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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산용 전자장비의 팬 선정 및 검증에 관한 연구

        진성은(Sung Eun Jin),김환구(Hwan Gu Kim),윤의열(Eui Youl Yoon),전희호(Hee Ho Jeon),이승준(Seung Jun Kim) 대한기계학회 2017 大韓機械學會論文集A Vol.41 No.11

        상용(Commercial type) 냉각 팬이 적용된 방산용 전자장비는 생산 기간 중 팬 단종이 빈번하게 발생된다. 팬 단종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대체 팬 선정이 필요하며, 고온 동작 시험 등의 장비 성능 및 신뢰성 검증이 요구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생산 과정에서 활용 가능한 효과적인 대체 팬 선정 및 검증 방안에 대해 연구하였다. 먼저, 장비 냉각에 필요한 유량 및 압력을 계산하여 대체 팬을 선정하였고, 신뢰성을 확보한 CFD 방열 해석 모델을 활용해 팬 선정의 타당성을 검증하였다. 이후 대체 팬을 장비에 적용하여 고온 운용 시험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장비는 고온 환경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며, 주요 부품 및 내부 공기 온도는 열적으로 안정된 상태임을 확인하였다. Sales of commercial-type cooling fans intended for application in military electronics are often discontinued during equipment production. This results in requirements for alternative fan selection as well as equipment performance and reliability tests, such as high-temperature operation testing. This study deals with alternative fan selection and verification methods that can be used during the production process. First, an alternative fan was selected by calculating the flow and pressure required to effectively cool the equipment, then the feasibility of the selected fan was verified using a reliable CFD heat dissipation analysis model. Following this, a high-temperature operation test was performed using the alternative fan in the equipment. Results demonstrated that the equipment satisfied its required function in a high-temperature environment, and the main parts as well as internal air temperature were found to be thermally stable.

      • 안드로이드기반 항공기의 지상 점검 장비 개발

        강재구(Jae Gu, Kang),진성현(Sung Hyun, Jin) 항공우주시스템공학회 2019 항공우주시스템공학회 학술대회 발표집 Vol.2019 No.11

        항공기 지상 시험과 정비 시 항공기 자체 혹은 항공기에 탑재되는 LRU (Line Replaceable Unit)들의 점검이 이루어 지게 되는데, 이때 점검 대상이 되는 장비의 통신 규약에 맞도록 별도 개발된 지상 점검 장비를 활용 하게 된다. 특히 점검 대상이 실시간 통신을 기반으로 하는 점검 기능이 필요할 경우 별도의 RTOS (Real Time Operating System)가 탑재된 지상 점검 장비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렇게 개발된 지상 점검 장비는 RTOS 사용에 따른 라이선스 비용 및 전용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의 라이선스뿐만 아니라 개발된 점검 소프트웨어의 사용과 관련된 라이선스 비용도 발생 되고, 해당 RTOS가 동작 되어야 하므로 전용 하드웨어 플랫폼을 필요로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개발된 장비는 상당한 양의 부피와 무게로 인해 장비 운용 시 적지않은 불편함을 초래 한다. 본 논문에서는 휴대성을 기반으로 기 제작된 안드로이드[1] 기반의 타블렛 PC (Tablet Personal Computer)와 스마트폰 (Smart Phone)을 활용 하여 개발 비용을 최소화하고, 사용 및 운용의 편의성을 증대하는 지상 점검 장비 개발 방법을 제안 하고자 한다.

