 충격력값이 통계적으로 관련성이 높은 반면, 표적면에 대해 비스듬히 진입하는 돌려차기는 양자 간에 통계적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태권도경기현장에 태권도지도자들이 전자호구 도입에 따라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Kim, 2012; Seo, 2012)과도 일치하는 사항이다. 여기서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은 전자호구의 충격력인식 센서가 표적면에 대해 수직방향만 인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즉 충격력은 벡터량이기 때문에 표적에 대해 좌우방향, 상하방향, 그리고 수직방향을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권도경기 현장지도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보다 객관적인 경기진행을 위해서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각종 전자호구의 충격력인식 시스템을 재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Although the electronic body protector has been officially adopted by the World Taekwondo Federation(WTF) in 2006, no scientific information is available about the reliability of its performance. The purpose of this study, therefore, was to investigat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mpact value of electronic body protector and the impact force of force platform. Male collegiate Taekwondo athletes([MCTA], n=21) and male collegiate Taekwondo students([MCTS], n=20) volunteered to participate in the study. Each subject performed the apchagi, dollyeochagi and dwichagi on the force platform and the electronic body protector. At the apchagi, it showed that MCTS(about 4,700 N) generated more maximum kick force than MCTA(about 3,900 N), but it expressed that MCTA(about 5,300 N) generated more maximum kicking force than MCTS(about 4,400 N) at the dwichagi. At the apchagi and the dwichagi, it indicated the high coefficient of correlation(over r=.8) which supports higher explanation forc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mpact value of electronic body protector and the impact force of force platform, but there was no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 at the dollyeochagi.
Bae,Sung-Heui,Kim,Hongsoo 한국노인간호학회 2020 노인간호학회지 Vol.22 No.1
Purpose: Formal long-term care in nursing homes became a popular means of caring for frail elders in South Korea. This universal long-term care (LTC) insurance for elders was introduced in 2008.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provide information on the extent of and variations in residents’ care needs and nursing staffing characteristics across nursing homes. Methods: This was a population-based secondary analysis of a large national survey study involving 1,472 older residents in 92 nursing homes in South Korea in 2013. Characteristics of residents and nursing homes were collected by functional assessment and an examination of administrator surveys for nursing home size was done using descriptive analysis. Results: Small and small-medium nursing homes were more likely to provide care to non-Medical-aid beneficiaries and older people with lower care need level. These smaller homes also better met the minimum nursing staffing standard. However, they were less likely to hire registered nurses (RNs), as it is not yet a staffing requirement for nursing homes in Korea. Conclusion: South Korea has a policy agenda to increase nursing staffing level, especially by adding RNs, and decrease variations in staffing levels by nursing home size. Further evidence on care-need level, proper resource allocation, and policies designed to strengthen the LTC workforce is essential to advance the LTC system in Korea.
Speaking Stella and Silent Astrophil : An Unstable Gender Paradigm in Astrophil and Stella
( Bae¸ Kyung-jin ) 동국대학교 영어권문화연구소 2015 영어권문화연구 Vol.8 No.3
The first English sonnet sequence, Astrophil and Stella (1591) by Philip Sidney (1554-1586), has been traditionally considered to embody a powerful sense of subjective presence and philosophical trappings in relations to love and desire. Traditional literary criticism has long been preoccupied with the poet as a desiring subject in the Renaissance love lyrics while the beloved lady is passively and silently represented by a male voice. In her traditional idealization, bordering at times on idolatry, the beloved lady is in fact reduced to silence, which was the most virtuous ideal of feminine decorum in Elizabethan period. In search of the previously hidden or overlooked female voices, this study aims to reexamine the typically gendered paradigm in Sidney's sonnet sequence between a silent female beloved lady and a speaking male poet-lover. Although the Petrarchan mistress is sometimes silenced, in some significant cases she is not. Not only does Stella speak, but the power and significance of her speech are also found at several points in the sequence. It is notable that Stella's voice is represented equal to Astrophil's own. Being a proxy for the representation of the male poet-lover's self, and therefore assigned a silent and iconic function, she occasionally plays an active role, while the male poet is passive and silent. In front of Stella's authoritative and virtuous speech, Astrophil is presented helpless, passive and silent. Though the Eighth song offers Stella's most frank and first person description of her desire for Astrophil, she denies Astrophil. Facing her refusal, Astrophil turns to looking inward in his dark, private and silent state. The last sonnet is overtly artificial and conventional with its Petrarchan metaphors and sentiments and reveals a sense of inability: confined within a convention and unable to say anything else. Stella is enforced to silence but on occasion she repels Astrophil in her speaking in contrast with a passive, helpless and most of all silent Astrophil.
Competition Responses of Populus alba Clone ‘Bolleana’ to red:far-red light
Bae,Han-hong,Kang,Ho-duck,Richard B,Hall 한국자원식물학회 2004 Plant Resources Vol.7 No.1
The reduced ratio of red:far-red (R:FR) light acts as a measure of the proximity of competitors and plants can detect the potentially competing neighbor plants by perceiving reflected R:FR signals and initiate the response of “shade avoidance” before actual shading occurs. The phytochrome system is responsible for monitoring the changes in the R:FR and initiating the shade avoidance response. The response to low R:FR ratio was studied in a white aspen Populus alba clone ‘Bolleana’ using two filter systems: a clear plastic filter system that allows a R:FR ratio less than 1.0 to pass from adjacent border plant reflection; and a special commercial plastic that blocks FR light and creates a R:FR ratio above 3.0. The reduced R:FR signals enhanced the stem elongation in response to competition at the expense of relative stem diameter growth. Trees grown inside clear chambers were 27 % taller than trees grown inside the FR-blocking filter chambers. Stem taper of clear chamber trees was 16% less than the FR-blocking filter trees. Low R:FR also induced 22% more stem dry weight and 13% greater petiole length per leaf compared to the FR-blocking filter trees. There were no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s in leaf area, leaf number increment, and total dry weight between the two light filter treatments.