      • KCI등재

        부산지역에서 분리한 레지오넬라균에 대한 PFGE를 이용한 molecular typing

        박은희,김미희,김정아,한난숙,이주현,민상기,박연경,진성,정구영,빈재훈,Park Eun-Hee,Kim Mi-Hee,Kim Joung-A,Han Nan-Sook,Lee Ju Hyeoun,Min Sang Gi,Park Yon Koung,Jin Seong Hyun,Jeong Gu Young,Bin Jae Hun 한국생명과학회 2005 생명과학회지 Vol.15 No.2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부산지역의 냉각탑수에서 분리한 L. pneumophila (serogroup 1) 39균주에 대해 제한효소 SfiI 처리한 경우 PFGE 양상은 dice coefficient $<65\%$의 유사성을 가진 band를 Awl로 10개의 pulsotype으로 나누었고, 가장 많았던 유형은 E pulsotype으로 39주중 18주로 $46.2\%$를 나타내었으며, 그 외 A pulsotype $17.9\%$, C pulsotype $15.4\%$, F pulsotype $7.7\%$ 및 B, D, G, H, I, J pulsotype이 각각 $2.6\%$로 유전적 양상이 다양하였다. 제한효소 NotI 처리한 경우 PFGE 양상은 dice coefficient $<60\%$의 유사성을 가진 band를 $a\~h$로 8개의 pulsotype으로 나누었고, 가장 많았던 유형은 f pulsotype이 $38.5\%$였으며 그 외 d pulsotype $20.5\%$, e pulsotype $17.9\%$, a pulsotype $10.3\%$, h pulsotype $7.7\%$ 및 b, c, g pulsotype이 각각 $2.6\%$를 차지하였다. 본 연구를 통하여 부산지역에서 분리되는 레지오넬라균에 대한 유전자 유형분석 결과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레지오넬라증의 집단 발생 또는 산발적인 질병 발생이 있을 경우 분자학적 측면에서 사람과 환경에서 분리된 균으로부터 감염원과 감염경로를 규명하는 역학적인 도구로써 이용 가능할 것으로 사료되었다. In this study, we did the molecular typing of 39 environmental Legionella pneumophila serogroup 1 isolates collected from 2001-2003 in Busan using the pulsed-filed gel electrophoresis (PFGE). PFGE of SfiI fragments were divided into 10 pulsotypes $(A\~J)$, corresponding to $<65\%$ similarity and a subtype within each pulsotype was characterized by $>84\%$ similarity. The major cluster was pulsotype E $(46.2\%)$, which included 18 isolates and was divided into 4 subtypes $(E1\~E4)$. PFGE of NotI fragments were divided into 8 pulsotypes $(a\~h)$, corresponding to $<60\%$ similarity and a subtype within each pulsotype was characterized by $100\%$ similarity. The major cluster was pulsotype f $(38.5\%)$, which included 15 isolates. The ATCC type strain L. pneumophila serogroup 1 was identified as a different molecular pulsotype compare to the Busan isolates. It is possible that L. pneumophila serogroup 1 isolated in Busan with specific DNA pattern is comparable with those isolation in other cities in Korea.

      • KCI등재

        『山海師友淵源錄(산해사우연원록)』編纂上(편찬상)의 爭點(쟁점)과 南冥學(남명학) 傳承(전승)의 두 흐름

        구진성 ( Jin Seong Gu ) 우리한문학회 2015 漢文學報 Vol.32 No.-

        이 글은 南冥 曺植의 전기 자료인 『山海師友淵源錄』의 편찬 과정과 편집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 전승의 두 흐름을 대략 파악하기 위한 의도로 작성되었다. 인조반정 직후 조식의 수제자 鄭仁弘이 처형되자, 그 문인의 다수가 정인홍과의 관련으로 인해 각종 獄事에 연루 되거나 지척을 받았다. 정인홍의 정치적 세를 따른 전력은 染北으로 표현 되었고, 晦退辨斥에 동의하거나 추종한 전력은 侮賢으로 표현되었는데, 이 두가지 요소는 그 뒤 지속적으로 정인홍 계열을 공격하는 구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산해사우연원록』은 이러한 혐의를 피해 이루어진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정인홍의 행적이나 회퇴변척에 관련된 문제는 긍정적인 맥락에서 수록되기 힘들었으나, 정인홍의 남명 추숭 정신은 책의 편집자들에게 계승되었다고 판단된다. 편찬상의 쟁점으로는 ``퇴계의 비판을 수용하는 문제``와 ``음부옥사와 절교사 처리 문제``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 전승의 방법론적 두 흐름이 발생했다. 박인은 남명에게 제기된 老莊的성향에 대해 별도로 변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하홍도는 퇴계가 지적한 奇異老莊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두 인물 모두 남명 학문에 대한 존모 정도가 높고, 그 본질이 出處에 있다고 보았지만, 박인이 남명 학문의 독자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을 지녔다면, 하홍도는 퇴계의 지적을 수용하여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이 공인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공론은 박인의 견해를 지지하는 흐름이었고, 淫婦獄사건이 현재까지 수록된 사실을 통해 남명 추숭을 위해 포기할 수 없었던 부분 또한 명확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시련이 있었음에도 조선 말기까지 남명학파가 유지되었던 한 원인을 『산해사우연원록』 편찬자들의 노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flow of Nammyeonghak[南冥學] succession. After Injo-Coup[仁祖反正], Nammyeonghak lore of flow is both a goal. It can be known through edit issue of 『Sanhaesauyeunwonrok』. After Injo-Coup, Pak,In[朴絪] had a unique position to defend the value of Nammyeonghak. On the other hand, Ha,Hong-do[河弘度] was prepared infrastructure that Nammyeonghak can be certified. Pak,In did not accepted the indications of Toegye[退溪], but Ha,Hong-do did. This is not only a difference of two people, but also it is an index that can know the two flow of Nammyeonghak Lore.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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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암(一庵) 신몽삼(辛夢參)의 생애와 학문 성향

        구진성 ( Gu Jin-seong ) 연민학회 2018 淵民學志 Vol.30 No.-

        일암(一庵) 신몽삼(辛夢參, 1648-1711)은 경상도 영산·합천 등 남명학파의 영향이 강한 지역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그의 가계 또한 그 영향권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교유 범위는 자신의 주변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이현일(李玄逸) 등 퇴계학파 남인과 민창도(閔昌道) 등 근기 남인에 걸쳐 있었다. 그는 인사(人事)에서 천리(天理)를 구현해 나가는 것을 학문의 과정으로 보았고, 인사의 중요성과 내용 및 과정을 알아서 행하는 것을 진지(眞知)·실천(實踐)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인사에 기반하지 않고 개념이나 논리로 천리를 추구하려는 태도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즉 하학(下學)이 선행되지 않은 상달(上達)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몽삼은 이러한 자신의 학문관을 여러 인물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신몽삼은 여러 차례 퇴계가 현몽(現夢)할 정도로 그를 지극히 존모하였고, 이점이 『동유학안(東儒學案)』에서 신몽삼을 퇴계 사숙인(私淑人)으로 분류한 한 가지 이유로 보인다. 하학이 중요하다는 점은 유학자라면 부정하지 못할 명제이지만, 그것을 중시하는 정도와 그것이 학문 체계 내에서 지니는 위상에 있어서는 학자마다 차이를 보인다. 신몽삼의 가학적 연원인 남명은 당대에 퇴계와의 학문 토론을 통해 하학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하학적 실천이 전제되지 않은 지식 추구는 무용하다고 주장하였다. 신몽삼은 퇴계가 정립해 놓은 학문의 언어로 많은 부분 자신의 학문관을 피력하였으나, 하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남명에 못지않은 인식을 보였다. Ilam (一庵) Shin Mong-sam (辛夢參, 1648-1711) was born in an area that has strong influence on Nammyeonghak (南冥學), and his family was closely connected with Nammyeong School (南冥學派). His days were in the Nammyeong School's doldrums by Injo-Coup (仁祖反正). Not only did he associate with Nammyeong School but also with Teogye School (退溪學派). He thought pursuing Cheonli (天理) in Insa (人事) is the learning process. Jinji (眞知) is that knew Insa is important, and above all, he emphasized the Practice (實踐) of Jinji. And he was extremely wary of the attitude of pursuing Cheonli through concept or logic, not based on Insa. That is, Cheonli without a leading Insa cannot be established. He respected teogye, so he has been classified as a Teogye School. However, his family and studies have a strong tendency to Nammyeo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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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珠潭 金聖運을 통해 본 18세기 초 경상우도 유림 동향