차인배(Cha In-bae)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역사민속학 Vol.0 No.44
19세기 풍속화가로 알려진 金允輔와 金俊根이 그린 형정풍속화가 ≪형정도첩≫과 <기산풍속첩> 등에 전하고 있다. 이들 형정풍속화는 범죄 단속, 처벌, 고문, 재판 등 다양한 형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법전에 기록된 형정 내용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벌체계를 소개하고 있어 형정연구에 대한 충분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형정과 형벌에 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형정풍속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19세기에 활동했던 김윤보와 김준근의 형정풍속도를 종합적으로 수집ㆍ분석하고, 개별 그림의 내용을 기존 형정에 관한 연구 성과와 비교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두 풍속화가의 형정풍속도를 오형ㆍ고문ㆍ사회범죄 등 몇 가지 형벌체계로 분류한 후, 그림내용의 내용을 분석해 각각의 특징을 고찰하고 그 공통점을 통해 당대의 형정의 특성을 고찰하였다. 또한 각론에서는 기왕에 알려진 형정에 관한 내용과 그림 묘사의 비교를 통해 그 집행 과정과 내용을 보다 면밀히 고찰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Genre paintings depicting scenes of penal administration by Yun-bo Gim and Jun-geun Gim are included in the Hyeongjeong docheop (Album of Genre Paintings Depicting Scenes of Penal Administration) and Gisan pungsok docheop (Album of Gisan’s Genre Paintings), respectively. These genre paintings depict various scenes of penal administration including crime enforcement, punishment, torture and trial, allowing visual confirmation of contents of penal administration that was recorded in the legal codes of the Joseon Dynasty. In particular, some of the paintings have significant value in respect of research on penal administration as they introduce unique punishment systems that are not found in existing literature. In existing studies on the penal administration of the Joseon Dynasty, genre paintings were undervalued, only used as supplementary visual material to help understanding of penal administration. Although some of the paintings were exaggerated due in part to commercial purposes, the genre paintings realistically reflect the penal administration of the time to such an extent as to even depicting trivial customs of the executor that could not be ascertained in literature. Thus, this paper classified the genre paintings of the two painters by several punishment systems, examined the each of their characteristics through the differences in the content of the paintings, and studi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penal administration of the time through their similarities. Moreover, in each section, the paper sought to approach historical truths by thoroughly studying the process and content of execution by comparing and contrasting the details of the paintings with the existing knowledge on penal administration.
Soo‑Bae Kim,Jae‑Gil Jung,Young‑Hee Cho,Su‑Hyeon Kim,Kwangjun Euh,Jung‑Moo Lee 대한금속·재료학회 2022 METALS AND MATERIALS International Vol.28 No.7
The effect of ultrasonic melt treatment (UST) on the solidification microstructure of an Al–5Ti–1B alloy containing highvolumefractions of Al3Tiand TiB2particles is investigated for various UST times with different melt holding times. Theas-cast Al–5Ti–1B alloy is composed of TiB2and polygonal Al3Tiparticles (present prior to UST), plate-like Al3Tiparticles,and Al grains (formed during UST and/or solidification). The UST causes a size reduction and homogeneous distributionof the TiB2-agglomerated region containing many submicron-sized TiB2particles pushed to the grain boundaries. The USTslightly decreases the size and improves the distribution of polygonal Al3Tiparticles enriched in the TiB2-agglomeratedregion. Unlike the TiB2and polygonal Al3Tiparticles, which exhibit a minor refining effect, the plate-like Al3Tiparticlesshow a significant refinement with UST application. The UST has a significant effect on the size distribution of Al grains byinducing the formation of medium-sized grains at the expense of small and large grains; however, it only has a slight effecton grain refinement. The degree of microstructure modification increases with increasing UST time but decreases with meltholding time after UST. The mechanisms for the refinement and dispersion of the TiB2and Al3Tiparticles and Al grains arediscussed considering fragmentation, nucleation, and growth behaviors induced by the UST and subsequent solidification.
배득종 ( Deuk J. Bae ) 한국행정학회 2004 韓國行政學報 Vol.38 No.4
The study of Public Administration is an application science that employs economic theory and models for the analysis of public finance. It usually adopts a theory of public goods. However, public goods are only a part of goods supplied by government. Most goods in the public sector are the commons (defined as rival goods without excludability) or the mixed goods. Theory of the commons has long been established, and the most famous is the theory of Tragedy of the Commons developed by Hardin. However, use has been limited to special areas such as fishery, forestry, and environmental quality. Most goods in the public sector are the commons, though the theories of the commons are applied to very limited goods. This study explores the ways to apply the theory of the commons widely to goods in public sectors such as budgets, performance, and other financial or human resources. The key for the wider use of the theory is the development of a feedback loop which connects private interest to public interests. It requires creativity and wisdom to develop such an incentive lo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