        구진성(Gu, Jin-seong) 대동한문학회 2020 大東漢文學 Vol.63 No.-

        이 글은 주담 김성운의 가계와 생애를 통해, 그의 학문적・당파적 정체성과 아울러 18세기 초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김성운은 ‘남명학파 남인’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남명학파적인 성향을 진하게 지니고 있었던 동시에, 숙종조 집권 서인에 대응하여 뚜렷한 남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고조부 김대명으로부터 이어진 학파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대 덕천서원을 이끄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이는 정인홍 계열의 남명학파가 배제된 학파 내 지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침체된 남명학파를 부흥시키기 위해 이만부와 같이 저명한 외부 인사를 초빙하는 등 지역 내외의 인물들과 적극적으로 교유하였다. 남인으로서 그의 뚜렷한 행적은 『주담집』 속 그의 여행 기록에서 드러나는데, 이를 통해 당시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과거시험장에서 벌어진 사건 기록이나 관련한 자신의 논평을 통해, 숙종 조에 발생한 첨예한 사안을 받아들이는 유림의 태도와 김성운의 인물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종 즉위 이후의 정국 동향도 여정 중에 관심을 기울여 기록하였다. This article was written to examine the trends of Confucian scholars in Gyeongsangwu-do in the early 18th century as well as his academic and partisan identity through the family and life of Judam[珠潭] Kim, Seong- woon[金聖運]. He had a strong tendency to Nammyeong School[南冥學派] and he had a strong characteristic of Namin[南人] in response to King Sukjong era s ruling party. Therefore he could define as “Nammyeong School Namin”. He was one of the leaders of the DeokcheonSeowon[德川書院] Confucian Academy, succeeding the tradition of the school from the great-great-grandfather Kim, Dae-myeong[金大鳴]. This was done within the internal dynamics relation of the Nammyeong School in which a group of Jeong, In-hong[鄭仁弘] s disciples was excluded. In order to revive the depressed Nammyeong School, he actively interacted with local and outer region figures by inviting prominent external figures like Lee, Man-bu. His distinct track record as Namin is revealed in his travel records. Through this, we can also see the trends of the Confucian scholars in Gyeongsangwu- do at that time. Especially through the record of the incident in place of state examination and his own comments, we can see the attitude of Gyeongsang-do Confucians accepting partisan events and the character of Kim, Sung-woon. In addition, the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enthronement of King Gyeongjong was recorded with interest during the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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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인조반정 직후의 남명학파(南冥學派) 동향: 남명 선양 사업에 드러난 논의를 중심으로

        구진성 ( Jin Seong Gu ) 연민학회 2013 연민학지 Vol.19 No.-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격변을 겪은 남명학파(南冥學派)는, 자신들의 학문적·정치적 정체성을 어느 방향으로 설정해 나갈 지에 대한 의견을 신중히 개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남명학파의 영수였던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반정 세력에 의해 적신(賊臣)으로 처형된 상황에서, 정인홍에 대한 입장 정리는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정인홍이 자신들에게 끼친 학문적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학파 내의 학자들 간에 적잖은 의견 교환이 있었던것으로 보이며, 특히 남명 관련 자료에 대한 정인홍의 편집 방침을 고수하는 세력과 수정을 요구하는 세력 간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반정 직후 남명 관련 자료에 대한 대대적인 수집이 정인홍의 문인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박인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남명 관련 자료의 수집에 임한다. 그러나 정인홍과 깊이 관련된 인물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집안 인물과 정인홍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자료 수집이 그리 용이한 일만은 아니었다. 또한 수집된 자료를 편집하는 과정에서의 논의 또한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연보 편찬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연보의 사실 기록에 대한 세세한 시비에서부터 연보 편찬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가 있었으며, 남명과 귀암(龜巖) 이정(李楨)이 절교한 사건을 삭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편집을 주도한 박인은 입증 가능한 사실만을 연보에 적시하여 남명의 본래 면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남명 출처에 대한 옹호의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타 학파와의 화해를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학파 내에서 다른 의견 또한 있었던 것이다. 박인이 가진 남명 전기 자료에 대한 편집 방침은 당시 남명학파의 공론을 반영한것이면서 동시에 정인홍의 『남명집』 편집 방침과 일치한다. 여러 비난을 감수하면서 남명의 학문과 출처에 대한 변호를 지속하던 정인홍이 처형되어 남명의 위상 또한 저하된 반정 직후의 상황에서, 박인은 정인홍의 방침을 고수하며 남명 학문을 선양하였던 것이며, 이는 당시 남명학파의 대체적인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Immediately after coup of the king In-Jo, Nammyung-School scholar`s gingerly express their opinion about academic and political positions. Because, at that time Nammyung-School`s leader Jung In-hong was executed by the coup government. For the existence of the school, they had a lot of exchange of ideas, and they had differed about methodology. At that time, Pak In was collected biographies base about Nammyung. He did all he could, however it was not an easy task. Because, they didn`t want to surface relationship with Jung In-hong. About biography edit, they discuss from a variety of perspectives. Pak In insisted that the biography must included accurate facts. It is also insist that Nammyung acts`s zero defect. Pak In`s biography edit course was reflected the Nammyung-School`s public opinion, at the same time, it was consistent with Jung In-hong`s 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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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학파의 역사적 전개상에서 용산범국회의 의미

        구진성 ( Gu Jin-seong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20 嶺南學 Vol.0 No.75

        용산범국회는 1636년 중양절에 동계 정온을 중심으로 성립된 모임이다. 정온은 광해군 정권시절 영창대군 사건과 관련하여 대북과 다른 의견을 주장하다가 기나긴 유배 생활을 겪어야만 했으나, 이러한 전력으로 인해 인조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남명학파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정온은 그의 스승 내암 정인홍의 위상을 이어받아, 인조반정 이후 이루어진 학파 내의 각종 사업에 관여했다. 이러한 정온의 역할을 고려했을 때, 용산범국회는 인조반정 이후 잔존한 정인홍 계열 남명학파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인조반정 직후부터 여러 옥사를 거치며 정인홍과 관련된 인물들이 숙청되어가던 막바지에 이른 시점이 용산범국회가 열리던 1636년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인물 상당수가 정인홍과 관련되어 있었고, 광해군 시기 북인으로 활동한 인물도 다수를 점한다. 이들이 정인홍 계열의 남명학파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가계의 후손들이 무신란(1728)을 주도한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용산범국회는 1636년 첫모임 이후 오랫동안 속개되지 못했으나, 팔송 정필달이 남겨 둔 기록으로 인해 구한말 재결성될 수 있었다. 정필달의 후손 구재 정재성의 주도로 재개된 용산범국회의 지향은, 구한말·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정온의 절의가 당대에 발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던 면우 곽종석의 절의가 정온을 계승하는 측면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정온과 곽종석 모두 남명학의 주요한 계승자임을 고려할 때, 용산범국회의 지향과 활동을 통해 구한말·일제시기까지 이어진 남명학파의 존재 양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YongsanBeomgukhoe is a group formed around Jeong,On in 1636. Jeong,On was exiled after claiming a different opinion from Big-North Party in King GwangHae period. However, this history have led to the centerpiece of the Nammyeong School after coup of the king Injo. Jeong,On succeeded the status of teacher Jeong,In-hong, and was involved in various projects within the Nammyeong School, which took place after coup of the King Injo. Considering the role of Jeong,On, YongsanBeomgukhoe has the combined characteristics of Jeong,In-hong's disciples, who survived after King Injo. Yongsan-Beomgukhoe had not been resumed for a long time since the first meeting in 1636, but due to the record left by Jeong,Pil-dal, it could be re-established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person who led the meeting was descendant Jeong,Jae-seong of Jeong,Pil-dal. They succeeded the spirit of Jeong,On and wished for the revival of the spirit of Jeong,On in Japanese colonial era. They assessed that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Kwak,Jong-seok succeeded Jeon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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